10년 전 11월 18일 나는 로마에 있었다.






그 때도 역사와 문화에 관심이 많았던지라 이탈리아로 신혼여행지를 정했을 때 흥분과 설레임으로 두근거렸던 기억이 난다.

지금보다 체력도 좋았고 모르는 것이 많았던 때라 그 곳에 가서 호기심을 채울 욕심이 왕성했다.

(여행할 때 나는 본래 휴식보다 관광에 목적을 두는 타입이다.) 


결혼 전 둘이 여행을 많이 다녔다. 하지만 이리 긴 기간 함께 여행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돌길이 많은 유럽을 나는 거침없이 활보했는데 옆지기는 관절이 좋지 않아 이른 아침 콜로세움 가는 길부터 힘들어했다.

욕심이 가득했던 내가 옆사람을 배려하질 못했던 것! 하지만 그 때는 그것이 잘 보이지가 않아서 결국 대판 싸우고 말았다.

사람들에게 말로만 듣던 신혼여행 와서 싸운다는 것이 이런 것인가 생각했다. 

일단 둘 다 감정을 진정시켜야 할 것 같아서 파스타 집으로 이동해 먹으면서 사과했던 기억이 난다.

이후에는 옆지기 관절이 무리가 가기 전에 한 템포 두 템포 늦추며 여행하기 시작했다.


이번 여행은 온전히 옆지기에게 속도를 맞추고 싶었다.

무덤덤하고 냉소적인 나를 챙겨준다고 대부분 먼저 손을 내미는 그이기 때문이다. 

보통 혼자 여행을 하면 2만 걸음은 기본으로 걷는데 이번에는 먹고 쉬고 먹고 쉬는 연속이라 몇 천보도 걷지 않았다. 

둘이서 함께 따스한 햇살을 받고 이따금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쉬엄쉬엄 하는 여행이 좋았다.

먹을 곳을 다 찾아둔 그 덕분에 맛집만 간 지라 갔던 곳의 음식도 다 맛있었다(진주에서는 육회비빔밥과 갈비찜/비빔냉면을 먹었고 밀양에서는 장어구이/장어탕을 먹었다. 덕분에 살만 찌고 온 것 같다).

날씨도 궂지 않고 좋아서 한낮에는 더워 외투를 벗고 돌아다녀도 될 정도였다. 


몇 개의 에피소드를 풀어본다면!!!

진주에 도착하자마자 두 개의 시장을 볼 수 있었다. 하나는 중앙시장, 다른 하나는 논개시장. 두 개의 시장이 함께 있어서 가게를 구경하는 맛이 있었다.

진주는 당연히 진주성이지 하며 갔는데 하필 촉석루가 우리 여행일 바로 며칠 전부터 지붕 보수공사로 막아놓아 가보지 못했다.

진주성의 핵심인 촉석루를 못가다니 눈물을 머금고 주변만 돌아야했다. 그래도 진주성 내에 국립진주박물관이 있어서 대리만족을 할 수 있었다.

물론 어느 곳을 가든 박물관을 가보는 나로서는 특별한 일은 아니었으나 동선상 멀리 가지 않아도 되었기에 옆지기가 운전을 덜해도 되었다는 것이다^^;

밀양은 뚜렷한 목적지가 있었다. 의열기념관과 의열체험관인데 둘은 붙어 있고 맞은 편에는 테마거리까지 조성되어 있어 사진 찍기에도 좋았다.

의열기념관은 의열단의 활동을 중심으로 관련 인물들의 행적을 전시해놓았다. 김원봉은 이제 유명해서 잘 알고 있고 나는 이번에 박차정(김원봉 아내)과 윤세주의 활동을 눈여겨보게 된 것 같다. 

의열체험관에는 문제가 있었다. RFID태그증을 발급받으면 내부 체험이 가능한 시스템인데 하필 고장이 났는지 오늘은 체험은 불가능하단다(그래서 돈은 받지 않았다);;; 체험관인데 체험이 불가능하다니 젠장! 그래도 2층에 기차 체험은 할 수 있었다. 나무 걸상에 앉았는데 어느덧 기적이 울리더니 기차가 출발하고 의자에 진동이 오기 시작했다. 1분여 정도 기차는 달리고 멈춰섰다. 과거에서 출발해 현재로 오는 컨셉이었다. 영상 시스템에 투자를 많이 한 느낌이었다. 다만 체험까지 할 수 있었다면 좋았을텐데 그건 아쉽다.

진주성의 촉석루를 못가서 아쉬웠는데 밀양의 영남루를 대신 갔다. 영남루가 그리 명소인지 몰랐는데 대한민국 보물로 지정되어 있고 촉석루와 더불어 3대 누각 중 하나라고 한다. 과연 누각에 올라가서 밀양 시내를 바라보니 신선놀음이 따로 없었다. 시민들도 누각에 앉아 여기 저기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일부 관광객들은 해설사의 이야기를 듣거나 우리처럼 각자의 시간을 보냈다


박물관과 역사 관련 기념관을 들르면 늘 꼬리표처럼 생각이 따라붙는 단어가 있다.

'선택'이다. 어떤 선택은 대의를 구하지만 어떤 선택은 개인의 안위만을 구한다. 

사람마다 기준은 다를 수 있겠지만 몇 번의 선택은 개인의 일생을 바꾸고 나아가 사회를 변화시킨다는 점은 분명하다.

내가 서 있는 이 자리에서 할 수 있는 가장 나은 선택은 무엇인가 곱씹어본다.

이렇게 10주년의 여행이 끝이 났다.

여행하는 동안 희희낙낙하는 시간을 보냈다. 매일이 이렇게 무탈하고 행복할 수 있으면 좋겠다 생각했다.




꿀빵 사진. 겉에 꿀이 발라져 있고 안에는 단팥소가 들어있다. 달아서 최대 3개 이상 먹기는 어려운듯. 맛은 있다^^

(이 곳에서 꿀빵을 샀다^^; 다 먹어버려서 사진이 없는;;;)










(내부도 루프탑도 잘 꾸며져 있던 분위기 좋은 카페. 손님이 한 명도 없어서 전세 내는 듯한 느낌!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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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2-11-21 11: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역시 늦가을에는 제철 음식으로 영양 가득! 로마의 돌길이 화가님 남편분에게는 힘드셨군요 제 로마 출신 친구들도 로마인들 토박이들은 절대로 굽있는 신발이 아닌 편한 신발 신는 다고 합니다. 로마는 단 몇일 만으로도 구경 할 수 없는 곳입니다 석달 머무른적 있었는데 담 생앤 로마인으로 태어나고 싶을 정도로로 이탈리아 도시 중에 로마는 매력이 가득 ㅎㅎㅎ 진주 먹방 일지 꼼꼼하게 읽고 저도 담번에 화가님이 알려주신 음식에 손을 뻗고 싶습니다 ^^

거리의화가 2022-11-21 13:21   좋아요 1 | URL
군대 때 심하게 고생을 한 뒤로 관절이 나갔다더군요ㅠㅠ 여행 다닐 때 음악회 가거나 좀 차려 입고 갈 일 아니고서는 저도 무조건 운동화 신는 편입니다. 저 때 아마 트래킹화 신었을걸요?ㅋㅋㅋ 로마 며칠 못 있어서 아쉬워요. 휴가만 좀 더 낼 수 있었다면 로마만 일주일 있고 싶었답니다. 하지만 그 뒤에 간 피렌체, 베네치아도 다 좋았어요^^
다음에 가시면 맛난 것만 쏙쏙 골라가보셔요~ㅎㅎㅎ 육회비빔밥 맛나더라구요^^

은하수 2022-11-21 12: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역시 가을여행은 먹방이죠!
음식 사진이 눈에 젤 먼저 보이지만 단풍과 구름사진 진짜 멋지네요
이탈리아... 저도 또 가고 싶네요. 아직 못가본 도시가 많아요. 이태리 소도시 기행도 하고싶고요^^
여자들은 대부분 관광지파? 인걸까요?
저도 열심히 잘 걷는파인데...
여행가면 남편혼자 휙... 저 앞에 가있고 전 또 카메라파거든요
사진만 찍으려고하면 전경에 남편이 있어요 ㅠㅠ 정말 눈물 주룩.. 얼마나 야속하고 미운지...

거리의화가 2022-11-21 13:24   좋아요 1 | URL
먹방은 계절을 가리지는 않는 것 같지만 어쨌든 옆지기는 먹방에 진심이라 항상 맛집만 고수하는 편입니다. 덕분에 저는 옆에서 맛난 거 얻어먹는 것 같구요~ㅎㅎㅎ 구름이 참 멋지죠. 날씨도 도와줘서 참 좋았답니다.
ㅋㅋ 이태리 좋죠. 저는 대도시만 가봐서 전국을 다 다니고 싶은데 참... 여력이 나질 않네요. 둘이 시간 맞추기가 어려워서^^; 둘다 일을 하다보니 나중에 다 일을 안해야 갈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ㅋㅋㅋ
ㅎㅎㅎ 부부들은 다 그런걸까요? 둘다 관광파면 잘 맞을텐데 말이죠~ㅋㅋㅋ

새파랑 2022-11-21 13: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수복빵집은 생긴게 그냥 빵맛집이네요 ㅋ 전주는 육회비빔밥이죠~! 10년전 유럽도 좋고 이번의 진주, 밀양도 좋은거 같아요~!!

거리의화가 2022-11-21 13:40   좋아요 1 | URL
ㅎㅎㅎ 빵집 맛집 맞더군요! 저희 들어갔을 때도 이른 시간인데도 불구하고 손님들이~ㅎㅎㅎ 진주 육회비빔밥 맛났어요^^ 10년 전과 후 세월은 흘러도 둘의 여행은 좋았습니다*^^*

다락방 2022-11-21 13: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와- 단풍 사진도 좋지만 아름다운 구름이 물에 비친 사진은 진짜 압권이네요!
타인과의 여행은 당연히 안맞는 부분이 생기는 것 같아요. 그게 싫어서 돌아서느냐 그걸 서서히 맞춰가면서 서로에게 맞춤한 여행 파트너가 되느냐는 전적으로 우리의 의지에 그리고 서로에게 가진 애정에 달려있는 것 같습니다. 저도 제가 가장 좋아하는 그리고 가장 잘 맞는 여행파트너가 있는데, 그 친구와 처음 여행했을 때는 당황한 지점도 있었거든요. 그런데 몇 번의 여행을 함께하다보니 서로에 대해 더 잘게 되었고 맞춰갈 수 있게 되었어요. 그만큼의 세월과 같은 경험이 우리에게 쌓인 탓이겠지만 거기엔 서로에 대한 애정이 큰 역할을 했다고 보여집니다. 애정이 없다면 사실 굳이 맞춰가며 좋은 상대가 될 노력을 하지 않게 되니까요.

좋은 여행 하신 것 같아 너무 좋네요, 거리의화가 님. 수복빵집 간판 보자마자 빵 사진 보고 싶었는데 다 드셨다니.. 미워요! 흑흑 ㅠㅠ

거리의화가 2022-11-21 14:05   좋아요 0 | URL
마음에 잘 맞는 여행 파트너를 만난다는 것은 역시 쉽지 않은 것 같아요. 말씀하신대로 그래서 함께하는 여행은 맞춰가야하는 것이겠죠. 솔직히 편한 것은 당연히 혼자 여행하는 것인듯하지만~ㅎㅎㅎ
수복빵집 집에 빵이 냉장고에 남아있긴한데 정말 봉지에 담아주는 빵이라 사진을 찍지 않았어요. 아마도 한두개는 남아있을 겁니다. 있으면 업데이트해서 올려볼게요.

라로 2022-11-21 16: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놋그릇에 담긴 음식에 눈이 머무네요. 맛있겠다!! 구름은 무슨 양털코트처럼 두툼합니다. ㅎㅎㅎ 10년이시라니,,, 제 10년 기념엔 뭐 했나??? 가물가물합니다. ㅎㅎㅎ 저흰 내년이 29주년이에요. 곧 30년이 된다는 것이 안 믿어져요. 10주년 축하드려요. 글에 쓰신 것처럼 늘 함께 행복하시길요!!

거리의화가 2022-11-21 16:46   좋아요 0 | URL
놋그릇에 담긴 음식이라면~ 갈비찜 먹으러 간 곳이네요! 반찬도 정갈하고 맛도 있었어요. 가격은 좀 나가는 편입니다. 구름이 저날 양떼구름이어서 예뻤습니다. 가는 곳마다 뷰와 잘 어울리더라구요~
라로님 내년이 29주년이시군요. 그때쯤 되면 척하면 척이 되나요?ㅎㅎㅎ 시간이 은근 빠릅니다. 가면 갈수록 빨라지겠죠~^^; 감사합니다. 라로님도 29주년, 30주년 기념 페이퍼가 올라올 때 힘껏 축하해드리겠습니다!

페넬로페 2022-11-21 19: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신혼여행보다 10년뒤의 여행에서 더 이해와 사랑이 늘어난 것 같아요.
그만큼 서로를 잘 알고 배려하고~~
점점 친구처럼, 동반자처럼 ㅎㅎ
혹시 첫 사진은 진주 중앙시장의 육회 비빔밥?
밀양 영남루등 잘 알기에 더 정겨워요.
결혼 10주년 축하드려요^^

거리의화가 2022-11-21 21:09   좋아요 1 | URL
네.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아요. 10년 동안 서로를 알아가면서 점점 더 마음 맞는 친구가 되어 가고 있습니다. 육회비빔밥 집 원래 가려던 데가 문닫아서 백종원 딱지 붙은 곳으로 갔어요^^ 그곳도 사람 많고 맛있었습니다. 밀양 영남루 생각 이상으로 좋더라구요. 그곳 근처에 살면 종종 가볼 것 같다 생각했습니다. 축하 인사 감사드려요*^^*

책읽는나무 2022-11-21 19: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금방 피렌체, 나폴리 도시 이야기 책 읽고 있었는데 로마 사진을 올리시다니??^^
나는 신혼 때 어땠었나? 추억 잠깐 떠올렸어요.
결혼 10 주년이시군요? 축하드립니다^^
부부는 여행을 통해서도 많이 맞춰가게 되는 것 같아요. 저희도 남편은 휴식파, 저는 관광파!!! 남편이 넘 힘들다고 투덜거렸었는데 지금은 반대가 되었어요. 이젠 제가 멀미도 하고, 체력이 힘들어 휴식파 쪽으로 이끌고, 남편이 자꾸만 몇 군데 더 돌자고 그러더라구요?
맞추다가 역전된 케이스랄까요?ㅋㅋㅋ

저희 동네에서 산 하나 넘음 밀양이에요^^
전 밀양 쪽은 배내골은 자주 갔었는데(그곳이 예전 허준 선생 스승 유의태 선생 사망한 곳이죠?) 밀양 시내는 아직 한 번도 못가봤어요. 영남루 쪽이랑 경치가 근사하네요? 예전에 김혼비 작가 <전국축제자랑> 책에서도 나왔었던 것 같아요.
진주 촉석루는 몇 번 갔었는데 강도 예쁘고, 참 좋았었던 기억이 있어요. 몇 년 전 그 옆에 유물이 발견되어 거기 발굴한다고 엄청 복잡했었는데 지금은 괜찮은가 보죠? 그래도 지붕공사 한다고 못들어가서 아쉬웠겠어요. 진주 박물관은 둘러볼만은 한데 그래도 대도시에 비하면 좀 아쉽더라구요ㅜ
진주 하면 진주 냉면이랑 진주 비빔밥이랑 육전이 유명하고 맛있었어요. 전주 육회 비빔밥이랑 또 다른 맛이죠??^^

거리의화가 2022-11-21 21:13   좋아요 1 | URL
앗! 타이밍이 좋았군요~ㅋㅋ 평소엔 관심없다가도 읽는 책 관련해서 감각이 트일 때 신기하곤 합니다^^ 저도 이젠 골골대서 휴식파에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그래도 관광이 여전히 더 좋긴 하지만요ㅋㅋㅋ
밀양이 생각보다 아주 남쪽이어서 부산도 가보고 싶다 생각했습니다. 영남루 참 좋더라구요. 시간 되시면 한번 가보십쇼!ㅎㅎ 유물 발굴 여전해서 길 막고 있더라구요. 촉석루를 못가봐서 아쉽긴 합니다. 박물관은 항상 가보는 편인데 유물 수는 적어도 나름의 매력이 있더군요. 도시마다 살짝씩 다른 매력도 보고~ㅎㅎ 육전도 먹었는데 사진을 안 찍었네요! 그건 포장해와서 맥주랑 먹었어요. 배가 불러 몇 점 못 먹었네요ㅋㅋㅋ

프레이야 2022-11-21 21: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화가님 결혼10주년 축하드려요. 결혼으로 봐선 아직 애기애기한 한때입니당. ㅎㅎ
여행파트너로 제일 좋은 사람은 결국 남편이더라고요. ^^ 그것도 세월이 오래 지나면서 알게 된 거이지만요. 진주 육회비빔밥 최고에요. 밀양 위양지는 안 가셨나요. 밀양 가을 사진 구경 잘하고 갑니다. 내내 행복하시길요 두 분^^

거리의화가 2022-11-22 09:14   좋아요 1 | URL
ㅎㅎㅎ 역시 애기애기한 때군요^^;
맞아요. 저도 결혼 후에는 남편과 돌아다닐 일이 거의 다인듯 싶어요. 그러니 서로 맞춰가야 할 일이 더 많아지는 것 같습니다.
그날 돌아가야 해서 위양지는 못가봤어요^^ 언젠가 갈 일이 있겠죠. 감사합니다 프레이야님^^

독서괭 2022-11-22 17: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사진이 참 멋져요^^ 옆지기님과 서로 배려하며 함께하는 여행! 좋아 보입니다. 저도 10주년이 멀지 않았는데.. 10주년 로망이 있었으나 애들 없이 갈 상황이 안 되어서 ㅠㅠ 가족여행이라도 가야겠어요.
진주성 궁금하네요. 요즘 토지에서 계속 진주가 등장하니 한번도 안 가봤는데 궁금해요. 역사에 해박하신 화가님 눈에는 모든 게 저랑 달리 보일 것 같습니다.
저도 다시한번 10주년 축하드립니다^^

거리의화가 2022-11-22 17:52   좋아요 1 | URL
괭님도 10주년이 얼마 안 남으셨군요. 미리 축하드립니다^^ 가족여행으로 보내는 10주년 더 기억에 남지 않을까 싶기도 하네요.
그러고 보니 진주...하니 토지가~ㅎㅎㅎ 봉순이도 생각나고~! 저는 진주성하고 진주박물관만 봤는데 풍경 명소도 몇 개 있고 그런 것 같더군요. 아무래도 눈길은 항상 역사 테마 장소 쪽으로 기우는 건 어쩔 수 없는 듯합니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박물관 가면 더 보이는 게 많아서 즐겁고 행복합니다.
괭님. 감사드려요*^^*

바람돌이 2022-11-22 21: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밀양박물관에 무슨 체험을 했었지??? 기억이 안나요. 저도 가봤고, 거기서 의열단 100주년 기념 사진 찍을 수 있어서 찍었는데 사진이 너무 잘 나와서 희희낙락했던것까지 기억나는데 말이죠. ㅠ.ㅠ 현재 밀양에는 김원봉님의 부인인 독립투사 박차정님의 무덤이 있어요. 그런데 진짜 산속에 가는 길도 제대로 정비되어 있지 않아 찾아가는 길이 참 속상했다가 무덤 관리되는걸 보고 더 속상했던 기억이 나네요. 박차정님이 해방 직전에 돌아가셨는데 김원봉님이 귀국하면서 아내의 뼈를 소중히 간직해와서 밀양 자신의 고향에 안치했다죠. (박차정님의 고향은 부산 동래입니다.) 영남루는 겨울 되면 쓸쓸하고 춥고 그런데 마지막 딱 좋을때 가셨을거 같아요. 서로 배려하는 여행 좋네요. ^^

거리의화가 2022-11-23 09:08   좋아요 0 | URL
다 RFID태그 찍어야 체험되는 시스템이더라구요. 그렇게 모든 체험은 할 수 없었던. 저도 체험해보지 않아서 뭔지 모르겠습니다. 기념 사진 잘나오는군요. 아쉬움이 더 크네요~ 뭐 다음에 다시 가보는걸로.
분명 옆지기한테 이야기했으면 ˝남의 무덤은 왜 가?˝라고 했을듯합니다. 박물관도 딱히 재미없어하는 사람인데^^ 부산 동래분이셨군요. 고향에 묻혔어도 좋았을 것 같은데 암튼... 영남루 좋았습니다. 따뜻해서 춥지도 않았고요~ㅎㅎㅎ 감사합니다.

희선 2022-11-24 03: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열해전보다 더 좋았겠습니다 혼자면 마음대로 여기저기 다녀도 누군가 함께 가면 그 사람을 생각해야겠지요 거리의화가 님이 남편분한테 맞춰서 천천히 쉬엄쉬엄 다니셨군요 남편분도 좋아하셨겠네요 앞으로도 그렇게 발 잘 맞춰서 사시기 바랍니다


희선

거리의화가 2022-11-24 09:12   좋아요 1 | URL
저는 혼자 여행하는 게 역시 편하긴 합니다만 함께 하는 여행은 서로에게 속도를 맞추고 배려하는 것을 통해서 배우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저라는 사람은 챙겨주는 것에 좀 인색한 편인데 함께하면서 조금씩 바뀌는 것도 있고 그러네요. 이러면서 사람이 되가는 것 같기도 하구요^^; 희선님 감사합니다.

얄라알라 2022-11-24 14:3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요렇게 음식과 건축물과
낭만(연애?)의 느낌이 어우러진 여행기가 좋아요!
아 부러워요!! ㅋ

거리의화가 2022-11-24 16:41   좋아요 2 | URL
알라님도 여행하고 돌아오셨더군요^^ 너무 오래 콧바람을 쐬지 않아서 겸사 겸사 다녀왔네요. 함께 하는 사람이 있으니 불안이나 걱정거리도 없고 좋았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레이스 2022-11-28 10: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이런 곳이 있었군요.
넘 좋아요~~

거리의화가 2022-11-28 10:24   좋아요 1 | URL
좋았습니다. 두 곳 다 저는 처음 가보게 된 것이어서 대표하는 곳만 가봤어요. 다음에는 다른 곳도 들르고 싶습니다.
올해는 가을이 길어서 좋네요^^ 남쪽이라 아직 단풍과 은행이 좀 남아있어서 늦가을 만끽하고 왔습니다.
 
희생자의식 민족주의 - 고통을 경쟁하는 지구적 기억 전쟁
임지현 지음 / 휴머니스트 / 2021년 8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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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해자가 과연 가해자이기만 할까. 피해자와 희생자는 어떻게 다른가. 2차 대전 이후 기억의 지구화가 진행되었다. 이를 동아시아 지역에 한정해서 보지 않고 독일과 폴란드를 비롯한 동유럽의 역사적 사건들을 통해 비교하여 들여다보고 미래의 지구적 구성체제를 위한 연대 행동을 고민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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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2-11-22 10: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 친구들 조부모들 모두 가해자 피해자가 뒤섞여 있어서 솔직히 일반 인들에게 전쟁의 비극은 가해자 피해자로 나누기 힘들다고 합니다
그저 매년 치뤄지는 선거철 정치인들의 편가르기 싸움 정쟁으로 끝이 보이지 않지만
그런데도 유럽은 매년 역사적 비극을 되새기는 교육을 엄청 하고 있습니다.

거리의화가 2022-11-22 11:14   좋아요 0 | URL
2차 대전 참전에 가담한 국가이거나 피해를 입은 국가에 있는 사람들에게 간단하게 치부될 수 없는 문제이더라구요. 나치의 홀로코스트와 동유럽, 일본 제국주의에 이르기까지 국내 정치에 이용되는 것 뿐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이것이 문제가 끊임없이 이어져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가해의 역사든 피해의 역사든 모든 것을 알려주어야 할 의무가 있는 것 같아요. 어찌됐든 확대 해석하거나 축소 은폐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는 생각입니다.
 

Ⅸ. 용서

[용서의 폭력성과 가톨릭 기억 정치]
‘나치 사냥꾼’ 시몬 비젠탈이 전 세계의 종교 지도자와 양심 있는 지식인에게 의견을 구한 일. 1942년 나치에 의해 야노프스카 강제수용소에 본인이 갇혀 있을 때 나치 친위대였던 이가 자신의 범죄에 대해 유대인(아무나)을 만나 사죄하고 편히 죽고 싶다는 말을 던진 것. 20년이 지나 비젠탈은 이 질문을 던졌다.

폴란드 가톨릭교회 주교단이 독일 주교단에게 보낸 사목 편지(1965.11.18) 사건: 폴란드 교회가 독일의 가톨릭 형제들에게 화해의 손길을 내미는 메시지가 문제됨.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오히려 용서를 구하는 제스처가 용서를 정치적 입장으로 끌고가
주교단 편지는 1966년 예정된 기독교 수용 1000주년 기념식에 서독의 가톨릭 형제들을 초대하여 폴란드와 독일 양국의 화해와 용서의 물꼬를 트려는 의도에서 작성되었으나 폴란드 교회는 이 편지로 인해 ’폴란드통합노동자당‘(가톨릭교회와 경합해왔음)이 이를 걸고 넘어지면서 가톨릭 민족적 정통성에 타격을 입었고 교회 내부에서도 갈등이 생김.
이후 냉전 화해 무드가 조성되면서 폴란드와 독일의 역사적 화해가 진전되었고 폴란드 주교단 편지는 “폴란드와 독일의 대화를 이끈 편지”로 주목되었고 21세기 들어서서 양국 관계를 넘어 역사적 화해의 외연을 넓혔음.

[폴란드 주교단 편지와 화해의 메타 윤리]
독일 개신교의 진보 진영이 서독 의회에 보낸 <튀빙겐 백서>(1961~1962): 서독의 핵무장 계획에 반대하고 오데르-나이세 경계를 전후 독일과 폴란드의 공식 국경선으로 인정할 것을 서독 정부에 촉구. -> 그러나 서독 거주 실향민들은 신랄하게 비난. -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동독과 동유럽 인민의 정치적 자결권을 무시하고 부정과 폭력을 찬양하는 공산주의에 동조했다!
‘독일개신교연합’이 <동방백서> 문서 공표(1965.10.14): 2차 대전 이후 오데르-나이세(독일과 폴란드 사이 국경) 국경선을 인정하고 폴란드에 할양된 독일 영토의 주권이 폴란드에 있음을 분명히 하면서 화해의 제스처를 취한 것. 독일 실향민의 고통과 어려움을 외면하지 않으면서도 나치 범죄와의 역사적 관계를 맥락화하면서 폴란드 희생자와 독일 희생자 사이에 상호 이해의 물꼬를 튼 계기. -> 폴란드의 권력기관 뿐 아니라 가톨릭 교회 내부에서도 큰 반향

폴란드 주교단 편지는 기독교의 진정한 선교 소명과 식민주의 사이에 분명한 선을 그었다. 그러면서도 폴란드의 안전과 평화는 독일의 안전과 평화를 불러온다 암시. 적지 않은 독일인이 나치의 강제수용소에서 폴란드 형제들과 운명을 같이했다 지적. ”그대에게 용서를 베풀며, 또 그대의 용서를 구한다“라는 구절로 끝을 맺는다. -> 집합적 죄의식을 넘어서기에 가능

[독일 주교단의 답서와 수직적 화해]
폴란드 주교단의 편지에 대한 독일 주교단의 답서는 독일인이 폴란드 민족에게 가한 테러는 인정했으나 독일 실향민의 고통에 훨씬 많은 분량을 할애했고 동프로이센의 독일인 이주민은 해당 지역 슬라브 통치자의 초청으로 건너간 것이지 침략 의도가 없었던 그들의 권리는 존중되어야 한다는 논지를 전개. 게다가 오데르-나이세 국경선을 인정하지 못하겠다 발언. 인간의 모든 행위는 신에 대한 죄이므로 신에게 먼저 용서를 구해야 한다는 수직적 화해를 강조. 폴란드 주교단의 수평적 화해 요청에 대해 수직적 화해로 소극적 자세를 보인 것.
-> 폴란드 정부의 반가톨릭 캠페인 가속화. 독일 언론의 자기중심적 보도 더해져. 폴란드의 가톨릭 주교단은 민족 배반자라는 비난이 밧발쳐.

[가톨릭 형제애와 동아시아 평화]
일본 주교단 <평화를 위한 결의> 주교단 문서 채택(1995.2.25: 일본군이 조선, 중국, 필리핀 등 여러 지역에서 인권을 유린한 행위를 솔직히 인정하고 사과. 일본인은 아시아인들에게 부과된 상처를 치유할 책임이 있으며 전후 세대 일본인도 이를 이어받아야 한다 강조. -> 한일 주교단의 정례적 만남 - 1차 ‘한일 교과서 문제’ 토론(1996),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의 교훈(2003), 동아시아의 탈핵/탈원전(2012) 등 쟁점을 다루며 양국의 역사 화해와 평화를 위한 가톨릭교회의 역할 커져
‘일본 가톨릭 정의와 평화협의회(일본 정평협)’(2019.8.15): 식민지 지배 역사에 대한 가해 책임을 인정하지 않는 일본 정부의 자세와 분노하는 피해국, 한국인의 마음 사이에 벌어진 틈이 한일간의 화해를 가로막는 장애라 지적. 일본 제국의 비인도적 행위의 피해자에 대한 개인 배상의 역사적 도의적 정당성 강조. 일본 가톨릭 교도도 메이지 이래 일본의 침략 정책에 협력하여 부응한 측면이 있으므로 책임이 있다 성명.


Ⅹ. 부정

[부정론, 제노사이드의 마지막 단계]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홀로코스트 학살 현장의 사진 촬영을 엄격히 금지. 하인리히 힘러는 학살을 입증하는 공문서를 파기하고 수용소의 시체소각로를 비롯해 학살 흔적을 폭파하는 등 홀로코스트의 증거를 인멸하는데 최대의 주의를 기울여.

[부정론의 스펙트럼과 담론적 지형]
단순 부정론은 공식 기억에 어긋나는 대항 기억이나 지배적 기억에 저항하는 도전적 기억을 부정하는 초기 단계에서 나타난다. 극단적인 홀로코스트 부정론자들, 난징 학살과 일본군 위안부, 강제노동의 폭력성을 부정하는 일본의 극우 논객들, 곳곳의 제노사이드 부정론이 이것에 해당한다.: 사실의 부정. 증언의 모욕 - 가해자 집단을 물론 피해자 집단에서도 발견

‘혐의’의 부정론은 혐의가 씌워지면 그것이 사실인지 역사적 진실에 얼마나 근접해있는지 중요하지 않으며 발화되는 순간 역사적 사실의 문제를 도덕적 감정의 문제로 바꾼다. 언어적 수행성 때문에 선전만으로도 혐의를 쓴 대상에 대한 의심과 의혹, 불신을 불러일으킨다.
인터넷 공간이 부정론의 새로운 산실.

실증주의적 부정론은 역사적 증거를 인멸한 사람들이 엄격한 실증주의자를 자처한다는 것에서 역설적. 이들이 외치는 ’증거‘는 ’증거‘가 없다는 확신 때문이다. 실증주의는 희생자의 기억이 부정확하고 정치적으로 왜곡되거나 조작되었다는 인상을 주기 위해 소환되는 이데올로기다. 증인의 기억은 주관적이고 감정적이므로 믿을 수 없다는 논지가 중심에 있다. - 히틀러에 대한 면죄 논리, 전두환의 면죄 논리, 일본군 위안부 제도를 부정하는 사람들의 논리, 난징 학살에 대한 부정론, 1945년 일본군이 점령하던 베트남에 있었던 대기근 부정론
-> 어렵게 용기를 내 증언에 나선 이들을 위축시켜버리는 정치적 악의가 내포되어 있다.
과거에 일어난 모든 일이 기록으로 남아 있을 것이라는 그들의 추정은 무지에 가깝다.

[국경을 넘는 부정론]
독일 역사가가 집합적 원죄에 대해 비판을 논해도 홀로코스트 원죄에서 벗어날 수 없는 반면 반론의 주체가 나치 독일의 희생자인 폴란드 역사가라면 상황이 달라진다. 스탈린주의에 의한 희생을 강조하는 폴란드의 반공주의적 희생자의식 민족주의가 독일의 기억공간으로 들어오면 나치 범죄의 역사적 평가에서 상대적 감가상각이 이루어진다. 조선인 일본군 위안부의 강제성을 희석하는 한국 연구자들의 연구가 일본의 부정론자들에게 전유되는 것도 비슷하다. -> 국경을 넘는 기억의 연대가 탈영토화된 비판적 기억의 영역과 민족주의적 기억을 재영토화하는 변호론적 기억, 부정론의 영역에서도 일어난다.
역사적 사실과 허구 사이를 오가는 시각적 재현(사진)의 회색지대는 실재를 조작하고 조정한다.

[증언의 진정성과 문서의 사실성]
과거에 일어난 사건에 대한 정확한 공식문서와 그 사건을 직접 경험한 증인들의 부정확한 기억이 서로 다툴 때 사실과 진정성은 양립할 수 없다.
아이히만 재판은 이스라엘에 홀로코스트 증인의 청자 공동체를 만드는 계기였고 홀로코스트의 지구화와 더불어 이 공동체는 세계로 확장될 것을 보여주었다.
1970년대 본격화된 증언과 보통 사람들의 생애사는 목소리를 되찾아주고 그들의 말로 역사를 다시 쓰게 만들었다. 역사적 행위자의 민주화를 가져온 것이다.
희생자의 목소리가 사회적 기억의 전면으로 등장하고 과거를 인식하는 중심이 문서에서 증언으로 옮겨갔다.
-> 21세기 역사학이 가지게 된 문제는 기억 연구가 갖는 윤리적 감수성을 수용하는 것
조르조 아감벤의 ‘아우슈비츠의 아포리아’ 재현의 역설: 사실과 진실이 어긋나고 입증과 이해가 일치하지 않는 역설이 증언과 문서자료의 역사적 진정성에 시사점을 던져
부정확한 사실의 ‘깊은 기억’이 충실한 사실의 ‘지적 기억’보다 더 큰 진정성을 갖는 딜레마
미디어의 발전으로 ‘과잉’이 대중문화의 정상적 감각이 되어 비극을 겪은 이들의 증언이 드라마적 미학의 소재로 소비될 수 있는 여지가 많아져


* 연대

1978~1985년 사이 일본의 급격한 우경화에 대한 동아시아 이웃 국가들의 예민한 반응 -> 동아시아 기억구성체의 생성으로 역사적 감수성 중요시해져
1950년대 일본 역사 교과서의 우경화 이미 시작되었으나 당시 한국 언론에 비판 기사는 전무해
“홀로코스트는 우리 땅에서 일어났지만, 우리 손은 깨끗하다”는 동유럽 민족주의자들의 홀로코스트 부정론과 홀로코스트에 대한 독일 민족의 유일 책임론이 맺고 있는 기억의 공모관계는 홀로코스트의 역사를 왜곡하고 그 책임을 회피하려는 동유럽 민족주의 변호론을 정당화하는 결과를 낳아



누구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다른 사람의 생명권을 소유할 수는 없다. 그것은 착각일 뿐이다. 논리를 떠나서 용서가 정말 위험한 것은, 그 행위가 피해자를 잊을 수 있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용서가 구해지면 사람들은 화해와 용서의 힘겨운 줄다리기가 끝났다고 생각하고, 아무 일도 없었던 듯 평온하게 살아갈 수 있다. 그러나 기억의 정치에서 중요한 것은 서둘러 가해자를 용서하고 상처를 봉합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끔찍한 행위조차도 인간성의 일부임을 아프게 인정하고, 그 끔찍한 일부가 다시는 세상에 드러나지 않도록 더 나은 기억의 방법을 모색하는 일이 더 중요하다.

폴란드 주교단의 사목 편지는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아시아·태평양 전쟁의 과거사를 놓고 한국과 일본의 국가권력뿐만 아니라 시민사회의 구성원 다수가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동아시아의 기억 공간으로 옮겨질 때, 돌연 동유럽의 과거이기를 멈추고 동아시아의 미래가 된다. 그것은 1965년 주교단 편지의 역사적 맥락을 지워버리고 자의적으로 탈역사화하는 작업과는 분명히 구분된다. 이 논문은 1965년 사목 서신의 정신을 21세기 동아시아의 맥락에서 어떻게 되살릴까 하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2019년 동아시아의 기억 공간에서 1965년 폴란드 주교단의 편지와 그 역사를 반추하는 것은, 역사적 화해를 도모하는 초국가적 행위자로서 가톨릭교회의 정치적 수행성과 윤리적 의미를 넓혀 교착상태에 빠진 한·일 간 역사 화해의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는 일이기도 하다. 국가와 시민사회 모두 국제정치의 세속적 규범에 매여 돌파구를 찾지 못하고 있는 동아시아의 현 상황에서, 가톨릭교회의 관계자들이 자유롭게 이념의 장벽과 국경을 넘어 대화한 선례는 특별히 중요하다. 폴란드 가톨릭교회에 대한 성찰은 화해와 용서를 동아시아의 기억 정치를 움직이는 게임 윤리로 정립하기 위한 첫걸음이될 것이다.

1965년의 폴란드 주교단 편지는 ‘화해의 아방가르드‘라는 평가도 부족할 정도로 시대를 앞선 것이었다. 편지의 작성자들은 독일-폴란드인의 고통이 똑같다는 의미가 아니라 크기와 상관없이 고통은 고통일 뿐이며, 정치적 의미가 다르다 해도 고통과 슬픔을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정의로운 일이라는 믿음 위에 서 있었다.

폴란드의 주교단 편지는 절제된 희생자의식과 더불어 훨씬 성숙한 화해와 용서의 윤리를 제시한다. 더 큰 고통의 희생자가 자신을 가해한 작은 희생자들에게 공감과 화해의 손길을 먼저 내민 것은 희생자 사이의 위계질서를 거부하는 단호한 도덕적 결단이었다. 《디벨트(Die Welt)》지가 썼듯이, 적지 않은 독일인이 폴란드 주교단 편지에 감동한 것은 희생자인 폴란드가 처음으로 독일 실향민의 고통을 인정하고 이들에게 정의를 되돌려주려는 메시지를 읽었기 때문이다. 희생의 비대칭성을 근거로 독일인의 희생을 부정하지 않고 그들의 고난에 따듯한 공감을 표시한 것은 이렇게 가해자 독일 대 희생자 폴란드라는 집합적 죄의식을 넘어섰기에 가능했다.

아무도 가톨릭 주교들에게 폴란드 민족을 대표할 권리를 주지 않았다는 당의 정치적

비난도 일리가 있었다. 비가톨릭 폴란드인까지 가톨릭 교회가 대변할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또 가톨릭 내부로 눈을 돌린다 해도, 아직 용서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폴란드의 희생자 개개인을 대신해서 회개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독일인을 교회의 이름으로 용서한다고 선언한 것도 문제였다. 독일 가해자의 속죄 의지를 확인하고 폴란드 희생자에게 용서의 윤리를 설득하는 과정이 생략되었던 것이다. 폴란드 주교단 편지가 독일과 폴란드 사이에 초국가적 화해의 초석을 놓았지만, 용서를 남용했다는 비판을 받는 것도 이 때문이다.

가해자 일본의 회개와 반성, 사과는 물론 화해의 필요조건이지만, 필요충분조건까지 충족되는 것은 아니다. 가톨릭교회는 초국가적 기억 주체로서 일본 사회에 회개와 반성을 촉구하면서도 한국 사회의 희생자의식 민족주의에 대해서는 탈식민주의적 비판을 견지할 수 있다. 희생자가 가해자를 용서한다는 것은 가해자에게 복수하려는 욕망뿐만 아니라 가해자가 아니라 희생자, 지배자가 아니라 피지배자가 되었다는 회한을 떨쳐버리는 계기가 된다. 식민자와 피식민자, 가해자와 희생자, 지배자

와 피지배자가 서로 위치만 바꾼 채 억압과 불의가 지속되는 연쇄 고리를 끊지 않는 한 식민주의적 불의는 재생산될 뿐이다. 이런 문제의식에서 보면, 반식민주의적 분노가 탈식민주의적 성찰을 앞서고 있는게 한국 가톨릭교회의 현실이 아닌가 한다. 한국 가톨릭교회가 폴란드의 가톨릭교회처럼 가해자에게 먼저 용서를 베풂으로써 가해자의 사과와 참회를 끌어내는 전복적 상상력을 펼치려면 먼저 희생자의식 민족주의의 이념적·감정적 구속에서 벗어나야 한다.

부정론의 메타언어는 제노사이드를 고취하는 메시지를 담고 있으며, ‘제노사이드의 마지막 단계‘라 일컬어질 정도로 극히 위험한 언어적 폭력이다. 부정론이 가해자의 공식

기억에 그치지 않고 한 사회의 기억 문화를 규율하는 ‘서사적 표준‘으로 작동할 때, 그것은 미래의 제노사이드를 위한 플랫폼이 된다. 부정론의 핵심은 기억을 죽이는 데 있다. 기억을 죽이는 것은 희생자를 두번 죽이는 일이다. 부정론자는 인간적 존엄성을 무시당하고 비통하게죽어간 희생자의 부름에 응답하려는 도덕적 결단으로서의 기억을 부정함으로써 응답 책임을 회피하고 ‘타자의 정의‘를 부정한다. 말살을 망각하는 것은 또 다른 말살이다. 기억의 제노사이드야말로 최후의 제노사이드다.

누구도 과거를 완벽하게 재현할 수는 없는 법이다.
부정론자는 실증주의를 자신의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상대방의 주장을 반박하기 위해서 사용한다. 즉, 문서가 아니라 기억에 토대한 상대방의 증언이 지닌 허점을 파고들어 기억의 진정성에 타격을 입히기 위해 사용한다. 부정론자에게 중요한 것은 실증이나 과학이아니다. 그것은 자신들의 부정론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로 소환될때만 필요한 도구적 실증주의일 뿐이다.
음모론이 횡행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위안부‘ 피해자들의 증언이
‘돈‘을 노린 거짓이며, 그 배후에는 일본국의 명예를 실추시키려는 ‘국내외의 반일 세력‘이 있다는 식이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음모론을 실증하려는 노력을 기울이지는 않는다. 이들의 실증주의는 사실을 확인하기보다는 증언의 진정성을 깎아내리는 데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희생자 중심적 관점은 궁극적으로 역사 인식의 민주화를 가져왔다.
인권의 강조는 희생자에 대한 공감을 낳고, 그 공감은 과거를 재현할때 문서 자료 못지않게 목소리의 중요성을 재인식하는 계기가 되었다.

구술사의 증언 채집은 개개 희생자를 익명의 숫자에서 구출하여 이름과 얼굴을 찾아주고 내밀한 역사를 되살리는데 그 의미가 있었다. 희생자들이 자신의 이름을 되찾자 역사는 여러 개개인의 이야기로 나뉘었고, 내밀한 역사의 추구는 역사의 정치적 범주를 심리적 범주로 바꾸어놓았다. 구술사의 등장은 단순히 문서로 기록되지 않은 구술자료를 통해 과거를 더 잘 알 수 있다는 실증주의적 보완 이상의 의미였다. 가해자가 지배하고 있는 공식 역사와 문서보관소에 맞서 힘없는 희생자의 목소리에 주목한다는 것은 중요한 정치적 실천이었다. ‘역사 정치‘의 관점에서 보면, 공식 역사의 단일화된 목소리에 삭제된 밑으로부터의 다양한 목소리를 복원한다는 것은 과거의 민주화를 의미한다. 그것은 공식 서사에서 무시되어온 하위주체들의 행위 주체성과 역사적 의의를 온전히 평가함으로써 ‘지금 여기에서‘ 그들의 존재론적 의미를 확인하는 일이기도 했다.

홀로코스트나 일본군 ‘위안부‘ 제도와 같은 국가적 폭력의 피해자/생존자 들은 가해자들의 잔혹함을 입증하여 진실을 확립해야 하고, 그 과정에서 피해 당사자는 한없이 불쌍해지고 비참해져야만 한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의 증언에 대한 한국 사회의 소비 방식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에게서 일본군의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만행을 듣고 싶어 하는 욕망과 ‘장기수 선생님‘들에게서 자랑스러운 투쟁 이야기를 듣고자 하는 욕망은 전혀 다르다. ‘장기

수 선생님‘들에게는 자랑스럽고 위대한 역사적 행위성을 청취하는 반면, ‘위안부 할머니‘들은 희생자로 대상화하고 일제의 끔찍한 가학행위를 짜내는 증언의 청취 방식은 확실히 문제적이다. 자신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가 아니라 여성인권운동가라는 이용수의 항변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을 일본 제국주의의 믿을 수 없는 만행을 폭로하는 증인의 위치에 고정해온 한국 사회의 기억 문화에 대한 절규였다."
"제가 왜 위안부고 성노예입니까?"라는 이용수의 반문에 한국 사회는아직 답을 못하고 있다.

자기 변호적인 일본의 기억 문화와 마찬가지로 자기 비판적인 독일의기억 문화가 지구적 기억의 연대를 저해하는 모순된 상황이 시사해주는 바는 분명하다. 일국적 기억 공간 내에서 변명적 기억과 비판적 기억을 구분하고 그 간격을 똑바로 바라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구적 기억구성체에 배치하여 기억의 탈영토성과 재영토성을 초국가적 관점에서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동아시아의 역사 논쟁이든 독일과 동유럽의 홀로코스트 논쟁이든, 그리고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점령지 식민이주 논쟁이든, 기본적으로 시끄러운 것은 침묵보다 바람직하다. 국경에 갇혀 있던 기억이 국경을 넘으면서 내는 파열음은 자신과 다른 기억을 지각하면서 나타나는 건강한 긴장의 신호이기도하다.
*********************

서로 경합하는 기억의 연대는 특정한 기억 아래 다른 기억을 위계적으로 줄 세우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기억의 연대는 지구적 기억구성체에서 서로 다른 기억이 만나고 얽히면서 생성되는 불협화음을 비판적 긴장 관계로 유지하는 데서 출발한다. 희생의 기억을 탈영토화하여 ‘제로섬 게임‘적 경쟁체제에서 벗어날 때, 자기 민족의 희생을 절대화하고 타자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 뒤에 줄 세우는 기억의 재영토

화에서 벗어날 때, 그래서 희생자의식 민족주의를 희생시킬 때, 기억의 연대를 막고 있는 장벽이 터지면서 지구적 기억구성체는 삐걱거리면서도 다양한 기억이 합류하여 흐르는 연대의 실험장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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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곡 2022-11-21 11: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와아 일단 좋아요 누릅니다 대단한 밑줄긋기 짝짝짝

거리의화가 2022-11-21 13:28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도서관에서 빌린 책이라 더 열심히 밑줄긋기했습니다ㅋㅋㅋ

2022-11-23 14: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11-23 16: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Ⅷ. 병치

[나가사키의 성자와 아우슈비츠의 성인]
홀로코스트의 책임은 공산주의에 있다는 논리는 공산주의의 정통성을 흔들고 공산주의의 범죄를 고발하기 위해 홀로코스트의 기억을 끌어내는 동유럽 사회는 현재 극우 민족주의와 네오파시즘을 정당화하는 것을 넘어서 최근에는 시민사회의 기억으로까지 일반화하는 경향
홀로코스트와 원폭 피폭의 병치 -> 아시아 태평양 전쟁의 기억을 구조화하는 서사적 기법이자 헤게모니적 장치 - 아우슈비츠의 성인 폴란드 신부 막시밀리안 콜베와 나가사키의 성자로 추앙받는 나가이 다카시에 대한 기억의 병치
막시밀리안 콜베: 나가사키에서 선교활동 후 귀국했다 아우슈비츠로 끌려가. 다른 수감자들의 탈출을 시도하다 나치의 보복으로 처형될 폴란드인 동료 수감자 프란시셰크 가요브니체크를 대신해 죽음을 택해(1941.8.14)
나가이 다카시: 의사였던 그는 나가사키 원폭으로 부인이 사망하고 본인도 크게 다친 후 원폭 후유증으로 고생.
콜베와 다카시의 인연 - 콜베를 진찰한 다카시는 폐결핵을 진단하고 절대안정을 주문. 선교활동에 열심인 신부의 모습은 의학적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었는데 묵주가 자신을 지켜주고 있다 이야기 -> 가톨릭이 기억 문화의 매트릭스로 작용해
일본 진주만 기습 공격일 = 성모마리아가 잉태한 축일(1941.12.8), 나가사키 원폭일(1945.8.9)에 우라카미 천주당에서 고해 성사 미사가 있었음
나가이 다카시는 콜베가 창간한 《성모의 기사》에 1947년부터 1951년 죽기 직전까지 <원폭 황무지의 기록>을 연재하면서 둘의 인연은 지속
나가이 다카시는 《나가사키의 종》 에세이를 출간: 나가사키 원폭 희생자의 죽음에 종교적 의미를 부여하는 글

[‘우라카미 홀로코스트‘와 사랑의 기적]
나가이 다카시: ‘우라카미 번제(홀로코스트)설‘의 창시자. 우카라미 번제설은 1945년 11월 23일 나카이가 우라카미 천주당에서 원폭 희생자 추모 미사에서 추모 연설을 하면서 시작
‘홀로코스트‘: 부정 타지 않은 깨끗한 동물을 산 채로 태워 신께 공양하는 제의를 뜻하는 성서의 용어.
나가사키 원폭 희생자 -> 홀로코스트의 신성한 희생자이자 종전을 이끌어 더 이상의 희생을 막은 평화의 순교자가 됨
오자키 도메이 신부는 우라카미 병기 공장에서 일하다 피폭당한 후 2개월 후에 수도회에 입회하고 《나가사키의 콜베》에 책 씀
《여자의 일생 - 2부》을 쓴 엔도 슈사쿠도 콜베 신부를 널리 알린 작품. 살아남은 자의 미묘한 죄의식 그려. ˝친구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는 것만큼 큰 사랑은 없다.˝

[반서구주의와 반유대주의]
교회는 서양 식민주의의 이미지와 겹쳐져 가톨릭에 대한 일본 사회의 시선이 그리 곱지 않았음.
일본의 기억 문화에서 콜베 신부는 주변부 국가로서 폴란드 출신을 갖고 있어 역설적으로 우위를 지닐 수 있었음. -> 태평양이나 동남아시아에서 서양 식민주의에 맞서 일제를 지지하는 콜베의 입장(주변부적 인물)은 일반적인 서양 선교사에게서 기대하기 어려운 것이었음
소노 아야코는 《기적》이라는 다큐멘터리 전기를 통해 콜베 신부의 생애를 일본에 널리 알림. - 콜베를 애국자로 그림. 콜베의 아버지가 러시아 대항 애국주의 계열의 폴란드사회당 지도자여서 민족운동에 투신한 영향도 있었음.
수필 <콜베 신부>에서 엔도 슈사쿠는 보통 일본인에게 콜베 신부의 사랑을 알리는 중요한 메신저 역할을 해. 이 수필은 고등학교 국어교과서에 실림.
얀 유제프 립스키는 콜베 신부의 반유대주의에 의문을 제기. 콜베 신부는 작은 신문의 창립자이자 편집인이었는데 이 신문은 극단적 반유대주의에 증오와 혐오의 온상이었다는 것. 신문은 급진민족주의진영(ONR) 인사들과 돈독한 관계
NYT, WP 등 미 주요 언론이 1982년 콜베의 시성식 전후하여 콜베 신부의 반유대주의가 논란화
NYT는 콜베가 자기 목숨을 희생해 구한 가요브니체크의 부고 기사에서 다시 콜베의 반유대주의에 대해 언급(1995.3.15)
퍼트리샤 트리스의 콜베 전기에 대한 서평에서 존 그로스가 콜베 신부의 반유대주의를 언급한 데 대해 반론과 재반론이 이어져(1983.2)
콜베 신부의 반유대주의 논란에 대해 일본 가톨릭 지식인들이 지켜온 침묵의 의미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 이들의 침묵(엔도 슈사쿠 등)은 일본 가톨릭 일반의 콜베 숭모 열기와 대조되는 것

[풀뿌리 기억과 순교의 문화]
콜베 신부의 순교가 알려진 것은 그의 시성식(1982.10.10) 이후. 엔도 슈사쿠는 1980년부터 1982년까지 《여자의 일생》 신문에 연재, 콜베 신부 기념관을 만드는 캠페인 시작
-> 1980년대 일본 콜베 열풍은 조국인 폴란드보다 앞섰던 것.
2007년 폴란드에서 TV 다큐멘터리 방영 후 콜베 신부 다시 회자되어. 폴란드 상원은 2011년을 성인 막시밀리안 콜베의 해로 선포.
카우코프-고두프 교회가 콜베 신부에게 최초의 교구 교회로 헌정됨(1983년 성당 1층 완공. 1986년 ‘폴란드 민족의 골고다‘ 명칭 얻어)




엔도 슈사쿠의 작품 <여자의 일생>은 번역된 것이 1986년이라 절판되었고 이후 출간된 게 보이지 않는다. 그나저나 <여자의 일생>은 모파상, 이광수의 작품이 유명해서 슈사쿠도 이런 작품을 쓴 줄 몰랐다. 아무튼 지금은 읽고 싶어도 읽을 수 없겠구나.(찾아보니 중고로는 있으나 흠... 2만원부터 시작해서 9만원까지 가격 스펙트럼이 넓네)


지구적 기억구성체에서 누가 더 많이 고통을 받았으며 누구의 고통이보편적 의미를 지니는가 하는 희생자의식 민족주의의 경쟁 구도는 기억의 병치를 전제한다. 기억의 병치는 정교한 이론적 서사나 감성에호소하는 장치를 수고스럽게 만들지 않고도 비교적 쉽게 자기 나라의희생자의식 민족주의를 본질화하고 정당화한다. 희생자의식 민족주의를 정당화하는 비교의 도구로 이용되는 병치를 비판적으로 검토할필요가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기억의 병치가 항상 희생자의식 민족주의를 정당화하는 방식으로만 작동하는 것은 아니다. 서로 다른 기억의 몽타주를 통해 의도하지않은 공통성을 드러내되, 기억의 선형적 질서를 교란하고 위계를 인정하지 않는 ‘급진적 병치(radical juxtaposition)‘의 방법도 있다.

제노사이드 용어의 창안자 라파엘 렘킨은 나가사키의가톨릭 박해가 독일의 헤레로 부족 학살, 벨기에령 콩고의 식민주의학살, 집시·미국 인디언 · 아즈텍·잉카·아르메니아·유럽 유대인의 대학살 등과 함께 제노사이드의 세계사를 구성한다고 썼다. 원폭 투하는 나가사키의 가톨릭 박해에 묵시록적인 이미지를 부여함으로써 제노사이드의 비극성을 강화했다.

나가사키의 원폭 기억은 콜베 신부를 통해 아우슈비츠의기억과 얽힘으로써 전쟁과 제노사이드의 고통을 성찰하면서 평화를향한 보편적 기억으로 나아가는 첫걸음이었다. 연대를 강조하는 나가사키의 기억 문화는 그 대신 원폭의 비극을 낳은 아시아·태평양 전쟁의 역사적 맥락을 경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탈역사화된 나가사키의 피폭 기억은 일본의 희생자의식 민족주의를 정당화하기도 했다.

나가이 다카시의 우라카미 번제설에 대한 비판은 그것이 천황의 전쟁책임과 미국의 원폭 투하 책임을 지워버리는 ‘이중의 면책‘ 담론이라는 데 있었다. 나가사키의 피폭자이자 시인 야마다칸(山田加人)은 번제설이 원자폭탄을 떨어뜨린 미국으로 향해야 할 "민중의 원한을 ‘신의 섭리‘라는 말로 달래는 친미적 허위 선전이라고 비난했다. 작가 이노우에 히사시(井上UL)도 ‘신의 섭리‘는 원폭 투하의 책임 소재를흐리게 만든다고 비판했다. 정치적 효과라는 맥락에서 볼 때 이들의비판은 나름대로 일리가 있다. ‘신의 섭리‘를 통해 원자폭탄의 무고한희생자를 세계평화를 위한 거룩한 희생자로 승화시킨 나가이의 연설은 나가사키의 비극을 탈역사화할 소지를 안고 있었다. 원폭 투하라는미증유의 역사적 비극을 탈역사화하고 종교적 본질로 환원한다면, 원폭 희생자의 무고한 죽음에 대한 정치적 책임을 지워버리는 것이다.
나가사키 피폭자의 희생자의식이 탈역사화되면 그에 입각한 전후 일본의 평화주의도 다시 탈역사화라는 기억 정치의 덫에 빠져버린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 바치는 기쿠의 희생적인 사랑과 동료 수인을 대신해서 목숨을 바친 콜베 신부의 순교자적 사랑은살아남은 자의 죄의식을 깨닫게 하고, 또 대신 속죄해주는 종교적 카타르시스를 가져다준다. 타인의 고통과 불행에 대한 무관심이야말로죄이며, 그에 대한 죄의식을 느낄 때 구원의 가능성이 있다는 엔도 슈사쿠의 기독교에 대한 이해는 그의 소설에서 아우슈비츠의 성인 콜베와 나가사키를 잇는 중요한 연결고리였다." 나가사키와 깊은 인연을가진 콜베 신부의 아우슈비츠 순교는 우라카미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가톨릭 신자의 죄의식을 성찰하고 정화하는 데 최상의 재료였다.

소노의 트랜스내셔널한 기억 속에서는 아우슈비츠에서 순교한 콜베와 게라마 제도 섬주민의 강요된 집단 자결이성스러운 그 무엇인가를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는 아름다운 마음으로죽은 사람들‘로 같이 배치되는 것이다. 이에 대해 오에 겐자부로는 일본군 수비대장의 죄를 인간의 관점에서 비판했음을 재천명하고, 소노처럼 이렇게 말하는 자야말로 인간을 더럽히고 있다고 대응했다.
나라를 위해 아름다운 마음으로 죽은 사람들에 대한 소노의 애착은전후 일본 민족주의의 시민종교적 집단 심성을 대변한다.

논쟁에서 드러났듯이, 콜베 신부가 《시온의정서>를 사실로 믿었으며, 프리메이슨 마피아가 무신론적 공산주의를 부채질하고 국제시온주의가 그 뒤에서 조종하고 있다는 식의 발언을 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또 콜베신부가 창간한 《작은 신문》이 강한 반유대주의적 논조를 띤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콜베 신부는 유대인의 개종을 승인하고 또 독려했다는 점에서 유대인의 개종이나 동화를 허용하지 않는 급진적 인종주의자는아니었다. 나치의 박해를 피해 니예포칼라누프 수도원에 숨고자 했던 1,500여 명의 유대인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숨겨주었던 일화에서 보듯이, 콜베 신부는 전형적인 반유대주의자 이미지와 거리가 있다.

1971년 시복 이후 공산주의 정권 아래 폴란드에서 콜베 신부는 이처럼 무신론적 공산주의에 저항하는 순교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졌다.
폴란드 교회의 관점에서 볼 때, 콜베 신부의 반프리메이슨주의와 반유대주의는 반공주의의 사상적 뿌리라는 데 의미가 있었다. 그러나 1984년 10월 19일 연대노조의 예지 포피에우슈코(Jerzy Popictuszko) 신부가공산정권의 보안경찰에게 피랍되어 잔인하게 살해되자, 콜베 신부의반공 순교자적 상징성은 상대적으로 빛이 바랬다. 1984년 이후 폴란드 가톨릭교회의 기억 문화에서는 포피에우슈코 신부가 콜베 신부를제치고 무신론적 공산주의에 희생된 순교자의 지위를 차지했다. 나치의 박해가 이미 희미해진 먼 기억이라면, 공산주의의 박해는 생생하게살아 있는 가까운 기억이었다. 연대노조 운동 이후 공산주의와의 싸움이 더 급했던 폴란드 가톨릭교회의 대표적인 순교자는 콜베 신부라기보다 포피에우슈코 신부였다. 20세기 말까지 폴란드보다 일본에서콜베 숭배가 더 컸던 데는 이런 이유가 있다.

아우슈비츠와 나가사키의 희생이 진정한 의미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 희생을 정당화하고 합리화하는 관행에서 벗어나는 것이 그 첫걸음일 것이다. 2019년 11월 24일 방일 중이던 프란치스코 교황이 히로시마 평화공원에서 한 연설은 지구적 기억구성체에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원폭의 바람직한 기억에 대한 방향을 제시하고 있어 흥미롭다. 그는 히로시마의 원폭 희생자에 관해 "여러 장소에서 모여 저마다의 이름을 가지고 있었고 그중에는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도 있었다"며 "이 장소의 모든 희생자를 기억에 남긴다"고 말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또 히로시마시 소재 평화기념공원에서 열린 평화 기원 행사에서 재일 한국인 가톨릭 피폭자 박남주 씨와 악수하고 대화하는 등 비일본계 타민족 피폭자들을 배려하는 태도를 보였다.
국적과 출신지를 따지지 않고 모든 원폭 희생자를 추모한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일 행적은 콜베 신부의 기억에 많은 관심을 표명한 폴란드 출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방일 메시지와 많은 차이가 있다. 슬라보이 지제크가 암시한 것처럼, ‘희생‘을 희생시킬 때 비로소 그 희생의 의미가 살아나는 역설을 음미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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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2-11-19 03: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엔도 슈사쿠가 쓴 여자의 일생이기는 하지만 신앙은 빠지지 않는군요 1부는 막부말기에서 메이지고, 2부는 2차 세계 전쟁이 일어난 나가사키군요 《침묵》에서 200년 뒤, 300년 뒤... 이건 한번 한국말로 나왔다 다시 나오지 않아서 예전에 나온 책이 아주 비싸게 팔리기도 하는군요


희선

거리의화가 2022-11-20 09:34   좋아요 0 | URL
네. 슈사쿠의 문학을 아직 제대로 읽은 게 없지만 역시 그의 작품에서 신앙의 문제는 중요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 책에서 주로 다루는 것이 2부의 내용입니다. 중고로 사기에는 비싸기도 하고 아무래도 사지는 못할 것 같아요^^;;; 근데 다시 나오면 책값이 오르겠죠?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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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2-11-17 11: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요즘 한국 문단 보다 작품들이 풍성 했던 시절인것 같습니다
자칫 한국어가 역사속에서 영원히 사라질 뻔 했던 시절 ㅜ.ㅜ

거리의화가 2022-11-17 11:31   좋아요 1 | URL
시대 상황이 스펙타클이여서였을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다양한 소재와 주제, 배경의 작품들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한국 근대소설도 읽다가 어느 순간 멈춰서... 다시 읽어봐야겠다 싶어요.
한국어만큼 말맛을 잘 살리는 글도 드물다는 생각입니다^^

그레이스 2022-11-28 10: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일주일 전에 아이들하고 압록강은 흐른다 읽고 토론했어요. 여기서 보니 반갑네요
이번달 서재 활동 많이 안했던니 그사이 엄청나게 올리셨네요 ^^;;

거리의화가 2022-11-28 10:40   좋아요 1 | URL
아이들의 논리력이 쑥쑥 클 것 같습니다. 저도 못 읽어본 책을 아이들이 읽었네요. 반성해야겠습니다ㅎㅎㅎ 읽고 정리하지 않으면 잊어버려서 최대한 읽은 건 기록하는 의미로 올렸는데 본의아니게 많아졌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