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부


- 리바이어던 2.0

근대 국가의 개념을 다루면서 리바이어던을 끌고 온 것이 눈에 띈다. 리바이어던 하면 토머스 홉스가 쓴 저작으로 예전에 얼핏 읽은 것도 같지만 생각해보니 기억이 희미하다. 하지만 어쨌든 토머스 홉스는 근대 사상계에서 중요한 획을 그은 인물 중 하나임에는 분명하다. 
베크 세계사에서는 리바이어던이 내놓은 국가의 개념을 초기 국가로 보고 1.0 버전으로 부른다. 그리고 1850년부터 1970년대까지의 시기를 2.0 버전으로 부르겠다라고 논한다. 일단 나는 1945년이 아니라 1970년대까지를 범위로 설정했다는 것이 신선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그것은 타당해보인다. 1945년 2차 대전의 종식으로 탈제국, 탈식민이 종식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시아의 해방은 한참을 이어서까지 진행되었다. 미소의 대결로 냉전이 격화되면서 체제와의 대결도 시작되었다. 체제의 경쟁은 이미 20세기 초부터 자유주의, 사회주의의 흐름이 진행된 바 있다. 

- 반둥회의의 재조명

1955년 반둥회의는 일반적으로 20세기 후반 비동맹운동, 나아가 제3세계 운동의 기원이라고 이해된다. 하지만 1953년 한국전쟁의 휴전, 1954년 베트남의 종전과 분단을 다룬 1954년 제네바회담과 동시대에 일어난 사건이었기 때문에 냉전, 식민 체제와 무관할 수 없었다. 탈식민 국가들이 냉전 질서에서 자신을 어떻게 위치시킬 것인가의 문제를 논하였다.
베크 세계사에서는 반둥회의의 의의를 더 확장하여 나아가는 것이 인상적이다. 공간적으로만이 아니라(비단 아시아에서만이 아니라 전 세계의 영역에 걸쳐) 시간적으로도 확대시키는 모습이다. 20세기 초 2차례의 세계대전을 겪고 제국주의-식민주의로 식민지 경쟁-저항 구도가 첨예하게 대립하던 역사는 반둥회의의 의제와 무관할 수가 없다는 논리라고 보인다. 아시아에서 큰 전쟁이 두 번이 끝나고 냉전이 막 시작될 무렵에 일어난 이 회의는 이 시기만이 아니라 이전부터 냉전의 종식 때까지 유효한 결정을 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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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의 수카르노, 인도의 네루, 이집트의 나세르에 이어 버마의 우 누에 주목해야 한다는 의견에 주목하자.(제3세계 운동의 기원으로서 한국전쟁-버마의 우 누의 중립주의를 연결고리로 by권헌익 in역사비평 138호) 우 누는 누구보다 냉전 체제 안의 중립주의가 중요함을 인지한 인물이다. 때문에 한국전쟁과 관련하여 반둥회의를 살펴볼 때 주목해야 하는 것이다. 

https://ko.wikipedia.org/wiki/%EC%9A%B0_%EB%88%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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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엄 그린의 <조용한 미국인>은 1950년대 냉전시기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심심하면 언급이 되는데 번역본이 없다. 

아무튼 여러 번 언급되니 언젠가 읽어보아야 할 작품!










초기 근대국가의 관념과 실천(토머스 홉스가 1651년에 쓴 현실적인 논문을 따라서 ‘리바이어던 1.0‘이라고부르자.)이 17세기에 출현하여 18세기 말에 어려움에 봉착했다고 가정하면,
이 국가들은 1850년 이후에 ‘리바이어던 2.0‘으로 재편되었다. 나는 그 재편과정이 1960년대와 1970년대까지 지속되었다는 견해를 제시하려 한다. 그때근대국가의 체계가 다시 와해의 도정에 접어들었기 때문이다. - P55

"국경 너머의 시민들?" 그러나 그러한 초국적 공동체들을 위한 정부를 어떻게 조직할 수 있을까? 민주주의는해체되어 인권에 전문가를 더한 것으로 남을지도 모른다. 웹에 떠다니는 정보와 대중매체나 구글Google 같은 민간 정보 제공자가 더 큰 공적 역할을 수행할 수도 있다. 그러나 현대 세계에서는 선거를 실시하고 군대를 보유하며동맹을 체결하고 무역이나 노동조건을 통제하려는 제도들이 지구를 뒤덮고있다. 20세기 말에 널리 쓰이게 되었고 여전히 사회과학자들과 재단들의 주목을 끄는거버넌스라는 용어는 ‘국가성stateness‘ 없는 정부를 바라는 마음의증거가 되고 있다. 마치 정책 수립이 더는 우선순위의 총합이나 이러저러한방안의 선택을 요구하지 않고 합의와 합리적인 토론의 힘으로 가능할 수 있다는 듯이 말이다. 어느 주요 옹호자는 이렇게 주장했다. 법원과 규제 기관들 같은 국가의 관청들을 해체해 ‘전 세계적 정부의 네트워크‘에 집어넣으라.
그러면 실제로 국가권력을 증강하는 결과가 나올 것이다. 재단들, 대학의 엘리트들, 사회과학자들, 선의의 남녀들은 거버넌스라는 개념을 사랑했다. 거버넌스 개념은 국가성 없고 눈물도 없는, 투명하고 스스로 정당성을 입증할수 있는 행정부를 제안했다. 거버넌스는 공공 정책학 석사들의 이상향이었다. - P321

1955년 4월에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스물아홉 개 독립국가 대표자들이 인도네시아의 반둥에 모여 "인류 역사상 최초의 대륙 간 유색인 회의를 열었다. 독립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버마(미얀마)와 스리랑카, 인도, 인도네시아, 파키스탄의 후원으로 열린 반둥 회의는 식민지 해방에 뒤이어, 그리고 한국전쟁과 초강대국 소련과 미국의 야심이라는 배경 속에서 ‘제3세계‘의 미래에관한 유토피아적 희망의 표현이었다. 반둥 회의는 지금 우리가 논의하는 시기가 끝나고 10년이 지난 후에 열렸지만, 제국과 식민지적 만남, 식민지해방의 역사적 의미를 온전하게 이해하기를 바라는 학자라면 반제국 운동이 어떻게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의 역사를 구축했는지는 물론 아프리카·아시아의연대와 비동맹이 어떻게 그리고 왜 식민지 해방 이후 냉전 시대의 표어가 되었는지 설명해야 한다. 반둥 회의를 시금석으로 삼는 것은 여러 가지 방법론상의 목적에 도움이 된다. ******** - P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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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2-11-28 16:1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그레이엄 그린!
한때 영국 정보부 MI 5요원으로 유럽 전역에서 조용히 활동 했던 경력이 있는 작가!

이분 작품 재밌습니다
화가님에게 사알 짝 추천^^

거리의화가 2022-11-28 16:22   좋아요 2 | URL
영국 정보부 요원이기도 했군요~^^ 심심하면 언급이 되는 작품이라 아무래도 읽어봐야할 듯 싶어요. 번역본도 있음 좋겠지만 수요상 나오긴 어려울듯ㅎㅎㅎ 감사합니다.
 
독립운동 열전 2 - 잊힌 인물을 찾아서 독립운동 열전 2
임경석 지음 / 푸른역사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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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선 《독립운동 열전》 1권에서 사건을 중심으로 잊힌 독립운동사와 한국근대사를 살펴보았다면 2권은 인물 중심으로 들여다본다. 그래서 2권의 부제는 <잊힌 인물을 찾아서>이다. 1권은 목차가 부제와 착 들어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있었던 반면 2권은 부제에 맞게 목차도 잘 구성되어 있는 편이다.

책의 내용에 등장하는 인물들 중 김단야, 홍범도, 김창숙, 주세죽, 김마리아, 이동휘 정도를 제외하고 이 곳에 등장하는 인물은 대부분 낯설었다. 여전히 우리는 임시정부, 한인애국단 등 알려진 독립운동 단체를 중심으로 한 인물들을 기억하고 있을 뿐이라는 생각을 했다. 때문에 앞으로도 찾아야 할 독립운동가들의 이름이 많다는 사실을 꼭 기억할 필요가 있다.

1922년 조선공산당(내지당 또는 중립당)에 가담한 두 명의 인물이 있다. 김사국과 김한이다. 둘은 모두 당에서 손꼽히는 지도자였다. 김사국의 경우 동생인 김사민도 독립운동에 참여한 이력이 있어 놀라웠다(김사민은 신생활사 필화 사건에 연루되어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1924년 7월 만기출옥했으나 정상적인 활동을 할 수 없는 상태로 평생 어머니의 보살핌을 받아야 했다) . 김한은 김상옥 사건에 연루되어 김원봉과 비밀 교신을 하고 다량의 폭탄 국내 반입하려한 혐의로 형량 5년을 언도받는다. 그는 법정에서 총독정치가 얼마나 조선인의 삶을 파괴하고 있는지에 대해 조목조목 설명했다. 교육과 산업은 물론이오 그 밖의 어느 방면을 보더라도 조선 사람은 '불평'과 '원한'을 품지 않을 수 없다, 조선인에게 남겨진 것은 총독부 법령을 위반하거나 아니면 죽는 길밖에 없다, 김상옥 사건도 이 같은 총독정치가 만든 것이라고 토로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혁명을 언급했다. 그는 헤겔과 다윈을 인용하면서 혁명을 위험시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실제로는 우주 만물이 살아가는 자연법칙이라고 강조했다. 이는 조선 사람이 자유와 해방을 요구하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라는 주장으로 이어졌다.(P45) 김한의 진술에서 주목해야 할 요소가 또 하나 있다. 끝내 비밀결사 내지당(조선공산당)의 존재를 발설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김한은 시종일관 해외 망명자들과 비밀리에 연락하고 폭탄 반입을 모의한 것이 자신의 개인적 판단이었다고 진술했다. 덕분에 내지당은 삼엄한 수사에도 불구하고 노출되지 않을 수 있었다. 김한은 일본 관헌들의 야수적인 취조 속에서도 비밀결사의 동료들을 보호하는 데 성공했다.(P46)

유림 독립운동계의 거목인 김창숙 선생에 대한 일화는 감동적이었다. 조선총독부가 경북 경찰부를 통해 망명자 김창숙에게 제안을 해왔다고 한다. 망명 생활을 청산하고 국내에 들어와 귀순한다면, 과거 '범행'을 모두 불문에 부치고 후대하겠다는 말이었다. 가옥을 새롭게 단장하고 논밭을 새로 사줘서 생활을 보장하겠다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다. 내희 숙씨는 경상북도 경찰부의 내용을 받아들여 전향 권유 편지를 베이징의 김창숙에게 발송했다. 총독부 당국이 이처럼 관대한 처분을 내렸으니 이제 가정의 즐거움을 누리기를 바란다고 권면하기까지 했다. 김창숙은 가까운 친족으로서 유교 고전학에 대한 담론을 나누고 문중의 대소사를 논의하던 사이였기에 실망감에 차라리 죽고 싶다는 생각마저 들 지경이었다. 김창숙은 바로 붓을 들고서 답장을 썼다. 절교 선언이었다. 그는 아들 환기에게도 사정을 전했다. 문중에서 가장 믿고 의지하는 김황에게 편지를 써서 자초지종을 알리고, 내희 숙씨가 더 이상 일족의 일에 간여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고 당부했다.(P126~127) 자신의 일족의 잘못을 덮는 것이 아니라 단호하게 내치는 모습이 참으로 멋있었다. 이 일화야말로 대쪽 같은 선비의 꼿꼿함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 아닌가 생각한다.

빨치산 대장들 박종근, 박영발, 방준표들이 있다.
박종근에게 주어진 보직은 경북도당 위원장 직이었다. 29세였다. 열일곱 살부터 반일운동에 참가했던 만큼 혁명운동 경력이 벌써 13년째였다. 사상범으로 투옥된 기간만 3년 7개월이나 됐다. 대중운동의 현장 경험도 갖추고 있었다. (...) 그뿐이랴. 해외유학도 나녀왔다. 모스크바 조선당학교 2년간의 유학을 통해 견문을 넓혔고, 본격적으로 마르크스주의 이론도 배웠다. 실천과 이론, 어느 면에서 보더라도 잘 준비된 간부였다.(P199~200)
박영발은 해방 이후 정국에서 당과 노동조합 양 부문에서, 그리고 총파업 투쟁의 지휘 방면에서 없어서는 안될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그는 장래 당조직을 이끌 중견 지도자로 지목받았다. 최고위 간부교육을 이수할 자격이 있다고 평가받은 것이다. 1948년 7월 그는 모스크바 유학길에 올랐다. 다소 늦은 나이였지만, 모스크바 조선노동당 간부학교 입학대상자로 추천된 것이다.(P221~222)
9월총파업은 조선공산당이 주도한 전국적인 노동자 파업투쟁을 가리킨다. 1946년 9월 23일 부산 지역 철도노동자 7,000여 명의 파업이 첫 출발점이었다. 경남도당 노동부장인 방준표의 역할이 중요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가 맞섰던 대상은 대한노총, 무장경찰, 미군 헌병 '3자의 합작적 공세'였다. 9~10월에 걸쳐 "장렬한 피투성이 반항투쟁에 직접 참가 지도하였다"고 기록했다.(P237)
놀라운 것은 그들 모두 해방 이후 모스크바 유학을 가게 된다는 사실이다. 아마도 그들의 노동 투쟁 이력이 유학에 도움이 된 것 같다. 박종근은 12개의 과목 모두 5점 만점에 5점을 받을 정도였고 박영발도 그에 못지 않은 최상 레벨의 성적을 받았다고 한다. 세 사람 모두 박헌영의 좋은 평가까지 받은 것을 보면 실력자들이었음에 분명했던 것 같다.

여성 독립운동가 파트도 눈에 띄었다. 그 중 이덕요와 박신우, 송계월에 대해 말해보겠다.
이덕요는 사회주의자이자 페미니스트였다. 그는 함흥 자혜의원에서 간호원으로 일하다 의학 공부를 위해 일본으로 유학, 도쿄여자의학전문학교 졸업 후 조선으로 돌아와 의사의 길을 걸었고 해마다 신년에 신문사들이 개최하는 '여류 명사 초청 가정문제 좌담회'에 초대되어 여성 문제와 가정 문제에 대해 발언할 정도로 명사였다. 문필과 단체 활동 등을 통해 여성해방운동에도 참여하였으며. 사회주의 운동에도 가담했다. 우리가 잘 아는 여성 최대 독립운동단체인 <근우회> 정치문화부에도 속해 있었다. 이덕요는 여성운동의 의의를 프롤레타리아트의 역사적 사명과 연관시켜 이해했다. 일간신문에 실은 한 기고문을 보자. 기고문에서 그는 오늘날 조선이 요구하는 여성은 "오랫동안 남성에게 유린되어 온 조선 여성의 해방운동"을 실행함과 동시에, 한걸음 더 나아가 "역사적 사명을 다하려는 대중운동과 악수"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언론 지면의 표현상 제약을 감안하더라도 여성운동과 노동운동을 연관 지어 포착하고 있음이 뚜렷이 드러난다.(P275)
박신우는 <근우회>의 선전 조직부에 있으면서 책사 노릇을 했는데 기획력, 실행력 모두 출중했다고 한다. 남편 김규열과 박신우 모두 코민테른 제공 고등 교육과정을 이수한 사회주의 엘리트였는데 1928년 초 블라디보스토크와 모스크바를 근거지로 조선공산당의 해외 부문 사업을 맡게 되어 갔다. P-3759 사건은 바로 '소련 국가폭력에 의한 조선공산당 서상파 망명자 그룹 탄압 사건'이었다. 소련 정치보위부는 피억압 민족의 해방을 위해 투쟁한 혁명가들에게 '일본제국주의의 스파이'라는 모욕적인 범죄의 낙인을 찍었다. 체포 6개월 뒤 사건 관련자 가운데 김규열, 김영만, 김중한에게 총살형이 집행됐다. 1934년 5월 21일이었다. 다른 두 사람은 한두 등급 아래 처분을 받았다. 윤자영은 노동수용소 8년 징역형, 박신우는 5년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노동수용소 이후 박신우의 운명에 대해서는 아직 알지 못한다. 관심을 갖고 주시한다면 언젠가 드러날 때가 있을 것이다. 이 탄압 사건의 피해자들은 뒷날 소련의 국운이 저물어가던 1989년에 비로소 소련 정부로부터 복권됐다. 55년이 지난 뒤였다. 너무나 뒤늦게 찾아온 정의였다.(P286)
송계월은 1930년 1월 제2차 경성 연합시위 사건을 주도적으로 모의한 혐의를 받았다. 글 실력이 출중해 문단에도 데뷔했고(<가두 연락의 첫날>) 잡지사 개벽의 기자로 활동하기도 했다. 안타깝게도 1933년 폐결핵으로 23살 나이로 요절하고 만다. 그래도 그녀의 전집이 두 권 남아 있어 다행이다.(<송계월 전집>) 그녀는 사상과 이론 문제에 관해서는 비타협적인 투사가 되곤 했다. 그녀와 교유하던 남녀 문인들은 말했다. "계월이는 그렇게 얌전하다가도 이론 투쟁에만 들어서면 여로하가 솟아오르는 기개가 있어 건드리기가 어렵다." 한걸음도 사양하지 않는 조리 있는 언변과 불길을 일으키는 듯한 열정으로 인해 무리 가운데 우뚝 섰다고 한다.(P292)

1962년 3.1절 일산 신문에 이채로운 보도 기사가 실렸다.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기로 예정된 한 인물의 자격을 취소하기로 결정했다는 기사였다. 문제의 인물은 장재성이었다. 1929년 광주학생운동의 지도자로 손꼽히는 이였다. 그에게는 건국공로훈장 단장을 수여할 예정이었다. 단장이란 포상 등급을 가리키는 용어로서, 1등 중장, 2등 복장에 뒤이은 3등 훈장이다. 해방 후 처음 시행하는 독립유공자 서훈이었다.
왜 서훈을 취소했는가? '공산당에 관련된 혐의' 때문이었다. 독립운동에 커다란 공로가 있다 하더라도 사회주의 사상과 운동에 공감한 경우에는 유공자 서훈을 하지 않겠다는 지침이었다.(P307~308)

이 사례 뿐 아니라 사회주의 운동의 이력이 있다는 이유로 독립유공자 기준에 거부되거나 선정되었다 취소되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벌어지고 있다. 독립유공자는 말 그대로 독립운동 이력이 있는 운동가에게 전달하는 훈장이다. 그것에 정치적 이유나 이념이 개입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독립유공자 서훈 기준이 아무쪼록 개정되기를 바란다.

이 책을 통해서 수면 아래 잠자고 있던 다양한 독립운동가들의 이력을 만날 수 있었다. 이들 중 한 둘이라도 더욱 깊게 들여다보는 기회가 된다면 이 책의 역할은 그 이상을 하는 셈이라 생각한다. 몰랐던 인물들을 알게 되었고 일대기 뒤에 숨겨진 뒷 이야기까지 만날 수 있어 감사한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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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2-11-27 14: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달을 정해서 역사만 읽는 달로 하고 싶었는데 오늘 이 리뷰를 보니 그 생각이 더욱..^^

거리의화가 2022-11-28 09:48   좋아요 1 | URL
역사만 읽는 달 좋은데요^^ 읽다보면 꼬리에 꼬리를 무는 것처럼 읽을 거리가 늘어나서 저는 즐겁더라구요. 페크님의 역사 읽기를 응원합니다ㅎㅎㅎ

그레이스 2022-11-28 10: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읽고 계신군요~♡
묵직한 제목때문에 나중으로 미루고 있습니다.
한 주제로 읽어야 할 욕구가 생길때 읽어봐야겠어요~!

거리의화가 2022-11-28 10:22   좋아요 1 | URL
제목은 묵직한데 내용은 사건과 인물에 얽힌 이야기라 쉽게 읽히는 편입니다. 알려지지 않은 인물을 많이 다루어서 좋았어요^^ 말씀처럼 구미가 당기실 때 한꺼번에 내리 읽으시면 더 깊이 보고 싶다라는 인물들도 생기실 것 같습니다.
 

3부 우리는 어떻게 타락했는가

6장 밀턴의 악령

버지니아 울프는 『자기만의 방』에서 ‘셰익스피어의 여동생이었던 죽은 시인‘을 소생시키기 위해 문학적 여성은 ‘밀턴의 악령 너머를 바라보아야 한다. 어떤 인간도 그 시야를 막아서는안 되기 때문‘이라고 선언한다.‘ - P360

문학적 부권 은유에 대한 논의가 암시하듯, 독자든 작가든 문학적 여성들은 모두 유일한 아버지 신을 모든 것의 창조자로 정의하는 가부장적인 원인론에 의해 오랫동안 위협받고 ‘당황’해왔다. 또한 그런 우주적인 작가만이 지상의 모든 작가에게 유일한 합법적 모델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여 두려워해왔다. 밀 - P361

턴의 기원 신화는 여성 혐오적인 장구한 전통을 요약하고 있으며, 여성 혐오적 관념을 (밀턴의 전형적인 가부장적 시에 대한불안을 직간접적으로 기록했던) 숱한 여성 작가들에게 분명하게 암시했다. 그런 여성 작가들의 목록에는 최소한 마거릿 캐번디시, 앤핀치, 메리 셸리, 샬럿과 에밀리 브론테, 에밀리 디킨슨, 엘리자베스 배럿 브라우닝, 조지 엘리엇, 크리스티나 로세티, H. D., 실비아 플라스, 스타인, 닌, 울프 등이 포함된다. 이들 중 많은 여성이 밀턴의 서사시가 표현하는 제도화되고 정교하게 은유화되곤 했던 여성 혐오와 타협하기 위해 자기 나름대로 신화와 은유를 수정했다. - P362

‘최초의 남성 우월주의자‘인 밀턴이 여성들에게 전하는 명백한 이야기는 물론 여성의 부차성과 타자성에 대한 이야기다. 그리고 어떻게 그 타자성이 가차 없이 여성을 악마적인 분노, 죄, 타락으로 몰고 가는지, 신의 정원(여성에게는 시의 정원이기도한 장소)에서 여성을 배제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다. - P366

셜리는 최초의 여자는 이브가 아니라 ‘반은인형, 반은 천사’로 언제나 악마로 변할 가능성이 있는 인물이었다고 가정한다. 이브는 티탄이며 특유의 프로메테우스적인인물이었다. - P370

밀턴의 사탄이 (그가 신과 동등한 체하는 것에도 불구하고)천사에서 무시무시한 (매우 교활하지만) 뱀으로 변하는 것처럼, 이브도 점차 천사 같은 존재에서 괴물과 닮은 뱀 같은 존재로 몰락한다. 그녀는 아담의 호령을 슬프게 듣는다. - P374

사탄과 이브가 어떤 의미에서 소외되어 있고 반항적이기에바이런적인 인물이라면, 하나의 계급으로서 여성 작가들도 (셜리뿐만 아니라 셜리의 창조자, ‘주디스 셰익스피어‘ 뿐만 아니라버지니아 울프도) 그러하다. 오빠들(‘신의 아들들‘)에 의해 소유권을 박탈당한 채, 순종하도록 교육받고 침묵을 강요당한 여성 작가는, 현실에서는 아닐지라도 환상 속에서는 바이런적인영웅들처럼, 사탄처럼, 프로메테우스처럼, ‘기쁨 없는 백일몽속에서 홀로 활보했던‘ 경우가 허다했을 것이다. - P385

여성들은 가장 반항적일 경우엔 사탄, 가장 덜한 경우에 반항적인 이브, 그 밖에는 거의 항상 낭만주의 시인들과 동일시된다. 따라서 여성들이 밀턴의 수정본이 초래할 종말론적인 사회변혁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 P387

밀턴의 사탄은 결정적으로 여성과 매우 흡사할 뿐만 아니라, (오스틴의 매력적인사탄적 반反영웅들을 통해 우리가 보았듯이) 여자들에게 상당히 매력적이다.
따라서 여성과의 관계에서 사탄은 일종의 니체적 초인으로서 명령하고 자신의 ‘자연적인‘ (말하자면 남성적인) 우월성에대한 존경을 기대한다. 마치 자신이 신의 그림자 자아이며 천국의 이드인 양, 가는 곳마다 낙원의 정치학을 악마적으로 되풀이해 말한다. - P390

낭만주의자들이 근친상간에 매력을 느끼는 이유는 부분적으로 밀턴의 ‘죄‘사탄 관계의 묘사에서 유래했을 것이다. 그러나어떤 의미에서 이것은 이 글의 요점이 아니다. 그보다는 여자와낭만주의 시인들이 사탄과 ‘죄‘ 각각과 맺고 있는 자신들의 관계가 사탄과 ‘죄‘의 근친상간적인 관계와 유사하다는 점을 틀림없이 발견했다는 사실이 훨씬 더 핵심적이다. - P391

브론테는 자신의 생각이 찬양받는 남성(바이런, 사탄, ‘지니어스‘)의 생각과 놀랄 정도로유사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마치 아담의 갈비뼈가 이브 몸의원천인 것처럼 남성의 사고가 모든 여성의 사고의 원천이라는가정에 익숙해 있기 때문에, 말하자면 ‘지니어스‘가 자신을 만들었다고 가정하고 있다. 게다가 브론테의 자율성은 근친상간적인 결합에 의해 부정되는데, 근친상간은 브론테를 자신의 창조자와 연결시키고 그 둘을 동등하게 만든다. - P393

근친상간의 금기를 깨뜨리고자 하는 욕망이 자아충족적(자아 증식적)이 되려는 욕망인 한, 그것은 ‘신들처럼’ 되고자 하는 소망, 동시에 신이 금지한 소망이다. 그것은 마치 맛을 보는 것이 곧 죽음을 의미하는 선악과에 대한 욕망과 같다. - P394

여성 작가들은 앤 핀치처럼 가사노동으로, ‘독창성 없는 집 관리 같은 따분한 일로‘ 추락할 뿐만 아니라 생식이라는 굴레 속으로 들어감으로써, 맨프리드처럼 고상하게 죽는 만족감조차 주어지지 못했을 것이다. 도리어 불임으로 인한 단조로움으로 점차 여위어가는 여성 작가는 그릇된 창조의 예술가로서 사탄과 이브의 이미지가 결국은 가장 품위 없고 낙담시킬 뿐인 밀턴의 악령의 화신이었다고 결론 내리는 것이 당연했다. - P396

지배자이자 일종의 영감을 받은 가장으로서 시인은 밀턴처럼 신성한 신비의 사제이자 수호자이며, 그릇된 여성적 창조
‘나태와 나약한 절망‘에 항상 대항했다. 게다가 시인은 인류를 싸움터로 집결시키는 씩씩한 트럼펫이고, 칼집조차 삼켜버리는 지독히 남근적인 칼이다. 또한 (무엇보다도 가장 밀턴적인) 아리스토텔레스의 ‘부동의 동자‘를 모델로 한 ‘움직이지 않은 채 움직이게 하는 영향을 미치는 신과 같은 존재다. 따라서 조지프 비트라이히가 말하듯, 『낙원』의 저자는 ‘낭만주의자들이 가장 찬양했던 모든 것의 정수, […] 진리에 의해서만 움직였던 식자, 신적 사고로부터 신적 행위가 나오도록 한[…]행위자, 신적 사고를 시로 번역하여 말하는 자‘였으며, ‘따라서 밀턴을 안다는 것은 구분할 수 없는 두 질문(시인은 무엇인가? 시란 무엇인가?)의 답변을 아는 것이었다. - P3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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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2-11-29 11:4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 이제 밀턴 읽을 차례입니다!! 언제 다 읽죠..

거리의화가 2022-11-29 14:25   좋아요 1 | URL
<실낙원> 읽지 않고 도전했는데 중간에 약간 험난하긴 했지만 읽을만했습니다. 이브, 사탄 여성주의 책에서 자주 등장하는 소재들이 나오더군요. 이 책 결국 이 달 안에 읽는 건 못하겠네요~ㅎㅎ 다락방님도 힘내세요!

독서괭 2022-11-29 17:2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후 저도 이제 6장 읽을 차례인데 걱정이네요. 실낙원은 커녕 성경도 안 읽었는데.. ㅠㅠ

거리의화가 2022-11-29 17:50   좋아요 2 | URL
저도 성경 잘은 모르고 앞부분 창세기 쪽만 읽어봤습니다...ㅎㅎ 아무래도 성경을 잘 모르기도 하고 빗댄 작품인 실낙원은 이해못할듯하더라구요. 결국 냅다 6장을 읽었죠! 아무래도 이 부분은 후속 주자분들의 감상을 기다려봐야할 것 같습니다^^

mini74 2022-11-29 22: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 실낙원 그림으로 된 거 읽고있어요 ㅎㅎㅎ

거리의화가 2022-11-30 10:13   좋아요 1 | URL
저도 그림으로 된 거 살 걸 그랬나봐요~ㅎㅎㅎ 괜히 2권짜리를 샀습니다ㅠㅠ 하~ 아까워서라도 읽어야 할텐데 손이 안가네요ㅋㅋㅋ
 
독립운동 열전 1 - 잊힌 사건을 찾아서 독립운동 열전 1
임경석 지음 / 푸른역사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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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아 우리 님아,
나 간다고 슬퍼마라.
나는 간다.
가기는 간다마는,
나의 가슴에 품긴 이상의 광명은 영겁무궁까지도 네가 그의 표상이로다.

잘 있거라, 나는 간다.
봄은 오느니라.
제왕의 권력과 재화의 세력 밖에 있는 동군東君(태양신)은 때만 되면 오느니라.
무궁화 다시 피건 또 다시나 만나자.

1910년 소년 잡지 4월호에는 이런 시가 실렸다. 최남선이 신민회 망명자들의 심정을 노래하며 그들을 축복하고자 하는 마음을 담았다. 여기서 태백은 조국을 가리킨다. 다시 만나자는 그의 말이 미래에 대한 낙관으로 들리지만 조선은 얼마 지나지 않아 망했고 일제의 압박 속에 35년의 세월을 견뎌야만 했다.

이 책은 몇 십년전 조선 땅과 해외에서 벌어진 사건들을 통해서 한국 근대사이자 독립운동사를 살펴본다. 사건의 상황을 설명하고, 관련 인물을 이야기하며 사건을 일으킨 이유가 무엇이고 이후 상황은 어떻게 전개되는지 친절하게 설명해준다, 사건들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3.1운동, 광주학생운동처럼 대중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던 것임이 눈에 띈다. 게다가 관련 인물도 김상옥, 이상설, 안창호, 이동휘 등 유명한 독립운동가들도 있겠으나 대부분은 사회주의/공산주의 운동으로 그동안 외면하거나 놓쳤던 독립운동가들이다. 때문에 책의 부제는 <잊힌 사건을 찾아서>다.

먼저 1910년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서 벌어진 독립운동의 갈등을 살펴보자. 이상설과 정순만을 비롯한 망명자들은 '해도 거점 임시정부 수립론'을 구상했다. 이를 위해 이들은 러시아 당국과의 교섭이 반드시 필요했다. 사건 당일 낮에 이미 한인 거류민회 회의에서 참석자들은 재정 문제로 충돌하여 갈등을 드러냈다. 정순만은 권총을 소지한 상태로 피살자인 양성춘의 집을 방문했다. 양성춘은 당시 한인 거류민들 사이에서 손꼽히는 유력자로 신망이 두터웠고 영향력이 있는 자였다. 러시아 사법기관은 정순만에게 3개월 금고형을 언도한다. 정순만을 지지하는 사람들의 적극적 방어로 고의 살해가 아닌 과실 치사를 인정한 것이다. 정순만 출감 후 한인 사회는 분위기가 냉랭해졌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건이 또 발생한다. 1911년 정순만이 양성춘의 아내인 전소사에게 도끼로 가격당해 사망한 것이다. 이상설은 분노했고 살인 사건 배후 조종 혐의로 러시아 관청에 안창호, 정재관, 이강, 김성무를 고발하는데 네 명은 모두 국민회 운동의 지도자들이었다. 이 일로 이상설과 안창호는 서로 등을 돌리게 된다.

3.1운동은 조선의 독립운동사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 사건일 것이다. 하지만 이 일로 동료를 밀고하거나 변절한 자도 적지 않았다.
이미륵은 3.1운동 후 고문과 투옥의 위기를 피해 망명길에 오를 때의 경험을 복기하여 후에 《압록강은 흐른다》라는 제목으로 책을 출간한다. 북간도 용정의 철혈광복단도 3.1 운동이 시작이었다. 의열 투쟁을 벌인 김익상도 3.1운동의 체험이 그의 이후 활동에 영향을 주었다. 조선공산당 2대 책임비서였던 강달영도 진주에서 3.1운동을 벌이며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박길양은 강화도 3.1운동에 참여한 인물인데 강화도 시위는 전국 최대 규모였다고 한다. 박길양은 시위에 참여하고 다행히 체포되지는 않았으나 시위가 사그라들자 무장투쟁 노선으로 전환한다.
대한민국애국부인회 초대 회장이었던 오현주는 비밀 활동 정보를 넘기고 동료를 밀고한 대가로 요즘 돈으로 3억원을 받아 챙겼다. 김대우는 3.1운동 학생단 지도부의 일원이었다. 학생단 지도부는 '민족대표 33인'과 함께 3.1운동을 기획한 양대 비밀결사 가운데 하나였고 그는 경성시내에 소재하는 6개 전문학교 학생대표들 중 하나였다. 경찰에 체포된 뒤 초기에는 혐의사실을 인정했으나 향후 입장을 바꾸어 조선의 독립을 위해 시위를 벌였음을 인정했다. 그의 아비는 친일파이자 대지주였고 가계에 로비를 펼친 모양이다. 그는 "지금은 독립을 희망하지 않는다" 발언으로 징역 7개월만 받고 풀려나온 뒤 변절하여 도지사까지 되는 행보를 보였다. 김성근은 3.1운동에 가담한 후 상하이와 국내를 오가면서 비밀 연락과 독립자금 모금에도 참여한 혁명가였다. 하지만 어느 날 상하이 주재 일본영사관 경찰부에 체포되었음에도 무사히 석방됐고 아무 일 없는 듯 상하이 시내를 돌아다니면서 밀정임을 의심받는다. 임정 경무국도 그에 대한 조사를 명했고 이를 눈치챈 그는 영사관을 통해서 은신처와 조선 귀국의 편의를 제공 받으며 경성으로 간다. 무사히 도착한 뒤에 그는 독립운동에 참가했다는 이유로 어떤 처벌도 받지 않았으며 이따금 조선총독부에 출입한다는 근황이 언론에 보도될 뿐이었다. 그는 건국공로훈장 단장을 수여받았고 여전히 독립유공자로 등재되어 있는 상태이다.

러시아 혁명과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은 조선의 독립운동가들의 노선을 변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 와중에 갈등은 더욱 불거졌다. 김립은 블라디보스토크 한인사회 안에서, 독립운동 계에서 적이 많았다. 그는 독립을 위해 싸우는 세력이라면 부르주아라도 연대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측이었다. 반면 이시파 공산당 세력은 부르주아와의 결탁은 결코 있을 수 없고 오로지 러시아 혁명에 기반한 프롤레타리아혁명을 실천해야 한다고 보았다. 모스크바에서 1차로 전달한 40만 루블의 관할권은 박진순이 속한 한인사회당과 그 후속 단체인 고려공산당에 있었으나 임시정부는 김립 등이 이 자금을 횡령했다고 오해해 암살했다.
'15만 원 사건'은 이 책을 통해서 전후 사정을 자세히 알게 되었다. 독립운동가로 알려졌던 엄인섭이 동료들을 밀고하면서 사건의 관련자들이었던 철혈광복단의 희망을 꺾어버린 것은 너무나 뼈아프다. 그는 무려 14년간 밀정 활동을 했다고 하니 그저 혀를 내두를 뿐이다.
김상옥의 종로경찰서 의거 후 경성 총격전은 이제 영화로도 알려지고 많은 이야기가 있다. 1923년 3월에 발각된 폭발물 비밀반입 사건은 '제2차 대암살 파괴 계획'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는 흔히 의열단이 주도하여 사건이 전개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의열단 단독 주도론은 사건 발발 당시 일본 경찰의 관점에서 비롯된 것이다. 경찰 당국은 이 사건을 "김원봉을 단장으로 한 의열단이 러시아 공산당에게서 자금을 받아서 대관을 암살하고 관공서를 파괴함으로써 조선을 적화하고 독립운동을 일으키려고 계획한 음모"로 간주했다. 경찰과 정반대 입장에서 작성된 기록인 《약산과 의열단》도 시종일관 김원봉 단장의 다각적인 노력의 결과로 이뤄진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실제 의열단 사건의 피고인 숫자는 18인이었는데 이 중 몇몇은 의열단과 달리 독자적인 정치 단체의 구성원이었다. 황옥은 이시당(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 내지부의 위원이었고, 장건상은 이시당의 최고 간부인 중앙위원이었다. 김시현과 권정필은 이시당의 국내 활동을 위해 1922년 3~5월 시기에 잠입한 당원이었다. 김한도 조선공산당(내지당, 중립당)의 간부였다.

이전에 조선공산당의 역사를 간략하게나마 공부했던 것이 책의 재미와 감동을 더 느끼게 했다. 7장 비밀결사를 통해서 조선공산당의 책임비서를 지낸 인물들의 활동을 확인할 수가 있다. 2대 책임비서였던 강달영이 자신만이 알 수 있는 암호를 만들어 문서를 작성했다는 것에 놀랐고 이를 일제가 풀어내자 정신을 놓았다는 것에 통탄했다. 사실 그가 옥중에서 정신이상이 되고 풀려나서도 온전한 정신을 찾지 못했음을 알고 있었기에 더욱 드라마틱하게 느껴졌다. 3대 책임비서인 권오설도 마찬가지로 흥미진진한 인물이다. 강달영과 마찬가지로 당이 가장 어려울 때 책임비서를 맡게 된 그는 자신이 수배된 위치에 있었음에도 당 재건을 위해 부단히 애쓴다. 나는 4대 책임비서인 안광천이 오히려 낯설었다. 안광천 책임비서 시기는 조선 사회주의운동사의 전성기 중 하나였다고 한다. 그의 재임과 동시에 사회주의운동 진영이 하나로 통합되었다. 하지만 안광천은 주목할 만한 인물임에도 사진 한장 하나 발견되지 않았다는 것이 안타깝다.

아쉬운 점을 하나 꼽으라면 부제와 목차의 불일치다. '잊힌 사건을 찾아서'의 부제인 만큼 '사건'의 제목으로 목차를 구성했으면 더 좋았을 것 같다. 2, 3장의 경우는 <김립 암살 사건>, <15 만원 사건>처럼 부제에 들어맞으나 나머지 챕터는 그렇다고 말하기에 애매함이 있다. <망명>,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 <배신>, <비밀결사>, <옥중투쟁>, <국제주의> 어떤 것은 장소이고 어떤 것은 일반적 용어라서 묶여지지 않는다는 생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잊혀졌거나 외면받았던 다양한 사건을 만날 수 있다. 다만 사건 관련자들의 모든 일대기를 알 수 있지 못하여 이후가 궁금한 경우가 많았다. 대부분 판결/수감 기록 등 외부를 통해 바라본 기록이기 때문에 한계가 있고 본인의 마지막도 불명확하여 후손이 있더라도 그들의 종적을 알 수 없는 경우가 많아서 안타까웠다. 향후 이들의 후속 연구가 이루어져서 전 생애를 알 수 있게 되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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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2-11-25 10: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진짜 독립운동을 한 조공
인사들의 행적에 대한
연구가 부족한 게 아쉬울
따름입니다.

항상 역사의 공과를 따지
자고 하면서, 자신들의 과
는 파묻고 경쟁자들의 과는
들추는 모습이 예나 지금
이나 하나도 달라지지 않
는 것 같습니다.

거리의화가 2022-11-25 13:13   좋아요 1 | URL
독립유공자 훈장에 대해서 생각해볼 지점이 많은 것 같습니다. 독립운동자들을 밀고한 사람인데 독립유공자로 여전히 등록되어 있는 경우도 많으니 말이죠. 진짜 독립을 위해 애쓴 분들은 여전히 알지 못하거나 사회주의 이력이 있다는 이유로 거부당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해서 씁쓸할 뿐입니다. 역사를 역사로만 바라보지 않고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세력들이 존재하기에 그런 것이겠죠.

그레이스 2022-11-28 10: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의열단> 읽고 안개가 낀듯 개운치 않던 머리가 선명해진 느낌이었습니다. 어떤 변명도, 햡리성을 내세운 오히려 모호하게 만드는 이유도 진실 앞에서는 무력하다는 것을 알게 해줬죠.^^

거리의화가 2022-11-28 10:39   좋아요 1 | URL
진실의 힘 맞습니다^^ 나약함이라는 무기와 변명 등은 결국 자신과 후손들 앞에 진실을 가릴 뿐이라는 생각입니다. <의열단>의 다양한 활동과 관련 인물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되었어요.
 


한국 근대사를 공부하다보면 늘 놀랍다.

어쩌면 이토록 파도 파도 모르는 인물과 사건이 숨어 있는지 말이다.


이는 해방 후 좌우 분열 후 이념이 정치적으로 이용되고 큰 전쟁을 겪은 후 남북이 분단된 탓이 컸을 것이다. 많은 사회주의/공산주의 운동가들이 소리소문 없이 사라지고 은폐되었다.

오랜 세월 남한에서는 사회주의/공산주의를 논하면 빨갱이 소리를 들어야 했다. 

때문에 여전히 발굴해야 할 인물과 사건들이 많음을 이 책을 통해서 다시 느끼고 있다.


1권은 사건 중심으로 독립운동사를 다루었다면 2권은 인물 중심으로 다룬다. 

나오는 인물 중 2/3 정도를 모르는 것 같다. 이는 이 책에서 사회주의/공산주의에 투신한 독립운동을 많이 다루어서인 듯 싶다. 

놀라운 것은 이 인물들의 모든 일대기를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대부분 판결/수감 기록 등 외부를 통해 바라본 기록이기 때문에 한계가 있다. 또 본인의 마지막도 불명확하며 후손이 있었는 경우에도 알 수 없는 경우가 많아 안타까울 따름이다. 


김사국과 김한은 조선공산당(익히 우리가 아는 1925년의 조선공산당 아님. 1922년 조직된 중립당)의 핵심 지도자들이었다. 해외에는 상해파, 이르쿠츠파가 있었으나 중립당은 이들과 노선을 달리 하여 노동자 중심의 성격을 중요시했다. 물론 둘은 얼마 안가서 화요파와 서울파로 결별하게 된다. 


박진순은 한국 최초의 마르크스주의 정당이라고 불리는 한인사회당에서 핵심 역할을 했고 연해주 한인사회에서 이동휘와 함께 소비에트파로 활동을 했다. 1차 세계대전 발발 후 이동휘가 러시아가 독일과의 전쟁을 끝내야 한다고 주장하자 독일 스파이 혐의를 받게 되었을 때 박진순은 이동휘를 위해 모스크바에서 구명 운동을 벌인다. 그는 외교술이 뛰어났다고 한다. 


이들 뿐 아니라 빨치산 운동을 한 이들, 여성 운동가들 등 다양한 범위의 독립운동가들을 다루고 있다. 


재밌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고 있다. 역사는 역시 인물과 사건이 중심이라 생각한다. 단순히 연표를 달달 외우는 것만으로는 역사 공부의 재미를 찾기 어렵다.



관련 책들도 다시 읽고 싶어지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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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2-11-23 12:4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꼬리에 꼬리를 무는 독서군요. 역시 역사는 화가님~!! 사실 근대사가 학교에서도 자세히 안가르쳐주기도 해서 잘 모르게 되는거 같더라구요

거리의화가 2022-11-23 13:08   좋아요 1 | URL
한국근대사는 오랫동안 한쪽으로 치우친(우파 위주) 독립운동가들을 주로 다뤘습니다. 친일파들도 많지만 이들이 해방 후 경찰, 군에 많이 얽혀 있다보니 시원하게 얘기못하는 부분도 많구요^^; 여전히 베일에 쌓여 있는 인물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파도 파도 끝없이 나오는 화수분 같네요. 새파랑님 고맙습니다^^

얄라알라 2022-11-24 14:35   좋아요 1 | URL
꼬리에 꼬리를 무는
파고 파는....

아!!!! 열정 돋우는 문구입니다요. 두분!

청아 2022-11-23 16:5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화가님이 한국사를 꾸준히 읽고 계셔서 저도 일단은 몇 권씩 담아 두고 있습니다. 근대사 공부는 특히, 하지 못한 숙제로
남아 있어요. <독립 운동 열전>흥미롭네요. 덕분에 알아 둡니다. ^^

거리의화가 2022-11-23 17:12   좋아요 2 | URL
미미님 댓글이 반가워서 눈물이ㅠㅠ 암튼 각설하고 근대사 공부는 숙제 같다는 말씀에 저도 동감합니다. 이만하면 됐겠지 하다가 택도 없다는 생각을 해요. 봐도 봐도 모르는 게 이리도 많을 수 있을까 싶어서요. 하지만 공부해가면서 경험하는 새로움과의 만남과 설레임의 감정은 늘 좋습니다. 감사해요 미미님^^

scott 2022-11-23 22: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독립 운동 하셨던 분들 자손들 모두 러시아 만주 시베리아 등지에서 사라지셔서 한국 근대사 한 줄기가 텅 비어 버렸죠.
김산의 아리랑 다큐 감동적이게 보았지만
크게 사회적 이슈가 되지 도 못했고
러시아와 연해주 일대에서 독립 운동과 학교 설립에 큰 역할을 했던 여성들은 이름조차 남아 있지 않습니다

거리의화가 2022-11-24 09:05   좋아요 0 | URL
네. 특히나 북쪽땅으로 넘어가신 분들의 대부분의 삶을 우리가 알 수 없는 경우가 많은 듯 합니다. 여성 독립운동가들이 알려지지 못한 것도 아쉽고 유공자 비율도 너무 낮아서 아쉬워요. 여전히 발굴되어야 할 자료와 인물들이 너무나 많습니다ㅜㅜ

책읽는나무 2022-11-23 23: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화가님의 열정은 늘 존경스럽습니다^^
어서 빨리 화가님 뒤따라 역사책 좀 읽어야 할텐데 늘 마음만 바쁘고, 읽을 책은 줄줄이고...ㅜㅜ
그래도 늘 눈여겨 보고 있어요^^

거리의화가 2022-11-24 09:08   좋아요 1 | URL
ㅎㅎㅎ 12월까지는 아무래도 <다락방의 미친 여자> 으로 읽을 책들이 많아서 부담스럽긴 하죠~ 하지만 저는 역사책을 읽지 않으면 힘드므로 이렇게 중간 중간 읽어나가고 있습니다^^
실낙원 읽기 시작하셨던데 괜찮은가요? 저는 이북으로 사두긴 했는데 첫부분 읽자마자 음... 저는 성경도 관심없고 신자가 아니라 그런지 쉽지 않네요ㅜㅜ
눈여겨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책읽는나무 2022-11-24 10:25   좋아요 1 | URL
실낙원!!!ㅜㅜ
이게 뭔말인가? 싶네요ㅋㅋ
어제 조금 읽어보았어요.
뒤에 주석 읽고, 원문 한 두 줄 읽다가 또 주석 찾아 읽기 바빠서...전 주석 찾아 읽는 걸 넘나 귀찮아 하는데...ㅜㅜ
근데 주석을 읽다 보니 성경 등장 인물 이름들이 눈에 익어 조금 알게 되는 점들도 있어 그냥 글이라도 막 읽어보려 생각 중입니다. 생각 많이 하면 책을 덮을 것 같아 아무 생각없이 그냥 막막!!!!ㅋㅋㅋ
그래서 읽고 나도 감상은 없겠구나? 미리 예상 중입니다^^

희선 2022-11-24 03: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남북으로 나뉘지 않았다면 좀 나았을지, 이런 거 생각해도 어쩔 수 없네요 그때는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람이 같은 걸 한다 해도 생각이 다르기도 하니 독립운동도 그랬을 것 같습니다 그래도 독립운동 하신 분들 잊지 않아야 할 텐데...


희선

거리의화가 2022-11-24 09:10   좋아요 1 | URL
이념의 문제가 아니었다면 지금의 현실보다는 나았을거라고 봅니다. 이념의 피해를 가장 크게 입은 곳이 한반도 지역이 아닐지 싶네요. 독립운동 내부도 다양한 색채가 있었는데 이 때문에 갈등과 분열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노선이 달라서 서로 죽고 죽이기도 했고요. 그래도 노선은 달랐지만 독립을 위해 싸웠던 이분들을 잊지는 않아야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