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부 세계경제의 상품 사슬

그 시기는 식민주의 시대이자 인종차별주의 시대, 부가 전례없이 크게 축적된 시대였다. 연이어 발생한 격렬한 전쟁과 황폐해진 경관은이러한 생산성의 개선이 큰 비용을 치르고 얻은 것임을 분명하게 했다.
그때는 자유주의적인 경제적 사고의 원리가 국제경제의 여러 부분에 처음으로 체계적으로 적용되고 ‘세계화‘가 분명하게 나타난 시대였다. 그러나세계화는 모든 사람이 유럽과 북아메리카에 발맞춰 걷게 된다는 뜻은 아니었다. 자본주의적 투자와 무역의 논리가 그 어느 때보다도 세계 여러 지역에찾아왔지만, 이질성과 다양성도 더욱 두드러졌다. 유사한 시장의 압력에 대응 - P679

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였다. 국제무역과 가격, 기술이 거의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미쳤지만, 사람들은 종종 그 충격을 다르게 느꼈고 경제적 반향보다는문화적이거나 정치적인 반향이 더 클 수 있었다. - P680

우리의 접근 방식은 서유럽과 북아메리카의 자본가와 노동자, 기술이 세계무역과 금융의 변형에서 수행한 주요 역할을 인정하며 북대서양 양쪽의 기업가들이 그 시기의 깊은 변화에 중요했다는 데 동의한다. 역사가 위르겐 오스터함멜은 최근에 이렇게 말했다. "19세기 역사는 대체로 유럽인 속에서 그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과거 그 어느 때에도 유럽은 압도적인 힘과 오만함을 터뜨리면서도 그와 비슷한 대단한 혁신과 창의성을 발휘하지 못했다."
그러나 우리는 유럽 예외론이 과장되었다는 그의 견해에 동의한다. 모든 변화가 다 유럽과 북아메리카의 자본가에게서 나오거나 그들이 만들어 낸 것은 아니다. 서유럽과 북아메리카 밖의 세계는 오랫동안 유지된 방식대로 계속흐르는 강물 같은 획일적인 ‘제3세계‘가 결코 아니었다. 이 시기에 유럽화하지 않은 세계가 널리 ‘동양Oriental‘으로 표현되기는 하지만 실제로 1870년에서1945년 사이 세계 여러 지역에서는 근본적으로 구별되는 경제적 변화가 일어났다. - P683

기술의 모순을 보여 주는 각별히 두드러진 한 가지 사례는 알프레드 노벨Alfred Nobel의 놀라운 발명품인 다이너마이트였다. 노벨은 니트로글리세린과 실리카를 혼합하여 폭발물을 만들었는데, 이는 화약보다 훨씬 더 강력했을 뿐만 아니라 그가 발명한 뇌관과 결합하면 안전하게 통제할 수 있었다. 그결과로 광부와 터널 파는 자들, 좀 더 넓게는 건설업자들이 뜻하지 않은 선물을 얻었다. 다이너마이트 덕분에 그들의 직업이 훨씬 더 안전해졌기 때문이다. 다이너마이트는 전 세계에 보급되었다. 더 안정된 폭발물을 안전하게 운반할 수 있었고 노벨의 회사가 여러 나라에 다이너마이트 공장을 세웠기 때문이다. 노벨의 발명품은 건축업과 건설업에서 유용했지만, 노벨은 죽음의 상인으로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평화주의자였던 노벨은 자신이 병에서 꺼내 준파괴적인 지니에 관하여 진지하게 고민했다. 노벨은 유언을 통해서 900만 달러에 달하는 재산의 상당한 몫을 건설적인 과학 발전과 다른 지적 발전을 크게 포상하는 데 쓰도록 했다. 폭발물로 얻은 수입으로 자금을 댄 노벨상의 제정은 그의 참회에서 가장 역설적인 부분이었을 것이다. - P692

상대적으로 운이 좋은 지역에서는 철도를 통한 항구와 내륙의 연결이 근대화와 국가 건설의 승리로 여겨지기도 했다. 파리의 오르세 역이나 런던의세인트 팬크러스 역, 뉴욕의 그랜드 센트럴 역 같은 많은 철도역이 발전을 축하하는 호화롭고 우아한 기념물로서 건축되었다. 이 역사들은 자연을 정복하는 것은 물론 거리와 공간을 지울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을 설득력 있게 증명한근대의 상징물이었다. 방문객들은 철도역과 이에 동반된 전신국을 세계적 도시들의 신경 중추라고 찬양했다. 그러나 비판자들은 증기기관차를 외국의 자본과 기술, 무기가 지역의 정치인들과 토착민, 상이한 생활 방식을 정복하도록 허용한 트로이 목마로 보았다. 철도망은 ‘빨펌프‘나 ‘촉수‘ 같은 별명이 붙어 비난을 받았다. 철도망은 또한 경제적 계산과 정치적 충성, 지역적 정체성과 국민적 정체성을 뒤엎고 바꾸어 놓았다. - P743

운송비와 보험 비용의 감소, 저렴한 토지 비용과 노동비용, 농업의 기계화, 곡물 재배와 수확, 운송, 마케팅 분야에서 이루어진 기술적 개선과 과학적 개선. 이 모든 것이 경제사가들이 말하는 이른바 세계곡물시장의 ‘극적인 가격 수렴‘에 이바지했다. 곡물 품종의 표준화와 검사 규약, 퇴비(동물의 분뇨와 클로버)와 비료의 사용 증가, 알팔파와 옥수수처럼 토양의 자양분을 회복시키는 작물의 정기적 윤작, 가뭄과 녹병에 내성이 있는 더 강한 조생종의 채택. 이 모든 것이 시장 통합 강화와 생산성 증대를 촉진했다. - P787

제2차 세계대전 이전 아시아는 전 세계 쌀 수출량의 93퍼센트를 차지했지만, 이 대륙은 또한 수입량의 4분의 3을 흡수했으며 생계형 쌀농사를 감안하면 아마도 전 세계 쌀 생산량의 90퍼센트 이상을 소비했을 것이다. 밀 무역에 소수의 두드러진 수출국이 있었던 것처럼 미얀마,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나 코친차이나, 태국, 조선, 타이완이 쌀 무역을 지배했다. 수출은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내내 꾸준히 증가했다. - P834

이 상품들은 대체로 처음에는 부자와 특권 집단을 대중과 구분하는 차별과 신분의 표지였지만, 공장과 전기가 노동규율을 강요하여 노동자들의 생물학적 시계에 부담을 준곳에서 때때로 음식 자체만큼이나 중요한 필수품이 되었다. 자극성 식품은siple lainisha쾌감을 유발한 동시에 고통을 무디게 했다.
일찍이 16세기부터 처음으로 대륙들을 연결한 상품이었고, 1870~1945년에 국제적으로 거래된 상품 중 가장 귀중한 것이었던 설탕과 담배, 커피, 차, 초콜릿에 집중해 보겠다. 이 상품들은 식민주의와 노예제, 이민, 기계화, 재배지역의 식물학적 개선의 대조적이고 변화하는 역할들을 두드러지게 보여 준다. 이 상품들은 또한 산업의 변화, 마케팅과 금융의 변화, 더불어 소비 국가들에서 나타난 대중적 호소력의 증대를 보여 주어 우리에게 여러 대륙의 생산 체제를 대비할 수 있게 한다. - P854

이 시기는 철도와 비행기, 라디오, 대량생산과 대량 소비가 승리한 시기이며 동시에 부의 집중, 두 차례 세계대전, 러시아 혁명, 핵폭탄의 시기이기도 했다. 속도를 더한 경제적 교류는 문화 전파와 혼합주의적 융합을 낳았다. 통신의 발전은 이따금씩만 더 나은 이해를 낳았다. 이시기는 날카로운 대조의 시기였다. 몇몇 사람은 전신과 증기선, 세계시장을떠올리며 분열을 초래하는 차이가 제거된 하나의 세계 one World를 생각했다.
이들은 국제연맹과 국제재판소를 발진시키고 에스페란토를 만들었고 적십자운동과 보이스카우트 같은 비정부기구들을 출범시켜 국경을 넘나들었다. 세계 박람회와 올림픽 게임은 지구촌 구석구석에 있는 사람들의 단합을 꾀했다. - P918

지리적으로 서로 떨어진 곳에 있는 사람들이 예상하지 못하고 미리 내다보지 못한 방식으로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다는 것은 분명하다. 상품 교환의 네트워크 속에 농민들을 결합한 것이 긍정적이었는지 해로웠는지는 구체적인 역사적 상황에 따라 달랐다. 결과는 한결같지 않았고 미리 결정되거나 일관되거나 일정하지도 않았다. 새로운 형태의 에너지,
기계와 화학의 신기술, 새로운 교통수단과 통신수단, 새로운 제품이 풀어놓은 지니가 반드시 자비롭거나 악의적인 것은 아니었다. 인간의 역사와 사람들이 살았던 환경이 이 첫 번째 근대 세계화 시대의 결과를 결정했다. 역사적으로 교류를 제한했던 지역과 사람 들이 상품 사슬로 연결되었기 때문이다. 이시기에 해방된 세계적 힘들은 지금도 여전히 메아리친다. 윌리엄 포크너williamFaulkner는 이렇게 경고한다. "과거는 절대 죽지 않으며, 심지어 지나가지도 않았다." - P91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3부 이주와 소속감

3~5장

인구와 경제가 조화롭게 성장하지 않는 이른바 인구학적 변이가 계속되면 가족과 미혼의 젊은 남녀들은 살던 곳을 떠나게 된다. 영아 생존율과 성인의 기대 수명이 늘고 출생률도 떨어지지 않는데 노동시장은 제자리걸음을 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것을 ‘이동성 변이‘로 부를 수 있다면 몇 세기 전에는 이동성이 낮았으나 이후에는 이동성이 높아졌다는 의미가 된다. 이동성은 이동 경로와 속도에 일어난 발전에 의해서도 촉진된다. 이동 경로와 속도의 발전이 일부 지역들을 막연하게 ‘현대화‘했다기보다 이동성을 촉진한 면이더 컸음은 최근의 연구 결과에도 나타난다. - P560

아메리카 대륙으로의 이주와 그곳에 대한 유럽의 지배권 확립은 백인을흑인의 우위에 두고 북아메리카 원주민을 소멸시키거나 강제 이동시키는 방식으로 논의되었다. 백인을 최상층에 위치시키는 인종적 위계의 부과를 주요목표로 삼은 것인데, 그 결과로 폭력과 성적 매력으로 표현된 비대칭적 성비性t가 야기되어 새로운 혼혈 인종이 탄생했다. 북부의 자칭 ‘백인‘ 지역들을 포함해 아메리카 대륙의 모든 곳에서 인종적 혼합이 일어나 새로운 생태적 환경에서 새로운 메스티소 인종이 출현하는 민족 발생의 결과가 초래된 것이다. - P576

아시아 내의 이주 지역에는 버마, 시암, 해협식민지가 포함된 말라야, 태평양의 몇몇 섬, 그리고 ‘백색 아시아‘ 지역인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가포함된다. 이주민들은 그 밖에 인도양 너머 서쪽의 동아프리카와 남아프리카, 특히 나탈로도 갔다. 태평양을 넘거나 아프리카의 곳을 도는 항해를 하여 아메리카 대륙의 서부 해안과 카리브해 지역으로 간 이주민도 있었다. 동아프리카에 있던 구자라트 상인들의 유서 깊은 교역 공동체와 시암 및 말레이반도에 있던 말라바르 해안 지대의 상인 공동체를 이용한 이주민도 있었다. 자본가들은 자본가들대로 범세계적으로 일어난 단기적 변화를 이용했다. 모리셔스의 플랜테이션 농장 소유주들만 해도 19세기 초에 일어난 노예 폭동과노예제 폐지로 카리브해의 앤틸리스 제도에서 사탕수수 재배가 불가능해진상황을 눈여겨보고, 유럽에서 마케팅 기회를 잡아, 인도인 강제 노동력을 들여와 사탕수수 생산을 늘렸다. 그런 식으로 이주, 교역, 투자가 대양적·반구적·범세계적 규모로 진행되는 가운데, 이주민 끼워 넣기의 전형이 되었던 곳들이 바로 모리셔스, 남아프리카의 나탈,말레이반도였다. - P585

1890년 이후에는 중국뿐 아니라 미국의 일본인 공동체도 덩치가 커졌으며, 필리핀인과 동부 인도인들도 북아메리카 이주의 일원이 되었다. 이런 식으로 1850~1920년의 기간에 아시아권에서 태평양권으로 이주하여 미국에거주한 사람을 지역별로 나누면 중국인 32만 명, 일본인 24만 명, ‘여타 아시아인‘ 3만 명, 태평양 섬 주민 1만 명, 오스트레일리아인과 뉴질랜드인 4만4000명이었다. 따라서 총계가 말해 주듯 다양한 이주가 포함되었다. 캐나다도 1921년의 인구조사에 중국인 3만9600명, 일본인 1만 5900명, ‘동부 인도인‘ 1만 500명이 거주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태평양 이주 체계는 이렇듯 대서양 이주 체계에 비해서는 이주민이 많지 않았다. - P601

다른 곳들에 비해 규모가 어마어마하게 컸던 만주로의 이주는 랴오허강계곡에 정착한 북중국인들이 선양과 하얼빈 이북 지역들로 재이주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렇게 이주민이 답지함에 따라 1911년에 1500만 명이던 만주 인구는 1931년에는 곱절로 불어나 3000만명이 되었다. 1920년대까지는 중국 정부가 이주를 장려하고 지원했으며, 사기업이나 행정 조직이 토지를 보유했다가 매각한 것도 이주율을 높이는 데 한몫했다. 1920년대 중엽에는 계절노동자 50만 명의 4분의 3이 가족이 있는 산둥성이나 즈리성으로 해마다 돌아오는 상황이 되었다. 철도로 촉진된 역내이주는 그때부터 매년 100만 명씩 늘어났으며, 가족 이주를 통한 영구 정착도 그와 더불어 증가했다. 그들 대부분이 가뭄, 기아, 내전이 끊이지 않는 상황에서 자발적으로 이주한 산둥성 사람들이었다. 1932년 3월 1일부터는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를 점령한 일본에 의해 만주가 ‘만주국‘이 됨에 따라 만주로의 대량 이주도 다롄-선양-지린-하얼빈 간의 철도 노선, 즉 일본이 세운남만주철도의 본선 구간을 통해 일본이 운영하는 탄광, 철도 건설지, 도시들 - P606

에 노동력을 공급해 주는 것으로 성격이 바뀌었다.
몽골에서는 문화적 상호작용이 중요했던 반면 만주에서는 수가 중요했던것도 만주 이주의 특징이었다. 중국 이주민이 현지의 만주족을 수적으로 압도한 것이다. - P607

생태 환경이 열악한 아프리카에서는 가뭄과 여타 자연재해로 궁핍해진지역 사람들이 제일 먼저 이주했다. 그리하여 처음에는 임금을 가로채는 토착민 지배자와 노동을 착취하는 식민주의자 간 권력 관계의 올가미 속에서허우적거렸으나, 1920년대 무렵부터는 이들도 노동자계급 특유의 호전성과 - P618

집단행동을 발현시키기 시작했다. 도착지들에 대한 정보가 전해짐에 따라 더욱 먼 지역으로의 알선과 이주도 증가했다. - P619

신체와 젠더가 정치, 전쟁, 이주의 과정에서 전략으로 사용된 것이다. 남성성은 이렇듯 식민지 국가들 안팎에서 인간성이 아닌 자기 권력의 확대와 약자에 대한 억압의 측면으로 발현되었다. 남성다움이 허약한 타자를 제압할 수있는 능력과 같은 의미를 갖게 된 것이다.
백인 식민주의 국가들의 중산층과 지배층 엘리트들도 내적으로 분화돼있었다. ‘국가‘ 공직 및 특정한 문화적 관행에의 접근 방식으로 민족성 및 인종의 위계와 더불어 계급과 젠더의 위계마저 ‘모국‘ 혹은 ‘조국‘으로 불리는 ‘민주주의‘국가의 필수 요소가 되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다. - P620

일본 통치자들은 서구식민주의자들과 달리 그곳에 플랜테이션 생산방식을 도입하지 않고 소유지보증제를 수립함으로써 소농과 중농들이 혜택을 보게 만들었다. 한편 경제적잠재력이 큰 분쟁지였던 극동의 사할린으로는 러시아 이주민들이 새롭게 들어와 중국, 조선, 일본의 이주민들과 경쟁을 벌였다. 하지만 자국 땅임에도 본국의 중심지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 보니 러시아인들은 일본 어부 및 중국상인들과의 경쟁에서 뒤졌다. - P632

종전 뒤에 체결된 평화협정은 전쟁 전의 제국적 지배와 대비되는 민족자결주의를 옹호했다. 실제의 국경도 그렇게 그어졌을까? 아니었다. 동중부 유럽의 많은 지역과 서유럽의 일부 지역은 수세기에 걸친 이주와 민족들 간의상호작용으로 복잡한 정주지의 모자이크를 이루고 있었다. 그런 역사적 사실을 도외시한 채 국경선이 그어진 것이다. 따라서 단일 문화를 가진 신생국은 어디에도 없었다. 한자리에 머물러 있던 사람들도 민족이 다른 국가에 속하게 되었다. 오직 국가의 문지기들만이 역사성을 가진 민족의 영토, 그들에따르면 우연찮게 천연자원마저도 풍부한 영토의 확실성을 주장할 수 있었다.
결국 종전 뒤 그런 ‘민족국가들‘이 수립됨으로써 2000만명이상의 유럽인이사촌뻘 되는 민족문화 집단이 사는 국가의 외곽에 남겨졌다. - P637

전쟁이 끝난 1945년 무렵 도주하거나 강제수용소에 갇힌 사람만 해도 수십만 명이었다. 인구 계획자들이 사람들을 노동 집단 혹은 잉여 집단으로 만들어 ‘인간 재료로 전락시킨 탓이었다. 민주주의 국가들도 예외는 아니어서 전시의 특별한 동맹 구조와 국가에 대한 의무를 이유로 체제 반대자와 평화주의자들을 수용소에 들어가 마땅한 사람들로 박해했다. - P650

유럽 탈식민주의 이론가들은 1930년대부터 1950년대까지 식민지인과 식민주의자들 간의 계층화된 상호작용, 다시 말해 저항할 태세에 있던 식민지인들, 즉 종속 집단과 비전이나 도덕적 기반도 없고 1945년 - P661

이후에는 자신들의 우월한 지위를 지켜 줄 군사력도 없이 오직 제국적 체제만 물고 늘어진 식민주의자들 간의 상호작용을 경험할 수 있었던 것이다. - P662

사람들은 전쟁이 끝난 뒤에도 전쟁 당시의 이적 여부, 민족문화적 편견혹은 ‘국가‘ 영토의 재편성에 따라 각국 정부에 의해 추방되거나 이곳저곳으로 옮겨 다녔다. - P66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1-12

같은 이름으로 취급되는 걸 거부하는 페트라.

I‘m no aberration. If I‘m going to be purged, I‘m going to give them a piece of my mind on my way out. I unclench my jaw and open my mouth to speak- - P81

I refuse to accept thatthey want to name us all "Zeta." So, maybe just for me, in that moment I decide to come up with my own names for us all. - P82

When I was little and staying at Lita‘s house, any time there was a thunderstorm or I had a nightmare, I would crawl into her warm bed and she‘d tell me a story to calm me. Her cotton nightgown smelled of flowers and her breath of coffee and cin-namon. But the pod bed is cold and smells of disinfectant. - P87

Lita made it no secret she thought our world‘s leaders needed to swallow their pride and figure out their differences. But inthe end, even with the comet coming, everyone had been outfor themselves. They didn‘t have much time, but they didn‘t even try to pool resources to build a shelter, or maybe another ship. Everyone worried only about their own. - P8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不觉得。 아닌 것 같아.
有点儿意思。 관심이 좀 가네.
不论天气好不好,我明天都要去旅行。 날씨가 좋든 나쁘든 나는 내일 여행갈거야.
这个想法太幼稚了。 그 생각은 너무 유치해.
不信你试试。 못 믿겠으면 한번 해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手头宽裕: 주머니 사정이 좋다, 금전적으로 여유 있다
手头紧: 수중에 돈이 없다
吃土: 돈이 다 떨어지다
韩币: 한국 돈, 한화
换算: 환산하다
凑: 모으다
零钱: 잔돈
分子: 각자가 낼 몫, 凑分子: 갹출하다, 추렴하다
什么的: 등등
可不是吗: 그렇고 말고요, 그렇죠
遇到: 만나다, 마주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