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올해의 책을 정리했다.


내가 뽑은 책들은 대부분이 역사 분야의 책이고 문학은 단 2권이다.
하지만 그동안을 생각하면 아주 이례적인 일이라고 볼 수 있겠다.


해방 후부터 한국 전쟁 이전까지 한국과 관련된 역사 책들을 계속 읽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알지 못하는 이면의 역사들이 얼마나 많을 것인가 생각하며 늘 관심을 갖게 된다. 원래는 한국 근대사에 관심이 더 많았으나 이제는 이 시기 책에 더 흥미를 갖게 되는데 뒤이은 역사가 탈식민과 이념 전쟁과 맞물려 돌아가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버치 문서와 해방정국>는 또 하나의 해방 후 정국의 키를 알 수 있게 하는 책이었다고 생각한다.
버치 중위는 미군정기 하지 사령관에 의해 발탁되어 조선에 들어와 좌우합작위원회를 이끈 인물이다.
당시 그가 작성한 자료들과 시간 순으로 배치된 기록, 인물에 대한 평가들이 담겨 있다.
강용흘이라는 작가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수확이 있었고(그도 미군정청에서 일했다) 1946년 쌀 추수 파동에 대한 실감나는 기록, 여운형과 김규식에 대한 평가 등이 흥미로웠다.



<1923년생 조선인 최영우>는 11월에 읽었던 <희생자의식 민족주의>, 일제 식민사학 비판 총서 7권이었던 <남양과 식민주의>와 궤를 같이 할 것 같다.
<1923년생 조선인 최영우>는 양반 지주의 아들이었으나 전시 상황에 일본군이 되어 연합군 포로 감시를 위해 남방을 향한다. 이 책이 특별한 것은 손자였던 작가가 조부의 행적을 영웅시하거나 미화시키지 않고 최대한 객관적으로 그려내려 노력했다는데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 난 후에도 나는 이전과 마찬가지로 조선인 전범이 받았던 피해, 고통의 측면에 주목했었던 것 같다.
<희생자의식 민족주의>는 제대로 된 소감을 정리하지 못했는데도 불구하고 오래도록 잔상에 남는 책이었다.(재독하고 싶은 책이다) 민족주의는 일국사적 관점에서 이해될 수 없고 앞 세대의 희생자의 경험과 기억은 세습될 때 민족주의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는 주장이다. 작가의 모든 주장에 고개를 끄덕일 수는 없으나 지나친 민족주의 신봉과 숭배 의식은 곱씹어볼 부분이었다고 생각한다.
<남양과 식민주의>는 일본 제국주의의 확장의 전시의 장이 된 남쪽 태평양의 섬들과 도서부 동남아시아를 배경으로 일제가 펼친 남진 정책과 대동아공영권에 대한 이해를 돕는 책이다. 일제가 남진 정책을 생각보다 일찍 염두에 두고 있었다는 것과 내외부의 상황의 추이에 따른 정책의 변화를 확인해볼 수 있다.



통사는 몇 년마다 한 번씩 읽어주는 것이 좋다고 여기는데 읽을 시점이 됐을 무렵 마침 <시민의 한국사>라는 책이 나왔다. 


이 책은 제목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지배층의 관점이 아닌 '아래의 힘'에 주목하여 쓴 역사다. 미국에도 민중사가 있는 것처럼 한국에도 이런 책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는데 늦었지만 이런 통사가 나와주어 참 반갑고 감사하다. 지배층의 학정을 엎고 들고 일어난 이야기가 무수히 많은 한반도의 역사는 어쩌면 민중이 이끌고 간 역사라고 해도 무방할 지 모르겠다.
1, 2권으로 나누어 1권은 전근대편으로 조선 후기 개항 이전까지의 시기를 담고 있고 2권은 근현대편으로 최근 정권까지 범위를 다루었다.
통사의 특성 답게 정치사적 측면에서만이 아니라 경제, 사회, 문화 파트까지 잘 정리되어 있다. 그동안 통사를 읽을 때 정치와 경제가 잘 연결이 되지 않는다고 여겼는데 이 책의 경제 파트는 핵심을 쉽게 정리되어 있으면서도 정치, 사회와 어떻게 연결되는지 보여주어 도움이 많이 되었다. 이 시리즈의 꽃은 역시 2권이다. 보수/수구 정권의 눈치에 은폐되거나 축소된 다양한 시민의 목소리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하버드 C.H.베크 세계사> 시리즈는 하반기 읽기의 핵심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대까지의 세계사를 거시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또 한 시리즈의 책이라고 생각한다(1350년 이전의 역사도 출간되었으면!).

특히 1750년 이후의 세계사를 지역사를 모으고 단순하게 나열만 한 것이 아니라 지구적 관점에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별로 특징을 뽑아내어 잘 정리했다고 느껴진다.
서양 중심의 세계사적 관점에서 탈피하려고 노력한 흔적도 엿보였고 가려져 있던 인종 차별, 노예, 여성, 이주민들의 역사를 다양한 사례로 만날 수 있어 반가웠다.
상반기에 읽었던 위르겐 오스터함멜의 <대변혁>을 읽으면서 미리 예열을 했는지 이 시리즈를 읽을 때 버겁지 않았다.
이 책을 읽으며 내가 부족한 역사 공부의 시기와 장소가 무엇인지 체크해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기에 더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오랑캐의 역사>를 읽으며 내가 그동안 해왔던 책 읽기가 헛된 것이 아니구나를 느꼈다.
한중일 삼국의 역사, 만주족의 역사, 타이완사, 중국의 철학, 일본의 근세 이후의 역사, 합스부르크 제국사, 오스만 제국 등 중동의 역사를 읽었던 것이 이리 도움이 될 줄이야. 결코 이것들이 따로 노는 것이 아니고 다 연결되어 있음을, 역사는 통합되는 것임을 느끼는 것이다.
만약 내가 이런 책들을 과거에 읽지 않았다면 <오랑캐의 역사>를 소화하기 어려웠음에 분명하다. 이 책은 작가님의 블로그를 통해서 읽을 때만 해도 좀 어렵다는 느낌이었는데 막상 이번에 읽게 되었을 때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것만으로 나는 마음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이 책은 그동안 저자가 내부의 역사를 외부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작업을 꾸준히 하면서 진행되어온 결과물과 최근 역사계에서 유럽중심주의에 대한 반성으로 내놓은 결과물들을 결합시킨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오랜동안 이어져온 저자의 노력과 내공이 느껴지는 결과물이었고 그만큼 확장된 시야를 갖게 하는 책이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도 동남아시아사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 느꼈는데 앞으로 보충을 해야 할 것 같다. 저자가 앞으로도 좋은 책을 부디 꾸준히 내주면 좋겠다.



<일제 식민사학 비판 총서>는 총 8권으로 학술연구서로 대중에게는 인기가 없지만 내게는 의미가 있었던 책이다. 모든 시리즈의 책들이 도움이 되었지만 앞서 7권은 이야기했고 1권과 8권을 더 꼽아보았다.(두 권은 저자가 같고 이야기도 이어진다)
일본 역사는 이전까지만 해도 '동양사'라는 개념이 없었고 '본방사', '지나사', '외국사' 등이 혼재되어 있는 상태였다. 그러다 근대 시기 나카 미치요의 주장으로 '동양사', '일본사', '서양사'로 구분되는 계기가 된다.(이 때 조선사는 '일본사'에 포함되어 있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
일본 근대론의 시작은 요시다 쇼인으로부터 시작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유수록'이란 책을 남겼고 자신의 생각을 전파한 제자들을 길러내면서 침략주의를 후대에 전파하였다.
자유민권주의자였다가 황국주의자로 변신한 언론인 도쿠토미 소호도 주목해야 한다. 그는 요시다 쇼인의 평전을 쓰고 황실 중심주의 전통을 알리겠다는 목적으로 출간한 책으로 일본학을 제창했다. 일본학은 일본 국민이 알아야 할 일본에 관한 일체의 학문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와 대립하는 모든 관계에 입장은 이로써 비일본, 반일본적인 것으로 모는 주장이다.
1권에서 메이지 시기의 일본 근대에 주목했다면 8권은 쇼와 시기의 일본에 중심을 두었다. 동방문화학원과 도쿄대학, 교토대학 내 설립된 연구소에서 연구한 동방학이 일제의 식민주의에 어떻게 뒷받침된 이론들을 만들어냈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
일본은 근대화에 성공한 유일한 동아시아 국가라는 '신화'로 자부심을 가지고 있고 주변국도 근대 시기 일본을 부러워하기도 했다. 다행히 최근에는 일본 지식계에서도 자국의 역사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견지한 담론들이 나오고 있지만 일본 뿐 아니라 우리도 일본 식민사학자들의 주장을 제대로 모르거나 아예 거부하거나 그대로 믿거나 하는 것은 아닌지 살펴볼 일이다.


비문학 분야의 책을 읽으면서 균형 맞추기로 문학 책을 읽었다.
문학이 내게 어려운 이유는 물성이 느껴지지 않아서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나는 눈에 그릴 수 있어야 관심을 가지게 되는데 모호하고 추상적인 묘사들이 항상 어렵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어쨌든 여전히 문학이 어려우나 그래도 그 중 얻은 수확이 있어 기쁘다.


올해 국내 소설 중 단연코 TOP인 <이토록 평범한 미래>. 제목부터 내용까지 어디 하나 빈 구석이 없는 책이었다.
3년 간의 코로나를 겪고 나이가 들어가기도 하면서 '평범한 미래'라는 단어 자체의 무게를 느끼게 된다. 우리는 언제 어디에서 죽을 지도 모르는 상황에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그래서 지금 현재, 그리고 먼 훗날이 아닌 바로 앞의 미래를 열심히 살아나가며 별 탈 없는 매일을 우리는 꿈꾸고 소망하게 되는 것 같다.
8편의 단편 소설 어느 편을 펼쳐도 공감과 위로를 얻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소설의 상황과 비슷한 경험을 했다면 과거의 기억이 소환되며 추억에 젖기도 할 것이다.
회의주의자인 내가 조금은 희망적인 미래를 그릴 수 있었다고 해야 할까. 이 책은 정말 마법 같은 책이다.



덴마크 작가 토베 디틀레우센의 내밀한 기록을 만날 수 있는 <코펜하겐 삼부작>.

과연 내가 해외 문학 작품을 읽으며 좋다고 느낄 때가 올까 생각했는데 있었다. 이 책은 작가의 삶이 반영되었으니 에세이라고 해야 맞겠지.
토베의 삶을 들여다보면서 어린 시절의 내가 자주 맞닥뜨렸던 공포와 불안, 좌절의 기억이 떠올라 어떨 때는 괴롭기도 했다.
불안한 청춘, 어딘가에도 기댈 수 없는 바람처럼 떠도는 유령 같은 자아가 그려졌다. 나도 그랬고 그도 그랬다.
그의 삶을 알고 있으면서도 책을 읽으며 응원하는 마음으로 읽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그의 글은 그만큼 나를 흔들어놓았던 것 같다.


작년 연말 올해 읽기로 했던 책들을 보니 거의 다 clear하였다(역시 계획은 중요!).

어쨌든 한 해동안 꾸준히 책을 읽고 정리하려고 노력했던 것 같다. 그동안은 책을 읽기는 했어도 제대로 정리한 책이 많지 않아 대부분 뇌에서 휘발되버리고 말았다. 그렇다 해도 역사에 관련된 책은 1년에 단 몇 권이라도 이전부터 읽어왔었다.

대부분 그렇겠지만 나도 책 선정에 고심하는 편이다.
내가 주로 읽는 책은 역사/문화 분야인데 눈여겨보는 출판사에서 신간이 출간되었을 때 받는 알림 중 괜찮은 책을 고르거나 집에 묵혀둔 책 중 '이제 더는 미루지 말자'라고 생각하는 책들 중에서 선정하는 편이다.
내년에도 이렇게 비슷하게 갈 것 같지만 그동안 집에 쌓인 책들이 많아서 아무래도 후자에 좀 더 치중하자고 다짐한다.
테마는 중국사와 동남아시아사가 될 것 같다. 그동안 읽어둔 게 너무 없어서 한계를 느꼈기에 이쪽 읽기에 집중하게 될 것 같다.



댓글(15) 먼댓글(0) 좋아요(4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락방 2022-12-27 18:2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와 거리의화가 님! 어쩌면 이렇게 제가 읽은 책이 한 권도 없을까요? 하하하하하
올해도 열심히 읽으셨네요. 우리 내년에도 열심히 읽읍시다!!

잠자냥 2022-12-27 22:09   좋아요 3 | URL
저도요! 하하하;;

프레이야 2022-12-27 18:5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화가 님 역사 읽기를 언제 따라가보나 합니다.
페이퍼 따라 쫓아갈 날이 ;;) 그나마 딱 한 권 겹쳐서 다행이에요. 내년에도 영양가 높고 고급진 페이퍼 부탁드려요. 😊

단발머리 2022-12-27 19:3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희생자의식 민족주의> 저도 인상깊게 봤는데 (대출해서 읽느라 완독 못 했음요. 뜬금 없는 고백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거리의 화가님 올해의 책이라니 내년에는 꼭 완독하렵니다. 많이 읽으셨어요, 멋지십니다!
역사 관련해 책 읽고 싶으면 무조건 거리의 화가님 방으로 와야겠어요!!

라로 2022-12-27 20:2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딱 한 권 겹치는데 저는 아직 다 안 읽었어요. 빌레뜨 2 방금 다 읽었으니 내일 김연수 책 다 읽겠어요!!ㅎㅎㅎ

책읽는나무 2022-12-27 22:0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
화가님 서재에서 많이 봐서 책 제목들이 눈에 익숙합니다^^
다 좋은 책이었군요!!
김연수 작가님 책은 소설가 50 인이 뽑은 1 위의 책이라고 오늘 유튭에서 보았어요.
저는 사다놓기만하고...^^;;;
암튼 계획한 책들을 모두 다 완독하셨다니 전 그게 더 대단하시단 생각이 드네요.
장하십니다^^

모나리자 2022-12-27 22: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거의 역사에 관한 책을 꼽으셨군요! 정말 대단하십니다.^^
역사에 대해서는 타의추종을 불허할 듯합니다.
새해에도 왕성한 독서활동 이어가시길 바랄게요. 거리의화가님.^^

새파랑 2022-12-27 22:1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역시 화가님은 역사 천재~!! 따라갈수가 없습니다~!! 전 역사 책 보면 전공서적 보는 느낌이 들어서 손이 잘 안가더라구요 😅 화가님을 통해 대리만족하고 있습니다 ^^

독서괭 2022-12-27 22:1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화가님 목록 멋지십니다. 특히 계획을 거의 다 실천하셨다니 대단!! 저도 계획을 세우고 독서를 해봐야겠어요.
“오랫동안 이어져온 저자의 노력과 내공”이 느껴지는 결과물 읽으시며 화가님도 오랫동안 이어오신 역사에 대한 관심과 노력을 보답받으신 느낌이^^ 꾸준함에 탄복합니다. 새해에도 많이 읽으세요!

페크pek0501 2022-12-27 22:3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역사에 관한 책을 고를 땐 앞으로 거리의화가 님께 여쭤보고 읽어야겠단 생각이 드는 멋진 페이퍼였습니다!!!

자목련 2022-12-28 08:1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제가 아는 책은 김연수 소설집 하나뿐입니다. 계획대로 실천하는 화가 님, 멋지십니다^^

거리의화가 2022-12-28 10:24   좋아요 7 | 댓글달기 | URL
댓글 달아주신 모든 분들 감사드립니다^^* 저도 서재에서 친구분들의 다양한 책을 만날 수 있어 기쁜 한해를 보냈습니다.
내년에도 열독으로 채우는 한 해가 될 수 있길 기원하며!

수이 2022-12-28 22:2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랑 겹치는 책이 단 한 권도 없는!!! 화가님 만나서 행복한 한 해입니다. 내년에도 잘 부탁드립니다!

희선 2023-01-01 01:5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역사에 관심을 가지고 죽 책을 보셔서 이런저런 걸 아셨겠네요 거리의화가 님 2023년에도 역사와 함께 다른 책도 즐겁게 만나시기 바랍니다


희선

희선 2023-01-08 01: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거리의화가 님 축하합니다 한해 읽은 책에서 좋았던 책 정리해서 그 책 한번 떠올리셨겠습니다


희선
 

1

일본의 안보는 미국의 보장으로 시작
동남아시아, 인도, 아프리카는 제국주의로부터의 독립과 국가의 성립이 동시에 이루어져야 했으므로 난항
라틴 아메리카에서 공산 확산 흐름 방지를 위한 미국의 개입

미국 국방부는 일본과 강화조약을 체결하는 것에 반대하다가 일본 영토에 미군 기지를 계속 보유한다는 조건을 전제로 찬성했다. 실제로 미국은1951년 9월 8일에 조인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으로 오키나와섬에 대한 사법재판권 일체를 보유했다. 오키나와는 117개 미군 기지와 함께 미국의 태평양 방어선 구축에서 핵심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과동시에 체결된 미·일 안보조약에서 일본은 자국 영토에 미군이 주둔하는 것에 동의했다. 하지만 국내 분위기를 고려해서 보수 정치가 요시다 시게루田※ 총리는 당시 미국 정부가 원한 일본군 창설 의무를 조약에 포함하기를 거부했다. 반면에 미국도 일본이 침략을 받을 때 일본을 방어할 의무를 공식적으로 확인하지는 않았다.
요시다는 미국 교섭자들에게 5만 명 규모의 일본군을 창설하는 것에 동의한다고 내밀히 말했다. 하지만 ‘자위대‘를 창설하는 법안이 1954년 3월에의회에서 다수의 지지를 얻을 때까지는 시간이 조금 걸렸다. 그 후 불평등한안보 조약을 수정하라는 요구가 거세졌다. 협상의 진통 끝에 1960년 1월 21일에 수정 안보조약이 탄생했다. 그에 따르면 미국은 일본에 군대를 계속 주둔시키고 기존의 공군기지를 확장할 수 있는 권리를 가졌다. 그 대신에 이제는수정 조약에 군사원조 보장과 상호 자문 의무가 담겼다. 그 외에도 일본은 조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할 권리를 가졌다. - P60

공산주의가 성공을 거둔 곳은 공산주의가 빈농이 빈궁한 삶을 개선하도록 돕고 옛 식민 권력과 결탁한 상류층이 그것을 저지하지 못하는 곳이었다. 냉전으로 인해 미국은 그들의 반식민 원칙보다 더 강력히 그 대결에휩쓸려 들어가서 태평양 지역의 군사적·경제적 헤게모니를 장악한 열강으로부상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 지역은 대서양 지역과 같은 정치 결속을 갖지 못했다. 일본과 일본의 옛 지배 지역 사이에 반목이 지속되었고, 국가를 형성하는 과정에서도 수많은 문제가 생겼다. 그로 인해 1954년 초에 미국이 ‘공산주의 침략자들‘에게 맞서자며 제안한 군사동맹에는 영연방국가들인 영국과 오스트리아, 뉴질랜드를 빼고는 단지 필리핀과 태국, 파키스탄만이 참여했다.
1954년에 정식 창립된 ‘동남아시아 조약기구Southeast Asia Treaty Organization: SEATO’는 정치적 의미가 거의 없었다 - P65

문제는 다만 인도아대륙의 상이한 지역과 다양한 지방의 행정 통솔권을누구에게 넘겨야 할지가 불분명했다는 사실이었다. 자와할랄 네루JawaharlalNehru 가 이끄는 국민회의는 다양한 민족 집단과 카스트와 종교 공동체를 결속할 하나의 인도 중앙 통합 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파트너를 자청했다. 하지만무함마드 알리 진나Muhammad Ali Jinnah가 이끄는 무슬림 연맹은 이슬람 주민을위한 독자적인 국가(그의 모국어로는 ‘순수한 땅‘이라는 의미의 ‘파키스탄‘)의 건설을주장했기에 국민회의의 권위는 도전받았다. 아마도 진나는 느슨한 형태의 인도 국가연합의 틀에서 이슬람 주와 힌두 주들이 서로 동등한 권리를 향유하는 방식을 꾀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 구상은 국민회의의 단일 전체 국가 건설 계획과는 합치할 수 없었다. 그 결과 인도에서 독립은 실상 분단을 대가로 달성될 수 밖에 없었다. - P66

1947년 3월에 영국 노동당 정부는 루이스 마운트배튼Louis Mountbatten 경을인도 총독으로 임명해 파견하면서 1948년 8월까지 인도 독립을 완수하라는임무를 맡겼다. 진나가 통합 국가 방안을 지지하도록 만들려는 시도가 실패로 끝나자, 마운트배튼은 종교적 기준에 따른 분단을 결정했다. 그것은 진나의 파키스탄을 북동부의 펀자브와 남동부의 벵골 지역 전체로 확대하지 않고 다만 이슬람 신자가 다수를 차지하는 지역으로 한정하는 것을 뜻했다. 펀자브의 비옥한 동부 지역과 대도시 캘커타Calcutta (콜카타)는 인도 영토로 남았다. 소요와 무정부상태를 막기 위해 마운트배튼은 계획을 서둘러 실천했다.
1947년 6월 3일에 관련 협정이 체결되었고, 1947년 8월 15일에 인도와 파키스탄은 독립국가로 선포되었다. - P67

유럽 열강은 근동과 중동에서 아랍 민족주의의 등장과 대면해야 했다.
아랍 민족주의의 발전 배경은 근대적 중간층의 성장이었다. 아랍 민족주의는제국주의자들에게 종속되는 것에 대항했을 뿐만 아니라, 유럽인들이 그 지역을 장악할 때 협력했던 전근대 지배 엘리트들에게도 각을 세웠다. 그렇기에유럽인들은 공식적으로 독립을 승인한 것을 빼면 경제 부문과 군사 부문에서 어떤 영향력도 발휘하지 못했다. 유럽인들이 권력을 상실한 것은 종종 일어난 내부 봉기와 소요에서 비롯된 결과였다.
아랍 민족주의의 발전은 기본적으로 팔레스타인의 갈등으로 가속화되었다. 그것은 1917년 11월에 영국이 그 지역에서 ‘유대 민족을 위한 국가 거주지건설‘을 지원하겠다고 약속한 것으로 말미암아 촉발되었다. - P69

신속한 탈식민화를 위해 지불해야 했던 대가는 경제 침체와 억압 부활의악순환이었다. 그 신생국들에서 경제 발전이 자립적으로 이루어지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무역과 광업과 공업을 장악했던 유럽 회사들과 지역 금권정치가들 사이의 비열한 동맹이 더 일반적인 양상이었다. 원주민들이 생산성 진보를 전혀 경험하지 못했던 곳인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는 장기적으로 그 어떤 발전 전망도 없는 ‘제4세계‘로 전락했다. - P80

미국은 카스트로를 무너뜨리기는커녕 오히려 그의 입지를 더 강화했다. 여러 남미 국가에서는 쿠바 혁명을 본받아 혁명 투사들이게릴라 투쟁으로 넘어갔다. 미국의 대게릴라 작전 전문가에게 배우고 미국의 군사 지원금에서 재정 지원을 받기도 한 경찰과 군부대들이 게릴라들을패퇴시켰다. 그렇다고 위협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미국은 유럽 제국주의가 몰락한 후 그것을 대신해 제국주의 세계열강이 되었다는 비난을 들었다. - P8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 국가와 권력관계의 변화

ing

세계 전역의많은 관찰자가 주장하듯이 ‘미국의 세기‘가 끝났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미국의 군사력과 경제력으로 만들어진 세계가 근본적으로 변해 미국이 더는과거와 같은 방식으로는 변화의 동력을 이끌지 못하기 때문일까? 아니면 전략이나 경제와는 무관한 발전들이 인류의 운명을 결정하는 데 더 중요해졌기때문일까? - P17

분명히 이 초국가적인 연계와 사유가 모두 평화나 정의와 일치하지는 않는다. 1945년 이후의 역사는 낯선 사람과 대상에 대한 몰이해, 심지어 자기생각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적대의 무수한 예를 보여 준다. 그럼에도불구하고 이 6권은 (아울러 이 하버드-C.H베크 세계사 시리즈의 다른 책들은) 남성과 여성, 어린이, 그들의 주거 공간, 그리고 동물과 새, 물고기, 식물들이 모두서로 의존하는 존재라는 사실에 관한 자각이 증대했다는 것을 알려 준다. - P19

미국은 채권국이자 전쟁 물자 공급국이라는 역할을 활용해 미국 상품을위한 새로운 시장과 미국의 영향력이 미칠 새로운 영역의 확대라는 목표를 더욱 적극적으로 추진할 수 있었다. - P27

미국과 소련은 경제체제와 정치 질서가 서로 달랐지만, 애초에 구체적인경제 이익의 여러 차원에서는 상호 보완적이었다. 미국은 전쟁 수요에 의한 생산 확대가 끝난 뒤 실업 증가와 경기후퇴를 초래할 과잉생산을 피하기 위해새로운 시장을 개척해야 했다. 반면에 소련은 전쟁으로 인한 파괴의 결과를 - P32

극복하고 전후 주민들의 기대를 소비 상승으로 충족해 주기 위해 더 많은 공업 제품을 공급할 필요가 있었다. - P33

합의를 통해 전후 질서를 만들 수 있는 여지는 계속 활용되지 못했고, 그대신에 냉전이 개시되면서 유럽은 분열되었다. 그것은 우선 매우 특별한 무능력의 결과였다. 공산주의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협력 제안을 신뢰할 수 있도록 만들 줄 몰랐다. 마찬가지로 서구 사회도 그와 같은 협력에 필요한 통찰력을 갖기가 쉽지 않았다. 그로 인해 다음 상황, 즉 쌍방 간의 인지 오류가 발생했다. 양측은 점점 더 상대방을 침략자로 간주하기 시작했다. 아울러 그런 인식이 확산될수록 다음 상황, 즉 적대 세력 간 경쟁 상황에서 항상 발생하는안보 딜레마가 점점 더 강력히 작동했다. 양측은 모두 혹시라도 있을 상대방의 침략에 대한 대책을 강구했다. 그런데 그것은 상대방에 의해 공격 의도를가진 증거로 해석되었고, 계속 또 다른 대책을 필요하게 했다. 이중적 악순환이었고, 그것에서 쉽게 벗어날 수가 없었다. - P37

1947년 3월 12일에 그리스와 터키를 원조하기 위한 기금을 요청하고자 대통령이 의회에서 발표했던 ‘트루먼 독트린‘은 소련과 미국의 갈등을 이제 ‘테러와 압제‘ 대 ‘자유‘ 체제의 세계적 투쟁으로 규정했다. 트루먼은 세계 도처에서 이 자유를 지키는 것이 미국의 사명이라 밝혔다. 이제 국무부 정책 기획관이 된 케넌과 국무 장관조지 C. 마셜George C. Marsall은 유럽 각국을 위한 개별 원조 계획을 하나의 다 - P45

자적 재건 프로그램으로 포괄함으로써 프랑스의 저항을 극복했다. 그것은 동시에 프로그램 참여국의 통합을 위한 길을 열어 주었다. 이제 원조가 다시 수포로 돌아가지 않도록 보장되었을 뿐만 아니라, 프랑스를 비롯한 여러 서유럽국가에 유럽 통합이라는 새로운 형식으로 독일의 부활을 통제할 수 있음을보여 주었다. 1947년 6월 5일에 국무부 장관이 프로그램을 설명한 뒤 그것은 ‘마셜플랜‘으로 알려졌다. 공산주의와 사회주의의 세력이 강한 서유럽 국가에서 마셜 플랜을 관철하기 위해 동유럽 국가들과 소련에도 참여가 제안되었다. 그리하여 이미 시작된 유럽 분열을 다시 돌릴 기회가 (적어도 이론상으로는)생겼다. - P46

서유럽 공산당 지도부는 종전 후 계속 쌓인 사회적 불만을 지지자들이자유롭게 폭발시키도록 내버려 두었다. 그 결과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는1947년과 1948년의 겨울에 대규모 파업 운동이 일었다. 그것은 때로 폭동의양상을 띠었다. 물론 그것은 서유럽에서 미국의 정책 목표가 관철되는 것을저지하기는커녕 오히려 정반대로 촉진했다. 지금까지 소련이 서유럽으로 팽창할 것이라는 미국의 공포를 근거 없다고 무시했던 대다수 서유럽인은 대규모 파업 행동과 이른바 제국주의자들을 겨냥한 전투적 공세를 보면서 서유 - P47

럽 공산당들이 현존 질서의 전복을 획책하고 소련이 유럽 전역을 자기 통제하에 장악하려고 한다는 확신을 얻었다. 그리하여 이제 공산주의자들이 다시 내각에 참여하는 일은 사실상 배제되었다. 공산주의자들은 ‘대항문화‘의게토로 추방당했다. 정치의 무게 추는 뚜렷이 우파로 기울었다. 마셜플랜을통한 재건은 반공주의라는 광범위한 동의를 토대로 수행되었다. - P48

1949년 말에 유럽의 세력균형 체제가 붕괴한 자리에 이렇게 서로 대립하는 두 개의 권력 블록이 만들어졌다. 그 블록은 제2차 세계대전의 두 승전 주역에 의해 지배를 받았고, 유럽은 동반구와 서반구로 나뉘었다. - P51

내전 발발 여부를 결정한 것은 결국 중국 내부의 당파투쟁이었다. - P54

1951년 6월에 중국군과 북한군의 지도부는 휴전협정을 제안했다. 하지만 그것은 상당 기간 별 성과를 내지 못했다. 무엇보다도 스탈린이 동맹국들에 서둘러 양보하지는 말라고 경고했기 때문이다. 미군을 한국에 묶어두는 것은 철저히 스탈린의 이익에 맞았다. 1953년 3월에 스탈린이 사망하자비로소 후임자들은 "가능한 한 빨리 한국에서 평화를 이끌 수 있는 방안을강구했다. - P5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일본제국의 대외 침략과 동방학 변천 - 외무성 관리 ‘동방학’에서 문부성·제국대학 ‘대동아학’까지, 2023 대한민국학술원 우수학술도서 선정도서 일제 식민사학 비판 총서 8
이태진 지음 / 사회평론아카데미 / 2022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일본제국의 역사학은 천황제 파시즘을 키운 온상으로, 그 침략 정책에 가장 큰 희생을 당했던 우리로서는 그 실체 파악에 더 적극적일 필요가 있었다. 그것은 동아시아의 평화공존체제 확립을 위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할 가장 중요한 정지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P12)


일제 식민사학 비판 총서 8권(마지막)은 1권과 이어지는 내용이다. 비판 총서의 시작과 끝을 한 저자의 글로 마무리하는 것이다.

1권에서는 메이지 시대의 '동양사' 개발이 쇼와 시대 도쿠토미 소호를 통해 천황제 황도 파시즘으로 가는 과정을 고찰하였다. 요시다 쇼인의 주변국 선점론은 일본제국의 대외 침략주의에 기반이 되었다.
8권은 쇼와 시대에 외무성이 관리한 동방문화학원 및 산하 도쿄연구소와 교토연구소의 연구, 1939년 문부성 지원으로 도쿄, 교토 두 제국대학 아래 설립된 동양문화연구소, 인문과학연구소의 연구와 연구 성향을 고찰하였다. 그렇기에 시대적으로도 자연스레 이어지고 일본제국의 대외침략에 따라 진행된 개발 연구 변화를 통해 그들이 침략주의 정당성을 찾은 경위도 살펴볼 수 있다.


1911년 중국은 신해혁명으로 청이 무너지고 중화민국이 들어섰다. 그러나 쑨원 정부는 각지의 군벌 세력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고 결국 위안스카이에게 권력이 이양된다. 일본제국은 위안스카이 정부에 압력을 행사해 1915년 1월 「21개조 요구」 를 통해 만주에 대한 일본의 이권을 반영구화하고, 남만주와 동무 내몽골 지역에 대한 특수권리를 인정하도록 만들었다. 이런 배경 속에 동방문화학원은 1920년대 의화단 사건의 결과로 중국에게서 받은 배상금과 「21개조 요구」로 얻어진 수익금을 통해 1929년 외무성 주도로 창설되었다.
동방문화학원은 산하에 도쿄연구소와 교토연구소를 두었으며 대부분의 구성원들이 도쿄제대와 교토제대 출신 교수들이었다.
도쿄제대의 동양문화 연구소와 교토제대의 인문과학 연구소는 중일전쟁 이후 창설되었으며 지금 현재까지도 유지되는 단체이다.

1885년 이후 대일본제국헌법, 교육칙어 반포 등으로 천황제 국가주의가 강화되었으나 국가 신도를 비판하다 제국 대학에서 축출되는 교수들도 생겨나는 등 자유 민권 운동의 붐이 일었다.
그러나 러일 전쟁의 승리 후 일본은 구미 열강과 어깨를 견줄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되었으며 1908년 천황은 「무신조서」를 발표하며 이를 공표하였다.
1912년 호헌운동이 일어나며 정당 정치가 실현되었다. 1차 대전으로 국가주의가 강화되는 듯 했으나 1918년 9월 하라 다카시가 총리로 지명되고 제2차 호헌운동이 일어나며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희망이 보이는 듯했다. 하지만 1921년 11월 하라 다카시가 우익 청년에게 살해되면서 어둠이 드리워졌다.
국제적으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가 천명되고 국제연맹 창설이 이루어지면서 일본 내각도 이에 걸맞는 외교를 지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내부적으로 대외침략 노선과는 갈등이 잠복할 수 밖에 없었다.
1925년 쇼와 시대가 시작되었고 1927년 다나카 기이치 내각이 들어서면서 대외 팽창 성향이 강해졌다. 3차에 걸친 일본의 산둥반도 출병으로 중국과의 대립은 극화되고 일본 내에는 천황제 국가주의(황도주의)가 부상하였으며 청년 군 장교들의 정당 정치 공격이 잇따랐다. 불만이 가득한 일본의 관동군은 단독으로 공격을 감행하였고(만주 사변) 뒤이은 일본의 국제 연맹 탈퇴는 일본 내 정당 정치의 종언을 고하는 것이었다.

황도 지상주의는 그야말로 교육이 낳은 괴물이었다. 동방문화학원은 천황제 국가주의 사조에 걸맞는 교육을 지향하였다. 만주국 건국을 학술적으로 뒷받침하였으며 일만문화협회를 구성함으로써 만주 통치의 영구화를 기했고 몽골 지역의 역사와 지리, 문화를 연구하였다. 이는 일본제국의 서양 세계에 대한 도전과 천황이 지배하는 새로운 동양의 목표를 천명하는 것이었다.

구미 물질문명의 세가 도도하게 세계를 풍미하고 있는 금일 동방 문화의 천명 발양을 도모하는 것은 바로 눈앞의 급무라고 믿는다. 이에 연구에 종사하는 여러 선비가 더욱 연찬의 공을 쌓아 그 업적을 들어 동방 문화의 정화를 세계에 선양하고 그리하여 본 연구소 설립의 목적을 달성하게 하기를 희망한다. - 동방문화학원 개소식 축사 中 (P98)

1930년대 말 동방문화학원의 주요 지도급 학자들이 고령이 되면서 사망하는 경우가 생겼고 재정난이 발생하였다. 또 중국과의 전면전 와중에 일본 정부가 난징에 친일 화평파인 왕징웨이 정부를 세워 전쟁 부담을 줄일 수 있다는 생각이 일본 지식인층의 기대를 높이면서 교토제대는 1939년 문부성 지원을 받는 제국대학 최초의 '동아인문' 관련 연구소로 인문과학연구소를 개설하였다.

우리 인문과학연구소는 신동아의 건설에 도움이 될 만한 인문과학의 종합 연구에 따르는 것을 사명으로 하여 (...) 본 학보가 추구하는 바는 동아의 현상을 밝히고, 또 이에 근거하여 원리 및 정책을 고구함에 있으며, 여러 종류의 지식을 종합하여 여러 연구에 당하여 힘써 (...) 세계사적 전환기에 본 연구소 사명의 일단을 이루는 것을 희망한다. - 1941년 3월 『동아인문학보(저널)』 발간사 中 (P181)

동방문화학원은 근 10년간 존속하면서 제국 일본 정부가 역사학 분야에서 필요로 하는 역할에 충실했다.

도쿄제대는 1941년 11월 동양 문화에 관한 종합적 연구를 목적으로 동양문화연구소를 발족하였다. 교토제대 인문과학연구소와 마찬가지로 문부성 지원으로 제국대학 내에 둔 최초 연구소였다.

지금 대동아공영권의 건설을 도모하여 동양 영원의 평화 기초를 다짐은 우리나라 부동의 방침이므로 이때 특별히 동양 문화를 근본적으로 고구하여 우리 국책의 수행에 이바지함은 실로 긴요한 급무가 되었다. (...) 동아를 중심으로 아세아 대륙 및 남양에 걸쳐 그 문화의 종합적 근본적 연구를 수행함으로써 국운의 진전과 학술의 발전에 공헌하고자 한다. - 1941년 총장의 '설립 이유' 中 (P189)

교토제대 인문과학연구소가 주로 중일전쟁의 점령지를 대상으로 하는 '동아 신질서' 확립 기여를 표방했다면 도쿄제대 동양문화연구소는 '대동아공영권' 확립에 이바지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는 것을 명료하게 드러낸다. 둘은 서로 미묘한 차이가 있었으나 동아학과 대동아학을 주장하며 국가의 대방침인 동남아시아와 태평양 지역을 천황의 지배 영역으로 끌어들이려는 의도를 뒷받침하는 연구를 진행하였다.
인문과학연구소는 '동아'라는 용어를 사용했다면 동양문화연구소는 '동양'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동양'은 1894년 나카 미치요가 역사교과서 체제 회의에서 일본사, 동양사, 서양사 3분으로 나누며 등장하였다. 동양은 천황 지배하의 동아시아 세계를 의미한다. 동아는 일본의 침략전쟁 진행으로 '동양'이란 용어에서 '동방', '동아', '대동아'라는 용어로 파생되었다. 동양문화연구소의 '동양'은 '대동아'와 같은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1890년 교육칙어 반포 이래 교육과정이 바뀌며 역사교육은 3분과 체제로 자리를 잡는다. 1902년 새로운 역사교과서가 중등학교에 배부되는데 이때 조선사는 '일본 역사' 속에 포함되었다. 조선(한국)은 4세기 진구 황후의 '신라 정벌'로 이미 일본에 복속되었다는 내용 등이 포함되어 있다. 일본제국은 1902년 한국의 역사를 일본사에 편입한 뒤 1910년 강제 병합을 단행하였다.

1925년 쇼와 천황이 등극 후 1929년 발행된 교과서에는 '국체의 정화' 곧 군민이 하나가 되는 것을 역사를 통해 깨닫게 하는 것을 제일의 목표로 내세웠다. 역사교과서가 쇼와 천황의 황도주의 정신에 맞추는 추세로서, 바꾸어 말하면 쇼와 천황 자신이 곧 황도주의 선양의 주체가 되고 있다. (P325)
천황 스스로도 12세 동궁 시절부터 신대 지상주의 역사교육을 받으며 황도 지상주의에 빠져 있었다.

청년 장교들을 배출하는 사관학교의 역사교육은 일반 중등 교육보다 황도주의 색채가 더 짙었다고 예상할 수 있다. 해군기관학교에서 발행한 『조칙집』에는 태평양 전쟁 시기에 주요 해전의 함대 사령관에게 작전 명령을 지시하는 칙어가 실려 있다. (P330~331)
① 「일미영 개전에 당하여 연합함대 사령장관에게 내린 칙어」(1941.12.8)
② 「하와이 해전의 전첩을 맞아 연합함대 사령장관에게 내린 칙어」(1941.12.10)
③ 「말레이해협 해전을 앞두고 연합함대 사령장관에게 내린 칙어」(1941.12.12)
④ 「홍콩 공략을 앞두고 지나 파견군 총사령관과 남방군 총사령관에게 내린 칙어」(1941.12.27)
⑤ 「싱가포르 공략을 앞두고 연합함대 사령장관과 남방군 총사령관에게 내린 칙어」(1942.2.16)
⑥ 「동인도제도의 전첩을 맞아 연합함대 사령장관과 남방군 총사령관에게 내린 칙어」(1942.3.10)

③~⑥은 적군을 섬멸하라는 출동 명령의 칙어이다. 메이지, 다이쇼 시대에 천황이 출격 명령을 내린 칙유의 예는 찾아볼 수 없다. 이 칙어는 쇼와 천황이 '대동아전쟁'을 직접 지휘, 통솔하였다는 명백한 증거이다. (P331)

쇼와 천황은 중국 점령으로 확립되는 공간을 '동아'라고 규정하면서 이를 실현하기 위한 조치를 독려하였다. 만주사변은 '동아'라는 공간으로 가는 첫 걸음이었는데 국제연맹이 이에 제동을 걸자 탈퇴를 선언하는 조서에서 일본제국이 목표로 하는 공간에 대한 규정으로 '동아'라는 단어가 등장한다.

1940년 고노에 후미마로 내각이 출범하면서 내놓은 「기본국책요강」에서는 '동아' 대신 '대동아'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황국의 국시는 팔굉일우의 조국(肇國) 의 대정신에 기초하여 세계평화의 확립을 가져오는 것을 근본으로 하여 먼저 황국을 핵심으로 하여 일만지(日滿支)의 강고한 결합을 근간으로 하는 대동아의 신질서를 건설함에 있다. 이를 위해 황국 스스로 속히 신 사태에 즉각 응하는 흔들림 없는 국가 태세를 확립하여 국가의 총력을 동원하여 위 국시 구현에 매진한다. - 「기본국책요강」 中 (P313~314)


일본 안에서도 대외 침략 정책에 대한 비판을 주장한 이들이 소수지만 있었다. 도쿠가와 막부 말기에 근대화 시책을 담당한 관리였던 가쓰 가이슈(1823~1899)와 일본 인류학,민속학,고고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도리이 류조(1870~1953)다.
가쓰 가이슈는 청일 전쟁을 반대하였으며 일본 미래의 국방체제를 방어적인 형태로 가져가야한다고 주장한 인물이다. 그는 친분이 있었던 사카모토 료마나 사이고 다카모리 등 조슈 세력의 국가주의 성향에 찬동하지 않았다.
도리이 류조는 도쿄제대 인류학교실에 근무하면서 국내외 현장 조사에 임할 수 있는 행운을 얻었다. 그는 조사를 통해 일본인과 일본 문화의 근원을 찾는데 전념하였으며, 관부 '동양학' 추구와는 거리를 두었다. 동방문화학원이 출범하면서 연구에 참여하였으나 요대(僚代) 문화 탐구에 열중할 뿐 일만문화협회에는 관여하지 않았다.


제국 일본의 '잘못된' 역사교육은 무려 반세기 이상 동아시아에 여섯 차례나 큰 전쟁을 반복하게 만들었다. 참극의 역사가 잘못된 역사교육에서 비롯한다면 일본 역사학계는 지금이라도 이를 바로잡는 것을 최우선의 과제로 삼아야 마땅하다. 피해국의 역사학도 그 실체 파악에 더 적극적이어야 할 것이다. 지난 세기의 참혹한 동아시아 역사에 대한 바른 규명 없이 21세기 동아시아의 진정한 평화공존체제를 과연 기대할 수 있을까? 한중일 3국 역사학계의 반성과 협력관계가 절실한 사항이다. (P348)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희선 2022-12-26 02: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여덟권 다 보셨군요 이런 책이 있는지도 몰랐네요 거리의화가 님이 보셔서 알았습니다 역사는 제대로 알아야 하는데... 한국이라고 역사를 제대로 알까 싶은 생각도 듭니다 역사학자도 하나가 아니고 여럿으로 나뉘기고 하고 역사를 제대로 알리지 않는 사람도 있더군요 한중일 세 나라가 힘을 합치면 좋겠지만, 역사를 제대로 알려고 하는 건 좀 어려울지도 모르겠네요 아니 언젠가는 그런 일이 있기를 바랍니다


희선

거리의화가 2022-12-26 09:54   좋아요 1 | URL
이 책은 아무래도 학술연구서라 대중역사서처럼 널리 읽힐 수 있는 형태는 아닙니다. 하지만 저는 이런 역사서들을 통해서 통용되는 역사 서술을 보충하고 가감하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지라 계속 이런 책들을 도전하고 있습니다.
일본 제국주의는 한중일 뿐 아니라 아시아 전체에 많은 영향을 끼쳤기 때문에 그들의 역사를 공부할 필요가 더 있는 것 같습니다.
 
에밀리 디킨슨 시 읽기 - 그 녀석은 이 왕관을 만질 수 없어
나희경 번역 및 해설 / 동인(이성모) / 2022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으로 에밀리 디킨슨 시의 세계를 모두 이해했다고 이야기할 수는 없다. 역자의 해설이 덧붙여져 있어서 나처럼 아예 이해하지 못하는 시들을 접근하기에 좋다. 자연의 묘사는 독특했고 고통과 죽음에 대한 작가의 시선에는 동정을 느꼈다. 시인에 대한 스스로의 자부심도 느낄 수가 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cott 2022-12-25 16: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디킨슨의 시는 읽을 때마다 사물과 사람 세계관이 다르게 보입니다 ㅎㅎ
화가님 디킨스 입문 시작!^^

거리의화가 2022-12-26 09:45   좋아요 1 | URL
디킨슨 어떤 시는 전체가 다 아리송한 것도 있는데 어떤 시는 단어 선택이 기막히게 좋은 것들이 있더라구요. 물론 역자의 해설에 도움이 있어 ‘아~‘한 것이지만...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