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장

이들은 기업의 방해, 정부의 보호조치를 억제하고 무제한의 자본주의를 밀어붙이는 다국적기업의 힘, 노동조합의 약화, 제3세계의 빈곤, 엘리트주의적 국제 거버넌스, 지구의 퇴화에 반대하여 압력을 행사했다. 이미 많은 기업이 시위자들의 진노를 감지했다. 나이키가 적절한 사례다. 나이키는 다양한 요소의 세계화 과정에 의존하여 프로농구 선수 마이클 조던 Michael Jordan 을 상표로 제품을 만들어 전 세계에 판매했다. 나이키의 스우시 swoosh‘ 로고는 ‘에어 Air‘ 조던이 경기장에서 보여준 멋진 몸동작과 한 짝을 이루어 전 세계적인 스포츠 열기를 위성통신과광고, 중국에서 급증한 외국인 투자, 아시아의 저렴한 노동력과 결합했고, 조던은 1980년대에 세계 전역에서 우상의 지위에 올랐다. 그러나 동시에 나이키와 여타 신발 회사들이 해외로 생산을 옮기면서 수많은 미국 노동자가 시간당 5.95달러라는 괜찮은 급여의 일자리를 잃었다. 나이키는 인도네시아에서 49달러에서 125달러에 이르는 신발 제품을 만드는 노동자들에게 시간당겨우 14센트를 지불했다. 1990년대 중반 이 초국적 기업은 생활임금을 지불하지 않고 초과 노동을 시키며 노동조합 설립을 방해하고 비인간적인 조건에 처하게 하여 노동자들을 착취했다는 맹렬한 공격을 받았다. - P361

세계경제가 누구는 이롭게 하고 누구는 해롭게 했어도, 지구 전역의 사람들이 희망을 품을 수도 있고 절망할 수도 있지만, 지도자들이 계속해서 경제의 이론과 모델, 결과와 씨름하리라는 것은 분명하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또 그 이후에 그랬듯이, 전문가들과 정치인들은 세계경제의 경제구조와 경제과정, 권력 공유투쟁의 문제, 나아가 도덕성 문제까지 계속해서 논의할 것이다. 사람들과 기업들, 여타 초국적 실체들은 변화와 항의, 성장의 씨앗을 지닌채 국경을 넘나들 것이다. 각 나라는 새로운 계획을 내놓을 것이고 협상을 통해 영원히 팽창할 이윤 체제를 만들기로 합의하여 욕구와 야심을 채울 것이다. 미국은 세계경제에 영향을 미치려 분투하면서도 전성기를 지난 이류의 지위에 굴복하는 징후는 보이지 않았다. 미국 계획의 중심에는 미국을 그 크기와 경제력과 더불어 세계 곳곳에 주입했던 시장의 힘이 있었다. 전후 미국의자유로운 기업 활동이라는 이데올로기와 그 실천은 세계화를 폭발시키는 문을 열었고, 지구 곳곳의 여러 나라와 국민은 세계화를 북돋고 환영할 뿐만 아 - P379

니라 공격하고 맞서 싸우기도 할 것이다. 시장의 힘은 여러 방식으로 변화를가져오고 다양한 결과를 가져왔다. 미국이 풀어놓은 자유로운 기업 활동의힘은 수십억 명의 삶을 부정적으로, 또 긍정적으로 만들었다. - P380

인류는 그 수에 전혀 어울리지 않게, 다른 종의 영향력을 크게 압도하면서 환경과 지구 생태에 지속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할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얼마나오래 그렇게 할지는 분명하지 않다. 먼 훗날 인류세는 하나의 지질 연대로 보기에는 너무 짧은 것으로 드러날지도 모른다. 국제 지질학회는 지금 인류세를그 학문적 개요에서 정식으로 인정하는 문제를 두고 씨름하고 있다. 시간이말해 줄 것이다. 우리 편에서 보면 다행이기도 하고 속박이기도 한데, 인류세는 앞선 지질시대들만큼이나 오래 지속될 수도 있다. - P385

근대사에서 급격히 늘어난 에너지 사용은 우리 시대를 인류 과거의 그 어느 때와도 크게 다른 시대로 만든다. 1850년 이후 대략 100년 동안많은 에너지 사용이 유럽과 북아메리카에, 그리고 정도는 약간 덜하지만 일본에 국한되었다는 사실은 이 지역들이 국제 체제에서 누렸던 정치적 지배와경제적 지배의 배후에 있는 단 하나의 가장 중요한 이유다. 1965년 이후 전체에너지 사용량은 증가율만 미세하게 감소했을 뿐 지속적으로 증가했다. 그러나 확대의 대부분은 유럽과 아메리카 밖에서, 주로 동아시아에서 발생했다. - P394

저렴한 에너지는 인간에게 새로운 지렛대를 제공했다. 그것을 수단으로 인간은 일을 성취했고 더 빠르고멀리 이동했으며 돈을 벌었고, 때로는 의식하지 못한 채 무심코 환경을 변화시켰다. 저렴한 에너지를 이용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누구나 그렇게 했다. - P421

1945년에서 2010년에 이르는 시기는 전 세계 인구사의 절정을 목도했다. 비슷한 기간(인간의 일생)의 어느 시기도 이처럼 독특하지 않았다. 인구 성장이 환경 변화에 늘 중요했다면, 이 몇십 년간에 분명히 중요했어야 한다.
실제로 중요했다. 그러나 언제 어디서나 중요한 것은 아니었으며, 반드시명백하지도 않았다. 서아프리카의 산림 파괴 같은 몇몇 형태의 환경 변화에서는 인구 성장이 주된 역할을 했다. 고래잡이 같은 다른 환경 변화에서 인구성장이 수행한 역할은 아무리 잘 봐주어도 미미하다. 인간사에서 흔히 그렇듯이, 인구 성장은 그 무엇에서도 유일한 원인은 결코 아니었으며 늘 다른 요인들과 공동으로 작동했다.
이주에 대해서도 같은 얘기를 할 수 있다. 1945년 이후 몇십 년 동안 장거리 이주가 늘어났다. 이것 또한 환경의 영향을, 특히 사람들이 한 환경에서 친숙하지 않은 매우 다른 환경으로 이동한 경우에 초래했다. 쌀농사든 목축이든 이들에게 익숙했던 일은 새로운 삶의 터전에서 예상하지 못한 극적인 환경적 영향을 가져올 때가 많았다. - P440

생물다양성 biological diversity(축약형biodiversity)이라는 용어는 1970년대와 1980년대가오기까지는 학계에 일반적으로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이 용어는 1980년대, 특히 저명한 생물학자 에드워드 오즈번 윌슨E.O. Wilson이 워싱턴 D.C.에서이 주제에 관하여 조직한 1986년 회의 이후 학문적으로나 대중적으로 급격하게 널리 유포되었다. 이 회의의 의사록은 『생물 다양성Biodiversity』이라는 적절한 제목을 달고 책으로 출판되어 경보를 울렸다. - P459

우리는 소수의 선호하는 식물 종과 동물 종을 선택하여 단순한 경관 안에서 관리했으며 이러한 경관에 잘 적응하는 다른 소수의 종들(쥐, 사슴, 다람쥐, 비둘기 따위)을 무의식적으로 선택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인간은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러한 경관에 살았던 다른 식물과 조류, 포유류, 곤충, 양서류의 수를 크게 줄이거나 이들을 제거했다. 이 점에서 윤리적질문은 언제나 거의 동일하다. 우리는 인간과 소, 닭, 돼지는 수십억 개체에달하지만 호랑이와 코뿔소, 북극곰은 겨우 몇천 마리에 지나지 않거나 전혀 없는 세상에 만족하는가? - P474

전후 시대에 세계경제의 생태학적 귀결과 사회적 불공평을 목도한 반대자들이 출현했다. 많은 사람이 있지만 두 부류의 비판자를 실례로 들어 보자. 첫째 부류는 생태 경제학이라는 항목으로 분류할 수 있다. 이전이나 지금이나 그 주된 관념은 세계경제가 유한하고 성장하지 않는 지구 생태계 안의 하위 구성 요소라는 것이었다. - P519

마오쩌둥은 자신에게 중요한 정치적 안건에 자원을 제공하는 한에서만 환경에 관심을 가졌다. 중국이 행한 극소수의 환경 규제는 1966년 문화혁명 초기에 "자본주의적이고 훼방을 놓는 수정주의적인 것"으로 선언되고 당연히 버려졌다. 1972~1973년에 가서야 중국 지도부는 환경을 무시했던 것에 회의를 내비쳤다. 주로 스톡홀름에서 열린 제1차 국제 환경회의에 영향을 받은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오늘날까지 환경문제를 통제하려는 중국의 노력은 경제적 관점에서 보면 진정한 대약진인 1980년 이후 몇십 년간의 뜨거운 도시화와 산업화에 압도되었다. 2010년이 되면 중국은 1958년 마오쩌둥이 품었던 무모한 꿈을 크게 뛰어넘어 미국보다 다섯 배나 많은 강철을 생산하게 되었다. 마오쩌둥은 그 경제적 자립 성향과 농민의 집단적 동원 운동 때문에 중국의 환경을 크게 훼손했다. 그러나 무심코 중국의 경제적 발전을 한 세대 정도 늦춤으로써 중국 환경에, 더불어 지구 환경에 미칠 더 큰 영향을 지연시켰다. - P541

20세기 말, 전쟁이 야생 생물에 미치는 영향은 바뀐 것처럼 보인다. 무기는 아주 강력해지고 정확해져서 누구나 최소한의 사냥 기술만지녀도 큰 사냥감을 쉽게 잡을 수 있었다. 1945년 이후 대부분의 전쟁에는 의용군과 게릴라 등 비정규군이 필요했으며, 이들은 병참 장교단이나 보급망에 - P546

전쟁이 끝나면 야생 생물을 사냥해야 할 직접적인 동기는 일부 사라질지 모르지만, 전후에 풍부하게남은 총포와 차량,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새로이 침투한 무법의 문화 때문에 먹을 수 있거나 시장에 내다 팔 수 있는 동물상이 종종 평화의 혜택을 누리지 못했다. 베트남 전쟁은 남부 아프리카의 분쟁처럼 대체로 환경전의 몫이 컸고 식물상과 동물상을 많이 파괴했다. 이것이 냉전과 연결되었든 아니든 세계 전역의 모든 게릴라전에 해당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냉전 이후 시기에 반란과 게릴라전은 다소 감소했지만, 콩고와 소말리아, 라이베리아, 시에라리온,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그 밖의 소수 불운한 나라는 자신들 몫의 비정규전이부수적으로 생물권에 해를 끼치는 것을 보았다. - P547

1998년 이후 일단의 한국인들(그리고 몇몇 외국인)은 두 개의 한국이 다시통일되어 비무장지대의 생태계가 더는 정치적 대결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때가 올 경우를 대비하려 했다. 이들은 통일이 되면 비무장지대에서 그 야생 생 - P548

물이 제거되고 대신 아스팔트와 콘크리트가 뒤덮이지는 않을지 걱정했다. 북한과 남한의 환경 기록을 생각하면 터무니없는 생각이 아니다. 이들이 설립한 단체인 디엠지 포럼DMZ Forum 은 비무장지대를 우연히 생겨난 자연보호 구역에서 계획적인 자연보호 구역으로, 평화 공원으로 전환하자고 제안한다.
옛 철의 장막의 서쪽 끝에서 그랬듯이, 아마도 한국에서는 냉전이 남긴 한 가지 환경 유산이 자연보호 구역의 표식이 될 것이다. - P549

환경 운동이 성공을 거두었음은 의문의 여지가 없지만, 세계경제가 지속적으로 팽창하여 환경보호주의자들이 소중히 여기는 그 모든 것을 위협한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무한한 경제성장과 질주하는 기술의 진보라는 전후시대의 미래상은 비록 도전이 없지는 않으나 여전히 그대로이다.
아마도 현대의 환경보호주의는 인류세의 발전에서 하나의 단계를 대표할 것이다. 수십 년 동안 사람들은 지구의 기본적인 생물지구화학적 순환biogeochemical cycle을 어설프게 건드렸지만, 그 사실을 인지하지는 못했다. 부지불식간에 저지른 이 간섭의 규모가 커짐에 따라 인간이 적어도 몇 가지 점에서는 지구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을 점점 더 많은 사람이 알아챘다. 그이전에는 아니라고 해도, 1950년대가 되면 인간의 활동이 대기 중의 화학작용과 세계 기후처럼 크고 중요한 문제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알아보는 사람들이 비록 적지만 나타났다. 1960년대 이후의 대중적 환경보호 운동은 인간 활동의 규모와 범위를 더 완전하게 인식하는 길을 닦았다. 그 결과로 21세기 초에 과학자들과 기자들은 인류세라는 용어를 쓰기 시작했다. - P567

소련은 자국 영향권 안에서 정치적·문화적 다양성을 거의 용인하지 않았다. 방어선 역할을 하는 동유럽 완충국가들buffer states에 둘러싸인 채, 소련은그 나라들의 정치·경제·군사 업무를 통제했다. 1947년에 체코슬로바키아에서일어난 공산주의 쿠데타는 적극적으로 지원했지만, 1953년 동독, 1956년 형가리,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일어난 봉기와 개혁 운동은 가차 없이 탄압했다. 아울러 소련은 대규모 국내 경찰 기구를 이용해 동유럽에서 언론 자유를 박탈하고 반체제 인사를 수감하며 문화 기관을 직접 통제했다." 표현의 자유가 제한되면서 미술 분야와 문학 분야에서 지하 시장이 활성화되었 - P578

고, 일부 작품은 서방으로 밀반출되었다. 사미즈다트samizdat라 불린 지하 출판물 장르에는 알렉산드르 솔제니친Aleksandr Solzhenitsyn의 『수용소 군도GulagArchipelago』"와 같은 세계적인 문학 작품도 들어 있었다. 반면에 소련은 자국 영향권 밖에서는 국제 평화의 수호자, 세계 소외 계급의 보호자, 그리고 식민주의와 제국주의의 굴레 아래서 고통받는 사람들의 지지자로 보이고 싶어 했다.
이와 대조적으로, 미국은 전후 세계 무대에서 자유와 정의의 수호자, 그리고 민주적 자본주의 이념을 신봉하는 모든 이에게 번영을 약속하는 현대소비자본주의의 본보기를 자임하고 나섰다. 그러나 동시에 반공anticommunism을 명목으로 권위주의 체제를 지원하기도 했는데, 특히 라틴아메리카에서 두드러졌다. 미국은 계속 다른 나라의 내정을 공공연하게 혹은 은밀하게 간섭했다. - P579

문화적 전통주의자들은 대개 문화 혼종화 추세를 막으려했다. 이들은 이방인을 본국의 주류 문화에 동화시키는 데 더 엄격한 요건을요구했을 뿐 아니라 이민 규제를 주장했다. 반면에 세계적으로 문화적 다양성이 확대되어 가는 추세를 영구적이며 돌이킬 수 없는 현대 세계의 고정적 특성으로 인정하고 환영하는 이들도 있었는데, 직접 해외 각지를 다녀 본 사람들이 특히 그러했다. 실제로 20세기 말에 복수의 문화권에서 생활하면서 일하고 소통하는 능력은 개인의 성공에 중요한 자산이 되었다. - P611

소비의 망이 세계 각지에서 점점 더 많은 사람을 더욱 가깝게 만들고 있는데도 수많은 빈민이 여전히 이 세계화된 소비사회 바깥에 남겨져 있다는사실을 알아야 한다. 소비는 불평등, 나아가 차이를 드러내고 심화시켰다. 선진국과 개발도상국 빈민들은 대부분 광고판이나 신문, 텔레비전 화면을 통해명품의 이미지를 접할 수 있지만, 명품을 실제로 접하지는 못했다. 불평등은여전히 남반구와 북반구 사이의 격차와 주로 관련이 있지만, 전적으로 남북격차의 문제만은 아니었다. 세계의 많은 지역, 특히 남반구에서는, 극도의 빈곤과 넘치는 부가 한 지역에 병존했다. 도시 엘리트층은 보편적인 세계 소비자 공동체와 유대를 맺고, 계급 간 불평등으로 인해 가난한 이웃들과 분리되었다.
세계화의 다른 분야들과 마찬가지로, 소비도 소비자들이 시장에서 각자경제적으로, 문화적으로 확고한 선택을 했기 때문에 동질화와 이질화를 모두촉진했다. 주요 인구 밀집 지역의 중간계급과 상층계급 소비자들은 훨씬 폭넓은 상품 선택의 자유를 누렸지만, 이러한 다양성은 세계 주요 도시 어디서나똑같이 누릴 수 있었다. 소비자들은 아랍에미리트의 두바이 몰에서 볼 수 있는 세계 유명 상표들을 미국 미네소타주의 교외 도시 블루밍턴에 있는 몰 오브 아메리카에서도 볼 수 있었다. 21세기가 시작될 무렵, 국적보다는 계급이소비자로서의 경험을 가르는 것처럼 보였다. - P624

1970년대 들어 서구 청년들은 자신들의 삶과 더 직접 연관된 정치 운동에 주력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전환은 정치체제를 바꾸지 못하는 무력함을받아들여서라기보다 전지구적 문제에 대한 지역적·개별적 해결책을 찾으려는 노력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1960년대 말에서 1970년대 초 사이에등장한 운동들(예를 들어 환경 운동, 여성 운동, 게이 운동과 레즈비언 운동 등)은 국적이나 젠더, 인종에 상관없이 개인의 행복에 더 큰 관심을 표명했다. 이 운동들은 보편적으로 적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지역적인 동시에 세계적이었다. 미국과 유럽의 젊은이들은 동반자 관계, 가족, 공동체를 조직하는 대안적 방법을 실험했다. 성인을 위한 대안 노동환경과 어린이를 위한 대안 학습 환경을조성한 이들도 있었다. 이러한 파편화tragmentation는 1960년대 운동의 힘을분산시켰고, 동시에 서유럽과 미국의 사회적·문화적 풍경을 점차 변화시켜 나갔다. - P643

여권운동가들은 20세기 후반 내내 공적 영역에서 여성의 삶이 가시적으로 드러나게 하고, 정치 영역에서 여성의 권리를 명확하게 하고자 투쟁했다.
그녀들은 미국 민권운동에서 많은 활력을 얻었고, 1970년대 초에 인권 의제가 확대되면서 더 큰 힘을 얻었다. 여성들은 전후의 문화적 전환에 이바지하고, 또 그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1945년 이후, 그 어느 때보다 더 많은 여성이가정 밖에서 일하고, 정치과정에 참여하며, 자신의 권리를 지키려고 목소리를높였다. 경제 세계화와 문화 세계화가 차례로 사회가 여성의 역할과 지위를 규정하는 방식에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여성들이 차지하는 사회·정치 공간과그녀들이 이룩한 발전은 각 사회의 지배적 젠더 규범에 따라 크게 달라졌다.
여성의 사회적 지위에 관한 논쟁은 젠더 관계에 깔린 문화적 전제에 기초하고있어서, 20세기에 전 세계에서 일어난 문화적 변화를 둘러싼 논쟁에서 빠질수 없는 부분이 되었다. 여성들은 각자 처한 환경에서 불평등을 극복하려고노력했고, 또한 여성의 권리에 관해 보편적 합의를 이끌어내려 애썼다. - P647

어느 문화에서나 젠더 관계에는 차이가 존재하지만, 차이들의 특성과 정의는 사회적·문화적 맥락에 따라 달라진다. 모한티 등은 서구 페미니스트들이 제3세계 여성이 겪는 불평등을 묘사하는 방식이 제국주의자들이 식민지의 "타자"를 묘사한 방식을 그대로 따라한 것이라고 비판했다.26 서구 페미니스트들은 젠더의 사회적 구성을 정의할권리가 자기들에게 있다고 주장하며, 자신들이 내린 정의를 고정 범주로 제시했다. 그녀들은 여성의 권리 향상을 고정된 서구적 기준에 따라 평가했다. 시몬드 보부아르의 "제2의 성"은 이처럼 서구·비서구 여성 간의 관계에서 똑같이 복제되었다. 비서구 여성은 서구 여성의 "주체에 대한 "타자"였다. 제3세계여성은 "제2의 성"에서 "두 번째"가 되었다.
서구 페미니즘 언어에 정통한 제3세계 페미니스트들은 제3세계 여성과관련한 자신들의 전제에 대해서도 문제를 제기하기 시작했다. 인도 상류층 출신 문학평론가 가야트리 차크라보르티 스피박Gayatri Chakravorty Spivak은 동료들(서구와 비서구 양쪽 모두에게 "제3세계 여성에 대해 충분히 배우고 또 다른 독자층을 개발하려면 그 집단의 거대한 이질성을 제대로 파악해야 하고, 제1세·계 페미니스트들은 더는 ‘여성으로서‘ 특권을 누린다고 느껴서는 안 된다는것을 알아야 한다."라고 경고했다. - P667

종교가 냉전 담론에 널리 영향을 미치면서 현대 세계의 세속화에 관한 핵심 가정을 약화시켰다. 계몽주의 사상에 기반을 둔 세속화 명제를 지지하는사람들은 근대화가 정치와 사회에서 종교의 쇠퇴를 초래했다고 주장했다. 이논리는 종종 역으로, 사회와 정치의 세속화를 근대화의 징표로 여기기도 했다. 근대화와 세속화 사이의 이른바 연쇄는 사회 내 진보 세력이 정치적·공적활동의 세속화를 고집한 반면, 종교 지도자들은 종교가 쇠퇴할지 모른다는두려움 때문에 근대화에 저항하곤 한다는 근대적 사고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었다. - P673

누스바움의 제안은 특수주의를 더 광범위한 보편성의 틀 안에 뿌리내리게 하려는 생각으로 되돌아가게 해 준다. 종교적 다원주의와 가치의 다양성을 더 광범위한 공교육 기획 속에 포함하고, 궁극적으로 국민 정체성에 통합함으로써, 국가는 다양성을 통합 과정의 중심에 놓을 수 있다. 이러한 통합 과정은 국가와 지역 또는 세계 어디서나 궁극적으로 성취하기 어려울지도 모르는 기본적인 인간적 가치와 도덕에 관한 합의를 전제로 한다. 그것은 또한 종교 지도자들과 신자들에게 더 세세한 교리와 관례 대신 인간의 존엄성과 행복이라는 근본 원칙에 주목해달라고 요구한다. 역설적으로 세계 주요 종교의 근본주의 교파들이야말로 이러한 근본 가치들을 망각하고, 그 대신에 다른 종교와 양립할 수 없게 하는 정교한 교리와 규칙, 사회적 관행 체계를 세웠다.345 종교적·문화적 차이를 드러내는 표현의 자유와 언론의 자유를 축소하는 강압적 방법을 쓰지 않고 다원주의를 무력화하려는 이들의 힘을 어떻게억제할지가 21세기에 들어서도 여전히 과제로 남아 있다. - P690

인권의 보편성을 둘러싼 논쟁은 전 세계에서 지역에 따라 다르게 진행되었다. 인권에 관한 특수주의와 보편주의의 입장은 배타적이고 경쟁적이기보다 상호 보완적이었다. 이러한 논쟁은 탈냉전 세계화 시대에 권력과 행위의 담지자로서 국가의 역할을 포기하지는 않지만 국민국가의 지상권에 문제를 제기했다. 그리고 지역과 세계를 연결함으로써 국가 공동체와 국제 공동체들을해체했다. 인권을 둘러싼 논쟁은 새로운 의사소통 수단과 정보 기술의 중요성을 두드러지게 했다. 비록 불완전하고 불균등했지만, 전 세계 인권 활동가들의 관계망을 통해 인권침해에 대한 증언과 시각적 자료들이 널리 알려지면서가해자들에게 대항하는 활동에 전 세계적인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이러한운동은 인권 체제의 의미와 범위에 대한 국제적 합의를 끌어내지 못했다. 반대로, 다양한 집단과 정치적 지지층이 인권을 어떻게 정의할지를 놓고 계속해서 싸우고 있고, 이 집단들은 도덕적 원칙보다 정치적 이해에 따라 움직이곤했다. 21세기를 앞둔 10년 동안 인권에 대한 이해는 어느 때보다도 더 파편화되었다. - P709

1945년이후 세계 문화의 등장과 발전에는 이처럼 구심력과 원심력이 함께 작용했다.
세계 대도시에서 볼 수 있는 세계 문화들에는 동질화와 더불어 이질화가 뚜렷하게 나타났다. 문화적 상호작용을 통해 행동과 권리, 가치의 보편적 기준이 만들어졌다. 동시에 문화적 상호작용은 그러한 가치를 지역에 따라 특수하게 해석할 수도 있음을 드러냈다. 그리고 결국은 문화 교류에 관계하는 사람들이 순응 요구와 차별화 욕구 사이에서 타협했고, 여전히 타협하고 있다.
사람, 물자, 사상의 세계적 교류망이 나날이 촘촘해져 가고 있지만, 21세기로접어드는 전환기의 문화 경관은 그 어느 때보다 더 다면적이었다. - P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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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부 3장

갈등 해결은 상대를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하는 것이라는 것을 빌리 브란트 총리를 통해서 느낀다.

고르바초프가 다른 사회주의 관료들과 달랐던 까닭은?

이라크 전쟁을 벌이고 이슬람 테러의 공포를 조장하면서 오히려 미국의 위신은 추락

중국 공산주의와 소련의 공산주의의 개혁의 차이

달러가 국제 기축 통화가 된 사연

일본은 미국의 이익을 만드는 시장

모잠비크, 필리핀 여성들의 노동, 희생

1969년 10월 28일의 정부 성명에서 브란트는 독일 문제의 타협에 필수적인 중요한 양보를 제안했다. 즉 동독이라는 국가의 존재를 인정하겠다고 말했다. - P121

정치 신참이었던 카터 대통령은 긴장 완화를 계속 추진할 작정이었다. 그러나 그는 어설프게 행동함으로써 오히려 합의를 점점 더어렵게 만들었다. 카터는 전략 군비를 제한하는 정도가 아니라 과감하게 감축하고 싶어 했다. 그 결과 미 국방부는 새 협상안을 마련했지만, 그것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어렵게 달성된 양보안을 다시 미국의 헤게모니 지위에 유리하게 만들었고, 그로 인해 소련 군부가 그것에 맞서는 요구를 제출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동시에 카터는 소련 내의 체제 비판가들에 대한 지지를 과시하듯이 공개적으로 표명했다. 그것은 오히려 체제 비판가들을 더 심하게 탄압하도록 만들었을 뿐이다. 게다가 그런 행동으로 인해 브레즈네프는 카터와직통선을 만들 수가 없었다.
아프리카에서 소련의 팽창 전략이 성공한 것처럼 보이는 상황에서 카터는 안보 보좌관 즈비그뉴 브레진스키zbigniew Brzezinski의 자문을 받아 들여 ‘중국 카드‘를 더 적극적으로 사용하기로 결심했다. 1978년 5월에 카터는 브레진 - P133

스키를 베이징으로 보내 전략 협력과 기술 지원의 가능성을 타진하게 했다.
중국 정부는 미국이 중국과 소련의 국경 분쟁에서 중국을 지지한다는 입장을 표명한 것에 상응해 이전처럼 타이완을 포기하도록 종용하지 않고 미국과관계를 정상화할 의지가 있음을 밝혔다. 10월 중순에 미국과 중국은 공동성명을 통해 외교 관계 채택을 알림으로써 세계 여론을 놀라게 했다. - P134

1983년 봄에 레이건은 소련 지도자들이 "악의 제국"을 이끌고 있다고 말했다." 레이건은 미국이 그에 맞서 "강력함", 즉 군사와 경제와 도덕의 강력함을 재건해야 한다고 밝혔다. 미국은 서구 세계의 지도적 역할을 떠맡아야 하며 나토도 더 강력 - P159

해져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그것이야말로 평화를 보장할 뿐만 아니라 소련을군축으로 강제한다는 것이다. "소련 지도자들은 군사 부문 생산을 더는 크게확대할 수 없다. 그들은 이미 민중을 죽음 직전까지 끌고 갔기 때문이다."55그러니 레이건 정부는 중거리 미사일 협상 합의를 실현할 생각도 전혀 없었고, 전략 군비 협상을 지속하는 일에도 아무 관심이 없었다. 그 대신에 레이건 정부는 소련에 대한 공적 비판과 군비 증강 조치에만 집중했다. - P160

고르바초프는 ‘56’ 세대였다. 그것은 흐루쇼프가 스탈린주의를 공격할 때 사회화되었으며 기본적으로는 마르크스-레닌주의 세계관을 가졌지만 사회주의의 ‘개선‘을 희망했던 당의 관료들을 말한다. 그를 서기장으로 끌어올린 ‘옛 동지‘ 대표자들과 고르바초프의 근본적인 차이는 고르바초프는 이데올로기의 확신에 사로잡혀 소련제국의 불편한 현실을 보지 못하는 오류를 범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 P167

부시는 이슬람주의 테러주의가 초래한 취약성에 대한 전 세계의 공포를 - P201

초열강 미국의 일방주의 헤게모니를 강화하는 근거로 활용하고자 했다. 하지만 그 시도는 다극화 경향만 강화한 채 종쳤다. 미국의 위신은 땅에 떨어졌다. - P202

중국 공산주의의 현대화는 같은 시기에 소련에서 시작된 공산주의 개혁과는 전혀 다른 길을 밟았다. 양자의 발전을 비교하면, 마르크스-레닌주의 정권의 유산을 극복할 때 결정적인 것은 최고 지도자들의 태도라는사실이 명료하다. 결정적인 순간에 덩샤오핑은 고르바초프와는 다른 길을 선택했다. 어떤 선택이 적절했는지의 문제에 관해서는 정치 입장에 따라 서로다른 답이 나올 것이다. 분명한 것은 각 선택은 그에 따르는 대가가 필요했고두 경우 모두 또 다른 선택의 길들이 존재했다는 사실이다. - P206

미국 금융계와 의회의 보수주의자들은 소련의 이탈에 개의치 않았지만, 실제로 미국의 힘과 이익을 구현할 금융거래에 노력을 집중했다. 그들은 브레턴우즈 체제로 미국이 잠재적으로 소모적인 대규모 해외 원조 정책을 그만두어도되리라고 기대하며 달러의 지위를 그 통화 체제의 ‘기축통화‘로 끌어 올렸다. 실제로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비록 각국은 자국 통화를 금에 ‘연동‘(국제통화기금체제 안에서 합의된 환율 패리티 범위로 통화가치를 고정하는 것)해야 했지만, 달러가사실상 환율을 결정했다는 사실이다. 본질적으로 달러는 새로운 금본위가 되었다. 국제 거래는 달러로 이루어졌고, 모든 국가는 자국 통화가치를 달러에 대한 비율로 규정했다.(35달러가 금 1트로이온스로 교환되었다.) 이 체제는 1950년대초 전후 재건 국면이 끝났을 때에야 비로소 제대로 작동되지만, 세계 전역에서 상품과 용역의 값은 달러로 지불되었다. 따라서 다자간 협정 체제의 토대는 달러였다. - P220

지역주의가 세계화의 토대를 흔들었지만, 유럽과 아시아의 위기는 본질적으로 서로 연관되어 있었다. 미국이 세계 전역에서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파괴할 수 있는 세력에 맞서 싸우기 위해 많은 노력과 자금을 투입했기 때문이다. 미국은 두 지역 모두 훗날 미국의 이익과 시장의 이상이 잘 침투할 수있도록 개방해 놓기로 결심했다. 케넌의 말을 빌리면 "동양과 서양의 가장 큰두 산업단지"였던 일본과 서독은 공산주의로부터 구원해야 했다. 두 나라는그렇게 면역력을 갖게 되면 반공 연합의 역내 기반이 될 수 있었다. 이는 또한 일본이 이류 경제의 대우를 받는다는 의미였다. 일본은 미국과 유럽의 시장이 아니라 개발도상국 시장에서 경쟁하게 될 것이었다. 일본 정부의 계획가들이 과학과 선진 기술, 고급품 제조업에 대한 장기 투자를 발판으로 최첨단경제를 수립하려 했다는 사실을 당시 미국인들은 알아차리지 못했다. 둘 다냉전의 안보 위협이라는 그림자 속에서 나타난 달러 부족과 문호 개방 신조가 결합하면서 미국은 일본에 동남아시아로 팽창하라고 압박할 수밖에 없었다. 1930년대와 전쟁시기에 일본이 주장한 대동아공영권의 논거를 생각하면이는 뜻밖의 결과였다. 이로써 미국은 강경한 식민주의 반대자에서 유럽이 아시아에 공식적으로 존재하는 것을 지지하는 나라로, 그리고 중국의 오랜 우방에서 강경한 적으로 돌아섰다. - P241

미국 정부는 일본과 아시아의 다른 동맹국들에 안전한 자원 공급지와 안전한 무역을 제공하기 위해 호찌민이이끄는 민족주의적 공산주의자들의 저항에 맞서 인도차이나의 식민지를 지키려는 프랑스를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결국 미국의 베트남 전쟁은 공산주의에 대항하는 십자군이 되지만, 애초의 목적은 회복 중인 일본을 아시아의 다자간 무역과 금융 체제의 중심 국가로 바꾸어 역내에 안정을 가져오고 일본에 평화를 정착시키며 더 큰 세계 자본주의 체제의 반공산주의 투쟁을 강화하는 것이었다." 미국의 제3세계 개발 정책은 자유기업 체제를 갈망하는 욕구만큼이나 안보에 대한 염려도 반영했다. - P247

경제협력이 불평등한 무역 관계와 약탈적인 금융협정, 불충분한 원조와 개발 노력을 시정할 것이었다. 반둥 회의참여국들은 상호 간에 교역을 증진하고 기술 정보를 공유함으로써 세계경제문제를 직접 떠맡겠다고 서약하여 제3세계를 개발도상국들을 위한 다자간경제 운동으로 이끌었다. - P265

자유무역을 비판하는 자들은 여성에 불리한 뿌리 깊은 차별과 남성 지배의 전통이 착취 체제와 결합하여 노동시장을 젠더의 구분선을 따라 분할했음에 주목했다. 이는 실제로 세계화를, 그리고 그 어두운 측면을 강화했다. 동예를 들면 세계 최빈국인 모잠비크 여성들은 농사의 부담을 떠안아 가족을 부양했다. 1994년 이 나라는 국민총생산의 다섯 배에 가까운 54억 달러라는 막대한 채무를 지고 있었다. 세계 금융 체제와 생산 체제로부터 사실상 단절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외국의 원조는 채권자였던 기부자들에게 되돌아갔고, 식량 원조는 전체 주민에게 혜택을 주지 못했다. 그 결과로 1995년 10월에수도 마푸토에서 대규모 기아와 식량 폭동이 발생하여 문제의 심각성이 확연하게 드러났다. 모잠비크 노동력의 거의 절반을 차지한 그 나라의 여성들이이 위기를 정면으로 받아 냈다. 무자비한 세계화로 남성들이 도시와 외국으로 일자리를 찾아 떠났던 반면 여성은 가구주로서 시골에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회적 전통과 환경 때문에 여성이 토지와 대출을 얻을 가능성은 제한되었다. 여성은 남성 친척을 통해서만 땅을 점유할 수 있었고 배타적인 사적 점유가 확대되면서 불모지로 밀려났다. 높은 식량 가격과 저임금, 국가 지원의 축소(낮은 식량 가격과 적절한 교통을 유지하기 위한 보조금의 폐지, 의료보험의 민영화 따위)로 곤경에 처한 여성들은 수도 인근의 작은 농장에서 일하며필사적으로 가족을 부양하려 했다. 구조조정 프로그램은 농촌의 회복으로이어지지 않았고 (특히 모잠비크의 17년에 걸친 내전이 끝난 후에) 대신 일군의 서 - P324

비스에 대한 정부 지출을 제한했다. 그 결과로 여성들은 날마다 단지 일하러가기 위해 먼 길을 힘들게 걸어야 했고 이를 마친 뒤에는 땔감 줍기와 먹을 물긷기 같은 기본적인 허드렛일을 해야 했다. 여성은 수단을 갖지 못했기에 남자보다 훨씬 더 크게 시장에 희생되었다. 가족을 돌보아야 할 책임(아이 양육, 교육, 노인 돌보기)이 여성에 남겨진 상황에서 시장은 토지를 사유화하고 국가의 프로그램을 축소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여성은 건강도 해쳤다. 모잠비크의 여성들은 세계화로 널리 퍼진 노동조건과 선진 공업국이 개발도상국에강요한 자유로운 기업 체제 때문에 뒤처지게 되었다. - P325

높은 실업률과 빈곤에 처한 바탄Bataan주 농촌의 가구들은 딸들(상당수가 젊은 여자로 노동력의 평균 연령은 열일곱 살에서 스물아홉 살 사이였다.)을 수출자유지역에 보내 일하게 했지만, 임금은 마닐라의 공업지대에 비해 적었다. 실제로 여성의 약 40퍼센트가 법정 최저임금보다 낮은 임금을 받고 일했는데,(하찮은 대우를 받는 남성의 급여에 비해도 17퍼센트밖에 되지 않았다.) 여성은 가난을 더 잘 견딜 것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생활 조건과 노동조건으로 보면 흔히 지독하게 과밀했고 비용이 많이 들었으며 위험했다. 여성들은 또한 그들에게 이러한 상황을 바꿀기회를 전혀 주지 않은 가부장적 제도에 직면했다. 욕실을 사용하는 것부터일터로 가는 것까지 모든 움직임은 남성의 규제를 받았다. 그리고 성희롱과판에 박힌 성적 관념이 만연했다. 그래서 수출자유지역의 필리핀 여성들은 세계화와 미국 시장 정책의 세력들과 대면한 다른 많은 사람처럼 경제적으로뒤처졌고 사회적으로 소외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이야기들은 아시아의 성공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고, 나중에 가서야 인류학자와 사회 평론가에 의해 발굴되어 빛을 보게 된다. - P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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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인은 종무식을 하면 한 해가 끝나는구나 생각하게 된다.

올해는 별도로 하지 않고 며칠 전 회식으로 대체한다고 했다.
돈으로 주는 보너스가 있으면 좋겠지만 불황인데 회사가 유지되는 게 어디냐 생각했다.
돈이 아니지만 공짜로 생기는 휴가는 월급쟁이라면 누구나 바라는 일이 아닐까.
직원들 사기를 북돋아주기 위해서겠지만 오늘부터 양일 공짜로 휴가가 생겼다.
사실 돈보다는 왠지 시간을 얻은 느낌이라 개인적으로 더 좋다.

남은 하버드 베크 세계사를 열독하면서 보내려 한다.

추가) 알라딘에서 그제 받은 선물인데 이제야 올린다.

그리고 어제 이 책을 받았다. 내년 1월에 나오지 않고 2023년부터 이 책을 매일 시작할 수 있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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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2-12-29 08:3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꽁짜 휴가 받으셨네요? ^^ 즐겁게 보내시길 바라겠습니다~!!!

거리의화가 2022-12-31 18:17   좋아요 2 | URL
새파랑님 2022년 마지막날 잘 보내고 계신가요?^^; 2틀 연속 아주 잘 놀았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책읽는나무 2022-12-29 08:4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연휴...시간 휴가비를 받으셨네요^^
경기가 어려우니....ㅜㅜ
그래도 알라딘 선물을 다 가지셨어요.
즐거운 연휴 되시길♡

거리의화가 2022-12-31 18:18   좋아요 2 | URL
네. 휴가비 받은 셈이죠^^ 알라딘 선물 4개나 받아서 사실 어떻게 써야 하나 행복한 고민입니다^^;
나무님 2022년이 정말 몇 시간 안남았네요. 잘 보내시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라파엘 2022-12-29 10:0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하버드 베크 세계사는 순서대로 읽고 싶어서 전반부 번역의 완결을 기다리고 있는데, 생각해보니 역사를 역으로 읽어보는 것도 괜찮겠어요. 거리의화가님, 행복한 연휴 보내세요 😊

거리의화가 2022-12-31 18:19   좋아요 2 | URL
전편 번역이 되겠죠? 저도 기다리고는 있습니다만...ㅎㅎ
역순으로 읽는 것도 방법이겠네요ㅎㅎ 우리와 가까운 역사부터 공부하는 거라 생각하면 더 친숙하게 느껴질 것 같기도 합니다. 라파엘님 감사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scott 2022-12-29 10:0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화가님에게 이런 휴일이 생겼으니
화가님 새해까지 맛난거 드시면서 따숩게 독서와 공부
정리의 시간을 ㅎㅎㅎ

저 붉은 색 표지를 보기만해도

미소가 ^^

거리의화가 2022-12-31 18:21   좋아요 1 | URL
연휴는 찰나 같아요! 어제는 산책할 때 바람이 따갑더니 오늘은 그래도 포근하네요. 계속 추워서인지 나가기 싫었지만 생존걷기도 하고 독서도 하면서 보냈습니다.

붉은색 표지라 더 따뜻하게 느껴져요. 스콧님 땡투 잘 받으셨죠?ㅎㅎ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라로 2022-12-29 12:0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공짜 휴가라니요, 그거 다 돈이에요.^^;;
암튼 선물이 두 가지가 왔군요!!
저는 1월 3일에 받을 거라고 문자가 왔는데
오늘 다시 오늘 배송했다고,, 빨리 집에 가고 싶어요.
근데 두 가지가 왔군요!! 축하드려요. 휴가도 받으신 선물도요.^^

거리의화가 2022-12-31 18:22   좋아요 1 | URL
돈이라고 생각못하고 시간만 얻었다고 생각했네요. ㅋㅋ 그쵸. 회사 입장에서는 돈 주는 게 더 힘들 수도...ㅎㅎㅎ
1월 3일 어떤 선물을 받게 되실까 궁금하네요. 라로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mini74 2022-12-30 19:3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남편도 분위기가 그런지 망년회도 많이 줄었다고 좋은데 불안한? ㅎㅎ 오붓하고 즐거운 휴가보내세요 화가님 ~ 올 한 해 감사했습니다 *^^* 내년에도 사이좋게 지내요 화가님 ~

거리의화가 2022-12-31 18:23   좋아요 1 | URL
코로나가 다시 유행이기도 하고 경기도 안 좋아서인지 송년회를 덜하는 분위기인 것 같습니다.
미니님 저야말로 정말 감사했어요. 항상 따뜻하고 정성어린 댓글 주셔서 힘이 많이 됐습니다. 내년에도 잘 부탁드리고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희선 2023-01-01 01:4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거리의화가 님 이틀 잘 쉬셨지요 뜻밖에 쉬는 날이 찾아와서 좋으셨겠습니다 북플 서재 다 되셨군요 축하합니다


희선

거리의화가 2023-01-01 18:20   좋아요 1 | URL
희선님 축하 인사 감사합니다. 잘 쉬었어요^^
 
[eBook] 석류의 씨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3
이디스 워튼 지음, 송은주 옮김 / 휴머니스트 / 2022년 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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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 바깥, 밤의 불확실함과 미스터리 속 어딘가에, 문지방을 서성이는 형체‘ 의심과 불안은 끝없는 개미 지옥을 경험하게 한다는 생각, 차라리 믿고 싶은 대로 믿는 것이 자신의 마음을 괴롭히지 않는 게 아닐까 싶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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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지구적 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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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식민화가 냉전의 틀로 해석되면서 유럽의 블록 형성은 더욱 수월해졌다. 1949년에 유럽에서 만들어진 여러 제도는 애초에는 임시적인 성격을 지녔다. 트루먼 행정부와 미국 여론은 북대서양조약으로 인해 미군이 유럽에서계속 주둔하는 것이 확정되었다고 보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 점령 기간이 끝나면 군대를 철수하게 될 것으로 생각했다. 독일연방공화국Bundesrepublik Deutschland: BRD(이하 서독)의 헌법도 다만 "이행기 동안" 서독에서 국가의 틀을 마련해 "새로운 질서를 부여하는 "기본법"으로 구상되었을 뿐임을 강조했다. 다른 한편 스탈린에게 독일민주공화국DeutscheDemokratische Republik: DDR(이하 동독)은 "평화 지향의 민주 독일로 가는 첫걸음이었지만, 사실은 내키지 않는 방식이었다. 스탈린이 그 신생국가의 지도부에보낸 경축 메시지에 독일 사회주의라고는 일언반구도 없었다.
물론 그 임시 조치들은 곧 굳어졌다. 하지만 유럽 분단이 영속될 위험이생기자마자 곳곳에서 저항이 일었다. 유럽의 블록 형성을 둘러싸고 격렬한 대결이 전개되었다. 그 결말은 1950년대 중반에야 비로소 뚜렷해졌다. - P82

서독의 나토 가입을 막으려는 소련의 노력은 모두 실패로 끝났다. 소련 지도부의 새 권력자 니키타 흐루쇼프Nikita Khrushchev는 유럽 정책을 점차 사통당의 동독 지배를 안정시키는 방향으로 바꾸었다. 1955년 5월 14일에 바르샤바에서 동유럽 블록의 정부 수반들이 "우호와 협력 및 상호 지원 협정"에 서명했을 때 동독 총리도 그 자리에 함께했다. 애초에 동독은 바르샤바 조약에 참관국으로만 참여했지만, 곧 정회원국이 되었다. 흐루쇼프는 1955년 7월의 제네바 정상회담에서 마지막으로 탐색한 뒤 그런 것이 아무 소용없음을 확인하고 동베를린의 한 집회에서 "독일민주공화국의 이익을 희생하면서 독일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으며 "동독의 정치적·사회적 성과를 모두" 없애는 것은 불 - P90

가능하다고 밝혔다. 두 달 뒤인 1955년 9월 20일에 소련은 동독과 상호 관계 조약을 맺었다. 조약은 동독이 내정과 외정의 문제에 대해 "자유롭게 결정"한다고 규정하며 다만 "독일 전체에 미치는 4대 열강 협약에 대해서만 유예를 둔다고 밝혔다. 1956년 초에 동독의 병영 주둔 인민 경찰은 국가 인민군Nationale Volksarmee: NVA으로 바뀌었다. 1956년 1월 28일에 바르샤바 조약국 이사회의 결정에 따라 국가 인민군은 소련 최고사령부 휘하의 바르샤바 조약 군사 기구로 통합되었다. 이제 동쪽의 블록 형성도 완결되었다. - P91

핵전쟁 위협 체제로 인해 동유럽 국가들의 공산당 간부들은 지배를 수월하게 유지했고, 소련은 동맹국들에 대해 계속 손쉽게 헤게모니를 행사할 수 - P92

있었다. 바르샤바 조약은 탄생 때부터 그런 지배 유지의 도구임이 확인되었다. 이때 그것은 외부로부터 오는 위험뿐만 아니라 자기 진영 내부의 해방운동에 대해 더 맞서는 것이었다. 그동안 서구에서 노동운동과 지식인 자본주의 비판가들 사이에서 상당히 먹히던 소련 모델은 헝가리 봉기가 진압되면서매력을 크게 잃었다. 공산주의 지배를 유지하기 위한 폭정은 서유럽의 경제재건 성공과 민주주의의 안정적 발전에 확연히 대비되었다. - P93

1966년 3월 7일에 드골은 대서양 간 통합에 맞서 자신이 추진했던 유럽적 대안이 점차 눈앞에서 멀어지자 나토의 군사 조직에서 프랑스는 탈퇴한다고 선언했다. 프랑스는 대서양 동맹 회원국 지위를 유지했지만, 나토 사령부의통제권에서 자국 군대를 뺐고, 동맹국들에 프랑스 영토에서 군사기지를 철수하라고 요구했다. 동맹국들은 그 요구를 따랐다. 나토 본부는 파리에서 브뤼셀로 옮겼다. 그렇게 함으로써 드골은 핵 열강으로서 프랑스의 독립을 지켰지만, 6개국 정치 공동체는 이제 저 먼 곳으로 날아가 버렸다. 유럽 국가들은 드 - P101

골이 일방적인 공세로 자신들을 함부로 대했다고 간주했고, 그 결과 다시 미국과 협력할 방안을 더욱 강력히 찾아 나갔다. 1967년 말에 잔존 나토 회원국들은 "유연한 대응"이라는 공동 전략을 통과시켰다. - P102

서구 열강과 동유럽 블록 국가 모두 재정적인 이유로 재래식 군비 계획을1950년대 초에 계획했던 규모대로 이행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미국과 소련의지도부는 모두 점차 핵 억지력에 의존했다. 핵폭탄 투입을 경고하면서 재래식군비의 결함을 보충하거나 고비용이 드는 재래식무기고의 감축을 가능하게만들 수 있었다. 물론 핵 억지 체제로 넘어가니 핵무기로 인한 절멸 공포가생겨났다. 그래서 핵무기를 보유한 양대 열강 지도부는 대화를 지속해야 한다 - P106

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데올로기 때문에 생긴 인지 오류와 핵무기 대치 상태에 대한 경험 부족으로 인해 대화가 지속되기는 극히 어려웠고, 그 결과 동서준비관계에서 새로운 긴장이 계속 발생했다. - P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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