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들은 기업의 방해, 정부의 보호조치를 억제하고 무제한의 자본주의를 밀어붙이는 다국적기업의 힘, 노동조합의 약화, 제3세계의 빈곤, 엘리트주의적 국제 거버넌스, 지구의 퇴화에 반대하여 압력을 행사했다. 이미 많은 기업이 시위자들의 진노를 감지했다. 나이키가 적절한 사례다. 나이키는 다양한 요소의 세계화 과정에 의존하여 프로농구 선수 마이클 조던 Michael Jordan 을 상표로 제품을 만들어 전 세계에 판매했다. 나이키의 스우시 swoosh‘ 로고는 ‘에어 Air‘ 조던이 경기장에서 보여준 멋진 몸동작과 한 짝을 이루어 전 세계적인 스포츠 열기를 위성통신과광고, 중국에서 급증한 외국인 투자, 아시아의 저렴한 노동력과 결합했고, 조던은 1980년대에 세계 전역에서 우상의 지위에 올랐다. 그러나 동시에 나이키와 여타 신발 회사들이 해외로 생산을 옮기면서 수많은 미국 노동자가 시간당 5.95달러라는 괜찮은 급여의 일자리를 잃었다. 나이키는 인도네시아에서 49달러에서 125달러에 이르는 신발 제품을 만드는 노동자들에게 시간당겨우 14센트를 지불했다. 1990년대 중반 이 초국적 기업은 생활임금을 지불하지 않고 초과 노동을 시키며 노동조합 설립을 방해하고 비인간적인 조건에 처하게 하여 노동자들을 착취했다는 맹렬한 공격을 받았다. - P361
세계경제가 누구는 이롭게 하고 누구는 해롭게 했어도, 지구 전역의 사람들이 희망을 품을 수도 있고 절망할 수도 있지만, 지도자들이 계속해서 경제의 이론과 모델, 결과와 씨름하리라는 것은 분명하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또 그 이후에 그랬듯이, 전문가들과 정치인들은 세계경제의 경제구조와 경제과정, 권력 공유투쟁의 문제, 나아가 도덕성 문제까지 계속해서 논의할 것이다. 사람들과 기업들, 여타 초국적 실체들은 변화와 항의, 성장의 씨앗을 지닌채 국경을 넘나들 것이다. 각 나라는 새로운 계획을 내놓을 것이고 협상을 통해 영원히 팽창할 이윤 체제를 만들기로 합의하여 욕구와 야심을 채울 것이다. 미국은 세계경제에 영향을 미치려 분투하면서도 전성기를 지난 이류의 지위에 굴복하는 징후는 보이지 않았다. 미국 계획의 중심에는 미국을 그 크기와 경제력과 더불어 세계 곳곳에 주입했던 시장의 힘이 있었다. 전후 미국의자유로운 기업 활동이라는 이데올로기와 그 실천은 세계화를 폭발시키는 문을 열었고, 지구 곳곳의 여러 나라와 국민은 세계화를 북돋고 환영할 뿐만 아 - P379
니라 공격하고 맞서 싸우기도 할 것이다. 시장의 힘은 여러 방식으로 변화를가져오고 다양한 결과를 가져왔다. 미국이 풀어놓은 자유로운 기업 활동의힘은 수십억 명의 삶을 부정적으로, 또 긍정적으로 만들었다. - P380
인류는 그 수에 전혀 어울리지 않게, 다른 종의 영향력을 크게 압도하면서 환경과 지구 생태에 지속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할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얼마나오래 그렇게 할지는 분명하지 않다. 먼 훗날 인류세는 하나의 지질 연대로 보기에는 너무 짧은 것으로 드러날지도 모른다. 국제 지질학회는 지금 인류세를그 학문적 개요에서 정식으로 인정하는 문제를 두고 씨름하고 있다. 시간이말해 줄 것이다. 우리 편에서 보면 다행이기도 하고 속박이기도 한데, 인류세는 앞선 지질시대들만큼이나 오래 지속될 수도 있다. - P385
근대사에서 급격히 늘어난 에너지 사용은 우리 시대를 인류 과거의 그 어느 때와도 크게 다른 시대로 만든다. 1850년 이후 대략 100년 동안많은 에너지 사용이 유럽과 북아메리카에, 그리고 정도는 약간 덜하지만 일본에 국한되었다는 사실은 이 지역들이 국제 체제에서 누렸던 정치적 지배와경제적 지배의 배후에 있는 단 하나의 가장 중요한 이유다. 1965년 이후 전체에너지 사용량은 증가율만 미세하게 감소했을 뿐 지속적으로 증가했다. 그러나 확대의 대부분은 유럽과 아메리카 밖에서, 주로 동아시아에서 발생했다. - P394
저렴한 에너지는 인간에게 새로운 지렛대를 제공했다. 그것을 수단으로 인간은 일을 성취했고 더 빠르고멀리 이동했으며 돈을 벌었고, 때로는 의식하지 못한 채 무심코 환경을 변화시켰다. 저렴한 에너지를 이용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누구나 그렇게 했다. - P421
1945년에서 2010년에 이르는 시기는 전 세계 인구사의 절정을 목도했다. 비슷한 기간(인간의 일생)의 어느 시기도 이처럼 독특하지 않았다. 인구 성장이 환경 변화에 늘 중요했다면, 이 몇십 년간에 분명히 중요했어야 한다. 실제로 중요했다. 그러나 언제 어디서나 중요한 것은 아니었으며, 반드시명백하지도 않았다. 서아프리카의 산림 파괴 같은 몇몇 형태의 환경 변화에서는 인구 성장이 주된 역할을 했다. 고래잡이 같은 다른 환경 변화에서 인구성장이 수행한 역할은 아무리 잘 봐주어도 미미하다. 인간사에서 흔히 그렇듯이, 인구 성장은 그 무엇에서도 유일한 원인은 결코 아니었으며 늘 다른 요인들과 공동으로 작동했다. 이주에 대해서도 같은 얘기를 할 수 있다. 1945년 이후 몇십 년 동안 장거리 이주가 늘어났다. 이것 또한 환경의 영향을, 특히 사람들이 한 환경에서 친숙하지 않은 매우 다른 환경으로 이동한 경우에 초래했다. 쌀농사든 목축이든 이들에게 익숙했던 일은 새로운 삶의 터전에서 예상하지 못한 극적인 환경적 영향을 가져올 때가 많았다. - P440
생물다양성 biological diversity(축약형biodiversity)이라는 용어는 1970년대와 1980년대가오기까지는 학계에 일반적으로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이 용어는 1980년대, 특히 저명한 생물학자 에드워드 오즈번 윌슨E.O. Wilson이 워싱턴 D.C.에서이 주제에 관하여 조직한 1986년 회의 이후 학문적으로나 대중적으로 급격하게 널리 유포되었다. 이 회의의 의사록은 『생물 다양성Biodiversity』이라는 적절한 제목을 달고 책으로 출판되어 경보를 울렸다. - P459
우리는 소수의 선호하는 식물 종과 동물 종을 선택하여 단순한 경관 안에서 관리했으며 이러한 경관에 잘 적응하는 다른 소수의 종들(쥐, 사슴, 다람쥐, 비둘기 따위)을 무의식적으로 선택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인간은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러한 경관에 살았던 다른 식물과 조류, 포유류, 곤충, 양서류의 수를 크게 줄이거나 이들을 제거했다. 이 점에서 윤리적질문은 언제나 거의 동일하다. 우리는 인간과 소, 닭, 돼지는 수십억 개체에달하지만 호랑이와 코뿔소, 북극곰은 겨우 몇천 마리에 지나지 않거나 전혀 없는 세상에 만족하는가? - P474
전후 시대에 세계경제의 생태학적 귀결과 사회적 불공평을 목도한 반대자들이 출현했다. 많은 사람이 있지만 두 부류의 비판자를 실례로 들어 보자. 첫째 부류는 생태 경제학이라는 항목으로 분류할 수 있다. 이전이나 지금이나 그 주된 관념은 세계경제가 유한하고 성장하지 않는 지구 생태계 안의 하위 구성 요소라는 것이었다. - P519
마오쩌둥은 자신에게 중요한 정치적 안건에 자원을 제공하는 한에서만 환경에 관심을 가졌다. 중국이 행한 극소수의 환경 규제는 1966년 문화혁명 초기에 "자본주의적이고 훼방을 놓는 수정주의적인 것"으로 선언되고 당연히 버려졌다. 1972~1973년에 가서야 중국 지도부는 환경을 무시했던 것에 회의를 내비쳤다. 주로 스톡홀름에서 열린 제1차 국제 환경회의에 영향을 받은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오늘날까지 환경문제를 통제하려는 중국의 노력은 경제적 관점에서 보면 진정한 대약진인 1980년 이후 몇십 년간의 뜨거운 도시화와 산업화에 압도되었다. 2010년이 되면 중국은 1958년 마오쩌둥이 품었던 무모한 꿈을 크게 뛰어넘어 미국보다 다섯 배나 많은 강철을 생산하게 되었다. 마오쩌둥은 그 경제적 자립 성향과 농민의 집단적 동원 운동 때문에 중국의 환경을 크게 훼손했다. 그러나 무심코 중국의 경제적 발전을 한 세대 정도 늦춤으로써 중국 환경에, 더불어 지구 환경에 미칠 더 큰 영향을 지연시켰다. - P541
20세기 말, 전쟁이 야생 생물에 미치는 영향은 바뀐 것처럼 보인다. 무기는 아주 강력해지고 정확해져서 누구나 최소한의 사냥 기술만지녀도 큰 사냥감을 쉽게 잡을 수 있었다. 1945년 이후 대부분의 전쟁에는 의용군과 게릴라 등 비정규군이 필요했으며, 이들은 병참 장교단이나 보급망에 - P546
전쟁이 끝나면 야생 생물을 사냥해야 할 직접적인 동기는 일부 사라질지 모르지만, 전후에 풍부하게남은 총포와 차량,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새로이 침투한 무법의 문화 때문에 먹을 수 있거나 시장에 내다 팔 수 있는 동물상이 종종 평화의 혜택을 누리지 못했다. 베트남 전쟁은 남부 아프리카의 분쟁처럼 대체로 환경전의 몫이 컸고 식물상과 동물상을 많이 파괴했다. 이것이 냉전과 연결되었든 아니든 세계 전역의 모든 게릴라전에 해당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냉전 이후 시기에 반란과 게릴라전은 다소 감소했지만, 콩고와 소말리아, 라이베리아, 시에라리온,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그 밖의 소수 불운한 나라는 자신들 몫의 비정규전이부수적으로 생물권에 해를 끼치는 것을 보았다. - P547
1998년 이후 일단의 한국인들(그리고 몇몇 외국인)은 두 개의 한국이 다시통일되어 비무장지대의 생태계가 더는 정치적 대결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때가 올 경우를 대비하려 했다. 이들은 통일이 되면 비무장지대에서 그 야생 생 - P548
물이 제거되고 대신 아스팔트와 콘크리트가 뒤덮이지는 않을지 걱정했다. 북한과 남한의 환경 기록을 생각하면 터무니없는 생각이 아니다. 이들이 설립한 단체인 디엠지 포럼DMZ Forum 은 비무장지대를 우연히 생겨난 자연보호 구역에서 계획적인 자연보호 구역으로, 평화 공원으로 전환하자고 제안한다. 옛 철의 장막의 서쪽 끝에서 그랬듯이, 아마도 한국에서는 냉전이 남긴 한 가지 환경 유산이 자연보호 구역의 표식이 될 것이다. - P549
환경 운동이 성공을 거두었음은 의문의 여지가 없지만, 세계경제가 지속적으로 팽창하여 환경보호주의자들이 소중히 여기는 그 모든 것을 위협한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무한한 경제성장과 질주하는 기술의 진보라는 전후시대의 미래상은 비록 도전이 없지는 않으나 여전히 그대로이다. 아마도 현대의 환경보호주의는 인류세의 발전에서 하나의 단계를 대표할 것이다. 수십 년 동안 사람들은 지구의 기본적인 생물지구화학적 순환biogeochemical cycle을 어설프게 건드렸지만, 그 사실을 인지하지는 못했다. 부지불식간에 저지른 이 간섭의 규모가 커짐에 따라 인간이 적어도 몇 가지 점에서는 지구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을 점점 더 많은 사람이 알아챘다. 그이전에는 아니라고 해도, 1950년대가 되면 인간의 활동이 대기 중의 화학작용과 세계 기후처럼 크고 중요한 문제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알아보는 사람들이 비록 적지만 나타났다. 1960년대 이후의 대중적 환경보호 운동은 인간 활동의 규모와 범위를 더 완전하게 인식하는 길을 닦았다. 그 결과로 21세기 초에 과학자들과 기자들은 인류세라는 용어를 쓰기 시작했다. - P567
소련은 자국 영향권 안에서 정치적·문화적 다양성을 거의 용인하지 않았다. 방어선 역할을 하는 동유럽 완충국가들buffer states에 둘러싸인 채, 소련은그 나라들의 정치·경제·군사 업무를 통제했다. 1947년에 체코슬로바키아에서일어난 공산주의 쿠데타는 적극적으로 지원했지만, 1953년 동독, 1956년 형가리,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일어난 봉기와 개혁 운동은 가차 없이 탄압했다. 아울러 소련은 대규모 국내 경찰 기구를 이용해 동유럽에서 언론 자유를 박탈하고 반체제 인사를 수감하며 문화 기관을 직접 통제했다." 표현의 자유가 제한되면서 미술 분야와 문학 분야에서 지하 시장이 활성화되었 - P578
고, 일부 작품은 서방으로 밀반출되었다. 사미즈다트samizdat라 불린 지하 출판물 장르에는 알렉산드르 솔제니친Aleksandr Solzhenitsyn의 『수용소 군도GulagArchipelago』"와 같은 세계적인 문학 작품도 들어 있었다. 반면에 소련은 자국 영향권 밖에서는 국제 평화의 수호자, 세계 소외 계급의 보호자, 그리고 식민주의와 제국주의의 굴레 아래서 고통받는 사람들의 지지자로 보이고 싶어 했다. 이와 대조적으로, 미국은 전후 세계 무대에서 자유와 정의의 수호자, 그리고 민주적 자본주의 이념을 신봉하는 모든 이에게 번영을 약속하는 현대소비자본주의의 본보기를 자임하고 나섰다. 그러나 동시에 반공anticommunism을 명목으로 권위주의 체제를 지원하기도 했는데, 특히 라틴아메리카에서 두드러졌다. 미국은 계속 다른 나라의 내정을 공공연하게 혹은 은밀하게 간섭했다. - P579
문화적 전통주의자들은 대개 문화 혼종화 추세를 막으려했다. 이들은 이방인을 본국의 주류 문화에 동화시키는 데 더 엄격한 요건을요구했을 뿐 아니라 이민 규제를 주장했다. 반면에 세계적으로 문화적 다양성이 확대되어 가는 추세를 영구적이며 돌이킬 수 없는 현대 세계의 고정적 특성으로 인정하고 환영하는 이들도 있었는데, 직접 해외 각지를 다녀 본 사람들이 특히 그러했다. 실제로 20세기 말에 복수의 문화권에서 생활하면서 일하고 소통하는 능력은 개인의 성공에 중요한 자산이 되었다. - P611
소비의 망이 세계 각지에서 점점 더 많은 사람을 더욱 가깝게 만들고 있는데도 수많은 빈민이 여전히 이 세계화된 소비사회 바깥에 남겨져 있다는사실을 알아야 한다. 소비는 불평등, 나아가 차이를 드러내고 심화시켰다. 선진국과 개발도상국 빈민들은 대부분 광고판이나 신문, 텔레비전 화면을 통해명품의 이미지를 접할 수 있지만, 명품을 실제로 접하지는 못했다. 불평등은여전히 남반구와 북반구 사이의 격차와 주로 관련이 있지만, 전적으로 남북격차의 문제만은 아니었다. 세계의 많은 지역, 특히 남반구에서는, 극도의 빈곤과 넘치는 부가 한 지역에 병존했다. 도시 엘리트층은 보편적인 세계 소비자 공동체와 유대를 맺고, 계급 간 불평등으로 인해 가난한 이웃들과 분리되었다. 세계화의 다른 분야들과 마찬가지로, 소비도 소비자들이 시장에서 각자경제적으로, 문화적으로 확고한 선택을 했기 때문에 동질화와 이질화를 모두촉진했다. 주요 인구 밀집 지역의 중간계급과 상층계급 소비자들은 훨씬 폭넓은 상품 선택의 자유를 누렸지만, 이러한 다양성은 세계 주요 도시 어디서나똑같이 누릴 수 있었다. 소비자들은 아랍에미리트의 두바이 몰에서 볼 수 있는 세계 유명 상표들을 미국 미네소타주의 교외 도시 블루밍턴에 있는 몰 오브 아메리카에서도 볼 수 있었다. 21세기가 시작될 무렵, 국적보다는 계급이소비자로서의 경험을 가르는 것처럼 보였다. - P624
1970년대 들어 서구 청년들은 자신들의 삶과 더 직접 연관된 정치 운동에 주력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전환은 정치체제를 바꾸지 못하는 무력함을받아들여서라기보다 전지구적 문제에 대한 지역적·개별적 해결책을 찾으려는 노력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1960년대 말에서 1970년대 초 사이에등장한 운동들(예를 들어 환경 운동, 여성 운동, 게이 운동과 레즈비언 운동 등)은 국적이나 젠더, 인종에 상관없이 개인의 행복에 더 큰 관심을 표명했다. 이 운동들은 보편적으로 적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지역적인 동시에 세계적이었다. 미국과 유럽의 젊은이들은 동반자 관계, 가족, 공동체를 조직하는 대안적 방법을 실험했다. 성인을 위한 대안 노동환경과 어린이를 위한 대안 학습 환경을조성한 이들도 있었다. 이러한 파편화tragmentation는 1960년대 운동의 힘을분산시켰고, 동시에 서유럽과 미국의 사회적·문화적 풍경을 점차 변화시켜 나갔다. - P643
여권운동가들은 20세기 후반 내내 공적 영역에서 여성의 삶이 가시적으로 드러나게 하고, 정치 영역에서 여성의 권리를 명확하게 하고자 투쟁했다. 그녀들은 미국 민권운동에서 많은 활력을 얻었고, 1970년대 초에 인권 의제가 확대되면서 더 큰 힘을 얻었다. 여성들은 전후의 문화적 전환에 이바지하고, 또 그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1945년 이후, 그 어느 때보다 더 많은 여성이가정 밖에서 일하고, 정치과정에 참여하며, 자신의 권리를 지키려고 목소리를높였다. 경제 세계화와 문화 세계화가 차례로 사회가 여성의 역할과 지위를 규정하는 방식에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여성들이 차지하는 사회·정치 공간과그녀들이 이룩한 발전은 각 사회의 지배적 젠더 규범에 따라 크게 달라졌다. 여성의 사회적 지위에 관한 논쟁은 젠더 관계에 깔린 문화적 전제에 기초하고있어서, 20세기에 전 세계에서 일어난 문화적 변화를 둘러싼 논쟁에서 빠질수 없는 부분이 되었다. 여성들은 각자 처한 환경에서 불평등을 극복하려고노력했고, 또한 여성의 권리에 관해 보편적 합의를 이끌어내려 애썼다. - P647
어느 문화에서나 젠더 관계에는 차이가 존재하지만, 차이들의 특성과 정의는 사회적·문화적 맥락에 따라 달라진다. 모한티 등은 서구 페미니스트들이 제3세계 여성이 겪는 불평등을 묘사하는 방식이 제국주의자들이 식민지의 "타자"를 묘사한 방식을 그대로 따라한 것이라고 비판했다.26 서구 페미니스트들은 젠더의 사회적 구성을 정의할권리가 자기들에게 있다고 주장하며, 자신들이 내린 정의를 고정 범주로 제시했다. 그녀들은 여성의 권리 향상을 고정된 서구적 기준에 따라 평가했다. 시몬드 보부아르의 "제2의 성"은 이처럼 서구·비서구 여성 간의 관계에서 똑같이 복제되었다. 비서구 여성은 서구 여성의 "주체에 대한 "타자"였다. 제3세계여성은 "제2의 성"에서 "두 번째"가 되었다. 서구 페미니즘 언어에 정통한 제3세계 페미니스트들은 제3세계 여성과관련한 자신들의 전제에 대해서도 문제를 제기하기 시작했다. 인도 상류층 출신 문학평론가 가야트리 차크라보르티 스피박Gayatri Chakravorty Spivak은 동료들(서구와 비서구 양쪽 모두에게 "제3세계 여성에 대해 충분히 배우고 또 다른 독자층을 개발하려면 그 집단의 거대한 이질성을 제대로 파악해야 하고, 제1세·계 페미니스트들은 더는 ‘여성으로서‘ 특권을 누린다고 느껴서는 안 된다는것을 알아야 한다."라고 경고했다. - P667
종교가 냉전 담론에 널리 영향을 미치면서 현대 세계의 세속화에 관한 핵심 가정을 약화시켰다. 계몽주의 사상에 기반을 둔 세속화 명제를 지지하는사람들은 근대화가 정치와 사회에서 종교의 쇠퇴를 초래했다고 주장했다. 이논리는 종종 역으로, 사회와 정치의 세속화를 근대화의 징표로 여기기도 했다. 근대화와 세속화 사이의 이른바 연쇄는 사회 내 진보 세력이 정치적·공적활동의 세속화를 고집한 반면, 종교 지도자들은 종교가 쇠퇴할지 모른다는두려움 때문에 근대화에 저항하곤 한다는 근대적 사고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었다. - P673
누스바움의 제안은 특수주의를 더 광범위한 보편성의 틀 안에 뿌리내리게 하려는 생각으로 되돌아가게 해 준다. 종교적 다원주의와 가치의 다양성을 더 광범위한 공교육 기획 속에 포함하고, 궁극적으로 국민 정체성에 통합함으로써, 국가는 다양성을 통합 과정의 중심에 놓을 수 있다. 이러한 통합 과정은 국가와 지역 또는 세계 어디서나 궁극적으로 성취하기 어려울지도 모르는 기본적인 인간적 가치와 도덕에 관한 합의를 전제로 한다. 그것은 또한 종교 지도자들과 신자들에게 더 세세한 교리와 관례 대신 인간의 존엄성과 행복이라는 근본 원칙에 주목해달라고 요구한다. 역설적으로 세계 주요 종교의 근본주의 교파들이야말로 이러한 근본 가치들을 망각하고, 그 대신에 다른 종교와 양립할 수 없게 하는 정교한 교리와 규칙, 사회적 관행 체계를 세웠다.345 종교적·문화적 차이를 드러내는 표현의 자유와 언론의 자유를 축소하는 강압적 방법을 쓰지 않고 다원주의를 무력화하려는 이들의 힘을 어떻게억제할지가 21세기에 들어서도 여전히 과제로 남아 있다. - P690
인권의 보편성을 둘러싼 논쟁은 전 세계에서 지역에 따라 다르게 진행되었다. 인권에 관한 특수주의와 보편주의의 입장은 배타적이고 경쟁적이기보다 상호 보완적이었다. 이러한 논쟁은 탈냉전 세계화 시대에 권력과 행위의 담지자로서 국가의 역할을 포기하지는 않지만 국민국가의 지상권에 문제를 제기했다. 그리고 지역과 세계를 연결함으로써 국가 공동체와 국제 공동체들을해체했다. 인권을 둘러싼 논쟁은 새로운 의사소통 수단과 정보 기술의 중요성을 두드러지게 했다. 비록 불완전하고 불균등했지만, 전 세계 인권 활동가들의 관계망을 통해 인권침해에 대한 증언과 시각적 자료들이 널리 알려지면서가해자들에게 대항하는 활동에 전 세계적인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이러한운동은 인권 체제의 의미와 범위에 대한 국제적 합의를 끌어내지 못했다. 반대로, 다양한 집단과 정치적 지지층이 인권을 어떻게 정의할지를 놓고 계속해서 싸우고 있고, 이 집단들은 도덕적 원칙보다 정치적 이해에 따라 움직이곤했다. 21세기를 앞둔 10년 동안 인권에 대한 이해는 어느 때보다도 더 파편화되었다. - P709
1945년이후 세계 문화의 등장과 발전에는 이처럼 구심력과 원심력이 함께 작용했다. 세계 대도시에서 볼 수 있는 세계 문화들에는 동질화와 더불어 이질화가 뚜렷하게 나타났다. 문화적 상호작용을 통해 행동과 권리, 가치의 보편적 기준이 만들어졌다. 동시에 문화적 상호작용은 그러한 가치를 지역에 따라 특수하게 해석할 수도 있음을 드러냈다. 그리고 결국은 문화 교류에 관계하는 사람들이 순응 요구와 차별화 욕구 사이에서 타협했고, 여전히 타협하고 있다. 사람, 물자, 사상의 세계적 교류망이 나날이 촘촘해져 가고 있지만, 21세기로접어드는 전환기의 문화 경관은 그 어느 때보다 더 다면적이었다. - P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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