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은 땅이 넓기 때문에 각지에 정권이 동시에 병립하여 각각의 건국신화를 갖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러한 지역 정권들은 끊임없이 흥망을거듭했기 때문에, 그럴 때마다 신화는 함몰되어 버린다. 어떤 이유에선지함몰을 면한 일부가 세상에 남겨지는 경우도 있었을 것이다. 도요 플신화는 역사를 반영한 부분도 가지고 있지만, 결코 전체를 반영하지는 않는다. 말하자면 단편적인 반영이다. 어떤 의도에 따라 허구로 조작될 수도 있기 때문에 신화에서 역사를 추구한다는 것은 어려운 작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에 비하면, 고고학상의 발견은 극히 구체적인역사 그 자체의 흔적이다. 그러나 흔적은 흔적이기 때문에 그것으로 역사 전체를 재구성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허구로 조작한다고 말했지만, 그 필요성이 제기됐다는 사실 그 자체가 역사를 푸는 중요한 열쇠가 된다. 예를 들어서, 일본의 신화가 기록된것은 국가의 통일이 어느 정도 이뤄져서, 그것을 더욱 강화할 필요를 느낀 시대였음을 알 수 있다. 이미 8세기에 접어든 뒤였기 때문에 허구에의한 조작의 조직성이 높았다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 P13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모든 것을 의심하고 그 실존을 부정했기 때문에
‘말살박사(抹殺博士)‘라고 불렸던 학자들이 일본에 있었다. 중국에도 그런부류의 학자들이 있는데, 그들은 의고파(疑派)라고 불린다. 학문을 하는 자세로서 이것은 평가를 받아도 좋을 것이다.
사마천은 자신의 시대에서조차도 실존인물이라 믿어지지 않았던 황제를 전부 허구라고는 말할 수 없다고 보고, 『사기』의 권두에 그 사실을 적었다. 맹종적이지 않았다는 점에서 사마천의 자세는 일종의 의고파라 할수 있다. - P17

이미 친숙하게 알려진 신들로 가득 차 있는 시대에는 새로운 신을 끼워 넣을 틈이 없다. 억지로 끼워 넣는다 할지라도 이질 분자임을 알 수있기 때문에 그곳으로 녹아들지 못한다. 따라서 하는 수 없이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좀 더 오래된 시대에다 끼워 넣게 된다. 어차피 혼돈스러운시대이기 때문에 그 위로는 얼마든지 섞어 넣을 수 있다.
새로운 신일수록 더 오래된 시대에 들어가게 되는 것을 ‘가상설(加上說)‘이라고 하는데, 의고파인 고힐강(顧頡剛, 1893~1981, 중국 고대사를 전공한북경대학 교수-옮긴이)이 주창했다. 일본에서도 에도(江戸) 시대에 도미나가나카모토(富永仲基, 1715~1746, 고문학 학자-옮긴이)가 같은 설을 주장했다.
새로운 신들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에서 온 신들도 끼어들 자리를 찾고 있었다. 비주류파의 신들은 자칫 오래전 시대에 자리를 부여받았던것은 아니었을까. - P18

신화에 그 편린이 반영되어 있는 역사는 의외로 짧은 기간이었을지도모른다. 신화를 정리할 때 상당 부분을 크게 늘렸을 것이다.
예를 들어, 복희와 여왜가 부부신임에도 불구하고 복희 다음이 여왜였다는 계보를 만들면 그 만큼 기간이 길어진다. 비주류의 신이지만, 가상설에 의해서 태고로 끌어올려진 삼황은 그나마 행복한 편이라고 할 수있다. 공공처럼 신화의 바다를 오랫동안 표류해야 했던 신도 있었으니.
아마도 삼황은 조용했기 때문에 계보에 들어가는 일을 인정받았을 것이다. 난폭한 존재는 방황하는 신이 되어 버리는 것 같다. 사실은 그런신들이 더 윤곽이 뚜렷해서 우리에게는 재미있게 여겨지지만. - P30

세습제도가 시작되었기 때문에 선양을 이상화할 필요가 생겼을 것이다.
세습은 사유재산이 늘어났기에 필요해진 것이다. 그 이전까지의 씨족공동체 안에서의 생활은 사유재산에 의지할 필요가 없었다. 반파유적에 - P60

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거주지 중앙에 집회소가 있어서 대부분의 일을거기서 해결할 수 있었다. 그다지 어려운 문제는 없었을 것이다. 홍수나가뭄 등과 같은 자연재해와 다른 부족의 공격 외에는 문제다운 문제는없었을 것이다.
제사를 주재하고 파종이나 수확 시기를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이 제왕의 주요한 일이었다. 황제 신화에서 그 편린을 엿볼 수 있는데, 부족은지역적으로 연합을 하게 되었고, 부족연합의 대수장이 제왕이라 불렸다.
그리고 각지의 수장이 바로 제후였다.
부족의 연합은 다른 부족과 전쟁할 때 강력한 군대를 만들기 위해 필요했을 뿐만 아니라, 대규모의 치수공사를 할 때도 역시 수많은 인력을모을 필요가 있었기에 형성된 것이다.
대수장은 커다란 힘을 모을 수 있었으며 그것을 지휘할 수 있었다. 사유재산은 틀림없이 그런 힘을 가진 대수장 주변에서 생겨났을 것이다. - P61

요가 제위(位)에 있고, 순이 섭정을 할 때
공공을 유릉(幽陵)으로 유배 보내 북적으로 바꾸고,
환두를 숭산(崇山)으로 추방해 남만으로 바꾸고,
삼묘를 삼위(三危)로 옮겨 서융으로 바꾸고,
곤을 우산(羽山)에 극(極, 유패)하여 동이로 바꾸고,
라는 처분을 했다.
북적, 남만, 서융, 동이라는 중국의 ‘사이관(四夷觀)‘이 여기에 나타나있다.
만들어진 이야기라 할지라도 이것은 중요한 사실이다. 적, 만, 융, 이등 중원에서 보면 변경에 있는 각 부족은 처음부터 변경에 있었던 것이아니라 중원에서 추방되어 사방의 변경으로 가게 된 것이라 되어 있다.
이것은 요와 순의 실재, 비실재 문제와는 상관없이 유력한 각 부족이 중원 주변에서 멀리 떨어진 땅으로 옮겼다는 역사적 사실을 솔직하게 반영하고 있는 이야기다. 이 이야기가 언제 만들어진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시대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것은 상식이었다고 여겨진다. - P65

청나라 말기의 개량주의자인 강유위(康有爲, 1856~1927)는 『대동서(大同書)』를 저술했는데, 그것은 점진적으로 태곳적 대동의 세계로 돌아갈 것을 주장한 책이다. 대동이 어떤 시대였는지 『예기』의 「예운편(禮運篇)」에 나타나 있다.
대도가 행해지면 천하를 공(公)으로 삼고, 현(賢)을 뽑고, 능(能)을 존중하고, 신(信)을 익히고, 목(睦)을 닦는다. 오직 자신의 부모만을 부모라 하지 않고, 오직 자신의 자식만을 자식이라 하지 않는다. 노(老)에게는 마칠 곳이 있고, 장(壯)에게는 쓰일 곳이 있고, 유(幼)에게는자랄 곳이 있고, 긍과고독폐질(吟寡孤獨廢疾)인 자를 모두가 돌보는 - P79

곳이 있다. 남자에게는 분(分)이 있고, 여자에게는 귀(歸)가 있다. 화공(貨)는 그것을 땅에 버리기를 싫어하지만, 반드시 자신이 저장하는 것은 아니다. 힘을 그 몸에서 내지 않는 것을 미워하지만 반드시 자신을위해서 하는 것은 아니다. 이런 연고로 모(謀)는 갇혀서 일어나지 않고, 도절난적(盜竊亂賊)은 더욱 일어나지 않는다. 따라서 대문을 잠그지 않으니 이를 대동이라 한다.

세습이 시작된 하(夏) 이전이 대동의 세상이다. 이것을 설명해보면, 대도가 행해지면 ‘천하위공(天下爲公)‘이 된다는 것이다. 천하를 공의 것이라보고 사유화하지 않는다. 현자를 뽑고, 유능한 사람을 존중하여 쓰고,
신을 익히고, 서로 화목하게 지낸다. 따라서 사람들은 자신의 부모만을부모라 여기는 것이 아니다. 누구나 노인을 대할 때는 자신의 부모처럼섬긴다. 그리고 자신의 자식만 귀여워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아이들을자신의 자식처럼 사랑한다. 노인에게 편히 눈 감을 수 있게 하고, 장년에게는 그 힘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도록 하고, 긍(나이 들고 아내 없는 자), 과(나이 들고 남편 없는 자), 고(어리고 부모 없는 자), 독(나이 들고 자식 없는 자), 폐질(장애자) 등은 모두가 돌보게 된다. 남자에게는 직분이 있고, 여자에게는 시집갈 수 있게 한다. 재화를 버리는 것을 좋지 않게 여기지만 반드시 자신의 것으로 삼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사회의 공유 재산이다. 힘을충분히 발휘하지 못하는 것을 좋지 않게 여기지만 그것도 자신을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모략 같은 것은 당연히 일어날 리가 없고,
물건을 훔치는 자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문을 잠글 필요도 없는 것이다.
이것이 대동의 세상이다. - P80

하라는 국호는 우가 처음으로 봉해진 나라의 이름에서 땄다고 한다. 그 후 전국적(全國的)인 정권은 시조가 처음으로 봉해진 땅의 국명을 국호로 사용하는 것이 관례가 되었다. 상(商, 은), 주, 진(秦), 한, 위, 진(晋), 수, 당, 송 모두이 관례에 따른 것이다. 몽골 정권은 특별히 어디에도 봉해진 적이 없었기 때문에 지명이 아니라 추상적인 가명(名)을 골라서 원(元)‘이라고 명명했다. 원에 의해서 하 이후의 전통이 무너진 셈이다. - P102

전승에 의하면 하와 은은 조상이 같지만, 계열이 다른 부족이었을 것이라 여겨진다. 그러나 서로의 생활양식에 커다란 차이가 있었을 것 같지는 않다. 하가 멸망하고 은의 천하가 되었지만 사람들의 생활이 송두리째 뒤바뀌는 일은 없었다.
틀림없이 하는 권력의 자리에 안주하여 수장이나 그 주변의 간부들이 타락했을 것이다. 사람들도 퇴폐했었을지도 모른다. 같은 기반의 생활권 속에서 보다 청신한 기풍을 가진 은이 힘으로 권력을 대신했다. 단절이나 혁신보다 계속이라는 느낌이 더 강했을 것이다.
나중에 이야기하겠지만, 은에서 주로의 교체는 흔히 ‘은주혁명(殷周革命)‘이라 일컬어지듯 커다란 변혁이었다. 그것은 계속이라기보다는 단절이라는 느낌이 더욱 강했다. 그에 비해서 하와 은의 교체는 일종의 사회 발전 선상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 P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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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버드-C.H.베크 세계사 : 1945 이후 - 서로 의존하는 세계 하버드-C.H.베크 세계사
이리에 아키라 책임편집, 이동기 외 옮김 / 민음사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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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이후의 세계는 비록 완전하지는 않지만, 인류의 결속과 분열 사이에 있는 그 간극을 메울 정도로 일련의 상호 연동 관계로 빠져들었다. 1945년 이전에는 변화의 동력이 주로 서구에서 발전한 근대 기술과 이데올로기였다면, 1945년 이후에는 문자 그대로 수백만 명이 개인으로든 집단으로든 그 과정에 참여해 앞서 존재했던 수많은 분리의 장벽들을 없앴다. 비서구 지역의 국가와 사람들은 서구가 만들어 놓은 세계에 적응하기보다는 스스로 적극적으로 역사를 만들어 나갔다. 그 결과 심지어 사람들이 서로 간의 차이를 점점 더 많이 인식했을 때조차 인류의 결속에 관한 의식은 계속 성장했다. 그런 상황에서 인간이 (자연생활환경과 함께 공유하는)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을지의 문제는 21세기에 닥친 핵심 질문이 되었다. (P15)

현대 세계는 보통 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시작된다고 보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전 베크 세계사에서는 이와 다르게 20세기 전후부터 1970년 무렵까지 넓은 범위를 다루었다. 이는 전후 많은 국가들이 탈식민 전쟁에 뛰어들어야 했고 자유주의와 공산주의 간의 이념 갈등이 시작되면서 냉전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베크 세계사 마지막 권에서는 1945년 이후 전후 복구 과정과 이념 갈등,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 세계가 연결되는 초국주의를 다룬다. 이로써 1945년 전후의 세계는 어떤 차이가 있었는지 들여다본다.

제2차 세계대전은 경제와 기술의 발전에서 유럽 침식 경향을 가속화했다. 게다가 제2차 세계대전은 미국과 소련을 실질적이고 지속적으로 유럽에 개입하도록 만들었다. 독일이 유럽 대륙을 패권적으로 장악하는 것은 결국 양국의 안보를 위협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독일의 패권은 외부의 개입을 통해서만 제거될 수 있었다. 독일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던 유럽 국가들은 더는 유럽에서 자력으로는 경쟁과 균형의 옛 체제를 회복할 수 없었다. (P23)

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유럽의 세기는 기울고 미국과 소련이 부상하였다. 많은 이들이 죽거나 다치고 유럽의 대도시들이 파괴되었다. 참전국들에 전쟁으로 쏟은 비용이 막대했으나 전후 비용은 더 막대했다. 승전국도 패전국도 차등이 없었다.
미국은 1947년 초 서독을 포함한 서유럽 안정화를 위해 '마셜 플랜' 정책을 발표했다. 스탈린은 서유럽 정부들이 자신의 편에 서기를 기대했으나 거부되자 마셜 플랜에 참여하기를 포기했다. 동유럽 국가 정부들은 마셜 플랜 정책에 참여하기를 원했으나 소련 지도부의 압박으로 대신 소비에트 블록이 만들어졌다.
트루먼 행정부는 마셜 플랜을 통해 서유럽을 재건하며 자유주의적 체제를 강화했다. 스탈린은 서독의 국가 건설을 어떻게든 막아보려 했으나 서독도 서유럽 블록 체제에 합류하였다. 1949년 말에 유럽의 세력균형 체제가 붕괴한 자리에 대립하는 두 개의 권력 블록이 만들어졌다. 그 블록은 제2차 세계대전의 두 승전 주역에 의해 지배를 받았고, 유럽은 동반구와 서반구로 나뉘었다. (P51)

중국은 국민당과 공산당 간의 내전 끝에 공산당 정부가 들어섰다. 트루먼은 베이징 정권을 인정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장제스를 구하는 군사작전을 고려하지는 않았다. 1950년 1월 12일에 딘 에치슨 국무부 장관은 아시아의 미국 '방위선'은 일본에서 필리핀 군도까지라고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그것에 따르면 타이완의 국민당도 아시아 대륙의 여타 다른 정권들도 미국의 군사 지원을 기대할 수 없었다. (P55~56)
한반도는 미소 갈등의 최전선이었다. 내전은 국제전으로 비화되었고 일본은 공산화를 막는다는 미국의 결정에 따라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미일안보조약을 연이어 체결하였고 자위대를 창설하는 법안도 통과시켰다.

동남아시아 지역은 대서양 지역과 같은 정치 결속을 갖지 못했다. 일본과 일본의 옛 지배 지역 사이에 반목이 지속되었고, 국가를 형성하는 과정에서도 수많은 문제가 생겼다. 그로 인해 1954년 초에 미국이 '공산주의 침략자들'에게 맞서자며 제안한 군사동맹에는 영연방국가들인 영국과 오스트리아, 뉴질랜드를 빼고는 단지 필리핀과 태국, 파키스탄만이 참여했다. (P65)
인도는 상이한 지역에 따른 행정 권리를 넘길 대상이 불분명했다. 네루는 하나의 인도를 위해 노력하였으나 무함마드 알리 진나가 이끄는 무슬림 연맹은 이슬람 주민을 위한 독자적인 국가 건설을 주장했다. 이로써 인도 통합은 실패하였으며 1947년 8월 15일에 인도와 파키스탄은 각각 독립국가로 선포되었다.

아랍 민족주의는 제국주의자들에게 종속되는 것에 대항했을 뿐만 아니라, 유럽인들이 그 지역을 장악할 때 협력했던 전근대 지배 엘리트들에게도 각을 세웠다. 아랍 민족주의는 팔레스타인의 갈등으로 가속화되었다. 그것은 1917년 11월에 영국이 그 지역에서 '유대 민족을 위한 국가 거주지 건설'을 지원하겠다고 약속한 것으로 말미암아 촉발되었다.

시온주의자들은 나치의 인종 학살 이후에도 아직 유럽에 남아 있는 유대인 난민들에게 시급히 새 고향을 마련해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이 적극적으로 로비를 한 끝에 1947년 11월 29일에 유엔 총회는 3분의 2의 지지로 두 개의 국가를 건설해 서로 결속시키는 분단 계획을 통과시켰다. (...) 1954년 5월 14일에 영국군은 팔레스타인을 떠났고, 유대인 군은 이미 강자의 지위를 차지했고, 유대인 국가 평의회 의장은 곧장 독립 '이스라엘 국가'를 선포했다. (P69~70)
지키지도 못할 약속을 한 영국으로 인해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갈등이 시작되었다는 것이 아이러니다. 물론 이들간의 기본적인 종교, 민족주의적 갈등은 이전부터 있었지만 말이다.

서구 열강과 동유럽 블록 국가 모두 재정적인 이유로 재래식 군비 계획을 1950년대 초에 계획했던 규모대로 이행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미국과 소련의 지도부는 모두 점차 핵 억지력에 의존했다. 핵폭탄 투입을 경고하면서 재래식 군비의 결함을 보충하거나 고비용이 드는 재래식 무기고의 감축을 가능하게 만들 수 있었다. 물론 핵 억지 체제로 넘어가니 핵무기로 인한 절멸 공포가 생겨났다. 그래서 핵무기를 보유한 양대 열강 지도부는 대화를 지속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데올로기 때문에 생긴 인지 오류와 핵무기 대치 상태에 대한 경험 부족으로 인해 대화가 지속되기는 극히 어려웠고, 그 결과 동서 준비 관계에서 새로운 긴장이 계속 발생했다. (P106~107)

카터는 전략 군비를 제한하는 정도가 아니라 과감하게 감축하고 싶어 했다. 그 결과 미 국방부는 새 협상안을 마련했지만, 그것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어렵게 달성된 양보안을 다시 미국의 헤게모니 지위에 유리하게 만들었고, 그로 인해 소련 군부가 그것에 맞서는 요구를 제출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동시에 카터는 소련 내의 체제 비판가들에 대한 지지를 과시하듯이 공개적으로 표명했다. 그것은 오히려 체제 비판가들을 더 심하게 탄압하도록 만들었을 뿐이다. 게다가 그런 행동으로 인해 브레즈네프는 카터와 직통선을 만들 수가 없었다.

아프리카에서 소련의 팽창 전략이 성공한 것처럼 보이는 상황에서 카터는 안보 보좌관 즈비그뉴 브레진스키zbigniew Brzezinski의 자문을 받아 들여 ‘중국 카드‘를 더 적극적으로 사용하기로 결심했다. 1978년 5월에 카터는 브레진스키를 베이징으로 보내 전략 협력과 기술 지원의 가능성을 타진하게 했다. 10월 중순에 미국과 중국은 공동성명을 통해 외교 관계 채택을 알림으로써 세계 여론을 놀라게 했다. (P133~P134)

고르바초프는 ‘56’ 세대였다. 그것은 흐루쇼프가 스탈린주의를 공격할 때 사회화되었으며 기본적으로는 마르크스-레닌주의 세계관을 가졌지만 사회주의의 ‘개선‘을 희망했던 당의 관료들을 말한다. 그를 서기장으로 끌어올린 ‘옛 동지‘ 대표자들과 고르바초프의 근본적인 차이는 고르바초프는 이데올로기의 확신에 사로잡혀 소련제국의 불편한 현실을 보지 못하는 오류를 범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P167)
이념에 갇혀 있지 않고 현실을 냉정하게 들여다 본 리더의 모습들을 통해 생각할 점이 많다.

미국 금융계와 의회의 보수주의자들은 소련의 이탈에 개의치 않았지만, 실제로 미국의 힘과 이익을 구현할 금융거래에 노력을 집중했다. 그들은 브레턴우즈 체제로 미국이 잠재적으로 소모적인 대규모 해외 원조 정책을 그만두어도 되리라고 기대하며 달러의 지위를 그 통화 체제의 ‘기축통화‘로 끌어 올렸다. 실제로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비록 각국은 자국 통화를 금에 ‘연동‘(국제 통화 기금 체제 안에서 합의된 환율 패리티 범위로 통화 가치를 고정하는 것)해야 했지만, 달러가 사실상 환율을 결정했다는 사실이다. 본질적으로 달러는 새로운 금본위가 되었다. 국제 거래는 달러로 이루어졌고, 모든 국가는 자국 통화 가치를 달러에 대한 비율로 규정했다.(35달러가 금 1트로이온스로 교환되었다.) 이 체제는 1950년대초 전후 재건 국면이 끝났을 때에야 비로소 제대로 작동되지만, 세계 전역에서 상품과 용역의 값은 달러로 지불되었다. 따라서 다자간 협정 체제의 토대는 달러였다. (P220)

2차 대전 후 미국은 달러를 기축통화로 만들고 문호 개방을 하며 자유로운 기업 활동과 세계화의 체제를 선도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미국의 주도에 의한 무역과 금융의 민주화는 다원주의와 권력의 공유를 가져왔다. 유럽과 아시아의 신 세력이 부상하며 미국의 지도력은 도전을 받게 된다. 세계화는 세계적 협력을 요구했던 것이다.

사실 이 책의 독특한 지점은 3~5부에 있다고 생각한다. 1, 2부가 세계를 이끈 정치적, 경제적 변화에 주목했다면 3부에서 4부는 미국이 지구상에서 더 이상 동력을 가지지 못하게 된 이유와 맞닿아 있다.

3부는 전후 인류의 무분별한 개발 등으로 인해 지구의 역사에서 새로운 단계, 인류가 지구 생태 환경에 강력한 영향을 미치는 존재로 출현한 단계가 출현했다는 것이다. 이를 네덜란드의 대기과학자 파울 크뤼천이 '인류세'라는 개념으로 표현했다.
인류는 그 수에 전혀 어울리지 않게, 다른 종의 영향력을 크게 압도하면서 환경과 지구 생태에 지속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할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얼마나 오래 그렇게 할지는 분명하지 않다. 먼 훗날 인류세는 하나의 지질 연대로 보기에는 너무 짧은 것으로 드러날지도 모른다. 국제 지질학회는 지금 인류세를 그 학문적 개요에서 정식으로 인정하는 문제를 두고 씨름하고 있다. 시간이 말해 줄 것이다. 우리 편에서 보면 다행이기도 하고 속박이기도 한데, 인류세는 앞선 지질시대들만큼이나 오래 지속될 수도 있다. (P385)

저렴한 에너지를 사용함으로써 인류는 기후 변화를 목도하게 되었으며 경제와 의학 발전으로 인해 맞은 압도적인 인구 증가는 역설적으로 지구 자원의 부족을 느끼게 했다. 무분별한 개발로 인해 자연은 파괴되었으며 생물다양성은 줄어들었다.
저렴한 에너지는 인간에게 새로운 지렛대를 제공했다. 그것을 수단으로 인간은 일을 성취했고 더 빠르고 멀리 이동했으며 돈을 벌었고, 때로는 의식하지 못한 채 무심코 환경을 변화시켰다. 저렴한 에너지를 이용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누구나 그렇게 했다. (P421)

우리는 소수의 선호하는 식물 종과 동물 종을 선택하여 단순한 경관 안에서 관리했으며 이러한 경관에 잘 적응하는 다른 소수의 종들(쥐, 사슴, 다람쥐, 비둘기 따위)을 무의식적으로 선택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인간은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러한 경관에 살았던 다른 식물과 조류, 포유류, 곤충, 양서류의 수를 크게 줄이거나 이들을 제거했다. 이 점에서 윤리적질문은 언제나 거의 동일하다. 우리는 인간과 소, 닭, 돼지는 수십억 개체에 달하지만 호랑이와 코뿔소, 북극곰은 겨우 몇천 마리에 지나지 않거나 전혀 없는 세상에 만족하는가? (P474)
놀란 세계는 부랴부랴 환경보호주의를 주장하기 시작했다. 1960년대 이후의 대중적 환경보호 운동은 인간 활동의 규모와 범위를 더 완전하게 인식하는 길을 닦았다. (P567)

21세기로 접어드는 세계 주요 대도시에는 공통점이 많았다. 뉴욕이나 파리, 도쿄, 두바이, 뭄바이, 나이로비 같은 도시를 방문하는 사람들은 어느 도시에서나 같은 의류 상표를 볼 수 있고 같은 음식을 먹을 수 있으며 같은 호텔 체인에 묵고 같은 음료를 마실 수 있었다. 사람들은 이렇게 각기 다른 장소에서 같은 것들과 마주치기도 하지만, 한곳에서 더 다양한 것들을 접하기도 했다. 도시 주민, 식습관 그리고 음악, 영화, 연극, 문학 같은 문화 상품은 다민족적이고 다문화적인 성격을 띠어 갔다. 이러한 곳에서는 동질화와 이질화가 나란히 진행되면서 혼성적인 세계 문화가 나타났다. (P571)

4부는 인류가 교류하며 만들어진 다양한 문화에 대한 이야기다. 세계 각 지역의 문화는 지식을 생산하고 다른 문화와의 접촉을 통해 지속적으로 발전했다. 사실 세계화라는 용어는 1970년대에 경제학자들이 전 세계적으로 벤처기업의 통합이 늘어나면서 나타난 효과를 설명하려고 처음 사용했다. 세계화 지지자들은 우월한 경제적 문화적 관행을 광범위하게 수용하고, 아울러 창조적으로 적용함으로써 참여자 모두를 위해 더 많은 부와 권력을 창출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반면에 회의론자들은 기업의 탐욕과 경제적 착취가 각 지역의 자결권을 침해한다고 경고했다. 세계화는 또한 세계시장을 지배하는 이들에게 더 많은 부와 권력을 창출해 주었지만, 주변부 주민들에게는 종속을, 나아가 모두에게 더 큰 불평등을 초래한 것으로 비쳤다. (P572)

사실 나는 세계화의 긍정적인 면보다는 회의적인 면에 아무래도 더 기운다. 부익부 빈익빈의 경제적 불평등은 문화적 흐름에서도 차이를 만들어낸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과연 세계의 각 시민들은 보고만 있지 않았다. 1970년대 들어 서구 청년들은 자신들의 삶과 더 직접 연관된 정치 운동에 주력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전환은 정치 체제를 바꾸지 못하는 무력함을받아들여서라기보다 전지구적 문제에 대한 지역적·개별적 해결책을 찾으려는 노력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1960년대 말에서 1970년대 초 사이에 등장한 운동들(예를 들어 환경 운동, 여성 운동, 게이 운동과 레즈비언 운동 등)은 국적이나 젠더, 인종에 상관없이 개인의 행복에 더 큰 관심을 표명했다. 이 운동들은 보편적으로 적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지역적인 동시에 세계적이었다. 미국과 유럽의 젊은이들은 동반자 관계, 가족, 공동체를 조직하는 대안적 방법을 실험했다. 성인을 위한 대안 노동환경과 어린이를 위한 대안 학습 환경을조성한 이들도 있었다. 이러한 파편화tragmentation는 1960년대 운동의 힘을 분산시켰고, 동시에 서유럽과 미국의 사회적·문화적 풍경을 점차 변화시켜 나갔다. (P643)

서구에서 시작된 이런 운동들은 전 세계로 뻗어나가며 영향을 끼쳤다. 세계가 연결되어 있지 않았다면 이런 흐름은 지속적으로 이어지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종교가 냉전과 맞물리며 세계 각지를 분열시키고 냉전 종식 후에도 정치와 결합하며 종교 민족주의로 이어지는 것이 참으로 안타깝다. 1979년 이란 혁명, 아랍과 이스라엘의 갈등, 중동의 종교적 갈등을 통해서 그 예를 살펴볼 수 있다. 다원주의가 종교에는 적용될 수 없는 것일까? 정치에 종교가 개입되어 있기 때문에 이것이 쉽지 않겠지만 부디 마사 누스바움의 관용주의에서 희망을 찾아본다.

누스바움의 대안은 19세기에 오귀스트 콩트가 처음 제안하고, 존 스튜어트 밀이 가다듬은 "인류교"에 바탕을 두었다. 이 종교는 "공적 제도나 공교육을 통해 길러질 수 있는 도덕 감정인 연민"을 신봉한다. 누스바움에 따르면, 이 애국심은 타인을 향한 관용과 연민을 담고 있기에 보편적 인간성에 대한 자긍심을 길러 준다. "자유로운 사회는 다원주의에 대한 존중을 훼손하지 않고, 이러한 종류의 도덕적 이상[연민]을 확립하며, 그것을 뒷받침할 도덕 교육을 장려할 수 있다. 이 이상은 평등과 존중의 공적 규범과 결부되어 공적 정치 문화의 토대가 되어 줄 것이다." 따라서 관용적 국가는 공적 활동에서 종교 정체성을 드러내지 못하게 하기보다 종교적 다원주의와 관용을 국민 정체성의 일부로 적극적으로 수용할 것이다. (P689)

5부는 세계의 발전을 초국적 관점에서 살펴본다. 구체적으로는 초국적 역사, 초국적 접촉, 초국적 의식, 초국적 기억을 통해 전 세계가 공유하는 역사와 문화, 기억이 있음을 확인한다.

이렇게 한쪽으로 치우친 힘의 방정식이 냉전의 전부였다면 냉전은 그렇게 오래 이어지지 않았을 터였다. 우리는 소련 뿐 아니라 중화인민공화국을 포함한 다른 사회주의 국가들이 세계 각지에서 사회주의 사회가 미래의 물결이라는 인상을 심으며 자본주의와 서구에 반대하는 여론의 관심을 끈 덕분에 세계에서 많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냉전의 군사적 토대 뿐 아니라 이념적 토대에 대한 도전이 세계의 지정학적 지도를 뒤흔들고 뒤바꾸어 놓는 데 이바지했다. 이러한 도전은 근본적으로 초국적이었고, 전 세계적인 인권 운동과 세계 평화를 위한 운동에서 소련과 서구 모두에 맞서는 이슬람 근본주의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했다. 냉전 종식에는 이런 모든 요소가 담겨 있었고, 지정학적 ‘현실realities‘만을 원인으로 지목한다면 기본적으로 동어 반복일 것이다. 즉 냉전이 그러한 ‘현실‘에 의해 규정되어 왔다고 본다면 ‘현실‘이 변해서 냉전이 끝났다는 주장은 뻔한 이야기일 따름이다. 지정학적 게임이 벌어지는 무대가 크게 변해서 점차 게임의 성격이 달라졌다는 점에 주목하는 것이 더 도움이 될 것이다. 핵무장국도 여전히 존재하고 국제 관계와 국가 간 경쟁도 활발하게 이어지고 있지만, 초국적 세력이 꾸준히 그 자리를 침범해 가는 중이었다. (P825)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간의 힘겨루기는 미소만이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이루어졌기에 냉전은 오래 이어졌다. 하지만 냉전 종식을 위해 많은 국제 기구들이 만들어지는 등 초국가적인 도전이 끊이지 않았기에 허물어질 수 있었다. 국가의 노력, 리더의 결단이 냉전을 종식시킨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냉전이 끝나고도 여전히 인류는 전쟁에 대한 공포와 불안에 끊임없이 시달리고 있다. 그러나 과거를 통해 우리는 서로를 겨누는 것이 공멸의 길임을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이다.

20세기 말의 세계는 이렇게 초국적인 존재들이 국경을 초월한 다양한 층위의 활동과 감정을 보여 주는 만화경 같았다. 초국적 존재는 대부분 국경이 낮아지고 국경을 초월한 정보 획득과 의사소통이 쉬워지면서 생긴 새로운 기회를 활용해 자신과 타인을 위해 더 나은 미래를 건설하려고 했다. 하지만 세계를 폭력과 혼란의 도가니에 몰아넣을 활동을 벌인 부정적인 존재도 소수 있었다. 결코 초국적이 되지 못한 사람들은 어떠했을까? 물론 세계에는 초국적이지 못한 사람이 많았다. 그중에는 다른 나라나 사회와 물리적으로 단절된 사람도 있었고, 원칙과 취향, 성격 등을 이유로 스스로 고립을 선택한 이도 있었다. 많은 사람이 초국주의의 일부 측면에는 반대하지만, 또 다른 측면에는 반대하지 않았다. (P859)

인류는 끊임없이 교류와 단절을 이어가며 지금껏 발전해왔다. 최근 들어 각국에 우경화 정부가 들어서고 민족주의, 국가주의적 흐름이 나타나는 것을 본다. 커다란 전쟁을 겪은지 불과 100년도 채 되지 않았다는 것을 생각하면 참 놀라운데 현재도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간 전쟁이 벌어져 사람들이 죽거나 다치는 것을 멀찍이서 바라보는 현실이 씁쓸하다. 과연 세계는 어디로 나아갈 것인가. 마지막 장에서 오바마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의 정치적 이력에 대한 평가는 별개로 그는 적어도 초국주의에 들어맞는 인물이었다. 뒤이어 미국에 도널드 트럼프가 들어섰다는 것은 자국에도 건강하지 못한 일이었고 세계적으로도 악영향을 끼쳤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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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2-12-31 20:0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세계화라지만 오히려 사람들의 시선은 더 좁아진 느낌이에요. 네모난 영상으로 누군가에 의해 편집된 세상을 보는 느낌 ㅠㅠ우크라이나의 전쟁이 빨리 끝나야 할텐데 잊히기만 하는거 같아 안타까워요. 화가님 편안한 연말 보내시고 새해 복 마니 받으세요 *^^*

거리의화가 2022-12-31 21:14   좋아요 1 | URL
냉전 이후 분열과 갈등이 끝날 줄 알았건만 여전히 반목은 계속되고 있네요. 말씀대로 우크라이나 전쟁은 이제 그들만의 싸움이 되고 있는 것 같아서 마음이 좋지 않습니다. 누군가는 기억하고 있다고 말하고 싶은데 제 말이 들리지는 않겠지요^^;
미니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아픈 것은 좀 나아지셨는지ㅠㅠ 새해에는 건강하세요.

청아 2022-12-31 21:5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화가님 베크 세계사 45년이후를 올해 클리어 하셨군요!!
세계적인 우경화 현상은 과거 전쟁,역사의 맥락과 무관하지 않은것 같아요.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내년에도 벽돌장인 화가님 화이팅입니다^^*

거리의화가 2023-01-01 18:12   좋아요 0 | URL
네^^ 클리어하고 2022년을 끝내고 싶어서 열심히 읽었습니다ㅎㅎㅎ 앞 권들은 언제 나올지 모르겠지만 나오면 그때가서 읽는 것으로 하려구요.
미미님 올 한해 복 많이 받으시고 독서 생활도 화이팅입니다!*^^*

2022-12-31 23: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1-01 18: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페넬로페 2023-01-01 00:1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1945년이후는 우리에게도 중요한 시기인 것 같습니다.
화가님, 한분야를 깊이 읽어내시는 모습, 항상 존경합니다.
내년에도 읽기 화이팅이예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거리의화가 2023-01-01 18:17   좋아요 1 | URL
이 책에도 한국전쟁에 대한 이야기가 군데 군데 언급됩니다. 한반도 뿐 아니라 미소 등 많은 국가들에 냉전을 더 심화시킨 일이었다고 생각해요. 뿌리깊은 이념 갈라치기도 여전한 요즘 생각이 깊어집니다.
페넬로페님의 올해 책 읽기 힘껏 응원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독서괭 2023-01-01 00:1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화가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올해도 성실한 독서생활 하자구요!! 😆

거리의화가 2023-01-01 18:18   좋아요 1 | URL
괭님. 해피 뉴 이어!ㅎㅎㅎ 올해도 함께 즐겁게 읽어요^^

희선 2023-01-01 02:0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제는 자기 나라 이익만 생각할 때가 아닌 것 같은데, 그런 나라도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앞으로는 좀 더 좋은 쪽으로 흐르면 좋을 텐데...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전쟁도 끝나기를 바랍니다

거리의화가 님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늘 건강 잘 챙기시고 2023년에 하고 싶은 거 즐겁게 하세요


희선

거리의화가 2023-01-01 18:19   좋아요 1 | URL
회의적인 사람이라 회의적인 생각만 듭니다. 그래도 희망을 가져야겠죠^^;;;

희선님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건강하시길! 올해도 희선님의 읽고 쓰기 응원합니다^^

새파랑 2023-01-01 08:5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화가님의 역사 연구는 2023년에도 계속될거 같습니다~!! 2023년도 즐거운 독서~!!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거리의화가 2023-01-01 18:19   좋아요 1 | URL
새파랑님 응원 고맙습니다^^ 올해도 좋은 소설 많이 소개해주세요^^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길!
 

5장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분쟁의 기원

제3세계

국가에 이바지하는 종교. 종교 민족주의

단일민족주의의 역설

독이 된 9.11테러, 이라크 전쟁

팔레스타인인은 오스만 제국의 일부였다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영 - P746

국의 위임통치령이 된 그 지역에서 수 세대에 걸쳐 거주해 왔다. 그래서 팔레스타인 난민은 대부분 자신들에게 고향으로 돌아갈 권리가 있다고 믿었다.
반면에 유대인의 기억은 완전히 다른 성격을 띠었고, 그 핵심은 나치 치하에서 겪은 박해의 역사였다. 1933년 이후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한 사람들의 대열에 전쟁 이후 새로운 이주자 대열이 가세했다. 유대인 이주민이 보기에 현대사가 시사하는 바가 있다면, 그것은 자신들을 내부와 외부의 적으로부터보호해 줄 독자적인 국가 건설이라는 지상 과제였다. 아랍 난민도 비슷한 관점을 공유했지만, 아랍인이 생각한 새로운 팔레스타인 국가는 설립자들이 유대인 국가로 규정한 이스라엘과 판이했다. 따라서 만약 팔레스타인 난민이 모두 팔레스타인 땅에 있는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 유대인 인구보다 수가 많아지면 난감한 상황이 벌어질 터였다. 유대인이 아랍인보다 수적으로 적어지면유대인의 기대 수명이 더 길다 하더라도(이스라엘은 수십 년 만에 기대 수명이 가장 긴 나라 중 하나로 떠올랐다.) 다수의 팔레스타인 아랍인을 배제하지 않는다면 유대인 국가의 전망은 그다지 밝아 보이지 않았다.(그리고 팔레스타인인의 출생률은 20세기 마지막 10년까지 매우 높은 수준을 유지했다.) 결과적으로 팔레스타인인은 자기 나라를 갖지 못한 채 계속 요르단강 서안에 세워진 난민촌에 거주하게 되었다. 이 상황에서 역사적 기억의 공유는 불가능해 보였다. - P747

제3세계의 정체성은 탈식민화와 국가건설의 경험에서부터 공통의 문명에 대한 믿음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했다. 모든 상황에서 비서구 세계는 서로, 그리고 서구 국가들과 함께 초국적 경험을확대해나갔다. 그 결과 국가마다 특정한 문제와 전반적인 국제적 사안이 한편에서 ‘현실‘을 규정하고 있는데도 초국적 사고를 더욱 심화했다. 1950년대에학문 분야와 비학문 분야에서 ‘현실주의‘가 유행하면서 이러한 초국적 층위)
를 가려 버리곤 했지만,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 P765

국가에 이바지하는 종교, 그리고 종교에이바지하는 국가는 초국적 사고와 열망이 뚜렷하게 확대되어 가던 시대에 나 - P808

타난, 여러모로 이례적인 현상이었다.
왜 이러한 상황이 전개되었을까? 그것은 분명히 민족 공동체를 희생해 초국적 개인을 드높이고, 국가의 권위는 꾸준히 약해져 가는데 비국가 행위자의 힘은 강해져 가는 시대 경향에 대한 반발이었다. 종교 민족주의가 어떤 의미에서는 국가를 구제했다. - P809

이렇게 한쪽으로 치우친 힘의 방정식이 냉전의 전부였다면 냉전은 그렇게 오래 이어지지 않았을 터였다. 우리는 소련뿐 아니라 중화인민공화국을 포함한 다른 사회주의국가들이 세계 각지에서 사회주의사회가 미래의 물결이라는 인상을 심으며 자본주의와 서구에 반대하는 여론의 관심을 끈 덕분에 세계에서 많은 영향력을 행 - P824

사할 수 있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냉전의 군사적 토대뿐 아니라 이념적토대에 대한 도전이 세계의 지정학적 지도를 뒤흔들고 뒤바꾸어 놓는 데 이바지했다. 이러한 도전은 근본적으로 초국적이었고, 전 세계적인 인권 운동과 세계 평화를 위한 운동에서 소련과 서구 모두에 맞서는 이슬람 근본주의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했다. 냉전 종식에는 이런 모든 요소가 담겨 있었고, 지정학적 ‘현실realities‘만을 원인으로 지목한다면 기본적으로 동어반복일 것이다. 즉 냉전이 그러한 ‘현실‘에 의해 규정되어 왔다고 본다면 ‘현실‘이 변해서냉전이 끝났다는 주장은 뻔한 이야기일 따름이다. 지정학적 게임이 벌어지는무대가 크게 변해서 점차 게임의 성격이 달라졌다는 점에 주목하는 것이 더도움이 될 것이다. 핵무장국도 여전히 존재하고 국제 관계와 국가 간 경쟁도활발하게 이어지고 있지만, 초국적 세력이 꾸준히 그 자리를 침범해 가는 중이었다. - P825

20세기 말에는 많은 나라에서 단일민족주의를 강화한 경쟁적인 기억이 더욱 두드러졌다. 예를 들어 중국과 일본은현대에 양국 간에 벌어진 전쟁, 특히 1930년대 일본의 중국 침략에 관한 공식기억을 두고 충돌했다. 민간인 저자들이 집필하지만, 수업에 도입하기 전에공식 검인정을 받아야 하는 일본 역사 교과서가 1980년대 이후 한국과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 국가들의 관심을 끌었다. 아시아 국가들은 도쿄 당국이 최근 과거에 관한 수정주의 교육을 부추기고, 일본군이 자행한 침략과 만행을눈가림하려 한다는 비판을 제기했다. 반대로 일본 일각에서는 일본을 비판하는 나라들이 공식 역사 서술에서 희생자 수를 비롯한 전쟁의 여러 가지 양상을 과장했다고 비난했다. 일본 민족주의자들은 아시아-태평양전쟁을 아시아를 ‘해방‘하려고 치른 전쟁으로 보았지만, 중국 민족주의자들은 일본 제국주의가 유럽 열강의 제국주의보다 훨씬 나빴다고 주장했다. 한국과 필리핀 등의 민족주의자들도 중국에 동조했다. - P833

20세기 말의 세계는 이렇게 초국적인 존재들이 국경을 초월한 다양한 층위의 활동과 감정을 보여 주는 만화경 같았다. 초국적 존재는 대부분 국경이낮아지고 국경을 초월한 정보 획득과 의사소통이 쉬워지면서 생긴 새로운 기회를 활용해 자신과 타인을 위해 더 나은 미래를 건설하려고 했다. 하지만 세계를 폭력과 혼란의 도가니에 몰아넣을 활동을 벌인 부정적인 존재도 소수있었다.
결코 초국적이 되지 못한 사람들은 어떠했을까? 물론 세계에는 초국적이지 못한 사람이 많았다. 그중에는 다른 나라나 사회와 물리적으로 단절된 사람도 있었고, 원칙과 취향, 성격 등을 이유로 스스로 고립을 선택한 이도 있었다. 많은 사람이 초국주의의 일부 측면에는 반대하지만, 또 다른 측면에는 반대하지 않았다. - P859

2003년에 워싱턴이 세계 여론을 무시하고 이라크를 겨냥한 군사작전을 개시하면서 미국의 정책에 대한 적극적 지지가 뚜렷하게 약해졌다.(이라크를 침공하기 전에 전 세계적으로 600만에서 1000만 명에 이르는 사람이 임박한 전쟁에 반대하는 시위에 참여한 것으로 추산된다.) 미국이 이라크 공격을 감행하면서내건 표면적 이유는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정권이 테러리스트들을 숨겨 주고, 핵무기를 비롯한 ‘대량 살상 무기‘를 개발했다는 것이었다. 이 중 어떤 혐의도 입증되지 않았지만, 조지 W. 부시는 필요하다면 미국 단독으로라도 행동하려 했다. 나중에서야 부시의 고위 보좌관들이 그러한 혐의와 모순되는,
일부는 미국 정보기관 관계자들이 제공하기도 한 정보를 무시했고, 심지어가장 가까운 동맹국인 영국조차 이라크 공격에 회의적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라크 공격을 감행하는 데 유엔의 동의를 얻기가 무척 어려웠지만, 미국은 뜻을 꺾지 않고 2003년 3월에 폭격을 개시하고 이라크를 침공했다. 영국도 군대를 파견했지만, 에스파냐와 프랑스처럼 공개적으로 전쟁을 비판한 북대서양조약기구 회원국도 있었다. (프랑스는 이라크 공격에 나선 미군 항공기가 프랑스 상공을 통과하지 못하게 했다.) 이러한 미국의 일방주의는 국제사회뿐만 아니라 미국 여론도 상당부분 멀어지게 했다. 그러나 세계가 워싱턴을 비판하면할수록 부시 행정부의 태도는 더 완강해지는 듯해 보였다. 초국적으로 연결된 세계, 그리고 적어도 이라크 문제에 관해서만큼은 세계와 유리된 듯 보이는 미국 정부 사이에 간극이 뚜렷하게 존재했다. - P867

과거사 문제는 동아시아 국가들 사이에서도 극도로 어려운 문제임이 드러났다. 독일, 프랑스와 달리, 일본과 중국은 여전히 과거를 극복하지 못한 채다. 일본과 그 식민지였던 한국도 불행한 식민지 경험에 관해 충분히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이 세나라는 경제적으로 분명하게 서로 의존하고 있지만, 이른바 "역사 문제historyproblem"로 인해 정치적·심리적으로는 더 가까워지지 못하고 있다. 세 나라의 - P886

교사와 학자들이 앞장서 공동으로 책을 집필하는 기획을 시도했다. 하지만이런 노력은 종종 바람직하지 못한 사건으로 좌절을 겪곤 했다. 대표적인 예로 2001년에 일본에서 몇몇 국수주의 저자가 과거를 오로지 일본의 관점에서 본 일국 중심의 국수주의적 역사 교과서를 출판한 사건을 들 수 있다. 이교과서가 일본 문부성의 검정을 통과하면서 한국과 중국에서 즉각 반발을불러일으켰고 민족주의에 불을 붙였다. 다행히도 초국적 성향을 띤 역사가들도 세기 전환기에 더 가시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함께 모여 일본의 우익 교과서가 촉발한 이 불행한 사태에 대응하고자 했다. 세 나라의 역사학자들은 매년 서울과 도쿄, 베이징에 모였다. 2005년에는 이들 중 일부 학자들이 19세기 이후에 초점을 맞춘 동아시아 근현대사 저서를 공동으로 출판했다. 저자들은 책 서문에 과거에서 배우고 평화와 민주주의, 인권을 부각하는 동아시아의 미래를 도모하고자 이 책을 썼다고 밝혔다. 이 책은 일본이 과거에 한국을 강점하고 중국을 공격한 일을 통렬하게 비판했지만, 세 나라 사람들, 특히 젊은 세대가 힘을 합쳐 상호 이해를 증진하려 한 노력도 언급했다.
이 책은 수백만 명이 강제 이주와 기아로 목숨을 잃은, 처참했던 대약진이나문화혁명 같은 공산당 정권 치하 중국의 심각한 오점을 언급하지 않은 점에서 결함이 있었다. 그럼에도 이 책은 동아시아사 연구를 위한 협력이 시작되었음을 보여 주는 중요한 징표였다. - P8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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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곡 2023-01-02 10:2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해피뉴이어입니다! 올해도 열독즐독기원합니다~~~

거리의화가 2023-01-02 10:39   좋아요 1 | URL
서곡님 올 한해도 화이팅입니다! 즐거운 독서 생활 이어가시길^^

thkang1001 2023-01-02 10:2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거리의화가님!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거리의화가 2023-01-02 10:40   좋아요 1 | URL
thkang1001님 새해 인사 감사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thkang1001 2023-01-02 10:4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거리의화가님!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有什么计划吗? 계획 좀 있어?
怎么讲?무슨 말이야?
这个想法很了不起。이 아이디어는 정말 탁월해.
每天几句话,随手写写。 매일 몇 마디만 대충 끄적거려 보려고.
开始成功的一半。시작이 반이지.
预祝你能顺利完成计划。잘되길 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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常看常新 계속 봐도 항상 새로워

他给大家留下了深刻的印象。그는 모두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어.
爱情是种很微妙的感情。사랑은 아주 미묘한 감정이야.
我想每天睁开眼睛都看到你。 나는 매일 눈을 뜰 때마다 너를 보고 싶어.

稀里哗啦 (비가 내릴 때) 주룩주룩, 후둑후둑 / 산산이 부서지는 모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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