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수, 이리가라이, 크리스테바가 공유하는 뭔가가 있다면, 그것은 국가, 젠더, 정체성 개념들이 잠재적으로 안정적이지 못하다는 감각이다. 국가, 젠더, 정체성 개념에대한 회의적인 접근은 구조주의와 구분된다. 구조주의는 개념들이기본적으로 안정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전제한다. 페르디난드드 소쉬르(Ferdinand de Saussure), 클로드 레비-스트로스(Claude Lévi-Strauss), 자크 라캉(Jacques Lacan)은 언어, 친족 관계, 정신 심리에 있어서 구조 관계 자체가 의미를 결정한다고 보았던 사람들이다. 이들은 모두 뭔가가 작동하는 근본적인 패턴을 발견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전제했다. 이들을 제각각 다른 학문 분야-언어학, 인류학, 정신분석학의 학자들이었지만, 그들 모두가 똑같이 인간행동과 언어 사용에 있어서 기본이 되는 이원론적 대립(binary opposition)을 발견해냈다. 이원론적 대립이란 한 쌍의 용어들인데, 이들이 서로 의미를 구성하려면 서로 의존해야만 하는 대립쌍들이다. - P199
데리다와 라캉 모두에게, 여성성은 ‘배제된 것‘이고, 동시에 어떤 본질이다. 데리다는 여성성을 언어학적 불고정성에 대한 비유로 사용한다.‘ 라캉은 여성을 상징계에 존재하지 않지만 타자(엄마)에 대한 욕망을 억압함으로써 무엇보다 상징계를 창조해낸 그 무엇으로 여긴다. 다시 말하면, 남성 주체는 엄마를 부정함으로써 가부장제에서 특권적 지위를 갖게 된다는 말이다. 잠정적이긴 하지만 고정된 의미를 만들어내는 것은 바로 언어적 유희(linguistic play)(언어적 유희는 은유적으로 여성성과 동일하다)를 거부함으로써 가능하게 된다. - P204
궁극적으로 식수는 언어를 사회와 동떨어진 시스템으로써 사회를 그저 잘 반영한다는 언어 재현이론을거부한다. 대신에 언어와 사회 모두 서로 상호 침투하는 담론이며, 언어와 사회 모두 텍스트로써 읽고 해석하고 다시 쓰기하는 과정에열려 있다. 쓰기와 문화가 서로 간섭하게 되면 결국 불가피하게 사회가 변할 것이다. 왜냐하면 둘을 분리하는 것은 잘못된 대립이기때문이다. 전설 속 남자들을 돌로 변하게 만들었던 메두사는 프로이트같은 남성에게 거세 불안의 메타포였다." 그런 메두사를 다음과 같이 씀으로써 식수는 차이를 만들어낸다. "메두사를 보려면 그냥 똑바로 보기만 하면 된다. 메두사는 무섭지 않다. 그녀는 아름답게 웃고 있다" (255). - P210
이리가라이의 "기이한 입술 중심성"은 라캉의 상징계에서 팔루스를 특권화하는 것에 대해 대응하면서 의문을 제기한다. 이리가라이는 해부학과 문화를 새로운 형태로 표현하고, 텍스트와 몸 사이에 있었던 전통적이고, 은유적이고, 재현적 관계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다. 이리가라이에게 몸은 언제나 텍스트적(textual)이고, 텍스트는육체적이다. "두 개의 입술"에서 강력하게 주장하는 바다. 잠시 식수와 이리가라이 에세이의 첫 머리로 되돌아간다면, 그 강력한 주장은 글쓰기 뿐만 아니라, 말하기에서도 강조할 가치가 있다. - P214
시적언어는 "센스와 넌센스, 언어와 리듬, ‘상징계‘와 ‘세미오틱‘ 사이에서 논증할 수 없는 어떤 과정이 있음을 증명해준다"(103). 크리스테바는 시 속 문장의 리듬에서 ‘세미오틱‘을 발견한다. 세미오틱은 문 - P216
장이 다양한 의미와 함축성을 지니도록 허용하고, 욕망이 텍스트속으로 분출하도록 외설스런 단어들도 허용한다. 시의 세미오틱한 성향은 독자들이 "자신의 판단을 깨뜨리고, 의식 속에 리듬 있는 충동을 향하여 통로를 내서 ‘주이상스‘를 경험하게 한다"(110). 주이상스(jouissance)는 강력한 쾌락을 포함하여 매우 많은 의미를지니고 있기 때문에 번역하기 힘든 단어다. 그러므로 시적 언어는전통적 언어의 단정적 주체로부터 다른 종류의 주체성을 창조해내야 한다. 크리스테바는 이를 "과정 중의 주체" (subject-in-process)(103)라고 부른다. 이런 주체는 분열되어 있고, 산만하고, 변화에 열려 있다. - P217
크리스테바는 여성성을 상징계의 질서를 넘어서는 위치로 규정한다. "넘어섬"은 항상 동시에 상징계의 흔적을 지닌다. 상징계에의해 규정될 지라도 말이다. 크리스테바에겐 여성성이 전체 시스템에서 이론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을 역설적으로 보여줌으로써여성성은 그 시스템이 어떻게 기능하는가를 보여주는 공간, 혹은장소이다. 그러므로 여성성이란 세미오틱과 상징계가 만나는 가장자리에 있다. 그 곳은 "안"에 있기 위해서 매우 중요하고 필요한 위치다. 육체적 차이를 언어 속으로 써넣는 작전을 사용하여 여성을가장자리나 한계로부터 움직여 중심 무대로 가는 것, 그것이 전략이다. 그 전략은 상징계의 질서를 변경시키지 않을 것이고 다만 상징계에 의해서 회복될 것이다. 그러나 앞선 인용에서 "어쩌면"이란 단어에 초점을 맞춰보면 여전히 모호함이 남아있다. 이 모호함은 다시금 성별화된 몸-생물-생리학으로 되돌아가게 한다. 성별화된 여성 몸을 지닌 여성이 성별화된 남성 몸을 지닌 남성보다 여성성의 지위를 차지할 가능성이 더 많을지라도, 식수와 이리가라이처럼, 크리스테바도 여성성을 생물학적 본질주의 개념으로 정의하고 있음을 암시해준다. - P219
실재를 객관적이고 진실하게 그려내는 능력에 대한 회의는 여성 문제를 정확하게 진단하려는 자신감과 서로 어울리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모순은 울프의 작품 자체 보다는 울프에 대한 비평에 해당될 뿐이다. - P221
울프에겐 모더니스트 형식적 실험이 페미니즘이라는 정치적 목적과 분리되지 않는다. 최근의 울프 비평은 전통적인 가부장적 모더니스트 정전이 젠더 이슈와 상호 연관된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그리고 정전에 다른 여성 모더니스트를 포함시키고 젠더 차이를 설명하면서 모더니즘을 재정의하고 있다. 예를 들어, 1차 세계 대전은 남녀의 삶과 글쓰기에 서로 다른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1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여성들은 처음으로 집밖에서 일할 기회를가짐으로써 1차 세계 대전은 여성들에게 해방적 효과를 줄 수도 있었다. 울프를 포함해서 많은 여성 모더니스트들은 아방가르드 스타일을 가부장제 현실을 공격하는 방법으로 활용했다. - P222
『올랜도』전체에서 울프는 전통과 규칙을 전면에 강조하면서, 오히려 함축적으로 의문을 제기한다. 이를테면 전기 (올랜도 소설은 전기를 표방한다), 소설, 섹슈얼리티, 젠더, 정체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 P223
S. W. 부인이 말한다. "여성들에게 남성의 자극이 없을 때 여성들은 서로 할 말이 없다고 잘 알려져 있지요. 여성들이 혼자 있을 때는 말도 안하고 그저 긁적 긁적 하기만 한다고 생각하지요." 여자들은 함께 말할 줄도 모르고, 긁적거리는 것도 계속 할 수는 없으니(T.R이 증명하듯이) "여성들은 동성에 대한 애정을 품을 줄도 모르지요. 서로 아주 싫어하지요." 여자들끼리 있을 때 여자들이 뭘 하겠는가. - P231
생각이 있는 남자들의 관심을 끌만한 질문이 아니니까, 남자든여자든 모든 전기 작가들과 역사들의 면역력을 즐기는 우리들은그냥 그 질문을 지나쳐 버리자. 그리고 그저 올랜도는 동성들과의어울림을 아주 좋아했다고 말하자. 그리고 남자들에게 증명하라고해보자. 남자들은 증명하는 것이 좋아하니까. 올랜도가 동성 모임을 좋아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남자들이 증명하도록 내버려두자. (210)
이 영리한 인용에서, 화자는 "중성" 이라면 쉽게 남성적 편견을감출 수 있을 거라고 가정한다. 여성에 대한 편견의 예를 인용하면서 울프는 편견을 흉내냄으로써 편견을 우스꽝스럽게 만들어버린다. 여성이 서로 어울림을 즐길 수 있는 가능성이 텍스트의 틈새에서 함축적으로 출현한다. 이것은 정확하게 포스트구조주의 페미니즘의 주장, 즉 여성이 가부장제 안에서 존재할 때 여성이라는 카테고리를 해체한다는 주장과 닮아있다. 그러나 동시에 잘못된 언어를 활용함으로써 여성이라는 카테고리를 전략적으로 재건한다. - P232
포스트구조주의 페미니즘은 경제적인 요소에 대한 분석이 없는데, 그 이유는 경제적인 것과 사회적인것 모두 담론적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사실 식수, 이리가라이, 크리스테바가 글쓰기에 부여하는 정치적인 중요성은 바로 언어와 실재 사이에 잘못된 이항대립을 깨뜨리는 것이다. 그러나 시적 언어 혹은 몸을 쓰는 것이 사회적으로 전복적인 기능을 지니기도 하는데, 이는 다른 얘기다. - P236
이 장에서 논의되는 네 명의 작가들은 모두 특히 남성적인 문학적, 철학적, 문화적 유산을 폭넓게 논의할 때엔 특히 난해한 언어를 사용한다. 남성들의 유산에 대해 존경심을 대놓고 드러내지는 않아도 원전을 모르는 상태에서 농담을 알아듣기는 힘들다. 정신분석학적 선조들 [프로이트와 라캉]을 다룰때 특히 그렇다. - P237
크리스테바마야코브스키, 마르토드, 로테르몽, 말라르메, 베켓, 마르키스드 사드, 셀린느를 언급한다. 식수는 각주에서 콜레뜨, 마르게리뜨두라스, 쟝 쥬네 등을 언급한다. 이리가라이는 자신의 생각을 명시적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적용시키지 않는다. 대부분의 정전 작가들의 텍스트 안에서 여성성의 흔적을 이렇게 발견한다면, 생물학과글쓰기 스타일 사이에 자동적으로 연결이 있다는 순박한 가정은 무너지게 된다. 그러나 이들은 생물학과 글쓰기 사이에 연결성이 좀더 세련된 방식으로 재건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긴 한다. 이것은 여성 작가들의 글과 관련해서 증명될 필요가 있다. 울프의 『올랜도』는 생물학과 글쓰기의 관련성을 주장할 수 있는 텍스트다. - P239
그들의 분석은 여성이라는 단일 카테고리가 계급, 인종, 섹슈얼리티에 의해 복잡해지고 분할될 수 있음을 인식하지 못한다. 가야트리 스피박(Gayatri Spivak)은 식수, 이리가라이, 크리스테바의 글을 음핵 절제술의 맥락에서 활용하면서, 여성의 몸에 대한 아이디어를전복적 글쓰기를 위한 원천으로 사용하되, 그리 단순하지 않은 복 - P239
잡성을 지적한다. "분명히 동시에 다른 초점이 있을 수 있다고 주장하지 않을 수 없다. 단지, 내가 누구인가, 라고 질문할 뿐만 아니라, 다른 여자는 누구인가? 나는 그녀의 이름을 어떻게 지어주는가? 그녀는 나를 뭐라고 부르는가도 초점이 될 수 있다. - P240
식수, 이리가라이, 크리스테바가 동성애를 모성과 연결시키고, 모성을 강조하는 것은 거세게 비판되어 왔다.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는 모성적 몸은 모든 의미화의 감춰진 근간이거나, 모든 문화의 암묵적인 원인도 아니다. 오히려 모성적 몸은, "여성의 몸은 필시 엄마가되어야 한다는 시스템, 모성은 자아의 본질과 욕망의 법이라고 규정하는 섹슈얼리티 시스템이 만들어낸 영향과 결과일 뿐이라고 말한다." 다른 곳에서 버틀러는 이렇게 말한다. - P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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