收支 수입과 지출, 수지
季度 사분기 / 月度 월간 / 年度 연간
流水 흐르는 물, 매출액, 입출금 내역 / 收支流水 금전출납
入不敷出 수입보다 지출이 더 많다
新开的店流水怎么样? 새로 연 가게 매출은 어때?
收支能平衡吗? 수지는 맞아?

泡 담그다
省钱 돈을 아끼다

我喜欢热水泡脚。난 뜨거운 물에 족욕하는 걸 좋아해.
再省,也不能省了看病的钱啊。아무리 아껴도 진찰비를 아낄 수는 없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Chapter5. 포스트구조주의 페미니즘

구조주의(데리다, 라캉) <-> 포스트구조주의

관념적인 서사

포스트구조주의 페미니즘은 경제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은 모두 담론으로 구성되어 있다.

언어와 실재 사이의 잘못된 이항대립을 깨려는 시도.

식수의 메두사의 웃음, 이리가라이의 우리의 입술이 함께 말할 때, 크리스테바의 한 정체성으로부터 다른 정체성으로 울프의 소설 올랜도와 함께 읽어야 다양한 해석이 나올 수 있다.

식수, 이리가라이, 크리스테바가 공유하는 뭔가가 있다면, 그것은 국가, 젠더, 정체성 개념들이 잠재적으로 안정적이지 못하다는 감각이다. 국가, 젠더, 정체성 개념에대한 회의적인 접근은 구조주의와 구분된다. 구조주의는 개념들이기본적으로 안정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전제한다. 페르디난드드 소쉬르(Ferdinand de Saussure), 클로드 레비-스트로스(Claude Lévi-Strauss), 자크 라캉(Jacques Lacan)은 언어, 친족 관계, 정신 심리에 있어서 구조 관계 자체가 의미를 결정한다고 보았던 사람들이다. 이들은 모두 뭔가가 작동하는 근본적인 패턴을 발견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전제했다. 이들을 제각각 다른 학문 분야-언어학, 인류학, 정신분석학의 학자들이었지만, 그들 모두가 똑같이 인간행동과 언어 사용에 있어서 기본이 되는 이원론적 대립(binary opposition)을 발견해냈다. 이원론적 대립이란 한 쌍의 용어들인데, 이들이 서로 의미를 구성하려면 서로 의존해야만 하는 대립쌍들이다. - P199

데리다와 라캉 모두에게, 여성성은 ‘배제된 것‘이고, 동시에 어떤 본질이다. 데리다는 여성성을 언어학적 불고정성에 대한 비유로 사용한다.‘ 라캉은 여성을 상징계에 존재하지 않지만 타자(엄마)에 대한 욕망을 억압함으로써 무엇보다 상징계를 창조해낸 그 무엇으로 여긴다. 다시 말하면, 남성 주체는 엄마를 부정함으로써 가부장제에서 특권적 지위를 갖게 된다는 말이다. 잠정적이긴 하지만 고정된 의미를 만들어내는 것은 바로 언어적 유희(linguistic play)(언어적 유희는 은유적으로 여성성과 동일하다)를 거부함으로써 가능하게 된다. - P204

궁극적으로 식수는 언어를 사회와 동떨어진 시스템으로써 사회를 그저 잘 반영한다는 언어 재현이론을거부한다. 대신에 언어와 사회 모두 서로 상호 침투하는 담론이며, 언어와 사회 모두 텍스트로써 읽고 해석하고 다시 쓰기하는 과정에열려 있다. 쓰기와 문화가 서로 간섭하게 되면 결국 불가피하게 사회가 변할 것이다. 왜냐하면 둘을 분리하는 것은 잘못된 대립이기때문이다. 전설 속 남자들을 돌로 변하게 만들었던 메두사는 프로이트같은 남성에게 거세 불안의 메타포였다." 그런 메두사를 다음과 같이 씀으로써 식수는 차이를 만들어낸다. "메두사를 보려면 그냥 똑바로 보기만 하면 된다. 메두사는 무섭지 않다. 그녀는 아름답게 웃고 있다" (255). - P210

이리가라이의 "기이한 입술 중심성"은 라캉의 상징계에서 팔루스를 특권화하는 것에 대해 대응하면서 의문을 제기한다. 이리가라이는 해부학과 문화를 새로운 형태로 표현하고, 텍스트와 몸 사이에 있었던 전통적이고, 은유적이고, 재현적 관계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다. 이리가라이에게 몸은 언제나 텍스트적(textual)이고, 텍스트는육체적이다. "두 개의 입술"에서 강력하게 주장하는 바다. 잠시 식수와 이리가라이 에세이의 첫 머리로 되돌아간다면, 그 강력한 주장은 글쓰기 뿐만 아니라, 말하기에서도 강조할 가치가 있다. - P214

시적언어는 "센스와 넌센스, 언어와 리듬, ‘상징계‘와 ‘세미오틱‘ 사이에서 논증할 수 없는 어떤 과정이 있음을 증명해준다"(103). 크리스테바는 시 속 문장의 리듬에서 ‘세미오틱‘을 발견한다. 세미오틱은 문 - P216

장이 다양한 의미와 함축성을 지니도록 허용하고, 욕망이 텍스트속으로 분출하도록 외설스런 단어들도 허용한다. 시의 세미오틱한 성향은 독자들이 "자신의 판단을 깨뜨리고, 의식 속에 리듬 있는 충동을 향하여 통로를 내서 ‘주이상스‘를 경험하게 한다"(110).
주이상스(jouissance)는 강력한 쾌락을 포함하여 매우 많은 의미를지니고 있기 때문에 번역하기 힘든 단어다. 그러므로 시적 언어는전통적 언어의 단정적 주체로부터 다른 종류의 주체성을 창조해내야 한다. 크리스테바는 이를 "과정 중의 주체" (subject-in-process)(103)라고 부른다. 이런 주체는 분열되어 있고, 산만하고, 변화에 열려 있다. - P217

크리스테바는 여성성을 상징계의 질서를 넘어서는 위치로 규정한다. "넘어섬"은 항상 동시에 상징계의 흔적을 지닌다. 상징계에의해 규정될 지라도 말이다. 크리스테바에겐 여성성이 전체 시스템에서 이론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을 역설적으로 보여줌으로써여성성은 그 시스템이 어떻게 기능하는가를 보여주는 공간, 혹은장소이다. 그러므로 여성성이란 세미오틱과 상징계가 만나는 가장자리에 있다. 그 곳은 "안"에 있기 위해서 매우 중요하고 필요한 위치다. 육체적 차이를 언어 속으로 써넣는 작전을 사용하여 여성을가장자리나 한계로부터 움직여 중심 무대로 가는 것, 그것이 전략이다. 그 전략은 상징계의 질서를 변경시키지 않을 것이고 다만 상징계에 의해서 회복될 것이다. 그러나 앞선 인용에서 "어쩌면"이란 단어에 초점을 맞춰보면 여전히 모호함이 남아있다. 이 모호함은 다시금 성별화된 몸-생물-생리학으로 되돌아가게 한다. 성별화된 여성 몸을 지닌 여성이 성별화된 남성 몸을 지닌 남성보다 여성성의 지위를 차지할 가능성이 더 많을지라도, 식수와 이리가라이처럼, 크리스테바도 여성성을 생물학적 본질주의 개념으로 정의하고 있음을 암시해준다. - P219

실재를 객관적이고 진실하게 그려내는 능력에 대한 회의는 여성 문제를 정확하게 진단하려는 자신감과 서로 어울리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모순은 울프의 작품 자체 보다는 울프에 대한 비평에 해당될 뿐이다. - P221

울프에겐 모더니스트 형식적 실험이 페미니즘이라는 정치적 목적과 분리되지 않는다. 최근의 울프 비평은 전통적인 가부장적 모더니스트 정전이 젠더 이슈와 상호 연관된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그리고 정전에 다른 여성 모더니스트를 포함시키고 젠더 차이를 설명하면서 모더니즘을 재정의하고 있다. 예를 들어, 1차 세계 대전은 남녀의 삶과 글쓰기에 서로 다른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1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여성들은 처음으로 집밖에서 일할 기회를가짐으로써 1차 세계 대전은 여성들에게 해방적 효과를 줄 수도 있었다. 울프를 포함해서 많은 여성 모더니스트들은 아방가르드 스타일을 가부장제 현실을 공격하는 방법으로 활용했다. - P222

『올랜도』전체에서 울프는 전통과 규칙을 전면에 강조하면서, 오히려 함축적으로 의문을 제기한다. 이를테면 전기 (올랜도 소설은 전기를 표방한다), 소설, 섹슈얼리티, 젠더, 정체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 P223

S. W. 부인이 말한다. "여성들에게 남성의 자극이 없을 때 여성들은 서로 할 말이 없다고 잘 알려져 있지요. 여성들이 혼자 있을 때는 말도 안하고 그저 긁적 긁적 하기만 한다고 생각하지요." 여자들은 함께 말할 줄도 모르고, 긁적거리는 것도 계속 할 수는 없으니(T.R이 증명하듯이) "여성들은 동성에 대한 애정을 품을 줄도 모르지요. 서로 아주 싫어하지요." 여자들끼리 있을 때 여자들이 뭘 하겠는가. - P231

생각이 있는 남자들의 관심을 끌만한 질문이 아니니까, 남자든여자든 모든 전기 작가들과 역사들의 면역력을 즐기는 우리들은그냥 그 질문을 지나쳐 버리자. 그리고 그저 올랜도는 동성들과의어울림을 아주 좋아했다고 말하자. 그리고 남자들에게 증명하라고해보자. 남자들은 증명하는 것이 좋아하니까. 올랜도가 동성 모임을 좋아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남자들이 증명하도록 내버려두자. (210)

이 영리한 인용에서, 화자는 "중성" 이라면 쉽게 남성적 편견을감출 수 있을 거라고 가정한다. 여성에 대한 편견의 예를 인용하면서 울프는 편견을 흉내냄으로써 편견을 우스꽝스럽게 만들어버린다. 여성이 서로 어울림을 즐길 수 있는 가능성이 텍스트의 틈새에서 함축적으로 출현한다. 이것은 정확하게 포스트구조주의 페미니즘의 주장, 즉 여성이 가부장제 안에서 존재할 때 여성이라는 카테고리를 해체한다는 주장과 닮아있다. 그러나 동시에 잘못된 언어를 활용함으로써 여성이라는 카테고리를 전략적으로 재건한다. - P232

포스트구조주의 페미니즘은 경제적인 요소에 대한 분석이 없는데, 그 이유는 경제적인 것과 사회적인것 모두 담론적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사실 식수, 이리가라이, 크리스테바가 글쓰기에 부여하는 정치적인 중요성은 바로 언어와 실재 사이에 잘못된 이항대립을 깨뜨리는 것이다. 그러나 시적 언어 혹은 몸을 쓰는 것이 사회적으로 전복적인 기능을 지니기도 하는데, 이는 다른 얘기다. - P236

이 장에서 논의되는 네 명의 작가들은 모두 특히 남성적인 문학적, 철학적, 문화적 유산을 폭넓게 논의할 때엔 특히 난해한 언어를 사용한다. 남성들의 유산에 대해 존경심을 대놓고 드러내지는 않아도 원전을 모르는 상태에서 농담을 알아듣기는 힘들다. 정신분석학적 선조들 [프로이트와 라캉]을 다룰때 특히 그렇다. - P237

크리스테바마야코브스키, 마르토드, 로테르몽, 말라르메, 베켓, 마르키스드 사드, 셀린느를 언급한다. 식수는 각주에서 콜레뜨, 마르게리뜨두라스, 쟝 쥬네 등을 언급한다. 이리가라이는 자신의 생각을 명시적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적용시키지 않는다. 대부분의 정전 작가들의 텍스트 안에서 여성성의 흔적을 이렇게 발견한다면, 생물학과글쓰기 스타일 사이에 자동적으로 연결이 있다는 순박한 가정은 무너지게 된다. 그러나 이들은 생물학과 글쓰기 사이에 연결성이 좀더 세련된 방식으로 재건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긴 한다. 이것은 여성 작가들의 글과 관련해서 증명될 필요가 있다. 울프의 『올랜도』는 생물학과 글쓰기의 관련성을 주장할 수 있는 텍스트다. - P239

그들의 분석은 여성이라는 단일 카테고리가 계급, 인종, 섹슈얼리티에 의해 복잡해지고 분할될 수 있음을 인식하지 못한다. 가야트리 스피박(Gayatri Spivak)은 식수, 이리가라이, 크리스테바의 글을 음핵 절제술의 맥락에서 활용하면서, 여성의 몸에 대한 아이디어를전복적 글쓰기를 위한 원천으로 사용하되, 그리 단순하지 않은 복 - P239

잡성을 지적한다. "분명히 동시에 다른 초점이 있을 수 있다고 주장하지 않을 수 없다. 단지, 내가 누구인가, 라고 질문할 뿐만 아니라, 다른 여자는 누구인가? 나는 그녀의 이름을 어떻게 지어주는가? 그녀는 나를 뭐라고 부르는가도 초점이 될 수 있다. - P240

식수, 이리가라이, 크리스테바가 동성애를 모성과 연결시키고, 모성을 강조하는 것은 거세게 비판되어 왔다.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는 모성적 몸은 모든 의미화의 감춰진 근간이거나, 모든 문화의 암묵적인 원인도 아니다. 오히려 모성적 몸은, "여성의 몸은 필시 엄마가되어야 한다는 시스템, 모성은 자아의 본질과 욕망의 법이라고 규정하는 섹슈얼리티 시스템이 만들어낸 영향과 결과일 뿐이라고 말한다." 다른 곳에서 버틀러는 이렇게 말한다. - P242


댓글(11)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락방 2023-01-12 09:1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오오 거리의화가 님, 진도 쭉쭉 나가시네요!!!

단발머리 2023-01-12 09:13   좋아요 1 | URL
제 말씀이 그 말씀이고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

거리의화가 2023-01-12 09:14   좋아요 1 | URL
지난 일요일부터 매일 한 챕터씩 읽고 있어요. 저는 아직까지는 <다락방의 미친 여자>보다 이 책이 더 덜 어렵게 느껴집니다^^; 저자가 최대한 쉽게 풀어서 설명해주는 것 같아서요.

단발머리 2023-01-12 09: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 아직 자유주의 페미니즘이에요. 우아!! 많이 읽으셨네요. 현재 스코어 1등이신데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거리의화가 2023-01-12 09:15   좋아요 1 | URL
앗ㅋㅋ 그런가요? 매일 한 챕터 읽으면 가능합니다ㅎㅎㅎㅎㅎ
단발머리님 남은 분량 화이팅입니다!^^

건수하 2023-01-12 10: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하루에 한 챕터 읽기는 가능할지도 모르겠는데 정리는 못하겠어요...
부지런하십니다!

남은 분량도 화이팅입니다! ^^

거리의화가 2023-01-12 11:23   좋아요 0 | URL
오늘 챕터는 살짝 길었는데 출근을 10~20분 정도 빨리 해서 다행히 다 읽을 수 있었어요. 1시간 남짓 걸리는데 이 책은 퇴근 이후보다는 출근해서 읽는게 나은 것 같아서 계속 그렇게 읽고 있습니다. 정리라고 하기에는 그냥 핵심 단어, 문장 정도만 체크해서 올려요.

수하님도 남은 분량 힘내세요!

수이 2023-01-12 10: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곧 완독하실듯 한데요!! 화가님 뒤따라 가야지! :)

거리의화가 2023-01-12 11:24   좋아요 0 | URL
ㅎㅎㅎ 수이님도 헛둘헛둘! 화이팅입니다!!!

청아 2023-01-12 11:5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이 책도 함께 읽고 싶은 책들이 줄줄이 나오지만 읽기에 어렵지 않은것 같아 좋아요!
화가님 벌써 이렇게나 많이 읽으셨군요? ^^* 에너지 듬뿍 받고 갑니다ㅎㅎ

거리의화가 2023-01-12 12:51   좋아요 2 | URL
저도 미미님과 같은 생각이에요. 저는 <제2의 성>만 읽고 시작했는데 그럼에도 무리 없이 읽고 있으니까요^^
미미님 에너지 듬뿍 받으셨다니 저도 좋습니다. 남은 분량 화이팅하세요!
 

<특집> 어린이와 한국의 근현대 - 이미지와 담론, 현실

‘언니’의 곡절 - 한국의 근대 가족과 여자 어린이 노동

1930년대 무렵부터 조선에는 언니/누나가 아이를 돌보는 그림과 사진이 자주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그 전에는 어머니의 노동 현장과 아이를 돌보는 공간이 분리되지 않았다고. 옆에 돌보아줄 어른들도 주변에 많았기 때문에 한마디로 단체로 아이를 키우는 시스템이라고나 할까.
그러나 1930년 이후가 되면 이것이 통하지 않게 된다. 쌀의 반출량이 많아지면서 농가의 소득으로 다른 것들이 필요하게 되었다. 부가 수입원이 필요하게 되었고 이를 위해 엄마도 생업 전선에 뛰어들어야 했다. 가족들은 모두 각자 도생의 길로 뛰어들어야 했고 여기에 언니 또는 누나가 가장 큰 피해를 입었다.

한국전쟁 사진으로 기억에 남는 것은 사실 아이를 업은 어린 소녀였다. 부모를 잃거나 헤어져서 떠도는 아이들이 무수히 많았다고 하는데 이 와중에 동생을 돌보아야만 하는 소녀들이 있었다는 사실. 문제는 전쟁이 끝난 한참 후에도 몇 십년동안 이 시스템은 이어졌다.

조선시대의 회화에서는 아이가 아이를 업고 돌보는 풍경을 찾기는 쉽지 않다. 김홍도나 신윤복, 김득신의 풍속도에서 아이들을 돌보는 것은 많은 경우 어머니나 할머니다. 그런데 이렇게 어머니나 할머니가 계속 돌보고 있는 아이들은 누군가 그들의 생리적 요구에 즉각 반영해야 하는 유아들이다. 그리고 아이들을 돌보는 어머니들은 생업과 노동의 현장에서 떨어져 있지 않다. - P13

조선총독부는 농촌진흥 운동을 추진하면서 농촌 빈곤의 원인을 조선인의 민족성이나 전통적인 습관과 가치관으로 지목하고 이를 개조해야 한다고 압박했다. 그중 하나로 지목된 것이 "부인이 야외 노동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생활에 자각이 없고 사회적으로 무관심"한 조선의 부인들을 교양시켜 노동하게 함으로써 전가근로를 달성하게 하는 것이 중요한 정책과제였다.
1930년대 가족 노동력 동원의 극대화는 학교교육과 정책 홍보에서 끊임없이 강조되었고, 실제 가마니 짜기나 농촌 수공업 제품 제조 등 부업은 물론이고 농업 생산 현장에도 여성 노동력 투입이 증가했다. - P17

여자 어린이들의 가사와 돌봄노동은 당시 농촌 가장들의 시각에서 ;일하지 않는것‘으로 규정되었다. 동생을 돌보고 오빠나 남동생의 학업을 뒷받침하는 것은 ’언니‘ 혹은 ’누이‘인 여성 가족 구성원의 당연한 의무로 ’노동‘이 아니라고 인식했던 것이다. 그러나 소녀들이 가사사용인으로 고용된 사례들은, 어린이들의 노동이 어머니의 부담을 덜어준다는 간접적인 수준을 넘어서 이들의 노동 자체가 실질적인 임노동으로 전환될 수 있었음을 의미한다. 집안에서 소녀들의 가사와 돌봄노동은 실질적인 여성 임노동으로 가는 첫 걸음이었던 것이다. - P29

1930~32년의 조선농회의 농가조사에서 나타난 학령아동의 취학 상황을 살펴보면 아들은 집안의 경제적 상황에 따라 취학 비율이 달라지지만(자작농 30.4%, 자소작 28.6%, 소작농 23.5%), 딸의 경우 소작농은 물론 자소작이나 자작농이더라도 대부분 학교에 보내지 않았다. - P30

결국 육아와 가사노동이 여자 형제들에게 집중되는 동안, 어머니들은 농업 노동에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할 수 있었고, 이것은 남자 형제들의 취학을 가능하게 하는 기반이 될 수 있었다. 1930년대 ‘언니’들의 희생을 기반으로 확립된 농촌 가족의 생존 전략은 이후 한국 근대 가족 이야기의 기본 구도가 되었다. 이런 현상은 해방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약화되지 않고 더욱 확대되었다. 게다가 이런 일하는 ‘언니’들의 모습은 담론과 이미지 속의 여자 어린이상에 제대로 반영되지도 않았다. 실제 가족 전략이 강요한 희생, 또는 헌신은 가족 구성원들에게 각각 다르게 기억되었던 것이다. - P31

해방 이후에도 어머니들이 생산노동에서 벗어나 가사와 육아에 전념할 수 있는 조건은 마련되지 않았고, 어린이가 어린이를 돌보는 풍경도 여전했다. 초등교육 기관이 많이 설립고 여자 어린이의 취학이 급격히 늘어났어도, 언니들이 동생을 돌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손위 여자 형제가 나이 차이 나는 동생들의 양육과 가사의 일부를 담당하는 양상은 한국전쟁 중 더 확대되었다. 1950~1951년 겨울 피난길에는 동생들을 업은 수많은 ‘언니’들이 등장했고, 피난 생활 중에 부모들이 식량을 구하려 떠난 뒤 동생들을 돌보는 것도 소녀들의 몫이었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이 장면들이 한국의 소녀, 혹은 언니들을 대표하는 이미지로 인식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 P32


댓글(6)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단발머리 2023-01-12 09:1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단체로 아이를 키우는 공동육아가 농촌사회에서는 흔했던 것 같아요. 핵가족화, 도시화 되면서 부모와 아이 사이가 더 가까워지기는 했는데 그러면서 오히려 여성의 육아 부담이 가중되었다고 보거든요.

근데, 거리의 화가님 이런 책도 읽으시네요! 완전 멋져요!!! @@

거리의화가 2023-01-12 09:20   좋아요 2 | URL
이 예시는 농촌 현장을 들었지만 산업화로 인한 구조적 변화가 큰 이유인 것 같아요. 때문에 여성은 부담만 더 늘어났죠. 이 구조적인 문제가 여전히 가부장제 시스템과 신자유주의, 산업화와 맞물려 여전하다는 것이 문제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 책은 역사 잡지인데 구독한지는 꽤 되었어요. 한 3년쯤 되었나봅니다^^;

그레이스 2023-01-12 09:1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ㅠㅠ
근현대사 속 여성들의 삶이군요
전 공장에서 일해서 오빠, 남동생 공부시킨 여동생, 누나들의 애환이 생각나네요

거리의화가 2023-01-12 09:21   좋아요 2 | URL
예전에 1960년대 가발공장, 섬유공장 등에서 여성들이 참 많은 국가 산업화에 기여를 했고 그 돈으로 가족들을 먹여 살렸죠. 제대로 된 임금도 받지 못하고 작업 환경은 엄청 열악했구요. 고생이 많았던 시절입니다.

희선 2023-01-13 02: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언니가 아이를 업은 사진이라 하니 바로 《몽실 언니》가 생각나네요 아마 이건 1930년대 뒤 이야기일 텐데...


희선

거리의화가 2023-01-13 09:38   좋아요 1 | URL
희선님 안 그래도 이 칼럼의 도입 부분에 <몽실 언니> 이야기가 나옵니다^^; 유독 아이를 업은 소녀가 많은 사진이나 이미지가 왜 익숙한걸까 그 기원을 쫓는다고 해야겠지요.
 

Chapter4. 정신분석 페미니즘

페미니즘에 있어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은 좋든 싫든 따라다닐 수밖에 없는 개념인가보다.

하지만 여전히 내게는 모호해서 손에 잡히지 않는 듯하여 어렵다.

정신분석에 기반한 페미니즘 이론은 결국 가부장제를 재생산하는 결과를 낳았다.

무의식의 욕망을 의식화해야만, 욕망은 우리를 더 이상 괴롭히지 않게되고, 치유가 일어나게 된다.
의식적 마음이 무의식의 내용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는바로 무의식의 내용이 성적(sexual)이기 때문이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성적인 존재이며, 처음부터 쾌락 원칙(본능적인 리비도적 충동을 만족시키려는 욕망)에 지배 당하고 있다. 유아는가족들과 상호 작용하면서, 성적 쾌락을 몸의 특정 부분들과 연결 - P161

시키는 과정을 통해, 쾌락 원칙을 현실 원칙에 맞춰 조절할 수 있게된다. 구강 단계에서 아이는 엄마의 젖을 빨면서 쾌락을 충족시키고, 항문 단계에서는 배설을 통제함으로써, 마침내 생식기 단계에서는 생식기로부터 쾌락을 충족하게 된다.
그러나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외디푸스 단계다. 프로이트의모델인 외디푸스 콤플렉스의 시작은 여아와 남아 모두 첫사랑의 대상인 엄마와 자신을 동일시하면서, 엄마의 사랑을 쟁취하기 위해서아빠를 경쟁자로 의식하는 것이다. - P162

프로이트에 따르면 무의식은 억압에 의해 통제되고, 유아 성욕은 외디푸스 콤플렉스에 의해 통제된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들을통해 "정상적인 성을 가진 성인의 정체성이 만들어진다. 바로 이것이 정신분석학의 초석이 된다. 그러나 프로이트 자신이 충분히인식하고 있듯이, 이런 과정은 많은 어려움에 봉착하게 되고, 그에따라 소위 "정상" 범위에서 벗어난 다양한 유형의 변칙 형태가 나타나게 된다. 그러므로 "정상" 범위란 종종 변하기 쉽고 또 환상에불과하다. - P163

『정신분석과 페미니즘』은 시몬느 드 보부아르, 베티 프리단, 에바 피지스, 저매인 그리어, 술라미스 화이어스톤, 케이트 밀렛과 같은 페미니스트들의 저작에 나타나 있는 프로이트에 대한 적대감을 나열하는데 대부분의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미첼은 그들이 프로이트의 여성 연구를 프로이트 저작 전체의맥락에서 보지 못한다고 비판한다. 그들은 정체성을 설명하기 위해서 "사회적 현실"과 "의식적 선택" (356)을 앞세우면서, 정작 꼭필요한 무의식과 섹슈얼리티의 우선적인 중요성을 간과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책의 결론에서 미첼은 우리 사회에서 여성의 억압이어떻게 왜 일어나는지 논의한다. 미첼은 외디푸스 콤플렉스가 어떻게 가부장제 시스템 - 남성이 여성을 교환하고, 근친상간을 금지하는 시스템을 제도화하고 유지시키는지 설명한다. 그리고 가부장제가 자본주의에만 특화된 제도인지 아니면 보편적인지 논의하면서, 외디푸스 콤플렉스가 자본주의에만 한정될 수는 없지만, 다른 경제/사회적 맥락이었다면 분명히 다른 형태도 가능했을 거라고 논의한다. - P167

초도로우에 따르면 정신분석만이 젠더 정체성의 획득을 자본주의 핵가족이라는 특정한 사회적 맥락에서 설명하기 때문에 이 문제를 제대로 답할 수 있다고 본다. 즉, "가족이라는 구조가 남녀에서서로 다른 관계적 필요와 능력을 만들어내서, 여성에게는 엄마로서 재생산 영역을 담당하도록 만든다" (51)고 설명한다. 초도로우는 남파리다
아와 여아가 전외디푸스 단계와 외디푸스 단계를 서로 다르게 경험하기 때문에 여성이 기본적인 양육자의 지위를 재생산하게 된다고 주장한다. - P169

조앤의 1인칭 서술은 오로지 자기자신과 독자들을향한다. 어떤 면에서는 남편인 아더(Arthur)를 향한다고 볼 수도 있지만 그리 중요하지는 않다. 자신과의 대화는 정신분석의 "말하기치료"와 상당히 흡사하다. 치료는 피상적이거나 사소해 보이는 증상, 꿈, 판타지로부터 시작해서 무의식에 감춰져있는 이들의 의미를 파악해내는 것이다. - P172

미첼이 지적하듯이, 프로이트는 후기 저작에서 여성에게 전외디푸스단계인 엄마-딸의 관계가 중요함을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딸이 엄마에 대해 수많은 이유로 적대감을 품기도 하지만(합리화처럼 나중에 깨닫게 되는 이유일 수도 있지만), 실은 일반적으로 엄마의 딸의 관계는 매우 양가적이다. 즉, 엄마와 딸 관계는 매우 중요하고강렬한데, 그 이유는 사랑만큼이나 서로 미워하기 때문이다"(57). - P175

미첼은 프로이트의 마조키즘 혹은 고통의 쾌락이란 "여성적인 곤경의 전형"(114)이라고 주장한다. 수동성이란 여성의 외디푸스 컴플렉스가 제대로 해결되지않은 까닭에 생기는 결과이며, 허영심과 질투는 페니스 선망과 거세콤플렉스에 대한 보상의 결과다. 여성에게 정의감이 부족한 것은 여성의 경우 외디푸스적 아버지의 금지 명령을 내면화하지 못하고, 아버지의 금지 명령으로부터 비롯되는 수퍼 에고, 혹은 도덕률역시 잘 내면화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 P179

딸의 엄마들은 딸과 동일한 젠더이고, 그들 자신도 소녀 시절을겪었기 때문에, 아들과 다르게 엄마는 딸을 자신과 분리된 존재로생각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청소년기에서 전외디푸스단계의 엄마-딸의 이슈가 다시 떠올라 중요해지는데 (불안, 강렬하고 배타적인 애착관계, 구순애와 음식, 딸의 몸을 엄마가 통제하려는 욕망,
기본적인 동일시 등), 이러한 현상은 전외디푸스적 엄마-딸의 관계요소가 엄마와 딸의 심리 속에 연장되어 보존되고 있다는 주장을임상적으로 확인시켜주고 있다. (109-10) - P182

미첼은 특정한 사회 맥락에서 정신분석학의 객관적 진리를 추출해내서, 결국 추출한 진리를 보편화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이는 모순적이고 혼란스럽다. 미첼은 책의 끝부분에서 정신분석은 근친상간을 금지하고 여성 교환을 제도화하는 가부장적 법을 보편적화하고 내면화하는 과정을 설명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런 과정은사회마다 다르다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은 똑같은 비판을 받을 수 - P187

있다. 즉, 가부장제는 사회를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인가? 아니면 사회 안에서 불가피한 것인가? 만일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남성이여성을 지배하지 않는 문화를 상상할 수 있단 말인가? 페미니스트정치적 액티비즘은 가부장제적 상황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무엇을할 수 있단 말인가?" - P188

『레이디 오라클』은 낸시 초도로우의 책 『모성의 재생산이 지닌 몇 가지 문제점을 정확하게 보여준다. 초도로우도 미첼과 마찬가지로, 정체성을 형성하는데 언어의 역할을 고려하지 못한다. 초도로우는 전외디푸스시기에 대상 관계에서 양육의 차이에 따라 남녀가 다르게 형성되는 자아 개념에 대해 설명한다. 이 이론은 경험론적이고, 기능적이고 결정론적이라는 비판에 취약하다. 초도로우는 여성의 양육이 만들어내는 "정상"이 실패할 수 있다거나, 불안할 수 있다거나, 뒤집어질 수 있는 가능성을 용납하지 않는다. - P192

그들의 이론은 지나치게 정상성과 적응의 개념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가부장제 구조를 오히려 재생산하게 된다. 정상적인 젠더 발전에 대한 심리적모델로는 동성애와 레즈비어니즘을 설명할 수 없다. 또한 젠더체성이 인종적 차이에 의해 굴절될 수 있음도 설명하지 못한다. - P19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辛巳】二十九年 秦封衛鞅 商於十五邑 號曰 商君


【癸未】三十一年 秦孝公薨 子惠文王立 公子虔之徒 告商君欲反 發吏捕之 商君 亡之魏 魏人不受 復內之秦 商君 與其徒 之商於 秦人 攻殺之 車裂以徇 盡滅其家 初 商君 相秦 用法嚴酷 嘗臨渭論囚 渭水盡赤 爲相十年 人多怨之

상앙의 최후. 법을 강화했지만 그 가혹한 법으로 인해 본인이 형벌을 받았구나.


○ 趙良見商君 商君問曰 子觀我治秦 孰與五羖大夫賢 趙良曰 千人之諾諾 不如一士之諤諤 僕 請終日正言而無誅 可乎 商君曰 諾 趙良曰 五羖大夫 荊之鄙人 穆公 擧之牛口之下 而加之百姓之上 秦國 莫敢望焉 相秦六七年 而東伐鄭 三置晉君 一救荊禍 其爲相也 勞不坐乘 暑不張盖 五羖大夫死 秦國 男女流涕 童子不歌謠 舂者不相杵 今君之從政也 陵轢公族 殘傷百姓 公子虔 杜門不出 已八年矣 君 又殺祝驩而黥公孫賈 詩曰 得人者 興 失人者 崩 此數者 非所以得人也 君之危若朝露 而尙貪商於之富 寵秦國之政 畜百姓之怨 秦王 一旦 捐賓客而不立朝 秦國之所以收君者 豈其微哉 商君 弗從 居五月而難作

輔車相依(보거상의): 순망치한 처럼 같이 사용되는 말 (백리해와 관련된 고사성어)
백리해(향후 오고대부五羖大夫가 됨)
진나라(晋)가 우나라가 가도멸괵을 통보.
백리해가 진나라(秦) 포로로 가게 되었으나 탈출하여 초의 목장으로 감. 진 목공이 백리해를 탐을 내어 그를 데려오려고 했더니 그가 초에 있기에 염소를 주고 데려옴. 미천한 출신이기에 진 목공은 말이 나오지 않게 그를 재상으로 발탁되어 결국 대부까지 오르기에 이름. 백리해가 오고대부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 건 이런 사연이 있었음.

왜 갑자기 오고대부를 끌고 왔는가 궁금했는데 상앙과 비교를 위해서였음. 참으로 탁월한 비유라고 생각되는데. 상앙과 백리해 둘 다 머리도 좋고 계책을 쓰면서 나라를 구했지만 둘의 결말은 확연히 달랐다는 것. 상앙은 주변에 시샘을 자초하면서 거열형에 처해지고 삼족이 멸해진 반면 백리해는 관리들은 물론 백성들에게까지 칭송을 받으며 대대손손 업적을 남긴 대부로 남게 되었음.


댓글(2)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레이스 2023-01-12 08: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기 완독하고 뿌듯했던 기분이 기억납니다.
상앙, 백리해,,, 기억나네요^^

그 기세를 몰아서 자치통감, 한서를 읽으려고 사놓았지만 금세 바람이 빠져버렸습니다. 반드시 읽을겁니다.

왜 여기서 이런 다짐을 하는지 모르겠네요 ㅋㅋ

거리의화가 2023-01-12 09:04   좋아요 1 | URL
그레이스님 그 두꺼운 책을 완독하시다니 역시 갓벽하십니다^^ 안 그래도 사기를 제대로 읽어본 적이 없는 것 같아서 이번 참에 읽어보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흐흐~ 저도 자치통감 올재 버전으로 갖고 있거든요. 지금 춘추좌전 읽는 중입니다^^; 한서는 이북으로 받아놨는데 아직 진행을 못했네요. 그레이스님도 같이 읽으시면 저도 덩달아 열심히 읽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