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만한 당신 세 번째 - 인간다움의 가능성을 넓힌, 가만한 서른 명의 부고 가만한 당신
최윤필 지음 / 마음산책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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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한 당신 첫 번째 부고와 두 번째 부고의 책을 읽지는 못하고 어쩌다 보니 세 번째 부고를 바로 읽게 됐다. 최윤필 기자라는 이름은 종이신문을 구독하면서 알게 되었고 그의 글을 몇 번 읽다보니 좋아서 어느새 <가만한 당신> 칼럼이 언제 실리나 기다리는 독자가 되었다.

세 번째 부고에는 남들보다 앞서서 새로운 것을 만들어낸 사람들, 비정상적인 현실에 의문을 가지고 폭로하거나 기록한 사람들의 사연이 실려 있다.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이들의 부고를 보는 일인데 마음에 동요가 일었다. 이는 그들이 현장에서 부딪히며 감내했을 상황이 자연스레 떠오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한국 사회는 특히나 소수자에 대해서 인색하다. 과거를 돌아보면 나는 학교 다닐 때도, 사회 생활을 하면서도 늘 튀지 않으려고 했다. 다수의 의견에 묻어가는 것이 편하니까 남들과 다른 소수가 되는 순간 질문을 받거나 공격을 당하거나 하는 상황을 너무 많이 보았다. 우리는 왜 다양성을 존중하지 못하는가 생각했던 적이 많다. 남들과 다르다고 결정받는 순간 그 사회에서 그는 매장당하고 쫓겨나게 된다.

서른 명의 주인공들은 스스로 소수자가 되었거나 소수자의 권리를 위해 나서서 투쟁한 이들이다. 이것이 어디 쉬운 일인가. '어떻게 이런 결심을 할 수 있었을까. 어떻게 이런 결행을 할 수 있었을까.' 그 결정들이 비록 전부 옳은 것이 아닐 수는 있다. 하지만 내가 선택한 정의를 위해 몸소 싸우기 위해 나서는 것만으로 이들은 인정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다.

케이트 밀렛은 페미니즘 이론의 고전이자 2세대 페미니즘의 정전인 『성 정치학』을 쓴 주인공이다. 그는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라는 페미니즘 2세대의 슬로건에 해당하는 이론적 철학적 뼈대를 만들었다. 하지만 1970년 무렵 그가 양성애자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레즈비언 진영으로부터는 당당하지 못했다고 비판받고 온건 진영으로부터도 너무 나갔다며 비판받는다. 이후 그의 삶은 너무나 비극적이다. 가족들에 의해 정신병원에 강제 수감되고 13년 간 리튬을 복용했으며 만성적으로 조울증을 앓았다고 한다. 함께 운동을 했던 2세대 페미니스트들이 학자나 교수로, 저널리스트로 지속적인 활동을 하는 동안 밀렛은 제대로 된 직장을 가지지도 못하고 대중에게도 오랫동안 그렇게 잊혔다. 이후에 자신이 썼다고 하는 칼럼의 내용이 너무 마음이 아팠다. 대중을 한 때나마 흔들었던 그가 이제는 하루를, 앞 날을, 미래를 걱정하는 지경에 이르다니 말이다. 부도 명예도 자신이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이겠지만 가난하고 힘이 없고 곁에 지켜주는 이가 없다면 누구든 마지막은 쓸쓸할 수 밖에 없을 것이라는 것이 가슴을 갑갑하게 만들었다.

1998년 밀렛은 <가디언>에 「잊힌 페미니스트의 시간The Feminist Time Forgot」이란 제목의 칼럼을 기고했다. "나는 내가 이룬 것들을 잘 팔아먹을 재주도 없고, 취업할 능력도 없다. 나는 미래가 두렵다. 모아둔 돈을 다 쓰고 난 뒤 닥쳐올 가난이, 감당해야 할 굴욕이, 어쩌면 노숙자의 삶이 겁이 난다." 그 무렵의 그는 언젠가 한 인터뷰에서 베티 프리던과 글로리아 스타이넘 등을 언급하며 "그들은 모두 뛰어난 정치인들이지만, 나는 아니다. '여성해방의 케이트 밀렛'도 아니다"라며 냉소하던 때의 그와 달랐다. (P43~44)

이문자의 이름을 처음 듣고 본다. 한국 여성운동계에서 이렇게 중요한 분을 이제야 알았다니 참으로 죄송한 마음이다. 1983년 6월 '여성의 전화'는 가정 폭력을 추방하고 남녀 평등 관계를 수립해 평화로운 가정과 사회를 이룰 목적으로 창립되었다. 이문자는 1988년 자원봉사자로 '여성의전화'에 참여한 이후 상담부장과 부설 쉼터 관장, 여성인권상담소장 등을 역임하는 동안 수많은 여성 전문 상담가들을 양성하고 성폭력 관련 법 제정 등의 여러 정책을 관철시키기 위한 투쟁에 앞장섰다. 주변의 활동가들이 정치인이나 공직계로 나서서 이름을 날리는 동안 그는 피해자 여성들의 곁을 떠나지 않으면서 정년 퇴직 후에도 '여성의전화' 활동을 계속 거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대외적으로는 그의 이름이 알려지지 못했으나 '여성의전화' 활동가들에게는 '대모'나 '큰언니'로 불리며 존경을 받았다.
오랜 세월 가정 폭력은 외부에서 간섭하면 안 되는, 가정 내에서 해결해야 할 것으로 잘못 인식되었다. 여성은 폭력의 피해자로 소리 없이 죽어가는 경우가 많았을 것이다. 이럴 때 '여성의전화'가 피난처이자 해방구가 되었음은 분명해 보인다.

타협이 정치력의 주요한 일부라면, 이문자는 정치력 있는 활동가가 아니었다. 입에 발린 소리를 혐오했고 스스로도 자신을 직설적이라고, "때로는 거칠고 다혈질적인" 사람이라고 했다. (P85)

왕슈핑은 1991년 저우커우시의 한 혈장 센터 부책임자로 발령받는다. 1985년 9월 미국에서 수입한 혈우병 혈액제제에서 HIV 바이러스가 발견된 이후 중국 당국은 혈장 경제를 통해 중국인의 피로 직접 약을 생산하여 감염을 막기로 한다(에이즈 확산을 막기 위한 방법으로 이런 말도 안되는 방법을 쓰다니 기가 찰 노릇이다). 
왕슈핑은 혈액 샘플 조사를 하며 C형 항체 양성반응이 나오는 것을 확인하고 C형 간염이 바이러스 감염 증식의 의심 요소임을 시 보건국에 보고하였다. 그는 조사방식에 C형 간염을 포함시키고 채혈 방식을 개선해야 한다고 건의했으나 당국은 묵살했다. 1996년 전국의 혈장 센터가 폐쇄되기까지 최소 300만 명이 혈장을 팔았고 이 중 많은 수가 에이즈로 고통받았다. 왕슈핑은 옳은 말을 했다가 내부고발자로 찍혀 결국 미국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1인당 월2회 매혈 횟수 규제는 무의미했다. 한 남성은 이삼일마다 피를 1리터씩 팔았다고 말했다. 채혈 센터에는 하루 평균 적게는 200명, 많게는 500~600명씩 몰려들었다. 그들은 한 번에 500밀리미터씩 두 차례 1리터의 피를 봅은 뒤, 혈장을 분리하고 남은 혈액을 식염수와 섞어 다시 수혈받았다. (...) 1990년대 혈장 경제의 매혈 주체는 주로 여성이었다. 남자의 피는 가문과 혈통의 정수인 반면, 여자의 피는 어차피 생리혈로 흘려버릴 피라는 인식 때문이었다. (P203~204)

비록 때늦은 부고 인사지만 독자에게도 이들을 기억하고 새롭게 각성하는 기회가 되지 않을까, 또 세상에 맞서 싸우며 살다간 이들에게는 위로가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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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3-01-24 02:1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피를 파는 거 하니 위화 소설 《허삼관 매혈기》가 생각나기도 하네요 한국도 예전에 피를 팔았던 적 있는 것 같더군요 예전에 죽은 사람이어도 몰랐던 사람을 알기도 하겠네요 이렇게 글이 되면 덜 잊히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거리의화가 님 남은 연휴 편안하게 보내세요 많이 춥네요


희선

거리의화가 2023-01-24 12:40   좋아요 3 | URL
희선님 안 그래도 본문에 <허삼관 매혈기>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요. 이 소설도 읽어보려구요.
다양한 분들의 부고를 읽으면서 느끼는 바가 많았어요. 날이 많이 춥습니다. 남은 연휴 잘 보내세요^^

새파랑 2023-01-24 09:5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화가님 리뷰를 읽고 책 표지를 다시보니까 표지가 좀 슬퍼보이네요 ㅜㅜ
서른번째 이야기가지 나오겠군요~!!

거리의화가 2023-01-24 12:41   좋아요 4 | URL
슬프게 쓰려는 의도는 없었는데. 이런 책 리뷰쓰는게 저는 더 어렵더라구요ㅠㅠ 쓰고 나서 마음에 안 들어서 지울까 고민했습니다. 서른 분의 부고 이야기가 담겨 있어요. 저마다의 사연으로 감동이 있습니다.

2023-01-24 10: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1-24 12: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 趙王得楚和氏璧秦昭王欲之請易以十五城趙王以問藺相如對曰秦以城求璧而王不許曲在我矣我與之璧而秦不與我城則曲在秦臣願奉璧而往使秦城不入臣請完璧而歸相如至秦秦王無意償趙城相如乃紿秦王復取璧遣使者懷歸趙而以身待命於秦秦王賢而弗誅禮而歸之趙王以相如爲上大夫

조나라의 화씨벽을 인상여가 지켜낸 이야기. 여기에서 완벽이란 단어가 나왔음

【壬午】三十六年秦王會趙王於河外澠池王與趙王飮酒酣秦王請趙王鼓瑟趙王鼓之藺相如復請秦王擊缶秦王不肯相如曰五步之內臣請得以頸血濺大王矣左右欲刃相如相如張目叱之左右皆靡王不豫爲一擊缶罷酒秦終不能有加於趙趙人亦盛爲之備秦不敢動
趙王歸國以藺相如爲上卿位在廉頗之右廉頗曰我見相如必辱之相如聞之每朝常稱病不欲爭列出而望見輒引車避匿其舍人皆以爲恥相如曰子視廉將軍孰與秦王曰不若相如曰夫以秦王之威而相如廷叱之辱其群臣相如雖駑獨畏廉將軍哉顧吾念之彊秦之所以不敢加兵於趙者徒以吾兩人在也今兩虎共鬪其勢不俱生吾所以爲此者先國家之急而後私讐也廉頗聞之肉袒負荊至門謝罪遂爲刎頸之交

조나라와 진나라의 만남에서 인상여의 계책으로 조나라의 체면을 세우다

조나라 재상 염파와 인상여의 문경지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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燕王封樂毅爲昌國君遂使留徇齊城之未下者齊王走莒楚使淖齒將兵救齊因爲齊相淖齒欲與燕分齊地乃遂弑王於鼓里

제나라 왕이 거 땅으로 도망가니 초나라가 요치라는 자로 하여금 병력을 이끌고 제나라를 구원하게 하였다. 그러나 요치가 연나라와 함께 땅을 나누어 가지고자 하여 왕을 시해하였다.

○ 毅聞畫邑人王蠋賢令軍中環畫邑三十里無入使人請蠋蠋謝不往燕人曰不來吾且屠邑蠋曰忠臣不事二君烈女不更二夫齊王不用吾諫故退而耕於野國破君亡吾不能存而又欲劫之以兵吾與其不義而生不若死遂經其頸而死

악의는 왕촉이 어질다는 말을 듣고 사람을 시켜 왕촉을 불러오게 하였으나 그는 사양하고 오지 않았다. 연나라 사람이 마을을 망가뜨리겠다 위협하였으나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고 열녀는 두 남편을 섬기지 않는 법이다. 제왕이 내 간언을 따르지 않기에 퇴직하고 농사나 짓고 있었는데 나라가 위기에 처하고 군주가 망하여 군대로 자신을 위협하니, 의롭지 못하게 살기 보다 죽는 것이 낫겠다.” 하고는 자결하였다.

○ 燕師乘勝長驅齊城皆望風奔潰樂毅修整燕軍禁止侵掠求齊之逸民顯而禮之寬其賦斂除其暴令修其舊政齊民喜悅祀桓公管仲於郊表賢者之閭封王蠋之墓六月之間下齊七十餘城皆爲郡縣

연나라 군대가 승승장구하니 제나라 성에서는 그 기세만 보고도 무너져갔다. 악의는 연나라 군대를 정비하여 침탈을 금지하고 제나라에 뛰어난 인재를 찾아내어 예우하였으며, 부역과 세금을 관대하게 하고 가혹한 명령은 없애고 옛 정사를 닦으니 제나라 백성들이 기뻐했다. 환공과 관중을 교외에서 제사지내고 왕촉의 무덤 봉분을 만들어주면서 여섯 달 사이 제나라 70여 성을 항복시켰다. 제나라 성을 치면서 그것을 아예 없애버리지 않고 그곳의 방식을 존중하는 것이 돋보인다.

【戊寅】三十二年齊淖齒之亂王孫賈從湣王失王之處其母曰汝朝出而晩來則吾倚門而望汝暮出而不還則吾倚閭而望汝今事王王走汝不知其處汝尙何歸焉王孫賈乃攻淖齒殺之於是齊亡臣相與求齊王子法章立以爲齊王保莒城以拒燕

제나라 요치의 난에 왕손가가 왕을 수행하다 왕의 거동을 놓쳤는데 어머니가 ”왕의 거처를 모르니 네가 그러고도 어떻게 돌아오겠느냐?“ 하였다. 왕손가가 요치를 공격하여 죽이니 제나라에서 도망친 신하들이 왕의 아들 법장을 찾아서 끌고 와 제나라의 왕으로 삼고 거성을 지켜 연나라에 항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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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丙子】三十年齊湣王旣滅宋而驕乃南侵楚西侵三晉欲幷二周爲天子燕昭王日夜撫循其人乃與樂毅謀伐齊王悉起兵以樂毅爲上將軍幷將秦魏韓趙之兵以伐齊齊湣王悉國中之衆以拒之戰于濟西齊師大敗遂進軍齊人大亂失度湣王出走樂毅入臨淄取寶物祭器輸之於燕

제나라 민왕이 송나라를 멸한 뒤에 교만해져서 초나라를 침략하고 삼진(진->한,위,조)을 침략하고 이주를 병합하여 천자가 되고자 했거늘 연나라 소왕이 밤낮으로 자기 백성을 잘 보살펴 악의와 더불어 제나라를 정벌할 것을 도모했다. 연나라 왕이 모두 병사를 일으켜서 악의로 상장군을 삼고 진,위,한,조나라 군을 거느리고 제나라를 치니 제나라 민왕이 백성과 함께 저항했다. 제서 지역에서 싸웠으나 제나라 군대가 크게 패하고 마침내 민왕도 달아나 악의가 임치(제나라 수도)에 들어가서 제나라 보물을 취해서 연나라로 가져 갔다.

이주(二周) ->
보통은 일반적인 서주, 동주를 이야기함
주(周)나라 위열왕의 이전 왕인 고(考)왕의 자기 동생을 하남(河南) 땅에 공(公)으로 봉한다. 환->위->혜->무 이렇게 흘러가게 되는데 이를 서주로 이야기함.
혜공의 둘째 아들을 다른 땅에 또 공(公)으로 봉하는데 이를 동주로 이야기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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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좌전 - 하 - 전면개정판 춘추좌전
좌구명 지음, 신동준 옮김 / 인간사랑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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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좌전 2권은 진초(晋楚)가 양분되는 과정, 오월(吳越)이 세력을 다투는 과정이 담겨 있다.

BC 551년부터 473년까지 1권(BC 722~BC552)보다 상대적으로 더 짧은 시기를 다루는데 드라마틱한 사건은 더 많아서 흥미진진하다. 이는 춘추 시대에서 전국 시대로 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춘추 시대 초기만 해도 열국 간 법도와 예의를 따르는 모습을 볼 수 있으나 말기로 갈수록 작은 일로 원한을 갖고 이것이 복수로 귀결되는 과정이 잦아진다. 춘추 시대만 해도 제후들은 '왕'이라는 칭호를 칭할 수 없었는데 가면 갈수록 스스로가 왕을 칭하는 제후들이 많아진다. 제후들은 등급도 나뉘어 있었는데 이에 따라 엄밀한 위계에 따라 행동해야 했으나 나중으로 가면 그런 경계도 허물어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 시기 핵심적인 인물은 역시 오왕의 합려와 월왕의 구천이라 할 수 있다. 둘은 쌍벽을 이루었으나 결국 월왕 구천의 승리로 귀결되지만 그들이 어떻게 열국들 중 승자가 되었는지 과정을 지켜보며 리더의 자격, 정치의 본질이 무엇인지 확인할 수 있었다.

합려는 BC 515년 노 소공 27년, 주 경왕 5년에 주군을 시해하고 등극하였다. 오나라의 공자 광(합려)은 무장한 갑사들을 지하실에 숨겨두고 오왕을 초청해 연회를 베풀었다. 오왕은 호위병을 자신의 주변에 단단히 깔아 놓았지만 합려의 계략에는 미치지 못했다.

공자 광이 발이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지하실로 들어갔다. 그러자 전설제(오나라 당읍 사람)가 물고기 요리 속에 칼을 감추고 들어가 마침내 그 칼을 뽑아 오왕을 찔렀다. 그 순간 호위병들이 양쪽에서 그의 가슴을 피로 마구 찔러 그를 죽였으나 결국 이때 오왕도 시해되고 말았다. 이에 합려는 전설제의 아들을 경으로 삼았다.

오나라에 합려가 새로운 왕으로 등극하면서 주변 열국들은 긴장했고 변경 지역의 긴장은 더했을 것이다. 사실 합려가 등극하는 모습은 이 기술이 다라서 아쉽다는 생각을 했다. 이 때의 모습은 실제 어떠했을까? 실감나는 묘사로 접했다면 더 드라마틱했으리라. 이런 아쉬운 부분은 동주 열국지를 통해서 상세하게 만날 수 있다.

그렇게 등극한 합려는 어떠한 사람이었을까.

오왕 합려가 서(徐)나라 사람을 시켜 공자 엄여를 잡게 하고, 종오 나라 사람을 시켜 공자 촉용을 체포하게 했다. 두 공자가 초나라로 달아났다. 그러자 초소왕이 이들을 이용해 오나라에 위해를 가하려 했다. 그러자 대부 자서가 이같이 간했다.
"오나라의 광(光)은 새로 나라를 차지하고서는 백성들과 매우 가까이 지내고 있습니다. 백성을 마치 자신의 자식같이 대하고, 백성들과 동고동락하고 있으니 이는 장차 그들을 이용하려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오나라의 변경 사람들과 사이좋게 지내 그들을 유복(고분고분하게 복종함)하게 만들지라도 오히려 오나라가 쳐들어올까 두렵습니다. 우리가 그들의 원수를 강대하게 만들어 그들의 분노를 가중시켜서는 안 됩니다. 이제는 강대해지기 시작해 중원의 여러 제후국과 견주게 되었고 군주인 광 또한 마음이 아주 넓어 스스로를 선왕과 같은 반열에 올려놓고자 애쓰고 있습니다. 하늘이 장차 그가 포학하다는 사실을 알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혹여 그를 시켜 오나라를 멸망하게 하고 이성 나라의 영토를 넓히려는 것인지도 알 수 없습니다. 아니면 끝내 오나라를 보우하려는 것인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 결과를 알 날이 그리 멀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어찌하여 잠시 우리의 귀신을 편히 쉬게 하고, 우리 백성들도 안정되게 만들면서 그 결과가 어찌될지 기다려 보지 않는 것입니까. 그러니 굳이 우리가 스스로 파양(힘들게 움직임)할 이유가 있겠습니까."
초(楚)나라의 신포서가 진(秦)나라로 가 구원병을 청하면서 이같이 말했다.
"오나라는 봉시(덩치 큰 멧돼지)와 장사(큰 뱀)처럼 욕심을 부려 중원의 제후국들을 천식(병탄)하고 있으니 초나라가 가장 먼저 그 침해를 입었습니다. 과군이 하신을 시켜 급히 고하기를, '이덕무염(오랑캐 오나라의 욕심은 끝이 없다)'하니 ..."

합려 자체의 인물됨은 오나라 안에서는 후한 평가를 받을 수도 있으나 다른 열국들 안에서는 별로 좋은 평가를 받지는 못했던 것 같다. 왕위에 등극한 이후 지나친 욕심으로 열국들의 긴장을 높였던 탓이지 않았을까.

아무튼 오나라는 월나라가 침입하고, 신포서가 이끄는 초에 패한(BC 505년) 이후 국력이 점차 쇠하게 된다. 합려에 뒤이어 부차가 월왕 구천을 항복(BC 494년)시키기도 했으나 그 기세는 반짝이었다.

월왕 구천의 등장은 묘하게도 오나라가 월나라를 쳤을 때 나타난다.

오나라가 월나라를 쳤다. 월왕 구천(允常의 아들)이 오나라 군사의 진군을 막으면서 취리(절강성 가흥현 남쪽)에 군진을 펼쳤다. 구천은 오나라의 군진이 잘 정비되어 있는 것을 보고 크게 우려했다. 이에 사사(결사대)를 두 차례나 출동시켰으나 이들 모두 포로가 되었을 뿐 오나라의 군사에 아무런 타격도 가하지 못했다. 그러자 다시 죄인들을 3항으로 열을 짓게 한 뒤 각자 자신의 목에 칼을 겨누고 앞으로 나아가면서 일제히 이같이 외치게 했다.
"양국 군주가 교전하는 중에 우리는 기고(군령)를 어겨 두 번 다시 병사가 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제 감히 형을 피할 수 없으니 감히 귀사(죽음으로써 죄를 구함)하고자 합니다." 이에 죄인들이 스스로 목을 베어 차례로 자진했다. 오나라 군사들이 이 광경을 주목하는 사이에 월나라 군사가 일제히 진공해 오나라 군사를 대파했다.

구천은 오나라의 공격을 받아 힘껏 싸웠고 합려는 이 때 엄지발가락에 부상을 입고 가던 중 숨을 거두고 만다. 이로써 구천에게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부차와 구천 간의 대결은 BC 473년 오왕 부차가 월왕 구천에게 포위되어 자살하고 오나라가 멸망하며 비로소 막을 내린다.

월나라가 오나라를 멸망시켰다. 월왕 구천이 오왕 부차에게 용동(절강성 정해현 동쪽의 해도에 위치)에 거처할 것을 허용하자 오왕 부차가 이같이 사양했다.
"내가 이미 늙었는데 어찌 군주를 섬길 수 있겠소."
그러고는 곧 목을 매어 자진했다. 월나라 군사가 오왕 부차의 시신을 이끌고 귀국했다.

건조한 문체로 적힌 간략한 기술이다. 역시 이와 관련한 자세한 상황은 동주 열국지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춘추좌전을 통해 춘추 시대의 역사를 만났다. 춘추좌전은 춘추 시대 열국의 명멸을 편년체 기술로 확인할 수 있는 책이었다. 특히 전쟁을 해야 할 지 말아야 할 지 고민할 때 거북점을 치는 과정도 확인할 수 있었고 인의예지에 입각하여 사건과 인물을 평가한 기술도 특징적이었다. 또한 <시경>과 <서경> 등 과거의 고전이나 경전의 글귀를 인용하여 독자로 하여금 해당 상황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이끈다.

춘추 시대의 역사를 기본적으로 확인하기에 이만한 책이 없다고 생각된다. 향후에도 참고서의 역할로 사용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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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23-01-20 23:4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사기세가 읽으면서 오나라와 월나라의 스토리 읽었는데 지금 거의 다 까먹었어요.
그래도 이름들은 기억이 나네요~~
나름 인간의 처세술이 중요하다는 생각과 뒷통수를 맞아 어쩔수 없는 운명의 슬픔 같은거도 느꼈어요^^

거리의화가 2023-01-23 22:23   좋아요 2 | URL
시간이 지나면 이야기는 잊어버려도 인물들은 기억나는 게 어딥니까^^
춘추좌전 읽는데 어찌나 인간의 마음이 훅훅 변하는지~ㅋㅋ 작은 거에 토라지고 그걸로 인해 싸움이 나고 하는 걸 보면서 오늘날과 다를 바가 없구나 싶습니다^^

여울목 2023-01-21 01: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인간사랑판은 한길사판과 비교해 조금 풀어썼던 기억이 있는데, 좀더 고풍스러운 한길사번역이 멋있었다고 느꼈습니다.
정치의 요체를 알 수있으며, 공자가 시를 공부해야한다고 한 이유를 좌씨전을 읽고서야 알 수있었습니다.
정치에 뜻을 둔 사람이라면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라고 봅니다. 물론 조괄이 병법책 읽듯이하면 아무 소용도 없겠지만서도요.
숙향,자산,안영과같은 인물 앞에서는 무능과 교활한 궤변을 일삼는 사람은 신랄할 비판을 받았을 겁니다.
특히 자산은 매우 훌륭한 정치가라고 생각됩니다.
다만 사건진행이 이해가지않는 경우도 있었는 데,아마도 자세한 사료가 없어져서 그런 것이 아닌가 추측해봅니다. 대표적으로 왜 기씨와 양설씨가 그 정도의 사건으로 멸문되었는지는 의문이었습니다.

거리의화가 2023-01-23 22:53   좋아요 0 | URL
말씀하신 한길사 번역으로도 만나보고 싶네요^^* 저는 사실 번역본 비교할 시간은 없었고 집에 있는 걸로 바로 읽은 경우라서요^^

네. 정치인들 뿐 아니라 리더라면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라고 생각됩니다. 리더의 자질이 어떠해야 하는지와 사람을 쓰는 용인술도 배울 점이 많아 보여요.

저도 참모 중에 자산이 인상깊었습니다. 좌전에서 특히 굉장히 많이 나오더군요. 사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관중 같은 경우보다 어쩌면 더 많이 출현하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구요. 인의예지에 입각한 평가에서도 후한 점수를 받는 인물이었던 것 같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상세하지 않은 부분은 아마도 사료가 부족한 케이스가 아닐까 싶네요. 댓글 감사합니다^^

희선 2023-01-22 01: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리더의 자격과 정치의 본질을 알게 해주는군요 역사에서는 배울 게 많겠지요 그런 걸 잘 못하지만... 역사 중요한데...


희선

거리의화가 2023-01-23 22:30   좋아요 1 | URL
네. 리더들이 꼭 좀 읽었으면 하는 바람이 드는 책이네요. 과거의 리더들의 우여곡절이 여기에 다 나타나 있으니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