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한과 후한을 합쳐서 400년 동안이나 ‘한(漢)‘이라는 이름을 쓰는 왕조가 계속되었다. 진나라의 소전(小篆)을 바탕으로 문자가 ‘한자(漢字)‘라불리게 되었으며, ‘한문(漢文)‘, ‘한시(漢詩)‘, ‘한족(漢族)‘ 등과 같이 한(漢)이라고 하면 곧 중국을 떠올릴 정도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을 중국의 국명으로 의식하는 곳은 일본을 비롯한 한자권뿐이다. 서방 사람들은 한(Han)이라는 명칭에 익숙하지 못하다. 한이 일어나기 전에 진(Chin)이라는 나라가 있었는데, 그 이름이 먼저서방 세계에 알려진 것이다. 영어의 China는 말할 나위도 없이 ‘진(秦)‘에서 나왔다. 인도와 이란에서는 Chin 자체가 지금도 중국을 의미한다.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하기는 했지만 채 20년도 지나지 않아서 멸망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이름이 한보다 잘 알려져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시황제가 통일하기 이전부터 진이라는 국명이 서방 세계에 알려져 있었다. 전국칠웅 가운데서도 진나라는 가장 서쪽에 위치해 있었다. 서방사람들이 동쪽과 교역을 하려면 가장 먼저 만나는 것이 바로 진나라였다. 한나라는 진나라의 뒤를 이었지만 이미 잘 알려진 ‘진‘이라는 국명을 ‘한‘으로 고칠 정도의 힘은 가지고 있지 못했다.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서방과 진 사이의 실크로드를 통한 교역의 역사는 상상 이상으로 오래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 P382
지금 백성을 몰아 농(農)으로 돌아가게 해서 모두 본업에 종사하게 하여, 천하로 하여금 각자 그 힘의 성과)을 먹게 하고, 떠돌이 상공업자로 하여금 남무(南, 남쪽으로 향한 밭)로 모이게 한다면, 곧 풍족하게 축적되어 사람들이 그곳을 즐거워할 것이다. 강제 귀농을 권한 것이다. 가의의 진언이 어느 정도 받아들여졌는지 자세히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농본주의는 한나라의 건국이념이었다. 그것으로 돌아가자는 주장이었다. 건국 당초 고조는 상인에게 농민들보다 무거운 세금을 매겼으며 비단의 착용을 금지했다. 그런데 문제 시절에는 상인들이 연회를 열면 화려한 비단옷을 담장에 걸었다고 하니, 상인들에 대한 차별조치는 폐지되었거나 아니면 유명무실해졌을 것이다. 그렇게 된 것은 상인들의 경제력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문제는 가의의 말에 감동을 받아, 처음으로 ‘적전(籍田)‘을 만들 - P401
고 친히 경작하여 권농의 모범을 보였다고 『한서』에 기록되어 있다. 천자가 몸소 농사를 짓는 적전 의식은 예로부터 있었다고 하는데, 주나라의 선왕(王) 때 폐지되었다고 한다. 그것을 부활시킨 것이지만, 600년 동안이나 행하지 않아 그 형식을 알 수 없었을 테니 부활이라기보다는 창설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 P402
여 씨 일족 토벌은 궁정 안에서만 일어난 싸움이었지만, 오초칠국의난은 상당히 넓은 범위에 걸쳐 있었다. 그러나 아주 짧은 시간에 끝나고말았다. 주아부가 적절하게 대처했으며, 노장인 오왕의 작전 실패도 있었다. 그러나 이 거병이 3개월 만에 평정된 것은 그런 문제보다 민중들에게 전혀지지를 얻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물론 힘든 일도 있었겠지만, 전반적으로 보자면 민중들에게 있어서 당시 상태는 평온한 휴식기였다. "그것이 혼란스러워지기를 바라지 않았다. 제후왕의 나라가 삭감되고 나라가 없어진다 해도 민중에게는 그다지 커다란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 고조 말년에 경포를 토벌한 이후 40년 동안 전쟁다운 전쟁은 없었다. 오왕 유비는 대 경포전에 20세의 나이로 출진했으며, 오초칠국의 난을일으켰을 때는 60세가 넘어 있었다. 대부분의 장병에게 있어서 이 난은첫 번째 전쟁 경험이었다. 일곱 명의 제후왕이 자멸하여, 제후왕의 힘을 약화시켜야 한다는 조조의 정책이 그가 처형을 당해 죽은 뒤에야 실현되었으니 얄궂은 운명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 P416
고대 궁정에서 ‘여성의힘‘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강했다. 경제의 궁정에서 두 태후의실권은 매우 강한 것이었기에 경제는 어머니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원앙의 맹렬한 반대에 경제는 내심 마음을 놓았을지도 모른다. 그 대신원앙은 양왕과 그 측근 모사들의 미움을 사서 암살당하고 말았다. 두 태후는 경제와 양왕 외에도 표(標)라는 딸을 낳았다. 장녀였다. 그녀는 장(長) 공주라 불렸다. 당읍후(堂邑侯) 진오(陳)라는 신분의 격이아래인 사람에게 시집을 갔는데, 종종 궁정에 나타나서 어머니 두 태후와 함께 ‘여성의 힘‘을 발휘하곤 했다. 경제는 어머니와 누나 두 여성에게휘둘렸다고 할 수 있다. - P418
무제 때에 처음으로 연호(年號, 원호(元號))가 등장했다. 즉위한 이듬해가 건원(建元) 원년이다. 건원이 6년 동안 이어지다 원광(元光)이 되었고, 원악(元朔), 원수(元狩), 원정(元鼎), 원봉(元封)으로 6년마다 개원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아무래도 보(寶)을 얻어 ‘원정‘ 이라는 연호를 사용한 것이 최초인 듯하다. 그 이전의 연호는 추명(命)이라고 해서 나중에 붙여진 이름이다. 따라서 원정 6년의 이듬해를 원봉원년이라 삼은 것이 개원의 시초인데, 기원전 110년에 해당한다. 당시제는 47세로 태산에서 봉선을 거행한 해이다. - P438
월왕 구천의 월나라는 전국 시대에 멸망했지만, 그 후에도 월이라는 부족은 중국의 남동부에 몇 개의 그룹으로 나뉘어 할거했다. 그 월 부족 중에서 동쪽에 있던 것을 동월, 민강(江, 복건) 연안에 있던 것을 민원, 광동 방면에 있던 것을 남월이라고 불렀다. 편의상 동월이라고 불렀지만, 후에 정식으로 동월이라는 나라가 생겼기에 동우(절강성 우강(甌江)연안에 있는온주(溫州)지구)에 도읍을 둔 부족을 동우라고 고쳐 불렀다고 생각된다. 중원 사람들은 남방에 관해서는 잘 알지 못했지만, 하나의 정권 밑에있는 것 같지는 않았기에 막연하게 백월(越)이라고 불렀다. 진나라 말기의 난 때, 그들은 파군(君)인 오예(鳴)에게 귀순하여 진나라 토벌을 위한 응원군을 보냈다. - P439
무제 시절에는 지금 당장 하지 않아도 될 일이라도 미래에 필요할지도 모른다고 생각되면바로 착수하려는 기풍이 있었다. 당몽이 야랑국으로 간 것은 진 황후가 무고 사건으로 실각한 원광 5년(기원전 130)의 일이었다. - P443
이렇게 해서 한나라와 전혀 관계가 없었던 서남 각 지방도 드디어 한나라 문화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서남의 소국인 야랑에서는 한나라에대해서 아는 것이 전혀 없었다. 한나라의 사절에게, 한나라와 우리 야랑국 중 어느 쪽이 큰가? 라는 질문을 했을 정도였다. 자신의 분수도 모르고 거만한 태도를 취하는 것을 ‘야랑자대(夜郎大, 야랑은 스스로를 크다고 한다)‘라고 하는 것은 이고사에서 유래하고 있다. 이들 서남의 군소국에서 한나라로 사절이 파견되자, 드디어 한나라의실정을 알게 되었다. - P444
한나라의 흉노 대책은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 충실해진 한나라의 국력, 명장의 활약, 흉노의 약화 등 여러 가지 원인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러나 한나라가 흉노의 사정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는 점도 성공에 커다란 공헌을 했다. 그런 의미에서 장건의 서역 여행은 중요한 사건이었다고 하지 않을 수없다. - P453
상업국가인 대하가 중국과 교역을 원하고 있다는 사실을 장건은 현지에 가서 알았다. 그러나 당시 서역으로 가는 길은 전부 흉노에 의해서 막혀 있었다. 그렇다면 중국 서남부에서 인도를 경유하는 교역로를 개척한다면 한나라의 물산을 대하나 대완으로 가져갈 수 있었다. 실제로 촉의물산이 인도를 경유해서 들어가고 있었다. 이렇게 해서 서남이 공작이 재개되었다. 이것은 단지 교역을 통한 이득만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흉노의세력권을 경유하지 않는 경로를 확보해 두면, 대하, 대월지, 강거, 오손 등과의 동맹 공작이 훨씬 더 손쉬워지는 셈이다. 장건은 거기까지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 P459
한나라는 남월에 9개 군을 두고 직할령으로 삼았다. 담이(瞻耳), 주애(珠崖), 남해(南海), 창오(蒼梧), 울림(鬱林), 합포(合浦), 교지(交附), 구진(九眞), 일남(日南) 등의 군이다. 이 중에서 담이와 주애는 해남도(海南島)에 있고, 교지, 구진, 일남 3개 군은 베트남 북부에 속해 있다. 남월은 월나라 부족과 이주해 온 한족의 잡거지(地)로 당시는 이중 구조를 가진 사회였을 것이라 추측된다. 남월국의 관리 중에는 한족이 많았는데 여가를 사로잡은 것도 한나라 군이 아니라 남월의 낭(郞, 관이었던 도계(都稽)였다. 도계는 공로를 인정받아 한나라의 임채후(臨蔡侯)가 되었다. 남월의 평정이 의외로 빨랐던 것은 지방정권으로서 독립성을 - P466
유지하는 메리트가 그다지 많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남월의 관리는그대로 한나라의 관리가 되고, 의욕이 있는 사람에게는 활약의 무대가넓어지니, 그러는 편이 더 장래성이 있다고 생각한 셈이다. 남월국을 사수하려 했던 것은 여가 등 일부 소충한 사람들뿐이었다. 동월의 여선도 이때 멸망했다. 한나라가 남월로 출병할 때, 한나라를도와 여가를 치겠다고 말해 놓고 실제로는 병사를 내지 않고 남월로 밀사를 보내 내통하고 있었다. 이때 여선은 황제를 칭했다고 한다. 그러나부하에게 살해당하고 말았다. 기록에는 그렇게 되어 있지만, 흉노에 대한 준비를 예전처럼 할 필요가 없게 된 한나라가 그 힘을 합병정책에 쏟아부은 결과일 것이다. - P467
흉노가 강성했을 때, 조선은 한나라의 압박을 받지 않았다. 남월과 ㅁ ‘찬가지로 조선은 한 번도 입조한 적이 없었다. 주위의 소국이 한나라의천자를 만나고 싶다고 청해도 그 상서를 전부 묵살했다고 한다. 이것은어쩌면 한나라의 트집이었을지도 모른다. 흉노의 힘이 후퇴하자, 조선도 드디어 한나라의 간섭을 받게 되었다. 한나라는 섭하(涉何)라는 자를 사자로 보내서 조선왕 우거를 회유하려 했다. 회유의 내용은 자세히 알 수 없지만, 남월에 대한 것과 거의 비슷했을 것이다. 제후와 마찬가지로 3년에 한 번은 입조를 하고, 한나라로통하는 길을 막지 말라는 등의 내용이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조선왕은그것을 거부했다. 할아버지가 어떤 약속을 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조선은독립국으로 할아버지조차 입조한 적이 없지 않은가, 각 만이에게 길을내주는 것은 우리들이 알아서 할 일이라는 이유였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 P4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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