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한과 후한을 합쳐서 400년 동안이나 ‘한(漢)‘이라는 이름을 쓰는 왕조가 계속되었다. 진나라의 소전(小篆)을 바탕으로 문자가 ‘한자(漢字)‘라불리게 되었으며, ‘한문(漢文)‘, ‘한시(漢詩)‘, ‘한족(漢族)‘ 등과 같이 한(漢)이라고 하면 곧 중국을 떠올릴 정도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을 중국의 국명으로 의식하는 곳은 일본을 비롯한 한자권뿐이다. 서방 사람들은 한(Han)이라는 명칭에 익숙하지 못하다.
한이 일어나기 전에 진(Chin)이라는 나라가 있었는데, 그 이름이 먼저서방 세계에 알려진 것이다. 영어의 China는 말할 나위도 없이 ‘진(秦)‘에서 나왔다. 인도와 이란에서는 Chin 자체가 지금도 중국을 의미한다.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하기는 했지만 채 20년도 지나지 않아서 멸망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이름이 한보다 잘 알려져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시황제가 통일하기 이전부터 진이라는 국명이 서방 세계에 알려져 있었다. 전국칠웅 가운데서도 진나라는 가장 서쪽에 위치해 있었다. 서방사람들이 동쪽과 교역을 하려면 가장 먼저 만나는 것이 바로 진나라였다. 한나라는 진나라의 뒤를 이었지만 이미 잘 알려진 ‘진‘이라는 국명을
‘한‘으로 고칠 정도의 힘은 가지고 있지 못했다.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서방과 진 사이의 실크로드를 통한 교역의 역사는 상상 이상으로 오래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 P382

지금 백성을 몰아 농(農)으로 돌아가게 해서 모두 본업에 종사하게 하여, 천하로 하여금 각자 그 힘의 성과)을 먹게 하고, 떠돌이 상공업자로 하여금 남무(南, 남쪽으로 향한 밭)로 모이게 한다면, 곧 풍족하게 축적되어 사람들이 그곳을 즐거워할 것이다.
강제 귀농을 권한 것이다.
가의의 진언이 어느 정도 받아들여졌는지 자세히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농본주의는 한나라의 건국이념이었다. 그것으로 돌아가자는 주장이었다. 건국 당초 고조는 상인에게 농민들보다 무거운 세금을 매겼으며 비단의 착용을 금지했다. 그런데 문제 시절에는 상인들이 연회를 열면 화려한 비단옷을 담장에 걸었다고 하니, 상인들에 대한 차별조치는 폐지되었거나 아니면 유명무실해졌을 것이다. 그렇게 된 것은 상인들의 경제력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문제는 가의의 말에 감동을 받아, 처음으로 ‘적전(籍田)‘을 만들 - P401

고 친히 경작하여 권농의 모범을 보였다고 『한서』에 기록되어 있다.
천자가 몸소 농사를 짓는 적전 의식은 예로부터 있었다고 하는데, 주나라의 선왕(王) 때 폐지되었다고 한다. 그것을 부활시킨 것이지만, 600년 동안이나 행하지 않아 그 형식을 알 수 없었을 테니 부활이라기보다는 창설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 P402

여 씨 일족 토벌은 궁정 안에서만 일어난 싸움이었지만, 오초칠국의난은 상당히 넓은 범위에 걸쳐 있었다. 그러나 아주 짧은 시간에 끝나고말았다.
주아부가 적절하게 대처했으며, 노장인 오왕의 작전 실패도 있었다. 그러나 이 거병이 3개월 만에 평정된 것은 그런 문제보다 민중들에게 전혀지지를 얻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물론 힘든 일도 있었겠지만,
전반적으로 보자면 민중들에게 있어서 당시 상태는 평온한 휴식기였다.
"그것이 혼란스러워지기를 바라지 않았다. 제후왕의 나라가 삭감되고 나라가 없어진다 해도 민중에게는 그다지 커다란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
고조 말년에 경포를 토벌한 이후 40년 동안 전쟁다운 전쟁은 없었다.
오왕 유비는 대 경포전에 20세의 나이로 출진했으며, 오초칠국의 난을일으켰을 때는 60세가 넘어 있었다. 대부분의 장병에게 있어서 이 난은첫 번째 전쟁 경험이었다.
일곱 명의 제후왕이 자멸하여, 제후왕의 힘을 약화시켜야 한다는 조조의 정책이 그가 처형을 당해 죽은 뒤에야 실현되었으니 얄궂은 운명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 P416

고대 궁정에서 ‘여성의힘‘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강했다. 경제의 궁정에서 두 태후의실권은 매우 강한 것이었기에 경제는 어머니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원앙의 맹렬한 반대에 경제는 내심 마음을 놓았을지도 모른다. 그 대신원앙은 양왕과 그 측근 모사들의 미움을 사서 암살당하고 말았다.
두 태후는 경제와 양왕 외에도 표(標)라는 딸을 낳았다. 장녀였다. 그녀는 장(長) 공주라 불렸다. 당읍후(堂邑侯) 진오(陳)라는 신분의 격이아래인 사람에게 시집을 갔는데, 종종 궁정에 나타나서 어머니 두 태후와 함께 ‘여성의 힘‘을 발휘하곤 했다. 경제는 어머니와 누나 두 여성에게휘둘렸다고 할 수 있다. - P418

무제 때에 처음으로 연호(年號, 원호(元號))가 등장했다. 즉위한 이듬해가 건원(建元) 원년이다. 건원이 6년 동안 이어지다 원광(元光)이 되었고, 원악(元朔), 원수(元狩), 원정(元鼎), 원봉(元封)으로 6년마다 개원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아무래도 보(寶)을 얻어 ‘원정‘
이라는 연호를 사용한 것이 최초인 듯하다. 그 이전의 연호는 추명(命)이라고 해서 나중에 붙여진 이름이다. 따라서 원정 6년의 이듬해를 원봉원년이라 삼은 것이 개원의 시초인데, 기원전 110년에 해당한다. 당시제는 47세로 태산에서 봉선을 거행한 해이다. - P438

월왕 구천의 월나라는 전국 시대에 멸망했지만, 그 후에도 월이라는 부족은 중국의 남동부에 몇 개의 그룹으로 나뉘어 할거했다. 그 월 부족 중에서 동쪽에 있던 것을 동월, 민강(江, 복건) 연안에 있던 것을 민원, 광동 방면에 있던 것을 남월이라고 불렀다. 편의상 동월이라고 불렀지만, 후에 정식으로 동월이라는 나라가 생겼기에 동우(절강성 우강(甌江)연안에 있는온주(溫州)지구)에 도읍을 둔 부족을 동우라고 고쳐 불렀다고 생각된다.
중원 사람들은 남방에 관해서는 잘 알지 못했지만, 하나의 정권 밑에있는 것 같지는 않았기에 막연하게 백월(越)이라고 불렀다. 진나라 말기의 난 때, 그들은 파군(君)인 오예(鳴)에게 귀순하여 진나라 토벌을 위한 응원군을 보냈다. - P439

무제 시절에는 지금 당장 하지 않아도 될 일이라도 미래에 필요할지도 모른다고 생각되면바로 착수하려는 기풍이 있었다.
당몽이 야랑국으로 간 것은 진 황후가 무고 사건으로 실각한 원광 5년(기원전 130)의 일이었다. - P443

이렇게 해서 한나라와 전혀 관계가 없었던 서남 각 지방도 드디어 한나라 문화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서남의 소국인 야랑에서는 한나라에대해서 아는 것이 전혀 없었다. 한나라의 사절에게,
한나라와 우리 야랑국 중 어느 쪽이 큰가?
라는 질문을 했을 정도였다. 자신의 분수도 모르고 거만한 태도를 취하는 것을 ‘야랑자대(夜郎大, 야랑은 스스로를 크다고 한다)‘라고 하는 것은 이고사에서 유래하고 있다.
이들 서남의 군소국에서 한나라로 사절이 파견되자, 드디어 한나라의실정을 알게 되었다. - P444

한나라의 흉노 대책은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 충실해진 한나라의 국력, 명장의 활약, 흉노의 약화 등 여러 가지 원인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러나 한나라가 흉노의 사정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는 점도 성공에 커다란 공헌을 했다.
그런 의미에서 장건의 서역 여행은 중요한 사건이었다고 하지 않을 수없다. - P453

상업국가인 대하가 중국과 교역을 원하고 있다는 사실을 장건은 현지에 가서 알았다. 그러나 당시 서역으로 가는 길은 전부 흉노에 의해서 막혀 있었다. 그렇다면 중국 서남부에서 인도를 경유하는 교역로를 개척한다면 한나라의 물산을 대하나 대완으로 가져갈 수 있었다. 실제로 촉의물산이 인도를 경유해서 들어가고 있었다.
이렇게 해서 서남이 공작이 재개되었다.
이것은 단지 교역을 통한 이득만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흉노의세력권을 경유하지 않는 경로를 확보해 두면, 대하, 대월지, 강거, 오손 등과의 동맹 공작이 훨씬 더 손쉬워지는 셈이다. 장건은 거기까지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 P459

한나라는 남월에 9개 군을 두고 직할령으로 삼았다. 담이(瞻耳), 주애(珠崖), 남해(南海), 창오(蒼梧), 울림(鬱林), 합포(合浦), 교지(交附), 구진(九眞),
일남(日南) 등의 군이다. 이 중에서 담이와 주애는 해남도(海南島)에 있고,
교지, 구진, 일남 3개 군은 베트남 북부에 속해 있다.
남월은 월나라 부족과 이주해 온 한족의 잡거지(地)로 당시는 이중 구조를 가진 사회였을 것이라 추측된다. 남월국의 관리 중에는 한족이 많았는데 여가를 사로잡은 것도 한나라 군이 아니라 남월의 낭(郞, 관이었던 도계(都稽)였다. 도계는 공로를 인정받아 한나라의 임채후(臨蔡侯)가 되었다. 남월의 평정이 의외로 빨랐던 것은 지방정권으로서 독립성을 - P466

유지하는 메리트가 그다지 많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남월의 관리는그대로 한나라의 관리가 되고, 의욕이 있는 사람에게는 활약의 무대가넓어지니, 그러는 편이 더 장래성이 있다고 생각한 셈이다. 남월국을 사수하려 했던 것은 여가 등 일부 소충한 사람들뿐이었다.
동월의 여선도 이때 멸망했다. 한나라가 남월로 출병할 때, 한나라를도와 여가를 치겠다고 말해 놓고 실제로는 병사를 내지 않고 남월로 밀사를 보내 내통하고 있었다. 이때 여선은 황제를 칭했다고 한다. 그러나부하에게 살해당하고 말았다.
기록에는 그렇게 되어 있지만, 흉노에 대한 준비를 예전처럼 할 필요가 없게 된 한나라가 그 힘을 합병정책에 쏟아부은 결과일 것이다. - P467

흉노가 강성했을 때, 조선은 한나라의 압박을 받지 않았다. 남월과 ㅁ
‘찬가지로 조선은 한 번도 입조한 적이 없었다. 주위의 소국이 한나라의천자를 만나고 싶다고 청해도 그 상서를 전부 묵살했다고 한다. 이것은어쩌면 한나라의 트집이었을지도 모른다.
흉노의 힘이 후퇴하자, 조선도 드디어 한나라의 간섭을 받게 되었다.
한나라는 섭하(涉何)라는 자를 사자로 보내서 조선왕 우거를 회유하려 했다. 회유의 내용은 자세히 알 수 없지만, 남월에 대한 것과 거의 비슷했을 것이다. 제후와 마찬가지로 3년에 한 번은 입조를 하고, 한나라로통하는 길을 막지 말라는 등의 내용이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조선왕은그것을 거부했다. 할아버지가 어떤 약속을 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조선은독립국으로 할아버지조차 입조한 적이 없지 않은가, 각 만이에게 길을내주는 것은 우리들이 알아서 할 일이라는 이유였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 P4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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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辛丑】五十五年
秦左庶長王齕伐韓攻上黨拔之上黨民走趙趙廉頗軍於長平以按(遏)據上黨民王齕因伐趙趙軍戰數不勝廉頗堅壁不出趙王以頗失亡多而更怯不戰怒數讓之應侯使人反間曰秦之所畏獨畏馬服君之子趙括爲將爾廉頗易與且降矣趙王遂以趙括代頗將藺相如曰王以名使括若膠柱鼓瑟括徒能讀其父書傳不知合變也王不聽

왕흘이 조나라를 정벌하도록 시켰으나 승리하지 못하고 염파가 성벽을 지키면서 출전하지 않자 조왕은 화를 내었다. 이 때 진나라 응후(범저)가 간자를 보내 조왕이 조괄(趙括)을 염파 대신 쓰도록 만든다. 재상 인상여는 조괄을 써서는 안된다고 간언했으나 조왕이 듣지 않았다.

○ 初趙括自少時學兵法以天下莫能當嘗與其父奢言兵事奢不能難然不謂善括母問其故奢曰兵死地也而括易言之趙若將括破趙軍者必括也及括將行其母上書言括不可使王曰吾已決矣母曰卽有不稱妾請無隨坐王許之

○ 秦王聞括爲趙將乃陰使武安君爲上將而王齕爲裨將令軍中有敢泄武安君將者

○ 趙括至軍悉更約束易置軍吏出兵擊秦武安君佯敗而走張二奇兵以劫之趙括乘勝追造秦壁堅拒不得入奇兵絶趙軍之後趙軍食絶四十六日皆內陰相殺食趙括自出銳卒搏戰秦人射殺之趙師大敗卒四十萬人皆降武安君乃挾詐而盡坑殺之遺其小者二百四十人歸趙

조괄이 어린 나이에 자신이 잘났다 여겼다. 부모는 이를 알아보고 그를 장수로 써서는 안된다고 생각했으나 결국 조왕은 듣지 않았다. 진나라 왕은 조괄이 장수가 되었다는 말을 듣고 무안군을 상장군으로, 왕흘을 비장군으로 삼아 군을 이끌게 했다. 경험이 부족한 조괄은 무안군의 꾀에 제대로 넘어가 죽고 병졸들은 구덩이에 빠져 죽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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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3-01-27 21: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장평대전에 대한 이야기인가요.

모친도 말린 조괄을 사령관으로
기용했다가 일패도지한 고사인
가 보네요.

수십만 포로를 학살한 무안군의
말로도 참 그렇네요.

거리의화가 2023-01-27 21:37   좋아요 0 | URL
맞아요 매냐님 딱 그 부분입니다^^ 무안군 말로는 내일 나오는 것 같네요. 병사들을 40만이나 학살한 것은 좀 그랬습니다. 그냥 돌려보내주지~ㅠㅠ

여울목 2023-01-28 00: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조괄의 경우를 음미하면 서적을 읽어 공부한다는 의미를 깊이 생각하게합니다.
촉한의 제갈량과 전진의 왕맹은 많지 않은 나이에 출사하였으나, 중국사를 통틀어 위대한 정치가라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아마 출사당시의 나이가 장평대전에서 총대장이 된 조괄보다 나이가 많지는 않았으리라 생각합니다.

명장 조사가 아들인 조괄에 대해 몹시 우려한것에 대해 그 이유를 깊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관료로 근무한 적이 없었던 제갈량이나 왕맹이 등용되자마자 능력을 인정받을 수있는 요인중 하나는 서적을 통한 공부를 할 때 매우 통찰력이 있게, 피상적이지 않게, 실제에 와닿게끔 독서를해서 그런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같은 재료를 갖고 있어도 이용하는 사람에 따라 결과는 전혀다릅니다.

독서를 제대로하는 것이 어떤것인지 설명할 수는 없으나, 조괄은 독서를 제대로 하지 못했고 제갈량이나 왕맹은 제대로 독서를 한 사람이라고 봅니다. 물론 좌전의 자산, 안영,숙향도 제대로 한 사람이고요.

거리의화가 2023-01-28 19:59   좋아요 0 | URL
조괄의 근자감은 같은 나이여도 독서 등을 통한 간접 경험의 부족이 있어서일수도 있겠지요. 어린 나이여서 사회 경험이 없지만 그럼에도 다른 결과가 나오는 것을 보니 흥미롭습니다.
 

괴통의 말은 곧 천하삼분지계(天下三分之計)였다. 당시 초의 항우와 한의 유방은 혈투에 혈투 - P305

를 거듭하고 있었다. 양쪽 모두 타격을 입어 힘이 약해졌다. 이 두 거두(巨頭)의 힘이 약화되면 제삼 세력이 진출하여 그들과 대등한 입장이 될가능성이 있었다. 제삼의 세력이 될 수 있는 것은 제의 왕이 된 한신뿐이었다. 당시 한신의 힘은 물론 두 거두에게는 미치지 못했지만, 그가 초에붙으면 초는 천하를 취할 수 있으며, 한은 그 없이는 패업을 이룰 수가없었다. 이런 그에게 괴통은 초에도 한에도 붙지 말고, 음천하를 삼분하여 정(鼎足, 다리가 셋인 정(鼎)에 비유한 것만 같지 못합니다.
라고 권했다.
그러나 한신은 한왕 유방의 은덕을 배신할 수 없다고 대답했다. 괴통은,
용략(勇略)으로 주인을 떨게 하는 자는 몸이 위태로우며, 공이 천하를 덮는 자는 상을 받지 못한다.
는 속담을 들려주었다. - P306

유방은 처음부터 함께한 부하들의 힘만으로는 천하를 잡을 수 없었을 것이다. 천하를 잡기 위해서는 한신, 팽월, 경포세맹장이 필요했다.
한왕 신과 같은 지방 세력의 도움도 얻어야만 했다. 그러나 일단 천하를잡은 뒤에는 야심만만한 이들 맹장들에게 상당한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고조는 결국 가장 간단한 방법, 즉 모반을 일으켰다는 누명을 씌워 주살하는 똑같은 패턴으로 그들을 정리했다. - P318

지금의 왕조가 멸망하면 자신들도 멸망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은 주어진 지방을 열심히 지키려 할 것이다. 그러나 그 지방, 즉 ‘제후국‘은 너무넓어서도 안 된다. 요소요소에 적당한 크기의 나라를 만들어 거기에 황족을 왕으로 세우는 것이 한나라의 국책이었다. 물론 천하의 대부분은군현이었다. 군현제를 주로 하고 거기에 봉건제를 약간 가미한 절충적 제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일반적으로 군국제(郡國制)라고 한다.
한신이 강등된 뒤, 초를 둘로 나누어 회동(東)의 3군 53현에 형왕(荊王) 유가(劉賈)를 세웠으며, 설(薛), 동해(東海), 팽성(彭城) 336현에 초왕유문(文)을 세웠다. 제후국을 가능한 한 작게 하려 했다.
※ 이들 나라에는 각각 상(相, 승상)을 비롯하여 중앙 정부 관료기구의 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존재했다. 독립성이 매우 강해서 한 제국은후에 이들 때문에 골머리를 썩게 된다. 제왕은 당연히 그 나라에 머물면서 가끔 입조(상경)하게 되어 있었다.
황실의 번병이기 때문에 왕의 나라도 군대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그 군대를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왕이 아니라 황제뿐이었다. 또 나라의 상(相) 등도 중앙 정부가 임명하는 것이 원칙이었기 때문에 제도상으로는독립 왕국이 되어 중앙에서 이탈할 수 없는 구조였다. - P323

여태후는 차근차근 여 씨 일족의 천하를 구축해 나갔다. 무력 이외에정권을 지킬 수 있는 것은 없다는 생각에서 조왕인 여록을 상장군으로삼아 북군을 지휘토록 했으며, 여왕(王)인 여산으로 하여금 남군을 통솔케 했다. 조왕과 여왕양(梁)을 개명하여 여라 칭했다)은 영국(國)이 있으면서도 그곳으로는 부임하지 않고 장안에서 군대를 장악했다.
그러나 여태후가 있었기에 여 씨 일족이 득세할 수 있었다. 혜제가 재위했던 8년 동안을 포함해서 여태후가 집권한 것은 거의 15년 동안이었다. 여후 일족의 천하는 여태후의 죽음과 함께 막을 내렸다. 혜제의 죽음이후 명목상의 황제는 있었지만, 여태후가 만들어 낸 가짜였기 때문에사가들은 이 15년 동안의 후반을 어떻게 불러야 할지 고민한 끝에 고후(高后) 몇 년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 P358

살아남은 역전의 호걸들이 어째서 여 씨 일족의 전횡을 용납한 채 침묵을 지키고 있었는가 하는 문제로 되돌아가자. 가장 큰 이유는 여 씨일족 진영에는 그리 대단한 인재가 없었기에 그들의 전횡도 어차피 여태후가 죽고 나면 끝이라는 마음이 모두에게 있었기 때문이라고 여겨진다.
나이 많은 여태후의 죽음을 가만히 기다리고만 있으면 되는 일이었다. - P360

삼족죄와 요언령 등은 법률지상주의, 엄벌주의였던 진나라 제도의 잔재와도 같은 것이었다. 진나라의 색채가 점차 사라지면서 그것이 백성의휴식에도 도움이 되기도 했다.
이 두 개의 악법이 폐지되었을 때, 특히 그것이 혜제의 유지강조되었다.
혜제 유영은 나약하기는 했지만 인도주의자 휴머니스트였다. ‘혜‘라는시호에 어울린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그가 유약했기 때문에 여후가위험한 공신들의 숙청에 목숨을 걸다시피 열을 올렸는지도 모른다.
이 시대에 대해서 사마천은 사기 여후본기」속에서,
여민(黎民, 서민)은 전국(戰國)의 고통에서 벗어났고, 군신(君臣) 모두 음가 무위하게 휴식하기를 바랐다. 따라서 혜제는 팔짱을 낀 채 아무것도 하지 않았으며, 고후는 여주(女主)로서 제(制, 칙서)를 칭하고, 정(政)은 방호(房戶, 후궁의 문)를 나서지 않아 천하가 평온했다. 형벌을 드물게 썼고, 죄인 역시 드물었으며, 산업에 힘써 의식은 더욱 늘었다.
라고 높이 평가했다. - P3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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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었지만 설 연휴는 잘 보내셨는지^^;
오며 가며 차가 많이 막혔고 설겆이의 홍수에 허리가 나갈 뻔 했으나 무사히 잘 넘기고 돌아온 것 같다.

최소 매달 하루는 휴일을 보내자 해서 오늘은 휴가를 내고 쉬고 있다.
사실은 다른 날 내고 싶었으나 오늘 저녁에 온라인 강연이 있는 바람에…
예전에는 오프라인 강연도 자주 갔었으나 이제는 사는 곳이 서울과 거리도 멀어지고 해서인지 온라인 강연만 찾게 된다.

아무튼 오늘 강연은 역사비평 141호 컨텐츠와 관련된 것이다.
깊이 이해하는 시간이라고 해야겠다. 강연에서 얻고 배울 수 있는 것은 역시 개인적으로 읽고 끝내는 것보다 교류 속에서 나오는 확장성이라고 해야할 것이다.
강연 때문에 부랴부랴 읽었는데 좀 더 일찍 읽고 정리하면 좋았을걸 싶다.

잃.시.찾 을 읽기 시작했다. 책에 흔적이 있는 걸 보면 과거 분명 읽었던 것일텐데 왜 기억에는 전혀 없을까. 그 때는 뭐가 뭔지 모르고 읽었는데 이번에는 그래도 문장을 따라가는데 어려움은 없어 보인다. 다만 주석에 달려 있는 내용들은… 그러려니 하면서 넘어가고 있다. 그것까지 이해하기에는 쉽지 않을 것 같다.


아침부터 이 곳은 눈이 많이 내렸다.
오늘 회사를 나갔다면 출퇴근이 쉽지 않았을 것 같다.
지금은 그나마 그쳤는데 더 이상 오지 않기를 바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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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3-01-26 18: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런 날엔 온라인 강의로 들어야 😄
오늘은 스노우 랜드
낼은 빙판길 ㅠㅠ
화가님 역사 수업 응원합니다^^


거리의화가 2023-01-26 18:41   좋아요 1 | URL
아무래도 내일은 무조건 빙판길일 예감이죠? 그래도 내일만 나갔다 오면 주말이라는 것에 위안을 삼습니다. 스콧님 응원 감사해요^^

바람돌이 2023-01-26 18: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늘 밤에 부산에도 드디어 눈이 온대요. 1cm정도? 저런 눈은 낮에 내리면 절대 안쌓이고 날리고 끝이지만 밤에 내리면 아마 아침에는 쌓여 있을 듯요. 내일 부산분들 출근길이 지옥길이 될테지만 그래도 눈온다니 좋은 이 마음은 부산 울산쪽 사람들만이 가지는 마음이겠죠. ㅎㅎ
시민을 위한 한국사 2권을 샀는데 책이 두꺼운건 알고 있었지만 판형이 커서 와 진짜 장난 아닌 벽돌책이 왔어요. 아 이거 언제 읽나하면서 2권 다 읽으신 화가님 생각 했어요. ㅎㅎ(물론 땡투도 했어요. ㅎㅎ)

거리의화가 2023-01-26 21:13   좋아요 1 | URL
부산에도 눈이 오는군요^^ 여기는 눈이 녹으니 또 눈이 와서...ㅎㅎ 쌓이지 않았으면 했으나 굵은 눈발로 내린데다 양도 제법, 날이 추워서 쌓여서 얼었네요. 내일도 어김없이 빙판길이 될 것 같습니다. 예전에 남쪽 지방에 눈이 왔을 때 제설 장비가 잘 안 갖춰져 있어서 시민들 출퇴근길이 힘들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네요. 모쪼록 내일 나가신다면 조심해서 다니시길!ㅎㅎ
시민의 한국사 두툼하죠. 커버 재질 때문인지 더 무겁게 느껴지는 것도 있는 것 같아요. 재미나게 읽으시길 바랍니다 땡투도 감사하구요^^*

2023-01-26 19: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1-26 21: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희선 2023-01-28 02: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설연휴에 설거지 많이 하셨군요 그때가 지나갔네요 큰 명절 하나... 명절 지나고 하루 쉬셔서 다행입니다 가까운 곳에서 바로 듣는 것도 좋지만, 추울 때는 온라인 강연도 괜찮겠습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2023년에 다 만나시기 바랍니다 2023년이 끝날 때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만난 거리의화가 님이 되시겠네요

거리의화가 님 주말 편안하게 보내세요


희선

거리의화가 2023-01-28 20:07   좋아요 0 | URL
네. 요리를 못해서 음식을 해도 도움이 안되고 해서 결국 설겆이 담당이 되네요^^; 식구들이 많다보니 음식의 양이 많고 그러다 보니 설겆이 양도 같이 늘어나는게 힘듦이라면 힘듦일까. 명절 바로 다음날 쉬지 않고 그 다음날 쉬는 것도 괜찮던데요?ㅎㅎ
올해 마무리할 때쯤 되었을 때 잃.시.찾 완독자가 된다고 생각하니 좀 설렙니다!
감사해요 희선님. 즐거운 주말 보내시길*^^*
 

부국강병 경쟁으로 각국은 앞다투어 유능한 인물을 등용했으며 정치개혁을 꾀했다. 그러나 가장 유효한 정치개혁을 단행한 것은 서쪽의 진(秦)나라였다.
진나라는 동주(東周)가 된 뒤에 비로소 제후에 봉해진 새로운 국가였다. 삼진(三晋)과 전제(齊)는 찬탈 정권이기는 했지만, 나라 자체는 오래되었으며 예전의 제도나 관습을 그대로 계승했다. 여러 가지 저항이 있었기 때문에 과감한 개혁도 마음대로 행할 수가 없었다. 그런 점에서 진나라는 고려해야 할 오래된 관습도 없었고, 개혁에 대한 반발도 다른 나라에 비해서 비교적 적었다. - P87

무령왕은 감정의 기복이 격한 사람이었던 듯하다. 미인 맹요를 얻자그녀와 함께 틀어박혀 몇 년 동안이나 조정에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그만큼 정열적인 사람으로, 말을 타고 활을 쏘는 이른바 ‘호복기사‘를 도입해 조나라 군제의 체질 개선에 성공한 것은 그것의 좋은 면이 나타난 것이다. 그러나 가정에서 애정의 균형을 유지하지 못했다는 데 정열적인 사람의 비극이 있었다. 그의 격렬한 감정의 기복은 왕족과 중신들의 두려움의 대상이었으며, 그것이 그의 목숨을 빼앗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그 후 조나라는 염파(廉), 인상여(如) 등과 같은 현명하고 재능있는 사(士)를 배출했기에 무령왕의 죽음이 더욱 안타깝게 여겨진다. - P106

전국사군에게서는 ‘협(俠)‘의 냄새가 진하게 풍긴다. 임협은 미묘한 차이로 난폭함이 되기도 하고 무뢰함이 되기도 한다. 맹상군이 ‘계명구도‘
무리들의 도움으로 진나라에서 탈출하여 돌아가던 도중, 조나라의 평원군에게 들렀을 때 길가에 있던 사람이 "뭐야, 소인배잖아"라고 말하자,
화를 내며 주위에 있던 수백 명을 죽이고 한 현(縣)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것은 폭력집단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왕의 밑에 있었던 사군은 행동대원이나 자객 같은 사람들을 데리고있으면서 왕의 이름으로는 할 수 없는 일들을 했다. 왕의 별동대 같기도하고, 때로는 그 세력에서는 왕을 능가한 것이 아닌가 여겨지는 경우도있었다. - P114

초나라의 회왕은 굴원의 반대파들의 말이 이치에 합당하다고 생각했다. 친진 정책을 취하기로 했다. 굴원은 왜 그것을 막지 못했을까? 그렇게도 표현력이 풍부했던 그가 왕을 설득하지 못했다는 것은 믿을 수 없다.
상관대부인 근상이나 자란(蘭) 등과 같은 반대파 사람들이 굴원보다더 뛰어난 설득력을 가지고 있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그들 뒤에 무시무시할 정도의 책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그 책사에게 놀아났던것이라고밖에는 생각되지 않는다.
장의(張儀)라는 괴물이 있었다.
전국 시대에 제후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유세하던 책사들을 ‘종횡가(縱橫家)‘라고 부른다. 춘추 시대 때부터 이런 부류의 유세외교가들이 있었는데, 고전을 인용하여 의(義)를 주장하고 예(禮)를 주장했다. 그러나 전국 시대에 접어들면서 그들은 오로지 이해(利害)에 관한 것만을 주장했다.
장의는 전국의 종횡가를 대표하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P132

변설가에 대한 사마천의 비평은 상당히 가혹한 편이다. 『사기』는 오기에 대해서,
각폭(刻暴, 각박하고 잔혹함) 소은(少恩, 인정이 없음)함으로 자신의몸을 망쳤다. 슬프다.
어라고 기록했고 상앙에 대해서는,
상군(商君)은 천자(天資, 타고난 자질)가 각박한 사람이다.
라고 평했으며 소진과 장의를 묶어,
요컨대, 이 두 사람은 참으로 경위(傾危, 위험한 사(士)이다.
라고 단정했다.
우리는 이런 사람들에게 매우 감탄을 하지만 개인적으로 사귈 수는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 P150

천하가 통일되어 하나의 커다란 강국이 태어나는 것이 과연 백성들에게 행복을 가져다주는 일일까? 모략가들에게 있어서 그것은 아프리오리(설명이 필요 없는 선험적 원리)였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하고 의문을 제기한사람들이 있었다. 때때로 언급한 적이 있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노장사상(老莊思想)이었다. - P151

순자는 진나라가 왕자(王者)가 되기에는 아직 멀었다고 판단했다. 다른 6개국보다는 뛰어나지만 순자가 이상으로 삼고 있는 왕도는 훨씬 더 높은 곳에 있었다. 진나라가 거기에 미치지 못하는 이유를 순자는,
대부분에 유(儒) 없기 때문이 아닐까.
라고 추론했다.
보기에 모든 것은 훌륭하지만, 거기에 하나의 중심이 되는 것이 없었다. 유가에 속한 순자에게 있어서 그 중심이란 유(儒)의 정신이었다. 그것이 없다는 것이다. - P196

유자는 정치와 사회를 비판한다. 한비가 보기에 이는 말로써 법을 어지럽히는 것이다. 협자는 힘으로 억지를 부린다. 이는 무로 금을 범하는것으로 양쪽 모두 절대적이어야 할 ‘법‘에 위반되는 것이다. 무례한 무리들임에도 불구하고 위에 있는 사람들은 유자(儒者)와 협객(俠客)을 앞다투어 예우한다는 것이다. 식객이 3천 명이라 일컬어졌던 전국사군의 빈객들도 대부분 유자나 협자였을 것이라 여겨진다. 군주는 비생산적이고국가의 근본인 법에 반하는 무례한 자들을 우대해서는 안 된다고 한비는 주장했다.
시황제의 입맛에 꼭 맞는 학설이었다. 후에 나타나는 시황제의 반유가적 행동은 한비의 영향을 크게 받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 P208

지금은 위청과 곽거병의 인물됨을 비교하는 자리다. 위청은 부하에게자비롭고 그들을 사랑하고 존경했지만 전장에서 그들을 토개처럼 부리지 못하는 성격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곽거병은 부하를 생각하는 마음이 전혀 없었다. 그리고 전장에서는 틀림없이 부하를 토개처럼 부렸을것이다.
무제가 보기에는 곽거병이 더 믿음직했을 것이다. - P259

진승이 왕위에 머문 것은 겨우 6개월에 불과했다. 그 전까지는 징용된일개 병사였는지 인부였는지도 잘 알 수 없는 인물이었다. 그런 사람이새로운 시대의 막을 여는 중요한 역할을 해내었다. 진승이 먼저 일어난뒤 항우가 나타났으며, 다시 유방이 나타나 역사가 바뀌었다. TOUS한나라의 천하가 된 뒤, 진승 무덤 가까이에 그 무덤을 지키기 위해서른 집이 배치되었으며 제사가 계속 올려졌다.
당시의 상태로 봐서 진나라는 그렇게 오래가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그때 진승이 군사를 일으키지 않았다면, 한나라가 진나라의 후계자가 되었을지는 알 수 없다. 그보다 10년만 더 늦었더라도 유방은 나이 때문에천하를 다투지 못했을 것이다. 진승이 거병했을 때, 유방은 채 마흔이 되지 않은 가장 좋은 연령대였다. 그런 의미에서 진승은 한 왕조의 은인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 P270

소수정예의 부대만을 거느린 항우는 양면전쟁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항우의 약점이 바로 거기에 있었다. 소수정예이기 때문에 전쟁이 오래지속되면 어려움을 겪었다. 정병은 그렇게 간단히 보충할 수 있는 것이아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병력은 줄어든다. 게다가 본거지의 생산력이 약했기 때문에 보급에도 문제가 있었다.
유방 자신은 연전연패였지만, 우군(軍)인 한신이 제를 평정하고 남하를 시작하여 초를 위협하고 있었다. 팽월(彭越)은 활발하게 게릴라전을전개했다. 그리고 보급에 대해서는 소하라는 그 방면의 천재가 있었으므로 유방은 그것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다. - P2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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