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순신 이야기 중국사 2 - 전국 시대~진.한 : 대통일 시대 진순신 이야기 중국사 2
진순신 지음, 박현석 옮김 / 살림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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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이 춘추 시대까지를 다루었다면 2권은 전국시대를 주름 잡은 칠웅, 이를 통일한 진시황과 짧았던 진의 치세, 유방의 등장으로 한이 통일되고 이후 전한이 멸망하기까지의 시기를 다룬다.
어찌 보면 가장 드라마틱한 사연이 모여 있는 최초의 시기가 아닐까.

춘추 시대의 제후는 주나라로부터 토지를 받은 봉건영주들이었다. 농업기술의 진보로 새로이 토지를 개간할 수 있게 되었는데, 이것은 주나라로부터 받은 것이 아니었다. 자신들이 직접 만들어 내었다.
새로이 개간된 땅은 영지의 변경이었을 테니, 영주 스스로가 가는 경우는 별로 없었을 것이다. 그것은 신하들의 일이었다. 명령을 받아 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자발적으로 하는 경우도 있었다. 어쨌든 이익을 가져다줄 새로운 토지가 생기는 일은 담당한 가신의 공적이니 그들이 권리를 주장하는 것도 당연했다. 제후를 섬기는 유력한 신하들이 더욱 유력해져서 드디어는 군주를 능가하게까지 되었다. 이것이 전국 시대의 양상이었다.(P33)

춘추 시대는 여러 제후국이 분열되어 있었으나 서로의 특색을 지닌 채 경쟁 구도를 가져갔다고 할 수 있다.
뒤이어 등장한 전국 시대는 7명의 제후국이 패자가 되어 피 튀기며 자웅을 겨루다가 드디어 중국 최초의 황제국이 등장한다. 지금도 China라는 명칭으로 불리는 데는 그만큼의 무게가 있기 때문일테고 외국에서 볼 때도 당시의 모습이 충격적이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진시황의 출생에 얽힌 이야기는 지금 봐도 놀랍다고 보여진다. 여불위는 재력을 이용하여 미모의 무기를 집에 들였다. 당시 부호의 집에서는 가기를 두어 빈객을 접대하고 있었다. 인질 공자인 자초가 어느 날 여불위에게 초대를 받아 가장 아름다운 무기를 보자마자 첫눈에 반해 "내게 달라"고 말을 꺼냈다. 그런데 그 무기는 여불위가 손을 댔을 뿐만 아니라 벌써 임신까지 하고 있었다. 그러나 거부하면 지금까지 쏟아부은 투자가 모두 물거품이 되어 버리고 만다. 여불위는 그녀를 자초에게 주기로 했다. 다만 여불위와 그녀는 임신했다는 사실을 숨기기로 했다. 이렇게 해서 그녀는 한단에서 사내아이를 낳았다. 자초는 물론 자신의 아이라고 생각했다. 그 아이의 이름을 정(政)이라고 지었다. 그 정이 천하를 통일한 시황제였다.(P180) 그는 정상적이라면 왕위에 오를 만한 위치는 아니었다. 그러나 결국 황제에까지 오른 것은 시대적인 상황만으로 보기는 어렵지 않을까. 결국 그의 드라이브 능력도 있었음을 의미할 것이다.
난세를 평정, 천하통일을 하고 만리장성을 이어 쌓으며 패업을 꿈꾼 진나라는 짧은 치세를 뒤로 하고 진승과 오광을 비롯하여 유방, 항량, 항우가 일으킨 군대에 의해 결국 멸망한다.

엘리트였던 항우에 비해 유방은 출신도 그렇고 어찌 보면 평범한 이였다고 할 수 있다. 홍문연에서의 만남은 역사에 남을 장면이기는 하나 그만큼 후에 각색된 측면이 있을 거라 생각한다.
항우는 서초의 패왕이 되고 유방은 한왕이 된다. 항우는 초의 회왕을 의제로 받들었다가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다며 바로 죽였고 이후 한과 초나라 간의 항쟁이 시작된다. 초한전쟁에서 항우가 속한 초군의 승리가 계속된다. 한군은 계속 대패했는데 이 때 유방이 초나라에 있던 범증을 이용하여 항우와 이간질을 놓았고 이것이 성공한다.
유방과 항우는 중국 시대의 여러 라이벌 중 아마 몇 손에 꼽는 이들일 것이다. 유방 4년 초, 한 천하를 양분하고 하나씩 가질 것을 맹약하였으나 유방은 이를 깨고 제후들과 함께 해하에서 항우를 포위한다. 항우는 결사대를 끌고 남하하여 오강까지 이르렀으나 결국 패하여 자결하고 한왕 유방이 황제를 칭하면서 고조에 오른다. 언제 봐도 재밌는 그들의 이야기에 또 다시 초한전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고조가 왕위에 오르고 나서 12년 만에 죽고 나서 혜제가 즉위하였으나 여 태후의 힘이 강하여 힘을 제대로 쓰지 못했다. 혜제가 죽고 나서도 여 태후의 힘이 강력하여 몇 대가 지나는 동안 정권을 좌지우지했다. 그가 죽고 나서 문제가 즉위하고(BC 180년) 나서야 한나라의 치세가 안정화된다.
한나라는 중국인들에게 특별하다. 이는 문자와 관련이 된다고 보인다. 진나라의 소전(小篆)을 바탕으로 문자가 ‘한자(漢字)‘라 불리게 되었으며, ‘한문(漢文)‘, ‘한시(漢詩)‘, ‘한족(漢族)‘ 등과 같이 한(漢)이라고 하면 곧 중국을 떠올릴 정도가 되었다.(P382) 문제 이후 경제를 거쳐 무제가 즉위하자 상황이 바뀌었다. 무제는 주변국을 이리 저리 들쑤시고 다녔다. 무제는 장건을 서역에 파견하여 정황을 살피게 했다(다시 돌아오기까지 무려 13년이 걸린). 그리고 눈의 가시였던 흉노를 위청과 곽거병 장수를 이용해 원정에 성공한다(BC 119년). 물론 한나라의 군사력이 강해서만은 아니였고 흉노에 내부 분열이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후 남월을 정복하고(BC 111년) 조선 원정을 꾀하기도(BC 109년) 했다.

무제에 뒤이어 황제가 되려는 이에 수많은 사람이 무고하게 죽어나갔다. 1차 무고의 난으로 공손하의 일족이 죽고 2차 무고의 난으로 위 황후와 황태자 유거가 자살하였다. 소제가 즉위하였으나 21살의 나이로 죽고 만다. 그가 재위하던 10여 년동안은 궁정 내의 권력투쟁의 시대였고 백성은 피폐했다. 거듭되는 외국 정벌 때문에 일을 해야 할 사람들이 차출되어 전쟁터로 갔다. 커다란 건조물 조영을 위한 인부로도 징용되었다. 농민뿐만 아니라 상인과 운송업자도 일을 잃었다. 정부는 독점 기업이 되었고 그 폐해는 여기저기서 나타났다. 당연히사회 불안이 조성되었다. 각지에 도둑이 창궐했다.(P537) 그 후 혼란의 시기를 거듭하다 왕망이 대부가 되었다 평제를 독살하고 스스로 가황제로 즉위한다. 국호를 신(新)이라 하였다. 왕망은 한나라의 정책을 따르지 않고 복고적 신정책을 펼쳐 사회불안을 가중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각지에 제후왕으로 봉해졌던 사람들과 열후왕으로 봉해졌던 사람들은 호족이 되어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는데 왕망의 정책에 불만을 가졌다.

3권은 후한, 삼국 시대에 이은 5호16국, 위진남북조 시기를 다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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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3-01-30 03: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다는 몰라도 여기 나오는 나라나 사람 이름은 한번쯤 들어본 듯도 하네요 여러 이야기가 있어설지도 모르겠습니다 싸움이 일어나면 힘든 건 백성인데... 옛날엔 그런 일이 많았네요


희선

거리의화가 2023-01-30 09:04   좋아요 1 | URL
그치요^^ 워낙 복잡한 시대긴 합니다만... 책, 드라마, 영화로도 많이 다뤄진 시대다보니 익숙한 이름들이 많습니다. 자세하게는 몰라도 여러 번 들은게 도움이 되더군요. 좀 더 몰입감을 준다고 해야할까요. 전쟁으로 피해를 입는 것은 언제나 하층 민중들일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2023-01-30 18: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1-30 18: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赧王下

【甲辰】五十八年魏王使晉鄙救趙秦王使謂魏曰吾攻趙旦暮且下諸侯敢救者必移兵先擊之魏王恐止晉鄙壁鄴又使將軍新垣衍說趙王欲共尊秦爲帝以却其兵魯仲連聞之往見衍曰彼秦者棄禮義而上首功之國也彼卽肆然而爲帝則連有蹈東海而死耳不願爲之民也今秦萬乘之國也梁亦萬乘之國也從而帝之秦將行天子之禮以號令於天下變易諸侯之大臣彼將奪其所不肖而與其所賢奪其所憎而與其所愛梁王安得晏然而已乎衍起再拜曰吾乃今知先生天下之士也不敢復言帝秦矣 

노중연 할 말은 하는 재상이자 선비

○ 初魏公子無忌愛人下士致食客三千人魏有隱士曰侯嬴年七十家貧爲夷門監者公子置酒大會賓客坐定公子從車騎虛左自迎侯生侯生至引坐上坐賓客皆驚

及秦圍趙趙平原君之夫人公子無忌之姊也平原君使者冠盖相屬於魏讓公子曰勝所以自附於婚姻者以公子之高義能急人之困也今邯鄲旦暮降秦而魏救不至公子數請魏王晉鄙救趙及賓客辯士遊說萬端王終不聽公子乃屬賓客約車騎百餘乘欲赴鬪以死於趙過見侯生生曰公子無他端而欲赴秦軍如以肉投餒虎何功之有
公子再拜問計生曰吾聞晉鄙兵符在王臥內而如姬最幸力能竊之且公子嘗爲報其父仇如姬欲爲公子死無所辭誠一開口則得虎符奪鄙兵北救趙西却秦此五伯(霸)之功也公子如其言得兵符侯生曰將在外君令有所不受有如鄙疑而復請之則事危矣臣客朱亥力士可與俱鄙不聽使擊之

公子至鄴晉鄙合符果疑之擧手視公子曰吾擧十萬之衆屯於境上國之重任今單車來代之何如哉亥袖四十斤鐵椎椎殺鄙公子下令曰父子俱在軍中者父歸兄弟俱在軍中者兄歸獨子無兄弟者歸養得選兵八萬人將之而進王齕久圍邯鄲不拔諸侯來救數戰不利武安君聞之曰王不聽吾計今何如矣秦王聞之怒免武安君爲士伍遷之陰密至杜郵使使者賜之劍武安君遂自殺秦人憐之魏公子無忌大破秦師於邯鄲下王齕解邯鄲圍走公子無忌旣存趙遂不敢歸魏使將將其軍以還

위나라 공자 무기가 후영을 빈객으로 후하게 맞아들인 사연.
공자 무기가 조나라를 구원하러 달려가다 후생을 만나 조언을 듣는다. 이에 진비의 병부를 얻은 뒤에 무기는 진비를 찾아가고 진비는 철퇴에 맞아 죽임을 당한다.
무안군 대리자인 왕흘은 한단을 오랫동안 함락하지 못한 상태였는데 이를 본 무안군이 자신의 계책을 쓰지 않아 여전히 이 상태라며 떠든다. 이에 관직을 삭탈당하는 수모를 당하고 유배를 보낸 뒤 사자를 시켜 검을 내리니 결국 그는 자살한다.
공자 무기는 드디어 진나라 군대를 대파하고 왕흘은 도망하였다. 무기는 조나라를 멸망시키지 않고 보존하여 주었고 그는 신릉군으로 봉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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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3-01-29 11:4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거리의 화가님
역사 깊이 읽기, 원문으로 읽으시는 화가님의 여정을 응원합니다.
저는 한문이 나오니 순간 저도 모르게 ....움찔^^;

서곡 2023-01-29 13:39   좋아요 2 | URL
저도 얄라님과 함께 화가님 응원합니다! ㅋㅋ 두 분 다 일요일 잘 보내시길요~얄라님도 응원해요 ㅎㅎ

거리의화가 2023-01-29 13:07   좋아요 2 | URL
@얄라알라
저도 다 제대로 읽진 못하고 온라인 강의를 들으면서 공부해요. 원문 읽기는 어려워서 저도 조금씩의 분량만 읽어요. 그러다보니 진도가...ㅎㅎㅎ 여전히 오래 걸리고 있습니다. 다음달에도 끝날 수 있을런지^^; 암튼 응원 감사합니다.

@서곡
응원 감사합니다^^ 서곡님도 남은 주말 즐겁게 보내세요!
 

무제의 목적은 명마를 얻는 데 있었다. 국방력의 중요한 부분을 말에의존하고 있던 시대이니 무제가 명마를 원했던 것은 한나라의 주인으로서 당연했다. 그러나 무제가 개인적으로 말을 좋아했다는 이유도 이 원정에 영향을 주었다.
장건의 서역 여행으로 인해 한나라와 서역 간의 길이 열려 교역도 점차로 활발해졌다. 대완으로부터의 주요한 수입품은 말이었는데, 아무래도 가장 좋은 말은 이사성이라는 곳에 숨겨 두고 밖으로 내놓지 않았다.
무제가 사절을 보내 이사성의 말을 청해봤지만, 대완의 왕은 이를 거절 - P486

했다. 이때 한나라의 사절이 욕을 하며 비난을 하는 등 그 태도가 매우좋지 않았다. 그 때문에 한나라의 사절은 돌아오는 길에 욱성성(郁成城)이라는 곳에서 대완 군의 습격을 받아 목숨을 잃고 말았다.
이것이 대완 원정의 원인이었다. - P487

"무릇 주나라 문왕은 사로잡혀서 『주역(周易)』을 풀었고, 공자는 재액을 만나 『춘추』를 지었고, 굴원은 방축(放逐)되었기에 <이소>미를 지었고, 좌(左丘)가 실명하였기에 『국어』가 있으며, 손자는 다리를 잘렸기에 『병법(兵法)』을 편찬했으며, 여불위는 촉으로 좌천되었기에 세상에 『여씨춘추』를 전했으며, 한비가 진에 사로잡혔기에 <설난(說難)>, <고분(孤憤)>(『한비자』를 말함)이 있고, 시 300편은 무릇 성현이 발분(發憤)하여 만들어 내었다. 이 사람들은 모두 뜻한 것에 막힘이 있어 그 길이 통하지 못했기에 옛일을 이야기하고 미래를 생각했다." - P499

무제가 황태자 거에 대해서 약간 불만을 품고 있다는 사실은 황실에가까운 사람이면 누구나가 알고 있었다. 자신과 닮지 않았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렇다고 해서 황태자의 됨됨이가 좋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기질적으로 아버지인 무제와 맞지 않은 점이 있었던 모양이다.
주안세에 의한 무고의 대옥은 제1차 무고의 난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사건의 발단은 정화 원년이었으며, 공손하의 일족 및 여러 사람이 목숨을 잃은 것은 이듬해인 2년의 일이었다. 같은 해에 제2차 무고의 난이일어 그 화가 마침내 황태자에게까지 미치게 되었다. - P509

참으로 강충은 피에 굶주린 괴물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와 같은 사전공작을펼친 뒤에 궁중에도 ‘고의 기운‘이 있다는 말을 올리게 했다. 후궁 여성들의 거처, 황후, 태자의 궁전을 파헤치자 나무 인형이 속속 모습을 드러냈다. 황태자의 궁전에서 나온 인형의 숫자가 가장 많았다.
황태자는 마침내 마음을 정했다. 지금까지 강충이해 온 방법으로 봐서 비상수단을 쓰지 않으면 죄를 모면할 수가 없었다. 쿠데타밖에 없었다.
황태자의 가신이 사자라고 속여 강충을 체포해, 황태자 앞으로 끌고갔다.
조려(趙慮, 조나라 놈), 전에는 네 녀석의 국왕 부자를 어지럽히더니그것도 모자라서, 이번에는 우리 부자까지 어지럽힐 생각이냐?
황태자는 이렇게 호통을 치고는 자신이 보는 앞에서 강충의 목을 치게 했다. 이것이 수만 명의 죄 없는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간 희대의 요물의 최후였다. - P512

황태자가 무죄였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무제는 강충 일가를 전부 죽이고 환관 소문을 위수에 걸린 다리 위에서 불태워 죽였다. 호현에서 황태자에게 칼을 휘둘러 ‘의상(賞)‘이지만 열후가 된 자들은 그것을 물론박탈당하고 일가 몰살이라는 형을 받았다.
황태자의 무죄를 용감하게 상서한 전천추는 대홍(鴻臚, 외무부장관)로 승진되었으며 다시 승상에 기용되었다. 그는 무제에서 소제(昭시절에 걸쳐서 승상에 머문 햇수가 12년에 이르렀고, 나이가 들어서는 수레를 타고 궁궐에 들어가도록 허락되었기에 사람들은 그를 거승상(丞相)이라고 불렀다. 『한서』에는 거천추(秋)라고 그의 전기가 수록되어 있다. - P520

여덟 살인 불릉을 후계자로 삼은 것은 딸린 식구가 적으니 강력한 ‘내조‘를 붙여 준다면 틀림없이 무제 체제를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 - P525

문이다. 어른이 된 후계자, 예를 들어서 연왕인 유단 등은 연의 작은 궁정에 이미 자신의 신하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황제가 되면 틀림없이 그무리들을 데리고 장안으로 들어와 무제 체제를 무너뜨리려 할 것이다.
물론 어린 불릉에게는 아직 신하가 없었다. 무제 체제를 물려받을 수밖에 없을 터였다. 게다가 불릉의 어머니인 권 부인은 하간의 비천한 계층 출신인데다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황제의 모계 세력이 궁정으로 들어올 염려가 없었다. - P526

스물한 살이라는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소제재위 10여 년동안은 궁정 내의 권력투쟁의 시대였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컵 속의 폭풍에만 그치지 않고 국민의 생활에도 상당한 영향을끼쳤다.
고조 유방이 제위에 오른 뒤부터 무제가 즉위하기까지의 60년 동안은무제 시대를 위한 준비 기간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무제가 죽은 뒤전한이 멸망하기까지의 90년 동안은 무제의 여운 시대라고 할 수 있다.
무제 사망 직후에는 말할 나위도 없이 여운이 짙게 드리워 있었다. 궁정내의 권력투쟁은 여러 방면에서 일었는데 그것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 P528

백성은 피폐했다. 거듭되는 외국 정벌 때문에 일을 해야 할 사람들이차출되어 전쟁터로 갔다. 커다란 건조물 조영을 위한 인부로도 징용되었다. 농민뿐만 아니라 상인과 운송업자도 일을 잃었다.
정부는 독점 기업이 되었고 그 폐해는 여기저기서 나타났다. 당연히사회 불안이 조성되었다. 각지에 도둑이 창궐했다. - P537

승자의 입장에서 기록한 역사에는 상관걸 부자가 연왕과 손을 잡고곽광을 제거한 뒤 소제를 폐하고 연왕 단을 위에 앉히려는 계획을 세웠지만, 그것이 들통 나서 일망타진했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곽광이 정적을 쓰러뜨리고 연왕의 야망을 꺾기 위해서 기선을 제압했을 가능성도 있다. 상관 일가는 황후이자 곽광의 외손녀이기도 한 어린 여자 한 사람만을 남겨 놓고 전부 주살당하고 말았다.
연왕 단은 천자의 새서(書)를 받고 원통하게 자살을 했으며, 후에 부인 등 연왕을 따라서 죽은 자도 20여 명이나 되었다.
이 사건 때문에 어사대부인 상홍양도 주살당했다. 상홍양은 외조의대표자로서 내조의 대표자인 곽광과 대립하고 있었다. 염철회의는 상황양에 대한 곽광의 첫번째 공격이었으며, 두 번째 공격은 상서(尙書천자에 대한 상주권(上奏權)을 가진 자의 직권으로 심복 양창(楊)을 대사농(大司農)으로 임명한 일이었다. 대사농은 지금의 재무부 장관에 해당하는요직으로 상홍양이 부수상인 어사대부가 된 후에도 그것을 겸임하고 있었다. 그런데 곽광이 그 자리에 전임을 둔 것이었다. 정책적으로도 상황양과 곽광은 의견이 맞지 않았다. 그랬기 때문에 상홍양이 반 곽광 진영인 상관 부자에게 접근했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곽광이 그 일을 계기로구실을 만들어서 나이 든 정적을 말살했을 가능성도 있다.
이 사건의 결과로 인해서 외조는 곽광이 기대한 대로 명목뿐인 사무실로 전락했다. - P542

민간에서 자란 그는 백성들의 고통을 알고 있었다. 백성을 구제하는 이른바 휼민(民)은 아마도 이상이었겠지만, 그는 현실을 아는 사람이었다.
선제의 황태자이자 후에 원제(元帝)가 되는 유석은 유교에 지나치게경도된 사람이었다. 그리고 황제인 아버지에게 거듭 유가에 의한 국가 운영을 주장했지만 그에 대해서 선제는,
패도(覇道)와 왕도(王道)를 섞지 않으면 안 된다.
고 대답했다.
선제의 정치는 그랬다. 소제에 이은 선제 시절은 앞에서도 이야기했듯이 무제 55년간을 끼고 문제와 경제의 시대와 마찬가지로 휴식의 시대였다. 무제 말기에 유민이 되었던 사람들도 다시 농민이 되었다. ‘무위로 화한다‘는 무리를 하지 않는 정치가 생산력을 회복시켰고 그것을 높였다.
그러나 이상적인 세상이 왕도만으로 실현될 수 있다고 생각할 정도로선제는 무른 사람이 아니었다. 민간에 있어 봤기 때문에 구제할 길이 없는 악당이나 도둑이나 변질자도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유협을 좋아하여 각지를 돌아다녔기 때문에 그는 많은 것들을 보고 들었다. 일반서민들이 가장 바라는 것이 치안의 유지라는 사실을 자신의 체험을 통해서 알고 있었다. - P554

왕망은 안한공(安漢公)이라는 칭호를 받았는데, 한나라가 시작된 이래생전에 공이라는 칭호가 사용된 경우는 없었다. 거기에 ‘재형(宰衡)‘이라는 칭호도 더해졌다. 주나라 성왕을 보좌했던 주공을 태재(太宰)라고 부르고, 은나라 탕왕을 보좌했던 이윤을 아형(阿衡)이라고 불렀는데, 그 두 - P562

사람의 이름을 합성한 것이다.
머지않아 그는 스스로를 가황제(假皇帝)라 칭하고, 사람들에게는 섭황제(攝皇帝)라 부르게 했다.
평제의 후계자로는 선제 계열의 황족 중에서도 나이가 가장 어린 자영(子嬰)이 선택되었다. 두 살짜리 젖먹이였다. 연호는 거섭(居攝)으로 삼았다.
이렇게 된 이상 왕망은 이미 황제가 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나머지는시간문제에 지나지 않았다.
거섭 3년(8), 왕망이 드디어 천자의 자리에 올랐다. 천명이 내렸다는증거가 여기저기서 보고되어 올라왔지만, 이것은 물론 왕망이 자신의 특기를 살려서 조작해 낸 것이다.
그해 12월 1일을 시건국(國) 원년 정월 1일로 삼고 국호를 ‘신(新)’이라 했다.
한나라는 이로써 멸망했다. - P563

왕망의 복고적 신정책은 전부 백성을 혼란시키고 외교를 정체 상태에빠뜨렸으므로, 사회불안을 가중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왕망이 국책 헌법으로 삼은 것이 『주관』이라는 점은 앞에서도 이야기했다. 그런데 이 『주관』그 자체도 왕망이 창작했을지도 모른다는 학설이 유력하다. 고대에서부터 그와 같은 저작이 전해진 것이 아니라 왕망이 꾸며 냈다고 보는 것이다. 그에게는 전과가 있었다. 상서로운 조짐 등도 그가 만들어 내었다. 왕망의 덕을 칭송하는 자가 48만여 명에 이르렀다는 것 역시 그가 만들어 낸 일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따라서 태고의성천자가 시행한 제도를 기록했다는 『주관』도 그가 그렇게 말했을 뿐 의심스러운 것이다. - P566

한나라가 건국된 지도 이미 200년이 지나 있었다. 각지에 제후왕으로봉해졌던 사람들과 열후왕으로 봉해졌던 사람들의 자손이 결코 적지는않았다. 그들은 각지에서 호족이 되어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들호족에게 있어서도 왕망의 정책은 좋지 않았다. - P568

먹을 것만 주면 따라올악소년(少年)들은 어디에나 있었다. 악(惡)은간악하다는 뜻이 아니라 일정한 직업이 없다는 말이다. 소년이란 젊은이를 말하는 것으로 이광리의 대완 원정에도 수많은 악소년들이 종군했다는 사실은 앞에서 이야기했다. 밥을 먹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술도 마실 수 있었으니 순식간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여모가 모은 것은 수백명에 지나지 않았지만, 모여든 악소년이 또 다른 친구를 불러들였기문에 그 수는 수천에 달했다.
한편 여모는 가진 돈을 아끼지 않고 무기를 사들여 결국에는 재산을전부 써 버렸다. 그러나 그녀는 소망을 이루었다. 일당이 해곡현을 습격하여 현재를 잡아다 그 목을 베어 버렸다. 여모는 그 목을 자기 자식의무덤 앞에 바쳤다.
소망을 이루기는 했지만 이제 와서 그 무리들을 해산할 수는 없었다.
-> 적미군의 탄생 - P5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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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력과 상상력의 결핍 탓에 쇄신의 원동력을 자신에게서 끌어낼 수 없는 사람들은, 앞으로 올 시간이나 초인종을 울릴 우편배달부가 설령 나쁜 소식일지언정 뭔가 새로운 것을, 어떤 감동이나 고통을 가져다주었으면 하고 바라며, 또는 한가한 하프 소리처럼행복이 침묵하게 한 감수성이 설령 난폭한 손에 그 줄이 끊어질지언정, 다시 한 번 울려 주었으면 하고 바라는 법이다. 또는욕망이나 고통에 방해받지 않고 전념할 권리를 아주 어렵게획득한 의지는, 비록 아주 잔혹한 사건이라고 해도 그런 급박한 사건들의 손아귀에 고삐를 맡기고 싶어 한다. - P206

숲은 이미 어둡고, 하늘은 아직 푸르도다.
"젊은이, 자네에게는 하늘이 항상 푸르기를 바라네. 그러면지금 내게 다가오는 이 시간처럼, 숲은 이미 어둡고 밤이 빨리 저무는 시간이 와도, 내가 지금 하늘을 쳐다보면서 그러듯마음을 위로받을 수 있을걸세." - P214

내가 황홀감에 사로잡힐 때는 특히 아스파라거스를 마주할 때였다. 아스파라거스는 짙은 군청색과 분홍빛이 감돌아, 꼭지 부분이 벼이삭처럼 보랏빛과 하늘빛으로 어우러져 아래로 내려갈수록 ㅡ밭의 흙이 아직 묻어 있는 땅 색이 아닌 무지갯빛으로 아롱거리며 그 빛깔이 조금씩 연해져 간다. 이러한 천상의 빛깔은어떤 감미로운 존재들이 즐겨 채소로 변신해서는, 먹을 수 있는 단단한 살로 변장해, 해 뜰 무렵 여명의 색깔이나 짧은 무지갯빛 출현, 푸른빛 저녁이 사라져 가는 과정에서 그 귀중한정수를 드러내는 듯 보였다. 저녁 식사 때 아스파라거스를 먹고 자는 날이면 나는 밤새 그 정수를 느꼈는데, 그것은 마치셰익스피어 요정극에서처럼 시적이면서도 외설적인 소극을연출하여 내 방의 요강을 향수병으로 바꾸어 놓았다. - P215

파브르가 관찰한 막시류 곤충인 땅벌은 죽은 후에도 유충이 먹을 신선한 먹이를마련하려고, 해부학의 힘을 빌려 자신의 잔인성을 키워 바구미나 매미를 포획하고는, 다른 생명 기능은 그대로 둔 채 다리 운동을 주관하는 신경중추를 놀라운 지식과 솜씨로 찔러, 그 마비된 곤충 주위에 알을 갖다 놓고는 알이 부화해서 유충이 되면 그 유충에게 온순하고도 무해하고, 도망치거나 저항할 수없는, 그렇지만 조금도 썩지 않은 먹이를 제공하게끔 한다고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프랑수아즈는 어떤 하인이라도 우리 집에 오래 붙어 있지 못하도록 그 끈덕진 의지로 매우 교묘하고도 가혹한 술책을 썼는데, 그해 여름 우리가 거의 매일같이 아스파라거스를 먹어야만 했던 것도, 아스파라거스 껍질을 도맡아 벗기던 부엌 하녀가 냄새 때문에 심한 천식 발작을 일으켜서 마침내 우리 집을 떠날 수밖에 없게 하기 위해서였다는 사실을 우리는 여러 해가 지나서야 알게 되었다. - P220

"우리가 다시는 돌아가지 못할 나라로부터 나그네가 보내 주는 꽃다발처럼, 아주 오래전에 내가 지나온 봄날 꽃향기를 그대 젊음에서 맡게 해 주게나. 앵초, 민들레, 금잔화와 함께 오게나. 발자크의 식물군에 나오는, 순수한사랑의 꽃다발을 만든 꿩의비름*과 함께 와 주게나. 부활절 아침의꽃 데이지**와 함께 오게나. 그리고 부활절의 우박 섞인 마지막눈송이가 아직 녹지 않았을 때, 그대의 고모할머니 댁 오솔길에향기를 풍기기 시작한 정원의 불두화***와 함께 와 주게나. 솔로제비몬 왕에게 어울리는 백합의 영광스러운 비단옷을 입고, "****제비 - P223

꽃의 다채로운 빛깔과 함께 와 주게나. 특히 마지막 서리로 아직은 싸늘하지만, 오늘 아침부터 문에서 기다리는 두 마리 나비를 위해서 예루살렘의 첫 장미꽃을 피우려는 산들바람과함께 와 주게나." - P224

"아아! 그렇게 나를 아프게 하지 말게. 난 정말로 게르망트네 사람들을 모른다네. 내 평생의 상처를 건드리지 말게."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이 말썽꾸러기 르그랑댕,
이 사기꾼 르그랑댕에겐 또 다른 르그랑댕처럼 아름다운 언변은 없었지만, 대신 아주 순발력 있는, 소위 ‘반사작용‘이라고 부를 수 있는 그런 말솜씨가 있었으므로, 달변가 르그랑댕이 그에게 침묵을 부과하면 또 다른 르그랑댕이 이미 말을 해 - P228

버린 뒤여서, 우리 친구인 르그랑댕 씨는 그의 ‘알테르 에고’*가 폭로한 나쁜 인상을 유감으로 여기면서도 어쩔 수 없이 그저 얼버무릴 수밖에 없었다. - P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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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壬寅】五十六年秦之始伐趙也魏王問諸大夫皆以爲秦伐趙於魏便孔斌曰不然秦貪暴之國也勝趙必復他求吾恐於時魏受其師也先人有言燕雀處堂子母相哺呴呴焉相樂也自以爲安竈突炎上棟宇將焚燕雀顔不變不知禍之將及己也今子不悟趙破患將及己可以人而同於燕雀乎當今山東之國敝而不振三晉割地以求安二周折而入秦燕齊楚已屈服矣以此觀之不出二十年天下其盡爲秦乎

진나라가 조나라를 정벌할 때 위나라 왕이 대부에게 의견을 물었다. 대부분의 대부들은 찬성의 의견을 보였으나 공빈은 반대 의견을 보였다(선인은 ‘제비가 당에 살면서 새끼와 어미가 서로 먹여 주어 다정하게 서로 즐거워하여 스스로 편안하다고 여긴다. 부엌 굴뚝에서 불길이 올라와 집이 장차 타려 하는데도 제비는 낯빛을 변치 않고 장차 자신에게 미칠 줄 알지 못한다’고 했다면서 조나라를 정벌하면 그 다음은 위나라 차례 아니냐고 말한 것).

【癸卯】五十七年秦以王陵攻邯鄲武安君曰邯鄲實未易攻也且諸侯之救日至破秦軍必矣辭疾不行乃以王齕代王陵
趙王使平原君求救於楚平原君約其門下食客文武備具者二十人與之俱得十九人餘無可取者毛遂自薦於平原君平原君曰夫賢士之處世也譬若錐之處囊中其末立見今先生處勝之門下三年於此矣勝未有所聞是先生無所有也毛遂曰臣乃今日請處囊中爾使遂蚤(早)得處囊中乃穎脫而出非特其末見而已平原君乃與之俱十九人相與目笑之
平原君至楚與楚王言合從之利害日出而言之日中不決毛遂按劍歷階而上謂平原君曰從之利害兩言而決爾今日出而言日中不決何也楚王怒叱曰胡不下吾乃與而君言汝何爲者也遂按劍而前曰王之所以叱遂者以楚國之衆今十步之內不得恃衆也王之命懸於遂手吾君在前叱者何也今以楚之彊天下弗能當白起小竪子爾一戰而擧鄢郢再戰而燒夷陵三戰而辱王之先人此百世之怨而趙之所羞而王弗知惡焉合從者爲楚非爲趙也楚王曰唯唯誠若先生之言謹奉社稷以從毛遂謂楚王之左右曰取鷄狗馬之血來毛遂奉銅盤而跪進之楚王曰王當歃血而定從次者吾君次者遂遂定從於殿上毛遂左手持盤血而右手招十九人歃血於堂下曰公等碌碌所謂因人成事者也平原君已定從而歸至於趙曰勝不敢復相天下士矣遂以毛遂爲上客於是楚王使春申君將兵救趙

진나라가 왕릉으로 한단(조나라 수도)를 공격했으나 잘 되지 않았던 모양이다. 진왕은 무안군에게 뒤를 잇기를 요청하였지만 무안군이 말하기를 ‘한단은 쉽게 공격할 수 없고 그 곳을 공격한다면 주변에서 모두 도우러 쳐들어올 것이니 진나라 군대는 격파당할 것이다’고 말하고 병을 핑계 삼아 나가지 않았다. 때문에 왕흘로 대리자를 삼았다.

조왕이 평원군을 시켜 초나라에 구원을 요청하였다. 이 때 평원군 수중에 부하 19명은 갖춰졌으나 1명이 갖춰져 있지 않고 있었는데 모수가 자신을 내세우며 <송곳이 주머니 속에 있어서> 그동안 쓰이지 못했으니 써달라 하였다. 평원군이 이에 받아들였다.

평원군이 초나라에서 담판을 벌이고 있었으나 잘 되지 않았다. 이에 모수가 칼을 만지작거리면서 평원군에게 협박을 하니 초왕이 평원군과 서로 합종 맹약을 맺을 수가 있었다. 모수는 상대부에 올랐고 초왕은 춘신군으로 하여금 군대를 이끌고 조나라를 구원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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