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丙戌】三十二年始皇巡北邊盧生入海還因奏錄圖書曰亡秦者胡也始皇乃遣蒙恬發兵三十萬人北伐匈奴收河南地爲四十四縣築長城因地形用制險塞起臨洮至遼東延袤萬餘里威振匈奴

【戊子】三十四年丞相李斯上書曰異時諸侯並爭厚招遊學今天下已定法令出一百姓當家則力農工士則學習法令今諸生不師今而學古以非當世惑亂黔首相與非法敎人聞令下則各以其學議之入則心非出則巷議誇主以爲名異趣以爲高率群下以造謗如此弗禁則主勢降乎上黨與成乎下禁之便臣請史官非秦記皆燒之非博士官所職天下有藏詩書百家語者皆詣守尉雜燒之有偶語詩書者棄市以古非今者族所不去者醫藥卜筮種樹之書若欲有學法令以吏爲師制曰可 

분서를 위해 몰아가는 이사


【己丑】三十五年使蒙恬除直道道九原抵雲陽塹山堙谷千八百里數年不就

○ 始皇以爲咸陽人多先王之宮廷小乃營作朝宮渭南上林苑中先作前殿阿房東西五百步南北五十丈上可以坐萬人下可以建五丈旗周馳爲閣道自殿下直抵南山表南山之顚(巓)以爲闕爲複道自阿房渡渭屬之咸陽以象天極閣道絶漢抵營室也隱宮徒刑者七十餘萬人乃分作阿房宮或作驪山發北山石槨寫(瀉)蜀荊地材皆至關中計宮三百關外四百餘於是立石東海上朐界中以爲秦東門因徙三萬家驪邑五萬家雲陽皆復不事十歲

○ 侯生盧生相與譏議始皇因亡去始皇聞之大怒曰盧生等朕尊賜之甚厚今乃誹謗我諸生在咸陽者吾使人廉問或爲妖言以亂黔首於是使御史悉按問諸生諸生傳相告引乃自除犯禁者四百六十餘人皆坑之咸陽始皇長子扶蘇諫曰諸生皆誦法孔子今上皆重法繩之臣恐天下不安始皇怒使扶蘇北監蒙恬軍於上郡

진시황이 함양의 유생들을 사람을 시켜 알아보니 자신이 백성들을 미혹시키고 있다는 소문이 나돌고 있었다. 이에 유생들을 심문하니 고발당한 모두가 함양의 구덩이에 빠져 죽였다(갱유). 시황의 첫째 아들인 부소를 몽염 장군이 있는 곳으로 쫓아 보냈다.

【辛卯】三十七年冬十月始皇出遊左丞相斯從少子胡亥最愛請從上許之西至平原津而病秋七月丙寅始皇崩於沙丘平臺丞相斯爲上崩在外恐諸公子及天下有變乃秘之不發喪獨胡亥趙高及幸宦者五六人知之趙高乃與丞相斯謀詐爲受始皇詔立胡亥爲太子更爲書賜扶蘇數以不能闢地立功上書誹謗將軍恬不矯正知其謀皆賜死扶蘇自殺胡亥至咸陽發喪襲位九月葬始皇於驪山下

진시황이 서쪽으로 출행한 뒤 평원진에 이르러 병이 나 사망하였다. 외부에서 황제가 붕어했기 때문에 호해, 조고, 이사만 이 사실을 안 채 그 사실을 발표하지 않았다. 세 명은 거짓으로 시황의 서신을 빌미삼아 첫째 아들인 부소가 아닌 둘째 아들 호해를 태자로 삼고 그를 왕위에 옹립했다.


二世皇帝在位三年壽二十四

【壬辰】元年春二世東行郡縣夏至咸陽謂趙高曰人生世間譬猶聘六驥過決隙也吾欲悉耳目之所好窮心志之所樂以終吾年壽可乎趙高曰陛下嚴法而刻刑盡除先帝之故臣更置陛下之所親信則高枕肆志寵樂矣二世然之乃更爲法律務益刻深大臣諸公子有罪輒僇死〈出李斯傳〉

○復作阿房宮盡徵材士五萬人屯衛咸陽

○秋陽城人陳勝陽夏人吳廣起兵於蘄是時發閭左戍漁陽九百人屯大澤鄕勝廣皆爲屯長會天大雨道不通度已失期乃召令徒屬曰公等皆失期當斬且壯士不死則已死則擧大名耳王侯將相寧有種乎衆皆從之乃詐稱公子扶蘇項燕爲壇而盟稱大楚勝自立爲將軍廣爲都尉入據陳〈出陳涉傳〉

陳中父老請立涉爲楚王張耳陳餘曰秦爲無道暴虐百姓將軍出萬死之計爲天下除殘今始至陳而王之示天下私願將軍毋王急引兵而西遣人立六國後自爲樹黨爲秦益敵敵多則力分與衆則兵强誅暴秦據咸陽以令諸侯則帝業成矣涉不聽自立爲王諸郡縣苦秦法爭殺長吏以應涉〈出陳餘傳〉

이사의 사사로운 욕심? 조고는 이를 이용했다.

중단되었던 아방궁 공사를 재개하였다.

진승과 오광이 난을 일으켰다. (진승이 스스로 장군이 되고 진에 들어가서 스스로 초왕이라고 칭하며 나라를 세우고자 했다. 장이와 진여가 육국의 제상이 되어 사람을 모아 세력을 얻는 계책을 내며 이에 반대했으나 말을 듣지 않고 자신의 뜻대로 진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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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장 흑인 여성에게 해방의 의미

노예 해방 후에도 흑인 여성은 대부분이 농장에서, 주방에서 하는 일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남부의 흑인들은 노예제 대신 재소자 임대 제도에 의해 재소노동자로 당국에 임대되어 수용 시설에 수용된 채 쓰러져 숨을 거둘 때까지 노역을 당했다. 재소자 임대 제도는 노예 소유주와 주 당국에게 이윤을 가져다 주어 그들의 배만 불리는 꼴이 되었다. 재소자 여성들의 경우 감옥에서 성폭력의 피해자가 되는 경우도 다반사였다.

노예제 이후 농장에서 시달리지 않는 대다수 흑인 여성 노동자들은 가사 노동자가 되어 30년 이상 집 안 하인으로 일했다. 그녀는 백인 고용주의 노예에 불과한 삶을 살았다. 사실상 가사서비스는 노예제의 연장 선상에 다름 아니었다.

짐크로법은 철저한 인종 분리 정책으로 1876년부터 1965년까지 시행된 법이다. 흑인들은 이 때문에 백인보다 경제, 교육, 사회 모든 면에서 불평등한 대우를 받았다. 웃긴 것은 흑인 하인이 백인과 같이 있으면 문제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마치 도장이나 지문처럼 주인이 있으면 그 상황에서는 하인 또는 노예가 인정되고 허락되는 시스템이었다.

흑인 여성의 '부도덕함'에 대한 끈질긴 이야기는 가사 노동자의 취약한 상황에서 비롯되었다. 가사노동은 대부분 흑인 여성이 수행하고, 비천한 일을 수행하는 흑인 여성들이 '무능'하고 '문란'하다고 여겼다. 하지만 그들이 가사 노동을 한다고 해서 그런 환경에 처해 있다고 해서 그들이 무능하고 문란한가. 이는 신화로 이용되는 도구였을 뿐이라 생각한다.
1890년 인구 총조사에서 48개 주 가운데 32개 주에서 대다수의 흑인들이 종사하는 직업이 가사 서비스라는 결과가 나오기도 했다.

그럼 당시 백인 여성들은 이런 상황을 어떻게 바라보았을까. 백인 여성들은 가사 노동자들의 투쟁을 인정하지 않았다. 노예제에 맞서지 않는 백인 여성들은 노예제의 비인도성을 외면하였다. 1940년까지도 노예제에서 해방된 흑인 여성은 열 명 중 한 명에 불과했다. 운 좋게 산업계에 진출한 흑인 여성들도 저임금과 착복에 시달렸다.



6장 교육과 해방: 흑인 여성의 관점

지배 이데올로기에 따르면 흑인은 열등한 위치에 자리했으나 그들은 교육의 기회를 얻는데 적극적이었다. 

다행인 것은 백인 여성과 흑인 여성은 연대하였다는 것이다. 프루던스 크랜들과 마거릿 더글러스, 미르틸라 마이너는 젊은 흑인 여성들에게 지식을 보급하기 위해 투쟁했다. 미르틸라 라이너는 1851년 위험을 무릅쓰고 학교를 열었다.

교육은 흑인들에게 해방이자 빛이었다. 교육을 받은 흑인들은 자신들이 얻은 지식을 노예 해방과 집단 투쟁에 이용하였다.

1831년 냇 터너 반란 이후 남부에는 노예 교육 금지 법안이 강화되었다. 메릴랜드와 캔터키 주를 제외하고 모든 남부가 노예 교육을 금지하였다. 노예 소유주들은 노예들의 교육을 저지하기 위해 체벌을 가했다. 그럼에도 몰래 독학으로 읽고 쓰기를 배운 이들은 자매와 형제들에게 지식을 나누었다. 

남북전쟁 이후 남부에 여러 흑인 대학들이 설립되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후 인종분리 교육이 등장하여 흑인의 교육 기회가 급감한다. 그럼에도 그들은 교육에 손을 끝까지 놓지 않았다. 


사실 여전히 "유색인종 여성은 백인 남성의 적법한 먹잇감 취급을 당했다". 그리고 만일 이들이 백인 남자의 성폭력에 저항할 경우 감옥에 내팽개쳐져서 ‘또 다른 형태의 노예제로의 회귀‘인 시스템의 피해자로 전략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 P146

나는 백인 아이들과 전차를 기차를 타러가곤 했고 (...) 앞자리든 뒷자리든 내가 원하는 데는 어디든 앉을 수 있었다. 백인 남자가 다른 백인 남자에게 "저 검둥이가 여기서 뭐하는 거죠?"하고 물었는데 "아, 저 여자는 그 앞에 있는 백인 아이들의 보모예요"라는 대답이 나오면 순식간에 평화의 침묵이 찾아왔다. 내가 하인-노예-으로서 백인 남자의 객차에 오르거나 전차의 백인 남자 구역에 있는 한 만사형통이지만 옆에 백인 아이가 없어서 내가 하녀임을 증명할 수 없으면 단박에 ‘검둥이‘ 자리나 ‘유색인종 객차‘를 할당받곤 한다. - P148

재건시대부터 지금까지 흑인 여성 가사 노동자들은 ‘그 집 남자‘들이 자행하는 성학대를 중대한 직업상의 위험 요소 중 하나로 여겼다. 이들은 번번이 일을 하다가 피해를 당했고, 자신과 가족이 절대 빈곤으로 떨어지든가 성학대에 굴종하든가 택일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조지아의 한 여성은 "마님의 남편이 내게 키스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라는 이유로 입주 일자리 중 한 곳을 잃었다. - P149

인종주의는 복잡다단한 방식으로 굴러간다. 백인보다 흑인하인을 더 좋아한다는 말로 자신이 흑인을 칭찬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고용주들은 실제로는 하인-솔직히는 노예-은 천생 흑인의 숙명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또 다른 고용주는 자신의 요리사를 이렇게 묘사했다. "아주 근면하고 조심성이 있어요. 정성스럽죠. 그녀는 착하고 충직한 사람이고, 아주 고마워할 줄 알아요." 미국 문학과 이 나라의 대중매체는 흑인 여성의 숱한 전형을 충직하고 참을성 있는 하인으로 제시한다. - P152

백인 여성들은 더 나은 일을 찾을 수 없다는 확신이 서지 않으면 절대 가사노동을 직접 하지 않았기 때문에 흑인 여성들은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할 때까지 이런 일자리에 발목이 붙들렸다. 심지어 1940년대에도 뉴욕과 그 외 대도시에는 백인 여자들이 일자리를 구하는 흑인 여자들 무리에서 원하는 사람을 골라갈 수 있는 길거리 시장-현대판 노예 경매장-이 존재했다. - P153

작금의 ‘중간계급‘ 페미니스트 프로그램에서 가사 노동자 문제가 편의적으로 누락된 것은, 그들이 부리는 가정부에 대한 착취적인 처사를-최소한 부유층 여성들의 입장에서-감추고 정당화하는 방편인 것으로 드러날 때가 심심찮게 있었다. - P155

수백만 흑인-그리고 그중에서도 특히 여성-은 해방이 ‘주님의 강림‘이라고 확신했다. - P161

흑인들은 해방이 되면 ‘40에이커의 땅과 노새 한 마리‘가 생긴다는 망이 악의적인 루머임을 알게 되었다. 이들은 땅을 손에 넣기 위해, 정치권력을 손에 넣기 위해 발버둥 치며 투쟁해야 했다. 그리고 수세기 동안 교육의 기회를 박탈당한 채 지내던 이들은 간절한 학구열을 충족시킬 권리를 열정적으로 부르짖게 된다. - P163

마르틸라 마이너는 가르치기 위해, 학생들은 배우기 위해 고군분투하면서, 돌을 던지는 인종주의 폭도들의 여러 비행과 방화 시도, 퇴거 조치와 전투를 벌였다. - P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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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3-02-10 00: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노예제도가 없어졌다고 해도 오랫동안 흑인과 백인은 화장실을 함께 쓰면 안 된다는 법도 있었군요 흑인은 거의 가정부 일을 했네요 교육은 중요하죠 그게 아무 도움이 안 될 때도 있지만, 아는 것과 모르는 건 차이가 크겠습니다


희선

거리의화가 2023-02-10 09:43   좋아요 0 | URL
네 인종분리 정책은 악명높았죠. 1960년대까지 이어졌는데 문제는 그 이후에도, 현재에도 여전히 그닥 나아지지 못했다는 것. 흑인들은 필사적으로 교육에 매달렸던 것 같아요. 어떻게든 자신들의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자구책을 쓰지 않을 수 없었으니까요.
 

‘흑인 남성은 여전히 정치적 관점에서 이 나라의 학식 있는 백인 여성보다 훨씬 우위에 있다.‘? 백인 여성은 흑인과 이민자에 우선하여 참정권을 누릴 자격이 크다? 이는 명백히 인종차별적 발언이었다.

1867년 엘리자베스 캐디 스탠턴은 백인 여성으로서 참정권을 얻는 일이 흑인 남성이 투표권을 얻는 일보다 더 중요하다고 했다. 남북전쟁이 일어나고 노예 해방을 목전에 두자 스탠턴을 비롯한 일부 백인 여성들은 흑인 참정권에 결사 반대했다. 하지만 이에 반대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프레더릭 더글러스는 남부의 흑인에게도 투표권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평등의 관점에서). 남부에서 흑인을 상대로 자행되는 폭력과 테러의 심각성을 따져볼 때 백인 중간계급 여성보다 흑인에게 투표권이 우선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남북전쟁에서 북부군이 남부군에 승리하자마자 스탠턴과 동료들은 여성참정권에 대한 보상을 요구했다. 이들은 여성 권익 옹호를 위해 노예 해방 운동에 뛰어든 것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뛰어들지 않았을거라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공화당은 여성참정권을 지원하지 않았는데 자신들은 북부의 자본가들의 경제적 이익을 대변해야 한다고 생각해서였다.

노예 소유계급의 이익을 대변하던 민주당은 남부에서 흑인 남성에게 참정권을 부여하지 않을 방법으로 여성참정권을 강구했다. 스탠턴과 동료들은 여성참정권 지원에 목이 말라 있었기에 민주당에 인종주의자인 조지 프랜시스 트레인을 끌어들였다. 트레인은 ˝여성이 먼저, 니그로가 마지막˝, ˝남자, 그들의 권리, 이 이상은 안 돼, 여자, 그들의 권리, 이 이하는 안 돼˝하고 주장하는 사람이었다.

수정헌법 제15조는 인종, 피부색, 과거 노예였다는 사실(성별 제외)을 근거로 참정권을 박탈하지 못하게 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여성참정권 지지자들은 이 입장에 극렬히 반대했으나 프레더릭 더글러스는 미래를 위해 이 헌법이 비준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평등권협회가 해체되면서 흑인해방과 여성해방의 동맹은 결렬되었다. 평등권협회의 일부 남성 지도자들은 남성우월주의적이었고 여성 지도자들은 인종차별적이었던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애비 켈리 포스터(Abby Kelly Foster)는 스탠턴의 논리에 동조하지 않고 이런 질문을 던졌다.
우리가 여성이 정치적 권리를 획득할 때까지 현재의 고충과미래의 노예 상태에서 벗어난 흑인의 안전을 연기하고자 한다면, 우리에게 진짜 정의감이 있는 건가? 인간애라는 정서가 전혀 없는 게 아닌가? - P125

정통 공화당원들이 "지금은 니그로의 시간이다"라는 슬로건을 가지고 남북전쟁 이후 여성참정권 요구를 억눌렀을때, 사실 그 밑으로 진짜 하고 있던 말은 "지금은 우리 당에200만 표를 더 끌어들일 때다"였다. 하지만 엘리자베스 캐디스탠턴과 그 동료들은 그것이 ‘남자의 시간‘이라고, 그리고 공화당은 남성우월주의의 완전한 특혜를 흑인 남성들에게 확대할 준비가 되었다고 믿는 것 같았다. - P128

엘리자베스 캐디 스탠턴과 수전 B. 앤서니 모두 북군의승리를 남부 노예정치의 피해자였던 수백만 흑인들의 진정한해방으로 해석했다. 이들은 노예제가 폐지되면 흑인들이 미국사회 내의 거의 모든 측면에서 중간계급 백인 여성에 필적할지위로 자동으로 승격된다고 생각했다. - P130

프레더릭 더글러스는 투표권이 없으면 남부의 흑인들은경제적 진보를 전혀 이룰 수 없으리라고 주장했다.
선거권이 없으면 니그로는 사실상 여전히 노예 상태일 것이다. 개별적인 노예 소유는 철폐되었지만 이 조치 없이 (그러니까 투표권 없이) 남부의 주들을 복구한다면 공동체에 의한 흑인 소유 관행이 자리를 잡게 될 것이다. - P132

남북전쟁 이후 여성 권익 지도자들은 투표권을 목적 그자체로 보는 경향이 있었다. 이미 1866년에는 아무리 그 동기가 인종주의적이라 해도 여성참정권이라는 대의를 강력하게밀어붙이기만 하면 누구든 여성운동의 신입 구성원으로 충분히 인정받는 듯했다. 수전 B. 앤서니마저도 백인우월주의자를자처하는 국회의원이 여성참정권에 지지를 표하는 데서 빤한 모순을 감지하지 못했다. 앤서니는 노예제 찬성 입장을 가진 신문 편집자 출신 국회의원 제임스 브룩스(James Brooks)를 공개적으로 칭찬해서 프레더릭 더글러스를 크게 당황하게만들었다. 브룩스의 여성참정권 지지는 분명 공화당의 흑인참정권 지원에 맞서는 전략적 움직임이었음에도 수전 앤서니와 동료들은 브룩스에게 열렬히 찬사를 보냈다. - P135

프레더릭 더글러스는 19세기의 가장 명민한 흑인해방 지지자였음에도 자본가에 대한공화당의 충성심을, 그리고 이들에겐 흑인 참정권에 대한 초기의 요구만큼이나 인종주의가 쓸모 있다는 사실을 완전히이해하지 못했다. 평등권협회 내 흑인 참정권을 둘러싼 논란의 진정한 비극은 참정권이 흑인들에게 거의 만병통치약 같은 역할을 하리라는 더글러스의 입장이, 어쩌면 여성참정권에대한 페미니스트들의 인종주의적 완고함을 부추겼을지 모른다는 점이다. - P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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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2-07 14: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2-09 13:3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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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2-09 14:5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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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자들이란, 병의재발을 줄이기 위해서는 늘 절제해야 한다는 사실에 지쳐서는, 만일 어느 전능한 존재가 아무 고통도 주지 않고, 말 한마디나 약 한 알로 건강을 회복해 줄 수만 있다면, 그 손에 자신을 맡긴 채 그가 원하는 모든 것을, 평소에 자기를 고통스럽게하는 일까지도 아무 문제 없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법이다. - P42

이 가장자리의 작은 장식만 해도, 붉은 바탕 위에 그린 「곰과 포도」의 작은 포도나무만 봐도 그렇죠. 잘 그렸죠? 어떻게 생각하세요? 전 그림을 그릴 줄 아는 사람이 그렸다고 생각해요. 이 포도는 먹음직스럽지 않나요? 저는 제가 자기보다 적게 먹는다고 제가 과일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우긴답니다. 그렇지 않아요. 저는 여기 계신 어느 분보다 과일을 좋아하지만, 눈으로 즐기기 때문에 입에 넣을 필요가 없는 거죠. 뭐가 그렇게 우습죠?
코타르 의사 선생님에게 물어보세요. 이 포도가 나를 깨끗이씻겨 줄 거라고 말씀하실테니. 퐁텐블로의 백포도로 치료하는 분도 있지만, 나는 이 보베 장식 융단으로 치료한답니다. - P43

아마도 우리가 듣는 음은 그 높이와 부피에 따라 우리눈앞에 있는 다양한 차원의 표면을 감싸고 아라베스크 무늬 - P45

를 그리며 우리에게 넓이, 미묘함, 안정감, 변화에 대한 감각을 주려고 한다. 그러나 그 음은 뒤이어 또는 동시에 나타나는 음이 불러일으키는 감각에 휩쓸리지 않으려고 이들 감각이 우리 마음속에 충분히 형성되기도 전에 사라져 버린다. - P46

음에 대한 가능성을 여는 것 같았다. 오래전부터 그는 어떤 이상을 향한 목적에 자신의 삶을 전념하는 것을 포기하고 일상적인 만족을 추구하는 데 그치고 있었으므로, 물론 그런 사실 - P47

을 공개적으로 말한 적은 없지만, 그런 태도는 죽을 때까지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 더구나 그의 정신이 더 이상 고귀한 관념을 품지 않게 된 후부터는, 그런 이상이 존재한다는을 전적으로 부정하지는 않았지만 더 이상 믿지도 않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사물의 본질을 소홀히 하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생각으로 도피하는 습관을 얻었다. - P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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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壬午】二十八年始皇東行郡縣上鄒嶧山立石頌功業上太山陽至顚(巓)立石頌德從陰道下禪於梁父遂東遊海上方士徐市等上書請得與童男女入海求三神山不死藥浮江至湘山祠逢大風幾不能渡上問湘君何神對曰堯女舜妻始皇大怒使伐湘山樹赭其山

○ 初韓人張良父祖以上五世相韓韓亡良欲爲韓報仇始皇東遊至陽武博浪沙中張良令力士操鐵椎狙擊始皇誤中副車始皇驚求弗得令天下大索十日

여기서 나오는 진시황이 간 상산(湘山)은 요가 순에게 시집 보낸 두 딸인 아황과 여영의 전설이 있는 곳이다. 아황(娥皇)은 상군(湘君)으로 불렸고 여영(女英)은 상부인(湘夫人)으로 불렸다고 한다. 알다시피 요 임금은 자식에게 왕위를 물려주지 않고 덕이 있고 현명한 순 임금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순 임금이 상산(湘山)으로 순행을 나갔다가 그 곳에서 생애를 마감했는데 아황과 여영이 그리 슬퍼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그 곳이 그렇게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진시황이 지나갈 때 워낙 험난하게 지나가다보니 이들을 원망한 것이다. 때문에 노하여 산에 있던 나무를 모두 불태운 것이다. 진시황은 참... 성격이 모 아니면 도 인듯 싶다.

장량이 등장한다. 장량은 한나라에서 5대 째 재상을 지낸 집안이었는데 진나라에 의해 망했으니 진시황에게 좋은 감정이 있을리가 없다. 진시황이 순행을 하자 자객을 시켜 그가 탄 가마를 공격했으나 진시황을 죽이는 데는 실패한다. 주모자를 찾기 위해 10일 간 찾느라 혈안이었다고. 이와 관련한 상황은 초한지를 통해 생생하게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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