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공은 백리혜가 어질다는 것을 듣고 많은 재물을 치러서라도그를 데려오려 했으나, 초나라 사람들이 내주지 않을까 염려했다. 이에 사람을 보내 초나라에 일러 말했다. "나의 잉신인 백리혜가 여기 있는데, 청컨대 검정 숫양 가죽 다섯장으로 그의 몸값을 치르고자 한다." 초나라 사람들이 이를 받아들여 백리혜를 내주었다. 이때 백리혜는 나이가 이미 일흔 살이 넘었다. 목공은 감옥에 갇힌 백리혜를 풀어 주고 그와 함께 국사를 논의하려고 했다. 그러자 백리혜가 사양하며 말했다. "신은 망한 나라의 신하인데 어찌 자문할 수 있겠습니까!" 목공은 말했다. - P170
"우나라 임금이 그대를 등용하지 않아서 망했으니 그대 죄가 아니오." 그러고는 묻기를 고집하여 사흘 동안 이야기했다. 목공은 매우 기뻐하며 그에게 나랏일을 맡기면서 오고대부五段大夫라고 불렀다. 백리혜가 다시 사양하며 말했다. "신은 제 친구 건숙蹇叔에 미치지 못합니다. 건숙은 현명한데도세상 사람들은 그를 알아주지 않았습니다. 일찍이 신이 세상을 떠돌다가 제나라에서 곤경에 빠져질 땅의 사람들에게 걸식했는데 건숙이 신을 거두어 주었습니다. 신은 이 일로 인해 제나라 왕 공손무지를 섬기고자 했으나 건숙이 신을 말렸습니다. 그래서 신은 제나라의 난을 벗어나 마침내 주나라로 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주나라왕자퇴가 소를 좋아한다기에 신은 소 기르는 재주로 그에게 다가갔습니다. 퇴가 신을 쓰려고 할 때 건숙이 신을 말렸기에 신은 떠나서죽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우나라 임금을 섬기자 건숙이 다시 신을말렸습니다. 그러나 신은 우나라 임금이 신을 쓰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사사로이 녹봉과 관직이 탐나 잠시 머물렀습니다. 두 번은 그의 말을 들어 재난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한 번은 듣지 않아 우나라임금의 재난을 당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 때문에 그가 현명하다는것을 압니다." 이에 목공은 사람을 보내 많은 예물을 들여 건숙을 맞이하고 상대부로 삼았다. - P171
동주의 군주가 제후들과 함께 진나라를 공격하려고 도모하자 진나라는 상국 여불위呂不韋를 시켜 그를 죽이고 그 나라를 모두 진나라에 편입했다. 진나라는 주나라의 제사를 끊지 않고 양인陽人 땅을 주군周君에게 내려 주어 그 제사를 받들게 했다. 몽오蒙鰲에게 한나라를 정벌하게 하니, 한나라는 성고成皐와 공鞏을 바쳤다. 진나라의 국경이 대량에 이르렀고, 처음으로 삼천군三川郡을 설치했다. [장양왕] 2년, 몽오를 보내 조나라를 공격하여 태원을 평정했다. [장양왕] 3년, 몽오가 위나라의 고도 급을 침공하여 점령와 했으며, 조나라의 유차, 신성, 낭맹서른일곱 군공격하여데 성을 빼앗았다. 4월에 일식이 있었다. 왕흘이 상당을 공격했다. 처음으로 태원군太原郡을 설치했다. 위나라 장수 무기無忌가 다섯 나라의 군대를 이끌고 진을 공격하자, 진나라는 황하 바깥으로 물러났다. 몽오가 패배하여 포위망을 풀고 달아났다. 5월 병오일에 장양왕이 세상을 떠나자 아들 정이 자리에 오르니, 이 사람이 바로 진시황제秦始皇帝이다. - P204
대량 사람 위료尉繚가 와서 진나라 왕을 설득하여 말했다. "진나라가 강대해지자, 제후들은 마치 군현의 우두머리와 같아졌습니다. 신은 다만 제후들이 합하여 군대를 모아 뜻하지 않게 출병할까 두려우니, 이는 바로 지백, 부차, 민왕이 망하게 된까닭입니다. 원컨대 대왕께서는 재물을 아끼지 마시고 권세 있는 대신들에게 주어서 그들의 모략을 혼란스럽게 하신다면, 불과 삼십만금만 쓰고서도 제후들의 그러한 마음을 완전히 없앨 수 있습니다." - P213
진나라 왕은 한단에 가서 일찍이 자신이 조나라에서 태어났을 때 외갓집과 원한 맺은 사람들을 모두 산 채로 묻었다. - P216
과인은 보잘것없는 몸이지만 군대를 일으켜 포학한 반도들을 주살할 수 있었던 것은 조상의 혼령이 돌보아 주었기 때문이다. 이에 여섯 나라 왕이 모두 자신들의 죄를 승복하니 천하가 크게안정되었다. 이제 〔나의] 호칭을 바꾸지 않는다면 이룬 공적에 걸맞지 않게 후세에 전해질 것이다. 그대들은 제왕의 칭호를 논의하라." 승상 왕관, 어사대부御史大夫 풍겁馮劫, 정위廷尉 이사 등이 모두 말했다. "옛날에 오제는 땅이 사방 일천 리였고, 그 바깥의 후복이나 이복夷服의 제후들 가운데 어떤 자는 조회에 들기도 하고 어떤 자는들지 않았으나, 천자가 그들을 제어할 수 없었습니다. 지금 폐하께서 의로운 군대를 일으키시어 남아 있는 적들을 주살하고 천하를평정하여 전국에 군현을 만들고 법령을 통일하셨으니, 아주 오랜옛날 이래로 일찍이 없었던 일로 오제라 할지라도 감히 미치지 못하는 것입니다. 신들이 삼가 박사들과 함께 의론하여 말하기를 ‘고대에는 천황天皇이 있고, 지황地皇이 있고 태황泰皇이 있었는데, 태황이 가장 존귀했다.‘ 라고 했습니다. 신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존칭을 올리나니, 왕을 ‘태황‘이라 하십시오. 명命을 ‘제制‘ 라 하시고, 영습을 ‘조詔‘라 하시며, 천자가 스스로를 부를 때는 ‘짐朕‘ 이라 하십시오." - P219
"짐이 듣건대 태고太古 때에는 호號는 있었으나 시호는 없었으며, 중고中古 때에는 호가 있다가 죽으면 행적에 의거해 시호를 삼았다고 한다. 이와 같다면 자식이 아버지를 논의하는 것이나 신하가 군주를 논의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으니 짐은 받아들이지 않겠다. 지금부터는 시호를 정하는 법을 없애노라. 짐은 시황제始皇帝라 부른다. 후세부터는 수를 세어 이세二世, 삼세三世에서 만세萬世8에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전하도록 하라." - P220
시황제는 오덕五德오행의 처음과 끝이 번갈아 이어지는 순서를 헤아려 주나라는 화덕德을 얻었는데 진나라가 주나라의 덕을 대신했으니 화덕이 이기지 못하는 것을 따라야 한다고 생각했다. 바야흐로 이제부터는 수덕德이 시작된다고 생각해 한 해의 시작을 바꾸고 조정의 하례식도 모두 10월 초하루에 거행했다. 의복과 깃발과 부절의 색은 모두 검은색을 숭상했다. 숫자는 6을 기준으로 했으니 부절과 법관法冠을 모두 여섯 치로 하고 수레 너비는 여섯 자로 했다. 또 여섯 자를 일 보步라 하고 수레 한 대를 여섯 마리 말이 끌게했다. 황하의 이름을 덕수德水로 바꾸어 수덕의 시작으로 삼았다. 강하고 엄하며 매몰차고 깊이 있게 모든 일을 법에 따라 결정하고, 각박하게 인애, 은혜, 조화, 감정이 배제되었을 때에야 오덕의 수에 부합한다고 생각했다. - P220
장강을 타고 상산으로 가서 제사를 지냈다. 큰 바람을 만나 거의 강을 건널 수 없었다. 진시황이 박사들에게물었다. "상군湘君은 어떤 신인가?" 박사들이 대답했다. "듣자니 요임금의 딸이며 순임금의 아내였는데 이곳에 묻혔다고합니다." 그러자 진시황은 크게 화를 내며 죄수 삼천 명을 시켜 상산의 나무를 모두 베게 한 후 그 산을 벌거숭이로 만들었다. - P227
"이제 황제께서 천하를 합하여 소유하시고흑과 백을 구분하여 지존황제 한 분에 의해 모든 것이 결정되도록 하셨사온데, 아직도 사사로운 학문으로 서로 함께 법령과 교화를 흐비난하고, 사람들은 내려진 법령을 듣고 각기 자신의 학문으로 그것을 의논하니, 조정에 들어오면 마음속으로 반감을 품고 조정을 나오면 길거리에서 논의하며, 군주에게 과시하여 명예를 만들고 기이한것을 취해 고귀함으로 만들고 아랫사람을 이끌어 비방을 조성합니다. 이런 짓을 금하지 않는다면 위로는 군주의 위세가 떨어지고 아래로는 붕당이 만들어질 것입니다. 마땅히 이를 금지하는 것이 이롭습니다. 신이 사관에게 명해 진나라 기록이 아니면 모두 태워 버리도록 청하겠습니다." - P233
이때 진시황은 함양에 인구는 많은데 선왕의 궁전선왕 때 지은 궁전이 너무 작다고 생각했다. "내가 듣건대 주나라 문왕은풍에 도읍하고 무왕은 호에 도읍했다 하니, 풍과 호 사이가 제왕의 도읍지이다." 이에 위수 남쪽 상림원 일대에 궁전을 지었다. 먼저 아방阿房에 전전을 만들었는데, 동서로 오백 보이며 남북으로 오십장으로 위쪽에는 일만 명이 앉을 수 있고, 아래쪽에는 다섯 장 높이 깃발을세울 수 있었다. 사방으로 말이 달릴 수 있는 길을 만들어 궁전 아래에서부터 곧장 남산南山까지 이르게 했다. - P234
내가 노생 등을 존중하여 그들에게 많은 것을 내렸으나이제는 나를 비방함으로써 나의 부덕함을 더하고 있다. 함양에 있는유생들에 대해 내가 사람을 시켜 조사해서 물어보도록 하니 어떤 자는 요사스러운 말로써 백성들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이에 어사를 보내 유생들을 심문했다. 유생들이 서로를 고발하니법령으로 금지한 것을 범한 자가 사백육십여 명이었다. 그들 모두를 - P237
함양에 생매장하고 천하에 알려 후세에 경고했으며, 더 많은 사람들을 징발하여 변경으로 유배시켰다. 진시황의 맏아들 부소扶蘇가 간언하여 말했다. "천하가 막 평정되었으나 먼 곳의 백성들은 아직 따르지 않고으며, 유생들은 모두 암송하며 공자를 본받고 있는데, 지금 황상께서 법을 엄격하게 하여 그들을 옭아매니, 신은 천하가 안정되지 않을까 봐 두렵습니다. 황상께서 이 점을 살펴 주십시오." 그러자 진시황은 노여워하며 부소를 북쪽으로 상군에 파견하여몽염을 감시하게 했다. - P238
유성流星이 동군東郡에 떨어졌는데 땅에 닿자 돌덩이가 되었다. 백성들 가운데 누군가그 돌에 새겨 말했다. "진시황이 죽으면 땅이 나누어지리라." 진시황이 그 말을 듣고는 어사를 파견해 추적하면서 심문했지만아무도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자 돌이 있던 곳 주변에 사는 자들을모두 잡아 죽이고 그 돌을 불살랐다. - P238
7월에 수자리 병사 진승陳진섭등이 옛 형 땅에서 모반을일으켜 ‘장초張楚초나라를 넓힌다는 뜻‘ 라 했다. 진승은 스스로 자리에올라 초왕楚王이 되었으며, 진현에 머물면서 여러 장수들을 보내 땅을 점령하게 했다. 산동군현의 젊은이들은 진나라 관리에게 고충을 겪자 각자 자기 지방의 군수郡守, 군위郡尉, 현령縣令, 현승縣丞을 죽이고 모반을 일으켜 진섭 1에게 호응했다. 그들은 서로 자리에 올라 제후나 왕이 된 후, 진나라를 정벌한다는 명분으로 연합하여 서쪽으로 향했는데, 그 수가 이루 헤아릴 수가 없었다. - P249
이세황제가 말했다. "짐이 듣건대 한비자는 ‘요순은 나무를 베어다 깎아 내지 않고 서까래를 만들고 띠로 지붕을 이을 때도 처마 끝을 잘라 내지 않았으며, 질그릇에 밥을 먹고 토기에 물을 담아 마셨으니, 비록 문지기의먹을 것이라 해도 이보다 누추하지는 않을 것이다. 우임금은 용문龍門을 뚫어 대하大夏로 통하게 하여 황하의 막힌 물길을 터서 바다로흐르게 할 때 직접 자신이 가래를 쥐고 흙을 다듬어 정강이에 털이없어졌으니 노예의 수고로움도 이보다 대단하지 않다.‘ 라고 말했다한다. 무릇 천하를 얻어 귀하게 된 자는 뜻대로 하고 싶은 것을 모두할 수 있으며, 군주가 엄중히 법을 밝히면 아랫사람들이 감히 그릇된 행동을 하지 않아서 천하를 제어할 수 있는 것이다. 은나라와 하나라의 군주는 고귀하여 천자가 되었는데도, 몸소 곤궁하고 수고로 - P251
운 고단한 현실에 처해서 백성들을 위해 희생했으니, 오히려 무엇을본받겠는가? 짐은 지극히 존귀한 만승萬乘의 천자이나 그 실질적인것이 없으니 천승의 어가 만의 군속을 만들어 내 이름과 칭호를 충족하려 하는 것이다. …" - P252
진나라은 장한으로 하여금 군대를 거느리고 동쪽을 정벌하게 했으나 장한은 이를 틈타 삼군三軍의 무리에 의지해 바깥에서 협상을 하여 그의 황상에게 모반했다. 군신들을 믿을 수 없다는 것을 여기에서 볼 수 있다. 자영은 자리에 올라서도 끝내 깨닫지 못했다. 만약 자영에게 평범한 군주의 재능이 있었고 겨우 중간 정도의 재능을 지닌 보좌가 있었다면, 산동이 비록 어지러웠더라도 진나라의 국토는 온전히 보전할 수 있었을 것이며, 종묘의 제사가 끊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 P259
만약 진나라 왕이 지난 세대의 일들을 헤아리고은나라와 주나라의 자취를 아울러 가지고서 그 정치를 제어했다면, 후에 설령 음란하고 교만한 군주가 있었다 하더라도 기울고 위태로워지는 근심은 없었을 것이다. - P266
속세에 전하기로는 진시황은 죄악을 일으키고 호해는 죄악이 극에 이르렀다 하니 일리가 있다. 그런데 다시 자영을 책망하며 진나라의 국토를 보존할 수 있었다고 하니, 이른바 시세의 변화를 통찰하지 못한 것이다. 기나라의 기계가 휴읍빵을 제나라에 바친 것에 대하여 『춘추』는 이를 지적하지 않았다. 나는 「진시황 본기」를 읽다가 자영이 조고를 거열형에 처하는 데에 이르면, 일찍이 그 결단을 탄복하고 그 의지를 애석해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자영은 삶과 죽음의도의를 갖추었다. -> 사마천은 자영에 대한 평가가 애석했던 모양이구만. - P2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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