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달갑지 않은 섹스: ‘동의’라는 함정

좋은 여자 되는 것은 그만.

저서 《권위에 대한 복종Obedienceto Authority》에서 밀그램은 피험자들이 설계자의 지시에 순응해야 한다는 허구이지만 강력한 도덕적 의무감을 갖고 주어진일을 수행했다고 상세히 밝힌다. 사람들이 그 순간에 도덕적 양심을 잃었다는 것이 아니라, 실험 설계자의 모습을 하고있는 현장에 존재하는 권위자의 명령에 순응해야 한다는 허구이지만 다른 어떤 가치보다 우선시되는 의무감을 주입하는것이 생각보다 쉽다는 사실이다. 이 경우 권위자는 예일대학교 과학자라는 신상을 가진 하얀 가운을 입은 남성의 형상을하고 있다. 피험자들은 이 남성과 초면이었고, 그는 피험자들의 장래에 특별한 영향력을 행사할 만한 인물도 아니었다. - P101

피험자들은 고작 4달러의 참가비(와 교통비 50센트)를 받았을뿐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피험자들은 자신을 순응하게 만드는것을 설계자의 특권으로 여겼다. 피험자들이 반대하거나 실험과정을 중단하고자 할 때, 설계자는 다음과 같은 말 중 하나를순서대로 제시했다.
"계속하세요." 또는 "하던 대로 진행하세요."
고 "이 실험에서 당신은 하던 것을 계속해야 합니다."
"하던 일을 반드시 계속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최후의 수단으로는
"당신에게는 다른 선택권이 없습니다. 계속해야 합니다."
흥미롭게도 과도하게 강압적인 마지막 지시의 효과가 가장 떨어지는 것으로 밝혀졌다. 마지막 지시를 들은 피험자들은 실험실을 박차고 나갔다. - P102

부부 상담 이후 15년 동안 그는 이 끔찍한 현실을 인정하는 데 큰 어려움을 겪었다. 남편에게 더 이상 관계를 갖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것, 남편의 욕구를 거절하는 것은 그에게 두려운 현실이었다. 또한 그런 상태를 자기 자신에게조차 납득시키기 두려웠다고 한다. 대신 그는 이렇게 쓴다.
"성관계를 피하는 방법을 어떤 식으로든 찾아내곤 했다. 관계 갖는 것을 거절할 정도로 충분히 아픈 상태를 기꺼이 즐겼다. 비록 머리로는 언제든 내게 성관계를 거절할 권리가 있다는 걸 알고 있는데도 말이다." 성관계를 피할 수 없을 때 그는남편이 섹스를 하도록 내버려두었고, 그러는 동안 자신은 책을 읽으며 관심을 다른 데로 돌렸다고 한다. 그는 남편이 자신에게 키스하지 못하도록 했다. - P106

여성은 자신이 끔찍한 사회적 결과(직업상의 보복에서부터 파경까지)를 맞이하게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느끼는 한편, 남성들(자신이 성적 만족을 누릴 특권은 물론 여성의 열렬한 동의와 참여를 즐길 권리까지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에게 거절 의사를 밝힐 때 극도의 죄책감과 수치를 경험하게 된다. - P108

밀그램 실험의 이러한 성적 버전, 즉 여성 주체에게 근본적으로 성적 욕망이 결여된 상태나 자신이 종사하는 직업에서 문화적 권위를 가진 인물에게 순종하는 행위는 비단 섹스의 영역에 국한되지 않는다. 무엇보다 분명한 것은 그런 일이 또 다른 형태의 폭력으로 확장된다는 점이다. 성적인 부분과 관련된 일이건 아니건 간에 그런 폭력은 상대를 소유하려 들고, 무례하다. *********** - P113

여성들은 자신을 가해하거나 학대한남성들을 감싸지 않는 것에 대해 수치심과 죄책감을 느낀다.
여성들은 남성들에게 해를 입히거나 남성들을 실망시키길 원치 않는다. 여성들은 좋은 여성이 되길 원한다. - P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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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파의 길 - 식인 자본주의에 반대한다 서해문집 사회과학 시리즈
낸시 프레이저 지음, 장석준 옮김 / 서해문집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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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시점의 자본주의의 위기를 진단하고 잘 분석한 책. 자본주의를 경제의 논리로만 해석해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문제는 왜 왔고(역사)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 대안도 제시하였다(미래). 경제, 사회, 문화, 정치로 다각도로 바라보고 분석하였다는 점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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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수하 2023-03-12 20:5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요즘 너무 답답한데… 읽어야겠네요

거리의화가 2023-03-13 09:05   좋아요 1 | URL
세계가 전체적으로 다 답답하게 흘러가고 있고 어디 하나 좋은 뉴스가 없다보니 저도 힘이 빠집니다. 사회과학 책을 오랜만에 읽었는데 내용은 무겁지만 아주 잘 읽히고 좋았습니다. 문제를 제대로 알아야 최소한의 대처라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사물을 지각하는 데 있어 첫눈에 나눌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사물을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사람만이 사회적 위치가 곧 그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법이다. 동일 인물을 삶의 연이은 시기에 비추어 관찰해 본다면, 그 인물이 자신의 환경보다 반드시 높다고 할 수 없는 그런 다양한 사회 계층에 잠긴 것을 보게 된다. 삶의 어느 시기에 있어서 우리가 몇몇 환경과 관계를 맺고 또는 다시 맺을 때마다, 그리하여 그곳에서사랑을 받는다고 느낄 때마다, 우리는 아주 자연스럽게 그곳에 인간적인 뿌리를 내리고정착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 P159

드레퓌스 사건은 내가 스완 부인 댁을 출입하기 시작하던 시절 이후에는 판단 기준을 새로이 변화시켰고, 만화경은 그 채색된 작은 마름모꼴을 다시 한 번 뒤집었다. 유대인과관련된 모든 것은, 설령 우아한 귀부인이라 할지라도 밑바닥으로 추락했으며, 무명의 민족주의자들이 상승하여 그 자리를 대신했다. - P163

천박함에 대한 엘리트의 이러한 종속 상태는, 우리가 만일 거꾸로 아주 뛰어난 여인들이 그녀들의 지극히 섬세한 말을 가차 없이 비판하는 어떤 상스러운 자에 매혹되어 그자의 지극히 진부하기 짝이 없는 농담 앞에서도 애정이 넘치는 한없는관대함과 더불어 황홀해하는 경우를 생각해본다면, 수많은가정에서 일반화된 현상이라고 결론지을 수 있다. - P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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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탈과 착취의 구별은 경제적이면서 동시에 정치적이다. 경제적으로 봤을 때 두 용어는 (분석상으로는 구분되지만) 서로뒤얽혀 가치를 확대하는 ‘자본 축적‘ 메커니즘들에 붙여진 이름이다. 반면 정치적으로 봤을 때는 ‘지배‘ 양식과 관련된 용어들이다. 특히 권리를 보유한 개인·시민과, 예속민부자유한 노예·하위 집단의 종속적 구성원을 구별하는 지위 위계제와 관련된다. - P89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자본주의의 강고한 수탈-착취 결합체를 극복하는 일이며, 그 기반 전체를 변형시키는 것이다. 그리하여 수탈-착취 공생을 유발하는 더 큰 시스템을 철폐함으로써 자본주의의 수탈과 착취 모두를 근절하는 것이다.
오늘날 인종주의를 극복하려면, 이런 변혁의 쟁취를 목표로삼는 인종 교차적 동맹이 필요하다. 이 동맹은 구조 변화의 결과로 저절로 출현하지는 않으며, 꾸준한 정치적 노력을 통해서만구축될 수 있다. 그러려면 금융화된 자본주의에서는 착취와 수탈이 공생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시각이 반드시 필요하다. - P111

일반적으로 자본주의 사회는 사회적 재생산과 경제적 생산을 분리하여, 전자를 여성과 결부시키고 그 중요성과가치가 눈에 잘 띄지 않게 만든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자본주의 사회는 바로 그 사회적 재생산과정에 의존해 공식 경제를만들어낸다. 이러한 분할division + 의존dependency + 책임 회피disavowal의 별난 관계야말로 불안정화destabilization를 야기하는 비법이다. 실제로 D로 시작하는 이 네 단어는 모순을 압축한다. 자본주의의 경제적 생산이 사회적 재생산에 크게 의존함에도 불구하고, 무한히 축적하려는 자본주의의 충동이 바로 그 재생산 과정과 역량을 불안정하게 만들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그 장기적 결과는 자본주의 경제에 필수 불가결한 사회적 조건들에 닥치는 주기적 위험이다. - P121

당면한 ‘돌봄 위기‘의 뿌리가 자본주의에 내재한 사회적 모순, 아니 더 정확히 말해 이 모순이 오늘날 취하고 있는 첨예한 형태인 금융화된 자본주의에 있다고 제시했다. 이 주장이 옳다면, 이 위기는 사회 정책에 의한 땜질로는해결될 수 없을 것이다. 해결은 오직 현 사회 질서의 심대한 구조적 변혁을 거쳐야만 가능하다.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재생산을 탐욕스럽게 생산에 종속시키는 금융화된 자본주의의 극복이다. 다만 이번에는 해방도, 사회보호도 희생시켜서는 안 된다. 이는 생산/재생산 분할을 재발명하고 젠더 질서를 새롭게 구상해야 함을 뜻한다. - P147

자본주의 사회는 ‘자연‘에 의존해 ‘경제‘를 만들면서 둘을 존재론적으로 분할한다. 이 제도배열은 - P165

가치의 최대 축적을 즐기면서도 자연을 손님으로 초대하지는않으며, 이로써 경제가 (자신이 유발한) 생태적 재생산 비용에 대해 책임을 회피하도록 프로그램화한다. 그 결과 이 비용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수록 생태계가 불안정에 빠지며, 주기적으로자본주의 사회의 날림 건축물 전체에 균열을 일으킨다. 자연을필요로 하면서도 하찮게 여김으로써 자본주의는 자기 신체의필수 기관을 먹어 치우는 식인종이 된다. 자본주의는 우로보로스처럼 자기 꼬리를 먹는다. - P166

자본주의의 생태적 모순은 이 시스템의 다른 구성적인 비합리성이나 불의와 깔끔하게 분리될 수 없다. 환경만을쟁점으로 삼는 환원론적 생태지상주의 시각으로 다른 모순들을무시한다면, 자본주의의 독특한 제도적 구조를 놓치게 된다. 자본주의 사회는 경제를 자연만이 아니라 국가, 돌봄, 인종적·제국주의적 수탈과도 분리함으로써, 함께 상호작용하는 모순들의 얽힘을 제도화한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비판이론이 단일한 틀안에서 동시에 추적해야 할 주제다. - P175

오늘날 민주주의의병증은 고립된 문제도, 부문의 문제도 아니다. 우리 사회 질서를통째로 집어삼키고 있는 전반적 위기 가운데 특히 정치적인 성격을 띠는 지류다. 그 근본 토대는 이 질서의 힘줄, 즉 사회 질서의 제도적 구조와 구성적 역학에 있다. 그러므로 정치적인 것에한정되지 않는 과정을 늘 함께 염두에 둬야만, 사회적 총체성에바탕을 둔 비판적 시각으로 민주주의의 위기를 포착할 수 있다.
이 사회적 총체성이란 정확히 무엇인가? 많은 날카로운 논평가들이 이를 ‘신자유주의‘라 확인하며, 이는 일리가 있다. - P221

정당하고 효과적인공적 권력은 자본 축적이 지속될 수 있게 하는 조건이다. 하지만 자본의 무한한 축적 충동은 자신이 의존하는 그 공적 권력을오랜 시간에 걸쳐 불안정에 빠뜨리는 경향이 있다. 이 모순이 - P226

현재 민주주의 위기의 근원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중요한 또 한가지는, 민주주의의 위기는 자본주의 시스템의 또 다른 곤경들과 긴밀히 얽혀 있으며, 그것만 따로 떼어서는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다. - P227

자본주의는 경제가 아니라 사회의 한유형이다. 이 사회에서는 경제화된 행위 및 관계의 무대가 다른비-경제화된 영역들과 분리돼 그 바깥에 있는 것으로 나타나는데, 경제화된 영역은 비-경제화된 영역들에 의존하지만 이에 대한 책임은 나 몰라라 한다. 자본주의 사회를 구성하는 것은 ‘정치‘ 혹은 정치적 질서에 의존하면서도)와 구별되는 ‘경제‘, ‘사회적재생산‘ 영역에 의존하면서도)과 구별되는 ‘경제적 생산‘의 무대, 무책임하게 내버려진 수탈 관계에 의존하면서도)와 구별되는 착취 관계의 조합, 비인간 자연의 물적 토대에 의존하면서도)와 구별되는 인간 행위의 사회역사적 영역이다. - P2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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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본기 - 개정판 사기 (민음사)
사마천 지음, 김원중 옮김 / 민음사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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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의 사기를 언젠가는 정독해봐야지 했었다. 처음 구입하고 얼마 안 되었을 때 통독을 했었고 이제 정독을 할 때가 되었다 싶어 읽게 되었다. 재미로만 따지면 군상들이 담긴 <사기열전>부터 읽으라는 이야기도 있으나 나는 <사기본기>부터 읽는 것이 좋겠다 판단했다.

<사기>는 오제 시대부터 한 무제까지의 중국 고대 시기를 기록한 역사서이다. 사기는 대표적인 기전체 역사서로 편년체 역사서와 구별된다. 편년체는 역사적 흐름에 따라 주욱 나열하는 방식이다. 기전체는 인물 중심으로 서술하면서 본기, 세가, 열전, 표, 서(또는 지)의 구조로 백과사전과 같이 분류한 방식이다. 때문에 기전체 역사서를 읽을 때는 각 편만 읽어서는 안 되고 본기, 세가, 열전을 함께 읽어야 그 흐름이 완성된다.
역사적 시기를 구분해보았을 때 서주 건국이 될 때까지, 전국 시대, 진나라와 한나라 사이의 시기, 한나라 무제 이후의 시기의 역사로 나눌 수 있다. 


<사기본기>는 제왕들의 전기를 엮은 것이다. 오제 시기부터 진나라 통일 이전까지는 오제, 하, 은, 주, 진으로 나라별로 나누어져 있고 이후에는 인물별로 실려 있다. 본기의 목차를 보다가 놀라운 지점이라면 단연코 항우와 여태후가 그것에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일 것이다. 여태후는 유방, 한 고조의 아내로 그가 죽고 나서 혜제 이후 황제는 있었으나 실권을 장악하고 통치를 했기 때문에 크게 놀랍지는 않으나 항우가 본기에 들어간 것은 그야말로 놀랍게 느껴진다. 하지만 사마천은 유방을 마지막까지 괴롭힌 항우를 고조 본기 앞에 두었다. 그만큼 한 고조와 그의 시기를 비판적으로 바라보았다는 이야기가 되겠다.

태사공은 말한다. "효혜황제와 고후의 재위 시절, 백성들은 비로소 전국 시대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군주와 신하가 전부 쉬면서 아무것도 행하지 않으려 했기 때문에 혜제는 팔짱을 끼고 아무 일도 하지 않았고, 고후가 여주인으로 황제의 직권을 대행해 정치가 방 안을 벗어나지 않았어도 천하가 편안했다. 형벌이 드물게 사용되어 죄인이 드물었다. 백성들이 농사에 힘쓰니 옷과 음식은 더더욱 풍족해졌다." - P407
(태사공은 여태후를 이렇게 평가했으나 사실 여태후는 득보다 실한 평가가 많다. 인정이 없고 잔혹하며 사사로이 형벌을 감행했다는 등이다.)


역사서는 이렇게 사관이 개입될 수밖에 없다. 사마천이 <사기>를 쓰고 편집할 때는 한 무제 시기였다. 그는 흉노족과의 전투에서 포위당한 이릉 장군을 변호하다가 무제의 분노를 사서 궁형의 치욕을 받았다.  사기의 편명 각 말미에 '태사공 평'을 넣음으로써 본인의 사관과 해석을 뚜렷이 하였다는 점을 참고하며 읽어야 한다.


역자가 이야기하기도 하지만 '효경 본기'와 '효무 본기'는 위작 논란이 있는 항목이다. '효경 본기'는 앞의 사마천의 본기와는 문체가 다르게 밋밋하게 쓰여져 있다. '효무 본기'는 당대 시기에 쓰여졌는데 죽지도 않은 사람에게 '효무'를 붙인 것이 이상하고 개인적으로도 원한이 있을 법한데 이리 사적 감정 없이 객관적으로 보이도록 쓸 수 있었을까 하는 의심이 들기 때문이다. 게다가 '효무 본기'를 읽어 보니 무제의 치세에 대한 관련된 기록보다는 신선을 찾았다는 이야기, 봉선을 행하는 기록에 치우쳐 있다. 향후에 <사기세가>와 <사기열전>, <자치통감>을 읽으면서 크로스체킹을 해봐야 진면목을 알 수 있을 것 같다.

<본기>는 인물 전기이지만 <세가>와 <열전>보다는 더 건조하게 쓰여져 있다. 물론 <자치통감> 등의 역사서보다는 인물과 관련한 일화들이 담겨 있어서 상대적으로 더 재미를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사기본기>는 '항우 본기'가 백미다. 뒤에 '고조 본기'가 나오지만 같은 사건을 두고도 '항우 본기'는 풍부하게 쓰여져 있다면 '고조 본기'는 밋밋하고 건조하게 쓰여져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항우 본기'의 사실의 진위 여부는 둘째치고  여기에만 실려 있는 내용들이 있어서 후대에 쓰여진 역사서에 대부분이 '사기'를 참고했다고 한다. 항우와 관련된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다른 역사서에는 없는 인물들도 있음)와 명문장을 보는 즐거움이 눈을 뗄 수 없게 만들었다.
본기를 전체적으로 보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항우 본기'만큼은 읽어보시라 말씀드리고 싶다.

"군대를 일으킨 이래 지금까지 여덟 해 동안 직접 칠십여 차례나 싸우면서 맞선 자는 쳐부수고 공격한 자는 굴복시켜 이제껏 패배한 적이 없었기에 드디어 천하의 패권을 차지했다. 그러나 지금 결국 이곳에서 곤경에 처했으니 이는 하늘이 나를 망하게 하려는 것이지 내가 싸움을 잘하지 못한 탓이 아니다. 오늘 죽기를 굳게 결단하고 그대들을 위해 통쾌하게 싸워 기필코 세 차례 승리하고, 그대들을 위해 포위를 뚫으면서 적장을 베어 죽이고 적군의 깃발을 뽑아 버림으로써 그대들에게 하늘이 나를 망하게 하는 것이지 싸움을 잘못한 죄가 아니라는 것을 알리고자 한다." - P325


오강의 정장이 배를 강 언덕에 대고 기다리다가 항우에게 말했다.
"강동은 비록 좁지만 땅이 사방 천 리이며 백성들 수가 몇십 만이니 왕 노릇 하기에 충분합니다. 대왕께서는 서둘러 강을 건너십시오. 지금 오직 저에게만 배가 있어 한나라 군대가 도착해도 건널 수 없습니다."
그러자 항우가 웃으며 말했다.
"하늘이 나를 망하게 하는데 내가 무엇 때문에 강을 건너겠는가! 나 항적이 강동의 젊은이 팔천 명과 함께 강을 건너 서쪽으로 갔는데, 지금 한 사람도 돌아오지 못했거늘 설사 강동의 부모와 형제들이 나를 불쌍히 여겨 왕으로 삼아 준다 해도 내가 무슨 면목으로 그들을 보겠는가? 설령 그들이 말하지 않는다 해도 나 자신이 마음에 부끄러움이 있지 않겠는가?" - P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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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울목 2023-03-12 02: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한무제는 사실 잔인한 황제입니다. 그럼에도 사마천은 용기있게 이릉에 대해 변호했다지만, 사실은 변호가 아니라 진실을 진실 그대로 밝힌 것입니다.
그로인해 처벌받은 사마천은 빈 껍데기인 평가,진실이 아닌 평가는 거부했던 것같습니다.
그렇기에 사실 그대로 그 시대를 좌지우지했던 인물, 항우와 여태후를 본기를 넣었던거라 생각합니다.

거리의화가 2023-03-13 09:13   좋아요 0 | URL
네. 저도 항우와 여태후가 시대를 풍미한 인물임에는 분명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본기에 실린 한 무제의 일화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좀 더 다양한 자료를 통해서 확인해보고 싶다 여겼습니다.

희선 2023-03-12 03: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마천은 인물을 중심으로 역사서를 썼다는 것만 알기도 하네요 아버지는 있는 그대로 쓰라고 했다고... 역사니 있는 그대로 써야지 거짓을 쓰면 안 되겠습니다 역사책 쓰는 건 쉽지 않겠네요 있는 그대로 쓰지 않는 사람도 있을 것 같기도 하네요


희선

거리의화가 2023-03-13 09:14   좋아요 0 | URL
역사서를 쓰는 것은 비판이나 비난을 감수하고 쓰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사마천이 다양한 사료를 수집하여 쓴 역사서인만큼 많은 노력을 기울인 책임에는 분명한 것 같아요.

그레이스 2023-03-13 11: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까치출판사걸로 열전, 본기, 세가 순서로 읽었습니다. 이 책 민음사는 그 후에 다시 읽었구요.
화가님 리뷰 보니 몇페이지 보다 만 한서를 올려다보게 되네요 ^^;;

거리의화가 2023-03-13 13:47   좋아요 1 | URL
까치출판사 것도 있죠^^ 사기 읽는 순서는 중요하지 않은 것 같아요. 어쨌든 본기, 세가, 열전을 모두 읽으면 한 세트가 되는 거니까요. 한서는 이북으로 받아놨는데 저도 읽어야 할 타이밍이 된 것 같습니다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