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버드 중국사 진.한 - 최초의 중화제국 하버드 중국사
마크 에드워드 루이스 지음, 김우영 옮김 / 너머북스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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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이 여러 차례의 분열기를 거친 이후 변신을 거듭하며 오랜 기간에 걸쳐 존속할 수 있었던 것은 초창기의 제국들인 진과 한漢에 의해 시도된 중국문화의 근본적인 재구성 덕분이다. 그 시기에 정치와 군사제도는 물론이거니와 문예활동과 종교적 관습, 친족구조, 향촌생활, 심지어 도시경관도 재편되었다.
진과 한 두 제국은 중국 문명의 ‘고전기‘를 이루는데, 이는 그리스와로마가 서양에서 성취했던 바와 유사하다. 그리스-로마 시대의 지중해권 문화와 마찬가지로, 이 시대의 중국 문화는 그 후 그것으로부터성장해 나온 여러 왕조의 문화와 확연하게 구별된다. 그렇지만 이 시대에 중국 최초의 통일이 이루어진 방식을 파악하지 않고서는, 그 후에 펼쳐진 중국의 역사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 P19~20

하버드 중국사 1권은 사실 작년에 읽으려고 정리해두었던 책이었는데 이제야 시작하게 되었다. 중국사 책 읽기를 얼마 전부터 시작했으니 이제 더는 미룰 수 없게 된 셈이다. 먼지를 털어내듯 시작했다.

작년에 읽었던 하버드 C.H. 베크 세계사와 관련성이 있다 보여지지 않지만 목차나 구성을 보면 비슷하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이 책은 일반적으로 우리가 역사서에서 만나듯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정리된 역사서가 아니다. 그러니까 어느 왕 다음에 어느 왕이 나오고 이런 식의 역사서가 아니라는 것. 그러니까 이런 역사서를 기대한 사람에게는 실망을 안길 수도 있을 것 같다.

총 6권의 시리즈로 정리된 하버드 중국사는 시대별로 테마가 서로 다르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시대별로 중요했던 명제에 따라 역사는 다르다.

예를 들어, 진나라의 경우 전국 시대의 혼란을 뚫고 세워진 나라인 만큼 전쟁이 항시 벌어졌던 환경이었고 중앙 집권 하의 황제의 권력이 중요했다. 때문에 '전쟁을 위해 조직된 국가', '제국의 역설', '법률' 같은 테마가 주제로 들어갔을 것이다. 한나라는 서한과 동한 시절이(전한과 후한으로 불리기도) 다른 만큼 진과 한이 어떻게 다른지에 주목했다. 오래갈 것 같았던 진나라가 20년도 안 되어 무너지고 한나라가 들어선 것은 왜인가. 진나라는 강한 법률과 황제의 지나친 권력이 백성들을 피폐하게 만들었다. 여기에 한나라의 정통성을 강조하기 위한 경전의 보급이 중요했던 만큼 '문예'라는 챕터가 들어간 것이 눈에 띈다.

두 나라간에 공통점도 많았다. 진은 상앙의 농지 개혁에 따라 개별 농가의 토지 소유권을 인정하고 지역에 따라 주민들을 이주시켰으며 그들에게 납세와 군역의 의무를 지우면서 제국의 질서를 만들었다. 중앙 권력인 황제가 있었지만 그럼에도 지방의 소리는 꺼지지 않았다. 초기 한나라는 진의 질서를 대부분 세습하되 자신들에게 맞춰 개선해나가는 방식을 택했다. 나라가 바뀐다고 해서 기존의 시스템을 모조리 다 갈아엎지 못한다는 소리겠다.

가장 인상적인 챕터는 '농촌사회', '친족'과 '종교' 였다.
진나라와 한나라에서 살던 사람들을 지금 바로 앞에서 느낄 수 있게 하는 주제였다고 생각한다.

농업은 고대 사회에 주축이 되는 기본 산업이었다. 지리적으로 북부와 남부에 땅의 질이 차이가 많았기 때문에 습윤한 땅이었던 남부는 치수를 중요시 했다. 북부는 물을 외부에서 끌어오는 것을 기본으로 고랑을 넓게 파고 씨앗을 고랑에 파종시키고 다음 해는 고랑과 이랑의 위치를 바꾸어 지력을 높이는 방식으로 토양을 개선시켰다.
마을은 현에서부터 시작하여 향, 정, 리까지 규모가 넓어지고 각 호는 소규모의 토지를 소유하면서 작위에 따라 등급화되는 체계였다. 농가는 일반적으로 4~5인의 가족으로 이루어진 소농들이었다. 작위를 받으면 특권(군역 면제 등 혜택)이 주어지기 때문에 점점 이를 노리는 이들은 많아졌다.
돈이 많고 지위가 있는 가문들은 학자들을 집안에 초대하거나 다른 성씨와 혼인, 조정의 관리와 인맥을 맺으면서 네트워크를 형성하였다. 특이한 것은 이들이 가구를 여러 개로 쪼개어 여러 개의 군현과 지방을 실질적으로 지배하면서 자신들의 부와 토지를 늘릴 뿐 아니라 인맥을 확대했다는 것이다.

최근으로 올수록 기존의 역사 서술에서 다루지 않았던 '여성', '노예' 등의 주제를 다룸으로써 균형을 맞춰가려고 노력하는 점이 보인다. '친족'은 그런 점이 가장 돋보이는 테마였다.
고대 가부장제가 기본인 사회에서 '여성'은 지워진 존재로 비켜서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역사서에서 다루지 않았더라도 여성들의 삶은 존재했다. 실제로 이 시기 가구 내에서 여성들이 제법 지위가 있었다고 한다. 물론 권위적으로 성별보다는 연령의 지위가 높았기 때문에 장자에 대한 존중이 더 높았지만.
현실에서 여성들은 가구를 지배했다. 진한시대 황태후의 권력이 막강했기도 했던 것은 특히 유방의 아내인 여태후가 대표적이다. 내부 공간은 여성이 관장했다면 외부 공간은 남성이 지배했다. 부계 친족 사회를 보존하는 데 여성들의 네트워크는 꽤나 위협적이었을 것 같다.

'종교'라는 주제에서 내가 눈여겨 본 것은 의례와 상장례다. 진한 시기 황제들, 특히 진시황이나 한 무제 등은 집권 시기 여러 차례의 봉선 의식을 가졌다. 이들이 봉선 의식을 가졌던 것은 자연신에게 최고의 권위를 부여함으로써 스스로를 인간계와 선계 사이에 인정받는 천하의 주인으로 확립하는 과정이었다. 사기를 읽으면서 한 무제 때 봉선 의식이 왜 이리 많이 나오나 궁금했는데 이런 배경이 있었다. 주나라 초기만 해도 산 자와 죽은 자 사이의 관계를 중요시 하며 연회를 즐기기도 하며 마치 축제처럼 사람을 떠나보내는 과정이었다. 이것이 전국시대 말 무렵이 되면 산자와 죽은자가 명확히 분리되고 한나라 때가 되면 형식을 중요시하면서 이를 확립해나가는 결과로 나아간다. 지방의 제의는 의례와 민간 신앙이 여전히 공존하는 방식이었다.

앞으로 남은 시리즈가 어떤 방식으로 전개될 지 사뭇 궁금해진다. 적어도 나는 이런 방식의 역사 서술이 나쁘지 않다. 다만 어느 정도 기본적인 시대의 흐름을 알고 이 책을 통해 전체적으로 주제별로 정리하는 방식이 되면 더욱 도움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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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甲辰】十年 戚姬有寵於上 生趙王如意 上以太子仁弱 欲廢之而立趙王 大臣爭之 皆莫能得 御史大夫周昌 廷爭之彊 上問其說 昌爲人吃 又盛怒 曰 臣口不能言 然臣期期知其不可 陛下欲廢太子 臣期期不奉詔 上欣然而笑

○ 初上以陽夏侯陳豨 爲相國 監趙, 代邊兵 豨過辭淮陰侯 淮陰侯挈其手 辟左右 嘆曰 公所居天下精兵處也 而公陛下之信幸臣也 人言公畔(叛) 陛下必不信 三至必怒而自將 吾爲公從中起 天下可圖也 陳豨曰 謹奉敎 九月 遂與王黃等反 自立爲代王 劫略趙, 代 上自擊之 至邯鄲 喜曰 豨不南據邯鄲 而阻漳水 吾知其無能爲矣 上令周昌 選趙壯士可令將者 白見四人 上嫚罵曰 豎子能將乎 四人慙皆伏地 封各千戶 以爲將 左右諫曰 今封此何功 上曰 非汝所知 陳豨反 趙代地皆豨有 吾以羽檄 徵天下兵 未有至者 今計 唯獨邯鄲中兵耳 吾何愛四千戶 不以慰趙子弟 皆曰 善 上聞豨將 皆故賈人 曰 吾知所以與之矣 乃多以金購豨將 豨將多降〈出史高紀及韓信傳〉

溫公曰 世或以韓信爲首建大策 與高祖 起漢中 定三秦 分兵以北禽(擒)魏, 取代 仆趙, 脅燕 東擊齊而有之 南滅楚垓下 漢之所以得天下者 大抵皆信之功也 觀其距蒯徹之說 迎高祖於陳 豈有反心哉 良由失職怏怏 遂陷悖逆 夫以盧綰 里開〔閈〕舊恩 猶南面王燕 信乃以列侯奉朝請 豈非高祖亦有負於信哉 臣以爲高祖用詐謀 禽信於陳 言負則有之 雖然信亦有以取之也 始漢與楚相距滎陽 信滅齊 不還報而自王 其後漢追楚至固陵 與信期共攻楚 而信不至 當是之時 高祖固有取信之心矣 顧力不能耳 及天下已定 則信復何恃哉 夫乘時以徼利者 市井之志也 酬功而報德者 士君子之心也 信以市井之志 利其身 而以士君子之心 望於人 不亦難哉 是故太史公論之曰 假令韓信 學道謙讓 不伐己功 不矜其能 則庶幾哉於漢家勳 可以比周召太公之徒 後世血食矣 不務出此 而天下已集 乃謀畔逆 夷滅宗族 不亦宜乎

진희의 군대가 패배하고 한신은 병을 칭하며 진희의 공격에 따르지 않고 몰래 진희와 반란을 공모하였다. 이를 지켜보던 이가 한신을 고발하자 여후가 소하와 모의하여 고조가 부른 것처럼 속여 그를 불렀다. 한신은 괴철의 계책을 쓰지 않한 것을 후회하며 삼족이 멸해진다.
괴철은 고조의 부름을 받고 죽을 뻔 하였으나 그 때는 한신만 알았지 유방은 알지 못했다며 빠져나간다.
한신에 대한 세간의 평가와 온공의 평가가 사뭇 다르다. 아마 이 때도 한신에 대한 여러 생각이 있었을 듯하다. 그는 애초부터 반란을 할 생각이었을까(일인자가 되고 싶었던 것일까) 아니면 유방에게 속은 것이 분하여 그 때부터 자신의 몸을 보전하기 위해서 배반을 결심하고 이행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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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初上以陽夏侯陳豨 爲相國 監趙, 代邊兵 豨過辭淮陰侯 淮陰侯挈其手 辟左右 嘆曰 公所居天下精兵處也 而公陛下之信幸臣也 人言公畔(叛) 陛下必不信 三至必怒而自將 吾爲公從中起 天下可圖也 陳豨曰 謹奉敎 九月 遂與王黃等反 自立爲代王 劫略趙, 代 上自擊之 至邯鄲 喜曰 豨不南據邯鄲 而阻漳水 吾知其無能爲矣 上令周昌 選趙壯士可令將者 白見四人 上嫚罵曰 豎子能將乎 四人慙皆伏地 封各千戶 以爲將 左右諫曰 今封此何功 上曰 非汝所知 陳豨反 趙代地皆豨有 吾以羽檄 徵天下兵 未有至者 今計 唯獨邯鄲中兵耳 吾何愛四千戶 不以慰趙子弟 皆曰 善 上聞豨將 皆故賈人 曰 吾知所以與之矣 乃多以金購豨將 豨將多降〈出史高紀及韓信傳〉

진희가 회음후 한신을 평소 잘 따랐다. 도성에 와 있던 한신을 만나 하직인사를 하며 자신이 먼저 일어나면 천하를 도모할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진희가 스스로 대왕이 되어 조나라와 대나라를 공략하였고 한 고조는 이 소식을 듣고 직접 출정하여 공격하였다. 고조는 주창으로 하여금 조나라 장수를 선발하고 진희의 장수들을 매수하였다(한신의 끈은 이제 떨어졌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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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장 제국의 도시들

중국이 여러 차례의 분열기를 거친 이후 변신을 거듭하며 오랜 기간에 걸쳐 존속할 수 있었던 것은 초창기의 제국들인 진과 한漢에 의해 시도된 중국문화의 근본적인 재구성 덕분이다. 그 시기에 정치와 군사제도는 물론이거니와 문예활동과 종교적 관습, 친족구조, 향촌생활, 심지어 도 - P19

시경관도 재편되었다.
진과 한 두 제국은 중국 문명의 ‘고전기‘를 이루는데, 이는 그리스와로마가 서양에서 성취했던 바와 유사하다. 그리스-로마 시대의 지중해권 문화와 마찬가지로, 이 시대의 중국 문화는 그 후 그것으로부터성장해 나온 여러 왕조의 문화와 확연하게 구별된다. 그렇지만 이 시대에 중국 최초의 통일이 이루어진 방식을 파악하지 않고서는, 그 후에 펼쳐진 중국의 역사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 P20

중화문명은 유난히 지형과 긴밀한 관계를 맺어왔다. 지형은 중화문명의 적지 않은 기본적 특성을 형성해왔고, 역으로 그 자체는 구석기 시대 이래 수백 세대에 걸쳐 농민들이 흘린 피땀을 통해 변화되어왔다. 이런 식의 자연 정복은 천연자원과 그것에서 생계수단을얻는 방법의 통제를 통해 타자에 대한 지배권을 주장하는 기반이 된다. 땅과 물의 관리는 진한 제국의 구조와 역사적 경로에 결정적으로중요하게 작용했다. - P29

진한 제국에서 황하는 인구의 약 90퍼센트를 그 유역에 품고 있던중화문명의 핵심이었다(지도 4). 그곳은 산과 언덕에 의해 서북부 지역(오늘날의 감숙과 섬세부)과 황토고원 지대(섬서, 산서, 하남河南서부), 충적평야 지대(하남, 하북 북부, 산동, 안휘 북부, 강소蘇북부)로 나뉘었다. 이 시기에는 변방에 속했던 양자강의 배수 유역도자연적으로 세 구역높은 산으로 둘러싸인 민강 분지(오늘날의사천四川), 양자강 중류(호북, 호남湖南, 강서江西), 양자강 하류 , 안휘 남부, 강소)으로 분할되었다. - P33

통일의 옹호자들은 지방의 풍속을 지적 결함과 문화적 결핍의 표지로 간주했다. 철학적인 면에서 풍속은 인습적 지혜의 오류를 나타내는 것으로, 진한 제국이 표방한 지적 전통에 배치되는 것이었다. 정치적인 면에서 풍속의 노예는 열등한 피지배자였다. 지역의 풍속은편협하고 제한적인 것으로, 고전문헌에 기초한 성인의 보편적인 지혜와 상반되는 것이었다. - P45

상앙의 변법은 주나라의 골격을 형성했던 도시와후배지 사이의 사회적·제도적 장벽을 무너뜨렸다. 그는 농촌 전역을반듯한 격자형으로 구획했고, 전 인구를 군사단위로 나누었으며, 모든 행정지구를 군사구역으로 개편했다. 그런 다음 전쟁터에서, 또는농사를 통해 쌓은 공에 따라 개별 가구들을 격자형 경지 위에 분포시켰다. 이와 같이 군민의 질서를 일치시키고, 사회 전체를 군사적정복에 주력하게 만드는 체제는 전국시대의 뚜렷한 특징이자 최초의제국을 출현시킨 밑거름이었다. 상앙의 개혁은 궁극적으로 주나라 식의 귀족제도에 종말을 고했고, 반독립적인 도시국가에서 군사적·종교적 힘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통제하에 있던 농촌마을들로부터 생존에 필요한 물자들을 강탈했던 무장종족들에게 치명타를 가했다. - P79

진이 세를 키워 패권을 쥐고, 궁극적으로 통일된 제국을 창출하는 데 성공한 것은 두 가지 측면에서 타국에 비해 진일보했기 때문이다. 첫째, 상앙의 주도 아래 진나라는 전국시대를 특징짓는 개혁들 가운데 가장 체계적인 개혁을 이루어냈다. 이 개혁은 호적을 작성하여 모든 성인 남성을 군역에 동원하고 그들로부터 세금을 징수하는결과를 낳았다. 여타 열국도 전시체제를 갖추었지만, 진은 이 체제를사회 전체로 확대하고, 정복을 위해 병력을 동원하고 그들에게 식량을 보급하는 데 행정력을 집중했다는 면에서 독보적이었다. 둘째, 오직 진나라만이 범수에 의해 도입된 정책을 통해 통치자 개인에게 권력을 몰아주는 데 성공했다. 다른 나라들이 여전히 봉신과 종친에게권위와 특권을 나누어주고 있을 때, 진은 통치자 한 명에게 나뉘지 않은 절대적인 권한을 부여할수 있었다. - P86

기원전 1천년기의 전반에, 중국의 일부가 된 북부 지역의 많은 민족이 계절에 따라 가축을 한 목초지에서 다른 목초지로 이동시키는 유목에 바탕을 둔 새로운 생활방식을 점차 발전시켰다. 전국시대에 북중국의 국가들은 이 북방 민족들에 의해 사용되던 초원지대로 세력을 넓혀나갔고, 확장된 영토를 지키기 위해 장성을 쌓았다.
날이 갈수록 이 북방의 민족들과 그들의 독특한 생활방식을 의식하게된 중국인들은 자신들의 나라를 ‘중심‘으로 ‘정의‘하면서, 지리적 측면뿐 아니라 문화적 측면에서도 중심에 속하지 않는 ‘바깥 세계와 대비시키기 시작했다. 그리스인이 적군인 페르시아인과 대비되는 일련의특징을 통해 스스로를 정의했듯이(자유로운/예속적인, 단호하고 강인한/나약하고 감각적인), 중국인은 자신들이 ‘오랑캐들‘과 확실히 다르다고생각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형성된 ‘화이‘ 관념은 중화제국의창출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 P121

진나라는 중국 전역을 통치한 최초의 국가였기 때문에, 어떻게 제국을 다스려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유일무이한 본보기로 남아 있었다. 따라서 한 왕조는 진나라의 많은 제도를 답습했다. 하지만 한 왕조가 오랫동안 존속할 수 있었던 것은 진의 제도를 신중하게 점진적으로 개선하고, 가끔은 어쩔 수 없이 새로운 통제방식을 채택한 덕분이었다. - P125

제국의 본보기이자 비판의 표적이라는 진의 이중적 역할은 그 이중성을 둘러싸고 생겨나온 역사적 신화에 반영되었다. 진의 급속한 부상과 멸망은 진나라와 제국의 성격에 대한 후대 중국인의 사고에 깊이각인되었다. - P141

전국시대 도시의 물리적 구획은 영속적인 법적·사회적 구분으로 이어져, 중화제국 도시 설계의 본보기가 되었다. 초기 제국의시대에, 국가는 배후에 농경지를 갖춘궁전도시들의 위계적 연결망으로부터 형성되었다. 주거지. 작업장 시장으로 구성된 도시의 외성은재화의 생산과 교환을 위해 필요했지만, 이념과 재정 양면에서 주변적인 공간이었기에 잠재적으로 국가에 위협적이었다. 국가는 거리와시장을 격자형으로 구획하여 질서를 부여하려고 노력했지만, 외성의주민들은 정부가 구상한 용역과 위계의 이상형과는 거리가 먼 존재로남아 있었다. 시적에 등록된 상인들과 공장들조차도 부에 기초한 대안적 위계를 만들어내어 비참한 농촌 주민들로 하여금 본업을 버리고돈을 벌기 위해 도시로 떠나도록 유혹함으로써 국가를 위협했다.
게다가 시장은 불법적인 일을 해서라도 한밑천 마련해보려는 주변인들을 도시로 끌어들였다. - P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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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력한 사상은 반대자에게도 그 힘의 일부를 전달한다. 정신의 보편적가치에 참여하는 강력한 사상은 다른 이차적인 사상들 가운데서 반대자의 정신 속에 끼어들고 접붙으며, 그리하여 반대 - P240

자는 이런 이차적인 사상의 도움을 받아 약간의 양분을 취하면서 그 강력한 사상을 수정하고 보완한다. 그러므로 최종 결론은 언제나 논쟁을 벌이는 두 사람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 P241

질베르트가 외동딸인 건 사실이지만, 적어도 거기에는 두 명의 질베르트가 있었다. 아버지와 어머니에게서 나온 두 성질이 단순히 그녀 안에서 섞이는 데 그치지 않고, 이두 성질이 서로 그녀를 가지려고 다투었고, 게다가 두 성질이라는 말도 정확한 표현이 아닌데, 제3의 질베르트가 그동안다른 두 질베르트의 희생물이 되는 고통에 시달렸음을 추측하게 하기 때문이다. - P247

이 두 질베르트 사이의간극은 너무 커서 당신은 자신이 무슨 짓을 했기에 이렇게 사람이 달라졌는지 생각해보지만 아무 소용없는 일이다. - P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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