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참 잘도 흘러간다. 벌써 4월도 중순이 훌쩍이라니. 요즘은 산책을 하며 꽃 사진 찍는데 열을 올린다. 가끔 하늘을 쳐다보기는 하지만 미세먼지와 황사가 잦아서 쾌청한 하늘을 기대할 수 없어서인지 하늘 사진은 덜 찍게 된다.
꽃의 화사함을 보고 있으면 기분이 우울했다가도 맑아짐을 느낀다. 내 안의 더러운 때가 맑아지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하면서.

옆지기는 2주 연속 야근 모드라 아침에 배웅하고 나면 내내 홀로 집을 지켰다. 왠지 집순이가 된 것 같아 이상한 느낌이었는데 한동안은 이럴 것 같다. 돌이켜보니 예전에 옆지기가 한동안 지방에 내려가 일을 해야해서 강제로 주말부부가 되어야했던 적이 있다. 사실 주말부부가 별건가. 지금도 주중에는 아침/저녁에 잠깐 얼굴 보는 게 다인걸. 그 때는 당연히 지금보다 어렸고 더 뜨거웠을(!) 때니 허전했었던 기억이 난다. 지금은 뭐 혼자 있어도 너무나 잘 논다. 혼자 있어도 참 잘 놀고 잘 살아서 옆지기가 한때 물어본 적도 있다. “뭐 그렇게 할 일이 많아?” 사실 내가 하는 일의 범위란 크게 벗어난 적은 없다. 기껏해야 쌓여 있는 책들을 한 권씩 읽고 한 번씩 기지개를 켰다가 가까운 곳에서 산책을 하고 좋은 공기를 마시고 이따금 사람들을 구경하고 드라마나 영화를 보거나 음악을 듣는 것. 그게 거의 전부인 것 같다. 아! 정말 가끔 문화 생활을 하는 것도.

지난 주부터는 철쭉이 하나 둘 피기 시작했다. 회사 근처에는 철쭉이 참 많기도 한데 찍고 보니 이상하게 자줏빛, 빨강, 하얀 철쭉만 있다. 분홍색 철쭉은 안 찍었군(여기서 내가 분홍을 참 싫어하는구나 느낀다^^;).


주말에는 사기열전을 꺼내 읽기 시작했고 코리아 체스판 상권을 완독했다. 사기열전은 역사책이 이렇게 재밌어도 되나 싶을 정도로 흥미진진하다(여기 실린 인물들은 역사에 이렇게 남게 되었으니 어떤 느낌일까 싶다. 당연히 모르시겠지만^^). 그리고 코리아 체스판은 역시나 읽을 만한 가치가 있었다. 한반도는 늘 화산처럼 언제 터질지 모르는 곳이라는 것을 되새기면서. 책을 읽을수록 문제점에 대한 해답을 구하려 하면 안 된다는 것을 깨닫고 있다. 수학처럼 인생의 대부분의 문제는 정답이 없기 때문이다. 그저 내가 모르는 질문들에 다양한 선택지를 채워나갈 뿐이다.


행복의 약속은 지난주부터 본격적으로 읽기 시작했고 1장은 뭘 읽었는지 모르게 지나갔다(어려웠다). 그리고 오늘까지 해서 3장을 읽었고 소설이나 영화를 기반으로 이야기를 해주니 이해하기 쉬웠다. 비록 내가 다 안 읽은 책과 영화들이지만^^; 역시 사례는 소설과 영화만한 것이 없다 싶다. 특히 2장의 내용 중 가족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때 여러 생각을 하며 읽었다. 나는 가족에게서 안정감이라는 것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구나 생각했다. 친밀함이라는 단어가 너무나 이질적이고 껄끄럽게 느껴지는 것이다. 결혼을 했고 옆에 사람이 있기는 하지만 관계를 통해서 무언가를 채우기에는 내가 너무 비좁나 싶기도 하고 스스로가 불안정하다 느껴서 벽을 치는 것 같기도 하고...

자녀의 의무는 부모를 행복하게 하는 것, 그리고 스스로가 행복함으로써 혹은 올바른 방식으로 행복하다는 신호를 보여 줌으로써 이런 의무를 행복하게 수행하는 것이다.
이런 의무를 따른다는 것은 현상유지를 위해 행복의 - 행복한 것으로 전달된 - 기호들에 단순히 가까이 가는 것을 의미할 수 있다. 페미니스트 계보들은 그런 올바른 것들에 행복에 대한 희망을 걸지 않을 뿐만아니라 자신들의 불행은 그런 것들에 의해 행복해져야 한다는 바로 그 의무 때문이라고 목소리 높인 여성들의 계보라고도 볼 수 있다. 따라서 페미니즘의 역사는 문제 일으키기의 역사, 다른 사람들이 좋다고 하는 것을 따르지 않거나 다른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어 주는 일을 거부함으로써 소피가 되기를 거부한 여성들의 역사다. - P111


세월호 9주기가 되었다는 걸 달력을 뜯어보며 새삼 되새겼다. 이제 노란색은 내게 개나리와 더불어 세월호를 떠오르게 한다. 그리고 그에 어울리는 김윤아의 라이브 앨범을 들었다. 아침 댓바람부터 ‘강’을 듣다가 울 뻔했다. 강물에 흘러간 사람들처럼 우리도 언젠가 떠나보내야 할 때가 오긴 할까.


그리고 과학의 고전이라는 뉴턴의 프린키피아를 펀딩해서 책을 받았다. 사진을 미처 찍지를 못했다. 언젠가는 읽겠지 하면서^^; 과학 책은 정말 드문 드문 읽는데 그래도 꾸준히 조금씩은 읽는 것 같다. 무엇보다 번역이 어떨까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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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티나무 2023-04-17 17:4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 강렬하네요 빨강!!!!!!

저도 행복의 약속 4장 들어갔어요. 거리의 화가님처럼 가족 부분에서도 킬조이페미 부분에서도 많은 생각이…..🙄

거리의화가 2023-04-18 09:33   좋아요 1 | URL
빨강 철쭉 이쁘죠^^ 자줏빛 철쭉이 주로 보이더니 요즘은 빨강 철쭉도 많이 보이더라구요.

아... 오늘 아침에 4장 읽으려고 했는데 갑작스레 일이 생겨 못 읽었습니다. 난티나무님도 비슷한 곳에서 많은 생각이 드셨었군요. 특히 2장은 생각할 거리가 많았던 것 같습니다.

단발머리 2023-04-17 18:1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 <행복의 약속> 앞부분만 읽다가 멈춘 상태인데 거리의화가님 인용문 보니 얼른 읽고 싶어지네요. 사기열전 재미있다고 하셔서 거리의화가님에 대한 궁금증이 100정도 상승했습니다. 책에 대한 감상과 예쁜 꽃사진 덕분에 맘이 화사해지네요^^

거리의화가 2023-04-18 09:39   좋아요 1 | URL
<행복의 약속> 앞부분이 특히나 좀 어려워서 저도 계속 붙들고만 있을 듯하여 일단은 읽자하고 읽어내려갔어요. 사라 아메드의 ‘정동‘이라는 개념이 아직은 명확하게 들어오지 않아서인 것 같습니다. 1장까지는 철학적인 내용들이 많은 듯한데 그래도 2장부터는 예시들도 많고 현실의 내용들이라 재밌게 읽으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ㅋㅋㅋ 사기열전 읽어보셨나요? 특히 열전은 더 재밌답니다. 본기, 세가도 재밌지만 열전의 인물들이 더 실감나게 그려져서가 아닐까 싶습니다. 화사해지셨다니 저도 기쁘네요^^
책을 읽으면서 감상이 종종 떠오르는데 놓쳐서 지나갈 때가 많습니다. 앞으로는 그 횟수를 늘려가야겠다 싶네요. 감사합니다^^

다락방 2023-04-18 08:1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주말에 외출하는데 철쭉이 지천이라 멈춰 서서 사진을 찍었어요. 제가 멈춰서 꽃 사진을 찍었던 그 때부터가 아마 노화의 시작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노화는 사실 아주 오래전부터 진행되고 있었던 셈이고요.

행복의 약속은 진도가 쉬이 나가질 않아요. 어렵지 않은것 같은데 그렇다면 쉬운가 하면 그게 아니고 말이지요.

안정감을 느끼게 되는 대상은 저마다 다른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누군가는 가족에게서 찾을 수 있고 누군가는 연인에게서 찾을 수 있고, 어쩌면 누군가는, 그러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비인간 존재로부터 그것을 느낄테고요. 얼마전에 투비에 올리신 잠자냥 님의 글을 보니, 그것은 예술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거리의화가 2023-04-18 09:46   좋아요 1 | URL
다락방님 말씀처럼 저도 꽃이 좋아지는 걸 생각하며 내가 나이가 들어가고 있구나를 느낀답니다. 예전에는 꽃이 그닥 들어오지 않았었거든요. 요즘은 꽃이 그렇게나 이쁘더라구요. 역시 사람의 앞 일은 알 수 없나 봅니다^^

<행복의 약속> 오묘하죠? 어려운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1장까지는 용을 쓰면서 읽다가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서 마음을 비웠습니다. 다행히 2장, 3장은 1장에 비하면 수월하게 읽었어요. 과연 제가 이 책을 다 읽고 소감을 정리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단 하나의 가르침이라도 들어올 수 있었으면 좋겠다 하며 읽고 있습니다.

저도 잠자냥님 글 보면서 여러 생각을 했었어요. 저는 예술, 특히 음악에 많이 위로를 받는 것 같습니다. 사람과의 관계는 대부분 비대칭인 경우가 많잖아요. 결코 5:5가 될 수는 없는 것 같아요. 누군가가 더 주면 다른 누군가는 더 받고 그런 거겠죠. 저는 정말 친정 식구들과의 관계가 소원하다 느끼거든요. 그렇다고 해서 가족들이 싫은 건 아니고 거의 연락도 잘 하지 않는데다가 시큰둥하고 무신경한 경우가 많아서 내가 너무 못됐나 관심이 없는게 정상인가 이렇게 느껴서 생각이 많아졌던 겁니다. 나중에 후회할 일을 만들고 싶지 않기도 한데 그게 쉽지는 않네요. 성격이 쉽게 바뀌는 건 아니니까... 아무튼 감사합니다.

독서괭 2023-04-18 15:2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 아름다운 꽃사진 좋네요^^ 꽃이나 나무 사진 단체창에 올리고 그러면 노화라고 하는 말이 있지만(ㅎㅎ) 꽃 보기 좋아하는 건 아이들에게도 해당됩니다. 첫쨰 아이가 꽃 보고, 예쁘게 떨어진 꽃 있으면 줍는 걸 좋아해요.
<사기열전>이 그렇게나 재밌는 책인가요? (약간 의심의 눈초리ㅋㅋㅋ)
4월 일력, 커다란 16의 노랑이 마음 아프네요.

거리의화가 2023-04-18 15:54   좋아요 1 | URL
이맘때에 느낄 수 있는 아름다운 풍경이죠. ㅋㅋㅋ 저는 카톡 단체창이 몇 개 있지만 아직까지 올려보지는 않았어요^^; 확실히 점점 꽃사진을 더 많이 찍는 것 같기는 합니다.
꽃을 보기 좋아하는 아이들이 있다구요? 감성적인 아이들이네요! 3년간 코로나를 겪은 상실 때문에 그런 것 아닌가 싶기도 한데 아닐까요?ㅎㅎ 아무튼 감성적인 아이인 듯 싶어요!
ㅋㅋㅋㅋ <사기열전> 재미난 책입니다. 역사적 배경을 모르고 읽어도요. 다양한 인물들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성공한 사람만 나오는 게 아니라 종국에는 실패했거나 찌질하거나 빈틈이 많은 인물들도 나와서 흥미로워요^^
4월 16일을 기억하도록 업자들이, 또는 업체들이 저렇게 고려를 하는구나 생각이 들더라구요. 일력 말고 저 왼쪽에 있는 건 마스킹테이프인데 노란 리본이 달려 있어서 찡했습니다.
 

3장. 불행한 퀴어

우리는 타자의 행복을 바랄 수도 있고, 타자에게 행복을 주고 싶을수도 있고, 타자의 행복의 원인이 되고 싶을 수도 있다. 또 이 모든 것들을한꺼번에 바랄 수도 있다. 이런 바람들에 따라오는 것은 무엇인가? 흥미로운 것은 사랑하는 사람의 행복을 바라면서 종종 "단지"just라는 기표를붙이며 주저한다는 사실이다. "내가 바라는 건 단지 네 행복이야." "단지" 행복을 바란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부모가 아이에게 이렇게 말할 때이는 무슨 의미인가? "단지"가 드러내는 것, 행복을 바라는 것은 아이에게 더 많은 것을 요구할 수 있지만 다른 건 바라지 않겠다는 것처럼 구는것일 수 있다. 어떤 면에서는 아이의 행복에 대한 욕망이 특정한 종류의 자유를 주는 듯하다. 마치 "네가 이렇게 되거나 저렇게 하기를 바라는 게 아니야. 단지 널 행복하게 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되거나 하기를 바랄 뿐이야"라고 말하는 듯하다. 이때 "무엇이든"이라는 말이 그 "무엇"의 의무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준다고도 말할 수 있다. 마치 아이의 행복에 대한 욕망은 결정의 내용에 어느 정도 무관심해도 되는 자유를 주는 듯하다. - P169

나는 시몬 베유의 다음과 같은 사랑에대한 정의를 퀴어적 정의로 제시하려 한다. "행복한 사람에게 사랑이란행복하지 않은 연인의 고통을 나누려는 소망이다. 불행한 사람에게 사랑이란 연인이 행복하다는 사실을 아는 것만으로도 기뻐하는 것이다. 그 행복을 공유하지 않아도 되고, 심지어는 그러기를 소망하지도 않는다"(Weil1952/2002: 63[107]). 퀴어의 사랑에 행복이 포함되려면 그런 행복은 서로공유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함으로써만 가능한 것이다. - P182

퀴어에 대한 인정은 용인에 대한 희망이나 약속으로 이야기되는데,
이때 용인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무엇이 용인할 만한 것인지 이미 결정돼있는 세상에서 용인받을 만한 것이 돼야 한다. 인정은 이성애 세계로부터 - P193

퀴어들에게 주어지는 선물이 되고, 이는 퀴어들의 노고와 투쟁(Schulman1998: 102 참조), 그리고 퀴어 운동으로 생성된 생활 세계들을 감춘다. 그런 인정은 이성애적straight 환대의 형태와 같아서, 결국 행복한 퀴어를 남의 집에 방문한 손님으로 만들고 그들의 지속적인 선의에 의지하게 한다. 그런 세상에서 당신은 당신에게 주어진 이런저런 것들에 감사해야 한다. 손님은 최상의 행동거지를 보여 줄 도덕적 의무가 있으며, 이런 의무의이행을 거부하면 공존할 권리도 위협받는다. 행복한 퀴어, 즉 예의를 갖추고 식탁에 제대로 앉아 있을 줄 아는 퀴어는 무례한 세계에 자리 잡는전략적 형식 가운데 하나일 순 있다. 하지만 전략적 자리 잡기는 현상유지를 의미할 수 있다. 아니면 자리를 잡으려는 노력 속에서 바뀌지 않는건 우리일 수도 있다. 퀴어 운동은 식탁이 바뀌기를 희망하면서 "식탁에자리 하나를 더 만드는 일이다(Ahmed 2006: 174). - P194

행복한 퀴어는사회적 희망의 한 형식이자 "우리가 얼마나 멀리 왔는지"를 나타내는 기호이다. 차별이 극복된 세상에 대한 희망이다. 이 희망이 담고 있는 위험은 그것이 마치 세상에 차별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듯 재상상한다는 데 있다. - P208

행복하게 퀴어 되기는 정상이라고 간주되는 것의 불행을 탐색하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퀴어들이, 자신이 원하는 것을 행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 개인적 욕망을 희생해야 하는 불행을 그 비뚤어지고 뒤틀린 도착성 속에서 폭로하는 듯하다. - P215

열망aspiration의 라틴어 어원이 "숨을 쉬다" breathe임을 기억해 보자. 견딜 만한 삶을 위한 투쟁은 퀴어들이 숨 쉴공간을 가지기 위한 투쟁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마리 루티의 말대로(Ruti2006: 19), 숨 쉴 공간을 갖는 것, 자유롭게 숨 쉴 수 있는 것, 그것이 열망이다. 숨쉬기와 더불어 상상력이 온다. 숨쉬기와 더불어 가능성이 온다.
만약 퀴어 정치학이 자유에 관한 것이라면, 그것은 그저 숨 쉴 자유를 의미하는 것일 수 있다. - P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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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아 - 라이브앨범 행복한 사랑은 없네 [2CD / 슬리브 컬러 2종 중 랜덤 발송] - 슬리브(컬러 2종 중 랜덤)+북클릿(28p)
김윤아 노래 / 지니(genie)뮤직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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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처럼 답답한 길을 걸어가고 있다는 생각을 할 때 그의 처연하고 구슬픈 목소리는 위로이고 빛이 된다. 봄날은 떠나가도 가라앉은 마음을 가만히 쓰다듬어주는 김윤아의 목소리를 사랑한다. 라이브 앨범만이 지니는 마지막의 조용한 박수 소리가 심금을 더 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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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울 때는 채우시고 비울 때는 비우시고, 천지만물이 다 그러하외다. 만물뿐이겠소? 만 가지 현상이 다 그러하외다. 비어 있어도 운행이 안 되는 법, 쌓여 있어도 운행이 안 되는 법, 많이 먹으면 배가 터져서 죽고안 먹으면 배 곯아서 죽고,"
"임병에 죽은 귀신아 칼 맞아 죽은 귀신아 배 곯아 죽은 귀신아 목매어 죽은 귀신아, 작두 가져올까요."
"여보시오 소지감선생, 무배들을 그리 괄시하지 마소. 나는무배는 아니오만 신령이 있고 없고 물증이 없기론 매일반 아니겠소. 서울 식자 귀에는 내 말이 우매하게 들릴지 모르나 이치란 어디 갖다가 붙여도하나요, 명료하고 어긋남이 없는 것인데 쓸데없이 헤매면서 근간(根幹)은 놔두고 수많은 잔가지들 각기 마음대로 휘어잡고 이것이다 저것이다. 때론 잔가지로 그물코를 만들어서 죄 없는 사람 올가미 씌우기 일쑤, 의론에 영일 - P184

이 없는 잘난 식자들 아무리 그 머리통 거미줄같이 생각이 얽힌들 그것 다 헛배 앓음에 불과한 것," - P185

혼란이며 목마름이었다. 순명할 수밖에 없는 절대적인 힘 앞에서 꿈틀거리는 한 마리의 벌레, 단말마의 고통으로 몸부림치는 한 마리의 벌레, 자신의 마지막 삶의 모습을 조용하는 어느 누구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았다. 동정이라는 구둣발로 짓이겨지는 것은 상상만 해도 모골이 서늘해진다. 함에도 불구하고 누구 한 사람 얼씬거리지 않는 산장은 공포, 그것은 공포의 밤이요 공포의 낮이었다. 각각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를 지켜보는 시간은 가장 잔인한 고문이었다. - P200

"본성은 냉혹한데 자기 자신에게는 어찌 늘 그렇게 달콤하냐. 쇠약해지고 희미해진 자네 눈에 비치는 제문식, 그리고 자신에게 소속된 사람들, 여전히 개새끼처럼 고깃덩이를 보고 침을 흘린다, 물론 그렇지, 그렇고말고, 본능이니까. 그러나 억누르는 자의 힘이 쇠약해지면 자네가 생각하는 대로 한몫을 얻어내기 위하여 고깃덩이를 보고 침을 흘리며 꼬리가 부러져라 흔들어대는 개새끼들이 있고 다른 하나는쌓였던 분노와 증오 때문에 작은 몫이고 큰 몫이고 그건 안중에 없이 덤벼들어 목덜미를 물어뜯는 부류도 있는데 그것 또한본능 아니겠나." - P213

"복종의 존재인 저 거대한 무리는 그러나 결코 복종 아니하면서 목적에 이르지도 못한 채 사라져가며 또 사라져가고, 결코 그들은 그 아무에게도 지배된 적이 없고, 어떤 힘도 그들을 완벽하게 지배한 적은 없었다. 물질의 결핍이란 순간 순간 혹은 어느 기간에 있어서의 고통이며 굶주림과 헐벗음이 생명을 파괴하는 만큼 의식주야말로 가장 초미한 문제임엔 틀림이 없겠으나 그러나 존재만으로 인간은 설명이 되지 않아. 도시 인간을 모르겠다 한 것은 그 때문일까? 노예나 노비들의 끊임없는 탈출에의정열, 그 치열함이 헐벗음과 굶주림과 더불어 역사의 본질일까. 그리고 그네들은 본능적으로 진리를 진실을 희구하며 종교나 예술, 사랑을 혹은 일을 통하여 끊임없이 소망하고 갈망하며 이것들이 상극하고 상승하고 상쇄하며 엄청나게 준동하는데 상층과 중간층이 역사를 지배해왔다는 것은 과연 옳은 말일까? 상층과 중간층은 중심에서 퉁겨나간 한낱 비말(飛沫)에 불과한 거 아닐까. 대다수 민중이야말로 거대한 여울이다, 여울.
내가 또 그들을 모르겠다 한다면 중언부언이겠으나 거대한 그집단, 꿈틀거리는 그 집단은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가, 내게 있어서 그 행방은 늘 불가사의하면서도 불길해." - P219

커튼을 걷는다. 산장의 뜰에는 눈부신 햇살이 가득 차 있었고 새들이 지저귀고 있었다.
신록은 미친 것처럼 연둣빛 진초록이 서로 얽히고 설켜 일렁이고 있었다. 타고 있었다. 녹색도 탄다. 진홍의 단풍만 타는 것은 아닌 모양이다. 생명이 타고 있는 것이다. 생명의 환희, 인고의 겨울은 이 환희를 예비하고 있었기에 설원은 그렇게 청정(淸淨)하였는가. 햇빛은 황금가루같이 부서지고 흩어지고, 산장에서 바라다뵈는 앞산에는 철쭉이 한창이다. 짙고 옅은 빛깔,
분홍 같은 연보라 같은 빛깔들이 얼룩처럼 구름처럼 흐드러지게도 피어 있다.
‘여자도 아니요 가족도 아니요, 아무것도 없는데 지금 내 곁에는 햇빛과 신록과 꽃빛만이 있구나.‘ - P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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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하늘의 이치는 사사로움이 없어 늘 착한 사람과 함께한다."
백이와 숙제와 같은 사람은 착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은가?
그러나 그들은 이처럼 어진 덕망을 쌓고 행실을 깨끗하게 했어도 굶어 죽었다. - P64

춘추시대 말기에 나타난 도적 도척盜은 날마다 죄 없는사람을 죽이고 그들의 간을 날로 먹었다. 잔인한 짓을 하며 수천 명의 무리를 모아 제멋대로 천하를 돌아다녔지만 끝내 하늘에서 내려준 자신의 수명을 다 누리고 죽었다. 이는 도대체 그의 어떠한 덕행에 의한 것인가? 이러한 것들은 그러한 사례 중에서도 가장 두드러진다.
최근 사례를 살펴보면 하는 일이 올바르지 않고 법령이 금지하는일만을 일삼으면서도 한평생을 호강하며 즐겁게 살고 대대로 부귀가 이어지는 사람이 있다. 그런가 하면 걸음 한 번 내딛는 데도 땅을가려서 딛고, 말을 할 때도 알맞은 때를 기다려 하며, 길을 갈 때는작은 길로 가지 않고, 공평하고 바른 일이 아니면 떨쳐 일어나서 하지 않는데도 재앙을 만나는 사람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이런 사실은) 나를 매우 당혹스럽게 한다. 만약에 이러한 것이하늘의 도리라고 한다면 옳은 것인가? 그른 것인가? - P65

자장이 녹을 구하는 방법을 묻자 공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많이 듣고 그중에서 의심나는 것을 버리고 그 나머지를 신중하 - P171

게 말한다면 실수가 적을 것이다. 많이 보고 그중에서 의심나는 것을 버리고 그 나머지를 신중히 실행한다면 뉘우치는 일이 적을 것이다. 말에 실수가 적고 행동에 뉘우침이 적으면 벼슬은 그 가운데 저절로 얻어진다." - P172

"네가 말하는 ‘통달‘이란 무슨 뜻이냐?"
자장이 대답했다.
"나라에서도 이름이 알려지고 집에서도 반드시 이름이 알려지는것입니다."
그러자 공자는 이렇게 말했다.
"그것은 명망이지 통달이 아니다. 대체로 통달한 사람은 질박하고 정직하여 의를 좋아하고, 남의 말을 잘 듣고 표정을 잘 살피며,
깊이 생각하고 다른 사람에게 자신을 낮춘다. 이렇게 하면 나라에서나 집에서나 반드시 통달하게 된다. 그러나 명망 있는 사람은 겉으로는 어진 척하지만 실제 행동은 완전히 어긋나면서도 그러한 것에물들어 조금도 의심 없이 행동한다. 이렇게 하면 나라에서나 집에서나 반드시 이름을 얻게 된다." - P173

위앙이 말했다.
"평범한 사람들은 옛 풍속에 안주하고 학자들은 자기가 배운 것에만 몰두합니다. 이 두 부류의 사람은 관직에 있으면서 법을 지키게 할 수는 있지만 법 이외의 문제변법를 더불어 논의할 수는 없습니다. 하, 은, 주 삼대는 예악 제도가서로 다르지만 천하에서 왕노릇하였고 오백五伯춘추 오패은 종법 제도가 서로 다르지만 모두 천하의 우두머리가 되었습니다. 지혜로운자는 법을 만들고, 어리석은 자는 예법의 통제를 받으며, 현명한 자는 법을 고치고, 평범한 자는 예법에 얽매입니다." - P200

진나라왕이 남을 꾸짖는 말은 둥근 고리처럼 돌고 돌며, 군사를 움직이는것은 나는 새처럼 재빠르므로 태후도 막을 수 없고 양후도 말릴 - P258

수 없었습니다.
위魏나라 장수 용고와의 싸움, 한나라 안문岸門에서의 싸움,
위魏나라 봉릉封陵에서의 싸움, 고상 싸움, 조장趙莊과의 싸움등에서 진나라가 죽인 삼진 지역의 백성은 수백만 명이나 되고지금 살아 있는 자는 모두 진나라가 죽인 자들의 고아와 과부입니다. 서하西河 외에도 상락上雒의 땅, 삼천 일대 등 삼진의 땅 중에서 진나라에 침략된 땅이 그 절반이나 됩니다. 진나라가 만든 재앙은 이렇게 큽니다. 그런데도 진나라에 갔던 연나라와 조나라의 유세가는 모두 다투어 자기 나라의 군주에게 진나라를 섬겨야 한다며 설득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신이 가장 걱정하는 바입니다."
연나라 소왕은 진나라로 가지 않고, 소대는 다시 연나라에서 중용되었다. - P259

합종에 참가하는 나라들은 양떼를 몰아 사나운 호랑이를 공격하는 꼴과 다르지 않습니다. 호랑이와 양은 서로 적수가 될수 없음이 명백한데도 왕께서는 사나운 호랑이와 손잡지 않고 양떼편에 섰습니다. 신은 왕의 계책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대체로 천하의 강한 나라는 진나라가 아니면 초나라이고, 초나라가 아니면 진나라입니다. 두 나라가 서로 다툰다면 그 형세는 양립할 수 없을 것입니다. - P2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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