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순신 이야기 중국사 4 - 수.당.오대십국.북송 : 중원의 황금시대 진순신 이야기 중국사 4
진순신 지음, 이수경 옮김 / 살림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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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년 전 이 책을 봤다는 것을 북플의 기록을 보고 알았다. 그렇다고는 해도 결코 읽었다고는 할 수 없는 것이 뒷부분인 송나라 역사만 읽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 김용 무협 소설 읽는다고 배경이 되는 역사를 훓어보기 위함이었다. 물론 덕분에 지금까지도 당시의 굵직한 사건들을 기억하고 있는 것을 보면 무엇이든 목적을 가지고 읽은 책은 기억에 남는 법인가보다. 진순신 이야기 중국사 4권은 우리에게 익숙한 수, 당, 그리고 짧은 분열기였던 오대십국, 북송 시기까지를 다룬다.

수나라 말에 각지에 다양한 반역단이 잇따라 나타났으나 수 왕조가 무너진 뒤, 그 자리를 대신한 것은 당(唐)이라는 새로운 왕조였다. 당나라의 이씨(李氏)는 수나라의 양씨(楊氏)와 마찬가지로 북주(北) 팔주국의 하나다. 선비색이 짙다는 점에서도 아주 꼭 닮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수나라를 대체한 당나라도 그다지 다르지 않다는 느낌이다. 그럼에도 수는 38년도 존속하지 못했는데, 당나라는 290년이나 이어졌다. 태생은 꼭 닮았으나 수와 당은 등장하는 방법이 달랐다. 수나라는 북주(北周)라는 기성(成) 왕조를 찬탈하고 남조(南朝)를 공격해서 천하를 통일했다. 수의 등장에는 천하에 반역단이 횡행한 배경이 없다. 하지만 당나라는 반역단이 천하에 가득한 시대를 무대로 탄생의 울음소리를 울린 것이다. 그러나 그 정권 안에 반역단의 흔적이 거의 없는 것은 후한이나 위·진(魏晉)의 경우와 비슷하다. 굳이 말한다면 당나라 창업 공신에 이적(李勣, 옛 이름은 서세적(徐世勣))과 울지경덕(尉遲敬德) 같은 반역단의 성격을 띤 인물이 있다는 정도다. 이것 말고는 수나라와 다른 점이라고 크게 꼽을 만한 것은 없다. - P65

황건의 난부터 시작된 중국의 분열기를 넘어 남북조를 통일한 것은 수나라 왕조였다. 수나라 시조인 문제는 북주의 중신인 양견이었다. 북주는 선비 민족주의가 강한 나라였으나 수나라는 한족 왕조임을 내세웠다. 수나라는 지방 행정기구를 정리하여 기존의 주군현 제도에서 군을 폐지하고 주와 현으로만 구성하는 대신, 지방관이 임명하던 지방 속리를 중앙 임명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드디어 과거제도를 실시했다. 하지만 수나라는 햇수로 38년(581~618)밖에 이어지지 못했는데 이는 후계자 문제, 고구려 원정, 수도 건설과 무리한 대운하 사업, 2대 황제인 양제의 사치 때문이었다.
당나라 고조인 이연은 그다지 적극적인 인물이 아니었고 결단력도 부족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는 뒤이은 태종이 형인 이건성을 대신해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이를 정당화하기 위함이 컸을 것이다. 거병했을 때 이연은 태원 유수라는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정부군을 반란군으로 돌리는 것이 가능했다. 수나라 말기에는 여기 저기에서 도적떼들이 황제나 천자를 자칭하며 일어났으나 최종 승리자가 된 것은 고조였다. 태종은 인재를 등용하는 데 과감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특히 책사인 위징은 이밀의 부하였는데 이밀은 수나라 말기 자신의 아버지인 이연과 더불어 경쟁했던 상대였다. 게다가 위징은 황태자로 장자인 이건성을 밀었는데도 태종은 그를 국사로 임명한다. 

황태자(건성)께서 만일 징(위징)의 말을 따랐다면, 반드시 오늘의 화는 없었을 것입니다. ‘징의 말‘이란 다름 아닌 세민을 죽이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했다면 좋았을 것이라는 대답이니 패자로서 대담무쌍한 발언이라 아니할 수 없다. 위징은 이 말을 입에 담은 이상 분명 죽음까지 각오했을 것이다. 하지만 태종은 위징을 용서하고, 첨사주부(詹事主簿, 동궁의 도장을 관장하고 공문서의 타당성을 검열하는 종7품 관리)에 임명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옳다고 믿는 것을 말하는 인물, 그런 사람은 흔하지 않다. 태종은 여기에서 그런 인물을 발견했다. - P140

안녹산은 재치 있고 붙임성이 좋았던 모양이다. 현종과 양귀비 모두 그를 마음에 들어했다. 안녹산은 거란을 격파하는 전공을 세우는 등 승승장구하고 있었고 (양귀비의 일가라는 사실만으로 출세한) 양국충과 손잡고 당시 최고 실력자였던 이임보 배척운동을 펼친다. 하지만 이임보가 죽자 안녹산과 양국충은 서로 대립하게 된다. 양국충은 수도에 있었기 때문에 황제를 곁에서 모실 수 있었던 반면 안녹산은 외지에 있어 그럴 수 없었다. 양국충은 현종에게 안녹산이 역모를 꾀하고 있다 간했고 불리함을 느낀 안녹산은 거병을 일으킨다. 그 때 안녹산은 3군 절도사를 겸하고 있었기 때문에 병력을 이동시키기에는 충분했다. 안녹산은 거병을 일으킨 이듬해 마침내 낙양을 함락시켰으나 아들인 안경서에게 살해당하는 비운을 겪는다. 현종은 이 때 촉으로 피신을 갔고 왕위를 이어받은 숙종은 위구르를 비롯한 주변 민족의 구원병을 모아 수도인 장안과 낙양을 겨우 수복했다.
당은 시 문학이 활발했다. 이백, 두보, 왕유, 백거이 등 지금도 당시(唐詩)의 대명사가 된 이들이 이 시기 차례로 등장했다. 성당시는 당의 국력이 번성했을 때의 시를 말한다. 이백은 그런 면에서 대표적인 성당시인이었다. 그는 당의 국력이 약해질 무렵 죽었고 당 말기가 되면 혼란스러운 사회가 된 만큼 사회성이 강한 풍조를 담은 두보나 백거이 등이 등장하게 된다.

이백의 죽음으로 성당(盛唐)의 시는 사라졌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성당시의 배경이 된 시대는 지나가고 뒤에는 상처투성이의 산하만이 남았다. 왕유는 미처 달아나지 못했지만, 두보는 도망가던 도중에 안록산군에게 붙잡혀 장안에 연금되었다. 머지않아 그는 그곳에서 다시 탈출해 황제의 행궁이 있는 봉상(鳳翔)에 도달한다. - P279
두보는 이백과 나란히 성당의 2대 시인으로 불린다. 이백은 확실히 성당의 시인이었을지 모르지만, 두보의 뛰어난 시는 대부분 안사의 난 이후의 것이라 역시 성당의 사람은 아니다. 두보는 오히려 다음 시대를 연 시인이라고 할 수 있다. 당의 국운이 계속 기울고 있었다. 이후에 중흥이라고 부르는 시대도 있기는 했으나, 무측천시대부터 개원(開元)에 이르는 그때의 전성기로 다시 돌아간 적은 없었다. 상처투성이의 산하를 직시하는 내용으로 시작되는 두보 이후의 시에서는 일종의 사회(社會派) 같은 요소가 느껴진다. 그런 느낌이 가장 농후했던 사람이 백거이(白居易)다. - P280

문관정치가 확립된 것은 송대였다. 그 이전 오대는 무가정치라고 할 수 있다. 오대 전의 당나라, 그리고 남북조는 귀족정치였다. 과거에 급제한 수재들이 문관으로서 정치의 본류를 형성한 것은 송나라부터다. 이 체제는 20세기 청나라 말기까지 이어진다. 그리고 그 여운은 오늘날까지 전해진다. 송나라의 숨결은 천년에 걸쳐 중국 산하에 살아 있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송나라에 친근함을 느끼는 또 한 가지 이유는 건국에 피비린내가 적었다는 데 있다. 전 왕조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왕조를 세울 때는 가공할 만한 유혈의 참사가 뒤따른다. 그런데 송의 경우는 뜻밖에도 조용했다. 술에 취한 동안에 황제가 되었다는 것은 약간 과장된 말이지만, 송나라 태조가 광포한 짓을 싫어한 인물인 것만큼은 틀림없다. - P450

송나라는 당에서 문제가 되었던 절도사의 힘을 약화시켰고 과거 제도를 본격적으로 활용하였다. 당나라 때도 과거 제도를 활용하기는 했으나 전체적인 비율로 따지면 소수였다. 과거제는 진사과와 제과로 나뉘었는데 진사과는 시문을 짓거나 논술을 하거나 고전을 일부 발췌하여 적어내야 하는 시험이었다면 제과는 문장을 베끼는 종류의 시험이었다. 진사과는 주로 고급 관리로 나아가는 지름길이었고 제과는 실무를 담당하는 하급 관리들이 주로 차지했다. 강남 지방은 예로부터 문인의 기풍이 높았고 화북 지방은 무인 기질이 넘쳤다(남북조 시기까지 거슬러 감). 송나라 초기에는 화북관료가 권력을 잡았으나(당나라 말기 권력을 잡았던 세력들) 이후 강남관료가 진출하여 북송 말기가 되면 강남관료가 권력을 장악하게 된다. 이는 과거제와도 연결되어서 진사과에 지원한 이들이 강남 지방의 문사들로 채워졌다. 화북 관료와 강남 관료 간의 경쟁은 북송 시기 내내 화북과 강남 인력 사이에 당쟁을 불러일으켰다.

진사 출신자들은 어느 정도 수준 높은 학문을 지닌 실력자가 많았다. 정관계에는 이처럼 귀족 출신과 진사 출신의 두 흐름이 있었다. 그리고 오랫동안 전자가 주류였다. 실력을 가진 진사 출신자가 불만을 품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모두 그렇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귀족 관료는 보수적이고 진사 출신 관료는 현상을 변혁하고자 하는 경향이 있었다. 진사 출신 관료의 수가 늘자 그 세력을 배경으로 현상 타파를 부르짖는 진사 출신자가 나타났다. 수석으로 급제한 우승유 같은 사람은 정부의 실정을 지적하며 통렬한 공격을 가했다. 우승유에게는 이종민(李宗)이라는 동지가 있었다. 그들이 정부 요인에게 미움을 산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헌종 때의 재상 이길보는 귀족 관료였기 때문에 특히 우승유 등을 꺼려 요직에 앉히지 않았다. 아버지의 영향을 이어받은 이덕유(李德裕)도 목종(穆宗) 때 한림학사(翰林學士)로 있을 적에 이종민을 검주자사(劍州刺史)로 좌천시켰다. 그렇지만 그의 동지인 우승유가 대두하여 재상이 되었으므로, 이번에는 반대로 이덕유가 지방으로 추방되었다. 무종(武宗)이 즉위하여 이덕유가 다시 재상으로 복귀하자 또다시 우승유 일당이 추방, 좌천되었다. 이런 일이 되풀되었으니 국가의 활력이 떨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정권이 바뀔때마다 그때까지의 방법을 파기했으며, 인사 면에서도 대신에서부터 말단에 이르기까지 모조리 갈아치웠기 때문에 정치는 늘 하다 만 채여서 정정(政情)도 매우 불안정했다. - P304

송나라는 대외적으로 문제가 많았다. 관료사회였던 송은 갈수록 국가 방비에는 허술해진다. 내부적으로도 주전파보다는 주화파 정치인들이 많았다는 것도 문제였다. 결국 요와 강화 조약을 맺고 대하(중국에서는 서하라고 부름)와도 강화 조약을 맺어야 했으나 이도 오래 가지는 못했다.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풍요로운 나라였으나 그만큼 국방에 투자하지 않았던 것은 실책이었다고 생각한다. 송나라는 세력이 커진 금에게 결국 수도를 뺏기고 남으로 내려가야했다. 이때까지가 북송 왕조다.

조이용이 요와 맺은 조건은 결국 영토는 그대로 두고 송은 요에게 해마다 비단 20만필은 10만냥을 보내고 송은 형, 요는 동생의 관계를 맺는 내용이었다. 요가 송과 군신의 관계는 맺지 않았지만, 송을 형으로 함으로써 송은 간신히 체면을 유지할 수 있었다. 『요사』에는 송이 요나라의 황태후를 숙모라고 부른다고 표현했다. 이것이 역사상 ‘전연(淵)의 맹(盟)‘이라고 부르는 강화조약이다. 이 조약에 따라 이후 약 40년 동안 두 나라의 관계는 안정되었다. - P462~463

금군은 개봉을 철저하게 유린했다. 재화를 약탈하고 부녀자도 끌고갔다. 개봉은 순식간에 폐허가 되고 말았다. 금군 내에 있던 연경의 한인들이 약탈 안내역을 도맡았다. 역대 황제, 특히 휘종이 고심하여 모았던 서화, 기물(奇物)도 가져갔다. (...) 흠종과 태상황 휘종은 스스로 금나라 군영으로 가서 포로가 되었다. 황족, 고급관료, 금나라가 필요하다고 인정한 기술자, 예술가 수천 명이 금나라로 끌려갔다(이것을 ‘정강(靖康)의 변‘)이라고 한다. 9제(帝) 167년 동안 이어 온 송 왕조는 이것으로 일단 막을 내렸다. - P548~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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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의 시대적 변화를 단지 왕조교체에서 찾았던 종래의 십팔사조사관에 대해, 나이토의 설은 시대상의 변화를 지적하고, 당·송 양 시대 사이에 성격적 차이가 존재한다는 것을 밝혀 중국사에서 당송변혁의 중요성을 학계에 인식시키는 업적을 남겼다. 그러나그의 설은 시대라는 그 자체를 완결된 개체로 보고 주로 문화사 중심으로 파악한 것으로, 한 시대에서 다음 시대로 나아가는 필연적 발전법칙에 의해 파악한 것은 아니었다.
나이토의 학설은 교토 대학을 주무대로 삼아 많은 후계자를 배출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미야자키 이치업적이 주목할 만하다. 미야자키는 나이토 학설을 사회경제적인 면에서 보강하고, 나아가 중국사 이외의 아시아 여러 국가(이슬람과 인도를 포함)의 시대구분까지 고려하여 총괄적인 시대구분 속에서 송대의 시대성을 파악했다.
예를 들면 1950년 출판된 동양적 근세는 당말 변혁을 중세사회로부터 근세사회로의 변혁이라는 사회경제적 의미로 파악하면서송대를 유럽사의 르네상스기에 대비시켰다.
한편 도쿄 대학에서는 가토 시게시가 중국경제사의 개척자로서 견고하고 치밀한 실증적 연구를 진행했는데, 특히 당송시대의사회경제사 연구에 진력하였다. 가토는 시대구분론에 대해서는 극히신중한 태도를 보였는데, 『중국경제사개설支那經濟史槪說』(1944)에서 다음 - P17

과 같이 지적하였다.
"전국진한은 물론 남북조 시대까지는 소작인이 그렇게 많지 않았고, 대관호족大官豪族의 대토지를 경작한 것은 주로 노복奴僕이었다. 균전법의 붕괴를 전후하여 농경에 노복을 쓰는 것이 쇠퇴하고, 소작인을쓰는 것이 유행했다. 대지주가 소유한 대토지, 즉 장원의 토지를 경작한것은 주로 소작인[전호佃戶]이었다. · 송대에는 노복을 경작에 쓰는일이 더욱 쇠퇴하고 소작제도가 점점 발달했다. 북송시대에 전국의자작농과 소작인의 비율은 대략 2대 1 정도 되었을 것이다."
AP즉 노예노동시대에서 지주전호제로 이행한 시기를 당말오대로 설정하였기 때문에, 가토 역시 당과 송 사이에 변혁이 있었다고 본 것 같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마에다 나오노리前田典의 『동아시아에서의 고대의 종말』(1948)이 출판된 이래 중국사 시대구분을 둘러싼 논의는 더욱활발해졌다. 마에다의 설은 동아시아 역사를 일체로 파악하면서,
여러 민족의 역사발전에 대한 이해는 상호간의 연관성을 중시해야 하며, 중국사에서 고대사회의 종말은 당말오대 즉 10세기 전후였다고보았다. 이 마에다 설을 계기로 해서 이후 점차 중국사를 동아시아사의일환으로 보고 시대구분을 하려는 방향을 취하게 되었다. - P18

조보는 태조가 즉위한 다음 해인 961년(건륭 2)절도사에 대한 대책을 바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방진鎭(절도사)이 상당한 비중을 갖고 있는 것은 오직 황제의 힘이약하고 신하가 강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들을 다스리고자 한다면달리 뾰족한 방책이 없습니다. 오로지 그들의 권력을 빼앗고 그들의전곡穀을 제어하고, 그들의 정병을 거두어들이면 천하는 자연히안정될 것입니다." - P28

송 초의 과거에는 제과科(경의과라고도 함)가 있었다. 진사과는 시부와 논 및 첩경 묵의로 시험을 쳤고, 제과는 경서經書·예서 사서.
등의 첩서 뮥의로 시험을 보았다.
시부란 시와 부시의 일종)를 짓는 것이고, 논은 논문이다. 첩경은 경서와 예서, 사서 등의 본문에서 앞뒤를 가린 채 한 줄만 드러내고 그한 줄 중에서 또 석 자를 감추어 감춘 글자를 맞추는 것이다. 묵의는경서·예서·사서의 작자 이름을 묻거나 이들 책에서 한 어귀를 뽑아그 문장 다음에 오는 문장이 무엇인지를 묻는 것이다. 즉 시부 및 논은직접 작문을 하는 시험이고, 첩경과 묵의는 일종의 암기시험이다. - P26

인종 때의 진사과는 종래의 시부·논·첩경·묵의 외에 책策이 더해졌다. 책은 시무時에 대한 대책을 논하는 것이다. - P59

북송에서는 처음 화북관료가 권력을 잡았으나 이후 강남관료가 진출하여 북송 말에는 강남관료가 권력을 장악하였다. 이러한 상황에 대해 남송의 육유陸游는 다음과 같이 논평하였다.
"천성(인종의 첫 번째 연호) 이전에 인재를 뽑아 등용할 때에는 대부분북인을 뽑았는데, 구준이 이를 담당하였다. 그로 인해 남방의 사대부들이 울적해하였다. 인종이 그 폐해를 알고 널리 인재를 뽑아남북 간의 차이를 없앴다. 그리하여 범중엄이 오(강서江·소주蘇州)에서, 구양수가 초楚(강서江西·길주吉州)에서, 채양蔡襄이 민園(복건福建·홍화興化)에서, 두연杜이 회계會稽(절강浙江·소흥紹興)에서, 여정 이 영남(광동廣東·광주廣州)에서 일어나 한 시대의 명신이 되니 성송사람을 얻는데 ‘뛰어나다고 칭찬받았다. 그런데 소성(철종 친정 후의 연호)·숭녕(휘종의 - P63

연호) 연간에는 남인을 뽑는 일이 더욱 많아져 북방의 사대부가 다시울적해지는 슬픔이 있었다. 그래서 진관(휘종조의 명신, 복건·남검주사람이 홀로 그 폐해를 보고는 조정이 남인을 중시하고 북인을 업신여기면 국가 분열의 싹이 튼다고 말했다. 이는 천하의 지당한 지적이다………." - P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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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프로이트주의: 오도된 페미니즘

프로이트주의와 페미니즘은 같은 역사적 조건에서 발생했고 같은 현실에 기반한다.
프로이트주의는 ‘사회적 적응’을 위해 임상치료적 목적에 맞게 수정되었다.

프로이트주의는 무척이나 비난할만하지만, 프로이트가현대 삶의 핵심적인 문제인 섹슈얼리티를 파악했기 때문에 부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 P70

20세기 초에는 사회적·정치적 사고를 함에 있어서도, 문학적·예술적 문화에서 섹슈얼리티, 결혼, 가족, 여성의 역할에 관한 관 - P71

념이 굉장한 동요를 일으켰다. 프로이트주의는 이러한 동요에서나온 하나의 문화적 산물에 불과했다. 프로이트주의와 페미니즘은 둘 다 서구 문명의 가장 독선적인 시대가족 중심성, 따라서과장된 성적 억압으로 특징지어지는 빅토리아 시대에 대한 반응으로 나왔다. 두 운동 모두 의식의 깨어남을 의미했다. 그러나프로이트는 페미니즘이 치유하려고 주장하는 것을 진단하는 사람일 뿐이었다. - P72

나는 오이디푸스콤플렉스가 완전한 의미를 가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권력의 측면에서라고 주장한다. 우리는 프로이트가가부장제 사회의 핵가족생물학적 가족 자체에 내재하는 불평등의 최악의 결과들을 강화시키는 사회조직 형태에서 자란 모든 정상적인 개인에게 공통적인 것으로서 오이디푸스콤플렉스 - P75

를 관찰했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남성이 권력을 덜 가진사회에서는 오이디푸스콤플렉스의 영향력이 감소하고, 게다가약화되는 가부장제는 오이디푸스콤플렉스의 완화를 추적할 수있는 많은 문화적 변화들을 만들어낸다는 것을 증명하는 증거들이 있다. - P76

전통적인 가족에서는 부모의 양극성이 존재한다. 어머니에게는 자녀를 헌신적으로 무조건 사랑할 것이 기대되는 반면, 아버지는 유아에게 적극적인 관심을 가지지 않고 물론 양육에도 관심을 가지지 않고 후에 아들이 나이가 들었을 때 실적과 성과에 대한 반응으로서 그를 조건적으로 사랑한다. - P78

마침내 소년을 설득시키는 것은 그가 자랄 때 세계를 제시하는 것이다. 무력한 사람들인 여성들과 아이들의 상태에서부터 잠재적으로 강력한 상태인 자아 연장인) 아버지의 아들로 이행하도록 요청받는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바보가 아니다. - P81

일반적으로 엘렉트라콤플렉스는 오이디푸스콤플렉스보다 덜심오한 발견이라고 믿어지는데, 그 이유는 여성에 관한 모든 프로이트의 이론처럼 여성을 단지 부정적인 남성negative male 으로서만 분석하기 때문이다. 즉, 엘렉트라콤플렉스는 역전된 오이디푸스콤플렉스라는 것이다. - P82

페미니스트적 번역은 이렇다. 아이들은 그들의 주인인 부모,
특히 진짜 권력을 가진 사람인 아버지를 지배하는 위치에 있는것을 상상한다.
또 프로이트는 페티시즘[성적 도착증의 일종fetishism]에 관해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 대상은 어린 소년이 그 존재를 믿지만포기하고자 하지 않는 어머니의 성기를 대치한 것이다. 프로이트는 정말로 난처할 수 있다. 어머니의 권력에 관해 말하는 것이훨씬 더 그럴듯하지 않은가? 어린 소년은 음경과 음핵 간의 차이를 가까이서 관찰하기는커녕 어머니가 옷 벗은 것을 본 일조차없다. 소년이 알지 못하는 것은 그가 어머니에게 애착을 가진다는 것과 그녀가 무력하다는 이유로 그녀를 거부하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선택된 대상은 이 애착의상징일뿐이다. - P86

프로이트는 특히 모든 정상적 남아에게서 오이디푸스콤플렉스를, 모든 정상적 여아에게서는 그것의반대급부인 엘렉트라콤플렉스의 존재를 발견함으로써 근친상간금기에 의해 야기된 성적 억압에 의한 심리적 처벌을 묘사했다.
동성애는 마땅히 억압해야 하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을 때에만 생긴다는 것이다. - P88

성을 감정으로부터 분리하는 것은 서구 문화와 문명의 토대다. - P93

이 신-프로이트주의적 수정주의neo Freudian revisionism를 가장 잘특징짓는 용어는 아마 ‘적응adjustment‘일 것이다. 그러나 무엇에의적응인가? 기본 가정은 사람들이 처한 현실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성, 흑인, 또는 특별히 불운한 사회적 계급의 일원이라면 어떤 일이 발생하는가? 그들은 이중적으로 불해진다. 그들은 우리가 보아온 대로 특권을 가진 사람들에게조차 어렵고 불안정한 정상성을 획득해야 할 뿐만 아니라 처음부터 자신들의 가능성을 제한하는 특수한 인종차별주의나 성차별주의에도 ‘적응‘해야만 한다. 그들은 자기정의 selfdefinition 또는 자기결정 self determination을 하려는 모든 시도를 포기해야만 한다. 그러므로 마르쿠제의 관점에 있어서, 치료의 과정은 그저 ‘체념의 과정‘일 뿐이고, 건강과 신경증 간의 차이는 ‘체념의 정도와 효과‘일뿐이다. - P98

그때 유럽에서는 전쟁을 하고 있었고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많은 지성인들이개업을 하러 미국에 정착했다. 미국은 이상적이었다. 고통받는 하나의 계급 전체가 그들을 기다렸던 것이다.
정신병 환자뿐만 아니라 교육 잘 받고 책임감있는 시민들, 그리고 아이들까지도. 이렇게 쇄도하는 환자를 다루기 위해서 전체적으로 새로운 분야가 개척되었다. 아동심리학, 임상심리학, 집단치료, 결혼상담 봉사 등 당신이 상상할 수 있는어떤 것이든 이름이 붙여졌고 존재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중 어떤 것도 충분하지 못했다. 새로운 학과가 대학에 창설될 수 있는것보다 그 요구가 더 빠르고 다양해졌다. - P104

심리학은 권력을 가진 사람들에게 유용한 것이 됨으로써 진지한 학문으로서 훼손되었고 그것의 핵심과 잠재성은 반동적인 것이 되었다.
심리학만이 타락한 유일한 학문은 아니었다. 교육학, 사회사업학, 사회학, 인류학, 모든 관련된 행동과학은 ‘인간 행동‘에 대한 연구뿐만 아니라 여성의 교화라는 이중적인 기능을 과도하게 수행하면서 수년 동안 사이비과학pseudo science으로 남아 있었다.
남성들은 곧 (남성들의 독점인) ‘순수‘ 과학으로 도피했다. - P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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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3-07-09 22: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왜 매달 제가 책을 정해 읽자고 하면서도 이렇게 매번 읽기 싫어서 미루기만 할까요? 저도 곧 읽겠습니다. 아 그렇지만 읽기 싫다 ㅠㅠ

거리의화가 2023-07-10 08:59   좋아요 0 | URL
읽어보니 역시 쉽지 않은 책이네요. 2장은 3~4번을 반복해서 읽었는데도 아리송한 부분이 많습니다. 다락방님도 화이팅입니다!
 

진사 출신자들은 어느 정도 수준 높은 학문을 지닌 실력자가 많았다. 정관계에는 이처럼 귀족 출신과 진사 출신의 두 흐름이 있었다. 그리고 오랫동안 전자가 주류였다. 실력을 가진 진사 출신자가 불만을 품은 것은당연한 일이었다. 모두 그렇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귀족 관료는 보수적이고진사 출신 관료는 현상을 변혁하고자 하는 경향이 있었다.
진사 출신 관료의 수가 늘자 그 세력을 배경으로 현상 타파를 부르짖는 진사 출신자가 나타났다. 수석으로 급제한 우승유 같은 사람은 정부의 실정을 지적하며 통렬한 공격을 가했다. 우승유에게는 이종민(李宗)이라는 동지가 있었다. 그들이 정부 요인에게 미움을 산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헌종 때의 재상 이길보는 귀족관료였기 때문에 특히 우승유 등을 꺼려 요직에 앉히지 않았다.
아버지의 영향을 이어받은 이덕유(李德裕)도 목종(穆宗) 때 한림학사(翰林學士)로 있을 적에 이종민을 검주자사(劍州刺史)로 좌천시켰다. 그렇지만그의 동지인 우승유가 대두하여 재상이 되었으므로, 이번에는 반대로 이덕유가 지방으로 추방되었다. 무종(武宗)이 즉위하여 이덕유가 다시 재상 - P303

으로 복귀하자 또다시 우승유 일당이 추방, 좌천되었다. 이런 일이 되풀되었으니 국가의 활력이 떨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정권이 바뀔때마다 그때까지의 방법을 파기했으며, 인사 면에서도 대신에서부터단에 이르기까지 모조리 갈아치웠기 때문에 정치는 늘 하다 만 채여서정정(政情)도 매우 불안정했다.
-> 우이당쟁 - P304

정부는 폭리를 취했다. 소금은 모두 정부의 손을 거쳐야만 유통되었는데, 이익이 많이 남는 물품이라 암거래가 생긴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정부의 손을 거치지 않은 소금을 ‘사염‘이라고 불렀으며, 사염 판매는 말할것도 없이 불법이었다.
소금 전매제가 붕괴되면 당나라 왕조도 무너지므로, 사염 거래는 단속이 엄격했다. 한 섬(10말) 이상의 사염을 판 자는 사형, 한 말 이상 판 - P354

자는 장형(杖刑)으로 정해져 있었다.
단속이 심해지자 사염 판매인들도 그것에 대항하려고 했다. 관헌의 습격을 받더라도 그들을 격퇴할 수 있을 만큼의 무력을 갖추게 되었다. 목숨이 달린 일이었으므로 무장은 당연했다. 또 관헌의 단속 정보를 가능한 빨리 알아내야 했으므로 각지의 사염업자들은 서로 연락을 취하고있었다. 황소와 왕선지는 둘 다 사염판매인이었으니, 거병 전에 만난 적은 없다고 해도 서로 연락은 취하고 있었을 것이다.
-> 왕선지와 황소의 배경 - P355

실력의 시대였다. 그것은 남북조 이후 이어져 온 귀족사회가 붕괴되었음을 의미했다. 무엇보다 문벌을 중시하던 시대는 지나갔다. 성당(盛唐)이후, 문벌이 없는 인물이라도 진사에 합격하면 관계에서 활약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것에 반발하는 감정이 우이(牛) 당쟁‘을 낳았다. 진사라고 해도 그렇게 어려운 시험에 합격하려면, 드물게 예외는 있지만 여유 있는 집안에서 자란 사람이어야 했다. 당나라 초기, 건국의 원훈 가운데도 도적떼 출신자가 재빨리 귀족화했듯이 진사 출신 고관도 귀족화다. 하지만 당나라 말기는 문자 그대로 실력주의의 시대다. 실력이란 무력을 말하므로 ‘군벌의 시대‘라고 바꿔 말해도 좋을 것이다. - P386

세종은 오대 여러 제왕 중에서도 명군으로 꼽힌다. 오대의 제왕 중에서 내정에 많은 힘을 쏟은 사람은 후주의 세종 정도다. 개간, 치수, 강기숙정(正), 행정개혁, 군대 정비 같은 일에 정력적으로 몰두했다. 역사상 세종은 불교를 탄압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삼무일종(三武一宗)의 법란(法難)‘이라고 불교 측에서 말하는 일종(一宗)이 바로 이 세종이다. 탈세와 병역 기피를 위해 출가한 승려를 환속시켜 생산적인 일에 종사시키는외에, 사찰의 토지를 몰수하고 불상과 범종을 회수하여 동전을 주조하는 경제적인 효과까지 생각한 폐불령이었다. - P407

후당에서부터 시작하여 후진, 후한, 후주를 섬겼고, 요나라의 태종(야율덕광)이 남하했을 때도 영입되어 입조했으므로, 이 인물은 다섯 조정에서 모두 재상으로 활약했다. 계산하는 방법에 따라 조금 차이는 있지만,
5조(朝), 8성(姓) 11군(君)을 섬겼다는 미증유의 기록을 가진 주인공이다.
예부터 풍도는 문제 있는 인물로, 칭찬과 비방의 낙차가 그만큼 큰 예도드물다. 오대는 남형(刑)의 시대여서 사람의 목숨을 지푸라기처럼 여겼다고 한다. 무슨 일이 있으면 쉽게 사람을 죽인 것이다. 그런데 정치의 무대에서, 그것도 재상으로서 그 중심에 있던 인물이 왕조가 바뀌어도 죽지 않고,
더구나 재상으로서 임용된 일은 기적에 가깝다고 해야 할 것이다. - P410

당말부터 오대에 걸쳐 완전히 몰락한 것은 귀족사회였다. 기록된 역사는 귀족과 귀족사회에 속해 있던 사람들의 움직임만을 보여 준다. 굵고뚜렷한 경계선이 있어서 그 아래에 위치한 비(非) 귀족층은 문헌에 전혀나타나지 않는다. 그런데 귀족사회의 붕괴로 그 경계선이 허물어졌다.
사람들의 의식 속에는 아직 그 경계선이 남아 있었을 것이다. 여러 번반복하지만 화응이 염사를 불태워 버린 것은 그런 의식이 농후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남당의 국주(國主)도 당당히 사를 지었다.
시는 읽는 것이지만, 사는 노래하는 것이다. 이 시대는 노래가 입을 통해서 나오는 상태였다. 아니면 그때까지 그들의 입을 막고 있던 것이 힘을 잃은 시대였다고 바꾸어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사의 주제가 주로 사랑이라는 점도 그때까지 금기시했던 것이 불식되었음을 의미할 것이다. 귀족적 분식 대신에 서민적인 솔직함이 시대의 분위기를 물들이고 있다. - P434

문관정치가 확립된 것은 송대였다. 그 이전 오대는 무가정치라고 ㅎ수 있다. 오대 전의 당나라, 그리고 남북조는 귀족정치였다. 과거에 급제한 수재들이 문관으로서 정치의 본류를 형성한 것은 송나라부터다. 이체제는 20세기 청나라 말기까지 이어진다. 그리고 그 여운은 오늘날까지전해진다. 송나라의 숨결은 천년에 걸쳐 중국 산하에 살아 있다고 할 수있다.
우리가 송나라에 친근함을 느끼는 또 한 가지 이유는 건국에 피비린내가 적었다는 데 있다. 전 왕조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왕조를 세울 때는가공할 만한 유혈의 참사가 뒤따른다. 그런데 송의 경우는 뜻밖에도 조용했다. 술에 취한 동안에 황제가 되었다는 것은 약간 과장된 말이지만,
송나라 태조가 광포한 짓을 싫어한 인물인 것만큼은 틀림없다. - P450

조이용이 요와 맺은 조건은 결국 영토는 그대로 두고 송은요에게 해마다 비단 20만필은 10만냥을 보내고송은 형, 요는 동생의 - P462

관계를 맺는 내용이었다.
요가 송과 군신의 관계는 맺지 않았지만, 송을 형으로 함으로써 송은간신히 체면을 유지할 수 있었다. 『요사』에는 송이 요나라의 황태후를 숙모라고 부른다고 표현했다.
이것이 역사상 ‘전연(淵)의 맹(盟)‘이라고 부르는 강화조약이다. 이 조약에 따라 이후 약 40년 동안 두 나라의 관계는 안정되었다. - P463

천하를 혼란스럽게 만든 것은 신법 실시가 아니라 그것의 폐지와 부활이라는 변동, 즉 당쟁이었다.
역대 중국의 역사가는 북송의 쇠망을 신법 탓으로 돌리는 자가 많아왕안석은 악역으로 몰려 버렸다. 개혁에는 시간이 필요한 법인데 왕안석의 집정은 겨우 6년이었다. 시간을 두고 일관되게 실시해야 효과가 나타나는데도, 정국은 긴 안목으로 지켜보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표면은 어찌되었건 중국인의 사고방식에는 노장적인 면이 의외로 강하다. 노장의 사상은 ‘무위(無爲)‘를 존중한다. 너무 간섭하는 정치는좋아하지 않는다. 신법은 그 성격상 백성의 생활에 상당히 깊이 파고들어 간섭하는 것이었다. 그 번거로움이 싫었던 것이다.
신법은 높은 이상을 내걸었으나, 새로운 정책을 실시할 때 일어나는혼란은 피할 수 없었다. 구법의 의식적인 방해도 있었지만 말단 정책을 이해하지 못한 혼란도 있었다. 지금까지의 역사가처럼 모든 죄를 왕안석과 신법에게 뒤집어씌우는 것은 공정하지 않다. - P489

휘종은 채경과 동관과 함께 있을 때가 가장 즐거웠다. 서화와 시문 이야기 상대로서 두 사람을 능가할 대신은 없었다. 게다가 이 둘은 정치적인 수완도 어쨌든 표준 이상이었다. 휘종은 정치를 그들에게 맡겨 놓고자신은 우아한 예술 생활을 보내려고 생각했다.
그런데 예술을 하려면 돈이 든다. 그 돈은 재상들이 어떻게든 마련했다. 이제 ‘신법‘은 그런 일을 위해 쓰이게 되었다.
항주에는 궁정용 도구를 만드는 공예국(工藝局)을 설치했는데, 그 설치를 동관이 맡았다. 또 황족의 혼례기구를 만들기 위해 ‘후원작(後苑作)’이라는 관청을 만들었다. 여기에도 환관 양(楊)이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양전은 ‘공전법(法)‘이라는 새로운 법을 만들어 후원작의 경비를 조달했다.
왕안석의 신법 안에 ‘방전균세법(方田均稅法)‘이라는 것이 있었다. 이것은 대지주가 숨긴 논을 찾아내 세금을 매기는 것이 목적이었다. 전국적으로 실시하지는 못했지만 토지 실측으로 숨긴 논밭을 많이 찾아내 증수(增收)로 이어졌다. 대상은 대부분 대지주였다.
휘종 때의 ‘공전법‘은 그렇게 만만한 법이 아니었다. 자의 기준을 바꾸었던 것이다. - P528

방납은 ‘끽채사마(喫榮事魔)‘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끽채사마란 채식주의자에다 마귀를 섬기는 자를 뜻한다. 분명한 증거는 없지만, 이것은 당나라 무종(武宗) 회창(會昌) 연간의 폐불령 때 함께 탄압받은 마니교가 지하로 숨어들어 살아남은 집단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냥 무장만 한 암거래상인 집단이 아니라 종교라는 유대로 묶인 만큼 단결이 강한 사람들의 반란이었는지도 모른다.
휘종은 이 지방의 반란이 조작국과 화석강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고,
토벌군을 보냄과 동시에 그것들을 폐지했다. 조작국과 화석강을 폐지함으로써 조금이나마 백성들의 원망을 무마하려고 했던 것이다. 방납은 항주를 함락하고 한때는 엄청난 기세로 자신을 성공(公)이라 칭하고, 영락(永樂)이라는 연호를 사용했다. - P533

금군은 개봉을 철저하게 유린했다. 재화를 약탈하고 부녀자도 끌고갔다. 개봉은 순식간에 폐허가 되고 말았다. 금군 내에 있던 연경의 한인들이 약탈 안내역을 도맡았다. 역대 황제, 특히 휘종이 고심하여 모았던서화, 기물(奇物)도 가져갔다. 연경의 한인들이 특별히 찾았던 것은 소식과 황정견의 글씨였다. 이때 왕안석의 글씨는 그다지 주목하지 않았다고한다. - P548

흠종과 태상황 휘종은 스스로 금나라 군영으로 가서 포로가 되었다.
황족, 고급관료, 금나라가 필요하다고 인정한 기술자, 예술가 수천 명이금나라로 끌려갔다(이것을 ‘정강(靖康)의 변‘이라고 한다.
9제(帝) 167년 동안 이어 온 송 왕조는 이것으로 일단 막을 내렸다. - P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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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나라 말에 각지에 다양한 반역단이 잇따라 나타났으나 수왕조가무너진 뒤, 그 자리를 대신한 것은 당(唐)이라는 새로운 왕조였다.
당나라의 이씨(李氏)는 수나라의 양씨(楊氏)와 마찬가지로 북주(北)팔주국의 하나다. 선비색이 짙다는 점에서도 아주 꼭 닮았다고 해야 할것이다. 수나라를 대체한 당나라도 그다지 다르지 않다는 느낌이다. 그럼에도 수는 38년도 존속하지 못했는데, 당나라는 290년이나 이어졌다.
태생은 꼭 닮았으나 수와 당은 등장하는 방법이 달랐다. 수나라는 북주(北周)라는 기성(成) 왕조를 찬탈하고 남조(南朝)를 공격해서 천하를통일했다. 수의 등장에는 천하에 반역단이 횡행한 배경이 없다. 하지만당나라는 반역단이 천하에 가득한 시대를 무대로 탄생의 울음소리를 울린 것이다. 그러나 그 정권 안에 반역단의 흔적이 거의 없는 것은 후한이나 위·진(魏晉)의 경우와 비슷하다. 굳이 말한다면 당나라 창업 공신 - P64

에 이적(李勣, 옛 이름은 서세적(徐世勣))과 울지경덕(尉遲敬德) 같은 반역단의성격을 띤 인물이 있다는 정도다. 이것 말고는 수나라와 다른 점이라고크게 꼽을 만한 것은 없다. - P65

황태자(건성)께서 만일 징(徵, 위징)의 말을 따랐다면, 반드시 오늘의 화는 없었을 것입니다.
‘징의 말‘이란 다름 아닌 세민을 죽이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했다면 좋았을 것이라는 대답이니 패자로서 대담무쌍한 발언이라 아니할 수 없다.
위징은 이 말을 입에 담은 이상 분명 죽음까지 각오했을 것이다. 하지만태종은 위징을 용서하고, 첨사주부(詹事主簿, 동궁의 도장을 관장하고 공문서의 타당성을 검열하는 종7품 관리)에 임명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옳다고 믿는 것을 말하는 인물, 그런 사람은흔하지 않다. 태종은 여기에서 그런 인물을 발견했다. - P140

태평공주의 죽음으로 여성의 시대는 일단 막을 내렸다. 하지만 여권은 크게 신장하여 당대(唐代)의 여성은 다른 시대의 여성에 비해 당당해보인다. 한대(漢代)의 미인은 조비연(飛燕)처럼 손바닥에 올려놓을 수 있을 만큼 가볍고 가냘픈 것이 이상이었다. 반면 당대의 미인 조건은 좋은체격이었다. 이 시대의 그림이나 당삼채(唐三彩)에 등장하는 여성을 보면대개 통통하게 살이 쪘다. 양귀비도 체격이 좋았다. 무측천도 태평공주도 아마 체격이 좋았을 것이다. 이 시대의 여성은 다리를 벌리고 말을 탔다. 그전까지는 두 다리를 가지런히 모으고 안장에 옆으로 걸터앉았다.
이것도 이 시대 여성의 기질을 말해 주는 풍속일 것이다. - P229

이백의 죽음으로 성당(盛唐)의 시는 사라졌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성당시의 배경이 된 시대는 지나가고 뒤에는 상처투성이의 산하만이 남았다.
왕유는 미처 달아나지 못했지만, 두보는 도망가던 도중에 안록산군에게 붙잡혀 장안에 연금되었다. 머지않아 그는 그곳에서 다시 탈출해 황제의 행궁이 있는 봉상(鳳翔)에 도달한다. - P279

두보는 이백과 나란히 성당의 2대 시인으로 불린다. 이백은 확실히 성당의 시인이었을지 모르지만, 두보의 뛰어난 시는 대부분 안사의 난이후의 것이라 역시 성당의 사람은 아니다.
두보는 오히려 다음 시대를 연 시인이라고 할 수 있다.
당의 국운이 계속 기울고 있었다. 이후에 중흥이라고 부르는 시대도있기는 했으나, 무측천시대부터 개원(開元)에 이르는 그때의 전성기로 다시 돌아간 적은 없었다. 상처투성이의 산하를 직시하는 내용으로 시작되는 두보 이후의 시에서는 일종의 사회(社會派) 같은 요소가 느껴진다.
그런 느낌이 가장 농후했던 사람이 백거이(白居易)다. - P2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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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3-07-08 22: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저는 그동안 위지경덕으로
알고 있었는데, ‘울지‘가 맞는
표현이고 하네요.

건성의 참모 위징은 춘추시대
공자 규를 모시던 관중 같은
존재였나 보네요.

이백과 두보의 시가 그 결이
다르다고 배웠는데, 저는 개인
적으로 후자가 더 마음에 드
는 것 같습니다.

거리의화가 2023-07-10 09:22   좋아요 1 | URL
저는 위징은 생각할수록 놀라워요. 건성을 왕으로 모시려고 주장했었는데 후에 태종이 그를 참모로 쓰는 걸 보면. 위징도 놀랍고 태종도 놀라운 건 마찬가지!

이백은 참 다사다난한 삶을 살았더라구요. 그래서 시의 양도 많지만 다양한 시를 남길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저는 백거이 시가 좋더라구요!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