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과 사의 경계 구성 그 자체가 정치행위다. 고유한 역동성을 지닌 정치권력 관계는 일차적인 사회 관계 안에서뿐만 아니라 보다 비개인적이고 이차적 사회 관계들인 민간 영역과 정치 영역 안에서도 작용한다. - P149

학문 안에서처럼, 정치 안에서도 ‘상아탑‘은 없다.
횡단의 정치는 차별적인 입장에 처한 이들에 의해 이뤄지는 대화를 통해 습득한 지식에 기초하여, 정착과 이동의 기술을 이용하고 나서, 풀뿌리운동의 수준에서든, 국내에서든, 초국가권력의 중심에서든, 모든 정치활동주의에 대한 지침서가 되어야 할 것이다.
시민권은 사회 영역과 정치 영역 모두에 걸쳐 있다. 사회적 조건들을
‘가능하게 해주지 못하는 정치권은 공허할 뿐이다. 동시에 의무가 없는 시민권 권리 역시 사람들을 소극적이고 의존적인 존재로 구성할 수 있다. 시민의 가장 중요한 의무는 그러므로 자신의 정치권을 행사하고 자신의 집단체, 국가, 사회의 궤적을 결정하는 데 참여하는 것이다. - P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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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필생의 연구과제이기도 했다. 사람이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사람의 뼈였다. 선주는 혼잣말처럼 말하곤 했다. "나는 사람을 할 거야." 선생님에게도 말했다. "저는 사람을 하겠습니다."

나는 A4-5다.
왜냐고 묻지 마라. 붙인 사람 마음이다. 처음으로 사람의 조각이 발견된 날, 그 자리에 폴대가 꽂혔다. 나와 동료들이 묻혔던 곳의 라인이 포착된 뒤, 폴대가 있는 곳부터 1미터 단위로 구역이 나뉘었다. A1구역에서 나는 4미터 북쪽으로 떨어진 A4구역에 있었다. 그리고 서쪽에서부터 다시 번호가 매겨졌다. 그렇게 내 앞에 누워 있던 네 명의 동료는 각각 A4-1, A4-2, A4-3, A4-4의 이름이, 나는 맨 끝에 있었으므로 A4-5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나는 특별했다. 73년 전 이 산에 끌려온 인물 중에 가장 먼저 처형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나는 중요한 사람이었다. 놈들에게 미움을 살 짓을 했던 것일까. 놈들은 나를 주동자급이라고 판단했던 것일까. 그래서 방향을 달리해 나만 참호 안에 특별하게 앉혀놓고 죽인 것일까.
내가 쪼그려 앉아 있던 자리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증명하는 물건들이 나왔다. 미국제 M1 소총 탄피 5개가 나왔다. 북한제 모시나강 소총 탄피 2개가 나왔다. 분류가 안 되는 탄피 2개도 나왔다. 조각난 탄창 1개도 나왔다. 나를 분석한 전문가는 무릎과 가슴에 총을 맞은 것 같다고 했다. 허벅지와 정강이가 만나는 연결 부위 위아래에서도 총탄 자국이 많이 발견되었다. 머리뼈에서는 총탄 자국이 나오지 않았다. 나의 몸통은 무차별 난사당했다. 갈비뼈와 등뼈가 파손되었다. 발가락뼈도 끝이 부서졌다. 그럼에도 내 뼈는 206개가 다 나왔다. 부분적으로 파손되었을 뿐이다. 이렇게 온전한 형태로 노출되고 수습된 경우는 전례가 없다고 했다.

손 선생 덕분에 고고학은 우리나라 학문 분야에서 보기 드물게 순우리말 용어를 널리 쓰는 분야가 되었다. 손 선생은 일본어에 대한 거부감이 컸다. 공주 석장리 유적지에 일본 사람이 견학을 오면 손 선생은 영어를 썼다. 식민지 시절에 태어났고 심지어 해방 직전 규슈제국대학에서 유학했으므로 일본어가 통하지 않을 리 없었다. 그럼에도 굳이 영어를 썼다. 일본 학자들이 영어가 짧다고 하면 통역을 구해오라고 했다.
발굴 현장에서 어떤 자세로 임해야 하는지도 손 선생에게 배웠다. 손 선생은 발굴단장이라고, 교수라고 뒷짐을 지지 않았다. 대신 직접 지게를 지고 흙을 퍼 날랐다. 챙이 좁은 모자에 청바지와 장화 그리고 점퍼 차림으로 현장에 나왔다. 영락없는 흙일꾼이었다. 힘든 발굴을 마치고 나면 밤늦게까지 유물 정리를 했다.

승완은 생전에 툭툭 던지듯 말했다. "낫으로 죽였어." 승완과 어울려 지냈던 동네 어른들이 대꾸했다. "OOO이가 쇠뭉치를 휘둘렀지." "몽둥이로 때려 죽였어." "OOO가 아주 잔학했지." "얼마나 잘 먹었으면 이렇게 두드려 패도 안 죽냐는 말까지 하며 죽였다고 했어." 그리고 또 그 이름들을 댔다. "OO이 대한청년단장을 했지. 그 사람 형님 위세가 대단했어." "OO집도 있지. 거기도 형제야. 인민군 때 부역하다 인민군 물러가니까 부역자 잡겠다고 돌변해서 사람들을 죽였어."
죽인 사람들은 죽은 사람들의 집을 차지했다. 신팥집만 그런 게 아니었다. 승우의 사촌동생 승완도 죄인이 되어 집에서 쫓겨났다. 인민위원장을 지냈다 하여, 인민위원회를 위해 밥을 해줬다 하여, 아들이 좌익 운동을 한다고 소문이 났다 하여, 인민군 점령기에 완장을 차고 양반을 모욕했다 하여 죽임을 당하고 재산을 빼앗겼다. 죽거나 쫓겨난 사람 집에 가해자 쪽 사람들이 들어와 살았다.

검사는 사형 구형을 남발했다. 나는 무죄를 선고하는 경우가 많았다. 나는 판사로서 철학이 있다. 재판이라는 것은 사실과 맥락에 대한 사색으로부터 시작해 사회적 압력에 굴하지 않는 용기와 결단의 과정을 거친다. 그래야 소신을 지킬 수 있다. 물론 부역자 처리는 보통 고민되는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이것이 민족의 근본 문제에 관계되는 일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부역범을 처벌하려고 만든 ‘비상사태하범죄처벌에관한특별조치령’(특조령)의 내용을 들여다보니, 어떤 면에서는 민족을 해치는 어마어마한 법이었다. 단독판사, 단심제에 단시간 내 처리라니.

승만에게 한국전쟁은 거대한 청소의 시간이었다. 눈엣가시 국회의원들을 남로당 프락치로 모략해 이 땅에 머물지 못하도록 했다. 프락치 사건이 조작이었다는 것을 밝히지 못하고 1992년 눈을 감아 원통할 뿐이다. 구속의 칼날을 피한 국회의원들은 전시에 ‘사형금지법안私刑禁止法案’ 등을 제안하며 폭주하는 승만의 정부를 견제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상처받고 외롭게 남은 나는 재기할 수 없었다. 1952년부터 1988년까지 선거에 출마했지만 떨어지기만 했다.
아산에서 꿈을 꾸던 고향 사람들도 한동안 재기할 수 없었다. 그때 너무 많이 죽이고, 죽이고, 죽이고, 죽이고, 죽였으니까.

엄마 품에 안겨 있던 창고 풍경은 지옥이었다. 엄마와 가족들은 사람 대접을 받지 못했다. 한쪽에서는 매타작이 끊이지 않았다. 청년단원들이 장작개비로 손목이 묶인 사람들을 때렸다. 신음 소리, 우는 소리가 모든 이들의 공포심을 자극했다. 그때 오빠는 옆 향토방위대 사무실에서 밤을 새면서 이 소리를 들었다고 했다. 나를 안고 있던 엄마도 때렸을까. 엄마는 울면서 기도를 했다. 찬송가를 읊조리기도 했다. 엄마의 간절한 기도는 소용 없었다.

그는 처형자들을 지엠시GMC 트럭으로 이동시킨 청년단원 중 한 명이었다. 그는 말했다. "이 사람들이 무슨 죄인지 아무것도 알지 못했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 다고. "나와 내 가족은 절대 이렇게 손가락질당하면서 죽으면 안 돼. 나는 살아야지. 내 가족은 살아야지"라는 오직 그 생각뿐이었다고.

갓난아기를 업고 일행과 함께 끌려가던 젊은 엄마가 어둠을 틈타 옆 콩밭에 잽싸게 숨었다. 갓난아이가 울면 끝장이었다. 그러나 아기조차 울지 않더라고 했다. 정적, 갓난아이조차 입을 닫게 만든 그 정적은 얼마나 두렵고 공포스러웠을까. 21세기를 사는 현대인들은 상상할 수 없는 공포다. 이 콩밭 이야기는 새지기 사건이다. 그러나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마을 사람 중 아무도 나를 만나주지 않았다. 비협조를 넘어 적대적이었다. 날이 서 있었다. 다른 지역의 참고인들이 새지기에 관해 진술해줘 그나마 다행이었다.

국민은 국가에 요청받은 납세와 병역 등 여러 의무를 수행한다. 그렇다면 국가는 국민에게 무엇을 해줘야 하는가. 전쟁에 나가 죽어서 돌아오지 않은 이가 있다면, 주검이라도 찾아서 가족에게 돌려주려 최선을 다해야 한다. 국가가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면 계약 위반이다. 선주는 이런 과정을 통해 국가가 자기 정체성을 확립하고 이를 내부 구성원에게 증명시켜줄 수 있다고 보았다. 이름 없는 군인의 유해는 대한민국 국가 정체성을 드러내는 표식이었다.

나는 태아다. 세상에 나와 엄마 젖을 먹어보지도, 울음을 터뜨려보지도 못했다.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모른다. 그저 하나의 수정란 세포가 되어 엄마의 자궁 내벽에 착상된 지 36주였다. 자궁을 찢고 세상에 나가기 딱 한 달 전, 나를 배 속에 품었던 엄마는 처형당했다.
태어났다면 맹씨네 일원이었다.

23년간 발굴된 피아 군대의 1만 3121구 중 최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유해가 있다. 바로 승갑이다. 선주는 한 편의 감동적인 드라마였다고 회상한다. 이 드라마는 실제로 영화가 되었다. 승갑에 관해 물어볼 때마다 선주를 비롯해 그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게 되었다.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의 모티브가 되었죠."

내 이름은 세화다.
세계 평화를 소망하며, 아버지가 지어주었다. 세상은 평화랑 정반대였다. ‘세계 평화’는 태어난 지 얼마 안 돼 전쟁의 칼날 위에 섰다. 가스실에 들어갈 준비를 하는 유태인 아이의 처지가 나와 같았다. 내가 갇혔던 황골의 작은 공회당 창고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였다. 손가락 하나로 삶과 죽음이 결정됐다. 그날로부터 73년, 내가 여태껏 살아남아 있다는 사실이 기적이다.
나는 방황했다. 그리고 반항했다. 정해진 코스를 거부했다. 1977년부터 한국민주투쟁위원회(민투) 맹원을 거쳐 남조선민족해방전선(남민전)의 전사가 되었다. 1979년 무역회사인 대봉산업의 해외 지사 근무원으로 독일 뒤셀도르프에 이어 프랑스 파리로 갔고, 얼마 안 돼 남민전 사건이 터졌다. 나는 직장을 잃었다. 한국에 돌아올 수 없었다. 거대한 파도가 내 인생을 덮쳤다. 생존해야 했다. 파리에서 택시 운전대를 잡았다. 나는 생각한다. 이 모든 것은 황골에서 시작되었다.

슈마리나이는 1940년대 우류댐 건설로 조성된 일본 최대의 인공 호수다. 담수 면적이 2373헥타르나 된다. 1938년부터 댐 공사와 함께 철도 공사가 시작되었고 일본 하층 노동자들과 징용된 조선인 노동자들이 동원되었다. 1943년까지 조선인 노동자들의 수가 3000여 명이나 되었다. ‘타코베야’, 즉 문어 항아리라 불리는 합숙소의 열악한 노동조건과 배고픔, 추위, 구타를 견디지 못하고 사망한 조선인 노동자들은 공동묘지에 가지도 못하고 그 바깥에 있는 조릿대(대나무의 일종) 덤불 밑에 아무렇게나 묻혔다.

왜 꼭 그 유해들을 데려와야 하는 것일까. 도노히라는 ‘역사와 목숨에 대한 상상력’을 말하곤 했다. 그것은 도리와 상식에 대한 상상력이었다. 가령 타지에서 온 사람이 죽으면 고향에 연락해주어야 하는 게 도리다. 슈마리나이 우류댐 공사에 자본과 기술을 댔던 왕자제지(오지제지)와 일본 정부는 도리를 다하지 않았다. 심지어 조선인들을 강제 노동이 아닌 정당한 모집과정을 거쳐 고용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선주는 체질인류학자이기 전에 사학도로서 그 말이 어이없다는 이야기를 자주 했다. 제국주의 침탈은 그 자체로 강제 약탈이었다. 그것이 상식이었다.
70년 만의 귀향은 도노히라가 말했던 ‘역사와 목숨에 대한 상상력’을 세상에 전파한 멋진 퍼포먼스였다. 홋카이도의 3인, 즉 도노히라·병호·선주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었다.

인민군이 아산을 점령하자마자 다수의 우익 쪽 사람들이 체포되어 대전형무소로 이송되거나 9월 초 인민위원회 궐기대회에 회부되어 희생됐다. 인민군 후퇴기인 9월 27일엔 신창읍 한티고개에서 유엔군이 인민군에게 의외의 패퇴를 당하면서, 도망가다 되돌아온 좌익 세력에게 죽은 사람들도 적지 않다.
인민군이 물러가고 부역 혐의자와 그 가족을 대상으로 한 보복이 시작되었다. 9월 29일 밤부터 10월 초까지가 1차 시기라면, 10월 중순부터 12월 초까지가 2차 시기였다. 그리고 이듬해 1·4 후퇴 때가 마지막 3차였다. 1·4 후퇴 때는 특히 가족 단위의 처형이 많았다. 이때엔 아산 둔포면을 지나던 피난민 300여 명이 미군 폭격으로 비명횡사하는 일도 있었다.

대통령 정희는 나에게 아산시장 자리를 제안했다. 주변에서는 국회의원에 나가보라는 권유를 했다. 나는 거절했다. 사람들은 내가 좌익 경력이 드러날까 봐 그냥 조용히 살았다고 쑥덕거렸다. 글쎄다.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종손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살아야 한다"라는 선친의 가르침을 따랐다면 이해해줄까. "문중을 위해 봉사하고 헌신하며 살기로 했다"면 납득해줄까. 어느 날 아들 재국과 결혼한 며느리가 나에게 ‘북한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나는 북한도 싫다고 했다. 이론과 현실은 다르다.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북한 사회주의는 다르다.
나는 1993년 1월 17일 서울대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칠순이 되던 1984년부터 심한 천식을 얻어 거동할 수 없었다. 내 인생의 마지막 10년은 기나긴 투병의 나날이었다. 79세였다. 이제 나는 무엇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남았는가. 독립운동가? 사회주의 운동가? 부역 혐의자?

선감학원은 아동과 청소년에 대한 국가 폭력을 상징하는 공간이었다. 1982년까지 40년간 경기도가 운영한 수용시설에서 5000여 명에 이르는 8~19세 아이들이 강제 노역과 폭력에 시달렸다. 수백 명이 병사하거나 탈출하다가 익사했다. 2014년의 평화로운 봄날엔 여객선을 타고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가던 고등학생 250명이 바다에 빠져 죽었다. 세월호는 청소년 보호에 대한 국가의 무책임과 무능을 상징했다. 국가는 선감도에서 악질이었고, 침몰하는 세월호에서는 아예 부재했다. 바다에 빠져 죽어서도 구조되지 못한 이들이 선주를 기다렸다.

내가 ‘학살’이라 쓰면 당신은 ‘평화’라 읽는다. 2023년 6월 9일의 어느 강연장에서 당신은 나와 같은 이들의 죽음에 관해 이렇게 평했다. "침략자에 맞서서 전쟁 상태를 평화 상태로 만들기 위해 군인과 경찰이 초래시킨 피해였다"고. 새로운 관점이다. 나는 전쟁 상태를 평화적으로 전환하려는 군인과 경찰에 의해 불가피한 피해를 입은 셈이다.

나는 선사 시대와 근현대사의 사람과 유적이 묻힌 현장을 추적해 발굴하고 증언해왔다. 매개체는 뼈였다. 나는 체질인류학자다. 나는 본 헌터다.

그를 이끄는 힘은 역사의식이나 정의감이 아니었다. 사실을 직접 확인하고 싶은 탐구 정신이었다. 군경에 의한 민간인 희생이든, 적 군인과 교전을 치른 국군 전사자든, 유해 발굴 현장에서는 수수께끼를 풀려고 하는 탐정의 태도로 임했다. 매번 발굴을 통해서 무얼 배울 수 있을까 기대하는 젊은 학자처럼 눈을 반짝였다.

선주가 강조하는 개념은 ‘모던 미스’였다. 우리가 사실처럼 알고 있는 어떤 지식이 꾸며진 이야기일 수 있다는 것이다. "어디에서 몇 명이 죽었다더라" 하면 절대 곧이곧대로 믿기 보다는 문헌과 증언을 비롯한 갖가지 기록과 직접 땅을 파보고 유해를 뒤져본 뒤의 결과로 사실 여부를 검증하려고 했다. 모던 미스를 넘어서려는 신조는 그가 작성한 모든 유해 발굴 보고서 맨 끝에 이런 표현으로 적혀 있다. "진실의 반대는 거짓이 아니라 꾸며진 이야기라는 말을 새기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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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4-06-23 19: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이 책을 시작하셨군요! 그렇네요. 거리의화가 님이라면 이 책의 존재를 아는 이상 반드시 읽어보고 싶으셨을 것 같아요. 다 읽고 리뷰 적어주세요!!

거리의화가 2024-06-24 16:51   좋아요 0 | URL
완독은 어제 다 했고 리뷰는 조금씩 쓰는 중이에요. 말씀하신 대로 이 책은 꼭 읽어보고 싶었는데 이번에 기회가 닿았네요.
 

미·소 강대국의 입김 속에서 자기 운명의 주인이 되지 못했던 코리언에게는 한국전쟁을 코리언화하는 작업이 가장 시급하다. - P87

전쟁, 특히 문명국가 간의 전쟁은 분명히 권력의 또 다른 행사이고 정책의 실천이다. 그런데 권력의 획득과 자원 분배로서의 정치는 경제 및 사회 상황에 기반을 두고 있다. 정치활동은 곧 자원의 분배이자 이익의 조정이며, 정치적 역학은 이해의 균열이나 경제적·사회적 세력의 분포에 좌우된다.
이렇게 본다면 현대사회에서 군사적인 것의 핵심은 정치적인 것이며,
군사적인 것과 정치경제적인 것은 직접 연관된다고 볼 수 있다. - P99

근대국가 건설이란 곧 누가 국가의 지배집단이 되는가 하는문제이다.

계급투쟁의 가장 극적인 표현으로서의 혁명 혹은 - P109

혁명적 노선은 계급 간의 질서 있는 대립이 아니라, 무력을 사용해서라도 상대방을 굴복시키고 완전히 무장해제시키려는 적나라한 폭력의 행사로 나타난다. 그런데 이러한 성격의 혁명 과정에서는 혁명을 거부하는 현상유지세력의 강력한 저항이 존재하게 마련이고, 혁명세력과 반혁명세력 간의 갈등은 통제되지 않는 범위로 확장된다. 즉 초기에는 큰대의와 명분으로 출발한 혁명이 진행 과정에서 반드시 선의의 희생자를 낳게 되고, 결국 민중들의 원초적인 계급적 분노가 개개인들의 사적인 분노와 혼합되어 걷잡을 수 없는 혼란 상황이 조성될 수 있다. - P110

전쟁의전선이 바뀜에 따라 ‘영토‘가 바뀌고, 국가조직이 바뀐 영토를 따라 움직일 수 있었지만, 국민은 쉽게 움직일 수 없었다. 국민은 적 치하와 국가 치하에 편입될 수 있었기 때문에 생존을 위해 새로운 국가에 충성을바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움직이는 국가, 즉 전선을 따라 이동하던군대는 주둔지의 주민들에게 충성을 요구하였다. 이 경우 국가, 즉 군대가 움직이자 그 이전의 ‘다른 국가‘에 충성을 바친 적이 있었던 국민은 그 국가를 따라 움직여야 했지만, 그것은 사실 불가능한 일이었다. - P172

재판 현장에서 생과 사의 결정은 동원된 주민들 목소리 크기에 의해결정되기도 했다. 즉 죽이자고 외치는 사람이 많으면 곧 죽게 되었던것이다. 생과 사의 결정이 단순히 이념적 기준에 의해서가 아니라 평소의 인간관계 · 인격. 타인과의 원한 여부 등 아주 사적이고 우연한 요소에 의해 좌우되는 상황이 연출된 것이다. - P235

6.25 발발 후 이승만 정권이 인적·물적 자원의 동원 과정에서 저지른 가장 큰 사건은 ‘국민방위군사건‘이었다. 정부는 1950년 12월 21일에 공포된 「국민방위군설치법」에 의거하여 제2국민병역에 해당하는 만 17세 이상 40세 미만의 장정을 국민방위군에 편입하였다. 그런데 바로 이 시점에 서울과 지방에서 국군이 후퇴작전을 펴자 각 지역에서 징집된 방위군도 자연히 후방으로 이송해야 했다. 그런데 이송 도중이나 후방 도착 시 장정들을 수용하는 과정에서 간부들이 많은 돈을착복하여 방위군에 대한 보급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결국 수많 - P255

은 방위군이 질병과 추위를 견디지 못하고 사망하였다. 행군 도중 병자나 아사자가 생겨도 보살피거나 책임지는 사람은 없었다. 그 이동은
‘끌어가고 끌려가는 슬픈 행군‘이었다. ‘포로‘도 아닌 국군으로 징집된 그들은 굶주림과 질병으로 거의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으면서 죽어갔다. - P256

전쟁 당시 학살의 사실이 이렇게 은폐되고 또 학문적으로도 접근되지 않은 것은, 한반도 통일은 물론 21세기 동아시아에서 평화로운 질서를 모색하는 데에도 대단히 심각한 장애가 된다. 한국전쟁기의 학살을거론하지 않고서 지난 시절 한반도 냉전의 역사를 정리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며, 한국 사회 내의 통합을 이루는 것도 어려울 것이다. - P283

좌·우익 주민들 간의 폭력과 상호 살해는 그 출발점에서는 분명히신분. 계급 간의 갈등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 당시에는 소작인 · 머슴 등억압받고 못사는 사람들이 대체로 좌익에 공명하였으며, 지주층이 주로 우익 측에 섰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그러했던 것처럼 지주나 양반층 자제들 중 상당수가 사회주의 이론의 영향을 받아 좌익에 가담하였고, 하층민 출신들이 신분상승을 위해 경찰과 군에 투신한 경우도 많았으므로 경찰과 민간인의 대립을 계급 간의 갈등으로만 보기는 어렵다. - P318

반란과 부역의 담론은 이승만과 대한민국, 김일성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하나의 절대적 공동체, 군주 혹은 군주국가와 유사한 정치 단위로 전제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태생적 공동체 혹은 백성과 군주가 피로써 맺은 체제에 대한 배반을 의미한다.
이러한 사고는 반란자와 그의 가족은 모두 한 사람의 반란행동에 연대책임을 진다는 가족주의와 같은 궤를 이루고 있다. - P370

이승만을 구원해 주고 남한의 지배집단을위기에서 구제해 준 이 전쟁을 통해 형성된 국가는 반공주의‘의 신성함을 과시하기 위해 너무나 많은 희생양을 필요로 하였다. 그것은 이민족 혹은 적의 핏자국 위에 세워진 국가가 아니라, 사실상 ‘적으로 의심되는‘ 수많은 동족의 핏자국 위에 세워진 국가였다. 그 국가는 이제 안보‘를 위해 ‘아름다운 나라‘와 완전히 한 몸이 되어 국가의 군사적. 경제적 하부구조와 정신적·문화적 자양분 등 거의 모든 것을 그들에게의존하게 되었다. 전쟁 과정에서 일어난 ‘전투의 기억‘들과 ‘미국으로 - P399

대한민국 지배집단의 다수는 국가 기둥으로서의 역할을 하기보다는 자식들을 모두 해외에 유학 보내거나 정치적 압력과 뇌물 등을 통해 자신과 자식의 군복무 - P402

를 면제받고, 고급정보를 빼돌려 투기와 부정축재에 앞장서 왔다. 국무총리가 증여세를 내지 않기 위해서 탈법행동을 하고 불명예 사퇴를 하는 등 이들의 도덕성이나 국가에 대한 헌신은 보통의 국민들보다도 훨씬 낮은 수준에 머물고 있다. 6.25 발발 다음 날 고위관리들이 식솔과가재도구까지 챙겨 관용차를 타고 서둘러 도망가던 것과 크게 다르지않은 행동들이 여전히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 P403

우리는 한국전쟁을 인간의 존엄성을 앗아가는 이러한 세계자본주의, 그것의 정치적 표현인 국제적 군사대결체제라는 틀 속에서 보아야 하고, 한반도는 물론 전 세계에서 항구적인 평화의 구축과 인권의 실현이라는 전망을 놓치지 않은 채 그 부정적 유산을청산할 길을 찾아야 한다. - P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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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체 1권을 읽고 삼체 중드 시리즈 앞부분을 보고 있다가 바빠져서 한동안 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 출퇴근으로 이동하는 길에 조금씩 드라마를 다시 보기 시작하면서 삼체 1권을 재완독했다. 여전히 난해하지만 다시 읽으면서 보이는 부분들이 많다. 


삼체 중드는 삼체 소설 1권의 내용을 담고 있는데 원작에 충실하다는 것을 단번에 느낄 수가 있다. 캐스팅도 어쩜 그리 찰떡으로 했는지 특히 왕먀오와 스창, 선위페이, 예원제 등... 모두들 연기력이 뛰어난 배우들이라 흡입력을 더한다. 원작 내용상 전체적으로 드라마는 묵직한 분위기로 이어지기 때문에 재미를 생각한다면 다른 컨텐츠를 보는 것이 낫겠다. 넷플릭스 삼체도 진작 나왔지만 여력이 안 되어서 아직 시도해보지는 못했다. 원작과는 다른 느낌이 많다는 평인데 어쨌든 나는  궁금해서라도 향후 보기는 할 것 같다.

삼체 소설을 읽고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그대로의 영상을 원한다면 30부작인 중국 드라마를 추천한다. 


삼체 이야기는 수학, 물리, 천문학 등 관련 지식들이 많아 어려울 수 있지만 대중들도 흥미롭게 여길 수 있는 이야깃거리가 제법 많다. 나도 순수 과학을 전공하지는 않았어도 재미나게 볼 수 있었다. 


삼체 1권에서 중요한 에피소드를 몇 개만 꼽아보자.


먼저, 초반에 왕먀오가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과학의 경계에 뛰어들어가기까지의 과정이 흥미로웠다. 누구라도 눈 앞에 시한폭탄 타이머가 움직인다면 두려움을 느낄 수밖에 없다. 그 타이머의 끝은 어떤 것일지, 내 삶은 이대로 끝이 날지 모른다는 불안감과 압박감이 타이머가 종료될 때까지 지속될테니 말이다. 안경을 쓰는 사람이라면 알텐데 눈 앞에 종종 희뿌연 안개 같은 현상이 일어날 때가 있다. 가끔씩 느끼는 어지러움증과는 다른 느낌인데 그럴 때마다 불편함을 느끼곤 한다. 잠깐동안 생기는 것에도 불편함을 느끼는데 매 순간 눈 앞에 숫자가 새겨지는 경험은 역시 유쾌할 것 같지가 않다.


숫자들이 그를 집요하게 따라왔다. 침대에서 내려와 커튼을 젖히고 창문을 열었다. 창밖 잠든 도시의 불빛은 여전히 찬란했고, 카운트다운 숫자는 광활한 도시를 배경으로 영화 속 자막처럼 떠 있었다. - '저격수와 농장주' 中


두 번째로, 홍안 기지의 진실이 파헤쳐지기까지의 과정이다. 중심 인물은 예원제로 부모가 모두 물리학도였으니 자연스레 그도 물리를 전공했다. 그의 부모는 서로 입장이 달랐는데 한쪽은 기본과 이론을 중요시했다면 다른 한쪽은 현실에서의 적용(응용)이 중요하다는 입장이었다. 당시는 미국과 소련을 중심으로 한 냉전이 시작된 시점으로 양국 간 우주 경쟁이 본격화되면서 중국도 그 경쟁에 뛰어들게 된다. 마오쩌둥의 사상 검증에 의해 예원제의 부모는 걸려들어 갈라서게 되었고 그녀도 이로 인해 노동형을 받아 가게 된다. 그러다 어떤 계기로 예원제는 양웨이닝과 레이즈청을 따라 홍안 기지에 들어선다. 


사실 나는 홍안기지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 찾아나가는 과정도 흥미로웠으나 그 전에 환경에 대한 비판이 인상 깊었다. 예원제가 노동형을 받으면서 읽게된 책이 공교롭게도 카슨의 <침묵의 봄>이었다는 것이 절묘하다는 생각을 했다. 베트남 전에서 DDT에 의한 피해가 극심했다는 것은 이제 잘 알려진 사실인데 카슨의 책을 통해서 이는 더 잘 알려진 면이 있다. 개발이라는 미명 아래 숲의 나무들은 끝도 없이 잘려나갔다. 붉은 등을 내뿜는 거대한 전파 망원경은 새 떼를 집어삼키고 근방의 사람들에게는 알 수 없는 피부의 가려움증이 생겨난다. 오늘 아침 신문 기사에서 이런 단어를 보았다. '기후 위기'나 '기후 재앙'을 넘어선, '기후 이상화'라는 단어다. 얼마 전 6월 중 역대 최고 기온을 찍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해외에는 성지 순례를 간 사람들이 50도가 넘는 폭염을 이기지 못하고 900명이 넘게 사망했다고 들었다. 갈수록 지구의 환경은 극한으로 치닫고 있는데 이를 타개하기 위한 노력은 너무나 부족한 것이 현실이다. 


푸다닥하는 소리가 나더니 산 아래 숲에서 어두운 그림자가 밤하늘로 속속 떠올라 빙빙 돌았다. 그녀는 엄동설한 숲속에 그렇게 많은 새들이 있다는 것에 놀랐다. 이어 공포스러운 광경이 펼쳐졌다. 새 떼가 안테나가 향한 곳으로 날아들더니 희미하게 빛나는 구름을 배경으로 후드득 추락하기 시작했다. 약 15분 뒤, 안테나의 붉은 등이 꺼졌고 피부의 가려움증도 사라졌다. - '홍안 1' 中 


세 번째로, '삼체'의 목적과 지구삼체조직에 대한 진실을 추적하기까지의 과정이 있다. 개인적으로는 구원파와 강림파 간의 구도를 설정한 작가의 생각이 좋았다. 지구는 누군가의 힘을 빌려 구원받을 수 있는가, 지구는 더 이상 가망이 없으니 없애버리고 다른 길을 찾을 것인가. 각 파의 대표 인물인 선위페이와 판한이 치열한 갈등을 벌일 때 특히나 흥미로웠다.


웨이청이 말했다. "삼체문제(질량이 같거나 비슷한 물체 세 개가 상호 인력의 작용 아래 어떤 운동을 하는가 하는 문제로 고전 물리학의 중요 문제이고, 천체 운동 연구에 중요한 의의가 있어 16세기 이후 계속 관심을 받았다)의 진정한 해결 방법은 어떠한 시간 단면의 초기 운동 벡터를 알고 있을 때 삼체 시스템 이후의 모든 운동 상태를 정확히 예측할 수 있는 수학 모델을 구축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선위페이도 갈망하는 목표였습니다."

선위페이가 말했죠. '당신들은 주의 힘을 빌려 인간에 반대하지요.' 그러자 판한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완전히 틀린 건 아니지. 우리는 주가 세상에 강림해서 진작에 벌을 받았어야 할 인간들을 처벌해야 한다고 생각해. 하지만 당신이 강림을 막고 있지. 그러니 우리는 공존할 수 없어." - '삼체문제' 中


그리고 가장 중요한 핵심 인물이 밝혀지기까지의 추적 과정은 그야말로 짜릿하다. 중심 인물이 밝혀지고 지구삼체조직이 설정되고 나서는 오히려 평범하게 느껴지는 면이 있기까지 했다. 물리 개념을 몰라도 과학과 문명이 지구에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 현재와 미래를 위해 지구인이 해야 할 생각과 행동은 무엇인지 절실히 느낄 수 있는 수작이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학창 시절 '물리' 선생님만 좋아했지 정작 '물리'와는 담 쌓고 지냈던 때가 떠오르기도 했다. 컴퓨터를 전공했음에도 인문/사회 분야에 관한 책들을 주로 읽느라 과학 분야의 책을 등한시하고 있는데 간간이 읽어보자는 결심을 갖게 하는 즐거운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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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들마치 1 - 완역본
조지 엘리엇 지음, 이가형 옮김 / 주영사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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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간의 연애를 하고 내가 결혼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을 때 그것은 ’선택과 결심‘이 아닌, 자연스러운 감정에 따른 행동에 가까웠다. 가끔은 생각하곤 한다. 그 때 진지하게 고민하고 결정했다면 지금 내 곁에 아무도 없고 홀로 살고 있을까, 아니면 또 다른 사람을 만나서 2인 가구를 꾸리게 되었을까. 솔직히 여전히 답은 없는 것 같다. 그는 분명 나에게 잘해주는 사람이고 서로를 좋아하는 감정이 있었지만 결혼은 다른 영역일지 모른다고 여기지 않았던 것 같다. 내 삶의 선택의 기로에서 어쩌면 너무 쉽게 선택해버린 것은 아닐까 싶을 때가 있다.  


사과 처녀가 호박 총각을 흠모해 행복하고 오래오래 사는 끝없는 앞날을 꿈꾸는 것은, 우리의 아버지 어머니들이 절대 싫증 내지 않았던 하나의 작은 드라마로 옷을 바꿔 가며 반복되었다. 호박 총각이 허리가 짧은 연미복을 입어도 그런대로 참을 수 있는 정도의 외모라면, 상냥한 처녀는 즉시 그의 미덕, 탁월한 능력, 무엇보다도 그의 완벽한 진실성을 알아보는 것이 완벽한 여성으로서 당연한 일이자 필요사항이라고 모두가 생각했다. 그렇지만 당시를 살던 사람들은, 분명히 팁턴의 이웃 중에는 누구도 어떤 처녀가 결혼에 대한 관념을 인생의 목적에 대한 고양된 열정으로 완전히 색칠하고, 그 열정을 주로 열정 자체의 불로 붙이며, 결혼에 대한 꿈에 근사한 혼숫감이나 접시의 종류, 심지어 꽃다운 부인의 명예나 달콤한 기쁨도 넣지 않는다는 것을 이해하지는 못할 것이었다. - P49


미들마치 1권을 읽으며 이처럼 내 과거가 떠올랐다. 명문 집안의 큰 딸인 도로시아는 배우자 감으로 두 사람 사이를 저울질한다. 한 쪽은 지적이고 연륜이 있는 커소번, 다른 한 쪽은 상대적으로 비슷한 또래의 제임스 체텀이다. 고민 끝에 도로시아는 이 중 진중하고 배울 점이 더 많은 커소번을 선택한다. 생각해보자. 상대의 말을 잘 들어주고 서로 잘 통하는 상대가 있고, 나보다 더 배울 점이 많은 상대가 있다. 당신이라면 누구를 선택하겠는가. 물론 이는 본인이 어떤 스타일이냐에 따라 선택은 달라질 수 있고, 어떤 부분에 호감이 가는지에 따라 상대를 선택하는 것도 달라질 것이다. 상대와의 케미스트리는 상호에 따라 다를 수 있다. 


나의 신혼 여행지는 이탈리아였다. 개인적으로 언젠가 꼭 가보고 싶었던 나라였기에 욕심을 부리지 않을 수 없었다(원래도 여행지를 고를 때 관광 거리가 있느냐가 가장 중요하다). 처음으로 도착한 도시였던 로마, 관광을 시작한 첫 날 옆지기는 울화통을 터뜨렸다. ‘울화통’이란 단어가 너무나 적절하다. 당시 그는 나의 스파르타식 관광 여행을 따라잡으려다 제대로 지쳐버렸으니까. 나는 여행을 하면 다 나처럼 해야 하는 것이라 멋대로 생각했다. 이전에도 우리는 2~3차례 여행을 다녀오기는 했지만 단기 여행이라 깊은 경험을 할 일이 없었다. 결국 화가 난 그를 달래주기 위해 우리는 근처 레스토랑에 가서 무얼 먹었고 나는 그 자리에서 진심으로 사과했다. 연애 전 거의 싸운 적이 없었는데 연애와 결혼은 다르다는 주변 사람들의 말이 실감났다. 이제 서로 부딪힐 일이 많겠구나 생각하니 두려워졌다. 


신혼여행이란 남편과 아내가 서로에게 이 세상의 전부라는 이유에서 단 둘만의 세계에 들어앉는 것을 명백한 목적으로 삼는 만큼, 그러한 여행 중에 불화를 느끼면 아무리 남이 모른다 해도 당황하고 어리둥절해지는 게 당연하다. 상대방과의 사이에 거리를 두고 정신적으로 고독해지면 신경질의 폭발도 내밀히 끝나고 말도 안 해도 되니까 물컵을 주면서 상대방 얼굴을 보지 않아도 될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만족한 해결이라고는 제아무리 강인한 성격의 소유자라도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 P344


도로시아의 배우자 선택은 옳았을까? 도로시아는 신혼 여행 초기 이후 커소번이 자신을 내팽개쳤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는 연구 과제로 바빠서 자신에게 신경써주지 않았고 당연한 듯 무덤덤하게 느끼는 듯했다. 커소번은 섬세함이 부족했을 수도 있는데 결혼 전에는 그 점이 그녀에게 그가 신뢰할 만하고 진중한 인물로 느껴졌다. 도로시아의 신혼 여행지가 공교롭게도 로마였던 데다가 둘의 갈등과 충돌이 있었던 점에서 나와 너무나 흡사하여 내 과거의 기록이 오버랩되었던 것 같다. 

도로시아가 우울해 속을 끓이고 있을 때 그녀 앞에 커소번의 친척 청년인 윌 레이디슬로가 나타난다. 그는 이전부터 커소번에게 경제적 도움을 받아서 공부를 진행해왔다. 그러다 여행지에서 만난 그녀는 막상 커소번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음에도 애써 후회하지 않는 선택임을 강조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에 그는 마음을 느낀다. 소설에서는 그가 그녀에게 들이대는 모습처럼 비춰지기도 하는데 실상 그는 그녀를 정말로 원했다기보다는 어떤 환상에 잠시 도취되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초반에도 그랬지만 책장을 덮을 때쯤에도 ’선택은 선택한 자의 몫‘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야기에 흥미로운 인물 구도가 더 있다. 첫 번째는 도로시아와 여동생 실리아, 두 번째는 리드게이트와 빈시, 세 번째는 메리와 프레드다. 


실리아는 도로시아와 정 반대의 성정을 지녔다. 도로시아는 진취적이고 열망이 강한 여성인데 반해 실리아는 당시 현실에 맞는 여성상에 가까웠다고 보여진다. 둘을 보면서 나와 여동생의 관계가 자연스레 떠올랐다. 여동생은 싹싹하고 다정다감하여 어른들에게 인기가 항상 많았다. 나는 무뚝뚝하고 딱딱하여 어른들에게 꾸중을 많이 듣는 편이었다. 집안일과는 담을 쌓고 지냈고 여성들이 해야만 한다고 여겨지는 일과는 특히나 거리가 멀었다. 그러다보니 ‘너는 대체 왜 그러냐.’라는 소리를 내내 듣고 살았는데, 이 때문에 여동생에게 괜히 분풀이를 하며 열등감을 표출하곤 했다. 지금이야 지난 일이 됐지만.


리드게이트는 젊고 유망한 외과 의사로 미들마치에서 막 들어왔다. 모든 사람이 도로시아에게 관심을 가지지만 그는 모범 있고 교양이 넘치는 로저먼드 빈시에게 마음을 빼앗긴다. 리드게이트는 출세를 위해 일에 몰두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주변 사람들을 포섭하는 열정을 보인다. 애정 관계를 멀리 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그녀의 매력 앞에서는 어쩌지를 못한다. 근데 과연 그녀가 화려한 외모를 지니지 않았다면, 명문고에 다니면서 바른 말씨와 예법, 우수한 학업 성적 등 실력이 있지 않았다면 과연 그가 그녀에게 관심을 가졌을지… 


프레드는 빚을 졌지만 언제라도 갚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등 경제 관념이 약한 사람이다. 그는 메리에게 호감을 보이지만 그녀는 매몰차게 거절한다. 그가 나중에 돈을 벌게 되면 다른 이를 부양할 능력을 갖추게 되겠지만 게으른 사람은 받아들일 수 없다면서 말이다. 나도 메리의 말에 동의한다. 내가 호감을 갖는 사람이라면 당장의 능력도 중요하겠지만 우선 성실한가, 어떤 일에 진심인가 하는 것을 볼 것 같으니까. 


“메리, 네가 나를 사랑하면 넌 나한테 결혼하겠다고 약속해야 해.”

“아니요, 그와 반대에요. 제가 당신을 사랑한다 해도 당신과 결혼하는 것은 나쁘다고 생각해요.”

“결국 지금의 내가 그렇지만, 내가 아내를 부양할 능력도 없는 주제에 그런다, 이런 말이겠지? 난 이제 겨우 스물세 살이니까.”

“나이는 달라지겠지요. 그렇지만 나머지 것은 달라질지 제가 확신할 수 없네요. 아버지께서 말씀하셨어요. 게으른 남자는 이 세상에 있어서는 안 된다고요.” -P240~241


이를 비롯해 미들마치에는 다양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어 참 흥미로웠다. 특히 이들이 관계를 쌓기 위해 내던지는 교묘한 수들을 보는 재미를 느낄 수 있었던 것 같다.

어쩔 수 없이 마주하게 되는 가부장제 하에서의 거슬리는 표현들과 차별적 언사들은 감안해야 하지만.


서문을 읽으며 작가의 문장력에 감탄했다. 그녀가 지금 이 시절에 살았다면 어땠을까 진심으로 그런 생각도 해 보았다. 서문의 모든 문장들을 필사하고 싶을 정도로 좋았다.

어쩌다 보니 너무나 오래 걸려 1권을 읽었다. 어쩔 수 없이 앞 부분이 기억나지 않아 다시 처음부터 읽었다. 여러 모로 기대 이상을 충족시켜준 작품이었다. 


오늘날까지 숱한 테레사가 태어났지만 그들의 행동이 끊임없이 널리 전파되는 서사시적 삶을 찾지 못했다. 고귀한 정신이 있으면서도 그것을 실천할 기회가 빈약해서 생긴 잘못투성이의 삶에 불과했는지 모른다. 그들의 실패가 아무리 비극적이었다 할지라도 그것을 읊어 줄 훌륭한 시인도 발견하지 못했거니와, 그들이 죽어서 망각의 심연에 빠져도 울어 줄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그 노력도 결국 보통 사람의 눈에는 혼돈되어 형태를 이루지 못한 불완전한 것으로밖에 비치지 않았다. 왜냐하면, 요컨대 이들 후세에 태어난 테레사에게는 그 열렬한 신앙심에 지식 역할을 해줄 일관된 사회적 신념이나 질서의 도움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열정은 막연한 이상과 여성이라면 흔히 갖는 동경 사이를 방황했는데, 전자는 터무니없다는 후자는 타락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그들이 이처럼 잘못투성이의 서투른 삶을 산 것은, 조물주가 고약하게도 여성의 본성을 분명히 정해서 만들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다. 만일 여성의 무능의 정도를, 이를테면 셋 이상의 수는 세지 못한다는 식으로 엄격하게 한정할 수 있다면, 여성의 사회적 운명도 과학적 확신을 가지고 취급할 수 있을지 모른다. 모호함은 여전히 그대로다. 그리고 그 편차는, 여성의 머리 모양과 여성이 좋아하는 시와 산문으로 된 러브 스토리는 모두 같다고 상상하는 보다 훨씬 크다. 여기저기 흙물 연못에서 한 마리의 백조 새끼가 오리 새끼와 불편하게 자라지만 물갈퀴를 가진 종류끼리 어울리는 살아 있는 흐름을 발견할 수 없다. 여기저기서 한 명의 성 테레사가 태어나지만 아무것도 창설하지 못한다. 선을 이룩하지 못한 뒤 그녀의 가슴 떨림과 흐느낌은 어떤 오래 기억될 만한 행위에 집중하기보다 방해 속에서 흔들려 사라져 버린다. - P6~7


첫 번째 신사 사람을 어떻게 분류합니까? 보통보다 나은 사람, 나아 보이는 사람, 저 망토보다 못한 사람? 성자 아니면 악당? 순례자 아니면 위선자?

두 번째 신사 아니, 그보다 당신이 갖고 있는, 세월의 성스러운 유물이라고 할 수 있는 그 많은 책들을 어떻게 분류하는지 알려주시죠. 차라리 그 책들을 크기와 장정으로 즉시 나누는 것이 나을 듯하군요. 송아지 피지로 만든 책, 큰 판, 보통의 송아지 가죽으로 만든 책으로 나눌지라도, 읽지 않은 저자의 책들로 분류하도록 교활하게 고안된 모든 딱지보다 많지는 않을 겁니다.

“남자가 여자에게 친절하게 해줄 때 여자도 거기에 대해 감사를 하면 둘은 반드시 사랑에 빠진다고 생각하는 건, 젊은 여자의 생활에서 무엇보다도 참을 수 없는 일 중의 하나예요.” - P235


무슨 일이건 좋아하는 문제에 마음을 기울인 사람이라면 거의 누구나가 기억할 것이다. 어느 날 아침 혹은 어느 날 밤, 아직 읽은 적이 없는 책을 책장에서 내리려고 높다란 발판 위에 섰을 때의 일을. 처음 듣는 이야기에 넋이 빠져 입을 헤벌리고 황홀하게 듣던 때의 일을. 읽을 책이 없어서 자기 내부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을 때의 일을. 그리고 그 발자취를 더듬어 보면, 그것은 사물을 사랑하는 일의 시초였던 것이다. - P247

손길이 미치지 않는 곳에 있는 여성에게 멀리서 바치는 경의라는 것은 남성의 생활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법인데, 대개의 경우 숭배자는 자신의 생각을 여왕이 알아주기를 바라고, 그의 마음을 다스리는 그 여왕이 옥좌를 내려와주지 않을지라도 그 생각을 기리는 표시를 주어 용기를 북돋아 주기를 간절히 바라는 법이다. 윌이 원하는 것도 바로 그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상상의 요구에는 많은 모순이 있었ㄷ. 아내다운 마음 씀씀이와 간절한 소망이 가득한 눈으로 커소번 씨를 응시하는 도로시아는 보기만 해도 아름다웠다. 그와 같이 아내로서의 임무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았다면, 그녀를 둘러싸는 광휘는 다소 약해졌을 것이다. - P3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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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수하 2024-06-20 09: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민음사판으로 1권까지 읽었는데 워낙 읽다가 말다가 하다보니..

사과 처녀와 호박 총각이란 말이 나온게 전혀 기억이 안 나네요 ^^;
민음사판에서는 메리가 프레드에게 존대하지 않는데, 번역 느낌이 좀 다른 것 같아요 :)

거리의화가 2024-06-20 17:27   좋아요 0 | URL
소설은 특히나 읽다 말다 하면 줄거리가 연결이 안 되어서 결국 다시 처음부터 읽었습니다.
나중에 저도 민음사 판으로 읽어볼까 싶어요. 민음사 거는 도서관에 들어오지 않을까 싶기도 해서ㅎㅎ

잠자냥 2024-06-20 10:2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미들마치>보다 화가 님 연애&신혼여행이야기가 더 재미난 1인....ㅋㅋㅋㅋㅋㅋ

거리의화가 2024-06-20 17:28   좋아요 0 | URL
재미를 드렸다니 좋네요^^ 연애 기간이 길어서 재미난 에피소드가 많았는데 웃프게도 이제는 오래 되어서 기억이 가물거립니다ㅋㅋ

다락방 2024-06-20 10:4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미들마치>보다 화가 님 연애&신혼여행이야기가 더 재미난 2인. 좀 더 들려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요? 그 다음은요? 다른 여행에서는요?

거리의화가 2024-06-20 17:34   좋아요 1 | URL
저와 남편이 비슷한 성향도 있지만 재미를 느끼는 포인트가 달라서 재미 있게 지내는 것 같습니다!ㅎㅎ
종종 생각나는 이야기가 있으면 썰을 풀어볼게요^^;

독서괭 2024-06-20 14:2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미들마치>보다 화가 님 연애&신혼여행이야기가 더 재미난 3인. ㅋㅋㅋㅋㅋㅋ 전 스파르타식 여행 힘들어하므로 옆지기님께 이입합니다 ㅋㅋ

거리의화가 2024-06-20 17:35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ㅋ 아마도 많은 분들이 옆지기 스타일에 호응할 것으로 예상합니다^^;

잠자냥 2024-06-20 14:3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화가 님 연애&신혼여행이야기 연재합시다. 열혈 독자 3인 확보.

거리의화가 2024-06-20 17:35   좋아요 0 | URL
ㅋㅋㅋ 자기 이야기가 연재된다면 식겁할 것 같습니다!ㅎㅎ

건수하 2024-06-20 15:2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니 이분들... 저도 재밌었지만 왠지 책 얘기를 써야할 것 같았습니다...

전 화가님처럼 휴양보단 관광.. ^^

거리의화가 2024-06-20 17:36   좋아요 0 | URL
호기심이 많아서 관광 컨텐츠가 없는 곳에는 관심이 덜 가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