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체성 정치‘는 사회범주들과 집단 규정을 동질화하고 자연화할 뿐만 아니라, 정체성과 내부 권력의 차이, 그리고 이익의 갈등의 경계들을 옮기지 않으려 하는 경향이 있다. - P214

민족적 및 국제적 정체성 정치의 고질적 문제는 대표성의 문제이다.
페미니즘과 기타 공동체 운동가들이 함정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스스로를 자신의 구성체의 대표가 아닌 대변인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대변인이라 할지라도 이들이 자기 사회의 다른 여성들과의 관계에서뿐만 아니라 특수한 상황에서 만난 타자들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이 실제로 복수신분임을 의식해야하는 것은 중요하다. - P215

각 집단은 자신의 입장에서 말하고 자신의 부분적이고 상황적인 지식을 일부 공유한다. 그러나 각 집단이 자신의 진실을 부분적으로 인식하기 때문에, 이들의 지식은 미완의 상태이다[타당성이 없다는 것과는 다르다].부분적이고 보편적이지 않다는 것이 들어 주는 조건이다. 자신의위치를 갖지 못하고 지식을 전송해야 하는 개인과 집단은 위치를 확보한개인과 집단보다 신뢰도가 떨어져 보인다. ………… 이러한 인식론적 접근에공하기 위해서는 대화가 중요하다. (Hill-Collins, 1990:236)

여기서 힐-콜린스는 맑스주의자들과 여러 지식사회학자들이 걸려들었던 덫에서 비켜간다. 하나는 상대주의의 덫이며, 다른 하나는 특정 사회집단을 인식론적으로 ‘진실을 가지고 있는 자truth bearer라는 위치에 놓는덫이다. 위치의 고정성보다는 대화가 세력을 갖춘 지식의 기초가 된다. - P232

이탈리아 여성들은 ‘뿌리내리기‘rooting와 ‘옮기기‘shifting를 핵심어로 사용했다. 대화의 참여자들은 각기 자신의 구성원권과 정체성 속에 뿌리내리기‘를 가져가지만 동시에 자신을 다른 구성원권과 정체성을 지닌 여성들과 나누는 교류의 상황에 놓기 위해 ‘옮기기‘를 시도한다. 이들은 이 형식의 대화를 ‘횡단주의‘ansversalism라고 불렀다. ‘동질적인 출발점‘을 가정함으로써 포함이 아닌 배제로 끝나는 ‘보편주의‘, 그리고 ‘차별적인 출발점‘으로 인해 어떤 공통된 이해나 진정한 대화도 전혀 가능하지 않다고 가정하는 ‘상대주의‘와 차별화하기 위해서였다. - P233

횡단적 전망의 발전에 중요한 두 가지가 있다. 첫째, 옮기기 과정은 탈자기중심을 포함해서는 안 된다. 이는 자신의 뿌리내리기와 일련의 가치들잃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른 이들을 강조하고 존중하는 동안 자신의 관점을 유지하는 것은 어떤 형태의 동맹과 연대 정치에서나 중요하다.


첫째에 이어 둘째는, 옮기기 과정이 ‘타자‘를 동질화해서는 안 된다. 비슷하게 뿌리내린 사람들 사이에 다양한 위치와 관점이 있듯, 다른 집단의구성원들 사이에서도 그렇다. 횡단의 동행은 다른 집단의 구성원들과 일괄적으로 함께하는 것이 아니라, 뿌리를 달리 내리면서도 자신과 양립할 수있는 가치와 목표를 공유하는 이들과 함께해야 한다. - P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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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헌터 - 어느 인류학자의 한국전쟁 유골 추적기
고경태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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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는 없지만 매년 마음 속으로 간절히 죽은 이들의 영면을 비는 날이 있다. 특히 6월 25일이 그렇다. 한국 전쟁이 발발한지 올해로 74주년, 강산이 몇 차례가 변할 만큼 많은 시간이 흘러 이제는 생존자들도 거의 남아 있지 않을 정도가 되었다. 그나마 남아 있는 생존자도 여전히 발설 시 받을지 모를 불이익에 진실은 은폐되었고 대중들에게는 잊혀진 일이 되어가고 있다.


본 헌터란 무엇인가. 뼈에 눈을 번뜩이는, 숨은 뼈를 찾아내는 사냥꾼이다. 그 뼈에 담긴 수수께끼를 푸는 추적꾼이다. 


책 제목이 ‘본 헌터‘인데 표지를 보지 않았을 때만 해도 ’Born Hunter’인 줄 알았다. ‘타고난 사냥꾼‘, 그래서 스릴러나 추적물을 생각했는데 실상은 ’Bone Hunter’로 ‘뼈 사냥꾼’이다. 물론 책의 내용을 보면 스릴러나 추적물로 생각해도 말이 되는 것 같이 느껴지니 작가가 이중적 의도를 가지고 쓴 것은 아닌가 싶기도 했다. 작가는 한겨레 신문에서 베테랑 기자로 오랫동안 일해온 분으로 책도 여러 편 내셨다. 


이 책의 주인공은 1950년 아산 부역 혐의로 희생된 민간인들과 이를 발굴한 방선주 박사다. 


한국 전쟁 중 많은 학살 피해가 있었다고 알려져 있지만 그 실태를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조사하기 시작한 것은 불과 20여년도 되지 않았다. 그 중 충남 아산에서 벌어진 민간인 학살 사건 현장을 특정 짓고 유해의 주인공의 시점에서 당시 과거를 복기한다. 계기가 된 것은 2023년 무려 73년 만에 206개의 온전한 형태의 뼈가 드러난 A4-5 때문이었다. 작가는 이를 바탕으로 발굴 현장에서 만난 유해들 속의 사연과 발굴을 담당한 방선주 박사의 이야기를 엮어 글로 담아 냈다. 


방선주 박사는 아내에게 반해서 만난 지 얼마 안 되어 혼인 신고를 한 뒤 (처가가 있는) 미국으로 이민을 건너 가 체질인류학 연구에 뛰어든다. 역사학, 고고학에 이어 운명처럼 만난 전공이었다고. 방 박사는 어릴 때 몸이 허약해 몸과 마음을 단련시키기 위해 합기도의 매력에 빠져 유단자가 되었지만 폐결핵을 앓아 죽을 고비를 넘겼고 한 때 집이 망해 광주대단지(지금 성남의 ‘모란’)에서 8개월을 어렵게 사는 등 순탄치 않은 세월을 보냈다. 


그의 인맥은 지금 독자의 기준으로 보면 화려하기 그지 없다. 유명한 등장 인물들이 줄줄이 나와 놀라서 절로 혀를 내밀게 된다. 화석 ‘루시’를 발견한 장본인이었던 요한슨과도 친분이 있었다고. 인맥 중 손보기 박사는 저자가 고고학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는 데 중요 역할을 했던 스승인 점에서 특히나 인상 깊었다. 


손보기 박사는 석장리 유적을 발굴한 장본인으로 고고학계의 거물이자 방선주의 스승이었던 사람이다. 윤동주, 최현배 등과 친분 관계가 있었던 만큼 우리말 사랑에 남달랐다고. 고고학계 용어를 한글로 풀어 쓰는 등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게다가 윤동주의 연희전문 동문이어서 후일 연세대에 윤동주 시비를 건립하기도 했다 


아산 부역 혐의 민간인 학살 피해 사건의 주인공은 앞서 말했듯 성재산 A4-5다. 유해 발굴 현장에서 붙여진 식별 번호라고 한다. 나이는 18~22세, 키 165cm 남성으로 추정된다. 1950년 10월 아산 성재산에서 산을 등진 방향으로 쪼그려 앉아 두 손을 삐삐선으로 감긴 채 발견되었다. 이를 비롯해 성재산에서는 A5-4, A17,A18,A19가 나왔다. 


A5-4는 뭉크의 절규가 떠오르는 모습으로 세상에 나온다. 25~~29세로 추정되며 머리뼈에 세 개의 구멍이 뚫려 있는 상태로 발견되었다.


A17, A18, A19는 16~~20세 나이로 교복 단추가 발견된 것으로 짐작컨대 천안농업중학생들로 추정된다. 


성재산에서 10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던 황골 마을에도 희생자들이 있었다. 새지기 사건으로 1950년 추석 기간 3~4일 사이 80여명이 희생되었다. 얼마 전 타계한 홍세화도 가족, 친지들이 희생을 입었다고 한다. 사건 발생 당시 불과 3살의 나이였다고. 살아 남은 아이는 부역자의 가족으로 갖은 고초를 겪었기 때문에 분노가 컸다. 그는 말한다. ‘우리는 이성의 빛을 품고 있는가.’ 이 문장을 읽고 한동안 멈춰 있었다.


설화산 은비녀로 명명되는 유해는 엄마가 아이를 안고 사망한 경우다. 1.4 후퇴 때 부역 혐의 가족 딱지를 붙여 살해된 경우다. 이런 일이 얼마나 많았을까 생각하면 마음이 너무나 무겁다.


이처럼 당시 충남 아산에서는 부역 혐의로 몰려 희생된 많은 민간인들이 있었다. 사건은 1950년 9.28 수복 이후 1951년 1.4 후퇴 때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다. 주민들은 인민군 점령 시기에 부역했다는 혐의가 씌워졌고 당사자는 물론 가족이라는 이유로 온양경찰서 및 각 지서 경찰과 대한청년단, 청년방위대, 향토방위대, 태극동맹 같은 각종 치안 단체가 가담하여 감금되었다가 성재산, 설화산, 황골 새지기 공동묘지 등에 끌려가 집단학살 당했다. 진실화해위원회에 의하면 신원 확인이 된 희생자(77명) 연령 중 10세 미만이 가장 많았다고 한다. 신원 확인이 안 된 희생자는 최소 800명 정도일 것으로 추정한다. 피해자 중 여성과 노인, 갓난아이와 어린아이까지 일가족 전체가 몰살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하니 그 참담함을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이런 일이 가능했던 이유는 지주와 소작인 간의 원한 관계에 의한 계급 갈등이 씨앗이 된 경우도 있지만 나중에 가면 내가 죽지 않기 위해서 남을 죽이는 인간 사냥 형식이 되었다고 보여진다. 


그 혼란스러운 세상 속에 부역자 재판을 맡았던 유병직 판사가 특히 기억에 남는다. 당시 인민 재판은 마구잡이 처형 식으로 이루어졌다. 검사는 사형 구형을 남발했는데 그는 무죄를 선고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그가 가진 판사로서의 철학에 숭고함이 일었다. 

재판이라는 것은 사실과 맥락에 대한 사색으로부터 시작해 사회적 압력에 굴하지 않는 용기와 결단의 과정을 거친다. 그래야 소신을 지킬 수 있다. 물론 부역자 처리는 보통 고민되는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이것이 민족의 근본 문제에 관계되는 일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부역범을 처벌하려고 만든 ‘비상사태하범죄처벌에관한특별조치령’(특조령)의 내용을 들여다보니, 어떤 면에서는 민족을 해치는 어마어마한 법이었다. 단독판사, 단심제에 단시간 내 처리라니.

이런 분이 있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반면 충남 온양 신창 지서 주임이었던 유해진은 가해자의 면모를 제대로 알 수 있는 사람이다. 닥치는 대로 주민들을 잡아들였고 죽였다. 당시 주민들은 그를 보기만 해도 치를 떨었다고 한다. 


김광동 진실화해위원장에 대한 소식은 알고 있었는데 글로 다시 보니 분노가 더 치밀었다. 이런 사상을 가진 사람이 하필 진실화해위원장이 되다니. 이런 식의 논리라면 학살은 불가피한 것이었다는 것을 당연시하는 것 아닌가. 수많은 사람들의 피와 땀을 가볍게 여기는 것이 아닌지 곱씹을수록 화가 난다.

내가 ‘학살’이라 쓰면 당신은 ‘평화’라 읽는다. 2023년 6월 9일의 어느 강연장에서 당신은 나와 같은 이들의 죽음에 관해 이렇게 평했다. "침략자에 맞서서 전쟁 상태를 평화 상태로 만들기 위해 군인과 경찰이 초래시킨 피해였다"고. 새로운 관점이다. 나는 전쟁 상태를 평화적으로 전환하려는 군인과 경찰에 의해 불가피한 피해를 입은 셈이다.


중후반 이후에는 방선주 박사가 참여한 여러 유해 발굴 사건을 다룬다. 그는 1997년부터 2015년까지 홋카이도 현장에서 강제징용 민간인 희생자 발굴을 했고 2000년부터 2006년까지 국군 전사자 발굴을 했다. 2007년부터 2009년까지 진실화해위원회와 함께 한국전쟁기 민간인 희생자 발굴을 했으며 장준하 의문사 진상 규명을 위한 일을 하기도 했다. 2014년부터 2023년까지 각종 시민단체나 진실화해위원회와 함께 민간인 희생자 발굴 현장을 누볐다고. 특히 선감 학원, 세월호 인양 발굴, 안중근 유해 발굴에도 참여하셨다고 한다. 그가 이렇게까지 뼈를 찾아다니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를 이끄는 힘은 역사의식이나 정의감이 아니었다. 사실을 직접 확인하고 싶은 탐구 정신이었다. 군경에 의한 민간인 희생이든, 적 군인과 교전을 치른 국군 전사자든, 유해 발굴 현장에서는 수수께끼를 풀려고 하는 탐정의 태도로 임했다. 매번 발굴을 통해서 무얼 배울 수 있을까 기대하는 젊은 학자처럼 눈을 반짝였다.


선주가 강조하는 개념은 ‘모던 미스’였다. 우리가 사실처럼 알고 있는 어떤 지식이 꾸며진 이야기일 수 있다는 것이다. "어디에서 몇 명이 죽었다더라" 하면 절대 곧이곧대로 믿기 보다는 문헌과 증언을 비롯한 갖가지 기록과 직접 땅을 파보고 유해를 뒤져본 뒤의 결과로 사실 여부를 검증하려고 했다. 모던 미스를 넘어서려는 신조는 그가 작성한 모든 유해 발굴 보고서 맨 끝에 이런 표현으로 적혀 있다. "진실의 반대는 거짓이 아니라 꾸며진 이야기라는 말을 새기며…."


책의 화자가 1인칭 시점이라 타인의 일기를 들여다보는 느낌이 든다. 어떻게 보면 다큐멘터리나 르포 같기도 하다. 책을 읽는 것이 쉽지만은 않았다. 피해자를 생각하면 가슴이 무거워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여전히 그들은 사건을 밝히기를 두려워한다. 윤석열 정부가 들어선 뒤 괜한 불똥이 튀지나 않을까 노심초사하는 마음,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유해와 진실을 파헤치는 사람들의 진심이 와 닿아 마지막 장을 덮을 때쯤에는 뭉클한 감정이 인다. 대한민국의 영토에는 여전히 빛을 보지 못한 수많은 유골이 남아 있다. 모쪼록 정부와 민간의 노력이 계속 이어져서 유해를 찾고 가려진 진실을 찾을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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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4-06-25 12:2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어휴 잘 읽었습니다, 거리의화가 님!

거리의화가 2024-06-25 15:38   좋아요 0 | URL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락방 님^^

은하수 2024-06-25 18: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요... 저도 너무너무 잘 읽었습니다.
한 자, 한 자 정성껏 써 주셔서 제가 다 감사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거리의화가 2024-06-26 07:45   좋아요 0 | URL
공들여 읽어주셔서 저도 감사한 마음입니다^^

희선 2024-06-28 05:4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전쟁이 일어났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을지 다 아는 건 아니군요 민간인 학살이 있기도 했다니, 지금도 전쟁이 일어나는 곳에서는 그런 일이 있겠네요 그런 일을 밝히려고 하는 사람이 있어서 다행이기도 합니다 지금도 땅에 묻히고 잊힌 사람이 많겠습니다


희선

거리의화가 2024-07-01 13:32   좋아요 0 | URL
한국 전쟁에서 이념 간에 충돌로 인한 문제만 생각을 했었는데 생각보다 계급에 의한 문제로 사적인 원한이나 복수에 의해서 갈등이 심했었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정부 측에서 그동안 쉬쉬하거나 했던 부분이 많아서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여전히 밝혀야 할 부분이 많아 보이는데 이런 분들의 노력이 있어서 다행이에요.
 

5장 밑줄

‘국민군‘people‘s army을결성하거나 국민강제징집을 도입하는 것이 광범위하고도 다양한 개인과집단을 위한 정권과 정부를 합법화하는 주요 방법이었다."
이것이 말하고 있는 바는 군대 참여와 시민권 사이에 반드시 직접적인연관성이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사회 안에서 누군가의 권리와 위치를 결정하는 것은 군 참여 여부가 아니라 어떤 능력을, 그리고 시민권력의원천이 될 어떤 대안을 지니고 있는가이다. - P177

여성들은 종종 근대성을 상징하는 존재가 된다.
1917년 케말 아타튀르크Mustafa Kemal Atatürk는 터키 혁명 당시 터키를 근대민족국가로서 구성하려는 목적에서 여성들의 베일 착용을 금지했는데, 당시 중동의 무슬림 근본주의자들이 베일 착용을 중요시해 온 만큼 이 정책은 중요했었다. 여성들의 군 편입도 이와 비슷한 역할에 충실했는데, 그 예로리비아나 니카라과, 에리트레아 Eritrea‘를 들 수 있다. 이러한 조건에서 여성들의 군 편입은 두 가지 메시지를 지닌다. 첫째는 여성이 적어도 상징적으로는 국가 집단체의 동등한 구성원이라는 점이다. 둘째는 아마도 더 중요한 문제일텐데, 국가집단체의 모든 구성원들이 적어도 상징적으로는 군에 편입되어 있다는 점이다. - P179

밸런타인 모가담(Moghadam,2000)은 혁명 운동을 두 종류로 구분했다. 첫째는 여성을 해방과 근대화의상징으로 이용하는 경우로, 여성들에게 군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것을 독려한다. 두번째는 여성을 간직해야 할 민족 문화와 전통의 상징으로 이용하는 경우로, 이때 여성들은 사실상 공식적 참여에서 제외되고 내조 역할의성격도 심하게 통제받는다.
그러므로 군에서의 여성의 신분을 전시/비전시, 전방/후방이라는 이분법의 언저리에서 구성한다는 것은 사회 내에서 여성성과 남성성을 이데올 - P188

로기적으로 구성한 결과에 더 가깝지 전투임무에 여성을 편입시키는 데 있어서 발생하는 객관적 어려움을 근거로 고려한 결정의 반영은 아니다. - P189

인구의 군사화는 사회 전반에 가정폭력을 비롯한 여러 폭력을 일으킨다는 사실이 종종 발견되곤 한다. 군대가 점차 현대의 정교한 산업복합단지와 유사해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명백히 공격과 복종의 원칙을중심으로 조직된다. 군이 사회에서 부각되면, 개인의 정체성과 개인 간의행위 및 젠더 간의 행위의 양식이 시민사회 내부에 확산될 수밖에 없다. - P193

남성을 공격적이고 폭력적이라 보는 본질주의적 구성은 민족주의-군사주의 신화와 잘 맞아 떨어진다. 즉, 남자들은 ‘여성과 아이들‘을 위해 싸운다(Enloe, 1990)는 ‘보호받는 이-보호하는 이‘의 신화(Stiehm, 1989)가 바로 그것이다. - P201

군에서의 젠더 관계에 대한 어떤 논의도 ‘여성‘과 ‘남성‘을 논하는 이러한 일반적 수준에 머물 수는 없다. 국가, 민족, 인종, 계급, 지역, 나이그리고 능력의 구분들은 군과 전쟁에서 특정 개인 및 여성 집단들의 위치설정에 남성들만큼이나 중요하다. 이들의 특정 사회 관계들을 고려하지 않고 여성이나 남성이 이러한 주요한 사회적·정치적 각축장에서 어떤 영향을 받는지를 이해하는 데 그친다면 그것은 부분적이거나 오해가 될것이다. - P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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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사회 - 우리에게 한국전쟁은 무엇이었나?
김동춘 지음 / 돌베개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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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책은 유독 기다림이 긴 경우가 있다. 물론 집에 있는 책 중 상당수가 비치만 된 채 손길을 기다리고 있기에 나의 주절거림이 변명처럼 느껴질 수 있겠다. 어쨌든 이 책도 그런 책 중 하나다. 그래도 이 책은 다른 책과 비교할 때 상대적으로 구입은 얼마 되지 않은 쪽에 속한다. 그렇다해도 오래 전부터 읽어봐야지 생각했던 책임에는 분명하다. 


우연히도 다른 책을 읽으려다 이 책을 이번에야말로 읽어야겠다 결심하게 되었다. 이처럼 독서의 계기는 얼마든지 만들어질 수 있다.

초판이 2000년, 개정판은 2006년이라 최신 자료가 반영되어 있지 않은 점은 감안해야 한다. 그렇다 해도 이 책은 독특한 위치성을 가진다는 생각을 했다. 저자가 밝히듯 기존에 한국 전쟁을 다룬 책은 그 기원과 배경, 전투 과정과 결과, 영향에 주목했다. 그에 반해 이 책은 한국 전쟁이 한국 사회에 미친 영향에 주목한 점이 다르다. 


우리는 한국 전쟁을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과연 그런가. 실상은 6월 25일 전쟁이 시작된 이후 9.28 수복, 1.4 후퇴, 흥남 철수 등 몇몇 전투를 외우고 목록화할 뿐이지 전쟁으로 인해 다치고 죽어간 사람들은 잊고 외면하지 않았던가. 전쟁이 한국 정치, 사회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끼쳤는지 우리는 피부로 느끼지만 사회적으로 언급하고 거론하는 것은 여전히 꺼리지 않나 싶다. ‘동족’이라는 단어가 구태의연하고 옛스럽게 느껴지지만 굳이 언급하자면 한반도 내에서 살던 이들이 색깔로 인해 구분되어 희생된 이들이 많았기에 그 뿌리 깊은 애증이란 쉽사리 떨쳐지지 않는 것이 아닌가 한다. 


이제는 6.25보다는 한국 전쟁이라는 명칭이 더 자주 불리는 것 같지만 여전히 남한 사람들에게는 전쟁의 휴전일보다는 개전일이 더 기억되고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 이는 정치권에서 남한이 전쟁을 도발한 북한과 공산주의를 문제시하고 국군 등을  영웅시하며 정치적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시민들에게 각인시키려는 의도가 숨어 있다고 여긴다. 


전쟁은 정치적 갈등이 폭력으로 극대화되어 발화된 사건이다. 정치는 경제와 사회와 따로 떼어서 생각할 수 없는 만큼 전쟁의 이면에는 경제와 사회가 있다. 한국 전쟁 이전 남북한은 미소군정 체제 경쟁 속에서 이루어짐으로써 안보 위기와 군사 대결을 내부 사회 통제로 이용했다. 한국 전쟁은 남북한이 협상에 의한 통일이 불가능해졌다고 판단한 상태에서 이루어진 선택의 결과물이었다. 이처럼 1부는 전쟁이 곧 정치이며, 경제와 사회를 들여다보는 것이 중요함을 이론적으로 설명해준다.


이 책의 핵심은 2부부터 4부까지의 내용이라 생각한다. 


2부는 전쟁이 시작되고 나서 피난을 앞둔 상황을 보여준다. 이승만을 비롯한 최고위층은 국민을 기만하고 수도를 버렸지만 말단 지배층과 군 장성 및 병사들은 본인의 자리를 지키며 국민을 보호하려 애썼다. 인민군이 수도에 가까워진 만큼 국군 통수권자가 잡혀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이해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국군의 대응이 잘 이루어지고 있으니 국민은 자리를 지킬 것을 종용하며 정작 본인은 달아나는 행태는 결코 용서할 수 없는 일이라 생각한다. 개전 초 군대의 대응이 혼란스러웠던 반면 이승만을 비롯한 권력층, 미군은 북한의 동태를 잘 알고 있었다. 다만 미군은 북한이 쳐들어오기 전 자국민을 일본으로 대피시킨 반면 남한 정부는 그런 준비를 일절 하지 않았다. 이승만과 자유당은 5.10 총선거에서 참패한 뒤 재기를 노리고 있었는데, 전쟁은 불리한 형세를 뒤집을 찬스 중 하나였다.

1차 피난이 정치적인 선택에 의한 것으로 정치적, 계급적 동기에 의해 지배층 중심으로 이루어졌다면 2차 이후 피난은 생존을 위한 피난으로 미군의 무차별 폭격을 피해, 1.4 후퇴 이후 남한 정부에 협력한 것으로 인민군에게 보복 당할 위협 때문에 대규모 민중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3부는 남한과 북한이 본격적으로 전투를 전개하며 점령이 교체되는 동안 벌어진 상황을 다루고 있다. 북한은 남한에서 소작인 등 하위층을 중산층으로 끌어올리고 기존의 지주 계급을 타파시키려는 정책을 펼치려 했다. 그러나 김일성 정부는 인민군은 남한 국가 기구 핵심 구성원인 군인, 검사, 경찰, 우익 단체, 정당 간부 등을 반동 분자로 몰아 처형했다. 남한 정부도 서울 수복 후 서울에 남아 있던 사람들을 사상을 문제 삼아 부역자로 간주해 처형했고, 부역자의 가족과 친지는 1980년대까지 연좌제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이같이 반복되는 정복과 해방의 과정에서 국민은 무척 혼란스러웠을 것 같다. 어느 날은 태극기가, 어느 날은 인공기가 걸려 있는 상황에서 대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말이다. 


4부는 전쟁 시기 벌어진 학살의 참상을 다룬다. 학살은 군경에 의한 작전에 의한 것, 인민 재판과 군의 재판권 행사에 따른 것, 군경이나 준군사 조직에 의한 비공식 작전에 의한 것, 사적인 보복에 의한 것처럼 그 형태가 다양했다.충북 영동 노근리 학살이나 북한의 신천 학살, 미군의 공중 폭격 등에 의한 피해는 대표적인 공식 작전에서 나온 학살이다.

보복으로서의 학살은 단지 이념 간 대립에 의한 것이 아니라 원수가 된 개인과 가족, 씨족 간에 발생하여 그 참담함을 더한다. 특히 이 경우 공식적으로는 사적 테러를 묵인, 방조하는 과정 속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더 안타까운 것 같다. 

학살은 국가 건설 과정 속에서 혁명이라는 미명 아래, 남북 간 내전의 형태로 이루어졌다. 게다가 시간이 더할수록 반공주의의 색깔론이 덧칠해지며 반역자를 처단한다는 오명 하에 심해진 측면이 강하다고 여긴다.


저자는 한국 전쟁을 국가주의 틀에서 벗어나 인간의 생존권과 평화적 관점, 탈냉전 정치 공동체적 전망 속에서 새롭게 접근해야 한다고 말한다. 한국 전쟁은 분단 이후 현대 한국의 국가와 정치, 사회를 구조화한 출발점이 된 사건이었다. 물론 전쟁 이전 1945년부터 5년 가까운 시간 동안 벌어졌던 여러 사건들이 전쟁의 도화선이 된 것은 알려진 사실이다. 그럼에도 지배층에 의한 강요된 관점이 아닌 대중의 목소리와 실체를 통해 전쟁이 재구성되어야 함은 나도 동감하는 바다.

 

대다수의 국민을 피해자로 만들어 버린 한국 전쟁은 국가, 영토, 주민을 그야말로 초토화시켰다. 요즘 남북한의 위험한 줄타기를 보고 있으면 가슴이 철렁할 때가 한 두번이 아닌지라 이 책을 읽는 마음이 무거우면서도 한편으론 의미가 있는 독서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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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과 사의 경계 구성 그 자체가 정치행위다. 고유한 역동성을 지닌 정치권력 관계는 일차적인 사회 관계 안에서뿐만 아니라 보다 비개인적이고 이차적 사회 관계들인 민간 영역과 정치 영역 안에서도 작용한다. - P149

학문 안에서처럼, 정치 안에서도 ‘상아탑‘은 없다.
횡단의 정치는 차별적인 입장에 처한 이들에 의해 이뤄지는 대화를 통해 습득한 지식에 기초하여, 정착과 이동의 기술을 이용하고 나서, 풀뿌리운동의 수준에서든, 국내에서든, 초국가권력의 중심에서든, 모든 정치활동주의에 대한 지침서가 되어야 할 것이다.
시민권은 사회 영역과 정치 영역 모두에 걸쳐 있다. 사회적 조건들을
‘가능하게 해주지 못하는 정치권은 공허할 뿐이다. 동시에 의무가 없는 시민권 권리 역시 사람들을 소극적이고 의존적인 존재로 구성할 수 있다. 시민의 가장 중요한 의무는 그러므로 자신의 정치권을 행사하고 자신의 집단체, 국가, 사회의 궤적을 결정하는 데 참여하는 것이다. - P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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