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오주의 - 전 세계를 휩쓴 역사
줄리아 로벨 지음, 심규호 옮김 / 유월서가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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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혁명의 역사와 영향(과 평가)로서의 마오주의를 다루는 책이다. 현대까지 마오주의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인지 그 기원을 살피고, 마오쩌둥을 비롯한 전 세계에 퍼져 있었던 마오 키즈를 소환한다. 마오주의를 글로벌적 관점에서 바라보자는 시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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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 동안 글을 써야지 해놓고 게으름 피우다 타이밍을 놓쳐서 이제야 글을 쓴다.

시간이 너무 빠르다는 이야기를 하기도 이제 민망할 정도다. 어영부영 하다보니 벌써 한 해의 반이 흘러버렸고…
요즘은 양이든 질이든 책을 마음껏 읽지를 못하는지라 더 시간이 속절 없이 흐른다는 느낌이 든다.

금요일에 미쳐서 두 차례에 걸쳐 책을 주문했다. 사실 한 번에 구매해도 되었을 걸 커피 쿠폰 때문에 2번이 되었다^^;
특히나 요즘은 스트레스 받으면 책 주문을 하게 되는 것 같다. 이제는 좀 한숨 놓겠지 생각했는데 금요일에 일이 터져서는 이리 되었다.

<뭉우리돌의 **> 시리즈는 해외에서 활동한 독립운동 사적지에 대한 이야기인데 앞으로 시리즈가 더 나오지 않을까 싶었지만 일단 먼저 샀다.
<미들마치 2>는 앞선 1권에 이어 읽으려고 샀다.
<한국전쟁> 정병준 선생님 작은 진작 샀어야 할 것을 이제야 샀다. 한국전쟁 관련된 책이면 어김없이 레퍼런스로 언급되는 책이므로 더는 미룰 수 없다 생각했다.

그리고 펀딩을 한 책이 있는데 이 두 권이다.
<마오주의>는 주말 동안 읽었고 리뷰가 남았다.
<한국 여성문학 선집 세트>는 기획만으로 안 살 수가 없는 책이었다. 목차가 있었으면 고르는데 도움이 더 되었겠지만. 이미 서재 친구분들 중에서도 펀딩한 분이 있는 것으로 안다. 모쪼록 잘 나오길.











요즘은 솔직히 드라마를 훨씬 많이 본다. 집중력도 떨어져서 책을 오래 붙잡고 있지를 못하는 것 같다. 이런 식으로 읽기든 쓰기든 퇴화되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드라마를 보면서 좋았던 노래를 찜해 놓았다 샤잠을 통해 검색하고 오며 가며 듣는다.
머리 식히기에 딱 좋다.


이 곡은 매번 들어도 좋고 청량해서 자주 듣는다. 이 가수 발음이 또렷해서 공부하기에도 좋은 것 같다.




그리고 산책하며 찍은 사진들도 덤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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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괭 2024-07-01 16:1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스트레스 받으면 책 주문 ㅠㅠ 흑흑.. 화가님, 스트레스 때문에 책 주문했는데, 이왕 주문한 거, 주문한 후에 그것 때문에 다시 스트레스 받지는 말자구요~!

거리의화가 2024-07-02 12:53   좋아요 1 | URL
다들 그러지 않을까 싶어요^^; 요즘은 잠들기 전에도 일로 머리가 지끈할 때가 많아요ㅠㅠ 말씀하신대로 구입은 구입한 것으로 만족하고 못 읽는다고 스트레스 안 받으려고요! 응원의 말씀 감사합니다.

공쟝쟝 2024-07-01 22: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푸릇푸릇! 마오주의 북펀딩하는 거 눈여거 봤는데 궁금해요! 화가님의 리뷰 기다려요~!

거리의화가 2024-07-02 12:54   좋아요 0 | URL
오늘은 비가 와서 그나마 시원하네요. 푸릇푸릇해서 여름이란 생각을 합니다. 좀 무덥기는 하지만^^;
마오주의 방금 리뷰 올렸습니다. 쟝님께 도움이 되면 좋겠네요.

다락방 2024-07-02 08: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이번 책들은 다 두께가 좀 있네요. 시간이 빨라도 산책은 놓지 않고 지내기로 합시다, 거리의화가 님. :)

거리의화가 2024-07-02 12:55   좋아요 0 | URL
그러고 보니 두께가!ㅎㅎ 뭉우리돌은 생각보다 더 두꺼워서 놀라기는 했습니다.
몸이 오락가락해서 덜 걸었는데 다시 열심히 걸어보려고 합니다. 덥기는 하지만 더울 때 산책은 또 다른 묘미가 있으니까요. 건강 잘 챙기세요!
 

1942년의 ‘정풍운동‘은 마오쩌둥이 1941년 공산당 최고영도자가된 이후 처음으로 당내 기율을 확립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신중하고 철저했으며 또한 복잡했다. 공산주의 테러의 체계 내부는 물론이고 외부에도 이러한 정풍운동을 서술하거나 설명하는 다양한 방식이 존재한다. 예를 들어 왕스웨이를 처리하는 방식은 스탈린식의 마녀사냥이라는고전적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 공격 목표를 고립시키고 왕년의 동료들을 비판공격에 가담하도록 권유하며, 대중집회(중국의 군사적 용어로 말하자면비판투쟁대회이다)를 개최하여 공개적으로 ‘적‘에게 굴욕을 가함으로써 다른 이들이 이와 유사한 행동을 하지 못하도록 경고하고, 강제적으로대중의 집단적 조롱을 유도하는 것 등이 그러하다. 이를 통해 ‘정풍운동‘은 "역사상 가장 야심찬 인간조작 human manipulation 시도 가운데 하나로 바뀌었다. " - P69

에드거 스노는 마오주의 역사에 등장하는 첫 번째 주인공이다. 왜냐하면그가 없었다면 중국 내외의 마오쩌둥에 대한 숭배를 상상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중국의 붉은 별이 시공간을 초월하여 막강한 영향력을 지녔음을 결코 과소평가할 수 없다. 20세기 미국에서 가장 탁월한 신문기자의 보도물가운데 하나라는 칭송을 받은 이 책은 중국 공산주의 운동과 마오쩌둥을 둘러싼 추종자들과 여러 교조적 원칙을 인간적으로 묘사하기 위해 명목상의최고영도자(마오쩌둥)를 창조해냈다. - P100

미국에서 중국인들의 세뇌에 관해 암시적인 분위기를 조성한 것은 미군들이 한국전쟁에서 포로로 잡혀 있던 기간에 발표한 에드워드 헌터의 저작물에 상당 부분 기인한다. 헌터는 자신의 생각을 한국전쟁 당시 중국의 위협에 국한시키지 않았다. 그가 진단한 중국의 위협은 세계적인 범위까지 확대되었다.
붉은 중국의 세뇌』는 그가 말한 중국의 영향력과 세뇌의 ‘궤적‘을 따라전후 말라야 정글과 베트남의 반식민지 갈등까지 깊이 파고들었다. - P144

1960년대 중국의 국내 선전 매체에는 세계 혁명에 대한 언급으로 넘쳐났다. 영화와 다큐멘터리, 심지어 음악과 수학 교과서, 연극과 보드게임에 이 - P205

르기까지 중국의 지도자가 세계 혁명의 공동체를 영도하는 형상으로 가득찼다. 1960년대 중반에 성인이 된 세대는 특히 이러한 선전을 잘 받아들였다.
중국 신문 및 방송 매체는 도처에서 그들 부모 세대가 참전하여 누렸던영광스러운 군사적 희생(제2차 세계대전, 국공내전, 한국전쟁)을 그들도 놓칠 이유가 없으며 세계 무장투쟁의 혁명가가 될 수 있다고 끊임없이 말했다. - P206

1966년 마오쩌둥은 ‘수정주의‘에 대한 국내외 투쟁을 통해 문화대혁명을 야기하여 국내의 정적, 특히 1962년 대약진이라는 급진적 비전을 끌어내린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을 공격하는 데 활용할 수 있었다. 마오쩌둥은 소련에서 훈련받았거나 소련의 영향을 받은 중국 관료 집단이 중국 혁명과 세계혁명 모두에 내부 이데올로기적 위험을 초래한다고 믿었거나 적어도 그럴것이라고 주장했다. 만약 국내 수정주의자들과 국외 수정주의자들이 결탁하여 우위를 점한다면 중국 정부를 잠식하여 적지 않은 이들이 중국 인민과국외의 혁명에 등을 돌릴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마오쩌둥과 그의전 세계 신도들이 애용했던 이른바 ‘두 노선의 투쟁兩個路‘이론, 즉마오쩌둥의 지속적인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수정주의자들의 부르주아 반동 노선 사이의 투쟁이다. 마오쩌둥은 중국에서 소련의 영향력을 근절시키기 위해 신속히 문화대혁명을 개시했다. 소련의 영향을 받은 수정주의자들이 득세할 것이라는 두려움은 외국(소련이나 서방)과 연계되었다고 의심되는 사람에 대한 폭력과 중국 사회의 군사화에 정당성을 부여했다. - P209

1965년 9월 대학살 전야에 인도네시아 사회는 극도로 분열된 상태였다.
한쪽에는 지역 엘리트들과 지주, 무슬림 지도자들이 포진하고 다른 한쪽에는 공산당 조직과 긴밀하거나 또는 느슨하게 연결된 사람들이 자리했다. 군부와 인도네시아공산당 사이의 권력 양극화로 인해 민간인들은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했으며, 이로 인해 발생하는 균열(적어도 사람들의 마음속에 느껴지는 균열)은 이후 1965년부터 그 이듬해까지 이어진 폭력을 더욱 극성스럽게 만들었다. - P250

마오쩌둥이 살아 있을 당시 중국이 아프리카에 많은 원조를 했다는 것은분명 사실이나 그 수치를 정확하게 산출하기는 어렵다. 다만 분명한 것은 부실 대출이 너무 많았고 예산을 초과한 특별 지원이 지나치게 많았으며 임무가 종료된 후에도 여전히 아프리카에 남아 있는 기술자나 고문단이 너무 많았다는 점이다. - P310

로버트 무가베의 무자비한 권력에 대한 집착은 그를 몰락 당시 세계에서가장 오래 재임한 국가 원수로 만들었고, 국가는 그 대가를 치러야만 했다.
그러나 마오주의는 짐바브웨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 1970년대까지 문혁시대의 전략이 ZANU의 정치와 군대를 지배했다. 하지만 그것은 심각한 결함이 있는 정치 모델이었다. 페루나 인도, 네팔의 경우에서 재차 확인할 수 있다시피 ‘고등 마오주의‘는 국가를 전복시키는 데 유효한 군사전략을 제공한다. 하지만 일단 집권한 후에는 매우 문제가 많다. 통고가라 등이 1960년대에 학습한 마오주의는 ZANU에게 당과 당의 최고 지도자가 항상 옳고 당이
‘인민의 적‘으로 지목한 자들을 절명시킬 수 있으며, 군사적 이익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음모로 가득 차고 전체주의적인 정치 모델을 남겨주었다. - P318

미국정책 입안자들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로 분열된옛 인도차이나의 공산당들이 용의 진격에 환호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결과는 그렇지 않았다. 중국, 베트남, 캄보디아는 도미노 이론에 대해 각기 다른 해석을 내놓았다. 중국 지도자들은 베트남과 인도차이나의 다른 지역을 ‘세계 혁명‘의 도미노로 간주했으며, 종종 이러한 영토를 중국 이익의자연스러운 확장이라고 독단적으로 말하곤 했다. 베트남인들은 인도차이나가 중국의 도미노가 될 것을 두려워했고, 캄보디아와 중국은 베트남이 인도차이나 반도를 지배하려는 야망을 가지고 있다고 의심했다. 1960년대 서방의 정책 입안자들은 베트남인들이 수천 년은 아닐지라도 적어도 수 세기 동안 중국 제국을 팽창주의 세력으로 간주하고 이에 대해 불만을 갖고 분개했다는 사실을 무시하거나 경시했다. - P326

서유럽과 미국 전역에서 문화대혁명의 마오주의는 진지한 반제국주의만이 아니라 젊은이들의 반란을 의미하기도 했다. 마오주의 열풍이 불었던 각나라에서 젊은이들의 저항 운동은 개인적, 지역적, 국제적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문화대혁명은 불만을 품은 이들, 특히 젊은이들에게 "반란에는 이유가 있다." "젊은이들은 활력과 생기가 넘쳐 마치아침 8시나 9시의 태양과 같다. 세상은 당신들의 것이다"라고 부추겼다. 1969년 서베를린에서 열린 사민당 반대 집회에서 학생들은 자신들이 임의로 개사한 구호를 힘차게 외쳤다. "당신들은 늙었고, 우리는 젊다. 마오쩌둥!"
문화대혁명이 많은 미국 학생들에게 영감을 준 것은 그들의 반체제 운동과 맞닿아 있었기 때문이다. - P404

1980년대 초의 페루는 1930년대 중국과 확연히 달랐다. 페루는민주국가였고, 인구의 3분의 2가 도시에 거주했으며, 페루인의 4분의 3이 글을 읽을 수 있었다(1950년대 중국은 도시에 거주하는 식자층이 전체 인구의 10분의 1에 불과했다). 전기 기술자, 농학자, 인류학자, 외국 비정부조직, 시민사회 복지 활동가 등이 페루의 생활 개선을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했다. 마오주의의 이념에 따르면, 가장 빈궁한 농민들이 혁명의 중추가 된다고 했지만 페루에서 농민들은 인디언들조차 그들 나름의 권력 구조를 갖추고 있었으며, 그중 일부는 백인이나 메스티소 위주의 센데로의 지배에 격렬하게 저항했다. - P475

남아시아의 마오주의 현상은 두 가지 중요한 점에서 전 세계 마오주의에 - P490

대한 이미지를 보다 분명하게 드러낸다. 우선 그 사상이 국경, 민족, 언어, 사회를 넘어 사방으로 퍼져나가는 놀라운 전파력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남아시아에서 문화대혁명의 이론과 실천은 국가와 사회를 지속적으로 변화시켰다. 인도와 네팔의 마오주의파 지도부는 사회적 구성에서 지금은 우리에게 익숙한 패턴을 따랐다. 페루, 캄보디아, 서유럽, 미국에서와마찬가지로 남아시아 마오주의의 지도부 역시 교육받은 엘리트층에서 나왔다. 그러나 인도(그리고 이후 네팔)의 마오주의는 이러한 정치 계획이 카멜레온처럼 수시로 변화하는 속성을 지녔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서독에서와 마찬가지로 마오주의정치는 사회 저변의 불만과 결합했다. 그러나 인도의 마오주의자들은 탈냉전 시대에 냉전 이데올로기에 기반한 정치운동을 구축하는 데 성공한 것처럼 보였으나 오히려 그들은 이러한 신조의 약점을 드러내고 말았다. 다시 말해 인도 마오주의자들은 자신들이 가난한 농촌을 고통에서 해방시키겠다고주장했으나 오히려 빈곤한 농촌사회가 더욱 심각한 폭력에 시달리게 만들었다는 뜻이다. - P491

네팔 마오주의의 급진적 비전은 20세기 두 가지 우연한 사건에서 기인한다. 그 하나는 1940년대에서 1950년에이르기까지의 급격한 전환(예를 들어 남아시아의 탈식민지화, 중국의 공산주의 혁명, 네팔 라나Rana 왕조의 종말 등)이고, 다른 하나는 1960년대 후반에 시작된 문화대혁명과 그 여파이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이 야기한 장기적영향을 이해하지 못하면, 프랜시스 후쿠야마Francis Fukuyama 가 공산주의에 대한자본주의의 결정적인 승리로 인류가 ‘역사의 종말‘에 이르렀다고 선언한 지7년 만인 1996년 역설적으로 마오주의 반란이 분출한 것을 이해할 수 없다.
1951년 네팔의 농촌에 거주하는 불만 세력과 인도로 망명한 네팔인들이연합하여 군사 정변을 일으켰다. 그들은 한 세기 동안 카스트제도에 기반한사리사욕에 착취를 일삼던 과두 정권을 앞세워 국가를 통치한 라나 왕조를권좌에서 몰아냈다. - P541

1960년대를 지나면서 보시라이는 충칭으로 가서 놀라운 정치적 실험을 단행했다. 이는 마치 마오쩌둥이 사망한 지 거의 40년이지난 지금, 중국공산당에게 마오의 시대는 대중을 끌어들이고 정서에 호소할 수 있는 홍가(공산당 혁명 가요)와 같은 상징을 제공했다고 말해주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 그들은 마오주의가 빚은 역사적 트라우마를 과거라는 상자에 가두어 두면서 이를 활용할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 P616

그의 흥망성쇠는 중국에 심각한 흔적을 남겼다. 그의 구속으로 중국 부패에 대한 외국 언론의 탐사보도가 시작되었고, 그 결과 구카이라이의63친척들이 1억 2600만 달러를 몰래 빼돌렸고, 이 중 27억 달러가 당시 총리인 원자바오의 가족에게 흘러들어간 사실이 밝혀졌다. 보시라이 사태직후 중국 당국은 보시라이의 ‘충칭 모델‘을 열렬히 지지했던 대중 좌파 오유지향을 폐쇄했다(많은 사이트가 몇 달 후 재허가를 받고 다시 개설되었지만 전반적으로 분위기는 매우 저조했다). 그러나 보시라이는 공개적으로 마오주의 가치관에 찬사를 보내는 새로운 공간을 창출한 셈이 되고 말았다. 보시라이가 숙청되고 2012년 11월 그와 마찬가지로 관이대(공산당 고급관리의 제2세대)인 시진핑이 중국공산당 총서기에 올라 마오주의 가치관을계승했기 때문이다. - P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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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니오 크뢰거 (- 토마스 만)

어떤 면에서는 소름이 끼치는 것이 사람에 대한 실망, 또는 사랑에 대한 실패나 열패가 예술성에 대한 숭고함으로 포장되며(!)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 것에 칼을 휘두를 지 모를 일이라는 생각이 잠시…
이것이 군국주의나 제국주의와 연결되면 잘못된 방향으로 흘러갈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했다.

어쨌든 삶을 잘 살아내는 일은 중요하다는 생각이고 치열한 삶만큼 아름다운 것은 없다는 생각을 한다.
에술 작품이 아름답기만 해서는? 글쎄???

그는 대충 되는대로 한결같지 않은 태도로, 혼자 휘파람을 불며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고 먼 곳을 바라보면서 자기가가야 할 길을 갔다. 그런데 그가 잘못된 길을 갔다고 한다면, 그 이유는 어떤 사람들에게는 올바른 길이란 아예존재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대체 뭐가 되고 싶으냐고 물으면 그는 그때그때마다 대답이 달랐다. 실은 속으로는 이것저것 다 불가능한 것투성이라고 남몰래 생각하면서, 수천가지의 존재 형식으로 살아갈 수 있는 가능성을 자기 속에지니고 있다고 말하곤 했다(그리고 이미 이런 사실을 글로적어 놓기도 했다)..………….. - P39

그는 살기 위해 일하는 사람처럼 일하는 게 아니라, 일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사람처럼 일했다.
그는 살아 있는 인간으로서의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라고치부하고, 오직 창작자로만 간주되기를 바라며, 그 밖의경우에는 있는 듯 없는 듯 눈에 띄지 않게 돌아다녔다. 배우가 분장을 지우고 연기도 하지 않을 때는 아무런 존재아니듯이 말이다. 그는 말없이 세상을 등지고 눈에 보이지않게 일하면서, 재능을남과 어울리기 위한 장식품으로 생각하는 소인배들을 한없이 경멸했다. 이들은 가난하든 부유하든 상관없이, 해진 옷을 아무렇게나 입고 돌아다니거나, 개성이 넘치는 넥타이를 매고 호사를 떠는 자들이었다.
무엇보다도 이들은, 훌륭한 작품이란 곤궁한 삶의 압박에시달릴 때에만 생겨나고, 생활하는 자는 창작할 수 없으며완전한 창작자가 되려면 죽어야 한다는 사실을 모르고서행복하고 근사하게 예술가처럼 살겠다고 작정하는 자들이었다. - P44

당신은 <길을 잘못 든 시민>입니다.
토니오 크뢰거- <길을 잃고 헤매는 시민>이지요.」침묵의 시간이 흘렀다. 그러다가 그는 단호한 태도로 일어서더니 모자와 지팡이를 집어 들었다.
「고맙습니다. 리자베타 이바노브나 이젠 안심하고 집에 갈 수 있겠습니다. 난처리되었으니까요.」 - P68

그는 반어와 정신에 갉아 먹히고, 인식에 의해 황폐해지고 마비되었으며,
창작의 열기와 한기에 반쯤은 닳아 없어진 자신을 보았다.
불안정하게 양심의 가책을 받으며 극단적인 양극 사이에서, 성스러움과 욕정 사이에서 이리저리 내던져져 세련되지만 빈곤해진 자신을 보았다. 인위적으로 차가운 흥분상태를 만들어 기진맥진해진 자기 자신, 그리고 길을 잘못들고 황폐해지고, 번민하느라 병들어 버린 자기 자신을 보았다. 그는 회한과 향수에 젖어 흐느껴 울었다. - P122

정말이지 온갖예술성, 온갖 남다른 것, 온갖 천재성에서 무언가 말할 수없이 모호하고 수상쩍으며 의심스러운 것을 알아차리도록 해주는 것이 나의 시민적인 양심입니다. 그리고 나로하여금 단순한 것과 진실한 것, 유쾌하고 정상적인 것, 천 - P124

재적이지 않은 것과 예의 바른 것에 대한 사랑에 빠지게 하는 것도 나의 시민적인 양심입니다.
난 두 세계 사이에 서 있어서, 어느 세계에도 안주할 수없습니다. 그래서 살아가는 게 좀 힘이 듭니다. 당신 같은예술가는 나를 시민이라고 부르고, 시민들은 나를 체포하고 싶은 유혹을 느낍니다....... 둘 중에 어느 쪽이 더 내마음에 쓰라린 상처를 안겨 주는지는 모르겠습니다. - P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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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더와 민족 트랜스 소시올로지 11
니라 유발-데이비스 지음, 박혜란 옮김 / 그린비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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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 민족주의, 반인종차별주의 같은 정체성의 정치(의 한계)에서 벗어나 횡단의 정치로 나아가자는 주장이다. 횡단의 정치는 자기 중심을 옮겨가며 선회하되, 가치와 목표를 공유하며 나아가는 것이라고(일괄적인 것이 아니다). 특히 문화, 시민권, 군대에서의 젠더 관계를 흥미롭게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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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4-06-25 16: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너무나 어렵습니다 ㅠㅠ

거리의화가 2024-07-01 13:33   좋아요 0 | URL
다락방 님 완독 고생 많으셨어요^^ 특히나 어려웠던 책이었던 것 같습니다.

단발머리 2024-06-25 18: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밑줄을 정체성의 정치를 벗어나자!에 그어야 한다고 생각했거든요. 거리의화가님 100자평에 안심이 되네요.
우리 모두 이 어려운 책 읽느라 고생 많았습니다ㅠㅜ

거리의화가 2024-07-01 13:34   좋아요 1 | URL
맞아요 단발머리 님. 잘 이해하신 것 같은데요? 더불어 저는 마지막 장에 총체적인 정리가 있어서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ㅎㅎㅎ 완독하느라 정말 고생하셨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