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한국의 가부장제에 관한 해석적 분석

1. 조선의 가부장제
여성은 어머니로서만 인정되었다. 그러나 조선 중기 이후 강한 생활력, 적극적 지탱자로서 여성의 역할의 폭이 확대되었다.

조선후기 경제활동이 없는 남성들을 대신하여 여성의 활동이 넓어졌다는 분석이 흥미로웠다. 단, 정치적 활동이 아닌 경제적 활동 위주였다.

’자궁 가족‘은 번역한 용어가 와 닿지는 않았다.

2. 근현대 가부장제
근대 초기 여성의 권한은 높아졌으나 중심 가치는 신분 의식, 가부장제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고 자본주의 이데올로기가 더해졌다.
현대는 현모양처 이데올로기가 정착되며 여성의 나약화, 한편으로는 자립화가 이어졌다.

남아선호가 일방적으로 여성이 강요받았던 측면이 컸다고 생각했는데 여성이 자발적으로 유리함에 의해 선택했다는 측면은 약간 놀랍기는 했다. 하긴 예전에는 딸은 시집을 가면 그만이라고 나조차도 그런 이야기를 심심치 않게 들었었다. 내 어머니조차도 할머니께서 아들을 둘 반드시 낳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어도 남성이 집에 있어야 한다는 그런 의식이 당연히 작용했을 거라 생각한다.

공식적인 부자 관계에 대비된 가족적 모자 관계 내지 ‘자궁 가족‘을 통해 여성은 상당한 권한을 가질 수 있었다. 특히 유교 윤리의 실천이 사회적 지위 상승에 중요한 변수로 부각됨에 따라, 여성은 적극적 행위자로서 ‘열녀‘ ‘효녀‘ 등의 공적 인정을 받을 기회가 생겼으며, 또한 ‘선비상‘을 이상으로 하는 사회에서 ‘세정‘을 모르는 남성의 보완자로서 경제 생산적 활동을 포함하여 일상 생활을 꾸려가는데 있어서 여성 역할의 비중은 매우 컸다. 여성은 어려운 단절적인시집살이를 이겨나가야 했던만큼 성취적이고 강한 인성을 지니게 되었으며 여성만의 안채 문화는 그들 나름의 갈등과 불만을 해소하는기능을 수행하여왔다.
궁극적으로 혈통을 극도로 중시한 당시의 체제에서는 대가족내의연장자이자 혈통 계승자의 어머니로서 여성의 지위와 활동에 상당한권한을 부여한 셈이며 여성들은 이 여자를 십분 활용하여 가부장제의 유지를 적극적으로 도와왔던 것이다. 여성이 인격으로서가 아니라 어머니로서만 인정되었다는 점과 여성 자신들이 조선 중기 이후의 붕괴하여가는 체제를 강한 생활력으로 보완하며 적극적인 지탱자가 되어왔다는 점을 이해하는 것은 가부장제의 현대적 변형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 P100

한국 사회에서의 가부장제 극복의 과제가 무엇인지는 매우 분명해진다. 첫째는 조선 시대로부터 사회 구성의 이념적 기본이 되어온 엄격한 공공/가정 그리고공/사"에 대한 인식, 그리고 그런 인식을 토대로 형성되고 재형성되어온 사회적 관계 구조, 특히 성과 부권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두번째는 새롭게 확대되고 있는 산업 자본주의적 여성 통제의 기제즉, 미시적으로는 낭만적 사랑에 근거한 핵가족 이데올로기와 거시적으로는 국가 및 기업 등 조직의 확대에 따라 더욱 강화되는 인간의도구화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나갈지가 문제가 된다. - P127

울프 Wolf(1972)는 중국 여성의 삶에 성취적· 획득적인 성격이 두드러진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자궁 가족 uterine family‘ 의 개념을 소개하였다. 남편의 집에 편입된 가장 낮은 지위에 있던 젊은 여성은점차 자신이 낳은 ‘핏줄‘을 이 집안에 더해감으로써 자신의 세력권을구축해간다. 자궁 가족내에는 자신이 낳은 자녀들과 며느리가 포함되며 남편은 별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지 못한다. 이 가족은 먼 조상까지를 포함하여 연속성이 중시되는 남성들의 가문과는 별 관계가없는 사적인 가족으로 어떤 뚜렷한 이데올로기나 형식적인 구조도갖고 있지 않다. 가족 유대는 주로 감성과 충성심에 기초한 것이나, 주목할 점은 그것이 구성원에게 공식적 가족 못지않은 구속성을는다는 점이다. 울프(1972: 37~38)는 여성을 철저히 배제시킨 것으로 보이는 유교적 가부장제가 여성을 상당히 성공적으로 흡수할 수있었던 근거는 바로 자궁 가족과 공식적 가족의 목표가 다행스럽게도‘ 잘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 P8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9월에 車駕가 궁중으로 돌아왔는데, 황제가 執金吾 寇恂에게 이르기를"
潁川지방은 京師(洛陽)와 매우 가까우니, 마땅히 제때에 평정하여야 한다. 생각건대 오직 만이 평정할 수 있으니 九卿으로부터 다시 外職으로 나가서國事에 매진하는 것이 가하겠는가?" 하였다. 恂이 대답하기를 "潁川의 도적들이 폐하께서 隴과 蜀을 정벌하시는 일이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 때문에 미친 자들이 틈을 타고서 서로 속이고 그르친 것일 뿐이니, 굳이 병력을 동원하여 토벌하지 않아도 만일 乘輿가 남쪽을 향해 오신다는 말을 들으면 도적들이 반드시 두려워하여 명령을 따를 것이니, 신은 원컨대 예리한 병기를 잡고 선봉이 되겠습니다." 하니, 황제가 그 말을 따랐다.
庚申日에 車駕가 남쪽을 정벌하니, 潁川의 도적이 모두 항복하였다. 寇恂이 끝내 郡守에 임명되지 않자, 백성들이 길을 가로막고 말하기를 "원컨대폐하로부터 寇君을 다시 1년 동안 빌리고자 합니다." 하였다. 이에 寇恂을 長에 남겨 두어 관리와 백성들을 鎭撫하게 하고 나머지 항복하는 자들을받아들이게 하였다.

東郡과 濟陰에도 도적이 일어났으므로 황제가 李通과 王常을 보내어 이들을 공격하게 하였는데, 耿純이 일찍이 東郡守가 되어 위엄과 신의가衛지역(東郡)에 드러났다 해서 使를 보내어 耿純을 太中大夫로 임명하여 軍과 東郡에서 만나게 하였다. 東郡에서는 耿純이 경내로 들어온다는 말을 듣고는 도적 9천여 명이 모두 耿純에게 나아가 항복하니, 大軍이 싸우지 않고돌아오자 親書를 내려 다시 耿純을 東郡守로 임명하였다. - P30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노마드 - 문명을 가로지른 방랑자들, 유목민이 만든 절반의 역사
앤서니 새틴 지음, 이순호 옮김 / 까치 / 2024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주말에 영화 <노매드랜드>를 보았다. 몇 달전 봐야겠다고 생각을 했었지만 놓쳤었는데 이번에 책 <노마드>를 읽으면서 자연스레 떠오른 것이다. 사실 책의 내용과 영화 내용은 관련이 없다. 그렇지만 연결되는 지점은 있다. '떠나는(방랑하는) 삶'에 대해 생각해볼 거리를 던져준다는 점에서 그렇다. 몇 년전부터 부쩍 몸이 하나둘씩 고장이 나고 회복 속도가 느려지는 것을 느끼면서 나이듦을 절실히 느끼고 있다. 만남보다는 헤어짐이 더 많아진다는 것도 그렇다. 그러면서 죽음을 생각할 때가 많은데 가능하면 가까운 사람들과 덜 아프게 헤어지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죽음을 목전에 둔 이, 자식 등 가까운 사람들을 먼저 떠나 보낸 이들 등 상실을 경험한 사람들이 영화의 등장인물들로 나오는데 보면서 느끼는 바가 많았다. 그동안 어딘 가에 주거하며 정착하는 삶이 안정적인 것이라고, 당연하다고 생각해왔다. 그런데 20년을 넘게 일하면서도 내 집 하나 없는 지금의 삶은 이미 그런 이상과는 거리가 멀어져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다. 영화에서도 은퇴하면 여행하려고 요트를 사두었으나 어느 날 병을 얻어 죽는 바람에 요트는 쓸모 없는 것이 되어버린다. 그러면서도 가진 것들을 놓은 채 훌쩍 떠날 수 있을까 고민이 되었다. 자원의 소비와 순환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거리가 많았다. 지구의 자원을 쓸 줄만 알았지 이를 자연에 어떻게 돌려주어야 할 지 고민하지 않는 민망한 지구인으로 살면서도 깨닫는 바가 없다면 이 지구는 앞으로 누가 책임질 것인가에 대해서 말이다. 영화 속 풍경은 슬프도록 아름답다. 영화관에서 더 큰 화면으로 보았다면 훨씬 좋았겠다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너른 하늘과 대지는 복잡한 도시에서 살아가는 나란 인간이 얼마나 작은 존재인가 느끼게 만든다. 


<노마드>의 저자는 21세기 이란의 자그로스 산맥에 방문하여 경험한 바를 책의 서두와 말미에 썼다. 그곳의 풍경을 보면서 마치 영화 속 풍경(물론 위치는 완전히 다르지만)과 비슷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을 했다. 책의 내용을 압축하여 말한다면 유목민들의 역사일텐데, 유목민과 정착민 간의 관계에 기반하여 기술했다는 것이 특징적이다. 기원전 8천년 전부터 20세기에 이르기까지 아주 긴 문명사를 요약해놓았다. 인물, 사물을 묘사하듯 그려서 지루함을 덜하게 하고, 세계사답게 특정 연도에는 세계 곳곳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기술하는 것도 독자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괴베클리 테페는 고대 문명사를 다시 썼을 정도로 지금은 중요한 유적이 되었다. 이곳은 인간이 어떻게 정착하게 되었는지 알려주는 유적이어서 특히나 중요하다. 수렵-채집, 이동 중심의 생활을 하던 인간이 정착하는 인간이 된 것은 농경의 시작이라고 배워왔다. 그러나 어떤 문화도 과거와의 단절에서 시작하지 않는다. 수렵-채집을 하면서도 농경으로 잉여 생산이 늘어나면서 점차 정착으로 이어졌다고 봐야할 것이다. 


예로부터 유라시아 스텝 지역은 수많은 유목민들이 거쳐가는 대자연이었다. 초원을 끊임없이 이동하며 사는 사람들은 여러 모로 말이 중요 자원일수밖에 없었다. 말은 1차적으로 인간의 이동 수단이 되었는데 말에 바퀴가 결합함으로써 마차 또는 전차로 변화하면서 인간의 이동 수단을 확장시켰다.


메소포타미아 우르크 성벽은 길가메시 신화가 서성이는 공간이다. 우리는 길가메시를 인간을 대표하고 엔키두는 자연을 대표하여 문명 대 야만으로 쉽게 치부해왔다. 하지만 엔키두의 무시무시한 능력을 위협으로 느끼면서도 이를 교화의 대상으로 생각하는 것은 생각해보아야 하지 않을까.


오시리스 신화는 홍수를 통제하는 법을 알려주는 존재인 '오시리스'와 사막을 지배하는 '세트'가 나온다. 이집트는 오늘날에도 문명사적으로 중요하게 다뤄진다. 과연 이집트인들 스스로도 자신들이 일구어낸 문명을 중요하게 여겼을까. 어쨌든 힉소스인들이 이집트를 정복한 것은 뼈아픈 실패처럼 여겨졌고 이는 신화로 남았다.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도 그런 구도를 담고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오디세이아는 주인공이 전투가 끝나고 온갖 모험을 하며 귀향하는 이야기로 유목민과 정주민 간의 갈등 끝에 정주민으로 귀착된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일리아스는 그리스 연합군과 페르시아 간 벌어진 트로이 전쟁을 다루는데 그저 모험과 전쟁 이야기로만 생각했었는데 유목민적 삶의 특징에서 볼 수도 있다는 지점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기에 흥미로웠다.

(페르시아는 키루스 대왕 시절부터 국력을 키우다가 크세르크세스 때가 되면 수도인 페르세폴리스를 건설할 정도가 된다. 페르세폴리스는 온갖 물자가 드나들어 부유했고, 여러 문화를 경험할 수 있는 곳으로 다양성을 지닌 곳이었다. 페르세폴리스는 당시 유목 세계를 대표하는 곳이었으나 알렉산드로스 1세에 의해 파괴되면서 유목 세계가 파괴되었다.)


흉노와 서쪽에 있는 그들의 짝 스키타이인은, 헤로도토스와 사마천이 말하는 동과 서의 세계를 연결하면 혜택이 생긴다는 점을 이해하고 있었다. 스텝 민족은 사치품 교역을 이끌어간 초기의 견인차였다. 성벽 내에 사는 사람들은 대부분 자국민 위주로 유대를 형성했다. 하지만 이주의 필요성 때문에 부득불 말 타기의 명수가 되고 수레와 전차를 발명했던 스텝 민족은 방대한 거리를 횡단하는 습성이 있었다. 그들은 마음을 가라앉히는 법을 알고 있었고, 낯선 것에도 편안해했다. 또한 생소한 관습을 용인할 줄 알았고 이해할 수 없는 언어들을 우회하는 방법을 찾아냈다. - P152


4세기 초 기후 변화로 세계적으로 강우량이 급격히 줄어들었다. 이 때 목초지나 물을 찾아 이동하는 유목민들이 늘어나 고트족, 훈족은 도나우강을 넘어 동쪽에서 서쪽으로 진출하였다. 기번은 훈족을 부정적으로 묘사하였으나 훈족은 BC451년 로마와 고트족 연합군을 격파하면서 로마 힘을 약화시킨 이력을 가지고 있다.


이븐 할둔은 <역사서설>을 통해 다양성과 변화를 포용하는 유목민의 능력에 관심을 두었고 그 중 아랍인들을 유목민들 중 가장 굳센 종족이라 생각했다. 아랍인들에 대한 인식은 그의 책을 통해서 비롯된 것들이 크다. 

아랍인 무슬림 세력의 극적인 확대는 기존의 세계질서를 바꾸었다. 700년대 중엽에는, 로마 제국이 콘스탄티노플의 일부 지역과 발칸 반도의 오지로 규모가 축소된 반면, 아랍의 지배권은 인더스 강에서부터 대서양까지 뻗어나가 이전의 어느 제국보다 커졌다. 하지만 이 신생 제국의 가장 놀라운 점은 제국의 크기가 아니라 그 제국이 이동하는 습성을 신속한 정복으로 이끌어간 사막인, 유목민이 쟁취한 것이라는 점이었다. 핵심 측근과 장군들의 대다수는 도시 정착민이었지만, 아랍인의 85퍼센트와 8세기 무슬림들은 대부분 이동하는 삶을 살거나 유목민의 전통으로 단련된 사람들이었다. - P193


아바스 왕조 때가 되면 종이가 전해져 필사가 가능해진다. 이후 타타르인 몽골이 부상하는데 중국, 위구르에 이어 호라즘까지 섭렵하며 힘을 키우다 나중에는 캅카스부터 카스피해에서 고려까지 7000km가 넘는 영토에 다다를 정도가 된다. 몽골의 중요 도시는 카라코룸과 사마르칸트다. 두 도시 모두 방대한 제국을 대표하는 도시이면서도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교류할 수 있는 개방성 있는 도시였다는 것이 특징이다.  

빌럼 수도사가 중앙아시아를 거쳐 몽골까지 한 여행기, 마르코 폴로의 여행기 등을 통해서 몽골이 세계 중심이자 문화적, 경제적으로 확장성을 지닌 곳이었음을 여실히 느낄 수 있다. 비잔틴 제국의 수도였던 이스탄불을 무너뜨린 오스만은 제국의 길에 들어선다. 그들은 천막, 말 중심의 유목민 뿌리를 잊지 않고 정체성을 지키며 살았다. 


대서양 횡단이 시작된 이후 베이컨과 갈릴레오를 비롯한 지식인들은 자연을 통제하는 것에 대한 노력을 기울여야한다고 주장했다. 프랭클린은 '근면'을 신념으로 삼았는데 원주민을 게으르고 방랑적 기질이 있는 이들로 치부했다. 새뮤얼 존슨은 18세기 말 영어 사전을 만들며 노마드, 유목, 방랑을 배제하여 편견을 고스란히 드러냈다(존슨 박사에 대해서는 두 가지 견해가 존재한다. 하지만 두 견해 중 어느 것도 그가 왜 "nomad"를 사전에 등재할 가치가 없다고 여겼는지를 설명해주지는 못한다. 그는 사하라를 본 적이 없고, 엠티쿼터 나고비 사막을 걸어본 적도 없었다. 그런데도 그가 사막desert을, "황무지, 황야, 황폐한 고장, 사람이 살지 않는 곳"으로 사전에 실었다. 방랑자wanderer는 "방랑을 직업으로 하는 상인과 같은 사람이면서, 그와 동시에 토지나 일터로는 쓸모없는 모든 곳에 존재하는 사람"으로 사전에 등재되어 있다. 그는 이동 방목을 뜻하는 transhumance도 그의 고향 마을에서 행해진 일이었는데도 사전에 포함시키기에는 부적절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심지어 migration도 싣지 않았다: P345~346). 빙켈만은 고대예술사를 통해 유럽의 고대 문명의 위대함을 찬양한다. 


기계식 파종기와 제니 방적기가 발명되고 공장식 대량 생산이 가능하게 되면서 영국의 생산력은 급격하게 늘어난다. 이후 도시로의 인구 유입이 증가하여 생활비가 늘어나면서 부익부빈익빈으로 구성원 간 불평등이 심화한다. 미국에서는 라이플(총기)이 개발되고 철도가 깔리면서 들소 등이 내몰리고 원주민이 삶의 터전을 잃고 무너뜨리는 것이 훨씬 쉬워졌다. 리틀 빅혼 전투에서 원주민을 상대로 미군이 패배하면서 희대의 학살극이 벌어졌고 이후 살아남은 이들은 보호구역으로 강제이주당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곱씹을수록 문명과 야만의 기준은 누가 만든 것이며 이는 일방적인 잣대가 아닐까 생각하게 한다. 유목민의 세계는 우리 생각 이상으로 넓고 큰데도 여전히 이들의 역사는 정주사보다 모호한 경우가 많다. 아무래도 유목민들 자체의 기록이 부족하기 때문이 크다. 저자도 서두에 밝혔듯 이 책의 서술도 서구의 사료를 이용했기에 한계가 있다고 말한다. 동방과 서방의 기준도 오랫동안 서방이 기준인 것처럼 이어져왔듯 정주사와 유목사도 그래왔다. 그래도 최근에 와서 문명에 대한 비판이 많이 이어지고 있음을 느낀다. 무엇보다 인간의 이기심으로 파괴되는 자연과 기후의 영향이 그렇다. 순환이 중요함을 알았던 유목민들의 지혜가 앞으로는 정말 필요한 때가 아닐까 생각한다.


방랑하는 우리의 "다른 반쪽을 재평가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들이 우리에게 공헌한 바를 밝히는 작업은 모두 우리 정착민들이 이동하며 사는 사람들에게서 배운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며, 우리가 협력에서 얻은 것이 얼마나 많은지도 보여준다. 또한 그것은 그들이 가볍게, 그리고 보다 자유롭게 살아갔다는 점에서, 환경에 순응하고 행동할때 기민함과 유연함을 발휘하는 법을 터득했다는 점에서, 그리고 자연계와 지속적으로 균형을 맞춰갔다는 점에서삶의 또다른 방식, 인류의 "다른" 반쪽이 먼 과거의 비옥한 정원에서 하나의 단일 집단으로 사냥하며 살았던 시대 이후로 줄곧 유지해온 삶의 방식도 엿볼 수 있게 해준다. - P23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바람돌이 2024-07-08 22: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안 그래도 이 책 내용 궁금했는데 화가님 덕분에 궁금증을 풀었네요. ^^

거리의화가 2024-07-09 08:43   좋아요 1 | URL
바람돌이 님 오랫만에 댓글로 만나니 더 반갑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한데 궁금증을 푸셨다니 다행이에요^^ 감사합니다.

희선 2024-07-09 03: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예전엔 옮겨다니면서 수렵과 채집으로 살았군요 그건 사람이 적어서 그럴 수 있지 않았을까 싶기도 합니다 그런 사람은 더 많이 늘지 않았을지... 인류가 죽 그렇게 살았다면 지금 어떤 모습일까 싶기도 하지만... 그런 일은 생각하지 않는 게 낫겠습니다 역사는 바꿀 수 없으니...

한곳에 산다 해도 그렇게 여기 저기 다니면서 살고 싶은 사람도 있겠습니다


희선

거리의화가 2024-07-09 08:47   좋아요 1 | URL
수렵-채집 생활에서 시작한 인간이 정착을 주로 하게 된 이후 제법 많은 세월이 흘렀지만 그럼에도 수렵-채집 기간이 훨씬 길었을거란 생각을 합니다. 일장일단이 있을텐데 미래인들이 과거와 현재를 어떻게 평가할까 궁금하기도 해요. 그러나 지구를 망가뜨렸다는 것에서는 자유로울 수 없겠지요. 희선 님 감사합니다^^
 

1장 서론

도구성과 추상성, 폭력과 경쟁을 축으로 인간이 극도로 대상화되는 현대의 남성주의적 문명을 극복할 대안은 여성들이 이제까지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형태로 수행하여온 역할과 체험과 지각을, "보이고 들리는" 형태로 살리는 데서 찾아질 수 있다는 것이다. - P24

성 역할 분업과 출산력 및 여성의 자결권에 대한 통제는 이념적 차원에서 언어·종교·예술·놀이 그리고 교육을 통해 존속되고 정당화되어왔다. 부족 사회에서 발견되는 여성 오염의 신화, 농경사회에 나타나는 남녀 유별과 남존여비 사상, 그리고 현대 사회의모성의 미화, ‘남성다움‘과 ‘여성다움‘의 극단적 대비와 낭만적 사랑내지 성관계에 대한 집착은 모두 이념적 통제 기제에 속한다. - P31

현 사회과학의 과제는 실제로 과학적‘ 설명의 틀에 집착하여 행동을 구성하는 의미의 맥락을 무시해온실증주의 과학과 인간주의적 입장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일상 생활의의미 속에 매몰되어 구조적 차원을 간과해온 해석주의자들의 한계를어떻게 넘어서는지에 있다. 경험과학의 과도한 확장 over-extension 이나 역사해석학주의의 과도한 확장은 모두 비판되어야 하며 이 두 영역을 연결하고 있는 권력과 이데올로기의 연구가 현 비판사회과학의주과제가 되고 있는 것이다(Habermas, 1974:10~12). - P36

푸코에 따르면 해석을 누가 내리는가에 대한 다툼이 곧 권력다툼인 것이며, 기존의 토론 구조 자체에 도전하여 대안적 해석 체계를 제시하는 작업을 통해 혁명은 이루어진다. 특히 권력 현상에 있어
‘서의 지배의 힘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저항의 힘으로, 종종 헤게모니를 강화시키는 권력 과정은 동시에 저항의 실천을 포함해왔으며 지배적 해석 체계를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것은 다행스럽게도 생각처럼그렇게 어려운 것은 아니라고 그는 보고 있다. - P37

사회 운동의 경험이 짧고 특히 시민혁명의 과정을 거의 거치지 않은 상태에서 일고 있는 사회 운동이 엘리트주의와 획일화 경향을 보이는 것은 어느 정도 불가피하다. 그러나 급격한 변동 과정에서 이미 다원화되기 시작한 사회 구성을 고려하지 않고 여전히 획일적이고 권위적인 운동 양식을 고집한다면 사회 운동이 사회에 뿌리내리기 힘들 것임은 또한 자명하다. 다원주의가 갖는 나태함의 위험 못지않게 획일주의가 갖는 경직 · 고립화의위험은 경계되어야 한다. 현재 우리의 상황에서 일어나는 사회 운동은 (1) 정치와 권력에 대한 좀더 새로운 이해와 (2) 우리가 형성해온집단 행위적 특성에 대한 근원적 성찰이 없이는 참여의 폭을 넓혀가기 힘들 것이다. - P5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십자군은 200년 동안 여덟 차례의 동방 원정으로 이어졌다. 십자군을 주도한 것은 물론 셀주크튀르크가 점령한 성지를 회복하고 교세를 확장하고자 한 교회였다. 그리고 중세 기독교인들의 종교적 열정과 신앙심이 십자군을 가능하게 했다. 그러나 십자군전쟁에는 당시 이탈리아 상업도시들의 경제적 이해관계와 유럽 봉건 기사들의 영토 지배욕 등 좀 더 다양하고 복잡한 요인들이 함께 작용했다.

승승장구하던 비잔티움제국의 국력이 쇠진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당시 제국의 동쪽과 남쪽에 버티고 있던 사산조 페르시아(226
~651) 및 이슬람과의 전쟁 때문이다. 특히 7세기 중반부터 급속도로 팽창하기 시작한 이슬람 제국과의 전쟁으로 비잔티움제국은 영토는 물론이고 국력도 현저히 줄어들었다.

11세기 중엽 노르만이 남부 이탈리아를 장악하면서 베네치아와 비잔티움제국은 노르만족에 공동으로 대응할 수밖에 없었다.
8
베네치아와 비잔티움 양국 모두 그들의 경제활동의 토대인 지중해를 지키려면 서로 협력해야만 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