뭉우리돌의 바다 - 국외독립운동 이야기 : 인도, 멕시코, 쿠바, 미국 편 뭉우리돌 1
김동우 지음 / 수오서재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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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라를 들고 동분서주했던 이유는 다른 게 아니다. 바로 현장만이 줄 수 있는 울림 때문이었다. 때론 그 진동과 떨림이 땅을 치며 우린 왜 이것밖에 안 될까, 하고 한탄을 하게 만들지만, 그래도 괜찮다. 그들이 있어 내가 있으니. - P11


광복절이 있기 얼마 전 신임 독립기념관장 선정을 두고 여야는 서로 다른 반응을 보였다. 어떤 이들은 건국절 논쟁은 그만 해야 한다고 말을 하던데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헌법에도 대한민국은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이어 받았다고 명백히 나와 있는 이 항목에 대해 대응하는 것이 어째서 논쟁이냐. 당연히 격렬히 싸워야 하는 논제이다.

광복절에 발표한 정부의 ‘8.16 통일 독트린’을 보니 뜬금이 없었다. 지금 이 상황에서 통일을 논하는 것도 당황스러운데 ‘북한 인권 개선을 위한 노력 전개’, ‘북한 주민의 정보접근권 확대’, ‘북한 주민의 생존권 보장을 위한 인도적 지원 추진’ 이런 항목들은 북한의 입장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항목들 아닌가. 그냥 뱉고 보면 다인지… 대부분의 항목들이 실현 가능성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지금 대한민국 내부 정치도 합치를 못하는 마당에 무슨…’ 이란 말이 맴돌았다.


누구나 인생에 한두번은 세계여행을 하는 날을 꿈꾼다. 저자도 그렇게 두 번째 세계여행을 떠났다. 어느 날 인도의 델리 레드포트에 들렀다가 그곳이 2차 세계대전 당시 독립운동사와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된 이후로 여행 목적을 바꿔 그 때부터 세계 곳곳에 산적해 있는 국외 독립운동사적지를 찾아 나서는 여행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만약 나와 무관한 관광지였다면 아마 그의 기존 계획은 변경되지 않았을지 모른다. 물론 평소 저자가 독립운동(가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저자는 인도,  멕시코, 쿠바, 미국을 아우르는 여행기를 책에 내보인다. 


여행 목적을 바꾸게 한 장소인 델리 레드포트는 2차 대전 때 영국군 총사령부가 있던 곳으로 알려져 있지만 한국광복군 ‘인면전구공작대’ 활동지였던 곳이기도 하다(인면은 인도와 버마, 전구는 전투 지역이다). 인면전구공작대는 1943년 ‘조선민족군선전연락대 파견에 관한 협정’이 체결된 이후 2년 여간 심리전단(적군 회유 특수 작전) 작전을 단행했다. 2020년 정부는 광복 75주년을 기념하여 영국군과 공작대 사이를 오가던 연락장교인 롤런드 베이컨 대위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러나 정작 인면전구공작대 대원 중 대장 한지성은 서훈을 받지 못했는데 1948년 월북을 선택했기 때문인 듯하다. 

조선의용대로 중국 땅을 누비다 광복군 대장으로 멀리 인도까지 날아간 사람 그리고 북한에서 숙청당한 비운의 독립운동가. 분단이 낳은 비극의 주인공 한지성. 이 이야기를 좇아가다 보니 마치 아직까지 서훈을 받지 못한 또 한 명의 김원봉을 보고 있는 것만 같다. 이젠 만성이 돼버려 잘 느껴지지도 않는 침잠한 슬픔들(P40). 


멕시코 이민이 언제 이루어졌는지는 대략 알고 있었는데 그 뒷 이야기를 이 책을 통해 알게 된 사실들이 몇 가지 있다. 먼저 멕시코 이민이 브로커인 존 마이어스에 의해 진행되었다는 사실이다. 마이어스는 1904년 국내에 들어온 뒤 전국 11개 지역에 대리점을 설치하고 신문에 허위 광고를 게재(기후가 좋고 부자가 많은 나라… 한국인이 가면 반드시 이득을 볼 것 등등)하여 이민자들을 모집했다. 그렇게 모인 이민자들은 배에 올라 우여곡절 끝에 멕시코 해변에 도착했지만 하선이 허락되지 않아서 4일간 배에 머물렀다. 당시 현지 통역인 권병숙(농상공부대신 권중현의 사촌)은 멕시코 애니깽 농장주 편에 서서 편지를 검열하거나 금지하는 등의 일을 앞장섰다고 한다. 남보다 못한 동포라니 희망에 부풀었던 이민자들을 두 번 죽이는 행동 아니었을지…


멕시코는 안창호와도 관련이 깊다. 당시 대한인국민회 총회장이었던 그는 애니깽 농장주와 이민자들 간의 노동문제 해결하고 한인들을 하나로 모으는 대한인국민회 단체 지회 설립을 위해 멕시코를 방문했다. 그러나 대한인국민회 메리다 지방회 환영식을 치르는 등 멕시코 활동을 모두 끝내고 돌아가려던 그의 귀국행은 고행이 되고 만다. 1918년 6월 귀국행에 오른 뒤 1924년이 되어서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돌아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고국이 일본의 식민지란 이유로 번번히 비자 발급을 거부당해서 미국->중국(1919), 중국->미국:입국 거절(1921), 중국->미국(1924) 이런 과정을 거칠 수 밖에 없었다고. 1918년 미국으로 돌아가려던 계획이 최초 좌절되었을 때 안창호는 멕시코 제2의 도시였던 과달라하라의 프란세스 호텔에 머물렀다. 2016년에야 호텔 측에서 안창호가 머물렀다는 사실을 밝히면서 이 사실이 알려졌다고. 한쪽 벽면에는 안창호의 얼굴이, 한글과 스페인어로 기록 내용이 병기되어 있다. 


멕시코의 대표 독립운동가는 김익주다. 부끄럽지만 김익주의 업적을 자세히는 알지 못했다. 1920년 기준으로 김익주가 임시정부 등에 보낸 독립자금은 1,500달러에 이르렀고 대한인국민회 탐피코 지방회 결성에 앞장섰으며, 3.1혁명 기념식, 순국선열기념식 등을 주도했다(안창호가 멕시코에 들렀을 때에도 도움을 주었다고). 

저자는 그의 손자인 다빗 킴을 직접 만난 이야기를 전했다. 다빗 킴은 태평양 전쟁 후에도 독립자금 모금을 위해 할아버지가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고 말했다. 광복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분단의 그림자가 드리우자 김익주가 많이 고통스러워했다고 한다. 저자가 찍은 다빗 킴 사진이 인상적이었다(몇몇 중요 인물들의 경우 이런 기법을 써서 보여준다). 선명한 배경에 인물을 흐릿하게 처리하여 마치 과거와 현재를 잇는 것 같은 묘사를 한다고 느껴졌다. 


일제의 한국 병탄 소식이 전해지자 애니깽 노동자로 왔던 이들은 1910년 독립군 양성을 위해 숭무 학교를 설립한다. 멕시코에 이민 온 이들 중 200여 명이 대한제국 군인 출신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군사 훈련 뿐 아니라 국어, 국사 교육 등을 철저히 교육했다고 한다. 다만 멕시코 혁명으로 1913년 짧은 세월을 뒤로 하고 문을 닫았다는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그들은 독립자금 모금으로 독립운동가들을 계속 후원했다.


쿠바 이민은 멕시코 이민사에서부터 시작한다. 설탕 공급으로 유명했던 쿠바는 1차 대전으로 국제 설탕 가격이 오르자 불황의 늪에 빠진 것이다. 멕시코 한인 270여 명은 애니깽 산업이 저물자 더 나은 생활을 꿈꾸기 위해 쿠바 땅을 밟는다. 하지만 현지의 사정은 기대 이상으로 좋지 않았고 시련의 시작이었다. 

저자는 현지에 도착해 독립운동가 후손을 찾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다. 아무래도 쿠바는 한국과 제대로 된 외교 관계를 맺지 않은지라 더욱 정보가 부족했다. 인터넷 검색은 기본 흥신소도 찾아가보고 나중에는 국가보훈처에 민원까지 넣었다고 한다. 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개인정보라 불가하다는 답변을 얻어 좌절했다고 한다. 사적지 자료와 위치는 거의 매번 같지 않았고 이 때문에 나중에는 화가 치밀어 독립기념관 관장에게 메일을 쓰기도 했단다. 국내 사적지 관리도 제대로 되지 않는 경우가 많은 마당에 국외사적지 관리야 오죽하랴 싶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기계적이거나 성의 없는 답변은 너무하지 않나 싶기는 했다. 말이 아 다르고 어 다른건데…


쿠바에도 대한인국민회 지방회가 존재했다. 쿠바 지방회는 1945년까지 2만여 달러를 모금해 교육비, 외교비 등에 사용했고 매년 3.1혁명 기념식을 거행하는 등 독립을 향한 마음을 꾸준히 보탰다고 한다. 


저자는 빅토르가 운영하는 까사(민박)를 찾아갔다. 빅토르 호 차는 독립운동가 호근덕(1889~1975)의 후손이다. 호근덕은 대한인국민회를 통해 임정에 독립자금을 지원하는 한편 광주학생항일운동을 돕는 데 앞장선 인물로 2011년에서야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빅토르가 직계 후손이라는 것도 2017년이 되어서야 밝혀져 서훈이 전달되었다고. 그는 최근까지 아버지가 독립운동을 했다는 사실을 까맣게 몰랐다고 한다. 이후 아버지의 묘소를 열심히 관리하며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과 애환을 달래고 있다고. 저자가 다른 곳으로 이동할 때가 되어 마지막에 방값과 식사비를 치르려고 하자 “내가 독립운동 사진을 찍겠다고 네 한국 집에 머물면 넌 어떻게 할 거니? 우리 아버지가 너에겐 돈을 받지 않으시겠대…” 


마탄사스는 쿠바 야구의 고향 같은 곳이면서 동시에 한인들의 정착 생활이 시작된 공간이다. 시내 외곽 핀카 엘 볼로는 1920년대 한인 100여 가구가 이주해 살던 곳이다.

엘 볼로 입구에는 2005년 미국 시애틀 한인연합장로교회가 후원한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당시에는 한인들이 집단 거주했던 방인 기숙사가 있었고 옆 공터에서 3.1 기념식이 치러지기도 했단다. 독립운동가 임천택이 1932년 야학 교실을 열어 청년들을 상대로 교육하던 장소이기도 하다. 현재는 마을 한가운데 한글학교이자 교회로 쓰던 건물만 유일하게 남아 있다. 집주인은 과거 그곳이 어떤 장소로 쓰였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지만 촬영을 허락했다는 것만으로 감사한 일이라는 생각을 했다.


임천택은 본래 기독교 감리교도였다. 그러다 잡지 <개벽>의 이두성이란 사람 소개로 천도교에 대해 알게 되면서 천도교도가 되었다. 1933년 쿠바 천도교 종리원장으로 임명될 정도였는데, 1937년 최린 일파가 친일로 돌아섰다는 소식을 접하고 분노하여 쿠바 천도교 종리원을 폐쇄하고 다시 감리교인이 되었다고 하는 웃지 못할 사건이 있다. 

임천택은 쿠바 유일 한인 이민 역사서인 <큐바이민사>를 남기기도 했다. 딸인 마르따는 아버지가 남긴 기록을 바탕으로 직접 답사를 하며 발품을 팔아 <쿠바의 한국인들>이란 책을 펴내기도 했다. 소중한 기록을 남겨준 이들 덕분에 쿠바의 한인사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음에 감사할 따름이다. 


카르데나스에는 독립운동가 이윤상의 딸 레오노르 이 박이 살고 있다. 이윤상은 1917년부터 해방 직전까지 임정에 독립자금을 지원했고 광주학생학일운동에는 특히나 적극적이었다고 한다. 이윤상이란 이름은 쿠바 한인 관련 기록에는 여러 차례 등장하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기록에만 존재하다가 2018년 한 대학의 후손 찾기 봉사단의 노력으로 이윤상의 딸이 레오노르 여사라는 게 확인됐다. 그 전까지 레오노르 여사는 아버지의 독립운동 사실을 전혀 몰랐다고 한다. 

쿠바 이민 1세대들은 모두 사망했다. 당시를 증언해줄 사람이 거의 남지 않은 상황이다. 먼지 수북한 자료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갖고 있는 거라곤 사진 몇 장과 유품이 전부다. 게다가 쿠바 이민 초기 39개쯤 되는 성 마저 세월이 흐르면서 이 씨는 리Lee, 김 씨는 킨Kin 또는 킹King, 강 씨는 칸Kan,Can 등으로 변해 누가 누구의 핏줄인지 찾을 길이 더욱 묘연해졌다. - P241


하와이 이민은 대한제국이 허가한 처음이자 마지막 집단 이주다.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에서 가장 필요했던 것은 값싼 노동력이었고 농장주들은 중국인, 일본인 노동자 대신에 대한제국 노동자들에 주목했다. 그렇게 1902년부터 1905년까지 하와이로 넘어간 한인들은 모두 7,300여 명을 헤아린다. 대한제국은 이들에게 외교적 보호나 지원 등을 해주지 않았고 설상가상으로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외교권 박탈로 하와이 이민이 금지되었다. 이후에 이민자들은 미국 본토로 갈 것인지 곻샹으로 갈 것인지 하와이에 남을지 선택해야 하는 기로에 섰다. 이렇게 미국의 이민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1919년 다뉴바에서 대한여자애국단이 창단된다. 이 단체는 여성들이 근검절약해 독립운동에 나선 것으로 유명하다. 단원들은 후원금을 모아 매달 3달러의 회비를 보탰다. 

대한여자애국단에 있던 한성신은 <신한민보>에 이런 글을 기고하기도 했다.

… 여러분의 딸들이나 아내들이 나라를 돕겠다고 돈을 좀 청구할 때에 머리를 흔들어 거절하거나 성을 내지 마소서.

대한은 남자 여러분의 대한만 아니요, 우리 여자들의 대한도 되나니 여러분의 아내나 딸들로 하여금 책임을 다하게 하소서. 의무를 각근히 하게 하소서. … - P315


중가주는 독립운동의 금맥이 되는 곳이었다. 통역관으로 하와이에 간 김형순은 ‘넥타린’이란 품종을 개발하여 털 없는 복숭아로 백만장자 반열에 올랐고 이 경제력을 바탕으로 독립운동 지원에 힘을 보탠 것이다. 유한양행을 설립한 유일한도 마찬가지다. 

임정 초대 군무총장에 임명된 노백린은 대한인국민회 지원을 받아 샌프란시스코에 윌로우스 한인비행사양성소를 설립해 비행 교관을 양성하는 데 앞장섰다. 일반 비행학교 교육생이 아닌 임정 산하 비행군단 소속 훈련이었다는 것이 중요하다. 안타깝게도 학교 설립 이후 얼마 되지 않아 폭풍이 강타하여 후원자인 김종림의 쌀농사 업체가 큰 타격을 입는다. 이 때문에 비행학교는 문을 닫고 김종림의 사업도 이후 전성기를 회복하지 못했다. 김종림은 일본이 진주만을 폭격하자 60을 앞둔 나이에 캘리포니아 주 방위군에 지원하고 두 아들도 미 해군으로 참전하여 일본과 싸웠다고 한다. 한국 정부는 2005년이 되어서야 김종림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이를 비롯하여 장인환과 전명운에 얽힌 이야기(너무 슬퍼서 눈물을 여러 번 훔쳤다. 마지막까지 슬프기 짝이 없는…), 이승만에 얽힌 이야기 등 다채로운 이야기들이 펼쳐진다. 


이 책은 붙잡지 않았으면 포착되지 못했을 그 증거의 현장을 찾아 발벗고 나선 저자의 기록이다. 대부분의 현장은 침묵이 흐르고 말이 없다. 그는 그런 순간들을 마주하고 질문을 던졌다. 구체적인 대답은 나올 수 없지만 눈여겨 보지 않았으면 놓쳤을 현장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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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장 관제 민족주의와 제국주의

유럽 왕조들의 ‘귀화‘ 많은 경우 어떤 흥겨운 곡예가 필요했던 작전들 •는 이윽고 시턴-왓슨이 신랄하게 ‘관제 민족주의‘ (officialnationalism)‘라고 불렀던 것으로 이어졌으며, 차르식 러시아화는 이것의 가장 잘 알려진 사례일 뿐이다. 이러한 ‘관제 민족주의‘들은 특히 중세로부터 축적되어 온 거대한 다언어 영지에 대한 왕조 권력의 유지를귀화와 결합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다른 식으로 말하자면 짧고 꽉 끼는민족의 피부를 제국의 거인 같은 몸통에 늘여 씌우기 위한 수단으로서가장 잘 이해될 수 있다. 차르의 이질적인 신민 집단에 대한 ‘러시아화‘
는 그리하여 고래의 것 하나와 꽤 새로운 것 하나, 이렇게 두 가지 대립되는 정치적 질서를 폭력적. 의식적으로 용접하는 과정을 표상했다. - P139

관제 민족주의들은 반동적이지는 않을지라도 보수적인 정책으로서, 대개 자연발생적으로 선행했던 인민 민족주의 모델을 각색한 것이었다. 이들은 궁극적으로 유럽과레반트 지역에만 국한되어 있지도 않았다. 제국주의의 이름으로 매우유사한 정책들이 같은 부류의 집단들에 의해 19세기 동안 예속된 광대한 아시아와 아프리카 영토들에서 추진되었다. 마지막으로, 비유럽 문화 - P170

와 역사로 굴절해 들어간 관제 민족주의는 직접 예속을 피한 얼마 안 되는 지구(그중 일본과 시암)에서 토착 지배 집단에 의해 선택, 모방되었다.
거의 모든 경우, 관제 민족주의는 민족과 왕조의 영지 간의 불일치를은폐했다. 그리하여 나타난 범세계적 모순에 의하면, 슬로바키아인들은마자르화되고, 인도인들은 잉글랜드화되고, 한국인들은 일본화되겠지만, 그들은 마자르인들, 잉글랜드인들, 일본인들을 통치할 수 있는 순례에 참가할 허가를 받지는 못할 것이었다. 그들이 초대받은 연회는 늘 알고 보면 먹을 것이 없는 잔치였다. 이 모든 것에 대한 이유는 단순히 인종주의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제국의 핵심에서 민족들- 헝가리 민족,
잉글랜드 민족, 일본 민족- 도 출현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 민족들은 ‘외국‘의 지배에 본능적으로 저항적이기도 했다. - P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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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장 영국의 베일 논쟁

1960년대 초까지만 해도 영국은 이민정책으로 ‘문화적 동화(cultural as-Similation)‘ 정책을 실시해 이민자들을 영국의 주류 문화로 흡수하고, 다인 - P205

종·다문화 사회의 문제점을 해결하려 했다. 그러나 동화만을 고집해온 프랑스와 달리 영국은 통합 대상의 규모가 적정선을 넘어서면 동화가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판단하에 실용주의 노선을 취했다(Weil and Crowley, 1994:117).

1960년대 중반부터는 다문화주의 통합 정책이 기저를 이루고 있다. 1966년 노동당 정부의 내무장관 로이 젱킨스(Roy Jenkins)는 "통합이란 동화라는 획일적 균등화의 과정이 아니라 상호 관용의 분위기 속에서 문화적 다양성이 수반되는 동등한 기회"라고 정의함으로써 영국 이민자 통합의 방향을 제시했다(Jenkins, 1967: 267). - P206

영국 사회 무슬림 집단의 가장 큰 불만은 인종차별을 다루는 인종관계법이 그들의 차별 문제를 보호해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현재 영국의 이민자 집단은 다양한 문화 · 종교 · 만족. 인종에 기초하고 있음에도 인종관계법은 피부색에 따른 인종만을 기준으로 삼는다. 예컨대 피부색을 문제 삼아 흑인을 차별하면 법적으로 처벌받지만, 종교적 이유로 무슬림을 차별하는 것에 대해서는 법적 처벌 기준이 마련되지 않았다(정희라, 2007: 19).
게다가 무슬림과 같이 종교적 성향으로 구분되는 이민자 집단들은 인종관계법의 보호를 받지 못한 반면, 시크교도와 유대인은 인종으로 구분되었다. 그 결과 유대인 남성의 모자와 시크교도의 터번은 종교적 상징이 아니라 인종적 정체성의 상징으로 인정된 반면, 이슬람 여성의 베일은 순수하게 종교성을 나타내는 것으로 간주되었다(염운옥, 2010: 16; Abbas, 2005:52). - P211

1990년대 말, 수전 몰러 오킨(Susan Moller Okin)은 소수 이민자 집단의문화적 다양성을 보호하기 위한 다문화주의 정책이 집단 내부의 차이를고려하지 않음으로써 여성의 권리와 이익을 훼손할 수 있다는 주장을 제기했다(Okin, 1999).

레티 볼프(Leti Volpp)는 페미니즘과 다문화주의를 대립항으로 파악하 - P213

면 소수집단의 여성을 해당 문화의 ‘희생자‘로만 보게 될 뿐 ‘행위 주체‘로서 여성을 보지 못한다고 지적하며, 페미니즘과 다문화주의는 상호 보완적이어야 하고 양자 간 건설적 대화가 필요하다고 제안한다(Volpp, 2001).
서구 대 비서구, 현대 대 전통이라는 이분법적 대립 구조 속에서 제3세계의 소수 문화가 여성 억압적이며 열등하다는 시각이 다문화주의와 페미니즘 간 갈등을 강화한다는 주장도 있다. - P214

실제로 여성 억압적 관행들은 주류 문화와 갈등하는 소수 문화의 문제가 아니라 가부장제에 의한 ‘젠더폭력‘ 문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다문화주의의 위기 속에 젠더 이슈가 소수 문화와 종교에 대한 비판의 형태로 제기되면서 여성의 인권이 그에 대한 명분으로 이용되고 있다. 여성억압적 젠더 이슈들이 소수 문화의 본질적 특징이라고 가정하는 것은 경제적·사회적·문화적 · 젠더적 불평등이 교차 · 중첩된 현실을 지나치게 단순화함으로써 주류 문화와 마찬가지로 소수 문화도 내적 다양성과 변화가능성을 지닌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이다. - P215

단순히 소수집단의 수적 증가만으로 다문화주의를 둘러싼 갈등이 증폭되지는 않는다. 스트로를 비롯한 정치인들의 니캅 발언에서 볼 수있듯이, 이러한 갈등들은 문화적 차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집단에 의해 비로소 사회문제화되는데, 특히 경기후퇴기에 이들의 선동은 사회적소수를 둘러싼 갈등을 증폭시키고, 모든 비난을 쏟아부을 희생양으로 이주민을 선택해 공격하도록 유도한다(김남국, 2009: 286). - P220

영국에서 베일에 대한 법적 규제를 할 것인지 여부는 핵심 사안이 아닐 수있다. 오히려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베일 논쟁이 그동안 영국이 공식적으로 표방해온 다문화주의 정책을 전면적으로 재검토하라는 여론을 조성하는 데 기여한다는 사실이다. 즉, 베일 논쟁이 순수한 젠더 이슈로 논의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 통합 정책으로의 여론 조성이라는 다문화 이슈의 방패로 이용되고 있는 것이다. - P223

여성은 직접 히잡 착용을 선택할 권리가 있으며, 그 선택이 교육권과 같은 다른 권리를 실행하는 데 어떤 영향도 끼쳐서는 안 된다는 점, 즉 머리카락을 가리는 것은 문화적·종교적 자유이고, 이러한 자유에 사회가 어떤차별이나 위협을 가하면 안 된다는 젠더 평등(여성의 인권·평등)이 전제될때 젠더 이슈는 문화적 다양성의 존중이라는 다문화주의와 비로소 동등한공존 관계를 형성할 수 있을 것이다. - P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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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이래 민족 형성을 촉진하기 위해 어떠한 상징적, 물리적 폭력이 필요했는지를 보여 주는 다수의 탁월한 역사 연구가 있다. 이 연구들에 따르면 민족 형성은 이미 존재하는 다양성을 거슬러 성취해야 했던 동질화였다. 이를 위해서는 다양한 영역, 다양한 수준의 방대한 개입이 필요했다. 물질적, 정서적, 문화적 동질화가 요구되었던 것이다.

비판적 역사학의 진영에서는 민족이 결코 완성된 적이 없다는 증거를 찾으려고 노력했다. 민족은 충족된 적이 없다. 다시 말해 동질 사회가 완전히 동질적인 적은 없다. 그러나 비판적 역사 연구가 전하는 이 모든 통찰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비판적 역사학자들은 절대 과소평가해서는 안 되는 본질을 간과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민족이 잘 기능하는 허구라는 사실이다.
동질 사회라는 상상은 언제나 허구였다. 그러나 잘 기능하는 허구였다. 민족은 게다가 기능이 대단히 뛰어난 허구였다.

서구의 민주화된 민족 국가에 살고 있는 우리 모두는 이중화되어 있다. 우리는 부르주아(Bourgeois)이자 시투아앵(Citoyen)이다. 시민(Burger)이자 동시에 국민(Staatsburger)인 것이다. 시민으로서 우리는 모두 사인(私人)이다. 서로 구별되는 특징이 있는 개인이며, 이 특징이 우리를 분류한다. 우리는 남성이거나 여성이며, 가난하거나 부유하며, 공무원, 농부, 교사다. 어떤 경우에도 우리는 구별된다. 그러나 시투아앵으로서, 다시 말해 국민으로서 우리는 공인(公人)인데, 우리는 모두 동등하기 때문이다. 바로 여기에 민주주의의 본질 요소가 들어 있다. 이것이 우리를 추상적 동등으로 이끈다.

이전의 개인주의는 개인의 다른 유형을 만드는 일이었다. 법권리 주체, 유권자, 국민은 추상화를 통해 생성되기 때문이다. 개별 사인으로서 개인은 언제나 구체적이고 구별된다. 그러나 공인으로서 개인은 구별되는 특성들을 추상화함으로써 동등해진다. 다시 말해 특수한 차이들을 무시할 때에만 각각의 개인은 전체의 동등한 부분이자 주권을 구성하는 동등한 일부가 된다. 이 점에서는 개인 사이를 결합하는 요인이 바로 개인의 특수한 직분에 대한 추상화다. 우리를 구별하는 것들을 무시할 때에만 우리는 전체의 동등한 부분이 된다.

한 사회의 동질화는 단순히 단일화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차이가 부차화된다는 데 가깝다. 더는 차이가 없다고 해서 사회가 동질화되는 것이 아니다. 차이가 우선순위에서 밀려날 때, 공통된 것 앞에서 차이가 부차화될 때 사회는 동질화된다. 민족 유형이 제공하는 이 공통된 것은 유사성의 원칙에 기초한다. 공통된 형상 속에서 민족의 모든 구성원은 서로를 알아볼 수 있다. ‘상상된 공동체’는 이러한 유사성의 사회다.

민족 서사는 민주주의적 개인이 자기 자신을 공인으로 재인식할 외형을 제공한다. 이 외형의 윤곽은 가변적이다.
바로 이 형상이 우리가 같은 민족 구성원을 모두 안다고 믿게 한다. 우리는 같은 유형에 속하는 다른 모든 이들과 동일시한다. 이러한 형상이 존재하기에 민족이라는 환상이 작동했고, 바로 그래서 동질 사회라는 환상은 잘 작동했다.

프로이트 이래 우리는 당연하고 직접적이라고 생각하는 모든 소속이 허구의 속임수임을 알고 있다. "자아는 자기 집의 주인이 아니다."라는 잘 알려진 명제로 프로이트는 자아와 집 양자에 대해 본질적인 질문을 제기한다. 자아의 자명함을 문제 삼고, 자기 소유로서의 집에 대해서 의문을 던지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족은 바로 이 두 가지 환상을 전 국민이라는 거대한 규모의 집단에게 오랫동안 정당화하는 데 성공했다.

자기 집을 다른 단어로 표현하면 환경이다. 환경이란 주위 환경이다. 하나의 전체를, 하나의 통일체를 이루는 환경. 민족의 경우 이 하나의 환경이 전국을 에워싼다.

개인의 정체성에 관련해 지금의 변화는 다음을 의미한다. 동질 사회의 환경이 천천히 해체되면, 우리 모두는 더 이상 온전한 정체성을 갖지 못한다. 우리는 이제 온전하고 당연하며 분명한 정체성을 갖지 못한다. 온전하고 당연하며 분명한 소속도 없다. 더 이상의 허구는 없다.

민족의 귀환은 바로 다원화 사회에서 민족은 사라지는 대신 침식되고 있다는 증거다.
이러한 침식은 민족이라는 세계가 더 이상 유일한 환경도 아니고, 하나의 당연한 세계도 아님을 드러낸다. 민족은 더 이상 완전한 소속과 온전한 정체성에 대한 약속이 아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러한 환경이 다른 환경에 의해 쉽게 해소되지 않았으며, 민족 유형도 다른 유형에 의해 해소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단순히 새로운 주도 권력이 발달했다는 말이 아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단 하나의 유형으로, 단 하나의 환경으로 조직되지 않는다는 점이 변화의 가장 무거운 본질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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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장

‘문화적 인종주의‘는 초기 생물학적 인종주의를 대체한 개념으로서 유럽중심의 백인 우월주의를 피부색이 아닌 문화적 차이로 설명한다. 이 용어는 1967년에 프란츠 파농(Frantz Fanon)이 처음으로 사용했는데, 실제 그개념이 확장되어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마틴 바커(Martin Barker)에 의해서라고 전해진다(Barker, 1981). 1970~1980년대 영국적 맥락에서 그는 문화적 차이가 적대적 인간관계를 만들어낸다고 보았고, 따라서 문화적 차이때문에 민족국가가 폐쇄된 공동체를 형성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문화적 인종주의가 하나로 경계 지어진 문화 단일체로서의 민족 건설이라는 개념에 토대를 둔다고 보았다. - P164

이슬람 관점에서 일반적으로 여성의 베일 착용은 이슬람을 지킨다는 종교적 의미, 무슬림 공동체에 속한다는 정치적 의미, 가족의 요구를 수렴한다는 사회적 의미, 성적으로 자신을 보호한다는 윤리적 의미가 있다(황병하, 2010: 61). 그뿐만 아니라 앞서 설명한 바처럼 서구 식민 경험이 있는국가에서는 베일 착용이 종교적 정체성 구현의 상징이자 저항의 도구로사용되기도 했다. 그렇다면 서구 이민 국가에서 무슬림 여성 이민자의 베일 착용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영국의 무슬림 베일 논쟁을 연구한 염운옥(2010: 23)은 영국 내 무슬림여성 이민자가 안전, 종교적 경건함, 정숙의 표시, 패션 등 다양한 이유로베일을 착용한다고 전한다. 하지만 최근 영국 사회에 이슬람 혐오 정서가높아지면서 무슬림 여성이 무슬림 공동체적 정체성에 귀속해 안정감과 안전을 얻으려는 동기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 P169

호주에서 정교분리는 헌법에 명시되어 있다. 그러나 기독교를 믿는 대다수 백인 호주인의 일상생활에는 기독교 문화나 관행이 자연스럽게 뿌리내려 있다. 아울러 호주 정부나 정치인들도 예나 지금이나 ‘유대-기독교(Judaeo-Christianity)‘적 전통이 호주 사회의 핵심 가치 또는 핵심 문화라는점을 명확히 하고 있다. - P171

호주에서 무슬림 여성의 베일 착용은 종교적 의미, 무슬림공동체에 속한다는 정치적 의미, 가족의 요구를 수렴한다는 사회적 의미,
성적으로 자신을 보호한다는 윤리적 의미 등 다양한 맥락에서 해석될 수있다. 이는 호주 무슬림 인구의 이민 시기, 이민국의 종교와 문화적 특성,
이민 배경, 호주 사회 내 사회적·경제적 배경이 다양한 만큼 베일 착용의의미 또한 다양하게 나타난다는 점을 알려준다. 하지만 베일 착용을 두고여성 개인의 자발적 선택이라기보다는 무슬림 공동체의 종교적·사회적압박에 의한 자발적 강제라는 시각이 부각되고 있다. 이렇듯 베일에 대한호주 주류 공동체의 부정적 시각은 베일을 착용한 무슬림 여성에 대한 인종적 타자화 현상을 심화시키고 있으며, 그로 인해 무슬림 여성의 안전과무슬림 정체성에 대한 위협이 호주 사회에서 확산되어간다고 볼 수 있다. - P190

무슬림 여성의 베일 착용 문제는 호주 사회 내 무슬림과 비무슬림 인구 간 갈등의 핵심에 놓여 있다. 베일을 둘러싼 논쟁에는 무슬림여성의 권리와 안전과 같은 페미니스트들의 언어가 등장하지만, 실제 두집단 모두 여성의 권리와 안전 향상에 귀결되는 주장을 제시하고 있지는않다. 특히 베일 착용 금지와 호주성을 둘러싼 비무슬림 호주인들의 논의는 그들이 세속주의, 반인종주의, 젠더 평등 수호라는 기치 아래 오히려 호주 사회에 깊이 내재된 백인. 기독교 · 남성 중심적 가치를 더욱 확대·재생산하려는 의도가 있음을 보여준다.
더욱이 호주 사회에서 무슬림 남성이 비무슬림 여성에게 저지른 성폭력범죄와 공동체 간 인종 분쟁 사건, 부르카를 이용한 범죄 등은 무슬림 공동체에 대한 인종적 타자화 현상과 함께 호주의 민족 정체성 유지·강화현상을 더욱 급속도로 진전시켰다. - P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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