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나와 타자들 - 우리는 어떻게 타자를 혐오하면서 변화를 거부하는가
이졸데 카림 지음, 이승희 옮김 / 민음사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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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의 정체성은 타인과의 구별 뿐 아니라 자신의 정체성과 구별 짓기로 형성된다. 다원화된 사회에서 개인의 정체성은 감소했고, 선택의 기회가 많아진 만큼 성숙한 결정을 내리지 못해 포퓰리즘 등이 활개치기 좋아진 상황이다. 중립성이 최선이겠지만 현실 사회에서 실현하기란 쉽지 않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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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몽주의 이후 근대는 사회의 세속화를 의미했다. 세속화는 진보의 방향이었다. 따라서 사회는 더 근대화될수록 더 세속화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난 10년 혹은 20년 동안의 변화는 이 주장이 틀렸음을 보여 주고 있다. 놀랍게도 우리는 예상하지 못했던 종교의 귀환을 확인해야 했다.(비록 실제로 종교가 완전히 사라진 적은 없었지만 말이다.)

종교적 정체성은 오늘날 더는 완전한 정체성 유형으로 기능하지 않는다. 가장 확신에 찬 신앙인도 오늘날 자신의 종교 공동체에 완전히 소속되지 않은 채, 불완전하게 소속된다. 불완전이란 자신의 확신과 결합이 언제나 여러 개 중 하나의 가능성임을 잘 안다는 뜻이다. 말하자면 사람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는다.
이 상황을 부분적 세속화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종교적 믿음은 오늘날 단지 부분적으로 세속화된 믿음일 수밖에 없다. 이 또한 모순처럼 들릴 수 있다. 부분적 세속화는 본질적으로 그 이상의 요소에 의해, 바로 다양한 종교들의 새로운 가시성을 통해, 즉 다원화와 함께 다양한 종교들이 점점 더 많이 눈에 들어오게 되면서 촉진된다.

오늘날 우리는 신앙을 선택한다. 하나 또는 여러 개의 신앙을 개수와 상관없이 선택하는데, 핵심은 선택이다. 이 점이 과거 종교에 대한 이해와 완전히 다른 점이다. 선택은 세속적이기 때문이다. 세속 사회는 오늘날 종교 세계 옆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세속적인 것은 종교의 심장으로도 진입했다. 전승 안에서 배치되는 대신 자기 전통 혹은 외부 전통을 스스로 습득한다. 어떤 자리에 배치되는 대신 자기 힘으로 어떤 자리를 차지한다. 스스로 선택된 전통은(이 무슨 모순인가!) 과거 종교성과는 반대되는 효과를 낳는다. 세대라는 사슬에 배치되어 탈주체화되는 대신, 선택한 자아가 강화된다.

결정이 반드시 성숙을 위한 결정은 아니다. 왜냐하면 결정의 무대가 된 종교는 결정을 통해 바로 근본주의로 가는 관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경우든 다양한 종교들의 새로운 모습을 더 자주 보게 되는 것은 다원화의 원인이자 결과다. 일단 볼 수 있게 되면서 여러 종교로부터 다원성이 생겨났다. 그리고 바로 이 눈에 보이는 다원성 때문에 오늘날 모든 종교적 믿음은 다른 신앙과 나란히 존재해야 하며, 부분적으로 세속화된 신앙을 가질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국가의 중립성은 바깥 어딘가에 있지 않다. 중립성은 컨테이너가 아니다. 중립성은 개인에게, 특히 국가의 대리인에게 자기가 양분된다는 사실을 지식과 의식 차원에 각인시킬 때만 존재한다. 모든 판사들은 자신들에게 사인과 공인이라는 두 개의 인격이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공적 인격은 바로 사적 인격과의 거리로 인해 존재한다. 사적인 성향 및 확신과 거리를 둘 때에만 국가의 중립성은 실현된다.

국가 시민적 의식은 시민의 완전한 정체성과는 거리가 있고, 완전함에서 뭔가 빠진, 감소된 자아로 이해된다. 다원화된 민주주의 사회가 필요로 하는 중립성은 바로 이런 것이다.

다양성이 큰 사회에서 정체성은 타인과의 구별로만 형성되지 않으며, 자기 자신의 정체성과 경계 짓기를 통해서도 형성된다.

근본주의는 오늘날 다원화에 대한 저항을 의미한다. 종교적 근본주의는 따라서 다원주의에 대한 종교적 저항이다. 이런 저항은 모든 종교에서 발견된다.

문화는 오늘날 중심 무대이며, 그 무대 위에서 우리는 우리 사회를 다룬다. 문화에 대한 다양한 생각들이 만나고 충돌하는 영역이 곧 문화다. 그러나 문화는 레크비치의 서술처럼 "가치와 담화의 영역"인 것만은 아니다. 문화는 또한 기호의 영역이다. 말하자면 문화 영역에서 물건, 자산, 단어들이 의미가 있는 기호 또는 상징으로 변환된다. 이런 의미에서 문화는 정체성에 상징을 부여하는 기본 틀이다. 문화 영역에서 개인과 상징 사이의 관계가 다양한 방법을 통해 고정된다. 이 관계에서 우리가 정체성이라고 부르는 것이 나온다.

1세대 개인주의에서 문화는 개인을 잘 조직된 상징세계에 (대중으로) 끼워 넣는 데 도움을 준다. 이를 통해 개인은 각자의 특별함을 포기하고 일반적인 상징 질서 안에 있는 주체로서 자신을 재발견한다. 즉 여기에서는 완전한 주체와 완전한 상징의 관계가 지배하고 있다.

2세대 개인주의에서는 이 질서정연한 관계가 휘청거린다. 여기에서는 해체라는 주제가 널리 퍼졌다. 예를 들면 여성이 대표적이다. 정해진 역할, 장소, 상징 관계의 해체.

3세대 개인주의는 정체성의 불안정화를 통해 규정된다. 이는 사회의 다원화 과정에서 자기 정체성을 외면적으로 보장하는 일이 개별 주체들에게 맡겨졌음을 의미한다. 자기 정체성의 불안정화, 유연화는 상징의 불안정화를 동반한다. 민족적, 종교적, 성적 상징 등 모든 상징이 자신의 분명함을 잃어버린다.

오래전부터 우리가 우리의 사회상을 다루는 지점인 즉 문화 영역에서 동성애가 찬성과 반대로 갈라지는 지점이었다면, 콘치타와 함께 트랜스젠더 유형이 이 민감한 지점에 불쑥 들어왔다.

다원화된 개인주의 시대에서 문화는 결코 훼손되지 않고 온전한 문화 재화들과 완전한 상징의 집합이 아니다. 문화는 오히려 불안정해진 상징과의 관계를 획득하려는 시도다. 다원화된 개인은 소수의 엘리트와는 달리,전 지구 안에서 획득 가능한 완전한 상징들의 단순한 주인이 아니다. 다원화된 주체는 기껏해야 불완전한 상징과의 관계 속에서 불안정한 자율성과 권한을 얻을 수 있을 뿐이다.

문화 본질주의는 자기 자신을, 자신의 "종교, 민족, 인종적 관습을 영구적으로 유지하려는" 시도다.

참여는 권리와 권한의 부여를 의미한다. 말하자면 참여는 참여적인 주체를 생성하고 힘을 주는 일이다. 따라서 말하고 싶지 않아서 침묵하는 이들에게, 말할 수 없고 말하면 안 되는 배제된 자들에게 권한을 부여하는 데 인종적 게토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쾌락주의는 주도 담론이 되었다. 성공한 삶이란 즐거움과 쾌락의 실현이자 향유다. 이 쾌락주의가 사회의 중심 개념이 되는 과정에서 자체의 의미를 바꾸었을 뿐 아니라 거의 뒤집었다는 것 또한 비밀이 아니다. 원래 쾌락주의는 욕망에 적대적인 도덕을 향한 저항의 징표이자 해방의 울림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오래전에 쾌락주의는 그 반대편에 자리를 잡았다. 실현과 성공을 통해 쾌락주의는 저항의 정신에서 빠져나와 참여와 소비의 도구이자 자본주의의 작동 원리가 되었다. 자본주의는 기능하는 노동력뿐 아니라 즐기는 소비자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정치적 쾌락주의는 변화 없이, 수직적인 계층 없이, 충동의 지연됨 없이 개인으로서 완전히 참여할 때 실현된다.

헌신적 사회 참여 속에서 다원화된 개인들은 자신의 정치적 쾌락주의를 실현한다.

집단을 통한 대의는 오늘날 시민들의 정치적 욕구와 맞지 않는다. 사회 문제가 더 이상 없어서가 아니다. 그보다는 오늘날 사람들을 정치적으로 움직이고 건드리며 자극하는 것은 다른 무언가, 즉 완전 참여를 향한 열망이기 때문이다.

포퓰리즘적 국면이란 포퓰리즘이 뻗어 갈 수 있는 상황으로, 특정한 사회 분열이 시작되는 역사적 국면을 말한다. 정치, 경제, 문화의 균형이 흔들릴 때, 사람들의 경제적, 정치적 문화적 통합이 더 이상 굳건하지 않을 때 생겨나는 국면이다. 이때 전 국민은 "사회적 홈리스" 신세가 된다.

포퓰리즘은 정확히 이 나눌 수 없는 것에 집중한다. 잃어버린 나눌 수 없는 것, 오늘날 정치적인 것의 중심에 자리 잡은 바로 그 나눌 수 없는 것, 곧 정체성에 집중하는 것이다.

포퓰리즘 전략은 왜 효과가 있을까? 우리가 정체성들이 더 이상 옛 안전 체계를 통해 보장받지 못하는 포퓰리즘적 국면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주체들은 자신의 정체성이 위협을 받는다고 느끼며, 자기 정체성의 당연함에 질문이 제기되는 상황에 처해 있다. 몰락을 두려워하는 중간 계급 이하의 사람들은 정체성에 관해 이중의 위협을 받고 있다. 나눌 수 있는 것에 정착한 사회 민주주의로부터 아무런 정체성도 제공받지 못하면서, 동시에 다원화가 불러온 사회 변화를 통해 위협받고 있다.

민주주의에서 국민은 추상 범주다. 이는 민주주의에 반하는 말이 아니다. 추상화는 필수적인 허구이기 때문이다.

우파 포퓰리즘은 바로 이 추상화를 무력화시키려고 한다. 포퓰리즘은 추상적인 국민에게 구체적인 형태를 부여하려고 한다.

파시즘과는 달리 우파 포퓰리즘은 세속 종교가 아니다. 파시즘은 정치의 신성화를 통해 자기 숭배 의례와 성스러운 의무로 기능했다. 그러나 우파 포퓰리즘은 파시즘에서 기꺼이 여러 가지를 모방하지만, 파시즘의 세속 종교성은 모방하지 않는다.
정확히 말해 포퓰리즘은 더 이상 종교적으로 규정되지 않는 사회에서 움직인다. 포퓰리즘은 전체가 순전히 세속적인 사회에서 움직이며, 이 세속적 세계에서 여전히 초월적 대용품처럼 기능하는 것을 이용한다. 바로 ‘타자’의 배제다. 실제로 타자가 우리를 주어진 세계에서 벗어나게 만드는 것은 아니다. 타자의 배제가 우리 내면의 위협처럼 보이는 것을 방어한다고 둘러댈 뿐이다. 지금 이 가상의 위협에 대항하며 포퓰리즘이 가져오는 것은 파시즘의 경우와는 다르다. 초월적 요소가 없기 때문이다. 영광스러운 미래에 대한 약속도 없다. 포퓰리즘의 모든 것은 오직 지금 여기에서만 작동한다.

민족은 르상티망(Ressentiment, 원한이나 복수감을 뜻하며, 인간 본성의 비합리적 측면을 말한다. 니체에 의하면 강자에 대한 반감의 배후에 작용하는 심리다.)과 연결되고, 동시에 정체성도 제공해 주는 환상이다.

미셸 푸코 덕분에 우리는 주피터 역사와 반주피터 역사를 구분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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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는 "권력을 상징하는 신" 주피터가 수행하는 역사다. 승자의 역사를 설명하는 방식이며, 권력과 영광을 드러내는 역사. 주피터 역사는 승리를 중심으로 사회를 일치시키는 이야기다. 다시 말하면 모범적인 영광의 역사다. 이 때묻지 않은 영웅담인 주피터 역사는 "권력 강화"를 위한 의례다.
이와 반대로 반주피터 역사는 억압받는 자, 굴복된 자, 희생자의 역사다. 이 관점은 저항의 역사에 경청하게 해 준다. 영광은 오직 승자만을 비춘다. 그러나 반주피터 역사에서는 희생자가 그늘에서 나와 영광이란 단어를 움켜잡는다. 이 관점에서 타인의 승리는 자신의 패배다. 권력에 반항하는 저항의 역사는 주권과의 동일시를 흔들어 놓으며, 권력이란 결합할 뿐 아니라 억누른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 준다. 반주피터 역사는 권력에 대한 저항 담론이고, 사회의 약속된 단일체를 방해하는 응답이다.

사회적 기준에 어긋난다고 여겨지는 정체성, 그런 의미로 부정적인 정체성, 그래서 피해자로 규정되는 정체성을 보호하는 일이 정치적 올바름의 핵심이다.

정치적 올바름의 과잉이란 정치적 올바름을 부정할 뿐 아니라 그에 적대적인 세력에게 좋은 먹잇감이다. 이것은 동시에 등장하는 실제 문제 그리고 편견의 관계와 같다. 실제 발생하는 문제가 편견의 원인이 아니듯이, 정치적 올바름의 과잉이 정치적 올바름을 거부하는 원인은 아니다. 그러나 과잉은 거부를 크게 촉진한다.

좌파가 잊은 것은 물질적인 차원이 아니라 오히려 이와 연결되어 있었고 물질적 차원이 가져온 그 정체성이다. 망각에 빠져 있는 건 바로 정체성이다. 계급 투쟁의 귀환을 요구하는 좌파의 정치적 올바름 비판에서 바로 이 점을 간과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이 핵심이다.
왜냐하면 바로 이것을 포퓰리즘이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억압된 좌파의 정체성을! 바로 좌파가 억압하는 정체성이 왜곡된 형태로 포퓰리즘 속에서 귀환하고 있다. 우파 포퓰리즘의 성공은 사회 문제의 귀환과 연결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포퓰리즘에 대한 저항도 단순히 사회 문제를 재인식하는 데 놓여 있지 않다. 오히려 우파 포퓰리즘은 경제적 착취가 아니라 잃어버린 정체성의 국면을 최우선으로 다시 받아들였다. 나눌 수 없는 것의 이 억압받던 국면은 여기에서 왜곡된 형태로, 백인 남성의 굴욕감으로 귀환했다.

정치적 올바름이 백인 남성들에게는 사회적 서열의 전복으로 느껴진다. 경제적 상실과 나란히 문화적 헤게모니와 자존감을 앗아가고, 담론적 권위도 빼앗는다. 백인 남성들은 더 이상 여성, 흑인, 외국인, 동성애자에 대해 지배적이지 않고, 그들보다 우월하다는 느낌을 받지 못한다. 사회적 관심이 앞으로 피해자 지위를 통해 정해진다면, 경제적 관점에서뿐 아니라 사회적 관심에서도 백인 남성들은 가장 아래 위치한다. 왜냐하면 백인 남성들은 이런 질서에서 피해자 지위를 요구할 권리가 없는 집단이기 때문이다. 경제적으로 착취당하고 문화적으로 종속되었다고 백인 남성들 스스로 피해자라고 주장하기란 쉽지 않다.

각각의 특수한 정체성 규정들과 특별한 정체성들의 추상화는 민족이라는 특수하지 않은 수준에서 유사한 존재를 재생산하려는 시도다.(모든 긍정적 효과뿐 아니라 단점과 어두운 면도 함께 재생산하게 된다.) 이에 반해 오늘날 우리 안에 자리 잡고 있는 감소는 더 이상 유사성에 의해 규정받지 않는다. 감소는 릴라의 단자들처럼 차이의 축제도 아니고, 즉 특수한 정체성과 본질적으로 오해된 정체성을 고집하지 않으며, 유사한 것들의 결합도 아니다. 오히려 다양한 존재들의 결합이자 만남이다.

"다원성의 공간"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많은 목소리들이 등장하고, 다종다양한 의견과 위치가 표현되는 그런 공간이 될 것이다.

우파들이 정치적 올바름을 반대하는 전장에서 실현하려고 하는 그림은 정확히 반대다. 이는 사회를 유사한 존재들을 위한 무대로 바꾸려고 하는 시도다. 이 유사한 존재는 릴라가 생각하는 추상적 유사성, 시투아앵이 아니라 실체가 유사한 존재들이다. 그러므로 분명히 해야 한다. 유사성은 다원화의 가장 극에 있는 반대 개념이다.

문화는 관계이며, ‘자기 자신’의 문화와 관계 맺는 방식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를 분열시키는 것은 문화가 아니다. 우리를 분열시키는 것은 오히려 우리가 문화를 사는 방식이다. 우리를 분열시키는 것은 우리가 우리 정체성을 사는 방식이다. 우리가 우리 종교를 사는 방식이 우리를 분열시킨다. 그러므로 진짜 경계선은 다원주의와 반다원주의 사이를 가로지르고 있다.

지도자 민주주의는 민주주의가 단지 권위주의적 지배에 겉치레를 제공할 뿐이라는 허깨비 민주주의를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이때 권위주의는 단순히 독재가 아니다. 비록 동의를 만들기 위해 강제가 동원될 수도 있지만, 강제를 통한 지배가 아니며, 동의를 통한 지배다. 예를 들어 국민 투표를 앞두고 기자들을 감금해 ‘반대’가 전혀 나올 수 없는 상황을 만든다. 이런 방식이 민주주의와 다른 지도자 민주주의 방식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점은 동의를 받는 일이며, ‘진정한 국민’과 그들의 지도자 사이에 직접 동맹을 만드는 일 또한 중요하다. 제도를 통한 우회로 없이 직접 동맹을 만드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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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된 공동체 - 민족주의의 기원과 보급에 대한 고찰
베네딕트 앤더슨 지음, 서지원 옮김 / 길(도서출판)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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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대는 식민지 지배에서 시작하여 해방, 분단, 통일을 겪으며 유독 ‘민족’이라는 개념이 강조되었다. 어릴 적, 학교에서 당연히 해야만 했던 국민 체조 행하기, 국민 교육 헌장 따라하기, 교련 교육, 태극기를 향한 경례 등은 지금 생각하면 너무나 부자연스러운, 강요 받은 세뇌에 가까운 개념이라 느낀다. 

2000년대 들어 탈근대, 탈민족주의 담론이 제기되면서 역사학계는 논쟁이 벌어졌다. 한국 민족주의 논쟁은 한민족의 형성, 권력 담론으로서의 민족주의의 성격, 민족(국가) 중심의 인식과 서술, 국사 해체 등에 대한 성찰을 가져온 바 있다.

그러나 비단 이는 과거에만 그친 개념은 아니다. 현재도 경주는 고대 신라 시기를 컨텐츠화하여 유물, 유적화하여 보존, 박물관화하고, 관광객을 끌어들인다(다른 한편에서는 원전을 이용한 개발 이익을 노린다). 부산은 한국 전쟁 때 외국군이 들어온 통로로  이용되면서 자유주의 평화를 강조한다. 그곳에는 UN평화로라는 이름이 존재하고, UN기념공원과 평화기념관이 있다. 인천은 근대 개항장으로 이용되었고, 한국 전쟁 때는 인천상륙작전이 이루어지면서 많은 근대 관련 박물관들과 자유공원(맥아더 동상) 등이 있다. 


내가 생각하던 ‘민족’이란 개념은 인종과 문화가 결합된 형태였다. 민족의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원어가 무엇인지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국어 학자인 이희승 선생님의 사전 정의에 따르면, 민족이란 “같은 지역에 살고 같은 말을 하며 생활양식, 심리적 습관, 문화, 역사 등을 같이 하는 인간집단. 역사적으로 형성된 것으로서 인간을 생물학적으로 분류한 것”이며 국민은 “동일한 통치권 밑에 결합되어 국가를 조직한 인민”을 뜻한다. 전자를 문화적 개념이라고 한다면, 후자는 정치적 개념이라고 볼 수 있다. 대체적으로 내가 생각했던 개념이 이희승 선생님이 정의한 개념과 비슷한 맥락이라 여겨진다. 그러나 원어는 nation, ethnic group, ethnicity로 다양하게 불린다. 이 중 네이션nation은 같은 공공 문화를 가지면서도 구성원들이 어떤 권리와 의무를 가진 개념이라면 ethnic group, ethnicity로 번역되는 에스니는 같은 공공 문화를 가질 뿐 권리와 의무를 지니지 않았다는 것이라고 여겨진다. 그러니까 nation은 정치적 공동체의 개념이 문화적 공동체의 개념에 더해져 있다고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베네딕트 앤더슨은 이 책에서 ‘민족’은 상상된 개념으로 ‘제한된 범위의 주권을 가진 정치 공동체’라고 소개한다. 그는 민족에도 정치적 공동체 개념을 부여하였다. 민족은 과거 종교나 왕조 국가 공동체가 하던 역할을 근대에 들어서 자본주의와 인쇄 혁명이 준 가능성으로 열린 개념이라고 볼 수 있다. 19세기에 들어서면 프랑스와 아메리카에 민족 국가의 모델(표준)에 만들어진다.  

19세기 중반 이전에 발명되었지만 식민지화된 지구들이 기술 복제의 시대에 입장하면서 형태와 기능을 바꾼 세 가지 권력 제도보다 문법의 윤곽을 더 선명하게 드러내는 것도 드물다. 세 가지 제도란 센서스, 지도, 박물관으로서, 이들은 함께 식민지 국가가 그 지배권을 상상하는 방식-그것이 통치하는 인간들의 본성, 그 영토의 지리학, 그 유래의 정당성-을 밑바닥에서부터 형성했다(P248). 

센서의 허구는 모두가 거기에 들어가 있다는 것, 그리고 모두에게 하나의, 단 하나의 극히 분명한 지리가 있다는 것이다. [1보다 작은] 분수는 있을 수 없다(P251). 

순수한 기호일 뿐, 더 이상 세계를 향한 나침반이 아닌 지도. 이러한 모습으로 무한히 복제 가능한 연쇄에 입장한 지도는 포스터나 공식 문장, 레터헤드, 잡지와 교과서의 표지, 식탁보, 호텔 벽 등에 전이될 수 있는 것이 되었다. 곧바로 알아볼 수 있으며 어디에서든 가시적인 로고 지도는 인민의 상상에 깊이 침투해, 태어나고 있는 반식민지 민족주의들을 위한 강력한 휘장의 형태를 구성했다(P262). 

박물관, 박물관화하는 상상은 심원하게 정치적이다. 고대 사적을 파헤치고 개발하고, 분석하고, 전시하는 과정이 이어졌다(P267). 


베네딕트 엔더슨은 비슷한 시기 서구적 관점에 의한 민족 정의에서, 식민지 입장의 관점을 적용했다는 것이 특징이다. 다만 주로 남아메리카, 동남아시아 지역을 중심으로 서술했기 때문에 글로벌 관점에서 지역의 폭이 좁고 추상적인 개념들이 많아 구체적 사례가 좀 더 필요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특히 동남아시아와 동북아시아의 경험은 다르니 말이다. 동북아시아 중에서도 일본은 제국주의를 시행한 곳으로 다른 곳과는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민족과 민족주의 관련해서 이 책은 늘 언급된다. 때문에 언젠가는 읽어봐야지 했는데 독서 모임에 이 책을 드디어 읽게 되었다. 책을 독해하기란 쉽지 않았다. 첫 술에 배부르랴, 어렵지만 첫 시도였다라고 생각한다. 


이 책을 읽으며 민족은 어떻게 정의되어야 하는지 어렴풋이 정리할 수 있었다. 민족의 범위는 어떻게 정해야 할지, 국가는 국민을 어떤 방식으로 동원하는지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다. 

해마다 광복절에 반일 담론은 그치지를 않는다. 국가, 지방 정부의 기념 사업은 정치적 노선과 입장의 차이에 따라  국민들을 정치적으로 선동한다. 그럴 때마다 국민들은 국가적 정치에 이용되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상상된 네이션은 진짜일까? 가짜일까? 그 시기가 언제인지, 상황에 따라 다르게 상상될 수 있는 것이 아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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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4-08-29 04: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독서 모임에서 이런 책을 보기도 하는군요 거기에서 책을 봐서 여러 가지로 도움이 되겠습니다 다른 것과 생각할 수도 있고... 사람은 숫자가 많아지면 어떻게 하지 못하니 뭔가로 묶기도 하겠습니다 거기에서 큰 게 같은 나라에 사는 민족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이런 걸 깊이 생각해 보지는 않았네요


희선

거리의화가 2024-08-31 15:25   좋아요 0 | URL
독서 모임을 하면 다양한 의견을 들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어요. 제가 생각하지 못했던 관점을 들을 수 있으니 공부에도 도움이 됩니다.
민족주의는 과거에서 끝난 것이 아니라 현재도 끊이지 않고 소환되는데 이를 위해서 여러 모로 이 책을 읽기를 잘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희선 님 감사합니다^^

공쟝쟝 2024-09-02 20: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상상된 네이션이지만 아주아주 강한 담론효과를 가지지요… 마치 젠더 수행처럼… ㅠㅠㅠㅠ 화가님 공부짱짱!!! 엄청 자극 받고 갑니다! 눈건강 허리건강 잘 챙기셔요🤸🏻‍♀️🤸🏻‍♀️ 화이팅!

거리의화가 2024-09-03 08:05   좋아요 1 | URL
‘상상‘이라는 용어가 아주 큰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이겠구나 싶습니다. 상상은 사람의 생각이 더 개입되기 쉬우니까. 구체적인 실체가 없다는 것이 불안과 공포를 조장하기도 하는 것처럼요.
쟝 님도 긴 독서 생활을 위해 건강 잘 챙기시길 바랍니다^^*
 

11장

아메리카 지명 붙이기에서 깜짝 놀랄 만한 것은 ‘뉴‘와 ‘올드‘가 공시적으로, 비어 있는 동질적 시간 안에 공존하는 것으로 이해된다는 점이다. 비스카야는 누에바비스카야와 나란히 있고, 뉴런던은 런던과 나란히 있다. 후계 구도가 아니라 형제 간의 경쟁을 연상케 하는 작명 스타일이다.
이 유례없는 공시적 참신성은 역사적으로 오로지 상당수의 인구 집단이 그들 자신이 다른 상당수의 인구 집단에 평행한 (parallel) 삶을 살고있으며, 결코 만나지는 않을지라도 틀림없이 같은 궤도를 따라 나아가고 있다고 생각할 위치에 있을 때에만 일어난다.  - P280

평행성과 동시성의 감각이 단순히 떠오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막대한 정치적 결과도 낳으려면, 반드시 평행 집단 사이의 거리가 멀고, 둘 중 새로운 쪽은 오래된 쪽에 확고히 종속되어 있는 대규모의 영구 정착지여야 했다.  - P281

유럽에서 새로운 민족주의들은 거의 즉시 그들 자신이 ‘잠에서 깨어난다고 상상하기 시작했는데, 이러한 문구는 아메리카에는 전혀 낯선것이었다. 1805년에 이미 우리가 제5장에서 보았듯이) 젊은 그리스인 민족주의자 아다만티오스 코라이스는 자신에게 공감하는 파리 관중에게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처음으로 민족은 자신의 무지라는 무시무시한광경을 살펴보고 민족을 선조의 영광으로부터 가르는 거리를 눈대중하며 부르르 떤다." 이것은 새로운 시간에서 옛 시간으로의 이행을 드러내는 완벽한 사례이다. - P289


 르낭이 그의 민족이란 무엇인가?』(Qu‘est-ce qu‘une nation?)를 발표했을 때, 그를 사로잡은 것은 다름 아닌잊을 필요성이었다. 일찍이 제1장에서 인용했던 구절을 다시 살펴보자. 

그래서 민족의 본질은 개개인 모두가 공동으로 많은 것을 가지면서, 많은것을 잊었다는 데에 있다. 프랑스 시민이라면 누구나 생바르텔레미와13세기 미디의 학살을 잊었어야 한다.

이 두 문장은 얼핏 보기에 직설적인 것 같다." 그렇지만 잠깐 곱씹어보면 이 문장들이 실제로는 얼마나 야릇한지가 드러난다. 예컨대 르낭이 그의 독자들에게 ‘생바르텔레미‘나 ‘13세기 미디의 학살‘이 무슨 뜻인지 설명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는 점이 눈에 띈다. 그러나 ‘프랑스인‘이라 일컬어지는 이들이 아니면 그 누가 ‘생바르텔레미‘가 1572년 8월 24일 발루아가의 왕 샤를9세와 그의 피렌체인 어머니가 개시한 지독한 위그노 학살을 가리킨다는 것을, 또는 ‘미디의 학살‘이 길게 줄지어선죄 많은 교황들 중 그 죄가 더 깊은 축에 드는 인노켄티우스 3세의부추김 끝에 피레네 산맥과 남부 알프스 산맥 사이의 광활한 지대에 걸 - P295

쳐 저질러진 알비파 교도의 절멸을 가리킨다는 것을 곧바로 이해할까.
르낭은 이 사건들 자체가 300년 전과 600년 전에 일어났는데도 독자들의 머릿속에 ‘기억‘되고 있다고 가정하는 것이 기이하다고 생각하지도않았다. 또한 (잊었다 (doit oublier)가 아니라 ‘이미 잊었어야 한다‘ (doitavoir oublié)라는 단정적인 구문도 놀라움으로 다가온다. 이는 국세법이나 징병법에 사용되는 불길한 어조로, 옛 비극들을 ‘이미 잊었어야 함‘이 현대 시민의 일차적 의무라는 점을 시사한다.  - P296

시조(Originator)가 없기에 민족의 전기는 복음처럼 기나긴 씨뿌림과 생식의 사슬을 통해 시간을 타고 내려가며‘ (down time) 쓸 수 없다. 유일한 대안은 베이징 원인이든, 자바 원인이든, 아서 왕이든, 고고학의 등불이 알맞은 빛을 내려주는 곳이라면 어디든 그쪽을 향해 ‘시간을 타고 올라가는‘ (up time) 형식으로 전기를 빚어내는 것이다.  - P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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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민족'이라는 개념이 적절한가에 대해서 의문점을 갖고 있다. 민족과 인종을 어떻게 구별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다문화 사회에서 다양성과 보편성 사이의 갈등에 대해서도 그렇다. 이럴 때 세 권의 책을 만났다. 


베네딕트 앤더슨은 <상상된 공동체>에서 오늘날 국가나 공동체의 연합 형태를 '민족'이라는 개념 하에 두고 이를 다양한 사람들이 모인 '상상된 공동체'라고 명명한다. 그러나 그것을 굳이 민족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물론 그가 말한 '상상된 공동체'가 인쇄 혁명, 언어, 글로벌 자본주의로 가능해졌다는 이유에는 납득이 간다. 

그러나 국가의 국경선은 그저 물리적으로 구분된 선일 따름 아니던가. 그 안에 존재하는 다양한 사람들을 단일 민족으로 규정할 수 없을 뿐더러 하나의 문화권으로도 규정짓기 어렵다고 생각한다(다문화, 인종적 관점에서도).

오래전부터 시작된 유대인에 대한 포비아, 9.11 이후 확산된 이슬람 포비아는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는 글로벌 사회에서 오히려 확산되고 있는 형국이다. 뿌리 깊은 인종 혐오도 마찬가지다. 가부장제에 의한 여성 문제가 결합하면 문제가 더욱 복잡해진다. 과연 다문화사회에서 보편적 관점이 가능한가. 


인류학적인 정신에서 나는 다음과 같이 민족을 정의할 것을 제안한다. 민족은 상상된 정치적 공동체로서, 본성적으로 제한적이며 주권을 지닌 것으로 상상된다. 민족은 상상되었다(imagined). 가장 작은 민족의 일원들조차도 같은 겨레를 이루는 이들 절대 다수를 알거나 만나보지 못한다. 그들에 대한 얘기를 들어볼 일조차도 거의 없으리라. 그럼에도 각자의 가슴속에는그들의 교감(communion)에 대한 심상이 살아 숨쉬고 있다. 민족은 제한적(limited)인 것으로 상상된다. 10억 가량의 살아 있는 인간들을 포괄하는 가장 큰 민족조차도 그 경계는 유연할지언정 유한하며, 그 너머에는 다른 민족들이 있다. 어떠한 민족도 스스로 인류라는 집합과 경계가 동일하다고 상상하지 않는다. 민족은 주권을 가진(sovereign) 것으로 상상된다. 어떠한 보편적 종교이든 간에 그 가장 독실한 추종자들조차도 그러한 종교들의 살아 있는 다원주의에, 그리고 신앙 각각의 존재론적인 주장들과 그 영역이 뻗어 있는 형태간의 어긋남에 어쩔 도리 없이 맞닥뜨렸던 인류 역사의 단계에서 성숙에 이른 민족들은 자유롭기를 꿈꾸었으며, 신의 가호 아래 있을 것이라면 다른 누구를 통하지 않기를 바랐다. 주권 국가는 이러한 자유를 표상하는 도전장이자 휘장이었다. 마지막으로, 민족은 공동체로 상상된다. 각각의 민족 내에서 실제로 횡행하고 있을 법한 착취와 불평등과는 상관없이, 민족은 언제나 깊은 수평적 동지애의 모습으로 그려진다. - <상상된 공동체>, P25~P28


<나의 타자들>에서는 민족은 주도 문화를 확립하고 패권을 다시 세우려는 시도라고 말한다. 그러면서도 자기 주도권이 흔들리는 상황에서는 그 패권을 위해 싸워야 한다고 말하는데 내 의견도 같다. 정상성에서 내쳐지고 타자화되는 상황에서 자기 밥그릇은 기필코 지켜내야 하지 않겠는가. 식민지 국가의 주권을 찾으려는 다양한 시도, 인권을 보장 받지 못하는 소수자들의 권리 찾기 운동, 제도 하에 묶여 난타당하던 여성들의 목소리 등등.


민족이라는 주도 문화의 확립은 패권을 다시 세우려는 시도다. 그러나 패권이 없다면, 그리고 자기 주도권이 흔들린다면 패권을 위해 먼저 싸워야 한다. 당연함의 상실은 말하자면 ‘정상성’의 상실이기도 하다. 이 말은 ‘정상’이 무엇인지에 대해 더 이상 제시하거나 묘사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정상성’을 정의하는 일이야말로 가장 거대한 사회 권력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이렇게 말해야 한다. 정상성, 당연함은 단지 그 정상성의 형태가 통용되는 집단에 소속된 이들만을 위한 가치다. 다른 이들에게 정상성은 정상이 아니다. 정상성은 배제의 역학이자 제외의 역학이다. - <나의 타자들> 2장 中


물론 그 과정에서 역설적으로 식민지 국가가 제국주의 국가의 카르텔을 답습하는 문제도 발생했다. 기득권은 나라를 빼앗겼을 지언정 자신들의 이권을 기필코 놓지 않았다.  

식민지 인종주의는 왕조적 정당성과 민족적 공동체를 용접하고자 시도했던 ‘제국‘(Empire)이라는 관념의 주요 성분이었다. 그러한 시도는 선천적으로 유전되는 우월성의 원리를 일반화함으로써 이루어졌으며, 그 국내적 지위는 해외 영토의 광대함에 (얼마나 불안정하든)기반을 두고 있었다.

식민지마다 목격되는 것은 드넓은 저택과 미모사와 부겐빌레아가 가득 피어난 정원, 급사들과 남자 하인들, 정원사들, 요리사들, 유모들, 하녀들, 세탁부들, 그리고 무엇보다 말들이라는 조연급의 대부대를 배경에 거느리고 시를 읊는 부르주아 귀족(bourgeois gentilhomme)"이라는, 으스스하게 우스운 활인화(tableau vivant)였다. 젊은 총각이라든가 하는 이런 식으로 살림을 꾸리지 않았던 이들조차 농민 반란 전야의 프랑스 귀족에 맞먹는 화려하게 의심스러운 지위를 누렸다. - <상상된 공동체>, P227


<다문화주의와 페미니즘>은 오늘날 다문화사회에서 벌어지는 갈등이 그저 문화 문제만이 아님을 이야기한다. 인종주의, 여성 차별이 더해져 여성들의 주장을 하나로 모으기 어렵게 하는 요인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세계는 연결되었다고 말하지만 점점 더 유한한 자원에 자본주의에 따른 이익으로 자국중심주의는 강화되고 있다. 특히 미국, 중국, 유럽 등 강대국은 국경을 강화하고 보수주의자들은 결집하는 중이다. 여기에 개혁주의자들의 논리가 분산되어 모여지기 힘든 것도 그 배경이 되지 않나 생각한다. 

여성들은 남성들의 역차별 논리와도 싸워야 하고, 보편주의냐 다문화주의냐에 의한 선택을 두고도 고민해야 하는 지경이다. 예를 들어 히잡 논쟁이 대표적일 것이다. 히잡을 썼다고 강간을 당한 여성이 여성 혐오에 의한 것이냐, 아니면 이슬람 혐오에 의한 것이냐, 아니면 또 다른 이유일 수도 있다. 히잡을 착용한 이유가 선택일 수도 있지만 강요일 수도 있다. 선택에도 여성이 종교적 이유로 선택한 것이냐 아니면 강간을 피하기 위한 선택이냐 등 여러 이유가 있다. 강요한 경우는 문화적이나 종교적 이유, 가부장제에 의한 논리에 의한 경우가 있겠다. 이처럼 히잡을 착용한 것에도 여러 이유가 있는데 이를 다른 문화권 또는 국가에서 어떤 식으로 바라보아야 할 것인가 문제가 생긴다. 생각할수록 뚜렷한 해답은 없고 생각을 회전시키는 어려운 문제인 것 같다.


‘문화적 인종주의‘는 초기 생물학적 인종주의를 대체한 개념으로서 유럽중심의 백인 우월주의를 피부색이 아닌 문화적 차이로 설명한다. 이 용어는 1967년에 프란츠 파농(Frantz Fanon)이 처음으로 사용했는데, 실제 그개념이 확장되어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마틴 바커(Martin Barker)에 의해서라고 전해진다(Barker, 1981). 1970~1980년대 영국적 맥락에서 그는 문화적 차이가 적대적 인간관계를 만들어낸다고 보았고, 따라서 문화적 차이때문에 민족국가가 폐쇄된 공동체를 형성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문화적 인종주의가 하나로 경계 지어진 문화 단일체로서의 민족 건설이라는 개념에 토대를 둔다고 보았다. - <다문화주의와 페미니즘>, P164


추가적으로 인상적이었던 챕터는 일본의 아시아 여성에 대한 인신 매매에 대한 언급이었다. 인신매매 과정은 다음과 같다. 인신매매 모집 브로커는 현지에 젊은 여성들을 상대로 성 산업에서 일한다는 사실을 숨긴 채 사기로 유인하고 모집이 끝나면 서류를 준비해 일본에 입국시킨다. 여성들은 이 때 이미 빚을 지기 시작하여 브로커를 거칠 때마다 수수료가 붙어 거액의 빚을 안게 된다. 국내 성 산업에 뛰어든 여성들이 겪는 고통이 생각날 수밖에 없고 이는 과거 몇 십년전 일본 전쟁에 강제로 동원된 수많은 조선인을 비롯한 아시아 여성들을 떠올리게 한다.

인신매매 이민 여성에 대한 사회 담론은 일본에서 주로 인신매매의 강제성 여부를 둘러싸고 촉발되었다. 하나는 이민 여성의 자기 선택과 자발성을 강조하는 담론이다(일본 정부가 일관되게 하는 주장). 이는 성 산업에 뛰어든 여성을 쉽게 비난하는 논리와 다를 바가 없다. 다른 하나는 인신매매 여성에 대한 남성의 성적 작취에서 기인하는 문제로 보는 젠더적 시각이다. 여기에서도 '성매매로 돈을 버는 일탈한 여성'이라는 전통 여성상 틀에서 본 관점과 자국 사회에서도 가난한 하층의 여성이라는 계급주의적 관점이 존재한다. 

이 중 어떠한 하나의 관점으로는 적절한 타개책이 떠오르지 않는다. 원인이 복합적이기 때문에 결국 해결법도 세심해야 할 터.


질문에 대한 결론? 답을 얻지는 못했다. 여전히 공부가 부족하니 이렇게 읽으면서 정리해둘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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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4-08-22 09: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거리의화가 님 그간 읽었던 책들이 [다문화주의와 페미니즘] 과도 맞닿아 있어서 깊이 있게 읽기가 더 가능했던것 같습니다.
저도 아직 다 읽지는 못했지만 ‘내가 생각했던 답이 답이 아닐 수 있는거구나!‘ 를 매 페이지를 넘기며 깨닫고 있습니다. 답이 하나가 아니라는 것은 앞으로도 답은 하나가 아닐 것이라는 것 아닐까요. 그런 점에서 계속 이야기하고 듣고 세심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저도 곧 따라갈게요!

거리의화가 2024-08-24 17:38   좋아요 0 | URL
다락방 님 <다문화주의와 페미니즘>이 이 달에 제가 다른 이유로 읽어야 했던 책과 연결선상에 있어서 더 폭넓은 시선을 전해주었던 것 같습니다. 덕분에 저도 많은 도움을 받았어요.
수학처럼 정답지가 존재하는 것 이외에 다른 분야의 학문, 현실 세계의 일들은 정답을 요구하기 어려운 경우가 대부분이죠. 갈수록 복잡해지는 현실 사회에서 하나의 정답은 강요이자 폭력일 수도 있으니까요. 그렇지만 정답은 없어도 정의로운 방향으로 모아지면 좋겠다는 바람은 가지게 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