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전반기 동안 계속된 식민 지배와 반식민 저항운동의 역사는 계급과 젠더 정치를 복잡하게 만들었고, 해방 후 냉전 구도 속에서 미국의 헤게모니 아래 진행된 남한의 민족국가 건설 과정은계급과 젠더 관계를 둘러싼 정치적 이데올로기적·사회적 협상의 불안정성을 증폭시켰다. 이 같은 격동하는 정치 지형에서 노동자와 여성을사회·경제적으로 어떻게 위치 지을 것인가는 20세기 내내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중차대한 문제였다. - P13

한국 자본주의 발전의 여명기인 1920년대초 조선인 기업가들은 적어도 수사학적으로는 노동자와 가부장적관계를 형성하는 경우가 많았고, 산업 노동자의 조직화 노력에 기꺼이동참하는 사례도 종종 있었는데, 이는 그들의 민족자본가적 관점에서 - P41

비롯된 것이었다. 하지만 1920년대 중반에 이르러 ‘조선인 기업에좋은 것이 곧 조선인에게 좋은 것‘이라는 이들의 민족자본주의적 논리는 더 나은 임금과 인간적 대우를 요구하는 노동자들의 거센 저항에 부딪혀 정당성의 위기를 맞게 된다. - P42

1920년대에 서울·평양·부산의 고무공장에서는 많은 노동쟁의가 있었다.전세계적 대공황의 여파가 식민지 조선에도 밀어닥치면서 파업은 더욱 격렬하게 일어났다. 1929년부터 1931년까지 평양에서는 1930년의 연대 파업을 비롯해 10건의 파업이 발생했고, 서울에서는 4건, 부산에서는 3건의 고무 파업이 있었다. 1931년 평원고무 파업은 이런 파업 물결에 이어지는 것이었는데, 평양은 평원고무 파업 이후에도 그해 후반에 세 차례, 그리고 1933년 열 차례의 고무 파업을 겪었다. 1933년 이후부터는 건수가 줄어들지만, 이들 도시에서 고무 파업은 1930년대 말까지 계속되었다. 이 고무 파업들 중에서 1930년 8월에 일어난 평양 고무 노동자들의 23일간의 연대 파업은 노동자와 조선인 자본가간의 가장 큰 충돌이었다. - P49

1923년경부터 인도주의에 기반을 둔 기독교 민족주의 이념은 사회주의 활동가들로부터 격렬한 공격을 받기 시작했다. 사회주의자들은 기독교 세력이 주도하는 민족주의 운동의 친미적이고 점진주의적이며 자강 지향적인 프로그램의 효과에 의문을 제기하고 조선물산장려운동과 같은 일부 자강 노력이 실은 자본가계급에게만 유리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중국과 마찬가지로 식민지 조선에서도 사회주의자들의 ‘반종교‘ 운동이 불붙어 1920년대 중반 절정에 달했고, 이에 대응해일부 기독교 활동가들은 사회주의 이념을 일정 부분 수용할 가능성을고려하게 되었다. 1925년 무렵 일본의 기독교사회주의자 가가와도요히코의 저작이 국내에 유통되기 시작했고, 그가 주창한 ‘애‘의 원리가 일부 기독교인 학생들 사이에서 인기를 얻었다. - P66

코민테른은 전 세계 노동운동에서 공산주의 활동을 조율하기 위해 1921년 프로핀테른을 설립했고, 프로핀테른은 1927년 5월 중국 한커우에서 아시아-태평양 좌익노동조합대회를소집했다. 이 대회를 계기로 범태평양노동조합(태로) 사무국이 상하이에 설치되었다. 프로핀테른과 태로 사무국은 활동가를 파견하고, 자금을 지원하고, 현장 활동가들에게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지침을 발표하는 등 아시아 지역 노동운동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했다. - P83

김수진은1920, 30년대 민족주의 지식인층이 여성 문제를 다루는 방식을 분석해 조선 신여성의 의미가 ‘신여자, 모던 걸, 양처‘라는 상징적 하위 범주 세 가지로 분화되었다고 말한다. ‘신여자‘는 남성 지식인의 지도 아래 아직 근대적 여성성을 갖추지못한 ‘구성‘을 계몽하는 근대적 주체로 상정되었다. ‘모던 걸‘은 식민지 조선에서 대체로 실체가 결여된 미디어적 구성물에 머물렀고, 서구화·근대화를 좇는나쁜 주체로 배치되었다. 마지막으로 ‘양처‘ 타입의 신여성은 근대적 과학 지식으로 무장한 현모양처로 근대화의 바람직한 주체로 간주되었다(김수진 2009). - P94

"여성의 교육, 경제적 자립, 성적 자율성"을 강조한 식민지 조선의 자유주의 페미니스트들은 빠르게 산업화되어 가는사회에서 노동문제를 다루는 데 성공하지 못했고, 여성참정권 운동이나 법 개혁 요구를 비현실적으로 만드는 식민지라는 조건 때문에 손발이 묶여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사회주의 페미니즘은 자유주의 페미니즘의 문제의식에 더해 노동계급 여성의 조직화와 계급 혁명을 통한여성해방의 비전을 제시함으로써 자유주의 페미니즘에 대한 강력한대안으로 떠올랐다. - P100

전반적으로 볼 때 부르주아 민족주의 언론은 동정심을 자극하는울부짖는 여성의 이미지와 적색 ‘배후‘에 대한 공포를 결합하는 데서부르주아 민족경제론에 도전하는 여성 노동자들의 급진성을 희석할 수 있는 효과적인 공식을 찾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가부장의 도움이 필요한 불쌍한 빈곤 여성의 이미지와 "노우처럼 돌진하는 실제 여성 투사사이의 틈새는 봉합이 쉽지 않았다. 이를 위해 민족주의 언론이 사용한서사 전략은 강주룡을 비롯한 여성 파업 지도자들을 예외적인 인물로격상하는 것이었다. 이를 통해 이들은 여공의 전투성이라는 불편한 현실에 눈감으며 예외적인 개인과 평범한 노동자들 사이에 안전한 거리를확보하는 효과를 낼 수 있었다. - P142

아나키즘 운동에서는 식민지기 내내 크로포트킨의 상호부조론을중심으로 한 아나코-코뮤니즘이 주류를 이루었지만, 아나코-생디칼 - P161

리즘도 지속적으로 영향력을 발휘했다.
아나코-코뮤니스트와 아나코-생디칼리스트는 혁명 전략, 특히노동조합운동의 위치와 역할에 대해 입장이 달랐다. 아나코-생디칼리스트는 노동운동과 노동조합을 사회혁명의 기반으로 우선시했다. 노동조합을 통해 노동자들은 "경제적 직접행동에 의해 사회혁명을 달성"하는 전략을 따라 민주적 구조와 생산의 자기 관리를 확립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는 것이었다. 반면 아나코-코뮤니스트는 산업 노동자들의 조직적인 계급투쟁에 아나키스트가 깊숙이 개입하는 것을 의심의눈초리로 보았다. 그들에게 노동운동은 전체 혁명운동의 여러 부문 중하나일 뿐이었다. - P162

1930년 부산의 조방 파업은 1930년대 초반 급진적 운동이 고조되는 흐름의 일부였고, 공산주의 적색 노조 운동에 영향을 받은 평양의고무 파업 등 동시대 다른 파업들과 여러 가지 성격을 공유했다. 1930년대 초 부산의 고무 노동자들도 섬유노동자들과 맞먹는 수준의 투쟁성을 보였다. 특히 1933년 10월에 25일간 지속된 연대 파업은 7개 회사고무 여공 700여 명이 오랫동안 치밀하게 파업을 계획했으며 회사가 고용한 깡패들의 잔인한 폭력, 해고, 경찰의 체포에도 불구하고 몇주 동안 물러서지 않았다는 점에서 여성 노동자들의 역량을 분명하게보여 주었다.[12]조방 파업과 평양 고무 파업에는 비슷한 점도 있지만 차이점도 분명 존재한다. 조방 파업 지도부의 핵심에는 1929년 11월, 남성 직공112명이 외형상 친목 단체로 출범시킨 ‘중락회‘가 있었다. 조방의여성 노동자는 대개 농촌에서 모집돼 기숙사 생활을 하는 젊은 여성들이었던 반면, 고무 노동자 중에는 좀 더 나이가 많고 기혼인 여성이 많았다. 조선인이 소유하고 경영하는 중소기업인 평양의 고무공장들과 - P183

달리 조방이 일본인 소유의 대공장이었다는 사실도 파업 노동자에 대한 정재계의 대응 방식에 영향을 미쳤다. - P184

여성 노동자들은 형사와 관리자들의 눈을 피해 통신망을 조직하고 주야간 교대 근무자들에게 비밀 암호를 전파하는 등 비밀리에 준비작업에 들어갔다. 파업의 시작 시점은 "흰 저고리에 검정 치마를 입고손에는 손수건을 들고 여공이 작업장을 순회하며 알리는 것으로 정해졌다. 그 무렵이면 노조 간부들은 모두 체포되거나 해고되고 무장경찰 병력으로 포위된 공장 근처로 접근하는 것이 금지돼 있었다. 또사복형사들은 공장 내 전략적 위치에 배치되어 노동자들을 감시하고있었다. 강일매와 경찰은 노조의 지휘 체계를 사실상 무너뜨렸기 때문에 파업이 불가능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러나 3월 12일 오전 8시, 주야근무가 교차하는 시간, 6000여 명의 노동자들이 한꺼번에 공장 정문으로 쏟아져 나와 경찰과 충돌하기 시작했다. 해고된 노조 위원장이자조방 대한노총 노조의 설립자 안종우는 단 하루 만에 파업을 조직하는 어려운 임무를 "치밀하고 민첩하게 수행해 낸 이외선 등 여성 노동자들의 역할을 높이 평가했다. - P209

1960년대에 노조들은 임금 인상 주장에 힘을 싣기 위해 정부나 한국은행이 생산하거나 노조가 설문 조사를 통해 얻은일련의 통계 데이터를 회사에 대한 노조의 임금 인상 요구안에 첨부하는 것이 상례였다. 생계 부양자인 노동자의 물질적 필요를 충족시키기위해 현재의 임금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한 이런 자료에는 전국 도소매 물가지수, 주요 생필품 가격, 조합원 가구(1960년대동안 평균 5~6인이었다)의 월평균 생활비에 대한 노조원 설문 조사 등이포함되었다.
결국 이런 과정을 거쳐 1960년대 중반 대부분의 노조들에는 남성 생계 부양자의 필요에 맞춰 임금을 책정해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게자리 잡았고, 이는 극심한 성별 임금격차를 가리는 효과를 가져왔다.
1968년 「매일경제는 독자들에게 한국의 임금체계는 "능률급"이 아니라 "생활급"이고 생활급 방식이란 "인습적으로 가정의 부양을 책임지고 있는 남성 근로자에게 보다 많은 임금을 주는 것"이라고 설명하고있다. - P242

급속한 도시화, 농촌인구의 대도시 유입과 함께 신흥 중산층 가정의 등장과 소비사회의 도래는 사회적으로 큰 변화를 낳았다. 1960년대 중반에는 ‘중산층‘이나 ‘대중‘ 같은 새로운 개념에 대한 논쟁이 처음언론에 등장한다. 보수적인 젠더 관념이 지속되는 가운데 개발 국가의경제정책과 성장 제일주의 이데올로기의 영향으로 돈벌이와 소비에대한 사람들의 태도가 급격하게 변화했다. 박정희 정권의 경제 발전 약속이 계층 상승을 지향하는 중산층의 상당 부분에서 현실화되면서, 지난 수십 년간 평등을 지향하는 ‘균‘ 이데올로기에 의해 지탱되었던 하층민에 대한 동정적 인식은 물질적 부에 의해 결정되는 새로운 신분의식으로 빠르게 대체되었다. 그리고 이 같은 계급 차별 문화는 자신의가치와 존엄성을 사회적으로 인정받고자 했던 육체노동자들의 열망과충돌하며 갈등을 낳기 시작했다. - P251

1970년 전태일의 죽음은 민주노조 운동을 규정하게 된 반면, 1962년 김 양의 죽음은 왜 잊혔을까? 현존하는 노동 관련 아카이브에서 ‘김 양‘의 흔적을 찾기는 쉽지 않다. 전태일과 달리 김 양은 자신의생각을 글로 남기지 않았고 두 사람의 죽음을 둘러싼 상황도 상당히 달랐다.
두 자살 항거의 또 다른 두드러진 차이점은 남성 노동자 전태일이어린 여성 노동자들을 위해 목숨을 바친 반면, 김 양은 동료 여성노동 - P274

자들 사이에서 싸우다 그들을 위해 죽었다는 점이다. 이후 불타오른 피복 노동자들의 운동에서 지배적인 세력을 이룬 것은 전태일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남성 지식인 활동가들과 남성 동료 노동자들이었고, 여성조합원들은 적극적 참여자의 위치에 머물렀다. 김 양의 죽음에 영감을받은 광주 JOC의 여성 노동자들은 자율적인 풀뿌리 운동을 발전시켰고, 여러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던 여성들이 합류해 활기찬 기독교 노동운동을 만들어 내고 새로운 세대의 여성 노조 지도자들을 배출했다. - P275

여성 노조지부장이 처음 등장한 것은 1972년 5월 동일방직에서다. 동일방직 주길자의 당선은 기존의 젠더 관계에 따른 노동운동의 권력 구조에 균열을 낸 사건으로 한국 노조 역사에서 큰 전환점이 되었다. 그 당시 전국섬유노조 조합원의 83.2퍼센트가 여성이었으며, 동일방직의 경우 생산직 노동자 1383명 중 1214명이 여성이었다. - P289

노조 활동가들은 성폭력에 대한 위협과 실제 성폭력에 시달렸다.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 초 부산 신발 산업 파업 노동자들의 가장우선적인 요구는 구사대 폭력 근절과 ‘구사 운동‘ 중단이었다. 이 시기신발 회사들이 사용한 가장 효과적인 전략 중 하나는 노동자들 사이에분열을 일으켜 사측이 가한 폭력을 노동자 내부 갈등의 결과로 돌리는것이었다. 공장폐쇄나 다운사이징의 위협, 또는 그와 관련한 소문은 종종 이런 노동자 간 분열로 이어졌다. 실제 공장이 문을 닫고 임금이 체불되는 사례도 점점 더 빈번하게 발생했다. - P321

1980년대 초중반의 노동운동은 1970년대 민주노조운동에 대한부정적 인식 아래 이 같은 대규모 노학 연대를 기반으로 발전했다.
1970년대의 운동은 1980년대 운동 진영이 절대 따라서는 안 되는 모델로 비난 받았다. 비판의 초점은 여성 노동자들이 명백한 정치적 목표를위해 싸우는 대신 노조 강화와 현장 활동을 우선시하는 ‘경제적 조합주의‘를 극복하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또한 1970년대 기업 단위로 활동한민주노조가 하나씩 해체되어 가는 것을 가능케 한 요인으로 연대 활동부족이 큰 문제점으로 지목되었다. - P325

한국여성노동자회협의회 대표였던 이철순은 2000년대 초반의 증언에서 "보통 40대가 넘는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들(당시 여성 노동자의 3퍼센트가 비정규직이었다)이 "20년, 30년 전에는 어느 공장에선가미싱을 타고, 전자 부품을 조립하던 그 여성 노동자들이 아니었겠는가"라고 정곡을 찌른다. - P332

전체 고용에서 비정규직이 차지하는 비율은 지난 수십 년 동안 남녀 모두에서 증가했다. 하지만 성별 분절이 극심한 한국의 노동시장 시스템에서 고용 기간이나 수당 등의 법적·제도적 보호 규정, 사회보험제공 의무, 노조 등의 부담 요인을 안고 있는 정규직 고용을 아예 없애려는 신경영전략의 공세를 가장 앞에서 마주한 것은 여성 노동자들이었다. 1997~98년 아시아 금융위기 당시 여성 노동자들은 가장이 아니라는 이유로 가장 먼저 해고 통지를 받았고, 남성 노조원들은 자신의일자리를 지키려는 필사적인 노력 속에서 여성 노조원 일자리를 비정규직으로 전환하겠다는 사측의 계획에 동의하는 입장을 취했다. 악명높은 초기 사례로는 현대자동차 노조에서 일어난 일을 들 수 있는데,
1998년 비정규직화에 항의하는 파업에서 노조는 남성 일자리를 지키기 위해 여성 구내식당 노동자 144명의 희생에 동의한다. 상대적으로연배가 높은 이 여성들은 대부분 가족을 부양하는 가장이자 남성 파업노동자들을 위해 따뜻한 식사를 준비하며 파업을 열렬히 지지한 동료들이었다. - P3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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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1: A World of Empires
찰스는 대부분의 유럽을 점유했음에도 더 많은 것을 원했다. 교황과 프랑스왕이 그를 두려워하기에 이르렀고 이탈리아 왕자도 찰스로부터 독립하기를 원했다. 찰스는 재임 기간 동안 전쟁에 수많은 비용을 쓰면서 점점 더 재정적으로 가난해졌고 스페인, 네덜란드, 이탈리아 땅을 아들인 필립에게 준다. 찰스는 동생인 페르디난트에게 신성로마제국황제 자리를 물려주었다.
콜럼버스 이후 콩키스타도르 항해가 시작되었다. 필립 2세가 남아메리카에 금을 찾는데 혈안이 되었고 스페인의 금광으로 마침내 돈을 끌어모으게 된다. 아프리카 땅은 점점 더 악화의 길로 치닫게 된다.

CH2: Protestant Rebellions
오늘날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영연합국은 같은 국가이지만 17세기만 해도 스코틀랜드는 독립국이었다. 스코틀랜드 여왕 메리는 5살 때 어머니인 Mary of Guise로부터 왕권을 계승했다. Mary of Guise는 가톨릭 신자여서 딸인 메리가 프로테스탄트에 물들까 프랑스로 보내 가톨릭 교도들 사이에서 13년 간 자라게 했고 몇 년 후 그녀는 사망했다. 스코틀랜드의 프로테스탄트 전도사인 John Knox는 여성(특히 가톨릭교도 여성)이 남자들을 제치고 왕권을 차지해서는 안 된다 주장했다. 당연히 메리는 동의할 수 없었고 18살이 되자 자신의 왕권을 찾기 위해 스코틀랜드에 입성한다. 그녀는 가톨릭교도였으나 프로테스탄트도 스코틀랜드 땅에서 잘 살아나가기를 바랐다. 그녀는 프로테스탄트 교도인 귀족 Darnley경과 결혼을 했다. Darnley는 메리보다 더 큰 권력을 갖기를 원해 프로테스탄트 귀족 일부와 함께 그녀를 감금하고 자신이 왕위에 오르는 계략을 꾸민다. 메리는 이 음모를 알게 되었지만 태중에 아기가 있어 그를 용서하기로 한다. 아기가 태어나고 얼마 후 Darnley 집이 통째로 날아가버리는 사건이 발생한다. 사람들은 메리가 살해한 것이라고 짐작할 뿐이다. 프로테스탄트 귀족들은 메리의 아들인 제임스를 왕위(13개월짜리 아기)에 올리고 메리는 갇힌다. 메리는 탈출하여 영국으로 가 사촌인 엘리자베스에게 도움을 청하지만... 엘리자베스는 그녀의 힘이 두려웠고 결국 메리는 교수형에 처해진다.

CH3: James, King of Two Countries
엘리자베스 여왕이 1603년에 사망하자, 가까운 친척이었던 메리의 아들인 제임스 6세가 영국 왕의 자리에 오른다. 당시 영국은 세 개의 종교 집단이 맞서고 있었다. 가톨릭, 성공회 교도, 청교도다. 이들은 제임스 6세에게 각자의 요구를 들어주기를 청원한다. 이 와중 가톨릭교도인 Robert Catesby와 Guy Fawkes가 제임스와 프로테스탄트 의회 지도자들을 제거하기 위해 의회 건물을 날려버릴 계획을 세우고 건물 지하 터널을 몇 달동안 판다. 그러나 Guy Fawkes가 지하실에서 성냥을 소지했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저세상으로 가고. 제임스는 영국에서 숨어 있는 가톨릭 신자들을 법으로 압박한다. 의회도 불만은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는 법 위에 왕이 존재하는 것이라 단언한다. 오늘날 제임스는 성경을 새롭게 번역(킹 제임스 성경)한 것으로 이름이 알려져 있다.
제임스 왕은 필립 2세가 남아메리카에 금을 캐는 것을 보고 부러워 북미에 금을 찾고자 부자들을 3대의 배를 태워 보낸다. 1607년 5월 13일 우여곡절(돌풍을 만나고 등등...) 끝에 미국 땅을 밟았다. 원주민인 포하탄을 만난 영국인들은 마을을 공격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고 리더인 존 롤프와 포하탄의 딸인 포카혼타스가 결혼한다. 영국인들이 정착한 곳은 제임스타운으로 현재도 그대로다.

CH4: Searching for the Northwest Passage
사뮈엘 샹플랭은 1604년 프랑스 앙리4세의 명을 받은 뒤 몇몇 프랑스인들을 이끌고 캐나다를 탐험한다. 여러 곳을 조사한 끝에 마침내 퀘백에 정착하여 거주 환경을 조성했고 이것이 오늘날 퀘백주의 시작이었다.

CH5: Warloads of Japan
영국이나 프랑스 탐험가들이 북서쪽을 향하는 동안 일본에서는 약해진 황위에 다이묘들이 영지 제각각을 다스리며 내전 중이었다. 혼란한 정국을 통일한 이가 도요토미 히데요시다. 그러나 그는 일본을 정복하는데 성공했지만 한국을 지나 대륙인 중국 진출에 실패했다. 그가 죽고 나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히데요시의 권력을 이어받는다.

CH6: New Colonies in the New World
신대륙에 많은 청교도인들이 들어가 자리를 잡은 후 플리모스 플랜테이션 북부에 2천명이 넘는 청교도인들이 매사추세츠에 입성했다. 오늘날의 매사추세츠 이민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신대륙에 뉴잉글랜드, 뉴프랑스, 뉴스페인이 이런 식으로 형성되었다.
독일은 아직 그 기반이 없는 상태였다가 암스테르담에 기반을 둔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가 뉴암스테르담에 자리하며 세력을 자리잡을 수 있었다.

CH7: The Spread of Slavery
뉴 암스테르담을 원했던 영국인들은 모피 부역으로 영국에 돈을 가져다줄 수 있을 거라 생각했으나 미국에 정착한 영국인들은 많은 부를 생산해내지 못했다. 킹 제임스는 제임스타운 식민주의자들이 금을 찾아내기를 희망했지만 버지니아의 흙은 보석이나 값비싼 광석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영국은 John Rolfe가 버지니아에서 담뱃잎(green gold)를 사들여서 부를 끌어모으게 되었다. 담배를 비롯한 플랜테이션 상품의 삼각 무역으로 인해 점점 더 많은 노예들이 미국으로 가게 되었다.
포르투갈은 아프리카 땅의 일부를 점령하기를 원했고, 서아프리카의 Ndomba가 그 대상국이 되었다. 양국 간 전쟁이 30년 넘게 이어졌는데, 포르투갈은 Ndomba 왕가의 공주인 Nzinga를 포섭하여 기독교인으로 개종하게 만들고 평화를 만들 수 있었다. 그러나 포르투갈의 욕심이 그렇게 간단할 리 없었고 결국 포르투갈은 야심을 드러내 Ndomba를 다시 쳐들어온다. 수년간 싸움 끝에 포르투갈인들은 마침내 전투를 포기하고 물러갔고 Nzinga는 평화롭게 Ndomba를 죽을 때까지 다스릴 수 있었다. 그녀가 죽고 나서 고국인들이 그녀를 전쟁의 신으로 불렀던 것처럼 포르투갈인들은 나라명을 ngola로 명명했고 이것이 오늘날 앙골라가 되었다.

CH8: The Middle of the East
중동에 모하메드 종교를 기반으로 한 이슬람 제국이 들어섰다. 한편으로 아시아 유목 세계에는 투르크가 등장했다. 그들은 어느 순간 세력을 키워 아랍군보다 더 군대력을 발휘하게 된다. 투르크계 중 Ghaznavids는 이슬람 율법을 거부하고 페르시아 땅으로 건너갔는데 몽골의 침입으로 페르시아는 무너졌다. 이스마일은 동족과 함께 몽골군을 공격하여 승리하여 사파비 왕조를 세운다. 압바스가 황제가 오른 뒤 전쟁으로 파괴된 나라가 재건되었다. 투르크 군을 기술과 무기를 들여와 훈련시키고 무역을 통해 경제를 부흥시켰다. 그러나 갈수록 흉포한 정치를 하고 형제들과 자식이 자신의 권위를 노릴까 두려워하여 의심한다(아들은 심지어 죽임).
투르크의 지도자 중 하나였던 오스만은 추종자들이 지중해 북서부에 모여 살도록 했고 투르크는 오스만 제국이 되었다. 중동에는 페르시아와 오스만이라는 두 강자가 집권하게 되었다. 오스만 투르크는 페르시아, 비잔틴 제국을 넘어 유럽까지 진출하게 되었다. 오스만 투르크에 부가 쌓이자 집권자들은 부패의 늪에 빠지고... 무라드 술탄은 자신의 권위를 찾기 위해 칼을 갈고 기다렸고, 시간이 되었을 때 거침 없이 정적들을 제거했다. 나중에는 무자비하기까지 했다.

CH9: The Western War
무라드 술탄이 중동을 두고 오스만 투르크와 전투를 하고 있을 때 유럽은 30년 전쟁(1618~1648)으로 피해를 겪었다.
당시 독일은 페르디난드 2세가 통치자라는 명목을 가졌으나 여러 개의 지역마다 세력이 있었고, 종교도 달랐다. 페르디난드 2세는 가톨릭 신봉자였는데 프로테스탄트인 보헤미아 지역이 가톨릭 법률에 항의하며 들고 일어나며 전쟁이 시작되었다. 페르디난드 2세는 신성 로마 제국까지 가지고 싶은 욕구를 가졌고 독일의 7 지역의 왕자들을 포섭하고, 오스트리아, 스페인까지 끌어들여 자신을 뽑아달라 설득했다. 이때 덴마크 왕인 크리스티안 4세는 페르디난드 2세의 권위를 두려워하여 3만 군대를 이끌고 독일로 쳐들어온다. 페르디난드 2세는 알버트 월런스타인 장군을 기용하여 대응한다. 스웨덴 왕인 구스타부스 2세(프로테스탄트)는 페르디난드 2세를 대응하기 위해 적극 준비를 하여 덴마크 밖으로 그들을 몰아낸다. 스웨덴인과 독일인은 프로테스탄트 연합이 되어 독일의 심장부에서 페르디난드의 수도인 비엔나를 향했다. 구스타부스가 전투에서 사망하자 프로테스탄트 연합은 쪼개지고 전쟁이 장기화되자 독일의 각 지역의 리더들과 페르디난드는 평화 협약을 맺어 나갔다. 그런데 프랑스가 페르디난드에게 전쟁을 선포하여 전쟁은 이어졌다. 각국의 지도자들이 사망하면서 전쟁의 동력은 점점 떨어져나갔고 베스트팔렌 조약에 서명을 했다. 그러나 프랑스와 스페인은 11년 전쟁을 더 하여 1659년까지 이어졌다.

CH10: Far East of Europe
도쿠가와 이에야쓰 사후 아들인 히데타다가 차기 쇼군이 된 뒤 유럽에서는 30년 전쟁이 치뤄지고 있을 때 예수회를 비롯한 가톨릭은 철저히 배제되었다. 그 바람에 기독교인이 많이 있었던 시마바라에 폭동이 일어났으나 철저한 진압으로 그들은 항복하고 순교의 길로 갔다(<침묵>의 내용이 이를 배경으로 함). 일본은 그 뒤 한참동안 가톨릭 선교를 철저히 배제했고 내면을 가꾸는 선불교(신라 8~9세기 무렵에도 선불교가 유행)가 유행했다.
중국의 명이 쇠퇴할 무렵 이자성이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그는 진압당했고 청 왕조가 들어섰다. 민족을 철저히 가르고 분리했던 시기를 지나 강희제 때 들어서 민족 간 통합 정책을 펼치면서 그는 중국을 부강하게 했다.

CH11: The Moghul Emperors of India
인도는 자한기르의 아들 샤 자한이 왕이 들어서고 나서 인도 전역을 부강하게 만들었다. 그에게는 아내 뭄타즈 마할이 있었는데 아내 사랑이 지극했다. 하필이면 전쟁을 함께 나갔다가 아내가 병을 얻어 사망한다. 아내가 죽자 너무 많이 울어서 시력을 잃을 정도였다고… 그는 2년의 애도 기간 후 타지마할을 짓는다.
샤 자한은 아들 중 현명한 아우랑제브를 놔두고 다라라는 아들에게 애정을 쏟았다. 아우랑제브는 반란을 일으켰고 아버지의 권위를 빼앗아 등극한다. 아우랑제브 시기 영국은 벵갈 지역에 도시를 내어 공장을 짓고 항구를 만들었는데 그곳이 현재의 캘커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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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괭 2024-09-14 13:0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

거리의화가 2024-09-20 20:39   좋아요 0 | URL
괭님 한참 앞서나가고 계실듯합니다^^ 열심히 따라갈게요!

청아 2024-09-18 22: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랑합니다 >.< 저도 읽고 있어요!!

거리의화가 2024-09-20 20:40   좋아요 1 | URL
ㅎㅎ 청아님 시작하셨군요^^ 남은 9월동안 열심히 읽어보겠습니다.
 

2장

교만은 습관적으로 자신이 타인들 위에 있다는 생각과 다른사람들을 충분히 인정하지 않으려는 생각을 수반하는 특성이다. 교만에는 많은 형태가 있는데, 어떤 사람들은 교만의 한 가지 형태만갖기도 한다. (인종적 교만을 보이는 사람들이라도 계급적 교만은없을 수 있고, 그 계급적 교만 대신에 인종적 교만에 매달릴 수도있다.) 하지만 남자들이 미국 내 위계질서 어디에 위치해 있든 간에, 오랜 전통들은 그들에게 여성은 충분히 중요하지 않으니 봐도 괜찮다는 젠더적 교만을 공급해 왔다. 교만은 탐욕과 질투 같은다른 나쁜 성질들에 부추김 당하기도 하는데, 이 다른 성질들이 교만함과 결합하면 무엇보다도 사회적으로 유독해진다. - P56

대상화는 사회적으로 잘 알려진 현상이다. 자율성과 주체성의부정을 수반한 수단화에는 깊숙한 내적 근원이 있다. 바로 교만이라는 악이다. 다른 사람들(그들 가운데 적어도 몇몇 집단들)이 온전하게 실재하지 않고 자아만이 실질적인 시야에 들어와 있으며, 노력의 초점이 된다. 시기와 분노는 교만의 사촌들이다. 인간성이라는 아름다운 비전은 거부하고 본질적으로 자신을 왜곡하는 경향을 복제하기 때문이다. - P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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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장 대상화


사람을 사물로 다루는 데에는 여덟 가지의 별개 개념, 여덟 가지의 방법이 있다.
1. 수단성(Instrumentality): 대상에 자율성이나 자기 결정이 부재한다고 여긴다.
2. 자율성의 부정(Denial of autonomy): 대상에 자율성이나 자기 결정이 부재한다고 여긴다.
3. 타성성(Inertness): 대상에 행위자성 및 활동성 역시 부재한다고 여긴다.
4. 대체 가능성(Fungibility): 대상을 같은 종류의 다른 대상 A, 혹은 다른 종류의 대상 B와 교환 가능하다고 여긴다.
5. 가침성(Violability): 대상에 온전한 경계가 부재한다고 여겨 그것을 깨고, 부수고, 침입하는 것이 허용된다고 여긴다.
6. 소유권(Ownership): 대상을 누군가에게 소유되었거나 소유 가능한 것으로 여겨 사고팔 수 있다거나 재산처럼 다룰 수 있다고 여긴다.
7. 주체성 부정(Denial of subjectivity): 대상의 경험이나 느낌을 (만약 있다고 해도) 고려할 필요가 없다고 여긴다.
8. 침묵시키기(Silencing): 대상을 말할 수 없는 것으로 다룬다.

인간 존재에는 두 가지 핵심적인 특징이 있다. 주요 종교들과 널리 퍼진 세속적 문화가 오랫동안 바르게 가르쳐 왔던 자율성과 주체성이다. - P28

성차별주의는 여성이 남성보다 구체적인 면에서 열등하다는 것을 뒷받침하는 신념 체계라고 정의할 수 있다. 성차별주의자는 그 신념 체계를 이용해서 여성의 참정권과 고등교육 등을 부정한다. 여성 혐오란 그와 반대로 실행 메커니즘이다. 여성 혐오자는 견고한 특권 속에 들어앉아 여성을 그 안에 들이지 않겠다고 마음먹은 사람이다. - P37

대상화한다는 것은 그것을 사물로 다루겠다는 뜻이다. 하지만 우리는 책상이나 펜을 사물로 다루는 것을 두고 ‘대상화‘라 부르지는 않는다. 책상과 펜은 그 자체가 사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대상화는 사물로 변환한다는 것을 의미하고, 실제로는 사물이 아닌 인간 존재를 사물로 다루겠다는 의미다. 그러므로 대상화는 그 대상에 인간성이 존재한다고 여기기를 거부하는 것이며, 더 많은 경우 완전한 인간성을 적극적으로 부정하는 것까지 의미한다. - P41

라우만과 동료 저자들은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남성은 그들이 한 섹스가 합의하에 이루어졌다고 생각한다. 여성은 그것이 강요당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상호 작용에 대한 기본적인 사실은 남성들의 특권 의식이 여성들은 남성에게 무언가를 해 주기 위해 존재한다는 반쯤 의식적인 신념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 이 남자들은 자신들이 강요한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그들은 실용적인 사회적 합의 속에서 자신의 몫을 요구한다고 생각할 뿐이다. - P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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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4-09-12 21: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사작했어요. 열심히 읽어봅시다!!

거리의화가 2024-09-20 20:50   좋아요 0 | URL
다락방 님 잘 지내셨지요? 이 책 주말 동안 다 읽어버릴까 생각 중입니다^^

다락방 2024-09-20 21:46   좋아요 0 | URL
앗 저도 그러면 한 번 도전해볼까요? 주말 동안 다 읽기요!!
 
허삼관 매혈기 위화 작가 등단 40주년 기념 리커버 특별판
위화 지음, 최용만 옮김 / 푸른숲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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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능할까?

야곱 알만스의 일개 백성도

장미와 같이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이

죽어갈 수 있을까?


남들 앞에서는 다소 비굴해 보이지만, 자식과 마누라 앞에서는 자신만만해 집에서 늘 잔소리가 많은 사람. 그는 그의 삶이 그렇듯 현실적인 사람이다. 그의 이름은 허삼관이다. 


허삼관은 성안의 날실 공장에서 누에고치를 대주는 일을 하는 노동자로 일한다. 이 부근에는 피를 팔고 돈을 받는 사람들이 있다. 피를 잘 만들기 위해 몸을 관리하는데, 물도 마시지 않고 물을 마신 뒤에는 오줌까지 참는 모습이 웃프기 짝이 없다. 혈두는 병원에서 피 파는 걸 관리하는 사람인데 사람들은 그에게 좋은 값을 받으려고 아첨을 하며 갖은 노력을 다한다. 방씨와 근룡은 허삼관과 피를 함께 파는 동지다. 


방씨가 말했다.

"우리가 판 건 힘이라구. 이제 알겠나? 자네 같은 성안 사람들이 말하는 피가 바로 우리 촌사람들이 말하는 힘일세. 힘에는 두 가지가 있지. 하나는 피에서 나오는 힘이고, 나머지 하나는 살에서 나오는 힘이야. 피에서 나오는 힘은 살에서 나오는 힘보다 훨씬 더 쳐주는 법일세."

허삼관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알겠어요. 그 힘이란 게 주머니 속의 돈이랑 똑같은 거군요. 쓰고 나서 다시 벌어들이는...."


허삼관에게는 허옥란이라는 아내와 일락이, 이락이, 삼락이라고 하는 세 명의 아들이 있다. 가족이 있다는 것은 소위 바람 잘 날 없는 일들이 많을 수 있음을 뜻하기도 한다. 

허삼관은 집안에 일이 있을 때마다 피를 팔고 35원을 받은 후 돼지간볶음에 황주를 먹으러 가는 것이 루틴이었다. 


잠시 후 돼지간볶음 세 접시와 황주 세 잔이 나왔다. 허삼관이 돼지간을 집으려고 젓가락을 들다 보니, 방씨와 근룡이는 술잔을 먼저 들어 입술에 살짝 대고 눈을 가늘게 뜬 채 한 모금씩 마셨다. 두 사람의 입에서 동시에 "카" 소리가 터져나왔고, 찌푸렸던 얼굴이 기지개를 켜듯 팽팽해졌다.

"이번에는 깔끔하게 됐구먼."

방씨가 한숨 돌리며 말했다.

허삼관도 들었던 젓가락을 내려놓고, 술잔을 들어 한 모금 살짝 맛보았다. 황주가 목줄기를 타고 따뜻한 기운을 전하며 흘러내리자 그의 입에서 자기도 모르게 "카" 소리가 새어나왔다. 방씨와 근이가 그 모습을 보더니 소리 내어 웃었다.


평범한 직장인이 일터에 문제가 없다면, 사회가 혼란하지 않다면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었을까. 문화대혁명으로 먹고 살 길이 어려워지고, 농촌 소개령이 떨어지지 않고, 아들과 떨어져야 할 일이 없었다면 집안은 덜 힘들지 않을 수 있었을지.

이 때 먹는 돼지간볶음과 황주는 자신의 몸을 내어 놓고 소정의 보상을 받는 개념일 것이다. 그러나 피를 한 번에 팔 때 두 그릇을 뺀다고 한다. 몸에 들어가는 주사 바늘 자체가 싫은 나로서는 검진 때 한 번씩 빼는 그 주사 바늘만큼의 피도 겁이 나는데 하물며 두 컵도 아니고 두 그릇이라니 생각만 해도 버거웠다. 아무튼 한 번 피를 팔고 나면 세 달은 쉬어야 보충이 될 정도라고 한다. 1950~1960년대 무렵은 중국도 먹을 것이 변변치 않던 시절이었다. 먹는 것이 부실한 마당에 피를 내어놓는다는 것은 목숨을 담보로 한 행위일지 모른다. 


가끔 아버지가 만들어주셨던 오이냉국이 생각날 때가 있다. 찬 음식에 시큼한 식초를 더한 이 음식은 원래 내 기호에 맞지 않는 음식이었다. 어릴 때는 집안 분위기를 험악하게 만드는 아버지가 싫어 피해다니기 바빴었다. 그러다 어느 날 아버지가 조금은 변했다고 생각이 들었을 때가 찾아왔는데, 이따금씩 오이냉국을 만들어서 우리에게 내어주시곤 했다. 그때는 이 음식을 먹으면서 '참 맛대가리 없다.' 했지만 겉으로는 아무 말 없이 먹고는 했다. 그러나 한참을 지나 지금의 나이가 되었을 때 이따금씩 이 음식이 생각날 때가 있는데 이 책을 읽으며 이 때의 기억이 또 떠올랐다. 구체적인 기억도 아니고 그저 스냅샷 같은 장면으로 기억될 뿐인데도 내 뇌리에 잔상처럼 남은 것을 보면 이는 내게 제법 중요한 기억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사람마다 긴 인생을 지나며 고비는 찾아온다. 허삼관의 인생에도 여러 번 고비가 있었다. 작품 마지막 무렵 최후의 죽을 고비가 지나고 시간이 꽤 흐른 뒤 허삼관은 거리에서 어떤 냄새를 맡으며 피를 팔고 나와서 먹던 음식들을 떠올린다.


"난 그냥 돼지간볶음하고 황주가 먹고 싶어."


마침내 돼지간볶음 세 접시와 황주 한 병, 두 냥짜리 황주 두 사발을 마주한 허삼관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음식 자체에 대한 욕구보다는 아픔과 고통을 넘기고 승화시킨 그 때의 기억과 감각을 찾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각자의 삶에서 다시 떠올리기 싫은 순간들이 있을 것이다. 한 고비를 넘겼다고 생각했는데 더 큰 고비가 찾아오면 사라지는 것이 낫겠다 싶을 때도 있지 않나. 그런 험난한 순간을 넘어온 이들에게 이 책은 결코 웃을 수 없는 씁쓸함을 남기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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