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여자들에게 : 엉망인 여성해방론
다나카 미쓰 지음, 조승미 옮김 / 두번째테제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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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의 생명, 그 뿌리를 간직한 자궁이 지금 부활하고 있다. 수컷을 바라보며 다른 암컷과 경쟁하여 교태를 부리는 가운데서만 살 수밖에 없던 여자가 자신의 역사성에서 자신을 해방하려 하는 것이다. 지금 그런 여자가 있다.
암컷의 제 새끼 죽이기, 이런 피억압자의 극한의 자기 표현은 여성해방운동과 동시에 일어나고 있다. 그 배경에 여자라는 성의 변증법이 있다. 부정적인 자궁에서 긍정적인 자궁으로 이르는 길은 암컷에서 여자로, 여자에서 여자들로 이어질 길이다. - P65

이 책을 읽기 전 공교롭게도 일본의 1960년대 후반에서 1970년대 초반까지 있었던 도쿄대 투쟁 등을 비롯한 사회적 사건을 둘러싼 이야기를 다룬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 을 읽었다. 그리고 그 책을 함께 읽는 분들을 통해서 이 책의 존재를 얼핏 듣게 되었으니 우연치곤 정말이지 절묘한 타이밍이라고밖에 할 수 없다.
과연 일본의 우먼리브운동은 어떤 과정에서 시작되고 전개되었는지 이 책을 읽기 전 내가 궁금했던 부분이었다. 그러나 고백하건대 중반 부분까지 이 책을 읽는게 힘들었다 말할 수밖에 없겠다. 저자의 개인사를 비롯하여 그녀의 주장에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 많았던 것이다. 다행히 후반부에 가니 저자의 주장을 어느 정도 이해하게는 되었다만.

책에서 세 가지 키워드를 뽑아냈다. 첫 번째, 당시 일본의 역사. 두 번째, 당시 일본의 신좌익 운동과 사회적 투쟁이 여성해방운동과 교차되었을 때의 전개와 결과. 세 번째는 여성의 실존적 문제에서 여성해방운동과의 관계. 결국 역사, 사회, 개인의 문제다.

저자의 개인적 고백은 솔직했다. 꽤 많은 여성들이 어릴 적 남성들에게 성추행과 성폭행을 당하지만 같은 여성이자 나를 낳은 어머니에게조차 그 사실을 털어놓는 일을 꺼려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세월이 흘러서 구체적인 기억이 사라진다 해도 그 잔상과 불쾌한 느낌은 여성들을 계속 따라다닌다. 가장 큰 문제는 그 경험이 일회적 사건으로만 끝나지 않고 여성들의 신체적, 심리적 트라우마를 남기는 것이다. 그 귀결이 무엇이든 폭력적인 형태로 나아가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 씁쓸함을 남긴다.

나는 어디까지나 내가 저지른 죄상이 무엇인지 전혀 추측조차 못하는 죄인이었다. 나는 열심히 어떻게 된 일인지 이해하려 했다. 엄마가 자꾸 묻는 바람에 벽에 딱 붙어서. 그런데 뇌리에는 ˝다른 사람들한테 말하면 안 돼!˝ 하고 무서운 표정을 한 엄마의 말만 남아 있었다. - P103

잘못을 저지른 남성은 그 일을 뉘우칠 리가 없는데(다른 여성에게 범죄를 안 저지르면 다행) 정작 피해를 입은 사람은 자신을 죄인으로 취급하고 괴로워한다. 결국 가장 가까운 어른인 부모의 역할이 중요하다 말할 수밖에 없겠으나 그들도 사람이라는 현실이 있다. 게다가 아이를 낳는 것부터 선택해야 하는 여성들은 아이를 키우는 일에서조차 책임을 더 가져갈 수밖에 없는 구조다. 사회적 제도는 여전히 너무나 부족하고 차별적 관행은 개선되질 못하고 있다.

평범한 가정에서는 평범한 부모가 평범하게 아이를 가르친다. 즉 평범한 가정에서는 딸에게 장래에 좋은 아내이자 좋은 엄마가 되라고 한다. 어린 완벽주의자 여자들은 어떻게든 부모의 기대에 부응하려고 애를 쓴다. 그러다가 좌절하면 자신을 한심하다고 여기고 스스로를 철저히 벌하려고 또 애를 쓴다. 한 되씩이나 되는 밥을 먹고서는 토해 낸다.
강조하고 싶다. 세상 어디에도 없는 가정이 이상이 된 현실이 바로 이 병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 P384

저자의 주장이 이해는 가지만 이를 개인과 가정의 문제로만 다루기에는 불합리한 면이 있다. 구조적인 도움도 뒷받침되어야하지 않을까. 얼마 전 홀로 아이를 키우는 엄마가 몇십만원의 원금을 빌렸다가 말도 안되는 이자로 빛더미 때문에 목숨을 끊었다는 안타까운 이야기를 접했다.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기 위해 사회는 어떤 대답을 해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1960년대는 미소의 두 강대국이 존재했지만 세계적으로 좌익의 흐름이 우세할 때였고 일본도 그 선상에 있었다. 베트남 전쟁, 한일조약 소식이 들리자 일본의 민중들도 참지 못하고 일어섰다. 사회당/공산당 데모를 비롯하여 학생 운동도 도처에서 시작되었다.

1969년 1월 18일 도쿄대학 야스다 강당을 점거하고 농성 중이던 학생들을 체포하는 강제 진압이 일어났다. 그날 밤 나는 밤새 친구와 기동대가 빙 둘러싼 도쿄대 주변을 배회했고 이튿날 오차노미즈에서 벌어진 투쟁에 참가했다. 현기증을 느끼면서도 나는 지금 내가 역사의 모든 것을 묻는 투쟁을 벌이고 있다는 직감이 들었다. - P127

나의 어렴풋한 기억에 따르면 적군파가 생긴 직접적 계기는 1969년 4월 28일 ‘오키나와의 날(오키나와 반전의 날)‘이다. 그날의 패배에 대한 총괄에서 적군파가 나왔다. 앞서 1월 18, 19일에 도쿄대 야스다 강당 투쟁 공방이 극적으로 전개되었기 때문에 그때까지 활발히 활동을 하던 신좌익은 이제 지는 해에 가까워졌음을 예상하고 있었다. 그러고 나서 4월 28일 당일에 적이 압도적으로 퍼부은 물량 공세에 신좌익은 박살이 났다.
˝오키나와의 날에 벌인 대중적인 무력 투쟁이 패할 수밖에 없었을 때 자연 발생적으로 도달한 군사적 투쟁의 한계성이 분명히 드러났다. 또 소시민인 투쟁 주체의 한계성 또한 확실히 드러났다. 남자의, 남자에 의한, 남자를 위한 투쟁의 약점이 백일하에 드러났고 혁명이 ‘남자다움‘을 상징하는 시대도 종언을 고했다.˝
위는 당시 내가 쓴 전단지 내용이다. 생각해 보니 1969년 4월 28일에 신좌익은 그전까지 갖고 있던 모든 것들을 잃고서 어쩔 수 없이 풍부한 ‘0‘의 지점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지는 저녁놀 가운데 적군파와 여성해방운동이 태동했다. 이 둘은 신좌익 운동의 아이들로 태어났다. - P241~242

투쟁의 한복판에 있었던 저자는 그 실패를 통한 한계를 느끼고 여성해방운동의 길을 스스로 찾아나갔다. 돌이켜보면 과거 한국의 일제 해방을 위한 투쟁에 나선 이들도 시작이 거창한 대의었음을 인식하고 뛰어든 이들은 없었을 것이다. 시간이 흐른 뒤 내가 그 길에 뛰어들었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달았던 것이겠지. 그러나 보편의 길에 밀려나 있던 여성들이 투쟁의 길에 뛰어들었을 때 저자도 그랬지만 개인으로서의 억압의 경험을 분쇄하기 위해 마냥 뛰어들었던 사회와의 괴리가 쉽게 부수어질 수 없음을 깨닫는 과정이기도 했을 것 같다. 혁명과 진보를 자처한 남성 동지들도 여성 동지들을 편견으로 대한 것은 마찬가지였으니. 자신들이 결혼하면 투쟁하는 여성과 살지 않겠다는 소리를 듣고 뒷일을 자처했으나 오히려 같은 남성들로부터 소외당하거나 차별당하는 경험 같은 것 말이다.

일본 제국주의에 도움을 얻어 승승장구한 전범기업과 우익 정치인들의 행보를 문제시삼고 당시 뛰어든 일본 내 많은 이들이 존재했다. 가해자의 후손을 자처한 그들의 용기가 한편으로 대단하다 생각이 들면서도(물론 그들도 가해자로만 보아서는 안될 것이다) 이는 일부 세력에 불과한 것이다. 그리고 과거 일본 제국주의에 도움을 주었던 많은 민간인들은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 것인가. 남성들은 전쟁에 나아갔고, 여성들은 그들 뒤에 있었다. 아시아 각국의 많은 여성들이 일제의 전쟁을 위해 동원되었는데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고 여전히 문제시되고 있다. 일본 내 여러 민들 간의 차별도 문제적인 것은 마찬가지다. 조선인, 오키나와인 등을 향한 차별적 시선은 개인 간 뿐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이루어졌으니 말이다.

예전에 일본 여자들은 나라를 위하고 가족을 위한다는 대의명분으로 몸과 마음을 다 갖고 있는 총체적인 존재인 자기 자신을 배신했다. ‘정숙한 여자‘는 ‘일본의 어머니‘가 되어 전쟁터 후방에서 침략 전쟁을 지원했다. 그렇게 하는 동안, 전쟁터에서 황군 위안부들은 남성의성을 풀어 주는 역할, ‘신국 일본‘이라는 대의를 지키는 그림자 역할을해야 했다.
앞서 썼듯 위안부 대부분은 본국에서 잡아 온 조선인 여자들이었다. 그리고 지금 일본 국내에서는 남자의 배설 행위일 뿐인 ‘프리섹스‘가 폐지된 집창촌을 대신한다. 한편으로 이런 ‘경제적 동물‘들이 동남아, 대만, 한국에 가서 그 땅의 여자들을 변소 대신으로 삼는다. - P264

나의 어둠과 타인의 어둠 즉 내가 살아가는 모습과 타인이 살아가는 모습이 경합하는 가운데 ‘우리의 내일‘에 빛이 싹튼다. ‘가해자 논리‘는 피억압자 자아를 버리게 할 우려가 있다. 억압자인 동시에 피억압자인 모순 속에 투쟁의 변증법이 숨 쉬고 있는데, 자신을 억압자일 뿐이라고 한쪽으로 기울여 고정하고 굳혀 버리면, 겉으로 내세운 명분밖에 없는 혁명 대의를 사명감으로 갖게 되며, 그런 대의에 나를 바치게 된다. 이런 과정에 ‘가해자 논리‘의 범죄성이 있는 것이다. 내가 실감한 것은 억압자라는 것은 철저히 겉으로 내세운 명분일 뿐이란 점이었다. 이는 늘 깔끔하게 딱 떨어지는 논리였고, 남자들한테 남자다움과 혁명가에 대한 기대를 만족하게 해 주는 논리이다. - P254

이처럼 이 책은 저자가 여성해방운동을 왜 시작하게 되었고, 이를 위한 배경 정보에 의한 개인의 과거사, 이후 현재까지 어떤 과정을 거치며 변화해 왔는지를 그려내었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저자가 후기에도 밝혔듯이 지금의 독자가 보기에는 너무 뜨거운 열정과 행동으로 비춰질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지금의 시대와 그 시대는 다르고 개인의 경험도 다르며 당연하듯 그 때는 저자의 나이가 어렸다는 점을 감안해야 하리라.

여성해방운동은 여성 스스로가 자립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하고, 여성 간의 대화를 통해 연대해나가야 한다 저자는 말하고 있다. 몇십년이 흐르는 동안 일본의 현실이 바뀌었고 여성의 현실도 어느 정도 변화가 있었다. 이 책을 통해 일본 현대 여성해방운동의 흐름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어서 좋은 기회였다고 생각한다(‘변소로부터의 해방‘ 등 뒤에 실린 자료는 참고 자료로도 잘 활용할 수 있을 듯하다).

여성해방이란 여자들이 힘을 모아 여자가 살기 힘든 현실을 깨부수는 것이며, 동시에 서로 갈등하고 미워해온 여자와 여자의 관계성 속에 에로스를 되살리면서 주체성을 확립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여자에게 에로스는 나의 자궁, 즉 나의 자연과 내가 서로 소통하는 가운데 나온다. 소통은 ‘여자인 것‘에서 오는 아픔과 대화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 P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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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4-11-28 10:2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와 다 읽어내신걸 축하드리고 읽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저는 지금 중간 넘어가는데 지금까지도 이 책읽기가 제게는 수월치 않습니다. 저자의 주장에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 있기도 하고 저자가 뭐랄까, 너무 .. 맹렬하게 느껴진다고 해야 할까요. 결이 저랑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저도 부지런히 읽어서 완독하도록 하겟습니다. 다시 한 번 고생하셨습니다!!

그나저나 이 책을 선택한 게 거리의화가 님께 너무나 적절한 타이밍이었네요!! 씐나요!! >.<

거리의화가 2024-11-29 05:48   좋아요 0 | URL
다락방 님도 이 책이 수월치는 않으셨군요^^; 맹렬하게 느끼신 점 저도 백 번 동감하는 바입니다.

그나저나 선정하시는 책이 이번에도 제게 큰 도움이 되었어요. 어찌 이리 딱딱 골라오십니까? 다음 달에도 모쪼록 잘 부탁드립니다^^
 

《성찰》은 “여기서 신의 실존 및 영혼과 신체의 구분이 증명되다”라는 부제에서도 알 수 있듯이, 주제로만 본다면 이전의 형이상학과 거의 다를 바가 없다. 《성찰》이 이전의 철학들과 크게 다른 점은 오히려 책의 구성, 문체, 기술 방식 및 철학적 방법론 등에 있다. 이것들을 통해 이전의 형이상학적 주제들은 완전히 다른 내용으로 거듭났으며, 그 이후로는 누구도 그 이전의 철학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나는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예전에 내가 참되다 믿었던 것들 가운데 의심이 허용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는 내가 생각 없이 경솔하게 하는 말이 아니라, 성찰을 거친 타당한 근거들에 따라 하는 말이다. 그러니 무언가 확실한 것을 발견하길 원한다면, 앞으로는 이런 논증에 대해서는 명백히 잘못된 논증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동의하는 일에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무언가 확실한 것을 만날 때까지, 아니, 다른 것은 몰라도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만큼은 확실하게 인식할 때까지 계속 나아가자.

이제 내가 보는 모든 것을 거짓으로 가정하자. 위조된 기억이 재현하는 것들 가운데 어떤 것도 결코 실존한 적이 없다고 믿자. 나는 아무런 감관도 지니고 있지 않으니, 몸이니 모양이니, 펼쳐있음, 운동, 장소는 키메라[같이 실존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면 무엇이 참된 것일까? 아마도 이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

누구인지는 몰라도 의도적으로 항상 나를 속이는, 대단히 능력 있고 아주 교활한 사기꾼이 있다. 이제는 그가 나를 속인다 하더라도 나 또한 의심의 여지 없이 있다. 실컷 속인다 하더라도, 내가 나는 무엇이다, 하고 생각하는 한, 그는 결코 나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 수 없을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모든 것을 대단히 충분히 숙고한 뒤 마침내 이러한 공리를 확립할 수밖에 없다. ‘나는 있다, 나는 실존한다’는 내가 소리 내어 말하든 정신으로 파악하든 언제든지 피할 수 없이necessario 참이다.

나는 발견한다. 생각이다. 오로지 이것만이 나와 나누어지지 않는다. 나는 있다, 나는 실존한다. 이것은 확실하다. 하지만 얼마 동안? 물론 내가 생각하는 동안. 다시 말해 [이런 일은 불가능하겠지만] 내가 모든 생각을 그만둔다면, 그와 동시에 내가 있다는 것도 완전히 멈추는 일이 일어날 것이다. 지금 나는 오로지 피할 수 없이 참된 것만을 받아들이고 있다. 따라서 나는 엄밀히 말해 오로지 생각하는 것이다. 즉 이전에는 말뜻을 몰랐던, 정신이나 영혼이나 지성이나 이성이다. 그러면서도 나는 참된 것, 참으로 실존하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종류의 것인가? 말했다시피 생각하는 것이다.

나는 나의 정신보다 더 쉽게 혹은 더 명백하게 지각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명백히 인식한다. 왜냐하면 이제는 알다시피 물체들 역시 엄밀하게 말하자면 감각이나 상상력이 아니라 오직 지성으로써 지각되며, 만져지거나 보여서가 아니라 오로지 인식되는 까닭에 지각되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실체라는 사실로부터 어떤 실체의 관념을 지니고 있다. 그렇지만 나는 유한하기 때문에 이것이 무한 실체의 관념은 아닐 것이다. 무한 실체의 관념은 정말이지 무한한 실체로부터만 비롯될 것이다. 또한 나는 무한한 것을 참된 관념을 통해서가 아니라 유한한 것을 부정함으로써 지각한다고 생각해서도 안 된다. 내가 마치 정지를 운동의 부정으로, 어둠을 빛의 부정으로 지각하듯이 말이다. 그렇기는커녕 나는 무한 실체가 유한 실체보다 더 많은 실재성을 담고 있다는 것, 이 때문에 무한한 것, 즉 신에 대한 지각이 유한한 것, 즉 나 자신에 대한 지각보다 어떤 면에서는 먼저 내 안에 있다는 것을 명백히 알고 있다. 만일 내게 더 완전한 존재자의 관념이 없어서, 내 결함을 이것과 비교함으로써 깨닫지 못했다면, 내가 의심하고 욕구한다는 사실, 즉 내게 무언가가 결여되어 있고 내가 전적으로 완전하지는 않다는 사실을 내가 과연 어떻게 알았겠는가?

삶의 모든 시간은 무수히 많은 부분으로 나누어질 수 있고, 이 낱낱의 부분들은 어떤 식으로도 서로 기대어 있지 않으며, 어떤 원인이 나를 이를테면 다시 이 순간에 창조하지 않는다면, 즉 나를 보존하지 않는다면, 내가 방금 전에 실존했다는 것으로부터 지금 실존하는 것이 틀림없다는 결론은 도출되지 않는다. 사실 시간의 본성에 주목하는 사람에게는 명백한바, 무엇이든 낱낱의 순간을 지속하는 어떤 것을 보존하는 데에 드는 힘과 작용은, 아직 실존하지 않는 것을 새롭게 창조하는 데에 드는 것과 똑같다. 따라서 보존과 창조는 자연의 빛에 따라 밝혀지는 것 가운데 하나지만, [실재적으로는 구분되지 않고] 단지 이성적으로만 구분될 뿐이다

많은 부분적 원인들이 나를 만들어내기 위해 참여했다. 이 원인에서는 신에게 귀속되는 완전성들 가운데 하나의 관념을 받았고, 저 원인에서는 다른 완전성의 관념을 받았다. 그리하여 그 모든 완전성은 우주 곳곳에서 발견되지만, 신이라고 하는 하나의 장소에 모두 결합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는커녕 신이 지니고 있는 모든 것 가운데 단일성, 단순성 곧 나뉘지 않음이야말로 내가 신 안에 들어 있다고 파악하는 주요 완전성들 가운데 하나이다. 그리고 이 모든 완전성 가운데 단일성의 관념은 내가 다른 완전성들의 관념들을 얻게 된 어떤 원인이 없었다면 내 안에 자리 잡지 못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이 원인이 나로 하여금 이것들이 도대체 무엇인지를 인식하게 할 수 없었더라면, 이것들이 결합되어 있을 뿐 아니라 나뉠 수 없다는 것 또한 인식하게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나는 내가 인식하는 모든 것을 인식하는 바대로 신한테서 얻었기 때문에 의심의 여지 없이 올바로 인식하며 이런 경우에는 내가 그르칠 리도 없다. 그렇다면 나의 오류는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물론 이 한 가지에서, 즉 의지가 오성보다 더 넓게 열려 있는데도 내가 의지를 지성의 한계 안에 가두지 않고 오히려 인식하지 않은 것들에까지 확장시키는 일에서 비롯된다. 이런 것들에 대해 의지는 차이 없다는 투로 있기 때문에 참되고 좋은 것에서 쉽사리 벗어나며, 그리하여 나는 속기도 하고 잘못하기도 한다.

판단을 내릴 때 지성이 맑고 또렷하게 보여주는 것까지만 의지가 확장되도록 묶어둔다면, 우리가 오류를 범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맑고 또렷한 지각은 의심할 바 없이 어떤 것이고, 따라서 어떤 것도 아닌 것으로부터는 비롯되지 않는다. 그런데 이것의 작자는 반드시 신이다.

상상하는 데에는 내가 인식하는 데에 사용하지 않는 어떤 특별한 마음의 노력이 필요하다. 이 새로운 마음의 노력이야말로 상상력과 순수 지성의 차이를 훤히 밝혀주는 것이다

물체는 본성상 언제나 나뉠 수 있음에 반해, 정신은 전적으로 나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정신, 곧 오직 사유하는 것으로서의 나 자신을 살펴볼 때, 나는 내 안에서 어떤 부분들을 구분할 수 없고, 오히려 내가 완전히 하나이자 통합되어 있음을 인식한다. 그리고 내가 아는 바로는, 신체 전체와 정신 전체가 통일된 듯 보이긴 하지만, 발이나 팔이나 무엇이든 다른 신체 부분이 잘려 나간다 하더라도 정신에서 떨어져 나가는 것은 없다. 나아가 의지 기능, 감각 기능, 이해 기능 등이 정신의 ‘부분’이라고 말해서도 안 된다. 하나의 동일한 정신이 의지하고, 감각하고, 이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정신은 신체의 모든 부분으로부터 직접 영향을 받는 것이 아니라, 뇌로부터, 혹은 아마 뇌의 어떤 작은 부분, 이른바 ‘공통’ 감각이라는 것이 들어 있는 부분으로부터만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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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장

우리는 사물들 자체를 인식하는 것이아니다. 단지 뇌에 주어진 정보에 대한 뇌의 ‘해석‘이 바로 우리의 관념들인것이다. ‘정신‘이란 이 관념들의 총체에 다름 아니다. ‘표상주의‘란 이 과정전체를 표상의 과정으로 보고, 그것을 (분자생물학의 용어를 쓴다면) ‘센트럴도그마‘로 채택한 이론을 가리킨다.
베르그송은 우주와 (뇌를 포함한) 우리의 신체는 연속적이며 그 전체가 물질(‘이미지들의 총체‘)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객체/객관과 주체/주관을 맞세우는 근대 인식론의 구도와 다르다. - P497

어포던스란 환경이 동물에게 제공하는 것이다. 환경이 동물들의 행동.
과 관련해 드러내는, 어떤 면에서는 동물들에게 강제하는 특성이 어포던스이다. 일반적인 생각과는 달리, 깁슨에게 의미와 가치란 (인간을 포함해) 동물들이 환경에 부여하는 것이 아니다. 의미와 가치는 환경 자체에 내재해있고, 오히려 환경이 그것들을 동물들에게 현시한다. "환경은 동물이 행할수 있는 것을 제약한다. 생태학에서 말하는 적소(‘니치)가 이러한 사실을반영한다." (EA, 135) 어포던스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절벽은 동물들로 하여금 죽지 않기 위해 그 앞에서 멈추게 만든다. 물은 동물들을 빠지게 만들지만, 소금쟁이 같은 동물은 그 위를 자유롭게 다닐 수 있게 해준다.33) 불은인간이 그것을 이용할 수 있게 해주지만, 다른 동물들은 두려워 피하게 만든다. 이렇게 어포던스란 환경의 어떤 성격이 동물들로 하여금 특정한 방식으로 행동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 P521

유물론적 환원주의에 따르면 우리 마음의 상태는 곧 뇌 상태와 별개의것이 아니며, 양자는 동일한 것일 뿐이다. 열역학에서의 ‘열‘은 통계역학에서의 ‘분자들의 평균 운동에너지‘일 뿐이다. 어떤 물질이 ‘불에 탐‘은 그것의 ‘산소와 결합함‘일 뿐이다. 마찬가지로 의식의 상태 C는 뇌의 상태 b의결과일 뿐이다. 그러나 환원주의의 실제 내용은 C와 b가 상응한다는 것 - P527

일 뿐이다. 우리는 C 과 b, 이, C2와 b2가, ... 상응한다는 것을 말할 수 있을 뿐, 전자의 차원을 후자의 차원으로 환원할 수 있을지, 다시 말해 후자로부터 전자를 연역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 정신적 차원과 물질적 차원은 전혀 다른 언어/존재론으로 서술되기 때문이다. - P528

무지개는 물리적으로는 파동방정식으로 설명되고, 그것의 지각에 대해서는 뇌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무지개에 대한 역사적·문화적 경험들과 담론들에서의 차이는 접어둔다 해도, 그것에 대한 각 사람의 경험들은 모두 다르다. 이 경험들(심리적 내용들)은 어떤 일반적 법칙성으로도 환원될 수 없다. 뇌에 대한 일반성은, 나아가 다른여러 과학이 동원된 어떤 일반성도 이런 독특성들을 포괄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비환원적 유물론은 마음을 하나의 실체로서 인정하지는 않지만,
마음이라는 차원, 속성은 별개의 속성임을 강조한다. 그래서 이 심리철학은
‘속성 이원론‘이라고도 불린다. - P529

기능주의적 사유는 존재자들을 모두 지표화하고 그 지표들을 계산해서 판단을 내린다. 그러나 지표들은 지표들일 뿐이다. 앞에서(1장, 1절, 82) 예를 들었듯이,
연결망 이론에서 노드 A가 노드 B와 링크되어 있다는 기준은 무엇일까? 환자의 고통은 수치화될 수 있는 것일까? 빅 데이터를 분석하면 과연 해당사태가 구체적으로 이해되는 것일까? 기능주의는 몸으로부터 분리된 정신이라는 데카르트 이원론의 그림자 안에 들어 있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때 아이스만이 사태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데이터 분석만잘했기 때문이 아니라 여러 군데를 발로 뛰면서 말하자면 현상학적 관찰을세심하게 수행했기 때문이었다. 미나레트 구축은 머리가 아닌 몸으로 배 - P534

운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준다. 도제들은 이론을 먼저 배우고 그것을 구현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밑바닥 작업부터 철저하게 몸으로(관찰과 흉내 내기만을 통해서) 배워나가는 과정을 잘 보여준다. ‘인식‘이란 지표들의추상적인 연산을 통해서만은 얻을 수 없는 것이며, 세계 - 내에서 몸을 통해이루어지는 경험이 뒷받침되어야만 성립하는 것이다. ‘체화된(embodied)인지‘가 중요한 것이다. - P535

체화된 인지를 기반으로 전개되는 체화된 마음의 심리철학은 용어가 시사하듯이 마음을 몸에서 추상된 어떤 것으로서가 아니라 몸에 구현되어 있는, 따라서 세계와 맞물려 있는 존재로서 사유하고자 한다. 이 입장을 취할경우 뇌 안에 마음이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 안에 뇌가 있다고도 할 수 있다. 마음은 어떤 실체나 부수물로서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주체성으로서, 그러나 몸에 구현되어 활동하는 주체성으로서 이해된다. 억지로 마음이 어디에 있느냐고 묻는다면, 마음은 몸과 세계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여러 주체적 활동들에 내재해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기능주의에서 벗어난)퍼트넘은 "의미는 머릿속에 있지 않다"라고 말한다. - P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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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장

구조주의 기능주의와 달리 토템 현상을 어떤 실질적인 기능, 유용성, 필요에 입각해서 해석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을 어떤 상징적인 것으로서,
문화를 떠받치는 틀, 구조, 객관적 선험으로서 해석한다. 따라서 토템은 해당 부족과 사실상 어떤 실질적인 연관성도 가지지 않는다. 기존의 모든 해석이 토템과 해당 부족의 실질적 연관성을 당연한 것으로 전제했다는 점에서, 이런 시각은 획기적이다. 토템이란 그 부족을 상징하는 특정한 기의를가지지 않는 순수가표일 뿐이다. 이 기표에 ‘의미‘가 있다면, 그것은 그 기표에 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기표가 다른 기표에 대해 가지는 차이, 달리말해 특정한 기표들의 체계에서 그것이 점하고 있는 위치에 있다. 이는 곧하나의 토템은 그 자체가 특정한 의미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다른토템들과 맺는 관계, 토템들의 체계에서 그것이 다른 것들에 대해 가지는차이. 그 체계에서 점하는 위치에 따라 의미를 가짐을 뜻한다. - P444

구조주의는 의식적 주체의 바깥으로 나아가 사유했지만, 이제 그 바깥의 바깥에 주목함으로써 후기 구조주의 사유들이 도래하게 된다. 구조주의에서 주체는 구조 내에 용해되어버리지만, 구조의 바깥은 주체에게 구조로부터 탈주하고 나아가 그것을 변화시켜나갈 수 있는 가능성의 장을 제공한다. 그러나 주체가 탈주해서 나아갈 바깥은 구조의 바깥이 아니다. 그 바깥은 구조로서의 바깥과 마치 웜홀에서처럼 통해 있는 구조 내의 바깥, 바깥의바깥이다. 그러나 바깥의 바깥은 바깥 너머로 뻗어가기보다 구부러져 안으로 이어진다. 주체가 찾아내야 할 바깥은 구조의 바깥이지만, 그 바깥은 오히려 그 자신과 닿아 있는 가능성이다. 주체는 이 가능성의 지점에서 솟아오르는 사건을 자신의 주름으로 바꾸면서 주체화해간다. - P448

칸트가 실재를 현상의 뒤편으로 물린 데 반해, 현상학은 그 뒤편을 접어두고 현상 자체의 실재성에 충실하고자 했다. 그것을 관념들로써 먹어치우고자 한다면 주체는 구토를 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현상학에서의 이 실재성은 어디까지나 의식의 지향적 대상으로서의 객관이며, 의식에 의해서만 그 의미가 드러날 차원이다. 반면 구조주의에서 의식과 대상은 공히 그 근저의 추상공간구조에 입각해 바로 그런 관계를는 것으로 이해된다.
때문에 양자에게서 ‘의미‘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이해된다. 현상학에서의미노에마는 주체와 객체가 겹쳐진 곳에서 생성되어 나온다. 이겹쳐진 곳, 주름은 신체의 차원인 동시에 지각된 것의 차원이다. 신체는 이양자가 겹쳐진 생생한 경험의 장에서 성립한다. 현상학이 이룩한 큰 개념적 혁신은 근대적 신체 개념의 한계를 타파하고 완전히 새로운 신체론을정립한 점에 있다. 그러나 구조주의 사유에서 신체는 다시 증발되어버린다.
합리주의적 사유인 구조주의에서 신체는 언어에 자리를 내준다. 신체의 차원은 ‘이미지‘이며 ‘기표계’에 종속되기 때문이다. 의미는 추상공간의 요소들이 계열화됨으로써 성립한다. - P4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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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장

데카르트가 방법적 회의의 끝에서 사유하는 자아("ego cogito"), 사유활동(cogitatio)을 발견했다면, 후설은 판단 중지를 통해서 "현상학적 잔여로서의순수의식" (선험적 의식, 순수 자아, 선험적 주체)을 발견했다. 바로 지향적 체험을 실행하는 의식/주체이다. - P360

메를로-퐁티 (1908~1961)는 경험주의와 주지주의(합리주의)는 공히 이현상학적 세계를 만족스럽게 파악하지 못함을 지적한다. 경험주의 예컨대행동주의는 행동에서의 주체성을 제거해버리고 그것을 오로지 기계적인자극-반응의 과정으로 파악한다. 행동을 단순한 요소들로 분석하고 그것들을 연합해서 설명한다. 그러나 인간의 (넓게는 유기체의) 행동은 대상의 속성과 주체의 의도가 섞여 있는 곳, 즉 세계와 주체가 겹쳐져 주름을 형성하는 곳인 신체-주체에서 성립한다.2) 주지주의는 이 현상학적 장을 어떤 순 - P367

수한 개념들로 환원하고자 한다. 그러나 메를로-퐁티는 이런 주지주의의사유는 인간의 삶이 철저하게 육화된(incarné) 것임을 망각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추상적인 개념들의 이런 환원은 인식과 실존 사이에 깊은 골을드리운다. 물론 인간은 상징 수준의 의미작용을 살아간다. 그러나 메를로-퐁티는 일반적인 언어의 의미작용은 어디까지나 육화된 차원에서의 의미작용으로부터 몸의 파롤로부터 변형되어 나온 것임을 역설한다. 신체의지각은 언어로 추상화되기 이전에 이미 그 자체가 하나의 ‘표현‘인 것이다 - P368

현존재는 존재의 목동이며 무의 자리지기이다. 존재의 ‘말 건넴‘은 그 열려있음 안에 들어서있는 현존재에게만 들린다. 그러나 일상성에서의 현존재는 이 말건넴에 등을 돌리고 세상에 빠져있다. 불안은 이 현존재를 그의 세계내존재자임으로 끌어당긴다. 불안 속에서 현존재의 존재가능도 분명해진다. 현존재의 존재가능은 곧 ‘자기를 앞질러 -감‘, 다시 말해 (허공을 향해 앞질러가는 것은 아니므로) 언제나 이미 세계-내에 존재하면서-자기를 앞질러-감이다. 이러한 현존재의 존재를 하이데거는 ‘심려(心)‘로 파악한다. 현존재 특유의 모든 행위는 결국 이 심려에 근거한다는 것이 하이데거의 생각이다. - P397

자기가 스스로 자기의 불안을 가리려 할 때, 즉 자기가 자기를 결정된 존재로서 스스로를 설득하려 할 때 ‘자기기만(자기 속이기)‘이 성립한다. 그런데 이 경우 자기가 자기의 불안을 잠재우려면 자기의 불안을 명확히 직시해야 한다. 이 점에서 자기 속이기는 타인 속이기와 다르다. 타인 속이기(‘거짓말‘)는 스스로는 진실을 알면서 타인에게는 거짓을 말해야만 성립한 - P418

다. 그러나 자기 속이기에서는 진실과 거짓이 하나의 통일된 의식 안에서혼효한다. 자기기만은 의식의 ‘반투명성‘에서만 나타난다. - P419

도달한 곳은 상반된 지점들이었다. 하이데거와 사르트르는 공히 현상학자들로서 ‘현존재‘를, ‘인간존재‘를 사유했지만, 하이데거 사유가 존재에 닻을 내린다면 대조적으로 사르트르는 의식/주체성에 닻을 내린다. 하이데거의 사유가 존재와 현존재의 사유라면, 사르트르의 그것은 의식= 대자와 즉자의 사유이다. 하이데거에게 현세계는 존재가 드러나고 숨는 장으로서, 인간은 이 장에서 철학과 시를 통해 존재를 향할 수 있다. 사르트르에게 현세계는 대자적 주체가 무로부터 스스로의 삶을 창조해나가야 할 장이며, 인간은 이 장에의 앙가주망을 통해 그것을 바꾸어나갈 수 있다. 하이데거가존재에로 경사된 그의 사유를 통해 현실에 어떤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을때 그것은 매우 위험한 것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그가 존재의 빛을 특정한 민족에 결부시켰을 때 필연적으로 나타나게 된 위험이다. 이런 경사를 품지 않았던 사르트르의 정치철학은 보다 의미 있는 것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철저한 주체철학에서는 존재에로 나아갈 수 있는 다리가 끊겨버린다. - P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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