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리남 곤충의 변태 - 과학적 지성과 예술적 미학을 겸비한 한 여성의 찬란한 모험의 세계
마리아 지빌라 메리안 지음, 금경숙 옮김 / 나무연필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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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곤충과 친하지도 않고 식물과도 친하지 않다. 그러다 보니 이 책은 알고는 있었으나 머릿 속에서 지웠었다. 그러다 어떤 강연을 듣고 마리아 지빌라 메리안의 삶과 작업 세계를 보면서 ‘궁금하다’ 싶었고 그 자리에서 바로 주문해서 집으로 받았던 책이다. 그동안 이런 저런 일들로 읽지 못하다가 이제야 읽게 되었다. 


마리아 지빌라 메리안은 예술과 출판을 가업으로 하는 환경에서 자라났는데 아버지는 출판사 주인의 딸이었고 새아버지는 꽃 정물을 그리는 화가였으며 이복 오빠는 동판화 화가였다. 나중에 새아버지의 제자와 결혼을 하는데 남편도 건축물을 그리는 화가였다. 그러나 어느 순간 결혼 생활이 소원해지고 심신을 안정시키기 위해 종교공동체에 5년간 몸을 담았다가 결국 이혼을 한다. 암스테르담에서 새 삶을 시작한 그녀는 곤충의 기원과 생식에 대한 설명을 찾고자 둘째딸과 함께 남아메리카 수리남으로 향했다(수리남은 당시 네덜란드의 식민지였다)는데 당시 나이가 50세가 넘었던 때였다고 한다. 더군다나 그녀는 수리남을 가기 위해 누군가에게 빚지지 않고 자신의 의지와 능력으로 돈을 마련해 여행을 감행했고 그곳에서 관찰한 결과를 충실히 정리해 책으로 출판해 냈다. 당시 표트르 대제가 메리안의 그림의 팬이어서 그림을 사기도 했다는 것을 보면 그녀의 그림 실력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름다운 그림 때문에 마리아 지빌라 메리안을 그저 식물세밀화를 그린 화가로만 인식하면 곤란하다. 식물과 곤충에 대한 풍부한 지식과 직접 관찰한 결과에 대한 묘사력을 보면 과학자라고 해야 맞다. 과학자인데 그림까지 잘 그린 화가라고 해야 정확할 것 같다. 과학과 예술이 어떻게 결합할 수 있는지 이 책은 그 본보기를 보여준다.


이 책을 통해서 온갖 애벌레와 나비, 곤충을 만났다. 어릴 때 곤충의 변태 과정을 간접적으로 경험한 이후 아마 책으로 만나는 것은 처음이지 않을까. 정말 그림이 세밀해서 묘사를 넘어선 느낌이었다. 그림이라지만 2D로 찍은 사진처럼 느껴질 정도였으니까. 또 다양한 식물(에서 열리는 열매)을 만났다.

총 60개 식물의 생김새와 꽃의 모습, 효능(줄기와 가지, 뿌리, 잎) 등을 소개한다. 식물마다 달라붙는 곤충이 있는데 그걸 함께 설명하는 식이다. 직접 관찰하지 않았다면 결코 나올 수 없는 결과물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가시여지’라는 것이 있는데 모습이 꼭 파인애플처럼 생겼다. 하지만 열매는 파인애플과 달리 겉은 노란색에, 안은 흰 과육에 검은 씨가 있다. 

‘카사바’는 식물의 뿌리로 빵을 만든다고 한다. 줄기를 잘라 심으면 증식한다고. 

우리도 잘 아는 ‘라임’은 수리남에서 가장 흔한 과일이라고 한다. 그런데 라임이 열매 이외에 용도가 또 있었다. 꽃과 껍질에서 기름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

‘바코버’는 바나나와 생김새가 비슷하지만 설탕과 물을 섞어서 식초로 사용할 수 있다고 한다. 

‘소돔의 사과’라는 열매는 독성이 강해 사람과 가축이 먹으면 죽는다고 한다. 

‘그리스도 종려나무’는 기름나무라 불리는데 씨앗을 물에 넣고 끓이면 기름층이 분리되어 기름을 얻을 수 있는 형식이라고 한다. 상처를 치료하기도 하고 등불을 밝히는 용도로도 사용한다니 여러 모로 재능이 많은 나무다.

‘장미’는 카리브제도에서 가져왔다고 적혀 있다. 신기한 것은 아침에는 흰색 꽃이 피었다가 낮에는 붉은 꽃, 저녁에는 진다는 사실이다. 마치 하루살이 같지 않나?

‘포도나무’는 온난한 기후 때문에 1년 내내 재배가 가능한데도 수리남 사람들은 심을 생각을 안한다는 저자의 푸념이 재미 있었다. 

‘머스크꽃’은 이름만 들어보면 향기가 폴폴 날 것 같지만 꽃 자체에 향기가 없다고 한다. 꽃이 진 자리에 씨방이 자라는데 그 안에 갈색 씨앗이 있고 그곳에서 머스크 향이 나는 것이라고 한다.

‘플로스 파보니스’는 씨앗이 분만 촉진제로도 쓰이지만 낙태를 할 때도 이용했다고 한다. 이곳이 네덜란드 식민지였음을 앞서 이야기했다. 네덜란드인 아래 제대로 된 대우도 받지 못하는 환경에서 노예로 생활하던 이들은 아이를 가져도 낙태를 감행했던 것이다.

‘타브로우바’는 열매즙을 짜내 햇볕에 말리면 검게 변하여 몸에 문양을 찍는 염료로 사용했다고 하는데 비누로 지워지지 않고 90일 정도를 유지한다고 한다. 


인상적인 곤충에 대해서 설명하기 전, 나방과 나비, 투명 나비의 차이점을 아는가? 나는 이 책을 통해서 처음 알았는데 나방은 털로 덮여 있고, 나비는 깃털, 투명 나비는 비늘로 덮여 있다고 한다.

또한 ‘가장 아름답고 독특한 애벌레가 가장 평범한 곤충으로 변하고, 가장 평범한 애벌레가 가장 아름다운 나방과 나비로 변하는 일을 나는 수차례 보았다(P61)’고 고백하는 부분이 인상적이었다.


‘카사바’에 ‘달라 붙은 노란 줄무늬 애벌레는 수리남 식물들에 가장 큰 피해를 입히는 장본인이라고 한다.  

‘아메리카 자두나무’ 꽃 위를 다니는 애벌레는 꽃을 먹다가 꽃이 떨어지면 나무의 잎파리를 먹는다고 한다. 천성이 굼뜨고 온종일 먹기만 한다는 저자의 소개에 웃음짓기도 했다(그런데 변태 과정을 거치고 나면 아름다운 푸른 나비가 나온다).

‘중국 사과나무’에 있는 애벌레들을 설명하는 저자의 설명도 웃기다. ‘하도 뚱뚱해져서 굴러다닐 지경이며 1년에 세 차례 나타난다.’라고. 

‘구아바  나무’에는 구슬 달린 애벌레가 있다. 애벌레에 구슬이 달리다니(정말이다)!!! 50개의 반짝이는 구슬이 각 면에 달려 있는데 이를 본 어떤 사람은 눈이 아닌가 라고 이야기했다고. 그러나 메리안은 구슬 위에 각막도 없고 사방 팔방에 달려 있는 구슬이 눈인데 왜 한쪽 방향으로만 가는가 생각해서 그건 아니라고 이야기한다. 이 아이의 최종 변태물은 초록색 파리다.

‘노란 마카이’ 잎을 먹는 굼벵이가 있는데 굼벵이 시절은 머리, 꼬리는 검고 몸통은 누런색이다가 변태하면 노란 얼룩무늬 딱정벌레로 변한다. 그러다 다시 알을 낳고 굼벵이가 나온다고 한다. 보통 다른 곤충의 변태 과정은 애벌레에서 번데기가 되었다가 곤충(나비 또는 나방)으로 변하는 과정을 거친다. 

‘풍각쟁이’는 짐작하듯 리라 소리를 내는 곤충이다. 


메리안은 이 책을 ‘모든 자연 애호가 및 연구자에게’ 헌정했는데 그렇다는 것은 동식물에 취미를 가진 애호가나 전문 연구자 모두를 타겟으로 삼았다는 이야기다. 그녀는 관찰대상을 수채화로 그리고 동판을 제작한 후 두 딸과 함께 채색했다고 한다. 곤충은 실제 크기로 묘사하고 그림이 글에 압도되지 않도록 숫자나 알파벳을 붙이지 않았으며 제목도 붙이지 않았다는 것이 눈에 띈다. 

박물학자 메리안은 얼추 50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나방과 나비를 연구했으며, 수리남에서 체류한 두 해 동안 100여 종의 곤충과 53종의 식물을 관찰한 성과를 세상에 내놓았고, 후에 린네는 이 그림들을 참조했다(P26).


‘과학적 지성과 예술적 미학을 겸비한 한 여성의 찬란한 모험의 세계’ 부제가 이 책을 잘 증명해준다. 옮긴이의 해제 또한 저자가 활동한 무대와 그녀의 삶을 이야기해주어 그림과 설명을 이해하는 데 훨씬 더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흥미롭게 잘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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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사바의 뿌리이다. 아메리카에서 인디언과 유럽인은 평소에 이 뿌리로 빵을 만들어먹는다. 뿌리의 즙에는 강한 독성이 있으므로 뿌리를 갈아서 즙을 모두 짜낸다. 이 나라 사람들은 이렇게 처리한 뿌리를 모자를 만들 때 사용하는 물건처럼 생긴 철판 위에 올려놓은다음, 철판 밑에 작은 불을 피워서 남은 수분을 모두 날려 버린다. 그러면 러스크[수분이 적은 서양 비스킷]처럼 구워지는데, 맛있는 네덜란드 러스크와 같은 맛이 난다. 사람이나 동물이 뿌리에서 짜낸 즙을 차가운 상태로 그냥 마시면 극심한 고통을 겪으며 죽는다. 하지만이 즙을 끓이면 매우 훌륭한 음료가 된다. - P41

가장 아름답고 독특한 애벌레가 가장 평범한 곤충으로 변하고, 가장 평범한 애벌레가 가장 아름다운 나방과 나비로 변하는 일을 나는 수차례 보았다. - P61

구아바 나무에서 커다란 애벌레를 많이 발견하여 잎을 먹이로 주었다. 검은 줄무늬를 두른 흰색 애벌레로, 50개의 반짝이는 구슬이 각 면에 달려 있다. 레이우엔훅 씨는 서한 146번 (430~452쪽)에서 이 구슬을 눈이라고 했다. 그런데 나는 지금까지 이를 인정할 수없다. 이것이 눈이라면 애벌레가 뒤쪽과 옆쪽으로도 먹이를 발견할 수 있어야 하는데, 나는 이제껏 그런 경우를 보지 못했다. 게다가 구슬 위에는 언제 보더라도 각막이 없다. 애벌레가 다 자라면 나무에 매달려 커다란 회색 고치를 짓는다. 그런 다음 번데기로 변하는데, 1699년 10월 20일에 나는 그 과정을 보았다. 1월 22일에는 거기에서 검은 줄무늬로 장식된 흰색 나방이 나왔다. 일부 애벌레에서는 흰색 구더기가 나왔고, 열흘 뒤에 멋진 초록색파리가 되었다. - P71

굼벵이는 식물 아래쪽에 보이는 것과 같은 노란 얼룩무늬 딱정벌레로 점차 변했다. 1701년 3월에 이를 발견했는데, 내게는 이 변태 과정이보통 애벌레의 것과 다르게 보였기에 딱정벌레의 변태 환경을 더 연구하기로 마음먹었다. - P81

그리스도 종려나무는 수리남에서 기름 나무olyboom 라고 부르는데, 크게 자라며 보기에우아하다. 노란 꽃이 피며, 거기에서 가시 달린 씨방이 돋아난다. 이 씨들은 처음에는 초록색이다가 익으면 갈색이 된다. 씨를 물에 넣어 끓이면 기름이 분리되어 뜨는데, 수리남에서는 이를 걷어 내어 여러 상처를 치료하는 데 쓴다. 밤에 등불을 밝히는 기름으로도 사용한다. - P93

이 책을 내면서 이윤을 추구하지 않았으며, 그저 내가 들인 비용만 회수하면 족하다.
나는 이 책의 제작비를 따로 마련해 두지 않았으나, 저명한 대가들에게 동판화 제작을 맡겼으며 가장 좋은 종이를 사용했다. 그리하여 곤충 및 식물 애호가뿐만 아니라 예술품 감식가에게도 즐거움과 만족을 선사하고자 했다. 내 목적이 달성되었다는 말을 들으면 기쁘고만족스러울 것이다. - P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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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읽은 책들을 정리하는 시간이다. 사실 며칠 전에 했어야 하는데 늦어지고 말았지만 또 안하고 넘어가면 안될 것 같아서 이제라도 한다. 

2024년은 4월부터 일이 바빠지고, 이후에는 여러 악재들이 겹치면서 독서의 흐름을 지속적으로 유지하지 못했던 것 같아 아쉽다. 작년에 분명 집에 묵혀둔 책을 읽겠다고 세워둔 계획은 어쩜 하나도 지키지 못했다는 것이 스스로의 약속을 저버린 것 같아 창피하다. 그래도 봄부터 시작한 독서 모임을 겨울까지 지속하면서 다양한 책을 읽었던 기회가 있었던 것은 수확이다. 

책 이외에 전시회와 강연을 다녀왔던 것도 기억에 남는다. 봄에 다녀온 <스투파의 숲, 신비로운 이야기> 전시회를 통해서 인도의 불교 미술을 경험할 기회가 있었고, 12월에는 <여성의 시선, 여성의 세계> 강연을 들었다. 같은 건물에서 전시회도 경험할 수 있어서 좋았다. 덕분에 한국근현대 여성 미술에 대한 지식과 경험을 넓힐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총 몇 권을 읽었는지 확인하려고 했는데 그만두기로 했다. 어쨌든 50권 이상은 읽었으나 100권까지는 못 읽은 것 같다. 아무렴 읽은 권수가 중요할까. 결국 어떤 책을 읽고 썼는지가 중요한 것이겠지.



올해 뽑은 책들은 다음과 같다. 

<1945년 해방 직후사>, <북으로 간 언어학자 김수경>, <현대 중국의 탄생>, <세계철학사 총4권>, <뭉우리돌의 바다/들녘>,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 <생명의 여자들에게>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 <한국여성문학선집 총7권>, <딕테>


상반기에 뽑은 책들 중 몇 권과 하반기에 읽은 책들이 추가되었다. 

하반기에 읽었던 <세계철학사> 시리즈와 <한국여성문학선집>, <딕테>가 참 좋았다. 


이중 <북으로 간 언어학자 김수경>과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은 독서모임을 통해서 읽게 된 책이다. 


<북으로 간 언어학자 김수경>은 언어학자 김수경의 개인사를 통해서 한국 근현대의 미시사를 조망하는 동시에 조선어에서 남북한의 현대어로 변환하는 과정의 역사를 경험할 수 있었다. 언어학자로 김두봉, 이희승 정도만 알고 있었는데 김수경이라는 이름을 새겨두게 된 것은 이 책 덕분이다. 그는 특히 당시 세계적으로 트렌드였던 언어의 구조에 천착했고 이를 조선에 맞게 개량하려 했다. 아무래도 언어의 구조와 문법을 설명하는 부분은 어려웠는데 다행히도 출판사에서 결정한 사항인지 언어에 대한 설명과 개인사를 교차로 편집하여 독자가 책을 놓을 수 없게 한 점이 센스가 있었다고 여겨진다. 


<동아시아 반일무장전선>은 1974년 도쿄 미쓰비시 중공업 건물에 폭탄이 투척된 사건을 파헤친 책이다. 누가 폭탄을 터트렸으며 왜 터트렸는가. 사망자나 부상자들 중에는 미쓰비시 중공업 근무자들 뿐 아니라 민간인들의 피해가 있었다. 폭탄을 투척한 이들은 민간인들의 피해까지 있을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해 결과적으로 후회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들은 도쿄 행동위원회의 '늑대' 멤버로 일본의 전범기업이 승승장구하는 모습에 분노하여 적폐청산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천황제를 문제삼으며 천황의 암살 시도를 감행했으나 실패하여 건물 폭파로 방향을 틀었다. 현재의 일본을 생각하면 이런 세력이 당시에 존재했다는 것이 놀랍게 느껴지지만 그때 사회적 분위기는 세계적인 흐름 속에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 책을 읽고 나서 다음달에 바로 <생명의 여자들에게>를 읽을 수 있는 기회가 되어 좋았다. 일본의 여성해방운동의 역사를 경험할 수 있는데 당시 사회상이 어떠했는지 <동아시아 반일무장전선>을 통해 배경 지식을 얻은 상태에서 <생명의 여자들에게>를 읽었기 때문에 읽기 훨씬 수월했다. <생명의 여자들에게>는 앞서 언급했듯 일본의 여성 운동의 역사를 알 수 있을 뿐 아니라 당시 일본의 신좌익 운동과 여성해방운동이 교집합되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또 여성해방운동 속에서 여성의 실존적 문제 간의 충돌과 갈등을 이해할 수 있는 책이었다.


추가적으로 몇 권만 언급하고 마무리하려고 한다. 


<1945년 해방 직후사>는 해방 직후 혼란스러웠던 정국을 살펴봄으로써 현대 한국의 원형을 추적하는 책이다. 해방 후 남북한에 각기 다른 정부가 들어설 때까지의 역사를 다룬 책들은 많지만 이 책은 지금까지 알려진 통념과 다른 사실들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이 있다. 주한미군사령관 하지와 초반에 개인 정치고문으로 일했던 윌리엄스 소령이 미군정의 인사를 좌지우지하면서 정책의 방향을 결정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 하지의 공식 통역인 이묘묵, 조선총독부의 공식 영어 통역관 오다 야스마, 사상 전담 검사인 나가사키 유조 등의 편향된 시선이 가져온 나비 효과는 건준과 여운형의 세력을 비롯하여 중도 세력까지 나락에 빠뜨리게 했다는 것. 이들은 미군정 하의 권력을 꿰차고 승승장구했다. 


<세계철학사>는 국내 철학자가 썼다는 장점 때문에 우선 잘 읽힌다. 그리고 서양의 철학자를 설명할 때 동양의 철학자를 소개해주어 이해를 더한다. 대부분의 철학서들이 서양 철학자들만 언급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서양 철학자들 사이에 동양 철학자들도 나란히 배치하여 균형을 더한다는 생각이다. 철학은 어느 시대든 정치와 사회상과 무관하지 않다. 그래서 왜 그런 철학 사조가 등장했는지 배경을 이해하는 것이 우선인데 그 부분이 개인적으로 탁월하다고 생각되었다. 물론 저자의 사족이 있다고 여겨지는 부분도 있지만 이는 독자가 적절히 수용하면 될 일이라고 생각한다. 전체적으로 고대부터 현대까지 철학 사조를 정리하기에 레퍼런스로 무난하다고 여겨지는 책이다. 이 시리즈를 읽어냈다는 것이 2024년의 가장 큰 수확이지 않나 싶다. 특히 나는 근현대 시기의 역사에 관심이 많아서 그때의 철학사조와 철학자들을 정리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딕테>는 차학경의 유작으로 그녀의 전방위적 글쓰기를 경험할 수 있는 책이다. 에세이로 읽히기도 하고 역사로 읽히기도 하고, 시나 희곡 같기도 하고 평론 같기도 하다. 한 사람의 머리에 어쩜 이리 다양한 지식이 있는지 그것을 글로 펼쳐낸 느낌이었다. 심지어는 천문학도… 개인적으로는 그녀의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와 어머니의 조국에 대한 대화를 통해서 이방인과 경계인으로서 살아가야 했던 슬픔과 고통을 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었다. 이해하기 어렵다는 이야기가 많아서 사실 두려움으로 읽기 시작했는데 글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크게 어렵지는 않다. 독해하려고 하는 순간 더 어려워지는 것이 아닌가 싶다. 시를 수용하는 것처럼 독자에게 와 닿는 점이 다 다를 것이라고 본다. 


<한국여성문학선집>은 한국의 근현대 여성문학에 대해 알 수 있는 소중한 기회가 되었다. 20세기 초부터 말까지 한국의 여성 문학은 쉴틈 없이 달려왔다. 최근 들어서 비로소 언급되는 나혜석, 김명순 같은 여성 작가도 있지만 아예 이름조차 잘 거론되지 않았던 작가들도 많았다. 이 책을 읽으며 생각 이상으로 한국 여성 문학이 사회 구조적 문제를 다룬 작품들이 많다고 여겨졌다. 이 책과 함께 <체공녀 연대기>, <한국여성노동자운동사>처럼 한국 여성 노동사를 함께 읽는다면 더 도움이 될 것이고, 한국 근현대 미술을 다룬 최근작 <그들도 있었다> 시리즈를 함께 읽는다면 구현의 세계까지 확장하는 경험을 얻을 수 있으리라 보인다.


2025년은 어떤 책을 읽겠다는 구체적인 계획은 하지 않으려고 한다. 적게 읽더라도 더 알차게 읽고 꾸준히 쓸 수 있는 한해가 되어야겠다. 

모쪼록 이곳에 들어오신 모든 분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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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5-01-02 08: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거리의화가 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새해에도 우리 지금처럼 같은 책을 그리고 또 다른 책을 읽읍시다.

거리의화가 2025-01-02 08:25   좋아요 0 | URL
다락방 님 새해가 밝았네요^^ 새해 복 많이 받으시구요.
늘 그렇듯 매일 일상을 열심히 살고 책을 읽고 쓰는 한해가 되길 소망합니다.
 
작별하지 않는다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장편소설
한강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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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문처럼 환하게 몸 전체로 번지는 온기 속에서 꿈꾸듯 다시 생각한다. 물뿐 아니라 바람과 해류도 순환하지 않나. 이 섬뿐 아니라 오래전 먼 곳에서 내렸던 눈송이들도 저 구름 속에서 다시 응결할 수 있지 않나. 다섯 살의 내가 K시에서 첫눈을 향해 손을 내밀고 서른 살의 내가 서울의 천변을 자전거로 달리며 소낙비에 젖었을 때, 칠십 년 전 이 섬의 학교 운동장에서 수백 명의 아이들과 여자들과 노인들의 얼굴이 눈에 덮여 알아볼 수 없게 되었을 때, 암탉과 병아리들이 날개를 퍼덕이는 닭장에 흙탕물이 무섭게 차오르고 반들거리는 황동 펌프에 빗줄기가 튕겨져 나왔을 때, 그 물방울들과 부스러지는 결정들과 피 어린 살얼음들이 같은 것이 아니었다는 법이, 지금 내 몸에 떨어지는 눈이 그것들이 아니란 법이 없다.

내가 발을 딛고 서 있는 공간에 과거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헤아려본 일이 없다. 우리 동네에 이사오기 전 생각했던 과거는 불과 몇 십년 전의 불쾌한 일로 연루되었던 어떤 사건이었다. 그런데 그로부터 더 과거, 더 이전의 과거에 이 땅에서 벌어진 일은 어쩌면 자료를 찾기 전에는 헤아리기 어려울지 모른다. 물론 자료가 남아 있다 해도 일부만 복원할 수 있을 뿐이지 온전한 복원은 불가능하겠지만. 찍으면 영상이 되는 현재와 달리 사진조차 사치였던 시기가 있었고, 있었다 해도 찍히면 문제가 될지 모른다는 강박을 가져야 했던 엄혹한 시절도 있었다.


2024년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은 여러 모로 국가적으로 큰 기쁨이었다. 개인적으로도 2024년 마무리를 하며 한강 작가의 책을 연달아 읽어서 영광이었다. <작별하지 않는다>는 세 번째로 읽는 한강 작가의 책인데 <소년이 온다>만큼이나 좋았다. 


이 책이 제주 4.3사건을 배경으로 다루고 있다는 정보를 갖고 읽었기에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를 하고 읽었다. <소년이 온다>에서도 느꼈지만 이 책도 참혹했던 과거의 사건을 현재를 사는 사람의 시선으로 잘 보여준다. 몽환적이기도 하고, 잘 만져지지 않는 물체처럼 흐릿한 부분도 있는데 그런 모호함이 한강 작가의 문체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1948년부터 한국전쟁 이후 1954년까지 제주도는 참혹한 현장이 되었다. 제주에 소개령이 내려지고 해변을 불태우자 주민들은 살기 위해 산을 올랐다. 전쟁이 터진 해 여름에 대구에서 검속된 보도연맹 가입자들은 대구형무소에 수용되었다. 매일 수백 명씩 트럭에 실려 들어오는 사람들을 더 수용할 공간이 없게 되자 기존의 재소자들은 총살당한다. 사망자들 중에는 좌익 혐의를 받은 사람 이외에 제주 사람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는 놀라움을 넘어선 참담함을 느낄 수밖에 없게 한다. 

개인적으로는 1942년 폐광된 경산의 코발트 광산에서 대구형무소 재소자, 대구 보도연맹 가입자, 경북 지역 가입자 등 3500여명이 총살되었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다.


이상하다, 살아 있는 것과 닿았던 감각은. 불에 데었던 것도, 상처를 입은 것도 아닌데 살갗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제주는 최근 들어 여행을 여러 번 한 곳이다. 코로나 전후로 한동안 해외 여행은 가기 어려웠기도 했고, 가족들과 여행을 가기에 그만한 곳이 없기도 했다. 


두 시간 전 내가 몸을 실었던 비행기는 몹시 불안정하게 흔들리며 제주공항에 착륙했다. 뉴스로만 들었던 윈드 시어 현상 같았다. 활주로를 미끄러져 달리는 비행기의 속도가 차츰 줄어드는 동안, 통로 건너 옆 좌석에 앉아 있던 젊은 여자가 스마트폰을 만지며 중얼거렸다. 세상에, 우리 다음 비행기부터 전부 결항이야. 연인으로 보이는 젊은 남자가 대꾸했다. 우리가 운이 좋았네. 여자가 웃음을 터뜨렸다. 이게 운좋은 거냐. 날씨가 야, 이래가지고.


몇년 전 겨울, 제주에도 폭설이 내린 적이 있었다. 우리가 공항에 내리고 나서 바로 다음 항공기들부터 결항 소식이 있었던 기억이 난다. 다행히 우리는 산간에 갈 일은 없었으나 시내를 돌아다니는 것도 참 쉽지 않았었다. 제주에도 이렇게 많은 눈이 내리는구나 하는 생각을 했었다. 제주의 겨울이 따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가 오돌오돌 떨면서 여행을 했었다.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그 벌판에 눈이 내린다. 우듬지가 잘린 검은 나무들 위로 눈부신 육각형의 결정들이 맺혔다 부스러진다. 발등까지 물에 잠긴 내가 놀라 뒤돌아본다. 바다가, 거기 바다가 밀려 들어온다.


습기가 가득한 눈이 벌판 위, 바다 위에 나리는 풍경을 이처럼 잘 묘사할 수 있을까. 이 장면은 꿈인듯 현실인듯 분간이 잘 가지 않는다. 


분명히 두 갈래 길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폭이 다른 세 개의 길이 숲 사이로 희끗하게 드러나 나는 혼란스러웠다.


주인공은 눈 속에서 길을 헤맨다. 혼란스러움 때문에 나도 읽으면서 가슴이 옥죄어오는 것을 느꼈다. 오래 전 독일 여행을 갔을 때 고성을 올랐다 길을 잃고 헤맨 적이 있다. 그때의 공포와 불안이 밀려왔던 것이다. 주인공이 겪은 이후의 장면들은 섬뜩했다.


얼마나 더 깊이 내려가는 걸까, 나는 생각한다. 이 정적이 내 꿈의 바다 아랜가. 무릎까지 차올랐던 그 바다 아래. 쓸려간 벌판의 무덤들 아래.


나의 죽음이 언제 닥칠지 아무도 알 수 없다. 언제 죽을지 몰라 주변을 미리 정리하고 유서를 적는 일이 먼 이야기라고 생각했었는데 이제 더는 그런 생각을 갖지 않게 되었다. 

올해 아버지의 병환, 시아주버님의 사망으로 참 힘겨웠다. 더군다나 국가적인 재난 속에서 이 책의 내용은 그저 과거의 일이라고 치부할 수 없게 만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고 나아가고 쓰고 싸우자고 작가가 말해주어 고마웠다. 



내가 싸우는 것. 날마다 썼다 찢는 것. 화살촉처럼 오목가슴에 박혀 있는 것.

새벽마다 책상 앞에 앉아 쓴다. 매번 처음부터 다시, 모두에게 보내는 작별 편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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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5-01-01 02: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942년에 많은 사람이 총살 당한 일이 있었군요 그런 건 누가 결정한 건지... 1942년이니 광복이 되기 전인데... 같은 나라 사람한테 죽임 당하기도 하고, 그런 일은 한국뿐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 많이 일어난 듯합니다 그런 일이 없으면 좋을 텐데, 그러고 보니 그런 일도 옛날 일만은 아니군요

제주가 따듯해도 섬이어서 눈이 많이 오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네요 비도 많이 오고...

2024년이 가고 2025년이 왔군요 아직 익숙하지 않지만, 거리의화가 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하고 싶은 거 많이 하는 해가 되기를 바랍니다


희선

거리의화가 2025-01-01 08:05   좋아요 0 | URL
1942년 폐광된 코발트블루 광산에서 한국전쟁 때 학살당한 일이 있었던 거에요. 수용소 인원이 많아져서 기존에 있었던 사람들을 쫒아냈는데 제주도민들도 포함되어 있었답니다ㅜㅜ 헌데 그 근처도 아니고 경산까지 가서 그랬다는 것이 당황스럽더라구요. 물론 그곳 뿐 아니라 다른 여러 곳이 있었겠지만. 크지도 않은 나라에서 서로 죽고 죽이는 피비린내가 났을 것을 생각하면ㅠㅠ

2025년 새해가 밝았네요. 희선 님 모쪼록 작년 한해 묵은 일은 잘 털어내고 새 기운을 받아 즐겁고 행복한 일이 많으시길 바랍니다.
 
채식주의자 (리마스터판)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창비 리마스터 소설선
한강 지음 / 창비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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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책은 읽기 전후 독자의 생각과 행동을 바꾸게 만들기도 한다. <채식주의자>는 한강 작가의 책으로 두 번째 만나는 책이었는데 역시 읽기 쉬운 책은 아니었다. 


이 책은 총 3부로 구성되어 3명의 관점에서 사건을 풀어낸다. 육식을 거부하다 나중에는 먹는 것마저 온몸으로 거부한 사람, 그 사람의 육체를 탐닉하고자 했던 사람, 안정을 추구했지만 사실은 욕망 자체를 내려놓으려 했던 사람?


어떤 고함이, 울부짖음이 겹겹이 뭉쳐져, 거기 박혀 있어. 고기 때문이야. 너무 많은 고기를 먹었어. 그 목숨들이 고스란히 그 자리에 걸려 있는 거야. 틀림없어. 피와 살은 모두 소화돼 몸 구석구석으로 흩어지고, 찌꺼기는 배설됐지만, 목숨들만은 끈질기게 명치에 달라붙어 있는 거야.


그는 자신이 어떤 경계에 와 있음을 알았다. 그러나 멈출 수 없었다. 아니, 멈추고 싶지 않았다.


문득 이 세상을 살아본 적이 없다는 느낌이 드는 것에 그녀는 놀랐다. 사실이었다. 그녀는 살아본 적이 없었다. 기억할 수 있는 오래전의 어린시절부터, 다만 견뎌왔을 뿐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선량한 인간임을 믿었으며, 그 믿음대로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았다. 성실했고, 나름대로 성공했으며, 언제까지나 그럴 것이었다.


세 이야기가 결국은 소유와 욕망에 대한 이야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먹는 행위도 자신의 취사선택에 따른 것이므로 욕망이다. 1부의 주인공을 보고 있자니 평소 고기를 너무 좋아하는 내가 짐스럽게 느껴졌다. 그런데 이 짐스러움이, 괴로움이 과연 얼마나 갈까. 그동안의 육식 위주의 내 식습관을 바꿀 수 있을까 생각하면 몇 십년동안 이어온 패턴을 하루 아침에 바꾸기란 쉽지 않음을 생각하니 한숨이 나온다. 

금기를 넘어서려 하는 소유와 욕망도 마찬가지다. 평범함과 안정성은 편안하지만 이를 넘어서고자 하는 욕구는 인간에게 모두 다 있다. 이를 제어할 수 있느냐의 문제일 뿐. 

무난하게 잘 살아왔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소유하고자 했던 것을 포기했던 적이 많았던 사람의 이야기는 특히나 내 마음을 특히 흔들었다. 개인적으로 비슷한 점을 많이 느껴서일까.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튀지 않는 무난한 성실함으로 인생을 살아 왔는데 그것이 그저 ‘견뎌내며 산 것이었나?’ 싶기도 하다. 누군가는 내게 “그렇게 늘 웃지 않아도 돼.”라고 말한 적이 있었는데 그 뒤로는 마음을 좀 내려놓았지만.


한강 작가의 문장은 섬세하면서도 날카롭다는 인상을 갖게 한다. 일상에서 만나는 고통을 드러내며 독자에게 질문한다. 쉽게 결론지을 수 없는 문제임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일상을 살아가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산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라고, 그 웃음의 끝에 그녀는 생각한다. 어떤 일이 지나간 뒤에라도, 그토록 끔찍한 일들을 겪은 뒤에도 사람은 먹고 마시고, 용변을 보고, 몸을 씻고 살아간다. 때로는 소리내어 웃기까지 한다. 아마 그도 지금 그렇게 살아가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 때, 잊혀졌던 연민이 마치 졸음처럼 쓸쓸히 불러일으켜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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