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 후반에서부터 19세기 초반에 형성되었던 초기의 공식(formulation) 이후로, 생물학에 관해 부인할 수 없는 한 가지 사실이 있다. 그것은 생물학이 기원에 관해, 창세기에관해, 자연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이다. 게다가 근대 페미니스트들은 우리의 이야기를 가부장제적 목소리로부터 물려받았다. 생물학은 아버지의 말에 의해 잉태되고 창시된 생명과학이다.
페미니스트들은 부계로부터 지식을 전수받았다. 그 말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이자 갈릴레오의 말이며, 베이컨의 말이고 뉴턴의 - P128

말이자, 린네의 말이고, 다윈의 말이었다. 반면 육신은 여성의 것이었다.! 그리고 말씀은 자연스럽게 육신으로 만들어졌다. 우리는 젠더화되어 왔다(engendered). 샌드라 길버트(Sandra Gilbert)와 수전 구바(Susan Gubar)는 19세기 여성작가들을 연구하면서,
목소리를 구성하고, 권위를 가지고, 텍스트를 저술하고, 이야기를말하고, 말씀을 출산하려고 애쓴 여성들의 노고에 관해 논의한다.
저술한다는 것은 창시하고 이름 짓는 권력을 갖는 것이다. 글쓰기와 말하기를 배워야만 했던 우리의 자매들이 그랬던 것처럼, 자연과학적 지식을 생산하고자 하는 여성들은 남성들에 의해 합법적권위를 부여받았던 텍스트인, 자연의 책(book of nature)을 읽어내야만 했다. - P129

남아 있는 유일한 문제는 우리가 다양한 목소리로 여기서, 무엇을말하느냐는 것이다. 다시 시작하기 위한 목소리 하나를 여성은생물학을 바라본다』의 후기가 제공한다.
남성 인간/자연의 안티테제는 인간에 의해 발명되었다. 우리가 할 일은 자연과 더불어 인류의 통일성을 실현하게(현실화한다는 말뜻 그대로) 될, 그리고 내부로부터 이해하게 될 관계를 재발명하는 것이다. (...) 과학은 인간의 자연 지배가 긍정적이고 가치 있는 목표처럼 보였던 특정한 역사적 조건 아래 출현했다는 점에서 인류의 구성물이다. 그런 조건들은 변했고 우리가 여행하고 있는 그 길이 자연을 설명하고 향상시키기보다 파괴하기 쉬울 것이라는 점을 이제는 알고 있다. 여성들은 우리가 자연의 일부이며 자연의 운명은 제대로 보살펴 주지 않았던 인간의 손에 달려 있다는 점을 남성들보다 훨씬 더 빈번히 인정해 왔다. 이제 우리는 그런 지식을 바탕으로 실천해야 한다. (허버드 외, 1979) - P145

생물학의 규칙을 탈신비화하는 것이 내게는 중요해 보인다.
자연은 구성되고 역사적으로 구축되지, 화석 지층이나 열대우림에서 헐벗은 형태로 발견되지 않는다. 자연은 논쟁 대상이며, 여성은 그 싸움에 열정적으로 참여했다. 일부 여성에게는 과학적인이야기의 저자가 될 수 있는 사회적 권위가 있다.

여성 학자를 포함한 많은 영장류학자들은 젠더가 자연과학의 내용을 물리적으로 결정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만약 그렇다면 그 결과는 형편없는 과학이라고 일컬어지게 될 것이다. 나는 이 증거가다른 해석을 지지한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젠더는 관찰에서 피할수 없는 조건이다. 계급, 인종, 국가도 마찬가지다. - P192

여성 과학자들이 남성에 비해 더 착하거나 심지어 더 자연적인 이야기를 생산해 내지는 않는다. 다만 그들은 과학이라는 규칙의 안내를 받은 사회적 학문을 공적으로 실천함으로써 자신들의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 이들은 규칙을 만드는 데 기여한다. 구체적인 여성의 삶 속에서 훈련된 에너지를 사용하는 평범한 문제인 것이다. 과학적 이야기의 질을 유지해야 한다는 의무, 비교 설화들의 의미를 향한 의무, 모델의 지위를 책임질 의무는 다면적이고 신비롭지 않으며 과학의 ‘내부‘와 ‘외부‘에 있는 평범한 여성들에게 잠재적으로 열려 있다. 과학을 만드는 사회적 과정을 무시하고, 그 과정에 참여하는 데 실패하고, 과학적 작업의 결과만을 사용하거나 오용하는 태도는 무책임하다. 나는 현재의 역사적 조건속에서 여성, 양육 그리고 남성의 전쟁으로 얼룩진 오염에서 자유롭다고 주장되는 다른 무언가를 이상화하는, 자연에 대한 반과학적 설화를 추구하는 것은 책임감이 훨씬 덜한 태도라고 생각한다. - P193

포함과 배제는 인종, 젠더, 섹슈얼리티, 혹은 국적과 같이 고정된 범주에 의해 미리 결정되지 않는다. ‘우리‘는 픽션 읽기라고 일컬어지는 고도로 정치적인 실천을 통해 생산된 포함과 배제, 동일시와 분리에 대해 설명할 수 있다. 우리가 누구에게 설명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읽기 자체 속에서 생산된다. 모든 읽기는 잘못된 읽기이자, 다시 읽기이며, 편파적인 읽기이자 강제적읽기이며 상상된 텍스트의 읽기이기도 하다. 텍스트는 원래부터궁극적으로 그냥 그곳에 존재하는 것이 전혀 아니다. 세계가 원래부터 무너져 있었던 것처럼, 텍스트는 이미 언제나 서로 경합하는 실천과 희망으로 뒤엉켜 있다. 여성 의식을 표시한 당대의 지1도 위에서 대단히 특수하고 순수하지 못한 지역적/지구적, 개인 - P224

적/정치적인 우리의 위치에서 비롯된, 이들 각각의 읽기야말로교육적 실천이다. 그런 실천은 세계를 변혁시키는 ‘여성 경험‘이라는 막강한 창작물을 만들어 내는 권력으로 충전된 차이, 특수성, 친화성이라는 호명을 통해 작동한다. 만회 불가능한 하나라는환상의 상실은 차이 속에 자리한다. - P22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헬레니즘 -로마 시대가 점차 진행되면서 철학은 양극으로 갈라졌다.
이 시대는 전통적인 공동체의 정체성이 무너지면서 ‘개인‘이라는 존재가 등장한 시대였다. 이 개인은 두 가지 상반된 방향으로 나타났다. 그하나는 공동체에 대한 헌신을 접고서 내면으로 또는 작은 ‘우리‘로 움츠러든 개인이고, 다른 하나는 과거에는 금기시되었던 초월적 권력의 화신을 추구한 개인이었다. 전자는 디오게네스와 에피쿠로스로 상징되는이 시대의 상당수 사상가들에게서 볼 수 있고, 후자는 알렉산드로스, 로마의 군벌들,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로마 황제라는 존재로서 구현되었다.
이에 따라 철학 역시 양극화된다. 한쪽에는 소집단에 안주하면서 심리적평정을 꾀했던 철학 학파들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거대 권력에 봉사하면서 통치 이데올로기를 제공했던 어용 철학자들-물론 현대적 의미와는 다른 의미이지만 이 있다. 어느 형태가 되었든, 이는 그리스 민주정과 로마 공화정에서의 철학/철학자에 비한다면 전락한 모습이 아닐 수 없었다. - P582

헬레니즘 - 로마 시대의 다른 철학들과는 달리 스토아철학은 수준 높-
은 논리학적 사유와 자연철학적 탐구를 보여주었고, 그 바탕 위에서 특히 윤리적 문제들에 천착했다. 이 점에서 그것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이은 세 번째의 위대한 철학 체계였다. 나아가 그것은 특히 지중해세계의 운명을 결정한 로마라는 거대한 힘을 떠받쳐준 정신적 기둥이기도 했다. 전문적인 철학자들만이 아니라 로마의 지도급 인사들의 상당수가 스토아적 가치관을 가지고 있었고, 로마사에서 진정으로 군인다운 모습을 보여주었던 장교들도 대개 스토아주의자들이었다. 광폭했던 로마이지만 스토아철학이 그것을 굳게 받쳐주었던 것이다. 철학 자체로서는쇠락한 이후에도 그것은 지중해세계의 주요 가치로서 남았으며, 오늘날까지도 서구 사유의 한 성취로서 이해되고 있다. - P58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플라톤이 많은 대화편에서 전개했던 이야기들은 그 수를 헤아리기가어렵다. 철학의 거의 모든 주제들이 다루어지고 있고, 대화편마다 다양한 주제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 게다가 그의 사유 자체가 계속 변모를겪어나갔으며, 때때로 모순된 이야기들까지 나타난다. 그럼에도 그의 대화편 전체에 걸쳐 일관되게 나타나는, 그래서 그의 사유 전반을 꿰고 있다고 생각되는 테마가 존재한다. 바로 ‘이데아론‘이다. 이데아론이라는플라톤의 존재론을 이해함으로써 우리는 그의 사유를 비로소 체계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 P252

플라톤 자신은 그가 "형상(相)"(‘idea‘ 또는 ‘eidos‘라는 말을 썼다)이라 부른 이런 존재의 차원이 실재한다는 가설을 제시했으며, 더 중요하게는 그러한 차원이 우리가 감각으로 확인하는 현실적차원보다 더 실재한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이후에 등장하는 이런 유형의생각들 모두에 ‘플라톤적‘이라는 수식어를 붙일 수 있다. 감각을 넘어 사물의 본질을 파악하는 ‘이성‘의 존재와 이성의 파악 대상인 ‘본질‘의 실재성을 믿는 각종 유형의 철학들은 모두 플라톤을 잇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에 대해 플라톤은 "이데아들이 존재한다"고 응했고(본질주의 존재론), "존재한다 해도 알 수가 없다"에 "이성이 알 수 있다"고 응했으며(합리주의 인식론), "알 수 있다 해도 전달할수가 없다"에 "우리 모두는 이성을 공유하고 있다"고 응한 것이다(보편주의 윤리학). 플라톤이 최초의 위대한 ‘철학 체계‘를 세웠다는 것은 바로 이 점을 뜻한다. 이후에 전개되는 서양 철학사에서 누구도 이 플라톤적 울림에 귀를 막을 수가 없었다. - P254

플라톤 철학 전체를 관류하는 문제의식은 ‘가짜‘에 대한 경계심과 그반면으로서 진짜를 가려내려는 열정이었다. 그의 사유는 가짜가 판을치는 그리고 오히려 진짜는 핍박받는 현실에 대한 의구심과 환멸에서출발했다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사유는 가짜와 진짜를 구별하려는, 사물들에 상이한 존재론적 위상을 부여함으로써, 달리 말해 사물들을 존재론적 위계(ontological hierarchy)에 따라 분류함으로써 진품을 가려내려는 열망에 의해 지배되었다. 그의 사유 전체는 모방(‘미메시스‘) 개념에 의해 추동되고 있으며, 모든 구별, 평가의 기준으로서 제시된 것이 바로 이데아 개념이었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이데아를 얼마나 잘 모방하고 있는가가 그 사물의 존재론적 위상을 판별할 수 있게해주는 기준이었다고 할 수 있다.
플라톤이 보기에 사람들이 사물들의 실재, 진상(眞相)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그들이 감각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 P341

아리스토텔레스는 처음으로 학문을 분류했으며 그 각각에 이름을 붙여줌으로써 비로소 ‘학문의 체계‘를 만들어냈다.
그가 분류한 학문 체계는 그 후 시대와 지역에 따라 많은 변이를 겪게 되지만 그 근본 구도는 오늘날까지도 유지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학문을 분류한 후 그 분야 하나하나에 대해 저작을 썼다. 그래서 그의 저작들의 제목(또는 관련어) 자체가 바로 그 학문 분야의 이름이 되었고, 그의 학문 체계가 바로 학문의 체계가 되었다. - P353

사유의역사를 전반적으로 살펴볼 때, 지성과 논리를 넘어선다는 상당수의 시도들이 진정한 철학적 도약을 이루기보다는 반지성주의적 폐해들로 흐르곤 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다른 한편,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가잘 보여주었듯이 이성/지성은 그 한계에 갇힐 때 얄궂게도 비이성적/비합리적인 폭력으로 흐를 수 있다. 때문에, 앙드레 랄랑드가 특히 강조했듯이, 진정한 이성/지성은 항상 스스로의 한계를 비판하고 초월해가는 이성/지성이어야 한다. 자체의 한계에 갇힌 이성도 또 그것을 빗나간 방식으로 초월하려 하는 반(反) 이성도 위험하기는 마찬가지인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오르가논은 이 모든 문제들의 중심축이다. 이 텍스트들이야말로 한편으로 기성 사유의 한계들을 돌파해나가려는 진지한시도들이 출발해야 할 지점이고, 또 온갖 형태의 반지성주의적 사조들을 그것으로 데려와 보어야할 지점일 것이다. - P396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은질료 및 시간과 떼어서는 의미를 상실하는, 플라톤의 형상과 성격을 달리하는 실체이다. 그러나 현실태로서의 형상이 잠재태로서의 질료를 이끌어가는 목적론적 구도는 그가 결국 플라톤을 잇고 있다는 점을 다시한 번 분명히 드러내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리고 있는 세계는 형상과 질료가 오로지 형식적으로만 구분되는 이원적 일원의 세계이며, 질료의 잠재성을 형상이 이끌어가는 목적론적 세계이다. 그리고 이런 존재론은 무엇보다 생명체들의세계에서 두드러지게 확인된다. 그의 존재론은 근본적으로는 플라톤을잇고 있지만, 보다 경험주의적이고 유기체주의적인 색채를 통해서 새롭게 재구성된 플라톤주의인 것이다. - P440

인간의 인간다움은 어디에 있을까? 인간을 인간으로 만들어주는 것은 정확히 무엇일까? 이 물음은 곧 오로지 인간에게서만 발견되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이다. 식물에게도 다른 동물에게도 없는 것,
인간에게만 있는 것, 그것은 곧 이성(‘로고스‘)이다. 인간의 핵심적인 능력은 곧 이성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실천적 맥락에서 본다면 인간이 그이성을 현실적으로 발휘해야 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이성 또는 이성을갖춘 영혼이야말로 인간의 아레테이며 인간의 아레테를 발휘하는 것이행복이라면, 행복이란 결국 "이성을 발휘하는 실천적 삶", "이성에 따른영혼의 활동", "인간다움/인간적 탁월성에 따른 영혼의 활동"이다. 요컨대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최고선/행복이란 가장 인간다운 것 즉 이성에따라 실천하는 삶이다. - P447

플라톤에게 당대 현실은 어떻게든 극복되어야 할 상황이었다. 스승 소크라테스의 죽음(BC 399년)을 전후한 그리스의 상황은 그가 꿈꾸었던이데아의 차원과는 대극에 있는 현실이었다. 그에게 이데아란 이 현실을그쪽으로 변화시켜가야 할 방향/목적이었고 현실의 타락을 비추어주는시금석이기도 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에게 형상은 현실의 사물들에 내재해 있는 것이고, 그것들을 좀더 완성된 형태로 끌어주는 동력이었다. 그리스 문명의 가치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그는 아테네에서 ‘이방인‘이었다. 때문에 그 자신 인생에서 몇 차례의 굴곡을 겪어야 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현실을 긍정하면서 거기에 보다 높은완성도를 부여하려는 안온(安穩)한 눈길이 존재한다. 바로 이 때문에, 그의 윤리학이 매우 세련되고 균형 잡힌 사유들을 보여주고 있는 것과 대조적으로 그의 정치학은 당대에 새롭게 도래하던 기운(氣運)들에 무척이나 둔감할 수밖에 없었다. - P46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인간공학은 개별 유기체를 모델로 삼아, 신경계를 정점에 두는 통제 위계를 구축할 방법을 찾았다. 이런 유기체적 모델은 사회를 조화롭고 기능이 적절히 분배되어 균형 잡힌 전체로 파악하기 쉽게 만들었다. 유기적 생명과 본능 그리고 성은 경영의 대상이 되었다. 유기체 피라미드 맨 위에는 정신이 놓여 있어서, 경쟁이 과도해지면 이타성이 상황을 완화할 수 있게끔 했다. 후에 사회생물학이 되는 심리생물학은 경쟁으로 얼룩진 세상에서 이타성을 합리화하는 문제에 직면했다. 지배라는 기본 구조는 위협하지 않고 말이다. - P89

인간 종에 비해서는 덜 분화되어 있어도, 침팬지들에게는-"사회조직의 단위로서" 인성이 "분명하게" 존재했다. 인성이란기능적 전체, "유기체의 심리생물학적 속성과 능력 전체가 통합된 산물"을 뜻했다. 정상적인 인성의 경우 유전된 특징 및 기본적인 유기체적 충동은 의식적 자아와 통합되어 있었다. 요약하자면,
(인성은 생명과 인간 과학에서 절대적으로 핵심적인 과학적 연구대상이었다. 남성적이거나 여성적인 인성을 갖는 것은 사소한 문제가 아니었다. 인성이 적절하게 발달해야, 개인과 정체가 조율되어 행복할 수 있었다. 여키스는 다양성과 가변성을 과소평가하기를 원치 않았다. 성과 지배처럼 핵심적인 충동과, 남성성 및 여성성이라는 의미심장한 표현과 관련해 인성 교화는 과학적 공공서비스를 책임감 있게 제공하는 문제였다. 합리적 기준에 따라 사회적 역할을 할당할 가능성이 여기 걸려 있었다. - P102

커뮤니케이션 혁명은 통제 전략을 바꾸어, 운영 연구에 기반해 유기체에서 체계로, 우생학에서 인구 관리로, 인사관리에서 조직구조(사회기술적 체계와 인체공학)로 그 대상을 바꾸었다[릴리엔펠드(Lilienfeld), 1978]. 커뮤니케이션 혁명은 자연적 대상을정보의 생산, 이전, 저장의 메커니즘을 통해 적절하게 이해할 수있는 기술적 장치로 다시 이론화하는 것을 뜻했다.
전쟁 이후 이루어진 전자공학산업과 커뮤니케이션 기술의 폭발적인 발전은, 축을 중심으로 여러 개의 면이 조직화된 안정적인 체계를 고안하고 관리하는 사회적, 군사적 계획 수립 전략과 점점 강한 관계를 맺었다. - P107

사회생물학은 두 가지 근본적인 체계 유형을 연구한다. 바로개체군과 사회다. 둘 모두 정보의 경계 및 에너지 흐름이라는 용어를 통해 연구된다. 정보와 에너지는 동전의 양면이다. 열역학과정보과학으로 이 사실을 깨달을 수 있게 되었다. 개체군은 시간에 따른 유전자 흐름의 경계라는 측면에서 계측되며, 유전자는 정보가 물질화된 것이다. 사회생물학은 사회를 커뮤니케이션 지대와 정보교환의 용어를 통해 연구한다(윌슨, 1971, 1975). 개체는사회생물학 및 다른 생명과학 분야에 공통된 체계다. 개체는 다른 개체들과 상호작용하고, 마찬가지로 정보 및 에너지의 구조화된 흐름의 일부로서 연구된다. 그 결과 보다 높은 차원(개체군과사회)이 생겨난다. 개체는 유전자가 구성하거나 작동을 지시하는매개 구조다. - P113

자연은 인간의 본성을 포함해희소성과 경쟁의 기초 위에 이론화되고 구축되었다. 게다가 우리의 본성은, 자본주의와 가부장제 안에서 그를 위해 구축된 생명과학을 구성함으로써 이론화되고 개발되었다. 이것은 풍요를 공동선이 아니라 사적 이해를 위해 전유하는 형태로서, 희소성 관리의일환이다. 이는 또한 가부장제에 근본적인 명령-통제 체계의 논리와 기술이 점증하는 형태로 지배관계를 유지하는 과정의 일부다. 이와 같은 관행이 자연을 이론화하는 우리를 이끄는 만큼 우리는 계속 무지하며, 우리는 과학의 실천에 개입해야만 한다. 이것은 투쟁의 문제이다. - P12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곽수문이 이미 죽고 나자 중사(中使) 가운데 바로 북방 변경에서 온 사람이 있었는데, 이르기를 무부(武夫)와 사나운 병졸이 모두 눈물을 흘렸다고 말하였다. 황제가 말하였다.

"어찌하여 이러한 지경에 이르렀는가?"

대답하여 말하였다.

"곽수문은 봉록을 받게 되면 모두 소고기와 술을 사서 병사들에게 호군(?軍)32하였는데 죽은 뒤에 집안에는 남은 재산이 없었습니다."

황제는 오래도록 탄식하고 애석해 하다가 바로 그 집에 전(錢) 5백만을 하사하고 이어서 그 아들을 녹용(錄用)하였다.

요(遼)나라 사람들이 남쪽으로 침략할 것을 모의하여 북악묘(北岳廟)52에 가서 이것을 점치게 하였는데, 신(神)이 허락하지 않자 요(遼)나라 사람들이 불을 멋대로 질러 묘(廟, 북악묘)를 태워버리고 갔다.

가서 옛 서적과 기이한 그림과 선현(先賢)들의 묵적(墨跡)을 모으게 하였는데, 몇 년 사이에 도적(圖籍)을 궁궐에 와서 헌납하는 사람이 헤아릴 수 없었다. 마침내 사관(史館)에 조서를 내려서 천문(天文)·점후(占候)·참위(讖緯)·방술(方術) 등에 관한 책 5,010권을 다 가져오고 아울러 옛날 그림 묵적 114축(軸)을 내어서 모두 비각에 수장하였다.


8월 초하루 계묘일에 비서감인 이지(李至, 947~1001)와 우복야인 이방(李昉)·이부상서인 송기(宋琪, 917~996)·좌산기상시인 서현(徐鉉, 916~991) 그리고 한림학사·제조시랑(諸曹侍郞)·급사(給事)·간의(諫議)·사인(舍人) 등이 비각(?閣)에서 책을 보았다. 황제가 이 소식을 듣고 사자를 파견하여 연회를 베풀어 주고, 도적(圖籍)을 크게 벌려 놓고 마음대로 보게 하였으며, 다음 날 또 권어사중승(權御史中丞)인 왕화기(王化基, 944~1010)와 삼관학사에게 나란히 비각에 연회를 베풀어 주었다. 이에 앞서서 황제가 지은 시문(詩文)을 비각에 수장(受藏)하였고 또 사자를 파견하여 여러 도(道)에

황제의 성품은 절약하고 검소하여 조회에서 물러가서는 항상 화양건을 착용하였고 베로 만든 옷과 굵은 명주로 된 띠를 맸으며 내복(內服)은 가는 명주로 만들었는데, 모두 여러 차례 세탁한 것이었고, 승여(乘輿)와 공급하는데 사용한 물건은 늘려 보탠 것이 없었다.

9월 을해일(3일)에 북여진(北女眞)54의 4부가 요(遼)에 붙기를 요청하였다.

경술일(9일)에 요(遼)에서는 이계천(李繼遷, 963~1004)을 하국왕(夏國王)로 책봉하였다.

정사일(16일)에 양주(?州, 甘肅省 寧夏)관찰사·판웅주사(判雄州事)인 하비(下?, 江蘇省 ?寧縣) 사람 유복(劉福, 928~991)이 죽었는데, 태부·충정(忠正)절도사를 증직하였다. 유복은 무인(武人)이고 글을 알지 못하는데 아랫사람을 어거(馭車)하는 데는 방략을 갖고 있었고, 정치를 하는 것은 간단하고 쉽게 하였다. 웅주(雄州, 寧夏 中衛市)에서 5년 있었는데, 경내는 편안하고 고요하여 백성들이 전운사를 막고 〔유복의〕 정치적 업적을 추가로 진술하기를 원하여 그 상황을 보고하니 조서를 내려서 유애비(遺愛碑)를 세우는 것을 허락하였다. 여러 아들들이 항상 유복에게 큰 집을 세우라고 권고하였지만 유복은 화를 내면서 말하였다.

"내가 받는 녹봉은 아주 후하여 충분히 집을 빌려서 스스로를 비호(庇護)한다. 너희들은 아직 한 자 만큼의 공로를 갖고 있지 않으면서 어찌 살 집을 지어서 스스로 편안하게 하려는 계책을 만들 수가 있겠는가!"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죽은 다음에 황제가 그 말을 듣고 백금 5천 량(兩)을 그 아들에게 하사하고 집을 사서 거주하게 하였다.

좌정언인 사필이 자주 시정(時政)의 잘잘못을 논하니 황제는 그 충성스러운 것을 가상히 생각하여 병진일(18일)에 우사간(右司諫)으로 발탁하고 금자(金紫)73와 아울러 전(錢) 30만을 하사하였다. 사필이 어느 날 편전(便殿)에서 응대하게 되었는데, 황제는 다시금 얼굴을 보면서 상찬(賞讚)하고 격려하니 사필이 감사하면서 말하였다.

"폐하께서 간언을 좇는 것이 물 흐름 같으시니 그러므로 신은 정성을 다 할 수 있었습니다. 옛날에 당 말(唐末)에 맹소도(孟昭圖)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아침에 간쟁하는 상소문을 올리었는데 저녁이 되어 있는 곳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전 시대에 이와 같았으니 어찌 어지럽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황제가 감동하는 얼굴을 오래 짓고 있었다.

정해일(21일)에 병주(幷州, 山西省 太原市)에서 거란의 400여 명이 내부(內附)76하였다고 말하였다. 황제가 이 때문에 가까이 있는 신하들에게 말하였다.

"국가에 만약에 밖의 걱정거리가 없다면 반드시 안의 근심거리가 있다. 밖의 근심거리는 변방 일에 불과하여 모두 미리 막을 수 있지만 오직 간사하기가 형편없는 사람들이 만약에 안에서 걱정거리를 만든다면 깊이 두려워할 만하다."

지지난 해에 북방의 군사[요의 군사]가 변경으로 들어 와서 살아있는 영혼들이 폐해를 입었습니다. 만승(萬乘, 황제)께서는 노심초사(勞心焦思)하셨지만 많은 관리들은 도와주는 공로를 세우지 않았으니, 동료들이 함께 일을 하면서 삼가고 두려워하며 청렴하지 않은 것은 없지만 오직 대책을 바칠 때에는 조금씩 잠자코 있으니 어찌 급히 반드시 해야 할 것을 처리하겠습니까?

위로군(威虜軍, 河北省 徐水縣)의 군량 공급이 이어지지 못하자 요인(遼人)들은 이를 엿보아 빼앗으려고 하였는데, 정주로도부서(定州路都部署, 치소는 定州 安喜縣)인 이계륭(李繼隆, 950~1005)에게 조서를 내려서 진·정(鎭·定)의 대군을 징발하여 군량 1천여 승을 호송하게 하였다. 요(遼) 유열(于越)인 야율휴격(耶律休格, 休哥)이 이 소식을 듣고 정예의 기병 수만을 인솔하여 와서 맞았는데, 북면연변도순검(北面緣邊都巡檢)인 준의(浚儀, 河南省 開封市) 사람 윤계륜(尹繼倫, 947~996)이 소속의 보병과 기병 1천여 명을 거느리고 변새(邊塞)에서 순시를 하다가 이들을 만났지만, 야율휴격은 공격하지 아니하고 지나가면서 지름길로 대군을 습격하고자 하였다.

윤계륜이 휘하에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저들은 우리를 마치 어육(魚肉)으로 보고 있을 뿐이다. 저들이 승리하고 돌아오게 된다면 이긴 기세를 타고 우리를 북쪽으로 몰아 갈 것이고, 승리를 못한다면 역시 우리들에게 화풀이를 할 것이니 우리들은 씨도 안 남을 것이다! 지금 계책을 세운다면 마땅히 갑옷을 둘둘 말고 함매(銜枚)하여 그들의 뒤를 습격해야 마땅하다. 저들의 날카로운 기세는 앞으로 향하고 있으니 우리들이 도착하는 것을 헤아리지 않을 것인데, 힘껏 싸워서 승리하면 충분이 자립(自立)할 것이고, 설사 패한다고 하여도 오히려 충성스러움과 의로움을 잃지 않을 것이다. 어찌 망하여 북쪽 땅에서 귀신이 될 수 있을까보냐?"

무리들이 분격(憤激)하여 명령을 좇았다.

윤계륜은 이어서 군중에서 말에 꼴을 먹이게 하고, 밤이 되자 사람을 파견하여 짧은 무기를 가지고 몰래 그들의 뒤를 밟게 하였다. 수십 리를 가서 당하(唐河, 장강지류)의 서하(徐河, 河北 徐水의 南쪽)에 도착하였는데19 날이 아직 밝지 않았지만 야율휴격은 대군에서 45리20 떨어졌으며 윤계륜은 성의 북쪽에 진을 늘어놓고 그를 기다렸다. 적들은 바야흐로 모여서 식사를 하였는데, 이미 밥을 다 먹고 곧 나아가 싸우려고 하자, 윤계륜은 그들이 생각지 못한 곳으로 나아가서 급히 그들을 쳐서 그들의 대장 한 명을 죽이자 무리들은 드디어 놀라서 혼란에 빠졌다.

야율휴격은 식사를 아직 끝내지 못하였다가 수저를 버리고 달아났는데, 짧은 무기에 그의 팔을 맞아 상처가 심하였으며 좋은 말에 올라 먼저 숨어버렸다. 요의 군사들은 멀리 대군을 바라보고는 드디어 붕궤되니 서로 짓밟으니 죽은 사람이 헤아릴 수 없었다. 이계륭이 진주부도부서(鎭州副都部署)인 범정소(范廷召, 927~1001)와 더불어 뒤를 쫓아 달려가서 서하를 넘어 10여 리를 갔는데 포로로 잡은 것이 아주 많았다.

주부도부서(定州副都部署)인 공수정(孔守正)이 또 요나라 사람들과 조하(曹河)의 사촌(斜邨)에서 싸워서 그 장수 대영(大盈) 등의 목을 베었다. 요나라 사람들은 이로부터 수년 동안 대거(大擧) 남하하는 일이 없었으며 윤계륜의 얼굴이 검었으므로 서로 경계하여 말하였다.

"마땅히 흑면대왕(黑面大王)을 피해야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