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터부’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게 되었다.

중요한 것은 성스러운 희생물이 혐오스러운 것으로 변형될 때 저 깊은 곳으로부터 질적인 변화가 일어나는데, 그것은 바로 죽이고 싶은 욕망을 잠재운다는 것이다. 이때 종교는 더 이상 희생제의의 종교가 아니다. 왜냐하면 희생제의의 성스러움을 혐오의 체계가 대신하기 때문이다.

차이와 분리를 유지시키는 혐오체계는 유일신을 유지시키는 방편이 된다. 그러나 그것 자체가 신성시되면 안 된다. 왜냐하면 유일신의 외부에 존재하는 것은 어떤 것도 성스러울 수 없기 때문이다. 그 밖의 것들과 나머지는 모두 가증스럽다.

크리스테바에 따르면, 성서 속에 나타나는 더러움의 전통은 어머니나 여성의 재생산하는 모성적인 기능이 종교사적으로 주체의 동일화 과정 속에 뿌리 내린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영원히 타자인 여성과 여성의 수태 능력이 위협적인 힘으로 감지되면서 그 힘을 부정에 집중시켜 동일시했다는 것이다. 성서는 여성이 가진 자연적인 힘을 사회질서의 상징체계 속에 강제적으로 복속시켰다.

신과 인간의 근본적인 차이는 삶과 죽음, 식물과 동물, 육체와 피, 건강과 질병, 이질성과 근친상간 같은 내용을 모두 포괄하는 것을 볼 수 있다. 크리스테바에 따르면, 이러한 대립이 지닌 의미론적 가치에 입각해서 대략 세 가지 혐오스러운 것의 범주를 도출할 수 있다. 1) 음식물에 대한 터부, 2) 육체의 노쇠와 그것의 절정인 죽음, 3) 여성의 육체와 근친상간이다.

‘터부’는 폴리네시아어인데, 이 말은 라틴어 ‘사케르’sacer, 고대 그리스어 ‘아고스’agos 히브리어 ‘카데쉬’Kadesh로 번역 가능하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터부’의 의미는 서로 상반되는 두 방향을 지향한다. 한편으로는 ‘신성한’heilig, ‘성별(聖別)된’geweiht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다른 한편으로는 ‘기분 나쁜’unheimlich, ‘위험한’gefahrlich, ‘금지된’verboten, ‘부정한’unrein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기도 하다. 프로이트는 터부를 공평하게 설명하기 위해, 『브리태니커백과사전』Encyclopedia Britannica을 인용한다. "엄밀하게 보자면 터부에 포함되는 것은 (a) 사람 혹은 사물의 신령한(혹은 부정한) 성격, (b) 이 성격으로부터 발생한 일종의 금제, (c) 그 금제를 범할 경우에 발생하는 신성(혹은 부정)뿐이다. 폴리네시아어에서 터부의 반대말은 ‘노아’인데, 이 말은 ‘일반적인’ 혹은 ‘평범한’의 의미를 지닌다."

크리스테바에 따르면, 터부는 정/부정을 구별하고 그 대립의 여러 형태와 차이들을 만든다. 부정한 것과 정결한 것을 나누는 터부를 통해 인간은 성스러운 법칙에 참여하고, 또 그 법칙을 유지시킨다. 일반적으로 터부는 인접하거나 유사한 속성을 차용해 전체를 표현하는 환유적인 방식으로 만들어진다. 예를 들어, 방과 마루의 경계인 문지방은 삶과 죽음의 경계를 표시하는 것으로 생각되어서 밟으면 안 된다는 사고방식이다. 이때 문지방에 대한 터부는 경계라는 속성이 환유적으로 차용된 것이다. 터부의 환유적인 질서가 교란되었을 때 그로 인해 부정해진 것을 정화하는 것이 희생제의이다. 여기서 희생제의는 결코 양립할 수 없는 두 개의 이질적인 의미 사이에서 작용하면서 서로를 결합시킨다. 이러한 희생제의는 은유적 방식으로 작용한다. 은유는 부재를 표현하는 비유법인데 가령, ‘내 마음은 호수’라고 할 때 내 마음은 호수가 아니지만 내 마음속에 없는 호수를 통해 마음 상태를 표현한다. 희생 제물이 되는 대상은 인간이 아니지만 인간을 대신해서 희생되기 때문에 부재를 이용한 은유적 작용을 한다고 볼 수 있다.

‘살생하지 말지니라’라는 인간과 신 사이의 최초 계약에 뒤이어 나타난 근본적인 대립(식물/동물, 살/피)이 이후에 논리적 대립체계 전체가 되었다고 크리스테바는 말한다. 이러한 대립체계는 대홍수 후에 노아가 정결한 것과 부정한 것을 구분해서 번제로 드리는 것과는 구분되는 혐오체계를 형성한다. 처음에 의미론적으로 삶/죽음의 이분법으로 지배되던 체계는 마침내 차이의 약호code 체계로 바뀐다.

음식물에 대한 혐오는 풍요한 여성의 육체나 출산능력에 뒤따르는 혐오와 유사하다. 음식물에 대한 금지는 분리의 과정에서 가장 근본적인 차폐막을 제공한다. 따라서 장소-피lieu-sang라는 장치와 차이들의 말-논리parole-logique라는 장치가 ‘말하는 존재’를 신과 분리되게 할 수 있는 근원은 이 풍요의 어머니일 것이다. 이런 경우 분리란 어머니의 환상적인 힘으로부터의 분리와 같다. 다시 말하면 자연의 힘으로부터 분리되어, 말하는 주체로 서는 것이다. 이 시원적인 대모신(代母神)은 종교사에서 실제로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다신교와 싸우는 한 민족의 상상 속에 나타난다. 그리고 각자의 개인사 속에서 환상적인 어머니에게 속하는 이 심연은 말하는 것을 배우기 위해 의미화할 수 있는 독립된 장소lieu와 다른 대상objet을 구축해야 한다. 풀어 말해, ‘말하는 주체’가 되기 위해서는 어머니와의 비분리 상태로부터 벗어나 어머니를 대체할 다른 대상을 찾아야 한다.

크리스테바가 보기에, 문둥병에 대한 혐오는 경계가 분명하지 않은 것 즉, 혼합된 것, 동일성을 교란하는 것들에 대한 부정과 같은 논리를 취한다. 나아가 출산과 월경을 경험하는 모성적 육체의 오염과 연결된다. 출산의 경험과 관련해서, 육체 내에서 생명을 배태해서 밖으로 내보내는 행위는 마치 피부에 물질적인 흔적이 계속되는 것과 같이 불결하다. 기한이 차서 몸 밖으로 강제적으로 내보내는 출산 행위에서 태아는 문둥병의 현실과 만난다.

최초 인류가 범죄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를 받은 후에 아담은 자기 아내에게 ‘하와’(Eve)라는 이름을 붙인다. 그 이름의 뜻은 ‘생명(living)’으로, "그가 모든 산 자의 어머니가 됨이더라"(창세기 3:20)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타락 전 낙원에서의 영원한 삶에는 이름이 필요 없었는지도 모른다. 역설적이게도 죽음의 저주를 받고 추방되면서 하와는 생명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부정한 것은 말씀 자체로부터 나온다. 즉, 고유한 자기 동일성과 떼려야 뗄 수 없는 한 면인 부정은 말씀을 거역하는 마음이다. 크리스테바에 따르면 예언서에 나타나는 혐오는, ‘말하는 존재’l’etre parlant의 악마적인 내면성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예언서에서 볼 수 있는 아브젝시옹은 음식물과 배설물 등의 오물에서 여호와의 말씀 속으로 옮겨간 듯하다. 그러나 레위기서부터 줄곧 부정한 것으로 취급되는 아브젝트들의 핵심에는 분리되지 않은 모성적 육체에 대한 혐오가 자리 잡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학자들은 더러움을 대하는 두 가지 관점이 성서에 나타난다고 말한다. 더러움에 대한 성서의 첫 번째 관점은 부정(不淨)을 신의 뜻에 위반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1) 두 번째 관점은 부정이 성스러움을 위협하는 악마적인 힘을 나타낸다는 것이다.2) 이 해석에 따르면, 부정함은 성스러움과 독립해서 작용하는 것으로써 사탄적인 힘 같은 것으로 이해된다.

크리스테바에 따르면, 성서에는 번제(燔祭) 동안 희생제의와 혐오스러운 것 사이를 벌려 놓기도 하고, 서로 결합시키기도 하는 두 기류가 존재한다. 여기서 혐오스러움과 성스러움, 살생과 희생제의가 함께 공존하는 것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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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성서》에 나타나는 부정(不淨)에 대한 해석은 크게 두 흐름으로나누어진다. 첫번째는 로버트슨 스미스(《셈족 종교에 관한 강의》, 1889)의 해석으로서, 부정이란 신의 뜻에 위반하는 것이기 때문에《성서》의 부정을 운명적인 의지에 복종하는 유대 유일 신앙에 나타나는 내면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입장이다.
바루크 A. 레빈‘에 따른 또 하나의 해석은 부정은 성스러움을 위협하는 악마적인 힘의 지표이다. 그에게 부정함은 성스러움과 독립해서 작용하는 것으로서 악의 정신의 자율적인 힘과 같은 것이다. - P143

인류학자 더글러스는 관찰 대상이 되는 사회를 연구하면서 무의식적으로 사회 질서를 발견하게 된다. 반면 종교사가 노이스너는,히브리 유일 신앙의 기념비적인 혁명으로 만들어진 율법으로 정/부정의 대립을 제시하고, 이 율법은 자체로도 충분히 고립된 것으로 축복받은 질서인 것이다.
그러나 정신분석가-기호학자가 제기하는 질문은 의식적인 부정을 어느 선까지 분석할 수 있을까 아는 데 있다. 이때 종교사가(노이스너)는 재빨리 멈추어 선다. 반면 인류학자(더글러스)는, 자연의
‘혐오스러움‘ 에 바탕을 둔 것은 문화적으로 부정하다는 사실 앞에 그 둘을 연계시킴으로써 전진한다. 그 자체로 ‘혐오스럽다는 것은, 주어진 상징 체계라는 고유한 계급화의 질서에 복종하지 않기 때문에 혐오스러운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계속해서 제기된다. 왜 상징 체계에는 계급 체계가 있는데 다른 것에는 없는가? - P145

정/부정의 배치는 유대교가 스스로를 정립하기 위해 이교도와 그들의 모성 숭배적인제사 의식에 대항하여 치러야 했던 치열한 싸움의 증언이다. 정/부정의 배치는 또한 각 개인의 생활 속에서도 주체가 스스로 분리하는 투쟁을 종결한다. 말하자면 말하는 주체나 법칙의 주체가 되기 위해 자신의 개인적인 역사를 따라 내내 벌여야 하는 투쟁을종결짓도록 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성서》를 구획짓는 정/부정의 대립이라는 ‘물질적인‘ 의미소는 원초의 물질적인 관습을 다시 취하는 신성한 금지의 은유뿐만 아니라, 동일성이라는 상징적법칙의 탄생에 대한 주체의 경제(체제)를 설명할 수 있는 논리이기도 한 것이다. - P148

《성서》에서 말의 논리는 인간으로 하여금 살생치 못하도록 금하는 것과 공외연적인 인간과 신의 차이에 관한 논리에 근거한다. J. 솔레르가 지적한 바에 의하면, 《성서》에서의 말의 논리는 <신명기> 제14장에서도 나타난다.
그것은 인간이 육식 동물을 먹지 않도록 하는 논리의 장을 구축하는 것과 관련된다. 육식 생활은 하지만 육식 동물이나 맹금류와 동화되지 않고, 살생 행위도 예방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단 한 가지의 판별 기준만이 남게 된다. 즉 새김질하는 초식 동물만을 먹는 것이다. - P153

여인이 잉태하여 남자아이를 낳으면, "제8일에는 그 아이의 양피(陽皮)를 벨 것이다."(<레위기> 제12장 3절)이 할례 의식은부정을 분리시키는 동시에, 어머니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불결함을분리하는 수단인 것이다. 할례는 희생 제의를 대신하는데, 그것은단순히 교체된다라고만은 할 수 없고 희생 제의와 동등한 것, 바꾸어 말하면 신과의 계약 증거가 된다는 의미를 가진다. 할례는 음식물에 대한 터부와 같은 계열에 속한다고도 할 수 있다. 결국 그것은 분리를 각인하는 동시에, 그 속에 분리의 흔적이 나타나는 희생 제의를 절약한다. - P155

어머니의 육체나 출산을 상기시키는 것은, 어머니 내부의 물질들이 육체를 분리시키려는 난폭한 축출 행위로 인해 끌어내어진, 태어나는 육체에 다름 아닌 출생의 이미지로 귀결된다. 그런데 피부에는이 물질들의 흔적이 계속되는 것 같다. 그 박해하고 위협하는 물질의 흔적들을 가로질러 더 이상 영양을 공급하지 않고 피해만을주며 조여 오는 태반 속에서 태어난 육체의 환상은, 문둥병의 현실과 만난다. 한 발자국 더, 우리는 그녀와 더불어 전(前)오이디푸스기의 동일화 과정이 참을 수 없는 것이 되는 어머니를 다시 한번 힘차게 밀어낸다. - P157

《성서》에 나타나는 부정은, 상징체계라는 조건이나 계약에 대해서 분리될 수 없는 내재성이다. 따라서 이전의 텍스트에서의 음식물에 대한 혐오를 이후의 예언자들이 변화시켰다고 해도, 《성서》에 나타나는 부정이 ‘사악한 권력의현실 형태‘21)와 연관성이 있는지는 확실치 않다. 사실 분리하는 요소를 지닌 신성한 성전과 말씀 자체가, 예언자들에게는 고유함이나 자기 동일성과 뗄래야 뗄 수 없이 병행하는 ㅡ 내버릴 수 없는 가치를 가진 부정인 것이다. - P164

상징적이거나 또는 사회적인 계약으로서의희생 제의에 대한 개념을 추월하라고 꼬드기는 것은, 바로 혐오의체계를 강조하는 《성서》 자체라는 점이다. "살생하지 말라"가 아니라 금지나 계율을 준수하지 않으면 어떠한 희생(犧牲)도 드릴 수없는 것이다. 〈레위기 > 제11장은 음식물에 관한 모든 터부의 규칙을 통해 이같은 견해를 보다 분명히 한다. 그 결과 성스러움과 정결의 법칙에 따라야만 희생 제의를 올릴 수 있는 것이다.
그 법칙이란 무엇인가? 속인인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희생 제의를 제약하는 것이다. 법칙이란, 말하자면 죽이려는 욕망을 가장한 것, 하나의 분류 체계에 불과하다. - P1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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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 스위트 홈 - 2023년 제46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최진영 외 지음 / 문학사상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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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문학 수상작 작품집을 오랜만에 읽었다. 2021년 이효석 문학상 수상집에서 이서수라는 작가를 알게된 수확이 있었으나 이후 문학상 수상집은 더 읽지 않았다. 한국 소설은 거듭하여 읽으면 비슷한 서사에 상황들이 반복되어 쉬이 질리기 때문이었다. 작년에 이 책의 전반적인 수준이 괜찮다는 후기를 보고 찜해 두고 있었는데 해를 지나 읽게 되었다. 


역시 사람들의 눈은 다르지 않았는데 나도 작품들이 전반적으로 괜찮았다. 



대상작 주인공인 최진영은 이름은 익숙한데 작품을 경험해본 적은 없었다. 작가의 이력을 보니 나와 비슷한 나이 또래였다는 것을 알았고 책에 실린 작가의 글 속에서도 기억의 패턴들이 나로 하여금 동질감을 느끼게 했다. 


나는 죽어가고 있다. 살아 있다는 뜻이다. 죽음을 죽음 자체로 두기 위해 오래 바라볼수록 두려움보다 슬픔이 커졌다. 두려움은 막연했으나 슬픔은 구체적이었다. 거기 나의 희망이 있었다. - P26


말기 암에 걸린 나는 보령에 폐가를 수리하여 이사를 하려고 한다. 엄마는 몸도 아픈데 왜 굳이 그런 곳에서 살려고 하는지 나의 마음을 이해를 하지 못한다. 죽어가는 지금, 나는 불안한 미래를 직시하며 바라본다. 두려움과 슬픔은 다르다. 적어도 슬프다는 것은 막연한 감정이 아니라 좀 더 구체적인 명징성을 갖고 있다. 거기에 희망을 느끼는 나의 마음이 뭔지 알 것 같아서 울컥했다.


시간은 발산한다.

과거는 사라지고 현재는 여기 있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은 것이 아니라, 하나의 무언가가 폭발하여 사방으로 무한히 퍼져나가는 것처럼 멀리 떨어진 채로 공존한다. 과거는 사라지지 않는다. 기억하거나 기억하지 못할 뿐. 미래는 어딘가에 있다. 쉽사리 볼 수 없는 머나먼 곳에. 나는 종종 과거와 미래를 헷갈리는 것만 같다. 과거의 일이라고 기억하는 상황을 현재에 그대로 겪을 때가 있으며 미래의 일을 짐작하여 이야기하면 예전에 그런 일이 있었지 않았느냐는 대꾸를 듣는 경험들. 인류가 동시에 과거, 현재, 미래라는 개념을 망각한다면 어떻게 될까. 혼란에 빠질까? 누군가는, 아주 찰나일지라도, 평생 경험한 적 없는 엄청난 자유를 실감할지도 모른다. 출생과 죽음, 성장과 노화, 발생과 소멸을 시간이란 개념 바깥에서 이해하고 싶다. 얼음이 물이 되고 물이 수증기가 되듯 바뀌어 달라지는 것. 시간을 배제하고 변화를 말할 수 있을까. 죽음 다음이 있다면, 어쩌면, 시간에서 해방된 무엇 아닐까. - P15


그곳에 살았던 사람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과거의 사람이 남기고 간 물건은 그 사람을 말해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종종 과거와 비슷한 상황의 일을 겪으면 혼란스러울 때가 있었다. 특히나 잊어버리고 싶었던 기억을 또 마주하는 순간 지금이 과거인지, 현재인지, 미래인지 아득해진다. 그럴 때는 주저앉아 잠시 그런 시간이 지나가기를 기다릴 뿐이었다. 미래에 또 그런 순간이 올까, 아닐까. 오만가지 생각을 하며 그 시간을 견디고 살아낸다.


우수상 작품들도 대부분 훌륭했는데 나는 그 중 특히 김기태의 <세상 모든 바다>, 이장욱의 <크로캅>이 좋았다.



<세상 모든 바다> 에서는 지금은 대세가 된 K-POP 그룹의 공연장을 찾은 팬인 자이니치 '하쿠'와 한국인 '백영록'의 교류(연대)를 보여준다. 하쿠의 부모는 자이니치 3세대이고 본인은 일본 국적을 취득했지만 유학생으로 서울에 왔다. '하쿠'는 '백'이라는 성을 일본식으로 음독한 성이라고 하니 백영록과의 만남이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필연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아마도 방탄소년단이 기점이었을 것 같은데 가수 뿐 아니라 아이돌 팬들이 세계 문제에 관심을 갖고 목소리를 내며 기부를 하기도 하는 등 긍정적인 활동들을 하는 것 말이다. 세모바(SMB)의 멤버들도 그런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다. 

한쪽에서는 원전을 반대하며 환경을 보호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는 동안 다른 한쪽에서는 발전해야 생존한다는 절박감으로 군청 앞에서 행인들에게 전단지를 건네며 원전 반대 무효를 이야기한다. 하쿠는 이 두 가지 상황에 부딪쳤을 때 피하고 뒷걸음질쳤다. 나는 과연 적극적인 목소리를 내며 행동할 수 있을까 묻게 되었다.


그 사정에서 나의 몫에 대해 무언가를 생각해 내려 했으나 잘되지 않았다. 큼지막한 파도 하나가 방파제에 부딪쳤다. 하얀 물보라가 세차게 튀어 올랐다. 얼굴에 와 닿는 차가운 물방울의 감각. 실제로 닿았을까. 느낌뿐이었을까. 분명한 건 내가 뒷걸음질을 쳤다는 것이다.



<크로캅>은 결말까지 멈출 수 없는 흡인력 있는 이야기였다. 아마 재미만으로 따지면 이 작품이 최고일 것이다. 격투기 링 위에 선 두 남자가 사투에 가까운 격투를 벌인다. 나는 수비자일까, 공격자일까. 입장의 차이에 따라 나는 수비자가 되기도 하고 공격자가 되기도 하는 것이 아닐까. 나는 경기장 밖의 일상에서도 혼란을 겪고 있다. 


마스크를 쓴 유령을 본 적이 있는가. 유령처럼 그자는 스르르 걸어다닌다. 표정도 없이 걸어다닌다. 계단으로 걸어 다니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오르내리고 거리를 휘적휘적 돌아다닌다. 원한을 품은 자답게, 당신을 노리는 자답게, 당신의 죽음을 기다리는 자답게, 당신의 주위를 떠나지 않는다. 하이에나가 사체 주위를 배회하듯이, 독수리가 죽어 가는 동물의 머리 위를 선회하듯이. - P201


나는 상대방을 공격자이자 침입자로 규정하고 행동한다. '그는 나를 죽일지 몰라. 그럼 어쩌지?' 루쉰의 광인일기가 오버랩되기도 했다. 나는 창문에 창살을 설치하고 보안 장치를 달며 방비를 한다. 그런데 그런다고 완벽할까? 완벽한 시스템이라는 것은 없을텐데. 마음만 먹으면 이 혼란한 세상에서 내가 온전히 버틸 수 있을 것인가. 심지어 나를 공격하는 이는 윗집이자 과거 같은 회사에 다녔던 동료였던 사람이다. 그들은 왜 철천지 원수가 되었을까. 


윗집.

적의 집.

동료였으므로 더욱 가증스러운 자의 집.

당신을 적의와 증오와 분노의 나락으로 빠뜨린 자의 집.

(...)

혼자 정의로운 척, 혼자 외로운 척, 혼자 개폼을 잡고 술잔을 비운 뒤에, 그자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지. 아.... 이 새끼가.... 저주받을 새끼가.... 왜 그렇게 생각이 없다.... - P221~222



마지막으로 이야기하고 싶은 작품은 박서련의 <나, 나, 마들렌>이다. 


목이 잘리는 꿈을 꾸고 일어나서 옆을 보니 내가 있었다? 어느 쪽이 원본일까? 나인가? 나를 쳐다보는 그 사람인가? 아무튼 그 때 마들렌은 옆에 없었다. 마들렌은 소설 창작 수업에서 처음 만난 친구다. "나 언니네 집에 가면 안 돼요?" 하더니 내 집에 눌러앉은 마들렌. 마들렌은 소설가에게 성추행을 당해 그를 고소했고 재판이 열렸다. 마들렌은 나에게 증언을 요청하는데...


가끔 내가 둘 이상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많은 일을 하고 싶은데 몸은 하나라서 해낼 수 있는 일은 한계가 있을 때다. 그런데 내 몸이 둘 이상이라면 나는 과연 같은 생각을 지닌 인간일까? 같은 인물이 다른 장소에서 각각의 일을 한다니... 


소설가의 성추행 이야기를 보면서는 이서수의 <미조의 시대>가 생각났다. 거기서 수영이란 인물이 나오는데 그녀는 IT 회사에서 일하며 회사 오너의 요구에 따라 성인 웹툰을 그리고 있다. 가면 갈수록 가학적인 말도 안되는 스토리와 그림을 그리라는 요구에 원형탈모증까지 겪어가며 꾸역꾸역 일을 해나간다. 작품에는 육체적인 접촉이 나오지는 않지만 왠지 그게 있을 것 같아서 불쾌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었다. 

돈과 권력, 지위를 이용해 상대를 누르는 행위는 너무나 흔한 일이지만 이것이 먹고 사는 문제와 연결되면 대체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돈이냐, 예술이냐.


나는 나를 향해 결심에 찬 눈빛을 보냈다. 나 역시 나에게 고개를 끄덕여 결의를 표했다. 이것 말고는 역시 방법이 없는 걸까. (...) 나는 싱크대 하부 장을 열어 식칼을 꺼내와 나와 나 사이에 내려놓았다. 나와 나는 식칼을 가운데 두고 공손히 무릎을 꿇었다. 곧 또 하나의 내가 집으로 돌아올 시간이었다. - P1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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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목련 2024-01-18 10: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화가 님의 문학 리뷰, 제가 왜 반갑고 좋은 걸까요? ㅎ
김기태의 <세상 모든 바다>가 급 궁금해지고요!

거리의화가 2024-01-18 11:34   좋아요 0 | URL
ㅎㅎ 오랜만에 문학 읽기를 시도해봤습니다. 그래도 한국 소설은 주변의 이야기라 공감이 더 가서 읽기에 편한 것 같아요. 외국 소설은 너무 어렵습니다ㅋㅋ
김기태의 작품 좋았어요. 심지어 등단한지 얼마 안되었던데(2022년 신춘문예) 놀라웠어요!^^ 앞으로가 기대되는 작가일 것 같습니다.
 

"밤은 깊고 추위는 심한데 폐하께서는 어찌해서 나오셨습니까?"

황제가 말하였다.

"나는 잠을 잘 수가 없었고, 한 개의 탑(榻, 평상) 이외에는 모두가 다른 사람의 집이니 그러므로 와서 경을 보는 것이요."41

조보가 말하였다.

"폐하께서는 천하를 적다고 하십니까? 남북으로 정벌을 하시려면 지금이 그때입니다. 원컨대 향하고자 계산하신 곳을 들려주십시오."

황제가 말하였다.

"내가 태원(太原, 산서성 태원)을 빼앗고 싶다."

조보가 잠자코 오래 있다가 말하였다.

"신이 알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황제가 그 연고를 물었다.

조보가 말하였다.

"태원은 서북 두 쪽에 해당하니 한 번에 떨어뜨리게 하려면 변경의 걱정거리는 우리가 홀로 감당하여야 할 것인데 어찌 잠시 보류하지 않으십니까?42 여러 나라를 평정하여 없앤다면 저 탄환만한 작은 검은 점43은 장차 어디로 도망가겠습니까?"

황제는 일찍이 북한의 경계에 있는 첩자(諜者)를 통하여 북한의 주군에게 말하였다.

"그대의 집안과 주씨(周氏, 후주)는 대대로 원수이어서 의당 굽혀서는 안 되었소. 지금 나와 그대는 틈이 없는데 어찌하여 이쪽 한쪽을 곤란하게 한다는 말이요? 만약에 중원지역에 있는 나라에 뜻을 가지고 있다면 의당 태행으로 내려와서 승부를 결정지읍시다."

북한의 주군이 첩자를 파견하여 복명(復命)하여 말하였다.

"하동지역의 토지와 갑병은 중원지역에 있는 나라의 10분의 1도 감당하기 어렵지만 구구하게 이곳을 지키는 것은 대개 한(漢)나라 황실이 혈식을 받지 못할까를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황제는 그의 말을 애달프게 생각하고 첩자에게 말하였다.

"나를 위하여 유균(劉鈞, 926~968, 북한의 睿宗)에게 말하여 너에게 한 길을 열어주어 살게 하겠다고 하시오."

그러므로 그의 세대에는 대군(大軍)을 가지고 북벌하지 아니하였다.

북한의 유계업·풍진가(馮進珂)가 단백곡에 주둔하고, 위대(衛隊)지휘사 진정산(陳廷山)을 파견하여 수백 명의 기병을 인솔하고 와서 정탐하며 순찰하였다. 마침 이계훈 등의 전군(前軍)이 도착하였는데, 진정산은 즉각 부하를 가지고 항복하였다. 유계업·풍진가는 중과부적(衆寡不敵)인 것을 알고 역시 달아나서 진양(晉陽)으로 갔는데, 북한의 주군이 화가 나서 그들의 병권을 빼앗았다. 이계훈 등은 드디어 성을 포위하였다.

잠깐 사이에 쌓아 놓은 풀이 성 안에서부터 바람에 날려 나와서 곧바로 수구(水口)를 막고 그치니 송나라 군사들의 노(弩)에서 발사하는 화살은 뚫을 수가 없었고, 북한 사람들은 이어서 일을 할 수가 있어서 수구는 드디어 막혔다.

곽무위는 다시 북한의 주군에게 나가서 항복할 것을 권고하였지만 북한의 주군은 듣지 않았다. 엄인(?人, 환관)인 위덕귀(衛德貴)는 곽무위가 배반한 현상이 분명하니 사면할 수 없다고 극단적으로 말하여 북한의 주군이 그를 죽여 조리를 돌리자 성 안은 조금 안정되었다.

북한 사람들이 조금 있다가 서쪽으로 길게 이어져 있는 성에서부터 몰래 나와서 공격용 전투도구를 곧 불 지르려 하자 송의 군사들은 그들을 쳐서 달아나게 하고 목을 벤 것이 1만여 급이었다. 밤중에 홀연히 군영 벽 밖에서 부르는 소리가 전해졌다.

"북한의 주군이 항복하였다."

태원성이 오래되어도 떨어지지 않으니 동서반도지휘사인 이회충이 무리를 거느리고 이를 공격하였으나 싸워서 승리하지 못하고 나는 화살에 맞아 거의 죽게 되었다.

전전지휘사도우후인 조정한이 제반의 위사를 인솔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먼저 올라가서 급히 공격하여 죽을힘을 다하기를 원하니 황제가 말하였다.

"너희들은 모두 훈련된 바여서 한 사람이 백 명을 감당하지 아니할 사람이 없으니, 그러므로 주액(?腋)으로 대비하면서 휴척(休戚)을 함께 하고 있다. 내가 차라리 태원을 얻지 못한다고 하여도 어찌 차마 너희들을 몰아서 칼끝을 무릅쓰게 할 것이며 반드시 죽을 땅을 밟게 하겠는가!"

무리들이 모두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사류(射柳)란 일종의 활쏘기 기교를 연습하는 놀이인데, 청명절에 시행되는 풍속이다. 이 놀이는 조롱박 속에 비둘기를 넣어서 버드나무에 높이 매달아 놓고 활로 조롱박을 맞추어 조롱박 속에 있는 비둘기가 날게 하는 것으로 비둘기를 높이 날게 하는 사람이 이기는 놀이이다. 그런데 거란족은 비가 오기를 바라는 기우(祈雨)를 위하여 사류활동을 한다. 이때에 먼저 장막을 치고 먼저 돌아가신 황제에게 전(奠)을 드리고 황제, 친왕, 재상이 차례로 사류를 하고 패한 사람이 승리한 사람에게 술을 올린다. 둘째 날에는 천막의 동남쪽에 버드나무를 꽂고 자제들이 사류활동을 하며 자제들이 3일간 사류활동을 하는데 비가 오면 상을 내린다.

이달 기사일(22일)에 회주(懷州, 黑龍江省 鶴崗市)에서 봄 사냥을 하였다. 요주(遼主)는 곰을 쏘아 맞추었는데 시중(侍中)인 소사온(蕭思溫, ? ~970)이 이륵희파(伊勒希巴, 夷?畢)인 아리사(牙?斯) 등과 술을 올리면서 축수하였다.

요주가 술에 취하자 행궁으로 돌아갔는데, 근시(近侍)인 소격(?格)·관인(?人)인 화격(華格)·포인(?人)인 석곤(錫袞, 辛古) 등이 시해하였는데 나이는 39세였고, 묘호를 목종(穆宗)으로 하였다.

경오일(23일)에 소사온과 남원추밀사 고훈(高勳)·비룡사(飛龍使)86 니리(尼?, 女里, 경종의 근신) 등이 세종의 둘째 아들 야율현(耶律賢, 948~982)을 받들고 갑기(甲騎) 1천 명을 인솔하고 말을 달려 행재소로 달려갔다.

야율현이 통곡하였는데, 여러 신하들이 황제의 자리에 나아가기를 권하자 드디어 영구(靈柩) 앞에서 황제의 자리에 올랐으며 백관들은 존호를 올려서 천찬(天贊)황제라 하고 크게 사면하고 기원을 고쳐서 보령(保寧)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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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대분단체제론
이삼성 지음 / 한길사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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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단을 피부로 느낀 것은 일상을 통해서이지만 내가 분단체제라는 개념에 대해 글을 통해 알게 된 것은 지난 해 별세한 강만길의 <분단체제의 역사인식>이라는 책을 통해서였다. 조선은 식민지 시기를 거친 후 진통을 겪고 통합을 이루지 못한 상태에서 전쟁을 겪으며 분열과 갈등이 더욱 심화되었다. 강만길은 이 분단체제에 대해 한국 사회에 화두를 던진 것이다. 

저자는 '동아시아 대분단체제론'을 주창하며 백낙청의 '한반도 분단체제론'을 비교 대상으로 던진다. 백낙청은 분단체제론을 통해 남과 북은 외견상 자본주의체제와 사회주의체제사회 성격을 가지고 있지만 양자는 교묘하게 얽혀 상호작용을 하는데, 이는 적대적 상호의존을 통해서라고 했다. 

백낙청은 기고를 통해 저자의 '동아시아 대분단체제론'을 비판하는데(아시아의 상황을 일본과 아시아 나머지가 대립하는 체제로 논하는 것은 개념의 남용이다) 이를 두고 저자는 백낙청이 주장한 '한반도 분단체제론'은 한반도의 전쟁과 평화 문제를 한반도 내로 국한해서 규정 짓기 때문에 동아시아적 맥락이 빠져 있다고 보았다. 

 

그렇다면 저자가 주창하는 '동아시아 대분단체제론'은 무엇을 말하는가. 

 

저자는 탈냉전에도 불구하고 경제적 상호의존은 깊어지는 반면 군사정치적인 갈등이 격화되어 지역통합을 저해하고 있는 동아시아의 지역구도를 ‘동아시아 대분단체제’라는 개념으로 접근하고자 했다. ‘동아시아 대분단체제’는 미소 냉전과 결부되면서도 중국과 일본이라는 차상위국가들의 역사심리적 대립이 결합된 미일동맹체제 대 아시아 대륙이라는 구조를 갖는다. ‘동아시아 대분단체제’는 하위에 남북 분단과 중국과 타이완의 분단이라고 하는 ‘소분단체제’를 거느리고 있다. 이는 탈냉전이 되었음에도 해체되기는커녕 강화되는 양상을 보이는 것이 특징이다.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서 한국은 ‘동아시아 대분단체제’의 최대의 희생자이자, 지정학적 역사심리적 ‘중간자’(아시아적 전망의 관점)라는 자신의 위치를 인식하고 동아시아 분단체제를 해체하고 공동의 안보질서로 나아가는 적극적인 주체로서 역할을 할 것을 주장한다. - P695

 

동아시아 대분단체제론의 시각에서 과거와 현재의 미중관계를 이해하기 위한 출발점의 하나는 미국의 동아시아 경영이 그 근간에서 일본과의 유서깊은 연합에 기초했다는 사실을 주목하는 것이다. 태평양전쟁으로 일시 파국에 직면했던 미일연합(태평양 전쟁 이전까지 미일 관계는 밀착되어 있었다)은 원폭투하와 미국의 일본 단독점령, 미국이 취한 일본 재건 정책에 의해서 복원의 길을 걷는다. 

전후 동아시아 질서의 다른 축은 중국대륙이다. 반식민지 단계의 중국은 미국이 일본과의 제국주의 연합에 의한 경영의 대상이었지만, 태평양전쟁 기간에 장제스의 중국 국민당 정권은 미국의 동맹국이었다. 그러나 전후 3년(1946~1949)에 걸친 내전 끝에 1949년 10월 중화인민공화국이라는 신중국이 탄생한다. 중국 공산당은 1949년 미국과의 외교관계 개선을 탐색했으나 미국이 이를 거부하면서 미중 갈등의 매듭은 풀어지지 못했다. 같은 해 말 중소동맹조약이 맺어지면서 동아시아 대분단체제의 원형이 완성되었다.

한국전쟁 발발 후 미국은 한반도에 군사개입을 단행했고, 동시에 타이완해협에도 항공모함을 파견하면서 중국에 압박을 가한다. 여기에 마오쩌둥이 한국전쟁에 개입함으로써 미중 간의 정면 대결이 벌어졌다. 1951년 미일동맹으로 미일-한반도/타이완의 소분단체제가 이루어지고,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 개입하면서 인도차이나에도 소분단체제가 만들어졌다. 인도차이나의 소분단체제는 두 소분단과 함께 ‘미일동맹 대 중국’이라는 대분단 기축과 서로 지탱하고 심화시키는 상호작용 관계를 형성하면서 동아시아 대분단체제의 중요한 요소가 된다. 

 

미국과 일본은 태평양 전쟁 이전까지만 해도 협력 관계에 있었으며, 진주만 사건 이후 양국 관계가 틀어졌지만 중국 내전과 한국 전쟁으로 미일 관계는 돈독해졌다. 이를 바탕으로 미국은 한일 관계 협력을 종용하였고, 남한과 베트남도 미일 연합 체제에 들어오게 되었다. 미중 관계는 중소 간의 갈등이 벌어진 이후에 개선이 되었으나, 소련 해체와 함께 시작된 탈냉전 이후에는 중국이 경제 대국으로 부상하면서 미중 간의 갈등이 격화되면서 갈등이 심화되었다는 이야기다.  

 

저자는 특히 한미동맹의 유연화를 주문하는데 무릎을 칠 수 밖에 없었다. 나는 한미동맹이 애초부터 잘못 설정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으로서 지금도 한미 간 관계가 지나치게 기울어져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기 때문이다.

 

한반도의 남북 간 평화 정착과정과 함께 이후 동아시아에서 한국 외교의 미래에 대한 거시적 방향감각이 필요하다. 하나는 유연한 동맹의 정치이며, 다른 하나는 동아시아 공동안보의 추구다. 한편으로 동아시아질서에서 한국의 영토적 존엄 및 안보와 동아시아 세력균형에 기여하는 유연한 형태의 동맹의 정치를 배제할 수 없다. 그러나 동맹외교에만 머무른다면 동아시아에서 경직된 동맹체제에 바탕한 국가 및 진영 간 군비경쟁과 군사정치적 긴장의 영속화에 기여할 뿐이다. 그러한 구조는 한반도의 운명에 항구적인 위협으로 남는다. 그러므로 다른 한편으로 공동안보질서를 지향하는 노력이 필요하며, 그 노력의 한가운데에 한국이 있어야 한다. - P827

 

더불어 중국과 러시아, 일본 간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외교는 영리하면서도 합리적으로, 고무줄처럼 유연해야 하는데 끌려 다니거나 아예 거부하거나 모 아니면 도 식으로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기본적인 것부터 안되니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가는 느낌이다. 다시 말하지만 주체는 한국이어야 한다. 

 

저자는 2000년 초반부터 논문, 칼럼, 기고, 책 등을 통해 '동아시아 대분단체제론'의 이론을 정립하고 살을 붙여 나갔는데 이 책이 그 결과물이다. 책은 최근 글부터 역순으로 하여 2000년 초반까지의 글을 담아내고 있어 순서대로 읽으면 저자의 최근 생각부터 그 기원을 추적해나가는 방식으로 읽게 되는 것이고, 뒷부분부터 시작하여 거꾸로 읽으면 최초의 생각부터 현재까지 심화되는 과정을 확인할 수 있을 것 같다.

 

‘동아시아 대분단체제‘의 정신적 폐쇄회로로 기능하는, ‘일본의 역사문제‘로 상징되는 동아시아질서 안의 역사심리적 간극을 해소해나가는 것이 한국인을 포함한 동아시아인 모두의 절실한 숙제라는 점은 누구라도 부정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동아시아 대분단체제라는 질서의 전체 구조의 핵심 요소이자 그 전체를 감싸는 정신적 폐쇄회로라는 사실은 그것이 단순한 역사문제에 그치지 않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 폐쇄회로를 해체하는 실마리를 찾기 위한 전제는 그것의 현실적이며 논리적인 구조를 이해하는 것이다. 이 정신적 폐쇄회로는 두 가지의 딜레마로 구성되어 있다고 생각된다. 첫째는 ‘반성하지 않는 일본‘ (unrepentant Japan)이라는 문제의 구조적 조건에 관한 것이다. 이 문제는 분명 일본이라는 특정 사회의 역사적 자기성찰 능력의 미성숙을 표현한다. 그런데 문제는 일본 사회의 반성적 역사의식의 미성숙이 미일동맹의 문제를 포함한 동아시아 대분단체제의 속성과 깊은 관계가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반성을 거부하는 일본‘과 그것을 변화시키기 위한 외부 압력이 동아시아 대분단체제 자체의 지속성에 던지는 문제다. - P348~349

 

나는 한미동맹에 대한 생각, 일본과 한중 간에 벌어지는 역사적 마찰의 문제에 있어서 일본이 해야 할 역할이 인상적이었고 좋았다. 

 

마오쩌둥과 중국 공산당의 이데올로기가 아시아 냉전의 근원적 토대라면, 동아시아에서 민족해방운동에 대한 미국의 뿌리 깊은 거부감과 적대의 이데올로기는 왜 세계와 아시아에서 냉전의 뿌리 깊은 근원적 요인의 하나로 거론하지 않는가라는 의문을 응당 던질 수 있다. 중국과 인도차이나, 필리핀, 그리고 한반도에서 모두 미국이 혁명적 사회운동에는 강한 적대감을 갖고 대처한 점에서 일관성을 보였다. 이 지역들 모두에서 반혁명적 엘리트집단과는 긴밀한 협력관계를 구축하고 유지하는 데 또한 익숙한 일관성을 보였다. 중국과 미국 쪽의 동력을 가급적 균형 있게 깊이 돌아다보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바로 그런 맥락에서다. - P799

 

저자가 20 여년간에 걸쳐 한 이론을 체계화시키며 누적한 결과물을 책으로 만나는 것이 소중하고 짜릿한 경험이었다. 특히나 온 세계가 전쟁의 구렁텅이에 빠져 있는 이 시점에 이 책을 읽게 되어 한편으로는 가슴이 뜨거워지고, 다른 한편으로는 머리가 깨어나는 느낌이었다. 동아시아의 평화를 위해서 냉철한 이성과 논리로 무장하고 이 중 하나씩이라도 차근히 해결해나가는 해법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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