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宋)나라 초기에 한의 제도를 이용하여 관부에 수납하는 것 역시 80전 혹은 85전을 사용하였지만 그러나 여러 주에서 사사로이 사용하는 경우에는 오히려 각기 그 습속(習俗)을 따르니 48전을 100으로 하는 곳도 있기에 이르렀다.
정유일(9일)에 조서를 내려서 있는 곳에서 77전을 100으로 하게 하고, 매 1천 전마다 반드시 4근 반 이상에 이르도록 하였다.45 강남[강남국, 남당]에서 만든 새로운 전(錢)을 금지시키고 백성들이 먼저 간직하여 저축해 둔 것이 있으면 모두 관부로 보내고 관부에서는 동(銅)의 값에 근거하여 그 값을 쳐 주게 하며 사사롭게 주전을 하는 사람은 기시(棄市)하게 하였다.
겨울 10월 신유일(4일) 좌위(左衛)대장군인 이숭구(李崇矩)를 옹·귀·심·횡·흠·두등주49도순검사(邕·貴·?·?·欽·竇等州都巡檢使)로 삼았는데, 얼마 되지 아니하여 경·애·담·만(瓊·崖·?·萬)50에 있는 휘하의 군사를 옮기려고 하니 모두가 좇아가기를 꺼리었다. 이숭구는 기명(器皿)과 금백(金帛)을 다 내어놓았고 무릇 가치가 수백만 전이었는데, 이를 모두 나누어 주었더니 무리들이 모두 감격하여 즐거워하였다.
당시에 여적(黎賊)이 소란스럽게 움직였는데 이숭구는 동굴마다 가서 어루만지고 타이르고 자기의 재물을 그 추장에게 남겨주니 무리들이 모두 마음에 품고 귀부하였다.
무술일(12일)에 요(遼)에서는 토욕혼(吐谷渾)을 배반하고 태원(太原)으로 들어 온 사람이 400여 호(戶)였는데, 초토사(招討使)인 야율희곤(耶律喜袞)에게 명령하여 이들을 찾아내서 돌려보내게 하였다.
신사일(25일)에 고려국왕인 왕전(王佃, 경종)이 그 아들 왕원보(王元輔)를 파견하여 와서 공물을 바치고 등극한 것을 축하하였다.
9월 초하루 갑신일에 황제가 강무전(講武殿)에 나아가서 예부의 시험에 합격한 사람들을 복시하였는데 진사과에는 논(論, 논하는 글) 1수(首)를 추가하였다. 이로부터 항상 세 문제를 기준으로 삼았다.
발해(渤海, 山東惠民) 출신 호단(胡旦, 955~1034) 이하 74명을 얻었다. 을유일(2일)에는 제과(諸科) 70명을 얻었는데 나란히 급제를 하사하였다.
요의 동경유수(東京留守)인 평왕(平王) 야율융선(耶律隆先)은 총명하고 많은 공부를 하였는데 그는 동경에 살면서 부렴을 적게 하고 형벌을 줄여주며 홀아비와 과부를 구휼하며 자주 현명하고 능력있는 인사를 천거하여 사람들은 대부분 그를 칭찬하였다.
그 아들인 야율진격(耶律陳格, 陳哥)은 발해의 관속과 더불어 그 아버지를 죽이려고 모의 하고 군사를 들어서 난을 일으키니 요주(遼主)가 명령하여 야율진격을 환열(?裂, 車裂)하여 이를 조리돌리게 하였다.
요(遼)의 남경유수(南京留守, 요의 남경은 북경)인 연왕(燕王) 한광사(韓匡嗣, 918~983)가 들어와서 권추밀사(權樞密使)81가 되었는데, 요주(遼主)는 그의 아들인 한덕양(韓德讓, 941~1011)에게 명령하여 이를 대신하게 하였다.
한덕양을 지략(智略)을 갖고 있었고 공로를 세우고 일을 만들어 하기를 좋아하여 누차 그 아버지를 대신하여 유수(留守)82가 되었는데, 요인(遼人)들은 영광으로 생각하였다.
겨울에 요주(遼主)가 금천(金川)에 주둔(駐屯)하였는데 어잔랑군(御??君)인 야율호도(耶律呼圖, 虎古, ? ~990)가 송을 빙문(聘問)하였다가 돌아와서 요주에게 말하였다.
"송은 반드시 하동을 빼앗을 것이니 마땅히 먼저 이를 대비해야 합니다."
한광사(韓匡嗣, 918~983)가 말하였다.
"어떻게 그것을 아시오?"
야율호도가 말하였다.
"이는 어렵지 않게 압니다. 사방에 있는 호칭을 참월(僭越)98하는 나라는 송이 모두 나란히 빼앗았는데, 오직 하동(河東, 북한이 있는 지역)만 아직 떨어지지 않았을 뿐입니다. 지금 송은 군사에 관하여 강론하면서 전쟁을 연습하고 있는데 속뜻은 반드시 한(漢, 북한)에 목표를 두고 있습니다."
한광사가 이를 꾸짖으며 말하였다.
"어찌 이런 일이 있겠소?"
끝내 방비를 두지 아니하였다.
황제가 말하였다.
"내가 지금 군사를 일으키려는데, 경은 어떻다고 생각하시오?"
조빈이 말하였다.
"우리 국가의 갑병은 정예이고 사람들의 마음은 기쁘게 떠받들고 있으니 만약에 조벌(弔伐)101한다면 마치 마른 나무를 꺾고 썩은 것을 끄는 것 같은 뿐입니다."
황제는 속으로 드디어 결심하였다.
재상인 설거정 등이 말하였다.
"옛날에 세종이 군사를 일으키자 태원(太原)에서는 거란의 원조에 기대고 성벽을 굳게 하여 싸우지 않아서 군사들이 오래 지치게 하여 돌아왔습니다.
태조가 거란을 안문관(雁門關, 山西省 ?州市 代縣)의 남쪽에서 격파하고 그곳에 사는 백성들을 다 몰아서 하·락(河·洛) 사이에 분포시키었으니 비록 소혈(巢穴)이 아직 있다고 하여도 위험하고 어려운 것이 이미 심합니다.
이를 얻는다고 하여도 땅을 넓히었다고 하기에는 부족하고, 이를 버린다고 하여도 걱정거리가 되기에는 부족하니 원컨대 폐하께서 이를 깊이 고려하십시오."
황제가 말하였다
"오늘날에는 하려는 일은 같지만 형세는 다르고 또한 먼저 돌아가신 황제께서 거란을 깨뜨리고 그 사람들을 옮겨서 그들의 땅을 텅 비게 하였는데, 바로 오늘날을 위한 일이었으니 짐의 계획은 결정하였소."
정해일(7일) 태자중윤인 장계(張?)·저작랑인 구중정(句中正, 929~1002)을 고려에 사신으로 보내어 북벌하겠다고 알렸다.
요주(遼主)가 송의 군사가 태원을 친다는 소식을 듣고 탄식하여 말하였다.
"야율호도는 특히 일을 헤아릴 수 있었는데 짐과 한광사가 생각한 것이 미치지 못하였다."
마침내 대마(玳瑪)인 장수(長壽)를 파견하여 와서 말하였다.
"어떠한 명목으로 한(漢, 북한)을 치는 것이요?"
황제가 말하였다.
"하동(河東, 북한)에서 명령을 거역하였으니 마땅히 죄를 물어야 하는 것이요. 만약에 북조(北朝, 요)가 원조하지 않는다면 화의의 약속은 예전대로일 것이며, 그렇지 않으면 전쟁이 있을 뿐이요."
계묘일(23일)에 새로운 혼천의(渾天儀)104가 완성되었는데, 사천감(司天監) 학생인 장사훈(張思訓)이 창안한 것이다. 문명전(文明殿)의 동남쪽에 있는 종고루(鍾鼓樓)에 두고 장사훈을 혼의승(渾儀丞)으로 삼았다. 예전에 만든 것은 일월(日月)과 주야(晝夜)로 운행하는 도수(度數)를 모두 사람이 움직여 돌렸는데, 새로 만든 것은 저절로 돌아갔고, 더욱 정치(精緻)하고 교묘(巧妙)하였다.
2월 정묘일(18일)에 북한이 요(遼)에 도와주기를 빌자 요에서는 남부재상 야율사(耶律沙, ? ~988)를 도통(都統)으로 삼고 기왕(冀王)인 야율탑이(耶律塔爾)를 감군(監軍)으로 삼아서 원조하러 가게 하였다. 또 남원대왕(南院大王)인 야율색진(耶律色珍)에게 명령하여 거느리는 부대를 가지고 따르게 하였으며 추밀부사인 야율목제(耶律穆濟)가 이를 감독하였다.
애초에 우감문위솔부(右監門衛率府)의 부솔(副率)인 왕계훈(王繼勳, ? ~977)이 분사(分司)인 서경(西京)에 있었는데, 저자에 있는 백성들의 자녀를 억지로 급사(給使)로 하였다가, 조금이라도 마음에 맞지 않으면 바로 죽여서 그것을 먹었다.
혜독(??, 관)에다 남은 뼈를 두었다가 나가서 들에 버렸으며, 여자 거간꾼과 관(棺)을 파는 사람은 그 문을 출입하는 것이 끊이지 아니하여 살면서 아주 이를 고생스럽게 여겼지만 감히 알리지 아니하였다.
황제가 번저(藩邸, 등극하기 전에 살던 저택)에 있으면서 자못 그 일을 들었고, 즉위하기에 이르자 마침 호소하는 사람이 있어서 빠르게 뇌덕양(雷德?, 917~992)에게 명령하여 이를 국문하게 하였더니 왕계훈이 모두 자복하였으며 죽인 비녀가 10여 명이었다.
을묘일(24일)에 왕계훈과 나란히 여자 승려 8명을 낙양의 저자에서 참수하였다. 장수사(長壽寺)의 승려인 광혜(廣惠)가 항상 왕계훈과 같이 인육(人肉)을 먹었는데, 황제는 먼저 그 정강이를 꺾어버리게 하고 그런 다음에 그를 참수하였더니 백성들이 모두 통쾌하다고 하였다.
애초에 절도사는 자제를 군중에서 아교(牙校, 하급무관)로 보임할 수 있었는데, 호방하고 횡행하며 사치하고 방종하니 백성들 사이에서는 이를 고생스럽게 생각하였다.
황제는 평소에 그 폐단을 알고 있어서 처음에 즉위하자 바로 여러 주부(州府)에 조서를 내려서 그 이름을 적어서 궁궐로 부송(部送)24하게 하였는데, 이른 사람이 무릇 100명이었다. 계미일(22일)에 모두 전전승지(殿前承旨)25로 보임하여 낮은 직책을 가지고 그들을 옭아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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