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업이 얼마나 철저하게 가부장주의와 주종관계를 임금관계로 대체했든, 몇몇 개인이 얼마나 성공적으로 사회적 장벽을 뛰어넘어계층의 사닥다리 위로 올라섰든, 성공한 자들이 자신의 발 밑에서 해체되는 기준과 구별에 대해 얼마나 깊이 고민을 했든, 명초의 중국사회를 묶어놓은 가부장주의와 주종관계에 기초한 계급체계는 그 마지막까지도 존재했다는 사실이다. 물론 이것들은 상업에 의해 많이 변용되었다. 상인들은 엘리트층으로 가는 길을 찾아냈고, 신사층은 수입을늘리기 위해 상업에 의존했다. 하지만 토대는 무너지지 않았다. 교통·통신과 상업이 명조 사회 내에 유도한 그 모든 유동성에도 불구하고지배자와 피지배자 사이의 구조적 경계는 약해지지 않았다. 각 개인은1644년의 위기를 고통스럽게 지나갔지만 사회제도는 의연히 살아남았다. 실은 더 강해졌을 것이다. 가을의 족장들은 겨울의 족장들이 형성되었던 환경과는 전혀 다른 조건하에서 백성을 다스렸으나, 그들의지배에는 변함이 없었고 다음 왕조에 들어서도 그들의 지배는 계속될것이었다. - P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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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이상은 안정된 농경사회였다. 이는 도가적인 이상에 바탕을 둔것으로 덕을 갖춘 소수의 연장자가 감독하는 자급자족적인 촌락들로 - P39

이루어지는 사회다. 국가는 최소한의 세금을 받아 기본적인 역할만 했다. 농민들은 촌락에 묶여 있고 공장(工匠)들은 국가에 소속되어 일했고, 상인들은 부족한 필수품만을 거래해야 했으며 군인들은 변경에서국가를 방어했다. 행정은 아주 소수의 교육받은 계급에 맡겨졌고 이들은 스스로를 엄격하게 성찰하는 도덕군자들이었다.
홍무제의 목표는 제국을 반석 위에 올려놓는 것이었다. 백성은 일단한 곳에 정착하면 국가의 허가를 받아야만 이동이 가능했다.
또한 왕조의 핵심법률을 모아 편찬한 『대명률』(大明律)에서는 신체적 이동뿐 아니라 사회적 이동도 제한하고 있다. 공장(工匠)의 아들은 공장이 되어야 했고, 군인의 아들은 군인이 되어야 했다. 직업을 바꾼 자에 대한 벌은 물리적 장벽을 넘어선 자에 대한 벌만큼이나 가혹했다. - P40

항구적인 정착 농촌이라는 목가적인 그림이 고대부터 현재까지 계속해서 재생산된 이유는 이 그림이 통치자들이 갈망하는 영구적인 정치적 안정을 만족시킬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명대 초기에조차 그것은 그저 그림일 뿐이었다. 마을의 실제 생활은 달랐다. 여인들이 들로 나가 일하는 것은 물론이고 사람들은 정부가 닦아놓은 길을통해 필요한 물자를 교환했다. 명조가 수송체계를 재건하자, 교역은그 수송체계에 의지하여 사람과 물자의 이동이 더욱 빨라지고 편리해졌으며 상업은 더욱 활발해졌다. 1425년경에는 상당수의 생산자들이잉여를 지역시장에서 거래했고 일부 일용품은 원격지로 이동하기도했다. - P96

쑤저우는 홍무제의 경쟁자였던 장스청(張士誠)의 본거지이자 몽골지배하의 신사-지주세력의 중심지였다. 홍무제는 재위 초기에 무거운 세금 부과와 사민(徙民)정책을 통해 쑤저우를 굴복시키는 한편 난징에는 수도로서의 위용을 과시하기 위해 투자를 집중하여 쑤저우의쇠퇴를 앞당기려 했다. 이 정책은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쑤저우는 상업경제가 크게 성장하여 황제가 부과한 세금을 무리 없이 소화해낼 수있었다. 오히려 세금 부담이 상업화를 촉진시키기도 했다. 사람들이돈을 벌 수 있는 혁신적인 전략에 골몰했던 것이다. - P106

끊임없는 세수 확대 요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명조는 몇 가지 과세를은납으로 대체했다. 그 일부가 베이징으로 보내졌고 그 비율은 점점커졌다. 은납의 시작은 금화은이 부과된 1436년으로 생각할 수 있다.
앞장에서 남부지방 일곱 개 성의 조량 일부가 은납으로 대체되었다고언급한 바 있다. 명 중기의 요역 개혁도 다른 대체제도를 필요로 했다.
‘지방별 조달‘(坐辦)이 ‘연례 징수‘(歲辦)로 대체되었다. 이는 수도에물품을 제공하는 지현은 그 비용을 자체 예산으로 부담하고, 그렇지않으면 은을 중앙정부에 보내는 것이었다. 지방의 역전(驛傳)에서 필요로 하는 의무적인 복무는 점차 사라지고 대신 ‘역은‘(驛銀)을 납부하 - P124

는 일이 많아졌다. 1490년에 시작된 이런 현상은 1507년에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이런 개혁과 그 밖의 개혁들이 국가 세수를 점차 현금위주로 바꿔나갔다. 16세기 말에는 실제로 이갑제를 통해 징발되던 모든 요역이 일조편법에 따라 토지에 대한 부가세로 과세되어 납으로대체되었다. - P125

명의 국가이념으로 인해 이 시기의 중국에서는 상업적인 해상여행을권장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의 법률은 당국의 허가를 받기만 하면 해상무역을 용인했다. 말, 무기, 철제품, 동전, 비단 같은 전략상품 이외의 중국상품은 해외로 나갈 수 있었다. (사법관원들은 『대명률』 - P162

에 열거된 전략상품과 비슷하다는 이유로 전략상품이 아닌 상품에 대해서도교역을 금지시킬 수 있었다. 한 예로 1524년에 한 관원은 중국의 조선공이외국인에게 무역선을 만들어주는 일을 허가하는 것에 반대하는 상주문을 올렸다. "법에 따르면 이는 금지된 무기를 국외로 반출하다 적발된 것과 한가지입니다."
‘즉 해군에서 사용할 경우 배가 무기로 간주될 수 있음을 의미했다.) 외국상품의 수입도 가능했지만, 단 지정된 항구를 통해서 들어와야 하고 수입관세를 물어야 했다. 『대명률』은 돛대가 둘인 배에 이런제한을 가하고 있는데 그보다 작은 배에는 적용되지 않았다. 이것은해상무역을 하는 대상(大商)들이 축적할 수 있는 부를 제한하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허가되지 않은 외국상품을 사들이거나 보관한 사람들은 국내의 상세를 회피한 경우보다 더 과중한 벌금형을 받았다. 『대명률』의 한 항목에 대한 주석에 따르면, 이렇게 벌금에 차이를 둔 것은원래는 국가가 고수익 거래에 대해 정당한 세금을 징수하겠다는 뜻이었지만, 나중에는 적극적으로 대외무역을 억제하는 수단으로 변질되었다고 한다. - P163

1513년 포르투갈인들은 라파엘 페레스트렐로가 지휘하는 한 척의선박을 타고 말라카를 떠나 중국 남부에 처음 당도했다. 두 번째 대규모 원정은 1517년 광저우(廣州)에서 무역을 하기 위해 이루어졌다. 이번에는 포르투갈 왕이 통상관계를 맺기 위해 중국황제에게 파견한 사절단이 동행했다. 이외교적 접근은 실패했고, 임무를 맡은 포르투갈인들은 고초를 겪다가 결국 옥사했다. 하지만 은밀한 거래는 양쪽 모두에게 이익을 주었고 유럽의 배들이 중국연안에 더 자주 나타나게 되었다. 중국과 포르투갈의 계절무역이 1549년에 이르러 정기적으로 이루어졌고 무역상들은 마카오 반도의 남서쪽 상촨(上川, 포르투갈인은상주앙이라 불렀음) 섬에서 접촉했다. 포르투갈인은 그곳에서 마카오로진출하여 1557년에 합법적인 조약항을 설치했다. 이 조약항은 아주작았지만, 유럽과 중국 사이의 무역이 장기간 이어지게 한 최초의 발판이 되었다. - P168

브로델은 유럽 자본주의 발전의 이해라는 커다란 지적 의문 안에서근세 유럽 상업의 성장모델을 정식화했다. 그는 자본주의가 시장경제의 확대에 따라 나타나는 것은 아니라는 현명한 주장을 했다. 오히려자본주의는 시장경제의 최상부에 형성되는 사회적 신분질서 안에서형성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자본주의는 특정한 사회구조와 시장경제 사이에서 일어나는 상호작용의 산물이다. 유럽 자본주의의 진화는유럽 역사에서만 보이는 유일한 것이다. 사회구조가 다를 경우에는 경제의 발전과정 역시 다르게 이루어진다. 이 부분에서 근세 유럽과 명대 중국사에 대한 해석은 갈라져야 한다. 엘리트 형성의 맥락이 서로다르고 국가권력의 영향도 다르다. 명대 후기의 중국이 자본주의를 발전시킨 것은 아니다. 물론 이 말이 중국이 자본주의를 발전시키는 데실패했다는 뜻은 아니다. 자본주의와 다른 어떤 경제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 경제는 국가의 통신망을 이용하여 지역간 경제를 연결시킨확대된 시장경제로서, 일부 지역에서는 농촌과 도시의 노동을 연속적인 생산과정으로 조직했다. 하지만 농촌가구가 그대로 기본 생산단위로 유지되었으며 생산과 소비의 완전한 분리는 일어나지 않은 채 소비패턴을 재편했다. 경제의 변화는 더뎠지만 확실하게 신사층 내부에 침투하여 상업에 대한 유교적 경멸을 불식시켰다. 이런 신사층의 변화는엘리트의 이익이 청대에도 온존하게 되는 배경이 되었다. 하지만 이것은 유럽적 의미에서의 자본주의는 아니다. - P263

명 후기에 은은 연간 수백만 냥씩 유입되었다. 이 정도의 은 유입은경제를 활성화시켰을 것이 틀림없다. 그 흐름이 붕괴된다는 것은 최소한 단기적 위기라고 할 만한 상황이었다. 1623년 네덜란드 무역상들이 웨 항을 봉쇄하고 중국정부에 무역을 허가해달라고 요구하며 폭력을 휘둘렀을 때, 장저우의 중국상인들은 그 위기를 실감할 수 있었다.
300명의 장저우 상인들은 순무에게 "네덜란드인과 거래를 허락해달라"고 진정했다. 봉쇄에 가담했던 한 네덜란드 선장도 이렇게 기록했다. "그들은 전쟁으로 상품을 잃었고 전쟁이 계속되면 모두 한순간에빈털터리가 될 것을 두려워했다. 그래서 앞서 말한 순무에게 강화안에동의하고 우리와 거래하게 해달라는 긴급 청원을 올린 것이다." - P272

봄은 북부 사람들이 저장 해안의 푸퉈 섬으로 가는 도중에 항저우를 지나는때이기도 했다. 이 몇 달간 시 호의 절들은 참배객으로 장사진을 이루었다. 가깝게는 이웃 부에서 오기도 했지만 멀리 산둥 성에서 오는 사람들도 있었다. 장난 지방에서 율(律)의 중심 사찰인 소경사(昭慶寺)는 골동품과 기념품을 파는 큰 장터로 변해버렸다. 불당의 안팎, 신도들이 다니는 길 위아래, 연못의 좌우, 산문(山門)의안쪽과 그 너머까지, 모든 공간이 한 치의 빈틈도 없이 이용되었다.
[상인들은 방이 있으면 거기에 진열대를 세우고, 방이 없는 곳에는헛간을 짓고, 헛간 앞에는 또 천막을 세우고, 천막 뒤에는 더 많은 진 - P307

열대를 설치했다. 없는 게 없었다. 화장품, 머리장신구, 귀고리, 상아, 가위, 경전, 목탁, 아이들 장난감까지 모든 것을 살 수 있었다. - P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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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을 때, 나는 사람이 죽어 귀신이 되면 다른 귀신들을 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진짜 귀신이 되고 나서야 귀신은 가장 고독한 존재이며 공간과 시간 속에서 어떤 사람이나 사건과도 만날 수 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나는 시간의 분과 초 사이의 틈새로만 흘러 다니다가 나뭇가지 끝에 박쥐들과 함께 조용히 매달려 잠을 자고, 매미와 함께 흙속에서 편안하게 매복한다. 고정된 형상과 냄새, 온도, 색깔이 없기 때문에 탐색과 관측이 불가능하며, 무게도 질감도 없다. 사람들이 탁자 가득 제물을 차리면서 귀신들과 외로운 혼귀들을 먹이기 위한 것이라고 말하지만 그런 제물은 인간의 사욕일 뿐이다. 사람들은 안전함이 부족할수록 죽음을 더 두려워하게 되고, 귀신들에게 바치는 제물이 부족하다고 느끼기 때문에 제사상 위의 제물도 갈수록 풍성해진다. 사실 제물이 풍성할수록 귀신들은 더 고독하다.

‘발전’을 외치는 것은 원래 있던 전통적인 것들이 모두 좋지 않고 열등하며 도태되거나 개량될 필요가 있다고 말하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다 말하고 싶다. 사람들을 찾아 다 말하고 싶다. 하지만 또 남들에게는 말하고 싶지 않기도 하다. 마음속에 넣어 두고 있는 게 가짜인 것 같을 때가 있다. 입 밖에 내야 진짜가 되는 것 같다. 그래서 말하지 않는 거다. 침묵은 일종의 도피다. 마음속에 감춰 두고 있는 거지. 내가 죽으면 비밀도 따라 죽을 것이고.

인간의 기억은 선별되기도 하고 감춰지기도 했다. 어떤 극단적인 상황에서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너무 고통스러웠던 성장의 한 구간을 지워 버리고 아름답고 좋았던 것은 남길 수 있었다.

난민들은 바다를 건넌다. 고향집이 포탄 공격에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집이 없어졌다. 나라가 망하거나 추방되어 의지할 데 없이 떠돌아다니게 되는 것, 더 이상 돌아갈 본향이 없는 것이 바로 ‘집이 없는’ 상태였다. 뿌리가 잘려 나가는 단절이자 영원한 이별이었다. 돌아갈 본향이 없어졌다. 집이 없다.

바람이 시작되는 곳은 어디일까? 멀고 먼 바다일까? 아주 먼 곳에 있는 산일까? 오늘 용징에 불어오는 바람은 발트해에서 출발한 바람이고 백악관의 방습 상자에서 출발한 바람이고 양타오 과수원의 나뭇가지에서 출발한 바람이었다. 바람은 한 겹 한 겹,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종종 윌리엄 포크너의 명구가 생각났다. "과거는 죽지 않았다. 과거는 심지어 지나가지도 않았다."
누구나 아픈 기억과 상처가 있으면 이를 덮어 버리거나 묻어 버리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과거는 그림자 같고, 지나간 일들은 다시 반복된다. 과거가 있는 한 귀신은 존재한다. 인간 세계 곳곳에 귀신들이 도사리고 있다. 어쩌면 우리 모두 귀신인지도 모른다.

기억은 믿을 수 있는 걸까? 과연 기억은 진실일까? 유년은 정말로 존재했던 것일까? 용징은 존재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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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31] Exploring New Worlds

당시 인도로 향하는 것은 트렌드였다(음식이 빨리 부패하는 것을 막기 위해 후추 등의 향신료가 중요했기 때문).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남들이 남쪽으로 내려가는 생각을 바꾸어 서쪽으로 향하는 것으로 하고 지도까지 제작한다. 콜럼버스는 포르투갈 왕, 프랑스와 영국 왕을 만나 투자 유치를 요청하지만 설득에 실패하고 마지막 스페인에서 페르디난드와 이사벨라에게서 허락을 받아 배를 살 돈을 마련한다. 그러나 오랜 선상 생활로 음식이 부족해지자 선원들은 괴혈병으로 상당수가 사망한다. 집에 돌아가자는 선원들의 아우성에 3일 동안 육지가 보이지 않으면 집에 돌아가기로 하는데 다행히 2틀째 육지에 당도했다. 그곳은 금도, 후추도 없이 목화와 감자 같은 식물만 보이는 땅이었다. 그들이 도착한 땅은 인도가 아닌 플로리다였다. 5년 뒤 포르투갈 항해사인 바스코 다 가마가 아프리카를 지나 인도에 도착하는 주인공이 되었다. 아메리고 베스푸치는 콜럼버스를 질투해 스스로 항해를 떠났다(돈이 많은 귀족). 그는 콜럼버스처럼 아메리카 대륙에 닿았는데 이곳이 신대륙임을 확신했다. 유명 지리학자가 새로 발견한 땅의 이름을 그의 이름을 따 'America'가 되었다. 페르디난드 마젤란은 콜럼버스의 항로를 그대로 따랐으나 폭풍우를 만나 한달 이상을 표류하다 갑자기 고요해진 너른 바다를 마주하며 편안해짐을 느낀다. 그곳이 태평양이었다. 마젤란과 선원들은 3달 이상의 항해 후 마리아나 제도에 닿았다가 물과 식량을 얻기 위해 필리핀까지 이른다. 그러나 마젤란은 현지 부족민에게 붙잡혀 사망하고 만다. 이후 남은 선원들이 배를 타고 인도에 닿으면서 마젤란은 인도까지 간 최초의 타이틀을 가진 사람이 되었다.


[CH32] The American Kingdoms

중앙 아메리카에 최초의 거대 제국은 마야였다. 오늘날 멕시코의 유카탄 반도에 해당하는 곳이다. 마야의 왕은 권력이 무척 컸다고 한다. 부족 간 전쟁이 잦았는데 전투가 있기 전에 왕은 온몸을 뚫어 피를 내는 것으로 신에 대한 신념을 표시했다. 마야의 도시는 몇 백년간 잘 유지되었으나 거주민들이 늘어나며 음식이 부족해졌고 잦은 지진과 허리케인의 발생, 왕의 가혹한 정치 등 때문에 시민들의 이탈률이 급증하면서 도시가 정글화된다. 

아즈텍은 넓은 호숫가에 자리를 잡아서 땅을 건조하게 오랫동안 만드는 일에 공을 들였다. 그렇게 테노치틀란이란 도시가 건설되었다고 점점 더 많은 사람이 이곳에 유입되며 도시의 규모가 커졌다. 운하가 건설되며 오가기가 편해졌고 호숫가라 도마뱀, 도롱뇽, 개구리, 생선알들을 요리해 먹기도 했다. 그들은 카카오를 초콜릿으로 만들어 최초로 브랜드화시킨 장본인들이다. 

남아메리카에는 잉카 제국이 있었다. 오늘날 페루 지역이 이에 해당한다. 쿠스코는 제국의 수도였다. 잉카인들은 자신들의 역사를 남기지 않았는데 역설적으로 콜럼버스가 방문했던 해에 왕이였던 Huayna Capac은 기록에 남아 있다. 당시 잉카 제국은 상품 무역으로 활발한 교류를 했다. 하지만 Huayna Capac이 죽자 쪼개진 왕권은 합쳐지지 못한채 제국의 힘은 약화되었다. 


[CH33] Spain, Portugal, and the New World

신대륙을 둘러싸고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대서양에 앞다투어 배를 보내게 된다. 그들은 그곳에 새 도시를 건설하고자 콩키스타도르(conquistadores)를 보내 원주민들과 전투를 벌이게 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협상을 벌여 중앙 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를 분할하는데 합의했다(자기들 맘대로 좌표 찍듯이 찍으면 자기 땅이 되는 참!). 이들은 효율적인 도시 건설을 위해 노예를 데려오는 것을 생각하여 처음에는 서아프리카에 있던 이슬람 상인으로부터 노예를 사서 보내다가 나중에는 직접 노예를 끌고 갔다(일부 모집도 있었겠지만 문제는 일방적으로 끌고 간 경우도 허다했다). 열악한 선상에서 그들은 햇빛도 보지 못하고 제대로 먹지도 못한 채 신대륙에 도착하기도 전에 많은 노예들이 목숨을 잃었고 도착한 노예들 앞에는 가혹한 노동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즈텍 제국에 코르테스를 비롯한 스페인 사람들이 도착했을 때 아즈텍 사람들은 그들을 방문자라고 여기고 환영했다(아즈텍인들은 말을 처음 보고 놀랐다고). 스페인 사람들은 8개월동안 호화로운 대접을 받다가 그마저도 지루해진 이들은 아즈텍인들과 싸움을 벌여 학살하는 만행을 저지른다. 아즈텍 인들은 분노에 차서 왕인 Montezuma에게 항의했고 그 과정에서 왕은 살해당한다. 아즈텍인은 스페인 사람들을 감금하고 얼마 후 시간이 지난 뒤 스페인인들이 주변이 조용해진 것을 확인하고 도망을 감행한다. 갑작스런 아즈텍인의 공격에 배에 마구 실은 금덩어리 때문에 무거워진 배는 가라앉고 코르테스와 몇 명의 스페인만 살아 남아 돌아간다. 하지만 코르테스는 포기하지 않고 새 사람들과 새 말을 준비한 후 테노치틀란으로 진군한다. 12개의 군함을 이용하여 드디어는 수도를 포위한다. 3개월 간의 전투 끝에 1519년 코르테스는 테노치틀란을 접수하고 중앙 아메리카에서 스페인 식민지의 역사가 시작된다.


[CH34] Martin Luther’s New Ideas

마틴 루터는 가톨릭 교회의 교리에 따라 교회가 원하는 것을 충실히 지키는 수도승이었다. 그는 수도승 생활을 한 지 5년이 지나 비템부르크 신학 대학에서 교수 역할을 하러 가게 되었는데 <the book of Romans>를 기반으로 학생들과 함께 연구를 하다가 기존에 자신이 가졌던 신에 대한 생각이 변화되는 경험을 한다. 그는 가톨릭 교회에서 신에게 죄를 용서하면 면죄부를 주는 행위가 잘못되었음을 비판한다. 그는 복음만이 답이다라고 이야기하며 1517년 10월 31일 95개의 면죄부 비판 목록을 내놓는다. 이는 가톨릭 교회가 옳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을 사람들에게 퍼지게 한다. 

1485년 헨리 튜더가 삼촌인 리차드를 죽이고 헨리 7세로 왕이 된 이후 그는 평화로운 왕위 계승을 위해 2살인 아더와 3살인 스페인 왕의 딸(캐서린)과 가상 결혼을 시켰다(진짜 결혼식은 각자가 16살, 17살이 되었을 때). 그러나 아서가 결혼한 지 6개월 만에 고열이 나 사망하여 남동생인 해리가 17살에 헨리 8세로 왕위를 잇는다. 헨리 8세는 왕위를 위해 캐서린과 결혼을 감행한다. 하지만 캐서린은 딸만 있었고 헨리 8세는 그녀와 이혼하기를 원했다. 이 때 헨리 8세에게 들어온 것이 마틴 루터의 교회 개혁이었다. 마침 귀족들도 헨리 편을 들면서 그는 캐서린을 보내 버리고 앤 불린과 결혼하고 영국 신교회를 만든다. 그런데 앤 불린도 딸(엘리자베스)만 낳아서 그녀를 참수시키고 Jane Seymour과 결혼하여 아들(에드워드)를 낳는다. 여기서 멈추지 않고 독일 공주인 Anne of Cleves 사진을 보고 그녀를 데려오게 한다. 그러나 사진과 실제 모습이 다르다는 이유로 고함을 친다. 여기에 어린 여성인 Catherine Howard와 결혼했지만 그녀 역시 참수시켰고 마지막으로 간호사인 Catherine Parr와 결혼한다. 나이든 헨리 8세를 돌보기에 적합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왕이라지만 이렇게 마구 갈아치워도 되는 것인가, 죽은 이들은 무슨 죄인가. 


[CH35] The Renaissance

고대 그리스와 로마를 재탄생시키는 시기, 르네상스가 도래한다. 대항해 시대가 시작되면서 사람들은 새로운 이론과 학설을 곳곳에서 받아들이게 되었고 신이 세계를 창조했다는 물음에도 회의론이 일면서 인간 중심의 사고, 과학적 검증 방법이 흐름을 타게 되었다.

르네상스는 인쇄술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작업이었다. 구텐 베르크는 금판을 만들어 글자들을 맞추어 넣고 잉크에 찍어내는 기술을 만들어낸다. 그는 더 나아가 포도의 압착 기술에서 착안하여 tin, lead, antimony를 조합하여 글자들을 만들고 유성 잉크를 제작하여 1년에 450개의 성경을 만들어내는데 성공한다. 그는 영어로 된 역사와 시를 인쇄했고 체스 게임 메뉴얼을 최초로 인쇄하였다.


[CH36] Reformation and Counter Reformation

마틴 루터의 가톨릭 비판 이후 사람들은 성경에서 직접 성경에서 가르침을 얻을 수 있다 생각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가톨릭 측은 이에 공포를 느꼈는데 진리는 보편성을 띄어야 하며(기준은 하나) 잘못된 번역으로 인해 잘못 전달되는 가르침들이 있다 생각하여 경계한 것이다. 가톨릭은 루터파를 이단으로 선언하였다. 하지만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Augsburg Confession)이라는 문서가 나오자 일부 개혁파들은 기독교인의 신앙에 대한 교리로 생각하며 이를 받아들인다. 이들을 프로테스탄트라고 한다. 프로테스탄트는 모든 사람들이 성경을 읽고 스스로 이해해야 한다고 여겼다. 몇 백년이 지나는 동안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는 신을 이해하고 숭배하는 방식을 놓고 계속 논쟁했다.

교황은 주교들을 이탈리아의 트렌트에 소집하여 1545년부터 18년 간 가톨릭 교회에 대한 대책 회의를 갖는다. 그들은 결과물인 트렌트 공의회 선언문을 발표하고 가톨릭 공식 독트린으로 삼았다. 이제부터는 주교가 되려면 신학교에 들어가 가톨릭 독트린에 따라 학습하고 훈련해야 했다. 여기에 맞서 루터파도 선언을 내놓으니 the Counter Reformation(반개혁)이다.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는 이후에도 싸움이 그치지를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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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개념에 대하여 / 폭력비판을 위하여 / 초현실주의 외 발터 벤야민 선집 5
발터 벤야민 지음, 최성만 옮김 / 길(도서출판) / 2008년 6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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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부터 정독한다고 해서 이 책의 모든 것을 소화할 수 없겠다 여겨서 훓어 읽었다.


여기에 속한 저작들은 20세기 초 쓰여졌지만 20세기는 19세기 근대의 산물을 바탕으로 이루어졌음을 안다면 내용의 바탕이 왜 19세기의 구성물로 이루어지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여러 방송을 통해서 종종 접했던 19세기 파리의 모습은 낯선 용어들을 제외하면 사례들을 통해서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기계의 확산, 유리 천장과 철골 구조의 건축물, 파노라마, 사진의 출현(순수 미술의 공포), 박람회와 백화점, 거리의 산책자들 등. <19세기의 수도 파리>는 독일어판과 프랑스어판이 실려 있는데 대부분의 내용은 동일하지만 나중에 쓰여진 프랑스어판이 정리된 성격이 강했다. 


사적 개인에게 처음으로 거주 공간이 작업장과 대립된 위치에 서게 된다. 거주 공간은 실내(Interior)에서 형성된다. 사무실은 그 실내의 보충물이 된다. 사무실에서 현실의 일들을 처리하는 사적 개인은 실내에서 자신의 환상들을 즐길 수 있기를 요구한다. - P199


신상품들을 파는 상점들에 발맞추어 신문들이 등장한다. 언론은 정신적 가치들의 시장을 조직하기 시작하고 이 시장은 우선 호황을 누린다. 비타협주의자들은 예술을 시장에 내다 파는 데 저항한다. 그들은 ‘예술을 위한 예술‘(‘art pour l‘art)의 기치 아래 모여든다. 이 구호에서 종합예술작품(das Gesamtkunstwerk)이라는 구상이 생겨난다. 종합예술작품은 기술의 발전에 맞서 예술을 밀폐시키고자한다. 종합예술작품을 기념하는 예식은 상품을 미화하는 기분 전환과 짝을 이룬다. 둘 다 인간의 사회적 현존을 사상(象)해버린다. - P206


이 책을 읽으려고 생각했던 이유는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의 18가지 항목을 정독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이 책을 전부 읽어보니 어려운 글들 중 하나가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였다. 도대체 그 글만 몇 번을 읽었는지... 그런데도 완전한 이해에 이른 것 같지는 않아서 찝찝하지만 더 읽는다고 뭐가 나오나 싶어 접었다. 사전 지식이 그만큼 부족했다 여길 수밖에 없었다. 


사적 유물론자는 역사의 서사적 요소를 포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역사는 그에게 어떤 구성의 대상이 되는데, 그 구성의 장소를 이루는 것은 공허한 시간이 아니라 특정한 시대, 특정한 삶 그리고 특정한 작품이다. 그는 그 시대를 사물화된 ‘역사적 연속성을 폭파하여 거기에서 끄집어낸다. 그래서 이런 식으로 그는 한 시대에서 한 특정한 삶을, 필생의 업적에서 한 특정한 작품을 캐낸다. 이러한 구성에서 얻어지는 수확은, 한 작품 속에 필생의 업적이, 필생의 업적 속에 한 시대가, 그리고 한 시대 속에 전체 역사의 진행 과정이 보존되고 지양되어있다는 점이다. 역사주의가 과거에 대한 영원한 이미지를 제시한다면, 역사적 유물론자는 그때그때 과거와의 유일무이한 경험을 제시한다. - P261


3.살았던 순간들 하나하나가 최후의 심판일이 될 날의 의사 일정에 인용 대상이 될 것이다. - P332

5.과거는 인식 가능한 순간에 인식되지 않으면 영영 다시 볼 수 없게 사라지는 섬광 같은 이미지로서만 붙잡을 수 있다. - P333

7.오늘에 이르기까지 늘 승리를 거둔 사람은 오늘날 바닥에 누워 있는 자들을 짓밟고 가는 지배자들의 개선 행렬에 함께 동참하는 셈이다. - P336

13.역사에서의 인류의 진보라는 생각은 역사가 균질하고 공허한 시간을 관통하여 진행해나간다는 생각과 분리될 수 없다. 이러한 진행에 대한 비판이 진보에 대한 생각 일반에 대한 비판의 토대를 형성해야 한다. - P344


'역사적 유물론'에 대한 개념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했는데 앞선 글인 <수집가이자 역사가 에두아르트 푹스>에서 도움을 얻을 수 있었다. 벤야민은 역사적 연속성을 비판하였고 순간을 포착하는, 정지하는 이미지로서의 개념을 대체재로 꺼내 들었다. 역사는 과거로 구성된 것이 아니며 진보하는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도 아님만 잡고 간다.


벤야민의 글이 어렵게 느껴지는 이유가 앞 뒤 문맥의 내용이 자연스럽게 연결되지 않아서인 것 같다. 'A->B->C' 인과적 흐름에 의한 글들에 익숙해서 그의 글이 낯설 수 있겠다 생각했다. 생각해보니 소설을 읽을 때도 시점이 왔다 갔다 하는 경우 잘 읽어내지 못했던 것 같다. 


<꿈 키치>와 <초현실주의>는 어떻게 보면 연결되는 지점이 있다. 해당 내용은 '초현실주의'라는 내용을 사전에 검색을 해보고 읽었다. 그랬더니 훨씬 나았다. 초현실주의는 1920년대 프랑스를 중심으로 전 세계에 퍼진 문예 예술사조 중 하나로 인간의 무의식을 표현하는 작품들을 표현한 것이 특징이다. 꿈을 해석한 프로이트와 연관이 있다 볼 수 있는데 당시를 생각해보면 국가라는 개념이 중요해지고 제국주의를 넘어선 군국주의, 전쟁이 엄습하던 시기다. 각종 신유물이 쏟아져 나올 때 민중은 어디로 갈 지 몰라 헤매고 혼란 속에 붕 뜨는 존재가 되었던 게 아닐까. 


"초현실주의는 그 본질적인 진실의 측면에서 대화를 재건한다는 사명을 갖고 나왔다. 파트너들은 예의범절의 강박에서 해방되었다. 말하는 자는 어떤 명제도 연역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대답은 원칙상 말한 사람의자기애를 신경 쓰지 않는다. 왜냐하면 말과 이미지들은 듣는 자의 정신에게는 디딤판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 P137


폭력에 대한 비판은 폭력의 역사에 대한 철학이다. 역사의 ‘철학’인 이유는 그 역사의 종결이라는 이념만이 그 역사의 시대적 자료들을 비판하고 구분하며 결정하는 입장을 가능케 하기 때문이다. - P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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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4-02-21 02: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름만 아는 발터 벤야민이네요 거리의화가 님은 이 책을 다 보셨군요 한번 봤으니, 시간이 지난 다음에 다시 보면 다를 것 같습니다


희선

거리의화가 2024-02-21 17:12   좋아요 1 | URL
첫 줄에도 적었지만 가벼운 마음으로 읽었어요^^; 물론 읽으면서 이해가 안 되서 자괴감이 들기는 했는데 아직 무지한 탓이려니 하면서ㅎㅎ 배경 지식을 충분히 쌓고 나서 나중에 도전해볼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희선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