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스피노자의 철학은 그것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 17세기 말 이래 지속 - P233

적으로 영향을 끼쳐왔다. 그러나 모든 위대한 철학체계가 그렇듯이, 그가끼친 영향, 그에 대한 해석은 각 시대, 각 맥락에 따라 다른 얼굴로 나타났다. 계몽의 시대였던 18세기에 스피노자는 플라톤과 기독교로 대변되는 서구의 전통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세계를 연 철학자로서 각광받았고, 또 그만큼 반(反)계몽주의자들에게는 부정의 대상으로서 경원시되었다. 이후에도 그의 얼굴은 계속 달라지거니와, 그의 사유가 철학적으로 가장 심도 있는 뉘앙스를 띠게 되는 것은 18세기 말~19세기 초의 독일 고전 철학(과20세기 후반 이래의 프랑스 철학)에서였다. - P234

스피노자 비판자들이 그의 사유에서 초점을 맞춘 것은 ① 모든 것을 이성적으로 해명하고자 하는 그의 합리주의, ② 인격신/초월신을 부정한 그의67)신개념, 즉 범신론, ③ ‘숙명론‘으로 이해된 그의 결정론, ④ 그리고 기독교와 "성서"에 대한 그의 급진적 비판이었다. - P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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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카르트는 자신이 배웠던 이전의 어떤 지식에도 만족하지 않고, 진리의 준거를 오로지 "나 자신"과 "세계라는 커다란 책"에 두는 입장을 표명한다. (방법서설』I) 기존의 권위에 일체 괄호를 치고 인식 주체와 인식 대상으로서의 ‘나‘데카르트는 서술의 주체를 ‘나‘로 한 최초의 본격적인철학자로 일컬어진다와 ‘세계‘에만 눈길을 주는 이런 태도는 중세적 전통에서 보면 놀라운, 아니 경악할 만한 무엇이었다. - P76

흔히 ‘과학혁명‘은 17세기 갈릴레오 이래 전개되어온 과학상의 혁명을말한다. 하지만 우리는 근대 과학의 역사에서 두 번의 혁명을 만나게 된다.
두 번째 혁명은 열역학, 파동역학, 진화론 등으로 대표되는 19세기의 과학혁명이다. 사실 존재론적 수준으로 두 과학혁명을 파고들면, 두 번째 과학혁명이 보다 급진적이다. 첫 번째 과학혁명을 떠받치는 존재론은, 여러 근본적인 혁신에도 불구하고, 전통 존재론과 연속적인 측면을 여전히 많이내포하고 있다. 반면, 두 번째 과학혁명을 떠받치는 존재론은 전통 존재론으로부터 급진적으로 이탈한 존재론이다. 갈릴레오, 데카르트, 뉴턴, 라이프니츠 등의 세계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세계로부터 크게 일탈했음에도 여전히 그 그림자 안에 있었다. 그러나 볼츠만, 맥스웰, 다윈의 세계는 이미 매우 다른 세계이다. - P116

17세기에 도래한 새로운 자연상, 데카르트의 철학과 갈릴레오 이래의 고전 역학이 빚어낸 자연상은 근대성의 핵심적인 축들 중 하나로 역할해왔으며, 그 후 자체 내에서의 변화(고전 시대의 힘의 과학, 질의 과학, 19세기의 열역학과 진화론 등)와 탈근대적 자연철학(생태학적 사유, 등질화와 환원주1의에 대한 비판, 비결정론 등)의 도전을 겪으면서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오늘날에도 자연에 대한 과학 및 형이상학의 사유는 근대성과 탈근대성의 문제에서 핵심적인 축들 중 하나를 이루고 있다. - P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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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근대성‘을 견인한 강력한 추동력들 중 하나는 바로 자연에 대한 새로운이해였다. 그리고 근대성은 자연에 대한 또 하나의 이해를 덧붙이기만 한것이 아니라 자연을 탐구하는 매우 새로운 방식,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있는 하나의 독특한 ‘방법‘을 개발해냈다는 데에 그 의미가 있다. - P22

기학적 세계관은 ‘현미무간‘의 입장에 서서, 구체적 현상으로부터 자연철학적 이치 그리고 형이상학적 원리의 차원까지를 연속적으로 파악하는사유이다. 이 점에서 세계의 존재론적 단절들과 파편화를 극복한 내재적사유의 전형이다. 그러나 이런 내재성의 사유는, 자체 내의 존재론적 분절들을 내포하고는 있지만, 세계의 존재론적 층들에 대해 다소 둔감한 특성을 보여준다. 설명하는 것과 설명되는 것이 질적으로 너무 연속적이어서
‘인식론적 단절‘(바슐라르)이 문제가 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이런사유는 대상의 표면과 심층이 연속적인 경우(예컨대 사람의 얼굴에서 그의 장기들의 건강 상태를 읽어내는 등)에는 일정한 설명력을 가지지만, 상대적으로불연속적인 경우에는 일정한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 P28

자연마술이 박물학적이고 실용적인 성격을 띠었고 신흥 부르주아 계층의 야심과 결부되어 있었다면, 신플라톤주의에 기반한 헤르메스주의는 이시대의 존재론 또는 과학철학의 역할을 했으며 보다 이론적이고 철학적인성격을 띤 사조였다. 양자는 같은 시대를 풍미했고 서로 얽혀 있었지만, 사실 지향이나 분위기가 사뭇 다른 갈래였다고 보아야 한다. - P37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모든 개체들은 그안에 결핍을 내장하고 있으며, 이는 곧 그것이 아직 비-자족적임을 함축한다. 때문에 이 비-자족성 즉 결핍이 그것을 운동하게 만들며, 질료의 결핍성이 형상/현실태에 의해 채워져나가면서 점차 자족성의 차원 즉 완성태의차원으로 나아간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런 운동론은 바로 생명체들을 모델로 해서 만들어진 운동론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생성의 세계는곧 생명의 세계이다. - P46

14세기 자연철학자들의 작업에는 반-아리 - P51

스토텔레스적 측면과 아리스토텔레스적 측면이 복잡하게 착종되어 있었다. 이들의 성과가 본격적인 근대 역학의 패러다임으로 편입되기 위해서는르네상스 시대에 이루어진, 앞에서 논했던 다양한 기술적-실험적 성과들이 통합되어야 했고, 나아가 기술·실험과 수학 양자가 보다 직접적이고 유기적으로 통합되어야 했다. - P52

대강을 분절하고, 측정 · 양화해 변항들의 함수관계를 파악하고, 그 주요 부분들을 실험해 이론을 확정하고, 그렇게 확립된 가설 · 이론 · 법칙을 통해 사물들의 상태를 예측하고 나아가 조작. 변형하는 과학적 행위는 그때까지 내려오던철학적 행위와는 매우 판이한 성격을 띠었으며, 때문에 이때부터는 철학에서 독립해 ‘과학(scientia)‘으로, 그리고 나중에는 기술과 결합해 (사실 처음부터 결합되어 진행되었지만) ‘과학기술‘로 독립하기에 이른다. 철학에서 자연철학 분야가 별도의 분야로 떨어져 나오게 되는 것이다. - P57

어떤 사람들은 과학기술은 그것 자체로서는 중립적인 것이며, 문제는 그것이 어떻게 사용되는가에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중대한 오류이다. 오늘날의 과학기술은 결코중립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애초에 기업의 자본주의 논리와 국가들의 권력 다툼에 뗄수 없이 연결되어 있다. 만일 과학기술자들이 기업과 정부의 비윤리적인 요구에 응하지 않았다면, 기업가들과 정치가들이 어떻게 그런 악행들을 저지를 수 있었겠는가? 그모두가 돈과 자리를 탐한 과학기술자들이 협력해서 가능했던 일들이다. - P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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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史斷≫에 말하였다.
" 광무제가 천명을 받는다는 符書에 응하여 군대를 일으켜 皇室을다시 일으켰는데, 昆陽에서 싸울 때에는 사람들이 그 武勇에 감복하였고, 司隷로 洛陽에 들어갔을 때에는 사람들이 그 度量에 감복하였고, 符節을 잡고黃河를 건널 때에는 사람들이 그 德에 탄복하였으니, 이 세 가지는 중흥의근본이다. 그러므로 宗廟 社稷을 다시 수복하여 옛 물건을 고치지 않은 것이다. 즉위한 뒤에는 맨 먼저 卓茂를 太傅로 삼아 德侯에 봉해서 당대에 循吏가 많았고, 천하가 대략 평정되자 즉시 太學을 일으키고 친히 왕림하여 시찰해서 東都(洛陽)에 儒學이 성하였고, 세 處士(周黨,王良,王成)를 불러말년에 선비가 많았으니, 漢나라를 제사하여 하늘에 配해서 2백 년의 기업을 드리운 것이 실로 여기에 있었다. 그러나 사사로운 사랑으로 皇后와 太子를 폐하고, 참소하는 말을 따라서 息侯(馬援)의 印綬를 거두고, 도참을 믿어서 끝내 봉선을 일삼았으니, 이 세 가지는 盛德의 누가 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폐출한 皇后의 母子와 친당에 은혜를 가함에 이르러서는또 후세의 임금이 하기 어려운 바였다." - P3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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胡氏가 말하였다.
"≪春秋≫의 義理에 아들을 세울 때에는 年長으로써 하고 功으로써 하지않으며 德으로써 하고 귀함으로써 하지 않으니, 아들을 세울 때에 귀함으로써 한다는 말이 없다. 가령 귀한 자를 세운다 하더라도 彊은 后妃의 아들이아닌가. 義에 맞지 않기 때문에 말을 제대로 할 수가 없어서 말하기를 ‘<春秋≫의 義理에 太子를 세울 때에는 신분의 귀함으로써 하였으니, 東海王 陽은 황후의 아들이어서 마땅히 大統을 이어야 한다.‘ 하였으니, 이는 잘잘못의구분이 변론하기를 기다리지 않아도 저절로 분명해진다." - P332

조서를 내려 답하기를 "黄石의 기록인 <진서>에 ‘부드러움이 강한 것을제압하고 약한 것이 강한 것을 제압하며, 가까운 것을 버리고 먼 것을 도모하는 자는 수고롭기만 하고 功이 없으며, 먼 것을 버리고 가까운 것을 도모하는 자는 편안하면서도 끝마침이 있다. 그러므로 땅을 넓히기를 힘쓰는 자는 황폐해지고 德을 넓히기를 힘쓰는 자는 강해진다.‘ 하였으니 - P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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