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 재정을 궁지로 몰아가고 가고 번주의 위신을 실추시켜 천황의 권위를 상승시킨 것이 보신전쟁이었다.

게이오 3년(1867년) 11월 2일, 사쓰마번사 데라시마 무네노리는 번주 시마즈 다다요시에게 의견서를 제출했다. 요시노부의 대정봉환이 이루어져 조정이 제번주에 상경을 명해 번주 다다요시가 가고시마를 떠나려던 시기였다.
의견서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정권이 조정에 반환된 현상황에서 모든 인민이 감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봉건 제후’ 다시 말해 제번주를 폐지하고 ‘진정한 왕도’를 세우는 것이다. 이를 위해 제번주는 ‘봉지’와 ‘국민’을 조정에 반환하여 스스로 ‘서민’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렇게 하여야 비로소 공명정대한 ‘근왕’이 실현되는 것이다. 구태의연한 ‘제후’인 채로는 정권을 조정이 쥐어도 ‘이름’만 달라질 뿐이며 ‘실질’은 전혀 변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명확한 판적봉환론이다.
다만 데라시마도 ‘사람들의 특성’이 자기가 하고자 하는 말만 하고 남의 말을 듣지 않는 상황으로, 즉시 이것이 실현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이에 구체적으로는 사쓰마번이 앞서서 영지를 몇 분의 일을 반환하고 다른 번주도 이를 따라 반환하도록 제안했다

기도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왕정복고 정신은 가마쿠라 이래 700년간 이어져온 봉건할거라는 ‘적폐’를 일소해야 비로소 실현된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모든 번주가 토지와 인민을 조정에 ‘반납’해야 한다. 기도는 제번이 조정의 권력을 좌우하는, 즉 밑의 세력이 강하여 위에서 제어하기 힘든 상황을 우려했던 것이다. 이를 미연에 막아 ‘진정한 권력’을 조정에 확립시키기 위해서도 판적봉환은 필요했다(

애초에 왕정복고란 전국의 정치를 ‘일제히’ 조정에 돌려주는 것으로, 각 번이 대항하는 이 같은 상황의 폐해를 타파하고 정령은 모두 조정에서 나오도록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모든 번주가 ‘정치·병마의 권한’을 조정에 봉환하지 않으면 안 된다. 또한 봉환 후의 영지는 부현으로 만들 것, 번주에게는 작위와 봉록을 주어 귀족으로서 상원 의원이 되도록 할 것, 번사 일부는 조정의 병사나 관리를 앉히고 나머지는 ‘토착화’할 것 등을 제안했다.
이와 같이 이토의 건백은 정치권력을 조정으로 일원화하자는 판적봉환론이지만, 단순히 판적을 봉환하는 것이 아니다. 기도나 오쿠보가 명확히 하지 못했던 ‘속내’, 다시 말해 봉환 후의 조치를 확실히 드러내고 있다.

이토는 더 나아가 다음해 2년 1월 ‘국시강목’을 건의한다. 앞의 정치·군사권 봉환을 포함한 전 6항목에 이르는 의견서이다. 다른 5항목은 천황중심체제 수립, 대외적 독립 유지, 자유권 확충, 서양학술 도입, 대외화친정책 추진이다. 이 의견서는 제번에도 널리 회람되어 ‘효고론’이라 불리게 된다.

건백서는 당시의 유신정권 내에 존재하던 왕토왕민론과 재교부론 쌍방의 의견을 거둬들여 작성한 것이었다. 양자는 본래 모순되는 것이나 그 실현을 위해서는 양자 모두 판적봉환이 필요불가결한 수단이기에 타협의 여지는 있었다.

건백서의 내용을 검토하면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는 왕토왕민론에서 나온 영지·영민의 반환이고, 또하나는 천황에 의한 재교부 청원이다. 허나 이 두 가지는 원리적으로 모순된다. 왕토왕민론은 일군만민 아래 영유권을 모두 천황에게 귀속시켜 일체의 사유를 인정하지 않는 주의이다. 이에 비해 재교부론은 구막부시대 쇼군을 대신하는 것으로, 소령을 재확인했던 관행에 기초하여 번의 개별 영유권을 전제로 하는 주의이다. 그럼 이러한 모순이 어째서 하나의 건백서에 동시에 나타나게 된 것인가?

천황친정이라는 기본적 성격은 지니고 가면서도 유신정권은 제번에 기대지 않으면 안 되었다.
‘공론’이란 구체적으로는 제번의 의사를 의미했으며, 그 제도화가 공의소였던 것이다.

판적봉환을 둘러싼 제번은 이후의 번체제를 어떻게 할지 의론을 전개했다. 이를 보면 번체제를 해체하는 군현론은 소수였으며, 다수는 현실의 부번현 세 통치 체제를 전제로 종래의 번체제를 온존하려는 군현·봉건병용론이었던 것이 확인된다. 그리고 이것은 유신정권이 진행하려 하는 방향과 기본적으로는 같은 것이었다.

판적봉환의 가장 큰 의의는 번주의 개별영유권이 부정된 것이다. 왕토왕민론은 여기에서 제도적으로는 실현되었다. 제후의 종래의 영지는 ‘관할지’로 불리게 되었고, 지번사는 천황의 토지를 관리하는 지방장관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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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당최 시간이 어떻게 지나가는지 모르겠다. 벌써 5월이 끝났다니…

아무튼 5월 북결산이다. 업무로 노트북을 계속 들고 다니고 있어서 종이책을 읽기 어려웠고 주말에도 출근을 한 적이 많아서 억지로 이북을 좀 읽었다.

읽은 책들이 전반적으로 평타 이상이었다.

김기태의 소설집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 역시 좋았다. 앞으로를 기대하게 하는 작가가 될 것 같은데 부디 계속 건필하기를!

제이미슨의 책은 롤러 걸을 기존에 읽었었는데 그 책도 좋았지만 나는 이 책이 더 좋았던 것 같다. 눈여겨보는 주제와 관심사라면 아무래도 더 마음이 끌리는 것은 어쩔 수 없으니까.

만주국에 관한 입문서, 만주족에 대한 역사서도 잘 읽었다.

최근에는 마음에 여유가 없어서 하늘 한 번 쳐다보기도 어려워서 사진도 찍지 못하고 지냈다.

이번주 볕은 따뜻한데 바람이 불어서 하나도 덥지 않은 그야말로 미친날씨였다.
어제, 오늘은 도무지 가만 있기는 아까워서 컨디션이 좋지 않음에도 나가서 걸었다.
올 여름 장미도 못 보고 지나가나 했더니 장미도 볼 수 있어 좋았다.

그리고… 5월이 끝나기 직전 책을 샀다.
12.12 사건을 다룬 책과 이번 달 여성주의 책, 그리고 주역을 샀다. 셋 다 전혀 연관성이 없어 보이는데 집히는 대로 샀다는 것이 맞을지 모르겠다. 그래도 다 보관함에 있던 책들이니 막 고른 것은 아니다^^;;;

6월은 제발 안 풀리던 일이 좀 풀려서 원하는 페이스대로 살 수 있는 날이 되면 좋겠다.
모두 행복한 달이 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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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4-06-02 22:3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6월은 5월보다 나은 한 달이 되기를 바랍니다.
굿나잇, 거리의화가 님!

잠자냥 2024-06-03 10:1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하늘 여러 번 쳐다 보셨는데요? ㅋㅋㅋㅋㅋ
6월은 여유롭길 기원합니다!

희선 2024-06-04 01: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볕이 뜨거워도 바람이 불어서 좀 낫기도 했네요 오월에도... 어제도 비슷했던 것 같습니다 유월은 갈수록 더워지겠습니다 유월엔 여유가 생기면 좋겠네요 거리의화가 님 건강 잘 챙기세요


희선

자목련 2024-06-05 11: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여전히 바쁘시군요. 6월에는 수월한 업무, 산책과 하늘 보기는 더 많이 늘어나길 바라요.
 
현대 중국의 탄생 - 청제국에서 시진핑까지 너머의 글로벌 히스토리 4
클라우스 뮐한 지음, 윤형진 옮김 / 너머북스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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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는 시간과 장소 측면 모두에서 상대적인 것으로 이해되며, 중국의 다양한 행위자가 나라를 강하고 부유하게 만들기 위해 끈질기고 광범위하게 추구했던 목표로 이해된다. 현대 중국 만들기는 무엇보다 강하고 부유하며 선진적인 국가를 다시 만든다고 하는, 빈번하고 분명하게 표현된 중국인들의 열망이 주도했다. - P20


역사서에서 비춰지는 중국에 대한 시각은 이분법적이다. 한편으로는 부정적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긍정적이다. 지금의 중국을 따져봐도 그렇다. 세계 경제 대국 2위가 된 중국에 대해 한편으로는 놀라움을 나타내는 반면 다른 한편으로는 인권, 환경 등의 문제, 몸집을 부풀리는 군사력으로 경계를 나타내기도 한다. 미국과의 심화되는 대결 구도는 한국에도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는데 앞으로도 그것이 더 강해질 예정인 만큼 대비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이 책에서 저자는 전반적으로 중립적 태도를 지향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듯 보인다. 우호적인 것도, 부정적인 것도 아니어서 책장을 넘기는 것이 부담스럽지 않았던 것 같다.


현대 중국은 청에서부터 시작한다. 현대 중국의 역사적, 제도적 기반이 이 때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인데 나도 어느 정도 동의하는 바다. 

강희제와 건륭제 재위 시기 청은 가장 큰 치세를 이루었다. 그러나 19세기 들어서면서 경제적인 불안이 대중 봉기를 불러일으키게 만들었다. 여기에 자연 재해까지 겹쳐지며 백성은 빈곤으로 내몰려 국내적으로 혼란스러워졌고 더불어 외국 세력의 이권 양보는 조정을 더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청 중앙 정부는 기본적으로 지방 사회에 최소한으로 개입하면서 적은 자원으로 중국 전역을 통제하는 것이 가능했다. 그러나 19세기가 되면 중앙 정부와 지방 사회 간의 얕은 관계로 인해 중요한 문제가 터졌을 때 일사분란하게 대처하는 것이 어려웠다. 제국 말 조정은 현재의 문제점을 진단하기 위해 유교 중심의 관료제에서 중앙 집권적 국가와 군대 중심의 체제로 변화하려 애쓴다.


그러나 세계는 빠르게 변화하고 있었지만 중국은 도전에 응전할 만한 지도력이 부재했다. 19세기 중국의 쇠퇴는 몇 가지 특정한 역사적 요인들의 결합으로만 이해할 수 있는데, 그 요인 중 일부는 세계적인 것이었고 청의 직접적 통제에서 벗어난 것이었다. - P258

첫째, 환경 악화와 세계적 기후 패턴의 변화는 중국을 위태롭게 했다. 둘째, 제국주의의 영향은 중국의 경제 문제를 심화시켰다. 셋째, 조약항에 외국 자본과 기술, 지식, 제도 등이 유입되면서 해안 지역과 내륙 지역의 격차가 커졌다. 넷째, 제국의 정치 제도는 긴급한 문제를 다루고 해결책을 찾는데 실패했다. - P259


20세기 시작 무렵 중국은 혁명이란 키워드에 꽂혔다. 여러 인물들을 바탕으로 한 중국 혁명의 시도가 있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실패했다. 그럼에도 혁명을 통해 중국 전역에 근대 기술이 들어서면서 사람들은 농촌 구석까지 변화를 느낄 수가 있었다. 얼마 후 중국은 일본과 동북부를 비롯해 만주 지역을 두고 일본과 충돌하면서 전쟁이 발생했다. 이 때문에 지역의 기반 시설이 파괴되고 기근, 재해 등 국민들이 많은 피해를 입었다. 하지만 전쟁은 군사력을 키우는 기회가 되기도 했다. 중국은 외세와 응전하며 국민 스스로가 자주성을 가지고 나라를 지켜야 한다는 사명 아래 똘똘 뭉치게 되는 계기가 된다. 이는 민족주의를 성장시키고 확산하게 했다. 중국은 1945년 이전 국가 통치를 둘러싸고 지방 군벌들과 국민당, 공산당, 만주국과 협력하는 친일 세력 등 다양한 세력이 난립했는데 어느 것 하나도 국민들의 희망에 제대로 부응하는 세력은 없었던 것 같다.


국민당과 공산당 세력 간의 대결 끝에 1949년 공산당이 승리하여 중국 땅에 중화인민공화국이 세워졌다. 그러나 국민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는 정부는 아니었기 때문에 애초부터 결함을 가진 채 시작되었다. 게다가 전쟁으로 도시는 파괴되고 농촌은 황폐했으며 인플레이션으로 사회는 혼란스러웠다. 한국 전쟁, 타이완과의 갈등 등 안보 문제는 공산당 정부가 이를 전면에 빌어 내세우고 사회와 개인을 통제하는 것이 가능하게 했다. 마오쩌둥 초기 경제는 중공업을 주도로 하여 집단화 농업이 받쳐주는 형태였다. 대약진과 문화대혁명의 실패로 마오쩌둥 정부는 한계를 드러냈다.


국가의 상대적 취약성은 무엇보다 비교적 낮은 정도의 제도적 구조와 약한 제도적 능력에 기인한다. 중국공산당은 저항을 힘으로 진압할 강력한 중앙집권적 국가를 만들어냈지만, 그것은 안정적이고 합법적인 제도들을 갖추지 못했고 확립된 절차를 결여했기 때문에 아렌트적 감각에서 보면 ‘구조가 없는‘ 국가였다. - P622


1970년대 말이 되면 세계적으로 탈냉전의 바람이 불면서 중소 갈등이 봉합되고 미중 간에도 협력의 장이 열린다. 덩샤오핑이 이끄는 정부는 기존의 계획 경제를 뒤로 하고 경제, 교육 중심의 개혁으로 중국의 경제 성장을 이끈다. 중국은 세계에서 생산된 부품을 받아다 최종 조립하여 제품을 만들어내 파는 것으로 이득을 보았다. 노동자들의 임금은 인상되었고 소비력도 증가했다. 하지만 늘어난 국가적 수입은 군사력의 강화로 이어지고 기업에 대한 규제 완화는 부패를 낳았으며 도농 간, 국민 간 경제 불평등도 심각해졌다. 중국 전역이 개발되며 환경 오염이 심각해졌음은 물론이다. 무엇보다 1989년 텐안먼 사태 이후 정부는 정치적 자유화에서 더 멀어지는 행보를 보인다. 민족주의를 강화하며 중국몽을 내세우는 모습은 왜 중국은 발전하는 경제만큼 정치가 따라주지 않을까 여러 모로 질문하게 된다. 


마오 치하에서 결핍을 경험한 후 소비와 물질적 풍요는 분명히 만족스러웠지만, 어느 정도까지만이었다. 물질주의의 추구가 부도덕한 행위와 사회적 부정의 반복을 가져왔고 이러한 반복이 때때로 권력에대한 특별한 접근성에 기댔기 때문에, 사람들은 좀 더 나은 무엇인가를 기대했다. 옳고 그름에 대한 근본적인 관념은 중국 전통 속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었다. 많은 사람이 어떻게 얻은 것이건 돈만을 중시하는 사회적 세계에 대한 불만을 온라인에서 표현했다. 중국 사람들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다음과 같은 큰 질문들과 씨름했다. 우리는 어떠한 규범에 동의할 수 있는가? 그러한 규범을 어떻게 실행에 옮길 수 있는가? 21세기 초에 우리는 올바른 사람이 된다는 것이 어떤 의미가 되기를 원하는가? 중국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 P778~779


잘 정리된 글을 읽을 때 나도 모르게 짜릿하여 읽으면서도 신이 나는 것 같다. 마지막에는 “브라보!”를 외치며 책을 덮었다. 300년도 넘는 긴 역사를 핵심만 뽑되 맛깔나게 정리한다는 게 쉽지가 않음에도 잘 읽힌다. 번역이 잘 된 것도 있겠지만 글이 지루할 틈 없어 재미나게 읽을 수 있었던 것 같다. 기존에 현대 중국사 관련 책들로 고전처럼 거론되는 책들이 있는데 아무래도 1980년대 말이나 1990년대, 2000년대 초중반에 쓰여져서 고리타분하고 낡았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렵다. 역사서는 현재성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데 이 책은 마침 시진핑 체제까지를 다루어 거의 최근까지의 역사를 정리할 수 있어 여러모로 도움이 된다. 더군다나 중국의 시진핑 체제가 계속 이어질 것으로 보이는데 근대부터 현대까지 중국의 역사서를 이 한 권이 담고 있으니 당분간은 이 책이 기본서 역할을 하게 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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젤소민아 2024-07-06 00: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려요~

거리의화가 2024-07-08 13:47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현대는 이 책에서시간과 장소 측면 모두에서 상대적인 것으로 이해되며, 중국의 다양한행위자가 나라를 강하고 부유하게 만들기 위해 끈질기고 광범위하게추구했던 목표로 이해된다. 현대 중국 만들기는 무엇보다 강하고 부유하며 선진적인 국가를 다시 만든다고 하는, 빈번하고 분명하게 표현된중국인들의 열망이 주도했다. - P20

만주족은 황제 한 명이, 즉 대청의 황제가 천명에 따라서 매우 발전한 관료제의 도움을 받아 모든 ‘천하‘를 지배하는, 중국의 제국 체제에기반을 둔 왕조를 만들었다. 동시에 청 제국의 지배자들은 만주, 몽골,
티베트 지역의 통합을 밀어붙였다. 이 통합은 위대한 만주의 칸을 티베트에서 온 라마의 정신적 영향력과 연결하고, 만주와 몽골 사이의 혼인외교로 가족적 결합을 만들고, 몽골에서 지켜온 국가적 알현 의례를 채택하고, 변경지역에서 호혜적 조공에 참여하는 등 다양한 장기적이고유연한 정책으로 이루어졌다. 청은 이러한 정책들로 몽골의 대칸이 통치했던 스텝의 3분의 2를 통제하게 되었다. 이것은 중국 역사에서 처음으로 북부의 초원이 안보를 위협하거나 중국 제국에 도전하는 원천이아니게 된 것이었기에 엄청난 업적이었다. 만주-몽골-티베트 사무는만주족 청 황제의 직접적 감독 아래 이번원理院, 내무부內府, 팔기 등과 같은 특정한 정부 기구가 관리했다. - P82

청대의 중국 국가는 상업 행위에 대해 규제하거나 과세하지않음으로써 실제로 경제에 자유방임적 접근법을 택했다. 전통적인 수공업에서 노동 투입을 줄이면서 더 많은 상품을 생산하고자 하는 욕구가 분명히 존재했고, 그것이 생산 과정의 지속적 개선을 이끌었다. 그러나 전통 공업에서 미미한 분업은 파편화를 불러왔다. 작업 공정의 매 - P99

단계는 비교적 독립적이었고, 생산 과정의 전체적인 조직화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생산 과정의 주요 단계도 대부분 체계적으로 조사하거나신기술에 투자할 금융 자원이 없는 작은 단위(가족이나 작은 작업장)였다. 후기제국 국가는 혁신을 추진하려고 자원을 징발할 수 있었겠지만, 경제 문제는 대체로 그 자체에 맡겨두었다. 초기 근대의 네덜란드나 영국과 달리 공공부채에 대한 공식적 시장도 없었다. 정부나 민간 대출을 위한적절한 금융 수단의 부재는 제도적 능력을 더욱 제약했고, 전통적인 국가가 예산이 부족할 때 재정적 약탈이나 징발을 하기가 쉽게 했다. - P100

두 차례 아편전쟁은 조공 체제를 조약 체제로 대체했다. 이러한화는 중요했고, 그 결과는 멀리까지 영향을 미쳤다. 조공 체제의 소멸은 수백 년 동안 중국과 동아시아에서 안정과 번영을 만들어낸 위계적 - P142

모델에 기초한 중요한 제도의 상실을 의미했다. 조공 질서는 동등한 행위자들 사이의 국가 간 경쟁에 기초하고 조약에 명기된, 서구의 영향을받은 외인적 규칙들의 새로운 조합으로 대체되었다. 그렇게 중심적인제도가 외부적 압력으로 갑자기 없어지자 청조 전체의 제도적 질서가심각한 영향을 받았다. 제국의 전체 구조를 확실하게 약화하면서 청지배의 한 기둥이 무너졌다. 제도적 변화가 불가피하게 되었다. - P143

태평천국 국가는 청 중기 저항과 반란의 방식을 번역과 전이로 제국에 새롭게 수입된 서구 기원의 이데올로기와 결합한, 내생적 제도와외생적 제도의 혼합체였다. 이 혼종적이고 개혁적인 프로그램이 20세기 혁명가와 학자들 사이에서 태평천국이 중국 최초의 현대적 혁명 국가라는 평판을 얻게 했다." 태평천국은 또한 어떤 식으로든 중국적인제도적 요소와 외국의 제도적 요소를 유사하게 혼종적 방식으로 결합했던 이후 정부들을 위한 길을 닦았다. - P190

전반적으로 중국 경제의 공업 부문은 민간 기업가들보다는 관료 자본주의의 체계에 지배되었다. 이러한 경영 방식에서는 관료들이 승인하고, - P218

계획을 세우고, 프로젝트를 감독했으며, 일상 관리는 역시 자금 대부분을 제공한 민간 상인들과 지방 엘리트의 손에 남겨졌다. 대부분에서 정책을 세우는 것은 관료들 혹은 더 정확히 말하면 관료의 참모들이었고,
투자와 위험은 공공부문과 민간 부문이 공유했다. 이런 방식은 사업이정치적 후원, 지방에 대한 충성심, 부패 등의 부담을 지면서 의사결정과 책임을 모호하게 만들기 쉬웠다. 게다가 정부가 지명한 후원자들은기업을 자신의 지역 권력의 기반으로 이용하는 경향이 있었다. 중앙정부는 자체의 예산 문제 때문에 자본을 공급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소금 유통에서 이익을 얻었던 것처럼 기업으로부터 자원을 추출할 방법을 기대하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기업들은 결코 완전히 발전하지못했고, 종종 투자 초기의 몇 년이 지난 후 쇠퇴하곤 했다. - P219

19세기의 마지막 시기에 이루어진 사건들이 민족주의와 군사주의로 형성된 현대 중국의 독특한 정체성이 만들어지는 데 중요했음이 드러났다. 개념적으로 정부 조직은 더 이상 황실과 엘리트 관료제에 맞추어지지 않고, 국가와 군사에 다시 초점을 맞추게 되었다. 제국의 새로운 군인들은 19세기의 위기로부터 중국의 운명이 돌이킬 수 없이 국가적 능력에 연결되어 있다는 결론을 끌어냈다. 게다가 국가의 능력은 단•순히 강한 방어 능력을 넘어 대중이 동원되고, 교육받고, 국가의 군사적 구성원으로 훈련될 것을 요구했다. 이것은 유일하게 가능한 결론이아니었다는 것이 자주 간과된다. 양계초가 조용하게 고취했던 또 다른관점은 대중적 시민권과 군대 확충에 주목했고, 성숙한 정치적 권리와종족적·역사적·문화적 연대로 통합된 민족 공동체 속 구성원들의 능동성이나 적어도 그 잠재력을 함축하고 있었다. - P256

위안스카이의 헌정 절차에 대한 저항과 의회 해산은 정치적 목적으로 외국의 체제를 차용하는 방식이 다시 나타난 것처럼, 나중에 반복될 선례를 만들었다. 중국은 명목상으로는 공화국이었지만, 실질적으로는 군사력과 막후 협상에 기초한 자의적인 정치 지배가 있었다. 다수가 공화국 실험에 환멸을 느꼈다. 학생, 장교, 기업인, 지식인들과 같은 새로운 사회 집단들이 희망했던, 오래 기다린 의회제와 더 큰 사회적 · 시민적 평등은 달성하기 어려운 채 남았고, 중국지식인들의 10년에 걸친 자기성찰이 촉발되었다. - P300

군벌들은 군사력을 효율적으로 행사했지만, 대중의 지지는 거의 얻지 못했다. 그래서군벌 시기 대부분 동안 강압적 권력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정당성의 명확한 근거가 없었고, 군벌들은 본질적으로 불안정한 정권을 운영했다.
그들 대부분이 자신이 지배하는 지역에만 헌신하고 국가로서 중국에거의 관심을 두지 않았기 때문에 원래 있던 중앙의 제도들을 약화하기도 했다. 우편과 세관 서비스만이 예외인데, 둘 다 놀랍게도 이 시기 내내 계속 작동했다. 단일 통화, 통합된 전국적 행정 체계, 일원화된 국방체계 없이 중국은 점점 더 사회적·정치적·경제적으로 파편화되었다.
그러나 중앙 집중적 통제의 부재는 일부 긍정적 효과도 있었다. 지적·예술적 산물이 정부 개입에서 자유로웠고 실험, 혁신, 창조성의 시기에 들어섰다. - P329

난징정부는 책임의 합리적 분할, 고도의 기술적 전문성, 법적 절차의 기초 등을 특징으로 하는 일련의 전국적인 국가 제도의 건설에서 엄청난 진전을 이루었다. 그러한 제도는 권력이 성이나 지방 단위에 위임되었을 때조차 중앙의 권위를 확고하게 만들었다. 이는 여러모로 청말인 1900년대에 시작된 중앙집권화와 현대화 진전하는 정책들이 지속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전략에는 몇 가지 단점이 있었다. 훈련받고 자격을 갖춘 공무원을 충분하게 고용하는 것은 지속적인 도전이었으며, 특히 농촌에서 그러했다. 부패와 지대추구 네트워크가 만연했다. 난징정부는 더 많은 자원이 없이는 도저히 강하고 효율적인 행정부를 건설할 수 없었다. 그러나 강력한 민간 행정 기구의 부재 때문에난징정부는 중국 사회로부터 필요한 자원을 추출할 수 없었다. - P358

현대사에서 그렇게 상황을 완전히 바꾸어놓거나 그 정도로 거대한 영향을 미친 사건은 거의 없다. 일본이 더 진격하는 것을 막고자 중국이 군사력을 총동원할 수 있었던 것은 시안사건이 가져온 결과였다. 뒤이은 시기에 일본은 중국의 끈질긴저항을 극복하려고 상당한 자원을 소모했다. 결국 전장에서 중국을 패배시키고 나라 전체를 정복할 수 없었다. 게다가 일본이 만약 중국에서교착 상태에 빠지지 않았다면, 태평양 전장에서 미국이나 둥베이 지역에서의 소련에 대한 군사 작전에 분명히 더 많은 군대와 물자를 배치할수 있었을 것이다. 시안사건이 없었다면 제2차 세계대전은 유럽과평양 모두에서 아주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었을 것이다. 이 사건은 또한중국에서 소련의 군사력과 정치적 영향력이 부상하기 시작하는 것을보여줬다. - P397

1932년에 하얼빈에서 약 100킬로미터 남쪽에 있는 작고 외딴 마을인 베이인허가 중마中 수용소의자리로 선정되었다. 윗부분에 가시철조망과 고압선이 있는 높은 벽돌담으로 둘러싸인 이 시설에는 많은 건물이 넓은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다. 수용소는 두 구역으로 나뉘었다. 한쪽에는 감옥, 실험실, 화장장이있었다. 다른 쪽에는 사무실, 막사, 창고, 구내식당이 있었다. 수용소는1,000명을 수용할 수 있게 설계되었지만, 재소자들은 평균적으로 500명을 넘지 않았다. 수용된 재소자 중에는 (보통 중국인과 한국인인) ‘비적‘, 의심스러운 사람들, 범죄자 등이 있었다. 그러나 수용 목적은 세균전 무기를 개발하려는 일련의 실험에 재소자들을 인간 기니피그로 사용하는 - P424

것이었다. 사망률은 매우 높았다. 보통 재소자가 실험으로 죽을 때까지한달이 걸리지 않았다. 과학자들을 위해 즉시 공급할 수 있는 대체 ‘비적‘이 있었다. 모두 소름 끼치는 실험이었지만 탄저, 마비저, 페스트 세가지 주요 질병에 초점이 맞추어졌다.
베이인허는 1937년 말 버려졌지만, 하얼빈에 더 가까운 핑핑 지역에 훨씬 더 큰 수용소가 생겼다. 1937년부터 1945년까지 731부대라고 불린 특수 부대가 재소자들에 대한 실험을 행했다. 의사이자 장교인이시이 시로가 이 부대 책임자였다. 여기에서도 인간 기니피그를 활용하여 탄저에서 황열병에 이르는 질병들을 실험했다. 병원균을인간에서 실험하는 것 외에 생물학전을 위한 병원균의 배양과 살포에초점을 둔 비밀 연구가 있었다. 수천 명이 죽었다. 이 수용소는 1945년에 소련군이 접근할 때 후퇴하던 일본군이 파괴했다. - P425

취약성, 부패, 억압과 관련된통치 문제가 늘어나면서 적극적인 지도력과 시민권에 대한 요구들이계속 커져갔다. 그러나 정치적 참여에 대한 요구들은 결코 제도적 변화를 가져오지 못했다. 민국시기의 최대 곤경은 권력을 가진 사람들에게배타적이고 독점적으로 남아 있던 정치제도와 관련되었다. ‘새로운 시민‘과 ‘새로운 문화‘에 대한 유토피아적 전망은 정치체제의 현실에 결코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중국의 공화국은 그 핵심적 가치와 실천들을 고귀한 의도와 미래의 야망으로만 남게 했다는 점에서 실패했다. 게다가 봉건주의와 제국주의의 역사적 멍에를 떨치려는 절박한 열망이 불가피하게 정치 개혁을 희생하여 ‘구국‘의 전망을 강조하게 하고, 정치적 규범과 과정을 형성하는 것을 국가 대리인에게 넘겨주었다. 전반적으로 정치제도의 개혁은 희망이 없고 무용한 것으로 보이곤 했다. - P453

공산주의는 중국 인민들이 물질적 풍요를 누릴 뿐만 아니라 민주적이고, 조화롭고, 스스로관리하고, 사회 계급·착취 · 전쟁으로부터 자유로운, 완벽한 사회에 사는 이상적인 상태였다. 공산주의는 역사 발전의 법칙을 통해 나타날 이성적인 체제였다. 사회주의는 그러한 유토피아로 가는 길에 있는 이행적 단계였다. 이 단계에서 공산당은 전위로서 사회에 대한 권력을 독점 - P457

하고, 민주집중제로 불리는 새로운 제도적 질서로 통치했다. 민주집중제는 공산당과 국가의 중앙 기구가 사회의 다양한 집단과 협의한 이후에 최종 결정을 내리는 것을 의미했다. 새로운 제도적 체제로 당은 당원들, 특히 ‘간부‘라고 불리는 지도자들 그리고 사회의 전반적인 문화적·지적 활동에 확고하고 때로는 냉혹한 규율을 행사할 수 있었다. 당은 경제의 국가 소유권을 확립하고 모든 경제 조직을 당국가의 통제와 계획에 종속시켰다. - P458

1953년에서 1956년까지 당이 수립한 새로운 경제제도들이 기존 구조를 대체했다. 이러한 제도적 혁신은 일정한 정도 국가의 중앙 집중화를 확립하고 성장을 가능하게 했다. 계획 기구는 비록 그 산업 자체가비효율적으로 조직되었더라도, 더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산업으로 자원을 이전시키려는 강압적 활동을 했다." 이렇게 자원의 흐름을돌리는 일은 빠른 경제성장을 이끌지만, 그러한 효과는 기술적 혁신보다는 농업 생산으로부터 추출한 노동과 자본을 재할당하고 재배치하는것으로 만들어졌다. 다른 말로 하면, 이 시기에 만들어진 경제제도는농업에서 징발한 자원을 중공업 투자에 돌린 착취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착취적 제도는 경제적 인센티브가 부족하고 계획 관료들이변화에 저항했기 때문에 지속적인 기술 변화를 만들어낼 수 없었다. 공업에 재할당될 모든 자원이 재할당되고 나면, 만들어낼 수 있는 경제적이득이 거의 남지 않게 되었다. - P543

그 이름과 달리 문화대혁명은 전혀 문화의 영역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그것은 오히려 ‘우귀사신을 쓸어버리고‘, ‘프롤레타리아 문화대혁명을 끝까지 수행하는 것을 목표로 한 폭력적이고 혁명적인 대중운동이었다. 문화대혁명의 공인된 목표는 ‘일체를 타도(切)‘하고 ‘전면 내전에 참여하는 것이었다. - P577

마오는 공산당 지도부의 규범과 규칙을 썼고 당의 성공을 대표했지만 또한 반란의 목소리이자 당의 결점과 실패의 거울이 되기도 했는데, 이것이 그가 남긴 모순된 유산이었다. 이러한 모호성의반향 그리고 1950년대와 1960년대에 마오가 벌인 캠페인의 충격이 마오 이후 시기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격동의 문화대혁명 기간에 가장유명했던 ‘반란은 정당하다‘는 구호는 전 세대에 영향을 미쳤다.
과거의 홍위병들과 하방되었던 학생들은 2년, 3년, 간혹 10년 동안 농 - P617

촌에서 노동하다 도시로 돌아왔을 때 비록 마오와 당이 그들이 배우기를 원했던 것은 아니었겠지만 진정으로 마오에게 배운 것이 있었다. 그들은 당의 뿌리 깊은 부패 그리고 구식 권력 투쟁이 곳곳에 있다는 것을 배웠다. - P618

국가의 상대적 취약성은무엇보다 비교적 낮은 정도의 제도적 구조와 약한 제도적 능력에 기인한다. 중국공산당은 저항을 힘으로 진압할 강력한 중앙집권적 국가를만들어냈지만, 그것은 안정적이고 합법적인 제도들을 갖추지 못했고확립된 절차를 결여했기 때문에 아렌트적 감각에서 보면 ‘구조가 없는‘ 국가였다. - P622

중국은 덩샤오핑의 지도 아래 1977년, 특히 교육과 경제에 주목하여 국내의 제도 개혁과 외부 세계에 대한 개방을 대담하게 시작하는 새로운 시기에 진입했다. 1980년대는 사회와 경제의 거의 모든 영역에서 대담하고 열정적이고 탐색적인 자유화와 실험의 시기가 되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학생들이 이끈 민주운동이 변화의 한계를 시험하고당의 권위에 도전했던 1989년 갑작스럽게 억눌러졌다. - P629

1989년 학생운동 진압의 이와 같은 결과들은 ‘두 전선에서의 강함‘이라는 구호에 요약되어 있는 1989년 이후 핵심적 정치 전략의 두 가지 일반적 성격과 연관되어 있다. 두 전선은 경제 개혁과 정치적 안정을 의미하고, 해결책은 두 가지 모두에 대해 견고하게 유지하는 것이었다. 톈안먼과 1989년은 개혁의 후퇴를 상징하게 되지 않았고, 영구적으로 중국 개혁의 궤적을 변화시켰다. 그때 이후 중앙집중화와 값싼 이주 노동력의 활용에 기초하여 경제 개혁이 가속화되고 확장되었다. 동시에 안정과 안보는 정치적·문화적·사회적 생활에서 압도적인 우선권을 가지게 되었다. 민주, 자유, 동등한 기회 등과 같이1989년의 사회 운동에서 제기된 기본적 쟁점과 관심은 무시되었다. - P679

민족주의는 ‘이데올로기적 무관심‘, ‘애국주의의 쇠퇴‘ 그리고 유감스럽게도 ‘돈 숭배‘가 증가하는 경향 등을 포함하여 경제발전이 가져온예측할 수 없는 정치적 효과에 대항하고 싸움으로써 중국에 사회적·정치적 결합력을 가져다주었다.
애국주의 운동은 역사적 신화와 역사적 트라우마를 결합한 절충적서사에 기초하여 민족 정체성을 구축하는 데 충분히 성공했다. 당이 구축한 1990년대 이후 중국 민족주의는 역사적 굴욕과 민족적 자부심이라는 모순적 감정으로 형성되었다. - P702

마오 치하에서 결핍을 경험한 후 소비와 물질적 풍요는 분명히 만족스러웠지만, 어느 정도까지만이었다. 물질주의의 추구가 부도덕한행위와 사회적 부정의 반복을 가져왔고 이러한 반복이 때때로 권력에대한 특별한 접근성에 기댔기 때문에, 사람들은 좀 더 나은 무엇인가를기대했다. 옳고 그름에 대한 근본적인 관념은 중국 전통 속에 깊이 뿌 - P778

리내리고 있었다. 많은 사람이 어떻게 얻은 것이건 돈만을 중시하는 사회적 세계에 대한 불만을 온라인에서 표현했다. 중국 사람들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다음과 같은 큰 질문들과 씨름했다. 우리는 어떠한 규범에동의할 수 있는가? 그러한 규범을 어떻게 실행에 옮길 수 있는가? 21세기 초에 우리는 올바른 사람이 된다는 것이 어떤 의미가 되기를 원하는가? 중국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 P779

중국의 역사적 장점은 전근대 중국 제도의 상대적 정교함, 능력주의와 교육에 대한조, 복잡한 행정·경제 체계를 운영했던 경험 등이 있었다. 전국적인 입학시험과 같은 현대 중국의 제도에는 깊은 역사적 뿌리가 있다. 현재의발전에서 중국의 역사적 유산의 핵심적 역할을 강조하는 이러한 관점은 중국의 행위자들이 수동적이고 전통의 마법 아래 있어서가 아니라그들이 과거에서 필요하고, 유용하며, 바람직한 것을 찾아내 끌어오기때문에 과거가 미래에 영향을 준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들은 의도적으로 제도적 변화를 추구할 때, 그리고 조직적·제도적 혁신의 개발이나 - P789

채택을 고려할 때, 새로운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를 결정하기위해 그렇게 한다. 중국 사회제도의 역사적 유산과 광범위한 새로운 제도 개혁의 창조적 채택은 결과적으로 (특히 경제에서, 또한 복지와 기반 시설과 같은 다른 영역에서) 중국이 직면했던 일부 장기적 문제에 대해 충분한 제도적 해결책을 찾도록 했다. - P7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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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메라 - 만주국의 초상
야마무로 신이치 지음, 윤대석 옮김 / 책과함께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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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국은 불과 13년 정도의 짧은 역사를 가졌으나 당시 식민지 국가였던 조선, 중국 등 주변국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1945년 이후 만주국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지만 대한민국의 뿌리와 관련이 깊어 들여다볼수록 마음을 무겁게 한다. 현대 일본은 과거의 영광을 꿈꾸며 그 역사를 되짚어보지 않을지. 사실 일본인이 만주국의 역사를 어떻게 바라보는지 그 견해가 개인적으로 궁금했다.


이 책은 만주국의 성립부터 소멸까지의 과정을 그리며 전체상을 개략적으로 알 수 있도록 하는 입문서적 성격을 지녔다. 입문서답게 분량도 적당해서 부담도 없고 만주국에 대해 본격적인 탐색에 들어가기 전에 핵심 개념을 정리하고 간다는 생각으로 읽으면 될 것 같다. 1989년 <최후의 ‘만주국’ 붐을 읽는다>라는 글이 발표되었을 때 저자는 고도성장기가 끝나고 일본 경제의 거품이 꺼질 무렵 과거의 역사를 돌아보고 현재와 미래를 어떻게 가져가야 할 것인가 고민을 했다고 한다. 이 책은 그런 저자의 생각에서 출발하여 만들어졌다. 


개인적으로는 만주국을 괴뢰국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런데 저자는 만주국이 괴뢰국가이고, 국가 형태를 취한 식민지지배의 통치 양식 가운데 하나였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고 이야기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서구의 제국주의 지배에서 벗어나 통합 아시아를 꿈꾼 이상국이기도 했다고 이야기한다. 솔직히 이상국가라는 이야기는 선뜻 받아들여지지가 않아서 왜 그렇게 말하는지 뒷 이야기를 지켜보기로 했다.


1920년대 만주와 몽골에 대한 권익 싸움으로 중국과 일본은 격렬하게 대립 중이었다. 1928년 10월 이시하라 간지가 관동군 작전주임참모로 부임했다(그는 향후 이타가키 세이시로와 만주사변을 계획하고 실행한다). 이시하라는 장쭤린 폭살 사건 전 1927년부터 이미 만주와 몽골을 영유해야 한다는 생각(만몽영유론)을 가지고 있었다. 

만몽 영유가 불가결하다고 생각했던 것은 그것에 의해서만 해결될 수 있는 절실한 현안이 있고, 그것이 또한 일본의 국운을 좌우할 것이라는 인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일본의 국운을 결정하는 과제였던가. 첫째로 들 수 있는 것이 총력전 수행을 위한 자급자족권의 확립이라는 과제인데, 이것은 당연히 일본의 국가개조와 맞물려 있었다. 그리고 둘째로 들 수 있는 것은 국방·전략상의 거점 확보라는 과제인데, 이것은 또한 조선 통치와 방공(防)이라는 이데올로기 문제와 관련되어 있었다. 물론 이 두 가지 과제는 연관되어 있어 일련의 문제로도 볼 수 있기 때문에, 만몽 영유를 달성하면이 과제들이 한꺼번에 해결된다고 생각하기도 했던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는 또한 "국내의 불안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대외 진출에 의존할 필요가 있다"는 판단도 작동하고 있었다. - P43


관동군은 국제적으로 1929년 세계경제공황의 상황으로 미국과 영국이 정신이 없을 때, 중국이 통일을 위해 국민당과 공산당 간의 대결로 전력을 기울이고 있어 만주사변을 일으킬 수 있는 배경이 되었다. 국내적으로는 여론이 정부보다는 군부를 지지했던 이유도 있다. 

이런 현상이 나타난 이유로는 우선 1929년 가을 이래 세계공황에 의해 "자본주의 일본의 국민경제가 막다른 골목에 다다라” 국민이 만몽에서 그에 대한 해결을 구했다는 경제적 배경을 들수 있다. 또 다른 하나는 장쭤린 폭살 사건으로 만몽 문제를 단번에 해결할 수 없었던 것에 대한 반성으로 군부가 "앞으로는 반드시 여론의 후원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어떻게 하면 여론을 환기시킬까를 연구하고 조직적으로 목적을 달성하기를 도모하면서 매우 정력적으로 여론 조작을 추진한 것도 한 원인이었음에 틀림없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11월에는 사회민중당도 만주사변 지지를 결의하고, 12월11일 와카쓰키 내각의 총사퇴에 의해 시데하라 외교가 종언을 맞이하는 등 사태는 급전되었고, 만몽 처리에 관해서는 관동군이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 P85~86


만주국 건설에는 만주 현지 지역의 군벌과 친일 단체 협조의 힘이 컸다. 

장쭤린의 책사이자 평톈 지방자치유지위원회 의원이었던 위청한은 장쉐량 군벌 및 난징 정부의 입김에서부터 벗어나 자체적인 이상적 왕도정치를 실현시키고 군대를 폐지한 뒤 군사적 기능을 일본에 위임하겠다 했다. 

또한 만주청년연맹은 ① 둥베이 4성의 철저한 문호개방, ② 현주 각 민족협화의 취지에 의해 자유평등을 지향하고, 현 주민으로 자유국민을 구성한다. ③ 군벌을 배제하고 철저한 문치주의로 다스리며 병란이 잦은 중국 본토로부터 분리하여 둥베이 4성의 경제적 개발을 철저히 한다는 것 등이 강조하면서 위청한과 마찬가지로 일본의 구미에 맞는 것이었다.

중국 본토로부터 단절된 왕도국가를 건설해 아시아 부흥의 초석으로 삼는다는 생각은 가사기를 중심으로 한 ‘다이유호카이’라는 단체도 꿈꾸던 바다. 


만주국 정치를 결정했던 것은, 괴뢰국가·보호국화라는 국제 여론의 비난을 피하기 위해 표면상으로는 현지 중국인의 자주적 발의의 의해 정치적 결정이 이루어지는 형식을 취하면서도 내면적으로는 관동군의 지도하에 일계 관리에 의해 일본의 통치 의사를 어떻게 효율적으로 실현하는가 하는 요청이었다. 그리하여 표면과 내면의 괴리라는 모순을 가지고 있으면서 만주국으로 하여금 "영원히 우리 국책에 순응하게 하는 것, 그것이 일·만 관계의 기조가 되었던 것이다. - P203

1929년 세계 공황 이후 일본 경제 막다른 길에 몰린다. 일본 농촌은 노동 쟁의가 최고조에 이르고 실업자 수도 상당했으며 결식 아동이 속출하고 생활고로 부모자식이 동반 자살, 딸을 파는 부모도 많았다고 한다. 이는 역설적으로 만주국에서 희망을 찾겠다는 만주국 붐을 일으킨다. 하지만 과대하게 선전된 만몽의 자원과 이권에 일본인의 활동은 제약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한정적 자원에 수요는 많으니 당연한 귀결이 아니었을까. 게다가 만주국 건국을 둘러싸고 정부 계열 간 균열이 발생하면서 자치지도부 사람들이 중앙정부로부터 배제되는 상황이 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1932년 만주국 승인 결의안이 만장일치로 가결되고 <일만의정서>에 의해 만주국 통치의 실권은 일본이 법적으로 장악하게 되었다. 쇼와 천황은 무토 노부요시 관동군 사령관에게 “장쉐량 시대보다도 한층 선정을 베풀도록 노력하라”는 훈시를 했다. 


일본인은 만주국의 제제를 천황제와 유사한 형태로 만드는 것에는 이상할 정도로 열의를 보였다. 천황제의 황실에 대응하여 제실이 만들어졌고, 국문장에 대응하여 제제 실시 후 일본식으로 난화(花)가 문장이 되었다. 이외에 궁성(宮城)에 대응한 제궁(宮), 행행(行)에 대응한 순수 나중에 순행), 어진영(御眞)에 대응한 어용(御容: 나중에 어영御影), 황위에 대응한 제위, 황후에 대응한 제후라는 식으로 만주국제제는 천황제의 모조)로서 만들어져 갔던 것이다. - P255

일본은 이렇게 천황제 시스템을 이용하여 만주국 체제를 이용하여 구성했음을 이해할 수 있다. 일본과 만주국은 마치 마주보고 있는 거울상처럼 일본은 만주국의 상 속으로 각각을 투영시켜 무한의 상을 겹쳐간다. 그리하여 그 모든 것이 자기이고 그 모든 것이 타자인 것처럼 진위를 가리기 힘들게 되어 간다. 


그러나 일본과 만주가 긴밀하게 이렇게 움직이려 했으나 전쟁 상황은 날로 악화일로를 걸어갔고 상황은 점점 어려워져갔다.

일. 만 관계가 진정으로 새로운 이념하에서 독자적인 국제관계를 창출했다고 한다면, 그것을 말하는 데 적합한 개념과 체계로써 구미의 정치학이나 법률학도 납득시킬 수 있을 만큼의 설명 능력을 제고해야 한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노력 없이 구미의 정치학과 법률학에서 말하는 ‘괴뢰국가의 개념으로 규정하는 것은 아시아 역사 자체가 용납하지 않는다‘라고 주장하는 것은 그 자체가 바로 지적 오만이고 지적 제국주의의 다른 형태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또한 만주국을 괴뢰국가로 보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 "아시아 역사 자체"란 도대체 어디의, 어떤 역사란 말인가. 건국 이래 일관되게 만주국을 괴뢰국가로 지탄해 왔던 중화민국과 삼십 몇 만이나 되는 반만항일군 전사들, 그리고 앞에서 든 겐코쿠대학의 중국인 학생은 포함되지 않는 것일까. 아시아를 거론할 때 우리들
일본인은, 과거에도 현재에도 항상 아시아 담론을 기만의 방패로삼아 왔다. 만약 자신의 삶을 경멸할 생각이 없다면 21세기에는 이러한 ‘아시아‘라는 담론으로 자신과 타자를 함께 속이는 일만큼은 절대로 하지 않았으면 하고 절실히 생각한다. - P334

재만 조선인은 만주국 시대에 일본인=‘동양궤이즈(東洋鬼구)‘에 다음가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얼웨이즈(鬼)‘로서 전후에는 참혹한 상태에 놓이게 되었지만, 경제적 이유 등으로 귀국도 할 수없어 112만 명 가까운 사람들이 만주에 잔류할 수밖에 없었다. 조선족은 일본인 다음가는 "만주국 중요 구성분자"로서 국방의 책무를 담당했는데, 동시에 ‘황국신민‘으로서 징병 · 징용되어 중국·남방전선에 동원됨으로써 전범이 되거나 시베리아에 억류된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패전 후에는 일본국적을 상실했기 때문에 보호나 보상의대상에서도 제외되었다. - P399


윗 구절을 읽으며 이 책을 읽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일본이 만주국을 통해 설사 이상향을 꿈꾸었다고 해도 그 방향은 분명 평화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고 주변을 핍박하는 형태였기 때문에 한계를 지닐 수 밖에 없는 것이었다고 여긴다. 


책의 말미에는 보론을 싣고 있다. 책의 특성상 간단하게 다뤄져 언급하지 못했던 질문을 추려 저자가 답을 하는 형태여서 독자가 궁금해 가려웠던 부분을 긁어주었다. 


1945년 만주국이 무너지고 나서 일본인은 어떤 상황에 처했을까. 급속도로 증가했던 재만 일본인은 중국의 내전으로 일본으로 귀환하려다 상당수가 목숨을 잃거나 시베리아에 억류당하는 어려움을 겪었다. 일부는 속죄하는 마음으로 자발적으로 현지에 남아 전문 지식과 기술을 중국인에게 전했다고 한다. 현지에 자발적으로 남은 이들이 있었다는 이야기는 잘 몰랐던 부분이었는데 이번 기회에 알게 됐다. 


대한민국 정부의 탄생에도 여러 인물이 만주국과 깊은 관련을 가지고 있다. 국가 탄생 이후 제대로 정리되지 못한 친일 청산과 현재도 뿌리 깊은 이념 때문에 벌어지는 색깔 논쟁은 고질병이 된 것이 아닌가 싶어 씁쓸해진다. 


이미 소멸해버린 만주라는 공간, 만주국이라는 국가를 거론하는 것은 일종의 시대착오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무참한 희생을 조금이나마 보상하고 거기에서 조금이라도 인류의 예지를 이끌어내어 후세에 교훈을 남기기 위해서라도 우리들은 그것을 과거의 사실로 망각할 수는 없는 게 아닐까. 

만주국이 그러한 사상과제를 가지고 있는 이상, 그것은 ‘영원한 현재’로서 계속 존재할 터이다. - P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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