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한달은 장마와 함께 수증기가 밀려와 빨래를 해도 도무지 마르지 않는 나날이었다(건조기를 쓰지 않는데 이제는 정말 사야 하나 싶다ㅜㅜ). 


어김 없이 지난 달 읽은 책들을 정리해본다. 




일단 <한국 여성문학 선집> 시리즈(총 7권)가 있다. 어제까지 마지막 권 읽고 시리즈 완독을 마무리하려 했는데 리뷰가 계속 밀려 있어서 깔끔하게 포기했다. 그래도 며칠 안에는 읽고 마무리가 될 것 같다.

한국 여성 문학의 역사는 근현대의 역사와 함께 흘러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기획 덕분에 개인적으로 새롭게 알게 된 작가들이 많아져서 무엇보다 큰 수확이었다. 수록된 작품들이 문학 중 소설 장르에만 치우치지 않고 시, 희곡 등도 담겨 있다. 게다가 문학 만이 아닌 연설문이나 비평문, 좌담회 발췌 등도 실려 있다. 문학은 간접적으로 작가의 목소리를 드러낸다면, 비문학은 더 직접적으로 느끼게 해서 다른 맛이 있다. 독자가 어느 장르에 관심이 있느냐에 따라 골라 읽는 재미가 있을 것 같다. 그것이 선집의 묘미가 아닐런지.

기억에 남는 작가들이 있다면 근대 시기에는 김일엽, 지하련, 박화성 등을 꼽을 수 있을 것 같고 현대 시기는 최정희, 김자림, 박완서, 박경리, 정복근, 김승희 등을 꼽을 수 있겠다. 추후 작가의 다른 작품들을 읽어본다면 작가의 작품 세계를 아는 데도 도움이 되겠지만 한국 역사를 재구성하는 보충재로서도 톡톡한 역할을 할 수 있지 않을까. 



<노마드>는 제목으로 짐작할 수 있듯 고대부터 현재까지 유목 생활을 하던 이들의 역사를 압축하여 보여주는 책이었다. 특정 지역을 오간 역사를 기술하되 고대 같은 경우 신화를 풀어 놓아 흥미를 돋우고 중세 이후에는 여행자들의 기록이나 역사서 등 관련 책을 기술하여 입체적인 역사를 볼 수 있게 해준다. 농경과 정주가 기본이라고 생각했던 관점에서 어느새 유목 등 '이동'도 다르거나 비상식이 아님을 알 수 있는 책들이 과거보다 확연히 많아졌다. 기준이라는 것을 만들어 정상과 비정상을 가르는 일은 이제 더는 유효하지도 않다. 다르게 볼 수 있는 감각을 역사서를 통해서도 이제는 경험해볼 수 있게 되었다.



<12.12>은 재판본이다. 초판본은 전두환과 노태우가 재판을 받을 무렵 나왔다. 이번 재판본은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를 통해 12.12의 배경과 결과 후의 역사까지 담아 놓았기 때문에 관련 지식이 없었던 사람들에게 그야말로 사전-사후 지식까지 채울 수 있는 선물 같은 기획이 아닌가 싶다. 나 같은 경우도 12.12에 대한 자세한 내막이나 경과 과정을 잘은 몰랐기에 많은 도움을 얻었다. 책을 보고 영화 <서울의 봄>을 보았더니 화룡점정이었다. 영화를 보고 나서 이 책을 보아도 정리하는 측면에서 좋을 것 같다.



<인생>은 위화의 대표작 중 하나로 장편 소설로는 첫 작품으로 알고 있다. '푸구이'라는 인물의 삶을 통해 중국 근현대사를 간접적으로 경험하게 해준다. 전쟁, 가난으로 힘겨웠던 푸구이의 삶에서 가족이란 자신을 버릴 수 없을 만큼 값진 존재였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누구든 홀로 태어나지는 않는다. 가족을 선택할 수 없어서 때론 맞지 않아 힘들고 삶에 부딪쳐서 힘들기도 하지만 가족 때문에 행복하고 버틸 수 있는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이 책을 읽으면서 느꼈다. 담담하게 울리는 문장을 얻는 것은 덤이다. 



<한국의 여성과 남성>은 한국의 여성주의와 역사를 정리한 책이라 사례 등이 쏙쏙 이해되어서 참 좋았다. 뒷 부분의 제주도의 사례가 특히 좋았는데 이런 책이 지속적으로 업데이트되어 나와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물론 쉽지 않은 작업임을 알고는 있으나 앞으로 여성주의를 알고 싶은 독자들을 위해서라도 나와주었으면 한다. 해외의 페미니즘 이론이나 대중서의 경우 번역을 해서 들어오기는 하지만 사례 등이 아무래도 외국 것이라 잘 와닿지 않아서 읽기 어려운 경우가 많았으니.  


권 수로 따지니 11권이라 많아진 느낌인데 개인적으로는 쉬어 가는 한달 간의 책 읽기였다^^ 


지난 달부터 시작한 함달달 책 <Holes>는 읽고는 있는데 잘 감기지가 않아서 결국 완독을 못했다. 함달달 책으로 그나마 영어 공부를 진행하는데 뭐가 문제일까. 아무튼 중도에 포기하는 것은 성정상 아니라서 완독은 해보려고 한다. 




요즘 덥지만 먹기는 또 잘 먹는데 상대적으로 움직이는 양이 줄어드니 살만 찌고 있다ㅎㅎㅎ 어제는 편육에 막걸리를 먹었다(왜 이리 맛있는지ㅠㅠ). 계속 흐린 날이 많아 사진을 한동안 찍지 않았다. 그러다 반짝 해가 나면 그때만 찍곤 한다. 더워도 파란 하늘을 보는 것이 역시 좋다^^








8월도 잘 살아보기로.


댓글(10) 먼댓글(0) 좋아요(3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자목련 2024-08-02 09:5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화가 님의 꾸준한 읽기, 대단합니다.
더위를 핑계로 저는 게으른 여름입니다.
<한국 여성문학 선집>의 리뷰 잘 읽고 있어요. 마지막 7권은 익숙한 작가가 보여 더욱 궁금합니다.
8월에도 건강하고 즐거운 날들 이어가세요!

거리의화가 2024-08-02 10:17   좋아요 2 | URL
자목련 님 무척 더운 여름날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잘 지내셨지요? 아무래도 쉽지 않은 책 읽기 계절입니다ㅋㅋ 선집 리뷰 잘 봐주고 계신다니 감사하고요.
무더위란 핑계로 계곡이나 바다로 가거나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서 뒹굴거려도 괜찮지 않을까 싶습니다. 앞으로 최소 열흘 정도는 폭염이 지속된다고 하는데 수분 섭취 잘하시고 건강 유의하시길 바라요^^

페크pek0501 2024-08-02 13:5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 이중 <인생>밖에 읽은 게 없도다...ㅋㅋ
다음달에 읽으신 책은 또 어떤 것들이 있을지 기대합니다!!!

거리의화가 2024-08-02 14:59   좋아요 2 | URL
ㅎㅎ 페크 님 인생 저도 계속 미루다 이번에 읽어봤어요^^ 위화 이후 작품도 계속 읽어보려고 생각 중입니다. 8월도 즐거운 독서 생활 이어가시길!

단발머리 2024-08-02 16:0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우아~~ 이 더운 날씨에 많이 읽으셨네요, 거리의화가님!
<한국 여성 문학 선집> 너무 부럽습니다. 저는 7권에 기가 팍 죽어서 ㅋㅋㅋㅋㅋ 시작도 못 하고 있어요.
겹치는 그 한 권, 매우 반갑습니다!!

거리의화가 2024-08-02 16:37   좋아요 1 | URL
이번 여름처럼 어디 잘 안 돌아다니고 집콕한 적은 없는 것 같습니다^^; 여름 휴가도 집에서 보내려고 생각 중이라... 7권이라 많아 보입니다만 막상 읽으면 잘 읽혀서 생각보다 시간이 금방 가더라고요^^
<한국의 여성과 남성> 얼마 전 올리신 글 봤습니다. 늘 좋은 귀감이 되어 주셔서 저도 보고 배우네요. 이번 달도 행복한 책 읽기 되시기를!

stella.K 2024-08-02 21: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 딴청인데 냉면 양이 너무 적은 것 같습니다.
냉면 값이 많이 비싸다던데 비싼만큼 양이라도 많으면.

저도 <한국 여성문학 선집>은 읽고 싶긴한데 과연 읽을 수 있을지...ㅠ

거리의화가 2024-08-04 12:08   좋아요 1 | URL
ㅎㅎㅎ 요새 냉면 양이 작더라고요? 도심에서 11,000원의 가격이면 싸다는 생각도 들기도 하고^^; 코다리 냉면이라 쫀득한 식감도 즐길 수 있었답니다.

스텔라 님 한 번에 읽기 힘드시면 특정 시기를 잡아서 한 권씩 독파해보시는 방법도 좋을 듯 하네요. 더운 여름 건강하게 나시길 기원합니다^^

다락방 2024-08-11 15: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중도에 포기하는 것은 성정상 아니라서‘ 라니, ㅋ ㅑ - 제가 너무나 좋아하는 성정인 것입니다!!

거리의화가 2024-08-11 17:06   좋아요 0 | URL
다락방 님 몸은 좀 괜찮으신가요?ㅠㅠ 여행 다녀오시자마자 아프셔서 어째요. 얼른 건강 회복하세요!
ㅎㅎ 늘 응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한국 여성문학 선집 6 - 1980년대 운동으로서의 글쓰기 한국 여성문학 선집 6
여성문학사연구모임 엮음 / 민음사 / 2024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980년대는 광장에 선 주체로서의 여성이 역사의 증언자로서 등장하는 시기다. 1970년대 서서히 시작된 페미니즘적 시각이 주류 담론과 갈등 및 분열을 일으키는 시기이기도 하다. 이 시기 정도까지가 ‘민족’이라는 의미가 가능했던 때가 아니었나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1990년대 이후가 되면 더 이상 ‘민족’이라는 명칭을 쓰기에는 낡은 개념이 되어 버린다. 

1980년대 여성들은 노동자, 민중적 주체로 많은 활동을 했다. 아무래도 5.18과 87은 중요한 분기점이 되었던 사건인 만큼 문학의 소재로 다양하게 쓰였다. 특히 5.18은 국가가 국민을 탄압한데다 많은 사상자를 낸 만큼 특히 많은 글들이 남아 있다. 이처럼 민중 문학이 활발했는데 여성 작가들이 어떤 특별함을 부여했는지 그것을 보는 일이 중요하다. 당연히 이전 시기처럼 페미니즘에 대한 여성의 시각을 드러낸 주제의 문학도 존재한다. 한국 문화를 여성의 눈으로 바라본 것이 특징이다. 


홍희담은 작가이기도 하지만 광주 민주여성 단체인 송백회 활동을 하는 등 활동가적인 면모도 있다. 특히 <깃발>은 5.18 때 도청을 사수한 여공들의 활약을 담은 중편 소설이라는데 정작 분량 때문인지 담겨져 있지 않아 아쉬웠다. 


김채원은 한국전쟁 때 아버지가 납북되는 경험을 겪었고 자신은 남한에서 지내다 1975년 이후에는 미국, 프랑스에서 유학 생활을 했다. 아버지를 전쟁 때 잃은 경험은 상실과 고통을 가져오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일찍부터 가장이 되어 살아야 했던 만큼 주체적으로 일어서야 한다는 강박감에 시달렸을 것 같기도 하다. 화가이기도 한 김채원은 여성에게 가해지는 억압을 내면화하여 표현한다.

<거울의 환>에서는 김치, 된장찌개, 동치미 등 어머니, 할머니와 함께 먹던 음식이 등장한다. 묘사를 보고 있자니 마치 밥상 위에 앉아 있는 등 침샘을 자극할 정도였다. 주인공은 예전에 살던 집을 찾던 중 길에서 한 남자를 만나는데, 헤어진 이후 연락을 기다린다. 그들은 다시 만났을까. 할머니는 전쟁이 터지자 거주지에 남고 남은 식구들은 피난길에 오르기도 한다. 어머니와 딸은 갈등 끝에 화해한다. 어머니와 딸은 갈등의 소재로 많이 등장한다. “나는 어머니처럼 살지 않겠어요.” 라고 말했던 딸이 어머니의 나이가 되면 과거의 그녀를 이해하게 되기도 한다. 누구보다 갑갑하게 살았을지 모를 어머니를 이제는 이해하는 세대가 되었다. 


역사는 구르고 사람들은 그 역사라는 것을 피를 흘리면서도 개선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는 것인지 모릅니다. - P229


나이 들어 가는 사람의 떨림이 아니라 나이 들어 가는 여자의 떨림으로, 저의 성을 찾아 여기에 서는 일은 이리도 힘이 든 일입니다. - P248


앞선 시기 최초의 희곡 작가인 김자림을 소개하기도 했는데 정복근을 설명하지 않고 넘어갈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는 1976년 신춘문예를 통해 희곡 작가로 등단하여 많은 희곡을 발표했고 여러 작품을 무대에 올렸다고 한다. 대중적으로도 작품이 성공하여 그는 한국 연극계에 이름을 단단히 남겼다. 1980년대가 민중이 글의 주체로 등장하는 만큼 그의 희곡에도 민중적 서사를 담았으나 여기에 여성주의적 관점을 추가시켰다는 것이 포인트다. 

<덫에 걸린 집>에서는 시대는 바뀌었어도 여전히 권력에 취하고 싶어 기생을 찾는 남성들이 등장한다. 절도와 강간 피해를 당했는데도 불구하고 집안 망신이라며 숨기기 급급한 사람들의 심리도 엿볼 수 있는데 읽는 것만으로 생생함이 느껴져 절망스러웠다. 오늘날에는 발전된 디지털 체계로 여성의 성은 더욱 난도질당하기 쉬운 환경에 들어서게 되버렸다. 어떤 것도 믿을 만한 것이 있을지 모르겠다.


가정파괴범이란 건 대체 누가 붙인 책임 회피적인 이름이지요? 그런 녀석들은 단지 용서 못 할 파렴치범에 불과해요. 집안이 그런 하찮은 범죄 때문에 깨어지는 줄 아세요? 비루한 인습 때문에 깨어지고 배신 때문에 깨어져요. 남편은 아내를 배신하고, 가족은 피해자를 배신하고, 피해자도 자신을 배신해요. (가방 들고 나가며) 난 이제 나 자신을 배신하지 않도록 노력하는 수밖에 없어요. - P318


강석경은 1985년 등단 후 10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주목을 받았다고 한다. 상업주의 문학을 배격하는 모임인 ‘작가’ 동인에 합류해 창작 활동을 했다. 산업 사회에서 글을 쓰면서 상업주의 문학을 배격한다는 것이 쉬운 일인가 싶은데 실제로 그의 글의 소재는 이와 관련하여 먹고 살기 위해 문학적 순수성을 버려야 하는 상황에서 개인의 실존적 고뇌를 다룬다. 

<밤의 요람>에서는 기지촌 여성들의 삶을 만날 수 있는데 그녀들이 일상적으로 받는 차별을 잘 그려내고 있다. 선희와 마크, 애니와 톰슨, 미라 등이 등장한다. 기지촌 여성들의 신산한 삶과 피부색, 돈으로 평가되는 개인의 희비극이 그려진다. 

술병이 뒹구는 거리도 어린아이처럼 어둠 속에 누워 있다. 자부심을 지닌 백인과 그 빛의 어둠인 흑인, 거대한 체구의 아메리칸에게 달러와 사랑을 뺏는 여자들, 그들 모두가 밤의 요람에 잠들어 있었다. 발 딛고 내릴 제 땅을 찾지 못하고 욕망의 허공에서 허우적거리는 색색의 인종들이, … - P370


1980년대는 여성 작가 단체, 잡지 등이 등장하기도 했던 때다. 여성평우회, 또 하나의 문화, 여성, 여성운동과 문학 등이 그 주인공이다. 


여성평우회는 한국 여성의 억압이 가부장제 산업화 분단 등에 의해 구조화되었음을 정면으로 응시한, 분단 이후 최초의 단체였다. 여성평우회는 기관지를 펴내고 배움에 대한 나눔의 장을 마련하기도 하였으며 여러 방면의 사업을 전개했다. 무엇보다 다른 여성 단체와 연대하여 여성 문제를 사회정치적 의제로 내세웠다는 데 의의가 있겠다.

특히 여성 문화 큰 잔치는 마당극에 여성주의적 시각을 덧붙여 내놓은 문화 컨텐츠라고 볼 수 있다. 막을 내린 후에도 한국여성노동자회의 문화 운동으로 계승되어 명맥을 이었다. 


책에는 1984년 10월에 펼쳐진 여성문화 큰잔치 연희마당을 실어 놓았는데 노동자 및 여성의 현실을 자학적으로 드러내면서도 가부장제에 대한 비판 의식을 드러내보인다는 생각이 들어 통쾌함을 느끼게 한다. 마당 놀이 답게 다양한 컨텐츠가 눈에 띈다. 고사문, 민요 함께 부르기, 이야기마당, 연희마당에는 영화, 사례극, 굿 등의 형식을 빌어 현실을 대차게 깐다. 


시어머니 갓마흔에 아들 낳아

잡색 갓마흔에 아들 낳아

시어머니 어서어서 키워 내어

잡색 어서어서 키워 내어

시어머니 판검사를 만들어서

잡색 판검사를 만들어서

시어머니 농부 신세 면해 보세

잡색 농부 신세 면해 보세


가요 가요 나는 가요

가요 가요 나는 가요 돈 벌러 가요

부모 형제 멀리 떠나 공장에 가요 ( 두 번 반복함) - P598


뭐? 노동자의 인권? 인권 같은 소리 하네. 야, 돈 버는 데 인권이 어디 있고 인정이 어디 있고 양심이 어디 있냐?

뭐? 배가 아프다고? 생리휴가를 달라고? 웃기시네. 야, 생리 안하는 여자 봤어? 아픈 배 움켜쥐고 죽어라고 일해서 이만큼이나 사는 거고 국가도 튼튼해진 거야. 알어? 

이 따위로 일해서 어떻게 작업량을 채우나? 매수 더 뽑아! 불량 내지 말고 정신 차려!(졸고 있는 노동자들 어이없는 듯 쳐다보다가 발길질을 하며)

이게 진짜….. - P600


우리 정부에서는 부강 한국을 위해서 여성 인력 20만을 풀가동시키고 있읍니다. 대한민국 만세! 애국 다찌 만세! (목소리를 낮추며) 니뽄이노, 노동자노, 청소부노 여러분. 논개 정신, 정신대의 전통을 이어받은 한국의 후예들이 환락의 고장, 서울에서 여러분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으므니다. … - P601


우리 재산, 공동 명의로 합시다. - P608


매맞던 부인, 잡색들의 응원으로 남편을 물고 꼬집고 대든다. 그러나 역부족인 미세스 폭력, 심하게 걷어차이며 바닥에 쓰러져 버린다. 폭력 남편, 한 발을 아내 위에 올리고 승리의 표시를 한다. - P611


어이 시집이나 가지.

여자는 결혼이 최고야.

아들이나 낳지.

… - P615


<여성>은 1985년 창비가 간행한 무크지로 출발했다. 진보적 여성운동을 지향하는 여성 지식인들이 편집인과 필진으로 활동했다는 것이 특징이다. 기존 여성 문학을 비판하고 한국의 페미니즘 진영과 민주 운동이 결합하면서 겪는 과정을 통해 격렬한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박완서, 박경리 작품을 비판하기도 했다고. 


여성 해방에 대한 불철저한 인식은 불철저한 세계관과 연결될 뿐 아니라 인간 해방을 위해 가장 철저히 싸워 나갈 수 있는 집단을 무시한 어떤 해방도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 이런 생각에서 우리는 인간 해방을 위한 총체적 이념의 정립과 여성운동의 일대 전기를 마련해야 할 필요를 절감하였다. … - <여성> 1호, P676


교묘하게도 1987년 체제가 막을 내릴 때쯤 여성문학 단체의 활동이 막을 내린다는 것이 안타까웠다. 

그래서 <또 하나의 문화>의 실험이 눈에 띄었는데 그것은 여성주의 무크로 발행된 잡지다. 필진이 조한혜정, 김은실, 조옥라 등 여성학 전공자들이 많다는 것이 눈에 띈다. 다른 여성주의 단체와 달리 1987년 출판사가 설립되어 2003년까지 갔다. 여성의 글쓰기와 표현 양식의 중요함을 알리고 출판 활동에 주안점을 둔 것이 특징이다. 


우리의 우선적인 대상은 두 종류의 사람들입니다. 하나는 일상생활의 차원에서 문제를 느끼는 사람들로 현재 사회 활동을 하고 있는 여성들과 그 주변의 사람들이 되겠죠. … 또 하나는 고등교육을 통해 남녀는 평등하다는 의식은 깨우쳤으면서도 구체적 현실의 장애에 부딪쳐서 제대로 자아실현을 하지 못하고 있는 지식층 여성이나, 소수의 좀 더 풍성한 삶을 살고자 하는 남성들이겠지요. 그들이 현재 자신이 하는 일에 자부심을 갖게 되고 구체적 현실의 장에서 서로 용기를 북돋우면서 발전적 대안을 찾도록 새로운 모델을 제시하도록 밀어주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 좌담 ‘또 하나의 문화’를 펴내며,  P667


어느덧 한국 여성문학 선집 마지막 권을 앞두고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한국 여성문학 선집 5 - 1970년대 개발 레짐과 여성주의적 각성 한국 여성문학 선집 5
여성문학사연구모임 엮음 / 민음사 / 2024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970년대는 군부 독재가 들어선 뒤 유신 체제로 사회적 감시는 두드러지게 심했으나 역설적으로 한국 여성 문학은 여성을 가정에 가두는 젠더 통치에 대항하고 여성의 다양한 목소리를 내세우기 시작한다. 특히 신춘 문예나 잡지 등을 통해서 등단하여 전업 여성 작가로 활동할 수 있는 기회가 열린다. 외국의 페미니즘 서적 등을 번역하기 시작하는 때도 이 무렵이다. 그 전까지는 여류 문학이라는 용어가 주로 쓰였으나 여성 문학으로 전환하게 된 것도 이 때다. 

직업 여성이 늘어나기는 했어도 기혼 여성은 가정에 얽매여 있는 경우가 많았다. 그로 인한 스트레스는 히스테리, 더 나아가 그로테스크함을 표현하는 소재로 선택됐다. 또 중산층이 늘어나면서 그들의 속물 근성을 까발리기도 한다. 직업 전선에 뛰어든 노동자가 자신의 목소리를 수기로 표현하는 경우도 많아졌다. 여성의 신체를 시적 언어로 표현하는 시인들이 대거 등장하고 모임 활동을 하기도 한다. 대표적으로 청미와 여류시가 있다. 


김자림은 한국전쟁 이후 희곡을 쓰기로 결정하고 신춘 문예를 통해 등단했다. 한국 최초 여성 희곡 작가로서 인정받는다고. 

<화돈>에서는 전화 통화를 하는 주부인 ‘나’가 나온다. 기혼 여성이 결혼 생활에 100% 만족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 것이다. 육체적이든 정신적이든 서로 맞춰가야만 하는 부분이 많다. 또한 욕망도 결혼한다고 해서 뚝 끊기지는 않는다. 물적 욕망이든 성적 욕망이든 사라질 리 없다, 다만 도덕적으로 스스로를 다독이는 것이 아닐런지. 소설 속 주인공도 마찬가지인데 통화를 하며 잠시나마 해방감을 느끼는 모습이 나온다. 희곡이라 그런지 말 맛이 참 좋았다. 


언니, 난 그 센트럴히이팅에다 불을 지피기 위해서 찌릿한 드릴과 몸서리쳐지는 엽기를 찾아야 했다우. 그러기 위해선 잔인할이만큼 강렬한 사람, 말하잠 나의 과거를 말끔히 소멸시켜 주고 찰나적으로 나를 죽여 주는 사람, 그러면 난 지글지글 타지. 그러구는 아까 말대로 환원하는 거야. 원초의 나로, 다시 구어지니까 말유. 아, 난 그런 사람을 찾아 헤맸다우. - 화돈, P40


박완서의 작품은 <나목>, <엄마의 말뚝> 등은 읽어봤었는데 이번에 <닮은 방들>이란 작품을 만날 수 있었다. 처가 살이 중이었던 부부가 아파트로 독립해 나가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성냥갑 마냥 똑같은 모양을 한 아파트(한국의 아파트는 너무 비슷한 모양이라 어딜 가나 보는 재미를 주지 못하는데 해외에서 만난 다양한 아파트의 모양과 색감이 인상적이었던 기억이 난다)의 생활은 지루하고 단조롭다. ‘닮은 방들’이란 제목이 이중적 은유로 느껴졌다. ‘닮은 방들’은 아파트고 간음이란 행위는 그 대상만 바뀔 뿐 비슷하고 닮았다.  


나는 내 이웃의 무수한 닮은 방들이 끔찍했고 내 쌍둥이 아들을 구별 못 하는 일이 끔찍했고 무엇보다도 한 눈을 애꾸를 만들어 가지고 콩알만 한 유리 조각을 통해 퇴근한 남편의 얼굴을 확인하는 일이 끔찍했다. 천정에 달라붙은 20와트 형광등 불빛 밑에서 비인간적으로 창백하고 냉혹해 보여 자기 남편을 아파아트 살인범으로 착각해야 하는 일이 끔찍했다. 

내 생활에서 끔찍하지 않은 일은 철이 엄마의 그 <-짐승 같은 새끼>와 간음을 하고 말 것 같은 예감뿐이었다. - 닮은 방들, P71


오정희의 작품 중 장편 소설 <새>를 작년에 읽었었는데 아이들의 감정에 이입되어 갑갑했던 기억이 난다. 다른 작품인 <중국인 거리>를 안 그래도 읽고 싶었는데 여기에서 만날 수 있었다. 그는 한국 전쟁 때 인천의 중국인 거리에 정착했는데 그 경험이 이 소설의 뼈대를 구성한다고 할 수 있다. 

조개탄을 때우고 회충이 등장하는 장면에서는 피식했다. 회충약 세대까지는 아니지만 조개탄은 경험해본 적이 있다. 중학교가 공립이다보니 지원이 한정적이었는지 겨울이면 조개탄 땐다고 돌아가면서 아이들이 그것을 날랐던 기억이 난다. 연기도 많이 나고 항상 환기를 해주어야 하는지라 딱히 효과는 없었다. 

아무튼 소설 속 중국인 거리는 도처에 외국인들이 돌아다니고 군인을 상대로 성을 파는 여성이 있는 등 부모 입장에서는 위험한 것들이 난무한 곳이다. 전후 어지럽게 널려 있는 터전 속에서 빈곤하지만 어떻게든 살아가려는 다양한 인간들의 모습이 드러나 있다. 


시의 정상에서 조망하는 중국인 거리는, 검게 그을린 목조 적산 가옥 베란다에 널린 얼룩덜룩한 담요와 레이스의 속옷들은, 이 시의 풍물이었고 그림자였고 불가사의한 미소였으며 천칭의 한쪽 손에 얹혀 한없이 기우는 수은이었다. 또한 기우뚱 침몰하기 시작한 배의, 이미 물에 잠긴 고물이었다. - 중국인 거리, P188~189


김승희는 1973년 신춘문예에 소설로 당선되었으나 전공은 현대시인데다가 미국에서 한국 현대시를 가르친 이력이 있고 1979년 첫 시집을 낸 이후에 계속하여 꾸준히 시집을 내는 시인이다. 그의 시에는 ‘태양’과 ‘어머니’가 많이 등장하는데 마치 빛의 반대에는 어둠이 있듯 현실과 꿈은 다름을 말하는 듯하다. 

<태양미사>의 시는 읽으면 바로 느낌이 올 정도로 그동안 읽었던 시들 중 가장 좋았던 것 같다.


어둠이 태양을 선행하니까

태양은 어둠을 살해한다.

현실이 꿈을 선행하니까

그리고 꿈은 현실을 살해한다.

구름의 벽 뒤에서

이제는 태양을 산책하는 독수리여,

나는 감히

신비스런 미립자의 햇빛 파장이

나의 생을 태양에 연결시킬 것을

꿈꾸도다.

… 

- 태양미사, P227


노동자의 입장을 대변하는 작가로 석정남을 만날 수 있다. 그는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서울에 올라와 양장점, 피복 공장, 전자회사 등 다양한 일을 경험했다고 한다. 자연스레 그의 글에는 노동자로서 겪는 현실에 대한 부당함과 불만을 고발하는 주제가 담겨 있다. 특히 1978년 그가 실제로 일하기도 한 인천 동일 방직에서 노동자를 해고한 사건을 연극에 올리고 동지 회보를 만드는 등 복직 투쟁에 나서기도 했던 면에서는 실천적 노동가의 모습이 엿보인다. 하지만 노동자로서 일을 하면서도 문학인으로 살고 싶어하는 열망이 있었다고 하니 가슴이 뜨거워지기도 했다. 당시 여성 노동자들이 어떤 삶을 살았고, 회사를 상대로 어떤 투쟁을 했는지 그의 소설을 통해 생생히 느껴볼 수 있다. 


3월 14일

우리 회사의 장래가 어떻게 되려고 이러는지 알 수가 없다. 만약에 회사가 문을 닫게 된다면 나는 어디로 가야 하나? … 나의 책임은 무겁다. 내년 이때쯤 나는 우리 집의 가장 노릇을 해야 된다. 가장의 월급이 8,000~9,000원 가지고 어떻게 한 가정이 살 수 있을까? 어떻든 빨리 미싱 기술자가 되어야 한다. - 인간답게 살고 싶다, P234


죽도록 일만 하고 밥 먹고 잠자고, 이런 일은 너무나 무의미하다. 이건 뭐 밥을 먹기 위해서 사는 벌레나 마찬가지의 생활이다. 나는 가끔 시라는 형식의 글을 써 놓고 훌륭한 작품이라는 착각에 빠져 스스로 기뻐할 때가 있다. 그러나 나중에 다시 보면 정말 보잘것없는 글이라는 것을 알고 나의 무능력에 대한 깊은 실의에 빠진다. 노력이 부족한 탓일까. - 불타는 눈물, P239


<인간답게 살고 싶다> 발췌문을 읽는데 과거 내 일기를 보는 줄 알았다. IMF가 터지고 나서 입사 후 회사를 여러 번 옮겨 다녀야만 했던 때가 있었다. 월급이 과연 제대로 나올지 전전긍긍하며 지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너덜너덜 피폐했다는 말이 딱이다. 그 때 일기를 열어보면 하나 같이 우울한 감정 뿐이었다. 

책임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여성 노동자들의 한숨과 투쟁이 오롯이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1970년대 여성문학은 글쓰기의 매체가 생겨나며 여성들이 작가로 활동하는 것이 가능해진 시기였다. 글쓰는 여성 노동자들이 등장하고 사회적 모순과 비판에 대한 문학 소재도 여전히 만나볼 수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한국 여성문학 선집 4 - 1960년대 세대교체와 저자성 투쟁 한국 여성문학 선집 4
여성문학사연구모임 엮음 / 민음사 / 2024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960년대는 시민이 등장하면서 공론장의 자각 변동이 이루어진 때이다. 그러나 ... 냉전주의는 시민의 자유를 납작하게 짓눌렀고, 개발과 진보는 신화적 가치로 자리 잡아 신분 상승을 향한 욕망을 부추기는 한편으로 사회적 약자에 대한 착취는 불가피한 선택인 양 호도되었다. 또한 서구와 구별되는 한국적 근대화를 향한 이상은 여성을 사적 영역과 전통 속으로 밀어넣어 시민으로부터 분리하고자 했다. 이러한 현실에서 여성 작가들은 여성에게 할당된 모성의 위상을 수락하며 여성의 시민적 권리를 주장함으로써 성역할, 가족, 전통, 연성, 문화에 갇히는 역설에 빠지기도 했다. 그러나 신진 여성 작가들은 자율적 개인에 대한 자각을 바탕으로 가부장제의 여성성 규범을 내파하는 여성 성장을 도모하고, 냉전 권력의 금기를 깨는 ... - P37


한국여성문학선집 4권은 1960년대를 다룬다. 전쟁 후유증에서 벗어나 이제 좀 자신을 알아가면서 자각하는 여성들의 이야기가 있는 한편 4.19 이후 목소리를 봉쇄당하는 감시 사회의 단면을 다루고 있기도 하다. 또 이 시기가 되면 여성의 몸과 욕망에 대한 주제가 담긴 글이 늘어난다. 여성 작가들은 여성 문학이 한국 문학의 구석진 자리가 아니라 중심에 떠오를 수 있도록 서서히 시동을 건다는 것도 눈에 띈다.


박순녀는 태어난 곳은 함흥이었으나 학업을 위해 홀로 월남하여 서울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교사로 일했다. 소설만 쓴 것이 아니고 번역도 하고 드라마도 집필하는 등 다방면의 활동을 했다. 무엇보다 남편이 일찍 사망하여 홀로 아이를 키우면서 작품 활동까지 병행했다고 한다.  

<아이 러브 유>에서는 일제 말 여학교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로 식민 체제에 대한 비판이 담겨 있다. 당시 학교는 여학생들을 근로 봉사라는 미명 아래 방공모를 쓰고 몸빼 바지를 입힌 뒤 전시 훈련 교육을 시켰다. 선생과 교사 간의 갈등은 전시 말에 갈수록 극에 달한다. 일본 출신 선생님과 조선 출신 선생님 간의 비교와 갈등이 눈에 띄게 보이지만 단정지을 수는 없다. 어떤 한 개인과 집단을 피해자와 가해자로 나눌 수 없는 복합적인 요인과 상황이 존재함에도 한쪽으로 매도하는 것은 지금도 여전하기에.

<어떤 파리>에서는 술집에서, 학교에서 현 정부를 비판하는 내용을 했다가 감시를 당하거나 쫓기는 일이 일상적이었음을 경험하게 한다. 선생이 인사 조처를 당하자 아이들이 선생님은 아무 죄가 없으니 돌려달라 말하는데 정부 조사원이 아이들 집을 모두 찾아다니며 배후를 추궁하는 부분에서는 무엇이 사회를 이렇게까지 만드는 것인가 답답하지 않을 수 없었다. 평범한 이웃이 간첩이 될 위기에 처하자 증언을 하기로 결심하는 주인공의 모습에서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그 선택을 나라면 할 수 있을까 고민하게 했다.


난 도무지 너흴 믿을 수 없단 말야. 순진하다면 순진하다고도 할 수 있지만 바보라고도 할 수 있지. 아니 너무나 모른다. 결국 모르기 때문에 불쌍한 거야. 넌 지금 일본 사람이라는 것에 폭발적인 불신과 증오를 느끼게 된 모양이지만, 좀 더 들어가 보면 우리 모든 사람이 피해자와 가해자로 나눠져 있는 거란다. 말하자면 일본 사람만이 가해자가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조선 사람만이 피해자랄 수도 없어. 너는 알 수 없겠지만 나도 역시 피해자의 한 사람일 따름이야. - 아이 러브 유, P113


빛과 색, 내 앞으로 내 뒤로 꽉 들이차 있는 그 빛과 검은색, 빛과 색-내 사고력은 온통 빛과 색에 동원됐고 나는 그 빛과 색에 묻혀 앗! 하는 내 비명을 들은 것 같았다. - 어떤 파리, P153


이정호는 한국 전쟁 때 김일성을 찬양한 일로 교사를 그만두고 국군에 입성한 뒤 대한청년단 선전부원이 되는 등 놀라운 선택을 했다. 흥남 철수 때 가족과 헤어지는 바람에 이북인 고향을 떠나와 남한에 정착해 가정을 꾸렸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그는 한국 전쟁에 대한 이야기와 흥남 철수 작전에 대한 뒷 이야기를 글로 써 냈다. 전쟁의 서사는 대부분 남성의 시점에서 쓰여지는 경우가 많은 만큼 소중한 기록이라 여겨진다.

<잔양>이 바로 흥남 철수 때를 배경으로 쓰여진 소설이다. 철수 전 긴박한 상황이지만 군인들은 자유 시간을 갖게 되자 이 때를 만끽하기 위해 마지막을 불태우듯 노는데 열중한다. 미래가 어떻게 될 지 모르기 때문에 오히려 타락할 수 있는 것일까. 문제는 이 때문에 피해를 보는 여성들이 존재했다는 것이다. 


야 따분하게 방에 박혀 있지 말구 밖으로 나가자. 그래. 나는 선뜻 밖으로 나왔다. 짐승처럼 울부짖으며 아무 데나 쏘다니고 싶었다. … 엄의 눈이 야릇하게 빛났다. 꺼리낌 없이 짐승이 된다는 건 참 유쾌한 일이야. 자넨 그래 의식적으로 그걸 맛보았는가? 의식적이라기보다 오늘 저녁 같은 때는 자연 그렇게 돼 있지 않은가. 평생에 몇 번 없을걸, 이런 챤스는. 죄악이네. 죄악? 짐승이 되고 난 뒤 사람은 더 선량해지는 것이 아닐까? 침묵, 빛나는 눈, 거센 숨결, 나는 이상한 예감이 들어 그를 쳐다보았다. … 가자! 심연 속으로 가라앉아 들어가는 패배와 굴육들, 쓰라림, 나는 어디를 어떻게 달렸는지 모른다. - 잔양, P177


정연희는 보수적 시각에 반대하는 불륜에 대한 문제를 다룬다. 

<정점>에서 중산층 부부가 등장한다. 지영은 프리마 발레리나로 활동하다 심장판막증으로 작품 활동을 강제 중단한 뒤 발레리나를 포기하고 결혼을 선택한다. 하지만 결혼은 생각했던 이상이 아니었고, 그녀는 남편과 자신이 동화될 수 없음을 깨닫는데, 그 때 마침 내연녀가 등장한다. 완벽한 행복 뒤에는 불안한 서사가 존재하는 것일지 모르겠다. 하긴 결혼이란 선택지가 당시로서는 정상 범위에 속하는 것이었을테니. 

결혼 생활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면 나이가 들고, 주름은 늘고 거울을 보는 것이 싫어질 때가 온다. 지영은 거울을 보며 무신경하게 자신의 모습을 보지만 그 속마음이 어떤 것인지 알 것 같아 좀 서글펐다. 


꿈과도 같은 황홀한 젊음이 거울 속에 있다. 그것은 거울 앞에 서 있는 사십이 넘은 여자의 얼굴이 아니라 이십 대의 팽팽한 살갗이다. 차가웠지만 총명한 그리고 사랑스러운 얼굴이 댕그마니 거울 속에 따올라 있었다. … 그 얼굴을 보면서 뜻하지 않았던 희망과도 같은 감동이 살아 움직인다. 무거운 몸에 날개라도 돋아나는 듯한 기분이다. 지영은 손으로 그 얼굴을 쓰다듬는다. 

쓰다듬으며 보니까 그 팽팽하던 얼굴에 갑자기 잔주름이 무수하게 생겼다. - 정점, P248


허영자는 1963년 한국 최초의 여성 시인 동인인 ‘청미회’ 결성에 참여하여 1998년까지 활동을 했다. 그는 서정시를 쓰지만 이성 한 스푼이 들어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녹음>에서는 무당춤을 추는 여성의 모습을 보여주며 억제하고 살아가는 여성들의 광기를 은유적으로 드러낸다. 살면서 단 한번도 미쳐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 여성은 없을 것이다. 돌아버리고 싶은 순간에도 미쳐버리면 안 된다는 주문을 외우며 억지로 이성으로 잠재우던 때가 나도 꽤나 있었던 것 같다. 


후루루 몸을 털곤

천지는 또 한 번

무당의 활옷을 챙겨 입었다


다스려 다스려

반눈이나 붙였던 핏물

치오르는 곤두박질을

어쩌면 좋아,


칠칠 흘러내려

비릿내 도는

화냥기를

참말 어쩌면 좋아,


가슴 불꽃을 온통 내쏟아

짱짱한 목소리의

노래를 부르리라


미쳐나는 춤

시퍼런 칼춤을

전신만신으로

또 춤추리라.

- 녹음, P288~289


박시정은 재미 한인 여성의 삶을 다룬 소설을 주로 썼다. 이는 미 한국어 교사로 근무한 경험, 미 평화봉사단 활동 등 자신의 경험과 무관하지 않다. 

<날개 소리>에서는 한국어와 한국 문화를 가르치는 장 선생이 등장한다. 그는 타자로서 외국에 철저히 생활해야 하는 고립감과 열등감이 노이로제가 되어 정신병을 만드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당시 해외에 나간 많은 한국인은 이방인으로 생활하면서도 잘 해내고 싶다는 부담감에 시달렸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나 가부장적 문화의 배경을 가진 한국과 다른 외국에서 정체성의 혼란을 느끼지 않았을까 싶다.


나는 지금 그들에게 한국의 실상을 비쳐 보이고 있는 중이었다. 이것은 힘든 일이다. 내 옷을 벗어 보이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 같다. 그들은 때로 한국 문화에, 또는 습관에 충격을 받아 훈련 생활을 포기하고 떠나 버린다. 한국적 상황에서 적응할 수 없는 사람은 일찌감치 떠나보내기 위해서 그들이 한국에 가기 전에 한국을 적나라하게 소개하는 중이다. 그러나 나는 싫다. 그들이 극히 일부분, 그 일부분의 껍데기만 보고 한국을 단정해 버리면 그들의 뇌리엔 평생 잿더미 변소가 한국의 인상으로 남아 있을지도 모르겠기 때문이다. … 나는 뭔가 잔뜩 기분이 일그러져서 슬라이드가 새것으로 바뀌기를 기다렸다. - 날개 소리, P30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한국 여성문학 선집 세트 - 전7권 한국 여성문학 선집
여성문학사연구모임 엮음 / 민음사 / 2024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0세기의 시작부터 말까지 한국 여성 작가들의 작품을 엄선했다. 문학 중 소설 이외의 장르도 포함되어 있으며, 논설, 평론, 에세이 등 비문학 장르도 함께 볼 수 있는 것이 장점이다. 국한문 혼용의 글인 경우 원문과 현대어를 함께 실어 두었다. 특정 기준을 따지지 않은 작가 구성이 특히 좋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