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다국화 시대의 유교 특히 강북에서의 유교는 ‘유교의 쇠퇴‘라는 맥락에서 이해되며, 심지어 유교의 역사를 다룬 저작들에서 아예 배제되기까지 한다. 그러나 이 시대는 유교 ‘철학‘이 쇠퇴한 시대일지언정 유교사상더 좁게는 유교적 ‘실천‘이 쇠퇴한 시대라고 볼 수는 없다. 오히려 이 시대는 유교 본래부터 존재론/인식론으로서의 성격보다는 윤리학/정치철학으로서의 성격이 강한 사상가 자신의 타자, 그것도 도교와 불교와 같은 사상의 테두리 자체 내에서의 타자가 아니라 아예 이 테두리 바깥에서 밀려온 절대 타자와 마주침으로써 행하게 된 독특한 역사실험/정치실험의 시대였다고 보아야 한다. - P621

강남이 급격하게 변하기 시작한 것은 강북이 혼란해지면서 많은 사람들이 강남으로밀려들기 시작하면서이다. 이 과정에서 강북의 선진문화는 강남의 지방문화를 압도했고, 강북의 인사들이 점차 강남의 인사들을 아래로 밀어내면서 상층부를 형성하기에 이른다. - P622

도교는 현실의 개혁과 현실로부터의 초월이라는 두 측면을 모두 포함했다. 현실의 개혁이라는 얼굴은 민중봉기의 형태로 나타나곤 했고, 현실로부터의 초월이라는 얼굴은 양생술 여기에서는 불로장생술, 방중술, 연단술, 신선술 등 갖가지 형태들로 구체화된 ‘술‘ 전체를 가리키는 넓은 의미에서의 양생술의 형태로 나타나곤 했다. - P636

강남의 문사- 귀족들은 강북에서의 옛날을 그리워하면서도, 자신-
들의 정치적 지적 정체성을 잃지 않으려 몸부림쳤다. 바로 이런 노력이이 시대를 ‘빛나는 암흑시대‘로 만들어낸 원동력이었다.
유교 지식인들의 정체성은 후한 정부에서 형성된 청류, 명사, 일민 등에뿌리를 두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전통은 혼란의 시대인 위촉오 시대에 오히려 꽃을 피웠으며, 예전보다는 퇴락된 형태이긴 했지만 서진·동진 시대 - P622

에까지도 이어지고 6조 내내 강남의 귀족제 사회를 형성했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이 단지 유교 지식인들 내면의 정체성 유지만으로 이루어진 것은아니다. 오히려 결정적이었던 것은 이들의 기득권을 보호해준 구품중정제가 남북조 시대에 이르기까지 유지되었던 데에 있다.
이렇게 ‘기득권‘과지식인들 자신의 ‘정체성 유지를 위한 노력‘이 선순환을 이루면서 6조의귀족사회는 유지되었다. 그리고 ‘무에 대한 문의 우위‘도 계속 유지되었다. 무관들도 이 귀족사회에 끼지 못하고서는 출세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 P623

도교적 초월은 내재적 초월, 들뢰즈식으로 말해 ‘내재면‘으로의 초월이다. 도교는 생명, 신체, 욕망 등 내재적 차원을 자체로서 긍정한다. 아니 이 내재적 차원을 극한적으로 뚫고 나간다. 방중술에서 잘 볼 수 있듯이, 욕망의 긍정은 결국 욕망의 정화 과정 이외의 것이 아니다. 개체에게 주어진 불길을 남김없이 태움으로써 오히려 불길 전체즉 도의 차원으로 합일되어 들어가는 과정이라 하겠다. 따라서 이 태움은소진이나 고갈의 이미지가 아니라 오히려 보존과 합일의 이미지를 통해서이해되어야 한다. 태워지는 것은 피상적 욕망이고, 그러한 연소에 반비례해서 보존되는 것은 도와 합일해가는 기ㅡ 개별화를 통해 생겨난, 그러나다시 도와 합일해 들어가는 기이다. 이것이 곧 욕망 정화의 과정이며, 이는 곧 삶과 죽음을 즉 존재와 무를 근본적인 무=존재 속으로 합일해 넣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것은 무엇 - ‘임‘으로부터 아무것도 ‘아님‘으로의 이행이지만, 또한 이 아무것도 아님은 모든 것‘이기도 하다. - P638

다국화 시대는 동북아문화가 자연과 새로운 관계를 맺어나간 시대이다. 이런 관계는 당시 사람들의 삶 곳곳에서 볼 수 있거니와, 특히 뛰어난 예술작품들을 통해서 표현되었다. 자연에 대한 애호는 뛰어난 ‘산수문학‘과 ‘산수화‘를 낳은 것이다. - P645

불교가 중국에 전래되는 방식은 북조의 경우와 남조의 경우가 달랐다.
북조의 경우 핵심적인 것은 왕들과 승려들의 관계였다. 왕들은 사분오열된 군사봉건제의 세계를 통일할 수 있는 정신적 힘이 불교에 내포되어 있다고 보았기에 호의적이었고, 승려들은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안전하게 또광범위하게 포교하기 위해 왕들의 후원이 필요했다. - P652

북조의 불교가 왕과의 관계와 기층 민중과의 관계에 초점이 맞추어져있었다면, 남조 불교에서의 중요한 문제는 귀족들과의 관계였다. 왕권이약한 귀족제 사회인 6조에서 승려들은, 강력한 군인-왕들에게 종사하면서 이들을 어떻게 전륜성왕으로 만들까를 고민했던 북조의 승려들과는 달리, 남조 귀족들의 문화와 어떻게 어울릴까를 고민했다. 이는 곧 이들이 남조 왕족들의 불안을 해소해주고, 귀족들의 정체성과 조화를 이루고자 노력해야 했음을 뜻한다. 남조의 도가적 유교 지식인들과 서역에서 건 - P653

너온 또는 중국에서 불교로 개종한 인물들을 이어주는 끈은 ‘청담‘이었다. - P654

동북아세계의 국가들은 지중해세계와 대조적으로 유교, 도교, 불교를 모두 포용코자 했다. 그 결과 국가가 종교에 휘둘리기보다 종교가 국가에 포섭되는 결과를 낳았다. 아울러 세 종교 또한대립보다는 융해의 양상을 띰으로써 지중해세계와는 판이한 과정을 연출하게 된다. 또 결과적으로, ‘국교‘ 개념도 생기지 않았고 한 국가 내에 이원적 권력이 대립하는 양상을 띠지도 않았다. - P667

긴 시간이 흘러간 후 이제 유·불·도 세 종교/사상의 통합의 기운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일신교세계에서는 통합 같은 것은 생각할 수 없다. 각각에서의 신은 최고의 원리이며, 따라서 통합을 위해 그 이상의 원리를 상정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또 그중 어느 한 신으로 통합되는 것도 생각하기 어렵다. 각 일신교가 숭배하는 신이 최고의 신이기에 어느 한신으로 통합되는 경우란 다른 한 문명이 아예 절멸되는 경우에나 가능할것이다. 일신교‘들‘의 세계는 서로 대립하는 세계, 동일률. 모순율 • 배중율이 지배하는 세계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동북아의 유·불·도는 이런 구도와는 다른 구도 위에서 공존했고(不二‘, ‘ㅡ多多‘의 세계), 그렇기 때문에 삼교의 통합은 시도될 수 있었다. - P6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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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곤란한 점은 사람들이 무의식적으로(대문자로 시작하는 Age와 마찬가지로) 대문자로 시작하는 민족주의 (Nationalism)가 존재하는 것처럼 가정해 놓고는 ‘그것‘을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분류하는 데에도 있다. (누구나 나이 (age)가 있지만, 대문자로 시작하는 Age, 즉 ‘시대‘는 단지 분석적 표현일 뿐이라는 데 주의하라.) - P25

인류학적인 정신에서 나는 다음과 같이 민족을 정의할 것을제안한다. 민족은 상상된 정치적 공동체로서, 본성적으로 제한적이며주권을 지닌 것으로 상상된다.
민족은 상상되었다(imagined). 가장 작은 민족의 일원들조차도 같은겨레를 이루는 이들 절대 다수를 알거나 만나보지 못한다. 그들에 대한얘기를 들어볼 일조차도 거의 없으리라. 그럼에도 각자의 가슴속에는그들의 교감(communion)에 대한 심상이 살아 숨쉬고 있다. - P25

민족은 제한적(limited)인 것으로 상상된다. 10억가량의 살아 있는 인간들을 포괄하는 가장 큰 민족조차도 그 경계는 유연할지언정 유한하며, 그 너머에는 다른 민족들이 있다. 어떠한 민족도 스스로 인류라는집합과 경계가 동일하다고 상상하지 않는다.

민족은 주권을 가진(sovereign) 것으로 상상된다. 어떠한 보편적 종교이든 간에 그 가장 독실한 추종자들조차도 그러한 종교들의 살아 있는 다원주의에, 그리고 신앙 각각의 존재론적인 주장들과 그 영역이 뻗어 있는 형태간의 어긋남에 어쩔 도리 없이 맞닥뜨렸던 인류 역사의 단계에서 성숙 - P27

에 이른 민족들은 자유롭기를 꿈꾸었으며, 신의 가호 아래 있을 것이라면 다른 누구를 통하지 않기를 바랐다. 주권 국가는 이러한 자유를 표상하는 도전장이자 휘장이었다.
마지막으로, 민족은 공동체로 상상된다. 각각의 민족 내에서 실제로횡행하고 있을 법한 착취와 불평등과는 상관없이, 민족은 언제나 깊은수평적 동지애의 모습으로 그려진다. - P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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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스웨덴의 무슬림 이민자 공동체에서 벌어진 명예 관련 폭력을 둘러싼논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1999년 6월 펠라 아트로쉬라는 쿠르드 소녀가 살해되고 난 이후다(Englund, 2002: 9). 펠라는 이라크 쿠르드 출신으로 스톡홀름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지역에 살았다. 그녀는 이라크 북부쿠르디스탄(Kurdistan) 지역에서 어머니와 여동생이 보는 가운데 아버지와스웨덴 국적의 삼촌 두 명에게 살해당했다. 처음에는 살인이 일어난 지역에서 사건에 대한 재판이 열렸다. 이 재판에서 그녀의 아버지는 제일 큰죄를 지은 것으로 인정되어 5개월 감옥형을, 스웨덴 국적의 두 삼촌은 집행유예를 언도받았다. 하지만 그들은 스웨덴으로 돌아온 후 펠라의 살인을 스웨덴 국내에서 모의했다는 혐의로 스웨덴 법정에서 두 번째 재판을받아야 했다. 펠라의 여동생이 삼촌들의 살인 모의가 스웨덴에서 이뤄졌다고 증언했기 때문이다. 마침내 2001년 1월 펠라의 두 삼촌은 무기징역을 언도받았고, 재판은 종결되었다. 결과적으로 이는 스웨덴의 국경과 법체계를 벗어나 발생한 첫 번째 명예 관련 살해 사건으로, 스웨덴인들이 자국과 이민자 모국의 젠더 규범을 비교적인 관점에서 바라보게 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 P53

2002년 1월, 또 다른 쿠르드계 스웨덴 여성 파다임 사힌달이 그녀의 아버지에게 살해되었다. 파다임 사건은 무슬림 가족 내 여성 명예 관련 폭력을 둘러싸고 스웨덴 사회에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다. 사건을 요약하자면, 26세파다임은 웁살라라는 지역에서 아버지에게 살해당했다. 그녀의 가족은 터키의 쿠르드인 거주 지역에 살다가 그녀가 일곱 살 때 스웨덴으로 이주했다. 스웨덴에 살면서도 그녀는 쿠르드 여성으로서 가족이 강조하는 권위와 정조 규범을 지키도록 요구받았고, 성인이 된 이후에는 가족이 선택한쿠르드 남성과 결혼하라고 강요받았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결혼 상대를 직접 결정하겠다고 선언했으며, 실제로 한 이란계 스웨덴 남성과 결혼하겠다고 가족에게 밝혔다. 하지만 가족은 그녀의 선택에 반대했고, 이어폭력의 위협을 가하기 시작했다. 파다임은 스웨덴 경찰과 사회 서비스 기관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별다른 도움을 얻지 못했다. 그녀는 스톡홀름에서 북쪽으로 약 80km 떨어진 웁살라 지역에 피신한 후 사회복지사가 되기위해 학업을 이어갔다. 다른 한편으로 파다임은 언론과 방송 인터뷰를 통해 그녀가 겪는 문제와 무슬림 가족 내 명예살인에 대해서 스웨덴 사회에알리기 시작했다. 당시 스웨덴 언론은 그녀의 이야기를 매우 비중 있게 다루며 무슬림 남성 이민자의 폭력성을 집중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했다. - P54

스스로를 ‘교차주의자‘라고 명명한 이들은 이민자 공동체의 문화적 특수성을 완전히 배제한 보편주의적 관점에 문제를 제기했지만, 특히 모나 살린처럼 영향력 있는 여성 정치인이 여성에 대한 폭력을 문화 중심적 입장에서 설명했다는 점에 가장 비판적으로 응수했다.
그들의 지적에 따르면 이민자는 모국 문화를 전수하는 것이 사실이라하더라도 스웨덴 주류 문화의 영향 또한 받는다. 또한 그들은 문화 중심적입장을 지닌 사람들이 스웨덴 문화가 여성에 대한 폭력을 비정상적으로간주하고 그러한 폭력이 결코 발생하지 않는 것처럼 언급하지만, 그것은현실과 다르다고 비판했다(Englund, 2002: 15). - P68

대부분의 유럽 국가가무슬림 이민자 공동체의 여성에 대한 명예 관련 폭력의 원인을 분석할 때이민자 공동체의 젠더 불평등적 문화를 문제시한다. 이러한 문화 중심적관점은 대다수 국가에서 주류와 이민자 공동체 간의 경계 구분을 더욱 명확히 하는 데 기여하며, 다른 한편에서는 이민자 여성의 권리 제한과 이민통제 정책의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스웨덴의 경우 문화, 폭력, 여성 이민자의 권리를 둘러싼 논의에서 문화중심적 관점과 보편적 젠더/가부장적 관점이 대립하는 측면을 보였다. 궁극적으로 두 관점 모두 여성 이민자가 더 이상 폭력의 희생자가 되어서는안 된다는 주장이지만, 폭력의 원인을 스웨덴 주류 공동체와 이민자 공동체의 문화적 차이로 볼지 아니면 스웨덴을 포함한 전 세계 어디에나 존재하는 가부장제로 볼지 그 관점이 나뉘었다. 이러한 논의는 한편으로 스웨덴의 젠더 평등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 제기와 함께, 다른 한편으로는 이민자 공동체의 폭력 문제를 단편적인 문화 차이나 가부장제의 문제로만 봐서는 안 된다는 지적으로도 이어졌다. 결과적으로 스웨덴에서는 어떤 문화적(인종, 민족, 계층, 섹슈얼리티 포함) 배경을 지닌 여성도 남성의 폭력으로부터 동등하게 보호받아야 한다는 원칙이 합의되었으며, 이는 정책 형성에도 반영되고 있다. 스웨덴 정부는 젠더 평등 담론을 이용해 여성 이민자의 권리를 제한하거나 이민자 유입을 통제하는 정책을 전개하지는 않고있다. - P73

파다임 사건을 계기로 스웨덴의 이민자 공동체에서 여성에대한 폭력이 지속적으로 발생하는 이유에 대한 역사학자 케네스 프리젠(Kenneth Fritzen)의 설명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에 따르면 이민자가 새로운 사회(이민 수용국)에서 가장 적응하기 어려워하는 문화는 다름 아닌가족, 아동 돌봄과 양육, 젠더, 섹슈얼리티, 갈등 해결 방식과 관련된 것이다(Englund, 2002:33). 이러한 이슈들은 이민 수용국에서도 여전히 논쟁적으로, 그리고 관용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다루어지기 때문이다. 이런 점 때문에 이민자 개인은 그러한 이슈들을 이해하며 그러한 이슈들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바꾸는 데 가장 적은 노력을 기울이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이는 이민자 공동체 내 여성 문제가 수용국의 여성 문제와 상호 교차해 유지·강화된다는 점과 더불어, 수용국의 여성 문제에 대한 해결 없이는 이민자 공동체 내 여성 문제의 해결도 어렵다는 점에서 중요한 시사점을 던진다. - P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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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4-08-11 15: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거리의화가 님, 화이팅!!
 

『우파니샤드』는 우리를 브라흐만(한정적 브라흐만)으로 인도하는 구절들로 가득 차 있다. 여기에서 핵심은 결국 욕망/욕심을 극복하는 것이다. 우파니샤드의 사유는 욕망을 부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아르타‘와 ‘카마‘를충족시켜야 그 후 ‘다르마‘와 ‘모크샤‘도 이룰 수 있다. 그러나 욕망/욕심 - P512

은 끝내는 극복해야 할 무엇이다. 욕망은 업이 사라지지 않는 한 역시 사라지지 않으며, 업 또한 욕망이 있는 한 계속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윤회란 결국 욕망과 업의 윤회이다. - P513

힌두교는 브라만적 우주관을 다시 세우고 ‘범아일여‘의 사유를 다시 다듬었다. 세계는 주기적 해체와 재창조를 계속한다. 해체는 브라흐만이 세 현현을 거두어들이는 과정이고, 재창조는 다시 세 현현을 시작하는 과정이다. - P524

붓다의 가르침은 ‘사제(四)‘라 불린다. 처음에 붓다 사유의 출발점은 모든 것이 ‘고‘라는 ‘고제(苦諦)‘였다 일체개고. 그리고 삶의 고뇌가 어떤 이치로부터 생겨나는가를 12연기설을 통해 통찰하는 것은 ‘집제(集諦)‘이다 제행무상. 그리고 고뇌로부터의 벗어남을 12연기를 거꾸로 생각해봄으로써 이해하는 것은 ‘멸제(滅)‘이다-제법무아. 마지막으로 멸제를 이룰 수 있는 길로서 제시된 8정도가 ‘도제(道)‘를 이룬다 열반적정 (涅槃寂靜). 붓다의 이 4제는 우파니샤드의 사상과, 그리고동시대에 나란히 등장한 지중해 문명에서의 소크라테스 ·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동북아 문명에서의 노자 · 공자의 가르침과 더불어 고대세계의가장 위대한 가르침들 중 하나로 손꼽힌다. - P541

업과 윤회의 사유에서, 붓다의 사유와 플라톤의 사유는 유사하면서도 대조적이다. 붓다와 플라톤은 공히 이승과 저승을 연속으로 보았다. 윤회와상기설은 삶의 차원과 죽음의 차원에 연속성의 가교를 놓는다는 점을 공유한다. 플라톤에게 이 연속성은 죽음으로 인한 단절을 오히려 해방으로,
"영혼의 감옥으로부터의 탈주로 이해하게 해준다. 그러나 영혼은 자신이지은 업에 입각해 육체의 감옥으로 되돌아와야 한다. 붓다에게도 역시 개아는 업의 상태에 따라 상이한 방식으로 윤회의 고리를 따라 다시 생을 살아야 한다. 그러나 이들에게 이 연속성의 끈은 정확히 반대의 뉘앙스를 띤다. 붓다에게 윤회의 고리는 어떻게든 끊어야 할 끈이며, 이런 해탈은 업을완전히 씻음으로써만 가능하다. 반면 플라톤은 삶은 ‘고‘라는 붓다의 직관을 공유하고 있지 않으며, 이는 그가 곧 윤회를 고통으로만 보지 않음을 함축한다. - P544

아비달마불교는 세계의 근본 실체들을 분석해내고 현상을 그 실체로 환원해 현상에 대한 집착, 특히 자아에 대한 집착을 벗어나고자 했다. 그리고그런 벗어남을 위해 교단을 조직하고 일정한 계(戒). 정(定)·혜(慧)를 닦아열반에 이르는 길을 추구했다. 아비달마불교는 여러모로 에피쿠로스학파 - P556

를 연상시킨다. 또, 세계를 그 존재요소들로 세분하고자 했다는 점에서는니야야 - 바이셰시카 학파에 근접하고, 현상세계를 환(幻)으로 보고 그 너머의 실재를 강조했다는 점에서는 베단타 - 미맘사 학파(특히 샹카라학파)에 근접하기도 한다. 아비달마불교는 세계의 존재론적 층위들(ontologicallayers)의 복합성이나 존재론적 분절(ontological articulation)의 상대성 등에관련해 현대 존재론의 시선으로 보면 단순한 형태의 환원주의로 보인다.
또 불교 자체 내에서 볼 때, 후대 불교 학파들이 비판했듯이 실체주의를 벗어나려 했던 붓다의 본지에 거슬러 실체주의적인 경향으로 흘렀다. 그리고 그들이 실체로 지목한 일부는 다른 학파들의 관점에서는 사유의 산물일 뿐인 것으로 보이기도 했다. 즉, 아비달마불교는 6경 중의 ‘법‘에 속하는 것들을 실재로서 본 것이다. 그러나 아비달마불교는 경험세계를 꼼꼼하게 분석해 ‘무아‘를 집요하게 증명하려 했다는 점에서 역시 불교적 사유의한 핵심 갈래를 형성한다고 할 수 있다. - P557

나가르주나는 우리가 실체화하는 이원성은 착각임을, 진상(tathatā)은 ‘불이(不二)‘의 차원 즉 ‘공‘에 있음을 역설한다. 이는 아비달마불교의 ‘아공법유‘에 대해 ‘아공법공‘을 분명히 하는 생각이며, 사실 바이셰시카 - 니야야학파를 포함해 세계와 자아 그리고 경험에 대한 ‘분별‘을 위주로 하는 모든 학파들에 대한 급진적인 비판이라고 할 수 있다. 나가르주나의 공사상은, 공 자체의 실체화를 포함해 인간이 행하는 모든 분석적 사유의 원초적인 한계를 논파하려 한다. 그에게 이런 논파는 ‘공‘의 진리에 도달하기 위한 것이고, 붓다의 가장 위대한 설법인 연기설이 그리고 그가 제시한 중도의 길이 다름 아닌 ‘공‘임을 증명하려는 것이었다. - P564

세계를 ‘전개‘의 측면에서 본다는 것은 상키야학파를 니야야 - 바이셰시카 학파와 구분해준다. 물론 어떤 사유에서나 그렇듯이 양자에는 모두 구조와 생성의 측면이 존재하지만, 니야야 - 바이셰시카 학파가 구조에 무게중심을 둔다면, 상키야학파는 생성에 무게중심을 둔다. 바이셰시카학파가무수한 원자들이 집적되어 사물들이 생겨가는 인중무과론적 사유를 펼쳤다면, 상키야학파는 단 하나의 원질(原質)인 프라크르티가 계속 전변해 세계를 만드는 인중유과론적 사유를 펼쳤다. - P580

굽타 왕조(4~6세기)는 인도의 고전 문화를 완성했으며, 이 시기에 마하바라타』, 『마법전』, 『바가바드기타』 등이 대성되었다. 그리고 6파 철학이그 온전한 형태로 구축되었다. 산스크리트어가 문화언어로 확고하게 자리를 잡게 되며, 불교학자들도 산스크리트어로 저술 활동을 하기에 이른다.
이런 과정을 통해 힌두교는 반석 위에 서게 되었다. 굽타 왕조는 이미 5세기 말에 사실상 저물게 되고, 이후 10~11세기에 무슬림들이 쳐들어오기전까지 인도 아대륙에는 굽타 왕조에 비길 만한 왕조가 들어서지 못했다.
이 혼란기에 인도에서는 상업이 크게 위축되었고, 상인 계층의 비호를 받던 불교와 자이나교도 그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반면 농촌 중심의보수적 성격의 힌두교는 이 혼란기에도 그 정체성을 계속 유지해나갔다. - P589

특정 교리를 떠나서 힌두교를 핵심적으로 특징짓는 것은 ‘아바타라‘
의 사상이다. 아바타라의 존재론은 개별자들의 동일성이 간단히 타자화됨으로써 세계의 존재론적 분절을 극단적으로 상대화하고 유동화한다. 개별자들이 서로 전변하는 세계에서는 어떤 동일성도 본질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사유는 본질들의 위계를 틀로 하는 지중해세계의 일신교들과 대조적이다. 이슬람교가 인도를 600년간 지배했음에도 종교적 통일을 이루지 못한 것은 두 종교의 이러한 이질성에서 기인한다. 이와 같은 전변의 세계는 개별화의 원리를 무력화함으로써 모든 것을 ‘두루뭉실하게‘ 만들어섞어버리며, 이 때문에 보다 철학적인 힌두 사상가들은 분명한 존재론적분절을 긋기 위해 노력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인도 사유의 근저에서 작동하는 아바타라의 사유. 차라리 이미지는 타자를 그 또한 전변에 불과한 것으로 만들어 자체 내에 녹여버리는 독특한 속성을 유지했다. 바로이런 이유에서 힌두교는 한편으로는 전변의 사유의 대척에 있는 이슬람교같은 절대 타자와는 결코 섞이지 않으면서,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자체내의 다양한 사상들을 모두 흡수해버리는 양극의 방향으로 진행되었다고볼 수 있지 않을까. - P607

일찍 잡아도 4세기 정도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그전에는 왜 불교의 서진(進)이 이루어지지 않았을까? 이는 철학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헬라스문명의 힘이 그만큼 강했기 때문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 독선적인 유대교조차도 그리스화되는 세계였던 지중해세계에, 또 정치적으로 "오리엔트"
쪽을 얕보던 헬레니즘세계에 불교가 쉽게 스며들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동방의 환경은 달랐다. 동방 특히 동북아는 ‘종교‘의 문명이 아니라 ‘정치‘의 문명이었다. 기성의 종교가 불교를 강고하게 막아설 수는 없었다. - P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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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서구의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 출발해 다문화주의 개념을 발전시킨 킴리카에 따르면, 다문화주의란 자유민주주의 사회가 사회 구성원의 개인적 - P21

권리를 보장해주기는 하지만, 그 속에서 소수자의 문화나 삶의 양태가 충분히 보호되지 못한다는 점을 고려해 특수한 집단의 권리 또는 집단에 부여되는 특권을 인정해주는 것이다(Okin, 1999). 그러한 권리는 예컨대 고유언어에 관한 권리, 정치적 대표권, 집단의 매체 운영을 위한 재정권, 과거 불의한 역사에 대한 보상권, 권력의 지역적 분배부터 특정 부분에 대한소수민 자치권까지 이른다(Kymlicka, 1999: 32). - P22

명예살인은 "가족의 명예를 다시 회복하기 위해 가족의 명예를 더럽혔다고 여겨지는 가족 구성원(특히 여성)을 살해하는 행위"로서(Zehet, 2007:2), 가족 구성원에 대한 폭력이라는 점에서는 일종의 가정 폭력으로 볼 수있으며, 가부장적 권력이 여성에 대한 통제권을 시위하고 관철하는 한양상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명예살인과 같은 관행에 대한 비판의 초점은가부장제에 맞춰져야 한다. - P29

본질주의적 문화 개념이 문화를 분화해서 보지 않고 하나의 동질적 단위로 상정할 때, 지배 권력은 자신의 문화를 그 사회 전체의 문화로 제시한다. 지배 권력은 단지 부분에 불과한 자신의 문화가 전체문화인 양 나타나게 하는 권리를 독점한다. 자신의 문화를 사회 전체의 문화로 제시하면서 그에 도전하는 모든 다른 형태의 문화를 무시하고 배제하며 추방해버린다. 또한 가부장적 권력의 문화를 그 사회 전체의 문화로 나타나게 하는 것은 반여성주의적 ·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에 속한다. - P33

우리에게 필요한 문화 개념은 다음과 같은 성격을 지녀야할 것이다.
①실체적으로 존재하는 지리적·민족적 혹은 종족적 경계에 입각해 규정된 본질주의적 문화 개념의 해체② 실체적으로 고정된 것이 아니라 문제의 맥락에 기초해 그때그때 작용하는 권력관계에 따라 새로이 설정되는 유동적 경계 개념의 내포 - P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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