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된 공동체 - 민족주의의 기원과 보급에 대한 고찰
베네딕트 앤더슨 지음, 서지원 옮김 / 길(도서출판)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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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대는 식민지 지배에서 시작하여 해방, 분단, 통일을 겪으며 유독 ‘민족’이라는 개념이 강조되었다. 어릴 적, 학교에서 당연히 해야만 했던 국민 체조 행하기, 국민 교육 헌장 따라하기, 교련 교육, 태극기를 향한 경례 등은 지금 생각하면 너무나 부자연스러운, 강요 받은 세뇌에 가까운 개념이라 느낀다. 

2000년대 들어 탈근대, 탈민족주의 담론이 제기되면서 역사학계는 논쟁이 벌어졌다. 한국 민족주의 논쟁은 한민족의 형성, 권력 담론으로서의 민족주의의 성격, 민족(국가) 중심의 인식과 서술, 국사 해체 등에 대한 성찰을 가져온 바 있다.

그러나 비단 이는 과거에만 그친 개념은 아니다. 현재도 경주는 고대 신라 시기를 컨텐츠화하여 유물, 유적화하여 보존, 박물관화하고, 관광객을 끌어들인다(다른 한편에서는 원전을 이용한 개발 이익을 노린다). 부산은 한국 전쟁 때 외국군이 들어온 통로로  이용되면서 자유주의 평화를 강조한다. 그곳에는 UN평화로라는 이름이 존재하고, UN기념공원과 평화기념관이 있다. 인천은 근대 개항장으로 이용되었고, 한국 전쟁 때는 인천상륙작전이 이루어지면서 많은 근대 관련 박물관들과 자유공원(맥아더 동상) 등이 있다. 


내가 생각하던 ‘민족’이란 개념은 인종과 문화가 결합된 형태였다. 민족의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원어가 무엇인지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국어 학자인 이희승 선생님의 사전 정의에 따르면, 민족이란 “같은 지역에 살고 같은 말을 하며 생활양식, 심리적 습관, 문화, 역사 등을 같이 하는 인간집단. 역사적으로 형성된 것으로서 인간을 생물학적으로 분류한 것”이며 국민은 “동일한 통치권 밑에 결합되어 국가를 조직한 인민”을 뜻한다. 전자를 문화적 개념이라고 한다면, 후자는 정치적 개념이라고 볼 수 있다. 대체적으로 내가 생각했던 개념이 이희승 선생님이 정의한 개념과 비슷한 맥락이라 여겨진다. 그러나 원어는 nation, ethnic group, ethnicity로 다양하게 불린다. 이 중 네이션nation은 같은 공공 문화를 가지면서도 구성원들이 어떤 권리와 의무를 가진 개념이라면 ethnic group, ethnicity로 번역되는 에스니는 같은 공공 문화를 가질 뿐 권리와 의무를 지니지 않았다는 것이라고 여겨진다. 그러니까 nation은 정치적 공동체의 개념이 문화적 공동체의 개념에 더해져 있다고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베네딕트 앤더슨은 이 책에서 ‘민족’은 상상된 개념으로 ‘제한된 범위의 주권을 가진 정치 공동체’라고 소개한다. 그는 민족에도 정치적 공동체 개념을 부여하였다. 민족은 과거 종교나 왕조 국가 공동체가 하던 역할을 근대에 들어서 자본주의와 인쇄 혁명이 준 가능성으로 열린 개념이라고 볼 수 있다. 19세기에 들어서면 프랑스와 아메리카에 민족 국가의 모델(표준)에 만들어진다.  

19세기 중반 이전에 발명되었지만 식민지화된 지구들이 기술 복제의 시대에 입장하면서 형태와 기능을 바꾼 세 가지 권력 제도보다 문법의 윤곽을 더 선명하게 드러내는 것도 드물다. 세 가지 제도란 센서스, 지도, 박물관으로서, 이들은 함께 식민지 국가가 그 지배권을 상상하는 방식-그것이 통치하는 인간들의 본성, 그 영토의 지리학, 그 유래의 정당성-을 밑바닥에서부터 형성했다(P248). 

센서의 허구는 모두가 거기에 들어가 있다는 것, 그리고 모두에게 하나의, 단 하나의 극히 분명한 지리가 있다는 것이다. [1보다 작은] 분수는 있을 수 없다(P251). 

순수한 기호일 뿐, 더 이상 세계를 향한 나침반이 아닌 지도. 이러한 모습으로 무한히 복제 가능한 연쇄에 입장한 지도는 포스터나 공식 문장, 레터헤드, 잡지와 교과서의 표지, 식탁보, 호텔 벽 등에 전이될 수 있는 것이 되었다. 곧바로 알아볼 수 있으며 어디에서든 가시적인 로고 지도는 인민의 상상에 깊이 침투해, 태어나고 있는 반식민지 민족주의들을 위한 강력한 휘장의 형태를 구성했다(P262). 

박물관, 박물관화하는 상상은 심원하게 정치적이다. 고대 사적을 파헤치고 개발하고, 분석하고, 전시하는 과정이 이어졌다(P267). 


베네딕트 엔더슨은 비슷한 시기 서구적 관점에 의한 민족 정의에서, 식민지 입장의 관점을 적용했다는 것이 특징이다. 다만 주로 남아메리카, 동남아시아 지역을 중심으로 서술했기 때문에 글로벌 관점에서 지역의 폭이 좁고 추상적인 개념들이 많아 구체적 사례가 좀 더 필요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특히 동남아시아와 동북아시아의 경험은 다르니 말이다. 동북아시아 중에서도 일본은 제국주의를 시행한 곳으로 다른 곳과는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민족과 민족주의 관련해서 이 책은 늘 언급된다. 때문에 언젠가는 읽어봐야지 했는데 독서 모임에 이 책을 드디어 읽게 되었다. 책을 독해하기란 쉽지 않았다. 첫 술에 배부르랴, 어렵지만 첫 시도였다라고 생각한다. 


이 책을 읽으며 민족은 어떻게 정의되어야 하는지 어렴풋이 정리할 수 있었다. 민족의 범위는 어떻게 정해야 할지, 국가는 국민을 어떤 방식으로 동원하는지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다. 

해마다 광복절에 반일 담론은 그치지를 않는다. 국가, 지방 정부의 기념 사업은 정치적 노선과 입장의 차이에 따라  국민들을 정치적으로 선동한다. 그럴 때마다 국민들은 국가적 정치에 이용되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상상된 네이션은 진짜일까? 가짜일까? 그 시기가 언제인지, 상황에 따라 다르게 상상될 수 있는 것이 아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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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4-08-29 04: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독서 모임에서 이런 책을 보기도 하는군요 거기에서 책을 봐서 여러 가지로 도움이 되겠습니다 다른 것과 생각할 수도 있고... 사람은 숫자가 많아지면 어떻게 하지 못하니 뭔가로 묶기도 하겠습니다 거기에서 큰 게 같은 나라에 사는 민족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이런 걸 깊이 생각해 보지는 않았네요


희선

거리의화가 2024-08-31 15:25   좋아요 0 | URL
독서 모임을 하면 다양한 의견을 들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어요. 제가 생각하지 못했던 관점을 들을 수 있으니 공부에도 도움이 됩니다.
민족주의는 과거에서 끝난 것이 아니라 현재도 끊이지 않고 소환되는데 이를 위해서 여러 모로 이 책을 읽기를 잘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희선 님 감사합니다^^

- 2024-09-02 20: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상상된 네이션이지만 아주아주 강한 담론효과를 가지지요… 마치 젠더 수행처럼… ㅠㅠㅠㅠ 화가님 공부짱짱!!! 엄청 자극 받고 갑니다! 눈건강 허리건강 잘 챙기셔요🤸🏻‍♀️🤸🏻‍♀️ 화이팅!

거리의화가 2024-09-03 08:05   좋아요 1 | URL
‘상상‘이라는 용어가 아주 큰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이겠구나 싶습니다. 상상은 사람의 생각이 더 개입되기 쉬우니까. 구체적인 실체가 없다는 것이 불안과 공포를 조장하기도 하는 것처럼요.
쟝 님도 긴 독서 생활을 위해 건강 잘 챙기시길 바랍니다^^*
 

11장

아메리카 지명 붙이기에서 깜짝 놀랄 만한 것은 ‘뉴‘와 ‘올드‘가 공시적으로, 비어 있는 동질적 시간 안에 공존하는 것으로 이해된다는 점이다. 비스카야는 누에바비스카야와 나란히 있고, 뉴런던은 런던과 나란히 있다. 후계 구도가 아니라 형제 간의 경쟁을 연상케 하는 작명 스타일이다.
이 유례없는 공시적 참신성은 역사적으로 오로지 상당수의 인구 집단이 그들 자신이 다른 상당수의 인구 집단에 평행한 (parallel) 삶을 살고있으며, 결코 만나지는 않을지라도 틀림없이 같은 궤도를 따라 나아가고 있다고 생각할 위치에 있을 때에만 일어난다.  - P280

평행성과 동시성의 감각이 단순히 떠오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막대한 정치적 결과도 낳으려면, 반드시 평행 집단 사이의 거리가 멀고, 둘 중 새로운 쪽은 오래된 쪽에 확고히 종속되어 있는 대규모의 영구 정착지여야 했다.  - P281

유럽에서 새로운 민족주의들은 거의 즉시 그들 자신이 ‘잠에서 깨어난다고 상상하기 시작했는데, 이러한 문구는 아메리카에는 전혀 낯선것이었다. 1805년에 이미 우리가 제5장에서 보았듯이) 젊은 그리스인 민족주의자 아다만티오스 코라이스는 자신에게 공감하는 파리 관중에게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처음으로 민족은 자신의 무지라는 무시무시한광경을 살펴보고 민족을 선조의 영광으로부터 가르는 거리를 눈대중하며 부르르 떤다." 이것은 새로운 시간에서 옛 시간으로의 이행을 드러내는 완벽한 사례이다. - P289


 르낭이 그의 민족이란 무엇인가?』(Qu‘est-ce qu‘une nation?)를 발표했을 때, 그를 사로잡은 것은 다름 아닌잊을 필요성이었다. 일찍이 제1장에서 인용했던 구절을 다시 살펴보자. 

그래서 민족의 본질은 개개인 모두가 공동으로 많은 것을 가지면서, 많은것을 잊었다는 데에 있다. 프랑스 시민이라면 누구나 생바르텔레미와13세기 미디의 학살을 잊었어야 한다.

이 두 문장은 얼핏 보기에 직설적인 것 같다." 그렇지만 잠깐 곱씹어보면 이 문장들이 실제로는 얼마나 야릇한지가 드러난다. 예컨대 르낭이 그의 독자들에게 ‘생바르텔레미‘나 ‘13세기 미디의 학살‘이 무슨 뜻인지 설명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는 점이 눈에 띈다. 그러나 ‘프랑스인‘이라 일컬어지는 이들이 아니면 그 누가 ‘생바르텔레미‘가 1572년 8월 24일 발루아가의 왕 샤를9세와 그의 피렌체인 어머니가 개시한 지독한 위그노 학살을 가리킨다는 것을, 또는 ‘미디의 학살‘이 길게 줄지어선죄 많은 교황들 중 그 죄가 더 깊은 축에 드는 인노켄티우스 3세의부추김 끝에 피레네 산맥과 남부 알프스 산맥 사이의 광활한 지대에 걸 - P295

쳐 저질러진 알비파 교도의 절멸을 가리킨다는 것을 곧바로 이해할까.
르낭은 이 사건들 자체가 300년 전과 600년 전에 일어났는데도 독자들의 머릿속에 ‘기억‘되고 있다고 가정하는 것이 기이하다고 생각하지도않았다. 또한 (잊었다 (doit oublier)가 아니라 ‘이미 잊었어야 한다‘ (doitavoir oublié)라는 단정적인 구문도 놀라움으로 다가온다. 이는 국세법이나 징병법에 사용되는 불길한 어조로, 옛 비극들을 ‘이미 잊었어야 함‘이 현대 시민의 일차적 의무라는 점을 시사한다.  - P296

시조(Originator)가 없기에 민족의 전기는 복음처럼 기나긴 씨뿌림과 생식의 사슬을 통해 시간을 타고 내려가며‘ (down time) 쓸 수 없다. 유일한 대안은 베이징 원인이든, 자바 원인이든, 아서 왕이든, 고고학의 등불이 알맞은 빛을 내려주는 곳이라면 어디든 그쪽을 향해 ‘시간을 타고 올라가는‘ (up time) 형식으로 전기를 빚어내는 것이다.  - P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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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민족'이라는 개념이 적절한가에 대해서 의문점을 갖고 있다. 민족과 인종을 어떻게 구별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다문화 사회에서 다양성과 보편성 사이의 갈등에 대해서도 그렇다. 이럴 때 세 권의 책을 만났다. 


베네딕트 앤더슨은 <상상된 공동체>에서 오늘날 국가나 공동체의 연합 형태를 '민족'이라는 개념 하에 두고 이를 다양한 사람들이 모인 '상상된 공동체'라고 명명한다. 그러나 그것을 굳이 민족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물론 그가 말한 '상상된 공동체'가 인쇄 혁명, 언어, 글로벌 자본주의로 가능해졌다는 이유에는 납득이 간다. 

그러나 국가의 국경선은 그저 물리적으로 구분된 선일 따름 아니던가. 그 안에 존재하는 다양한 사람들을 단일 민족으로 규정할 수 없을 뿐더러 하나의 문화권으로도 규정짓기 어렵다고 생각한다(다문화, 인종적 관점에서도).

오래전부터 시작된 유대인에 대한 포비아, 9.11 이후 확산된 이슬람 포비아는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는 글로벌 사회에서 오히려 확산되고 있는 형국이다. 뿌리 깊은 인종 혐오도 마찬가지다. 가부장제에 의한 여성 문제가 결합하면 문제가 더욱 복잡해진다. 과연 다문화사회에서 보편적 관점이 가능한가. 


인류학적인 정신에서 나는 다음과 같이 민족을 정의할 것을 제안한다. 민족은 상상된 정치적 공동체로서, 본성적으로 제한적이며 주권을 지닌 것으로 상상된다. 민족은 상상되었다(imagined). 가장 작은 민족의 일원들조차도 같은 겨레를 이루는 이들 절대 다수를 알거나 만나보지 못한다. 그들에 대한 얘기를 들어볼 일조차도 거의 없으리라. 그럼에도 각자의 가슴속에는그들의 교감(communion)에 대한 심상이 살아 숨쉬고 있다. 민족은 제한적(limited)인 것으로 상상된다. 10억 가량의 살아 있는 인간들을 포괄하는 가장 큰 민족조차도 그 경계는 유연할지언정 유한하며, 그 너머에는 다른 민족들이 있다. 어떠한 민족도 스스로 인류라는 집합과 경계가 동일하다고 상상하지 않는다. 민족은 주권을 가진(sovereign) 것으로 상상된다. 어떠한 보편적 종교이든 간에 그 가장 독실한 추종자들조차도 그러한 종교들의 살아 있는 다원주의에, 그리고 신앙 각각의 존재론적인 주장들과 그 영역이 뻗어 있는 형태간의 어긋남에 어쩔 도리 없이 맞닥뜨렸던 인류 역사의 단계에서 성숙에 이른 민족들은 자유롭기를 꿈꾸었으며, 신의 가호 아래 있을 것이라면 다른 누구를 통하지 않기를 바랐다. 주권 국가는 이러한 자유를 표상하는 도전장이자 휘장이었다. 마지막으로, 민족은 공동체로 상상된다. 각각의 민족 내에서 실제로 횡행하고 있을 법한 착취와 불평등과는 상관없이, 민족은 언제나 깊은 수평적 동지애의 모습으로 그려진다. - <상상된 공동체>, P25~P28


<나의 타자들>에서는 민족은 주도 문화를 확립하고 패권을 다시 세우려는 시도라고 말한다. 그러면서도 자기 주도권이 흔들리는 상황에서는 그 패권을 위해 싸워야 한다고 말하는데 내 의견도 같다. 정상성에서 내쳐지고 타자화되는 상황에서 자기 밥그릇은 기필코 지켜내야 하지 않겠는가. 식민지 국가의 주권을 찾으려는 다양한 시도, 인권을 보장 받지 못하는 소수자들의 권리 찾기 운동, 제도 하에 묶여 난타당하던 여성들의 목소리 등등.


민족이라는 주도 문화의 확립은 패권을 다시 세우려는 시도다. 그러나 패권이 없다면, 그리고 자기 주도권이 흔들린다면 패권을 위해 먼저 싸워야 한다. 당연함의 상실은 말하자면 ‘정상성’의 상실이기도 하다. 이 말은 ‘정상’이 무엇인지에 대해 더 이상 제시하거나 묘사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정상성’을 정의하는 일이야말로 가장 거대한 사회 권력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이렇게 말해야 한다. 정상성, 당연함은 단지 그 정상성의 형태가 통용되는 집단에 소속된 이들만을 위한 가치다. 다른 이들에게 정상성은 정상이 아니다. 정상성은 배제의 역학이자 제외의 역학이다. - <나의 타자들> 2장 中


물론 그 과정에서 역설적으로 식민지 국가가 제국주의 국가의 카르텔을 답습하는 문제도 발생했다. 기득권은 나라를 빼앗겼을 지언정 자신들의 이권을 기필코 놓지 않았다.  

식민지 인종주의는 왕조적 정당성과 민족적 공동체를 용접하고자 시도했던 ‘제국‘(Empire)이라는 관념의 주요 성분이었다. 그러한 시도는 선천적으로 유전되는 우월성의 원리를 일반화함으로써 이루어졌으며, 그 국내적 지위는 해외 영토의 광대함에 (얼마나 불안정하든)기반을 두고 있었다.

식민지마다 목격되는 것은 드넓은 저택과 미모사와 부겐빌레아가 가득 피어난 정원, 급사들과 남자 하인들, 정원사들, 요리사들, 유모들, 하녀들, 세탁부들, 그리고 무엇보다 말들이라는 조연급의 대부대를 배경에 거느리고 시를 읊는 부르주아 귀족(bourgeois gentilhomme)"이라는, 으스스하게 우스운 활인화(tableau vivant)였다. 젊은 총각이라든가 하는 이런 식으로 살림을 꾸리지 않았던 이들조차 농민 반란 전야의 프랑스 귀족에 맞먹는 화려하게 의심스러운 지위를 누렸다. - <상상된 공동체>, P227


<다문화주의와 페미니즘>은 오늘날 다문화사회에서 벌어지는 갈등이 그저 문화 문제만이 아님을 이야기한다. 인종주의, 여성 차별이 더해져 여성들의 주장을 하나로 모으기 어렵게 하는 요인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세계는 연결되었다고 말하지만 점점 더 유한한 자원에 자본주의에 따른 이익으로 자국중심주의는 강화되고 있다. 특히 미국, 중국, 유럽 등 강대국은 국경을 강화하고 보수주의자들은 결집하는 중이다. 여기에 개혁주의자들의 논리가 분산되어 모여지기 힘든 것도 그 배경이 되지 않나 생각한다. 

여성들은 남성들의 역차별 논리와도 싸워야 하고, 보편주의냐 다문화주의냐에 의한 선택을 두고도 고민해야 하는 지경이다. 예를 들어 히잡 논쟁이 대표적일 것이다. 히잡을 썼다고 강간을 당한 여성이 여성 혐오에 의한 것이냐, 아니면 이슬람 혐오에 의한 것이냐, 아니면 또 다른 이유일 수도 있다. 히잡을 착용한 이유가 선택일 수도 있지만 강요일 수도 있다. 선택에도 여성이 종교적 이유로 선택한 것이냐 아니면 강간을 피하기 위한 선택이냐 등 여러 이유가 있다. 강요한 경우는 문화적이나 종교적 이유, 가부장제에 의한 논리에 의한 경우가 있겠다. 이처럼 히잡을 착용한 것에도 여러 이유가 있는데 이를 다른 문화권 또는 국가에서 어떤 식으로 바라보아야 할 것인가 문제가 생긴다. 생각할수록 뚜렷한 해답은 없고 생각을 회전시키는 어려운 문제인 것 같다.


‘문화적 인종주의‘는 초기 생물학적 인종주의를 대체한 개념으로서 유럽중심의 백인 우월주의를 피부색이 아닌 문화적 차이로 설명한다. 이 용어는 1967년에 프란츠 파농(Frantz Fanon)이 처음으로 사용했는데, 실제 그개념이 확장되어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마틴 바커(Martin Barker)에 의해서라고 전해진다(Barker, 1981). 1970~1980년대 영국적 맥락에서 그는 문화적 차이가 적대적 인간관계를 만들어낸다고 보았고, 따라서 문화적 차이때문에 민족국가가 폐쇄된 공동체를 형성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문화적 인종주의가 하나로 경계 지어진 문화 단일체로서의 민족 건설이라는 개념에 토대를 둔다고 보았다. - <다문화주의와 페미니즘>, P164


추가적으로 인상적이었던 챕터는 일본의 아시아 여성에 대한 인신 매매에 대한 언급이었다. 인신매매 과정은 다음과 같다. 인신매매 모집 브로커는 현지에 젊은 여성들을 상대로 성 산업에서 일한다는 사실을 숨긴 채 사기로 유인하고 모집이 끝나면 서류를 준비해 일본에 입국시킨다. 여성들은 이 때 이미 빚을 지기 시작하여 브로커를 거칠 때마다 수수료가 붙어 거액의 빚을 안게 된다. 국내 성 산업에 뛰어든 여성들이 겪는 고통이 생각날 수밖에 없고 이는 과거 몇 십년전 일본 전쟁에 강제로 동원된 수많은 조선인을 비롯한 아시아 여성들을 떠올리게 한다.

인신매매 이민 여성에 대한 사회 담론은 일본에서 주로 인신매매의 강제성 여부를 둘러싸고 촉발되었다. 하나는 이민 여성의 자기 선택과 자발성을 강조하는 담론이다(일본 정부가 일관되게 하는 주장). 이는 성 산업에 뛰어든 여성을 쉽게 비난하는 논리와 다를 바가 없다. 다른 하나는 인신매매 여성에 대한 남성의 성적 작취에서 기인하는 문제로 보는 젠더적 시각이다. 여기에서도 '성매매로 돈을 버는 일탈한 여성'이라는 전통 여성상 틀에서 본 관점과 자국 사회에서도 가난한 하층의 여성이라는 계급주의적 관점이 존재한다. 

이 중 어떠한 하나의 관점으로는 적절한 타개책이 떠오르지 않는다. 원인이 복합적이기 때문에 결국 해결법도 세심해야 할 터.


질문에 대한 결론? 답을 얻지는 못했다. 여전히 공부가 부족하니 이렇게 읽으면서 정리해둘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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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4-08-22 09: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거리의화가 님 그간 읽었던 책들이 [다문화주의와 페미니즘] 과도 맞닿아 있어서 깊이 있게 읽기가 더 가능했던것 같습니다.
저도 아직 다 읽지는 못했지만 ‘내가 생각했던 답이 답이 아닐 수 있는거구나!‘ 를 매 페이지를 넘기며 깨닫고 있습니다. 답이 하나가 아니라는 것은 앞으로도 답은 하나가 아닐 것이라는 것 아닐까요. 그런 점에서 계속 이야기하고 듣고 세심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저도 곧 따라갈게요!

거리의화가 2024-08-24 17:38   좋아요 0 | URL
다락방 님 <다문화주의와 페미니즘>이 이 달에 제가 다른 이유로 읽어야 했던 책과 연결선상에 있어서 더 폭넓은 시선을 전해주었던 것 같습니다. 덕분에 저도 많은 도움을 받았어요.
수학처럼 정답지가 존재하는 것 이외에 다른 분야의 학문, 현실 세계의 일들은 정답을 요구하기 어려운 경우가 대부분이죠. 갈수록 복잡해지는 현실 사회에서 하나의 정답은 강요이자 폭력일 수도 있으니까요. 그렇지만 정답은 없어도 정의로운 방향으로 모아지면 좋겠다는 바람은 가지게 됩니다. 감사합니다.
 

10장

새로운 인구학적 지형도는 식민지 국가가 그 크기와 기능을 배가해 감에 따라 사회적·제도적뿌리를 깊게 내렸다. 상상된 지도를 길잡이 삼아 국가는 종족인종적계서제, 그러나 언제나 평행한 연쇄라는 관점에서 이해되는 계서제라는원칙 위에 건설하고 있었던 새로운 교육 ·사법·보건·경찰· 이민 관료제를 조직했다. 차등화된 학교 · 법원·진료소. 경찰서·이민국의 그물망을 지나가는 예속 주민들의 흐름은 머지않아 일찍이 국가가 만들어낸 환상에 실재하는 사회적 삶을 부여한 ‘교통의 습관‘ (traffic-habit)을창조해 냈다. - P255

 지상의 범속한 공간만을 다루는 이 지도는 보통, 마치 제도사들의 눈이 일상 생활에서는 풍경을 눈높이에서 수평적으로 보는 데에 익숙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주지의 수직성으로부터 잠재의식적으로영향을 받는 양, 야릇하게 비스듬한 시점이나 시점들의 조합으로 그려진다. 통차이는 언제나 지방적인 것이었던 이러한 길잡이 지도들이 결코 안정적이고 더 넓은 지리적 맥락에 자리 잡고 있지 않았으며, 근대지도의 관습인 조감도란 그들에게 완전히 낯선 것이었음을 지적한다. - P258

나는 우리가 진짜로 보고 있는 것은 자각 없는 식민지 고고학의 직계 후예ㅡ 국가 문장으로서의, 그리고 "당연히 이게 그거지"라는 로고로서의 보로부두르가 아닌가 생각한다. 똑같은 보로부두르의 무한한 연쇄속에서의 그것의 위치에 대해 모두가 알고 있기 때문에, 민족 정체성의기호로서 더더욱 강력한 보로부두르


사고의 ‘날줄‘은 주민집단들. 지역들. 종교들. 언어들. 생산품들. 유적들 등 국가가 실제로 또는 생각 속에서 통제하고 있는 어떤 것에든 끝없이 유연하게 적용될 수 있는, 모든 것을 포함하려는 분류의 모눈이었다. 이 모눈의 효과는 무엇에 대해서든지 저것이 아니라 이것이다. 저기가 아니라 여기에속한다고 언제나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경계가 있고, 한정되어 있으며, 그러므로 원칙적으로 셀 수 있었다. (분류와 하위 분류에 사용되는 센서스의 우스운 네모, ‘기타‘라는 이름이 붙은 네모는 광채 나는 관료적 눈속임으로 현실의 모든 변칙 현상을 은폐했다.) ‘씨줄‘은 연쇄화(serialization)라고 부를 수 있는 것, 세계는 복제 가능한 복수형의 것들로 만들어져 있다는 가정이다.  - P2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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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장

일본은 1952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비준 이후 연합군 점령 통치로부터 벗어나면서 단일민족주의를 바탕으로 구 식민지 출신 이민자를 차별·배제하는 폐쇄적 이민자 정책을 지속해왔다. 그러나 1980년대 중반부터아시아 각국에서 일본 이주가 증가하기 시작, 1990년대에 들어와서는 그증가 폭이 확대되고 있다. - P284

일본으로의 여성 이민 중 결혼 이민을 제외하면 상당수는 ‘흥행(enter-tainment)‘ 자격으로 이주하는 경우다. 일본의 입국관리법 별표 해설에 따르면 ‘흥행‘이란 관람객을 모아 입장료를 받고 연극· 연예 · 연주·스포츠·•
영화 관람물 등을 개최하는 것을 말하며, 바. 카바레 · 클럽에 출연하는 - P286

가수 등의 활동도 포함된다.
흥행 자격의 외국인등록자 수는 1990년대 중반부터 증가해 1996년에 2만 103명을 기록했으며, 2000년대 들어 급증해 2004년에는 최고치인 6만4742명을 기록했다. 아시아 중에서도 필리핀과 태국이 가장 높은 비중을차지한다. 흥행은 일본 남성의 아시아 섹스 관광이 비난받자 1980년대 초에 신설된 재류 자격으로, 단순 취로와 거주 목적의 이민은 받아들이지 않 - P287

는 엄격한 출입국관리법에서 전문 분야로 분류되면서도 쉽게 취득할 수있도록 규정되어, 일본 남성이 해외로 나가는 대신 아시아 여성을 일본으로 유인해온 것이다. - P288

1991년 9월에 일어난 시모다테(下) 사건은 인신매매 아시아 여성 이민자를 둘러싼 다양한 사회 담론이형성되는 계기였다. 현지 브로커로부터 일본의 태국 레스토랑과 공장에서일하며 생활비가 들지 않는다는 조건을 제시받고 일본에 입국한 태국 여성 3명은 이바라키 현(縣) 시모다테의 일본인 부부가 경영하는 한 야간 업소에 인도되었는데, 도항 비용 350만 엔과 매월 가산되는 생활비를성매매로 갚아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들 여성은 강제 성매매와감금·폭력을 견디다 못해 자신들을 관리하는 태국 여성, 속칭 ‘마마‘를 살해하고 도주하기에 이른다. 결국 그들은 강도살인죄로 기소되어 1994년 5 - P293

월 지법에서 징역 10년, 1995년 6월 항소심에서 징역 8년을 언도받았다.
이들 여성은 형기를 마치고 본국으로 귀국했다(下館事件夕3女性支3會, 1993). - P294

인신매매 여성 이민자에 대한 피해자 보호 담론이나 인권 담론은 인신매매의 실태와 구조적 문제, 이민 여성에 대한 인권침해의 심각성을 가시화하고 이슈화하는 데 영향을 미쳤지만, 실제로 일본 정부의 정책대응을 이끌어내지는 못했다. 일본 정부는 이민 여성의 자기 선택과 자발성에 기인한 자기 책임론을 견지했기 때문이다. 인신매매 문제의 개인화 - P297

를 우려하는 피해 담론이나 인권 담론은 인신매매와 관련된 일련의 형사사건에 대해 극한 상황에서의 우발적 정당방위로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일본 사법부에서 정당방위가 인정된 경우는 없었다. - P298

일본의 인신매매 대책 중 가장 취약한 부분이 피해자 보호다. 인신매매방지와 처벌은 법적 근거에 따라 추진되지만 피해자 보호를 의무화한 법제는 없기 때문이다. 피해자 보호는 경찰과 관할 부서의 인신매매 피해자인지를 전제로 하며, 인지된 피해자가 원할 경우 일시 보호를 받을 수 있고, 국제이주기구의 귀국 지원 절차를 밟아 본국으로 귀국하게 된다.
피해자 보호와 관련해서는 출입국관리법상 인신매매 피해자로 인지된 경우에 한해 불법체류자일지라도 강제 퇴거를 면할수 있도록 일정 기간 특별 재류를 허가하는 조항을 두었다. 그러나 보호의 필수 요건으로서 피해자 인지는 명확한 규정이 없어 경찰과관할 부서의 재량에 따라 이루어지고 있으며, 인지 절차 자체가 매우 엄격해 인신매매 피해자로 인지되는 건수가 많지 않다. 피해자로 인지되더라도 일본에 재류할 수 있는 선택권은 없다. 피해자로 인지되면 합법적으로귀국할 수 있고, 인지되지 못하면 불법체류자로 강제송환되어 귀국하는것이다(人身賣買禁止가 4,2009). - P306

또한 인신매매 피해자 보호에서 주체를 행정기관인 여성상담소로 한정하고 민간의 여성의 집이나 여성 단체와 인권 단체를 배제한 것도 문제로지적된다. 오랫동안 피해자를 보호하고 피해자의 인권 보장을 주장해온시민단체의 경험이 인신매매 대책에 반영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성매매방지법 시행에서 성매매 여성의 일시 보호와 선도를 담당해온 여성상담소는 인신매매와 이민 여성에 대한 인식이 약하고 행정편의주의에 입각해접근하는 경향을 나타낸다(渡邊美穗, 2009). - P307

일본 사회에 외국인 이민자가 증가하고 이민자의 정주화가 진행되면서 일본이 강력한 체제 통합을 기조로 이민자를 치안 유지 목적의 관리대상, 노동력으로만 파악하던 데서 나아가 다양한 문화적 배경을 지닌 생활자로 인식하는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즉, 1990년대 중엽 다문화 공생 담론의 등장이다. 다문화 공생이란 다양한 국적과 문화적 배경을 지닌주민이 상호문화적 차이를 인정하고 대등한 관계를 구축하며 더불어 사는것이다(省, 2006). 이러한 일본의 다문화 공생 담론은 문화적 차이에대한 인정만 강조하고 이민자의 문화적 권리나 시민권에 대한 논의는 누락되었다는 특징이 있다. - P298

1952년 제정 이래 50년간 유지되어온 외국인등록법이 2012년 7월에 폐지되었다. 이제 이민자도 세대별로 주민기본대장의 작성 대상이 되어 주민표의 기초 정보를 기반으로 국민건강보험, 개호보험, 국민연금 등사회보장 서비스와 기타 행정 서비스를 받게 되었다(總務省, 2013).
그러나 주민 간의 문화적 차이와 다양성 공존을 지향한다는 다문화 공생 정책과 마찬가지로, 이제 내국인과 이민자의 구별을 없애고 지역공동체의 주민으로서 이민자를 주류 정책에 통합시키겠다는 주민 통합에 이민자의 시민권 논의는 결여되어 있다. 이민자의 문화적 차이와 다양성은 인정하지만 주민 통합의 대전제로서 대등한 관계 구축을 위한 시민권은 여전히 논외인 것이다. 따라서 재일 한국인은 4세대에 걸쳐 일본 사회의 구성원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선거권을 부여받지 못하고 있다. 일본은 주민 통합을 표방하면서도 기타 이민자와 달리 재일 한국인에게 특별영주가드를 발급한다. 이러한 인종주의는 몰성적인 다문화 공생 정책하에서 성을 매개로 여성에게 더욱 억압적으로 작용해왔다. 일본이 생산해온 긍정적인 다문화 공생과 주민 통합이 가능하려면 인신매매 문제를 포함한 이민자 문제에 시민권과 여성의 인권을 근거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 P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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