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가 도착하기 전에 陳俊이 耿에게 이르기를 "劇縣의 오랑캐 군대가강성하니, 우선 營門을 닫고 군사들을 휴식시키면서 上이 오시기를 기다려야합니다." 하였다. 耿이 말하기를 "大駕가 장차 이르실 것이니, 신하들은 마땅히 소를 잡고 술을 걸러 百官을 대접하여야 할 터인데, 도리어 저 오랑캐 - P271

를 君父에게 남겨 드리고자 하는가?" 하고는 마침내 출병하여 크게 싸워서아침부터 저녁까지 계속하여 다시 대파하니, 張의 군사 중에 죽거나 부상당한 자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아서 도랑에 모두 시신이 가득하였다.
耿은 張가 곤궁하여 장차 후퇴하려 할 줄을 알고는 미리 左 右을설치하고 매복하여 기다렸는데, ㅅ定(오후 10시경) 때에 張가 과연 군대를이끌고 떠나가자, 耿은 다시 매복했던 군대를 일으켜 크게 공격해서 추격하여鉅가에 이르니, 8, 90리에 죽은 시체가 서로 이어졌으며,輜重車2천여 대를 거두어 얻었다.
張가 劇으로 돌아간 뒤 며칠 만에 車駕가 臨淄에 이르러서 직접 군사들을 위로하였는데, 여러 신하들이 크게 모였다. 황제가 耿에게 이르기를 "옛날 韓 歷를 격파하여 기반을 닦았는데, 지금 장군이 阿를 공격하여자취를 드러냈으니, 이는 모두 齊나라의 서쪽 지역이다. 功이 충분히 서로 비견할 만하고, 韓信은 이미 항복한 齊나라를 습격하였는데 장군은 홀로 강한敵을 함락시켰으니, 그 功이 韓信보다 더 어렵다. 또 옛날 橫이 酈生(食其)을 삶아 죽였는데, 田橫이 항복하자 髙帝는 衛尉(食其의 아우 商)에게명하여 원수가 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으니, 張가 전에 伏隆을 죽였으나만약 張가 귀순해 온다면 내 마땅히 大司徒(伏隆의 아들 伏湛)에게 명하여그 원한을 풀게 할 것이니, 또 일이 더욱 서로 비슷하다. 장군이 지난번 南陽에 있을 때에 이 큰 계책을 세웠는데 나는 항상 소활하여 부합하기 어렵다고여겼으나 뜻을 가지고 있는 자는 일이 끝내 이루어지는군요" 하였다. - P2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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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에 경조(京兆, 西安)의 지독한 도적인 초사(焦四) 등이 수백 명을 불러 모아 살고 있는 백성들을 겁탈하고 노략질 하며 삼보(三輔, 西安)지역에 해(害)를 끼치자 황제는 상을 내걸고 불러 모집하면서 사형시키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기다렸다. 초사 등은 죄를 받게 해달라고 하면서 스스로 귀부하니 각기에게 금포(錦袍)·은대(銀帶)·의복(衣服)·민전(緡錢)을 하사하고 나란히 발탁하여 용맹군사(龍猛軍使)로 삼았다.

황제는 다시 사자를 파견하여 요(遼)에 가서 화의(和議)를 약속하게 하였지만 〔요에서는〕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사람을 모집하여 바다에 배를 띄워 여진(女眞)과 오실(烏實) 등의 부족에게 뇌물을 주면서 그를 배반하게 하였지만 두 부족은 좇지 않았다.

정축일(28일)에 황제는 촉(蜀)지역에서의 도적 떼가 점차 평정되어가자 조서를 내려서 자기에게 죄를 주었다. 애초에 한림학사인 전약수에게 명령하여 조서의 초안을 잡게 하였고 이미 완성되어 황제에게 올리니 황제는 붓으로 친히 몇 글자를 지워버려서 모든 허물을 끌어안는 것이 깊고 절실하였다. 그것에서 대략 말하였다.
"짐은 마땅하지 않은 사람에게 위임하였고 이치를 밝히는 것도 밝지 아니하여 저들 백성과 가까이 하는 관원(官員)이 은혜와 화합으로 정치를 하지 못하는데 이르게 하였다. 관각(??, 전매)의 관리는 오직 각박하게 깎아 내는 것만을 공로로 생각하여 나의 증민(蒸民, 많은 백성)을 어지럽히게 되자 일어나서 미친 듯이 노략질하였다. 이렇게 덕정(德政)을 잃은 것을 생각해 보니 이리하여 힘써 자신에게 책임 지우는 것이다. 고쳐서 다시 설립하는데, 영원히 전의 폐단을 거울로 삼아 지금부터 이후로는 아마도 경계(警戒)함을 줄 것이다!"

요(遼)의 초토사(招討使)인 한덕위(韓德威, 942~996)가 수만 명의 기병을 인솔하고 진무(振武, 內蒙古 呼和浩特市 大靑山南麓)에서부터 남침하였는데 영안(永安, 四川省)절도사인 절어경(折御卿, 958~995)이 경기(輕騎)를 인솔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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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맞아서 그 무리를 자하차(子河?)에서 크게 패배시키니 그 치중(輜重)을 다 내버리고 숨어 달아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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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리한 것이 보고되자 황제가 좌우에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거란은 가볍게 나왔다가 쉽게 물러가는데, 짐은 항상 변경에 있는 장수들에게 훈계하기를 그들과 더불어 칼끝을 가지고 다투지 말고, 그들이 깊이 들어오는 것을 기다렸다가 군사를 나누어 그들이 돌아가는 것을 요격(邀擊)하면 반드시 남기는 것이 없을 것이다. 지금 과연 나의 말과 같았다."

황제가 말하였다.
"짐의 여러 아들 가운데 누구에게 신기(神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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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맡길 수 있겠는가?"
구준이 말하였다.
"폐하께서 천하를 위하여 군주를 선택하시는데 모의 하는 것이 부인과 환관에 미치는 것은 안 되고 모의하는 것이 가까이 있는 신하에게 미치는 것도 안 되니, 오직 폐하께서는 천하 사람들의 희망에 부응하기 위하여 선택해야 합니다."
황제가 머리를 숙이고 오래 있다가 좌우에 있는 사람들을 가리게 하고 말하였다.
"원간(元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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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가능하겠소?"
대답하여 말하였다.
"아들을 아는 것은 아버지만 한 사람이 없습니다. 성스럽게 생각하신 것이 이미 가(可)하다고 여기시었다면 원컨대 바로 결정하십시오."
황제는 드디어 조원간을 개봉윤으로 삼고 수왕(壽王)으로 고쳐 책봉하였는데, 이에 이르러 세워서 태자로 하였다.

"사람들의 마음이 갑자기 태자에게 쏠리고 있으니, 나를 어느 곳에 두려고 하는 것이요?"
구준이 두 번 절하고 축하하며 말하였다.
"이는 사직(社稷)의 복입니다."
황제가 들어가서 〔이 내용을〕 말하자 후빈(后嬪)과 6궁(宮)이 모두 앞으로 와서 축하하였다. 황제가 다시 나가서 구준을 이끌어서 술을 마셨는데, 아주 만취하고서야 끝냈다.

구준은 일찍이 사건을 상주하면서 절실하고 곧아서 황제는 화가 나서 일어났는데, 구준이 황제의 옷을 붙잡고 다시 앉기를 청하였고 일이 결정되고서 마침내 물러갔다. 황제가 칭찬하며 감탄하여 말하였다.
"이 사람이 정말로 재상이다!"
또 좌우에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짐이 구준을 얻은 것은 마치 당 태종이 위징(魏徵, 580~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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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얻은 것과 같다!"

고려에서 해를 이어가며 요(遼)에 진공(進貢)하였는데, 요주(遼主)는 한림학사인 장간(張幹) 등을 파견하여 왕치(王治, 成宗)를 고려 국왕에 책봉하였으며 왕치는 그 동자(童子) 10명을 파견하여 가서 거란어를 익히게 하였다.

3월 임인일(2일)에 고려 국왕인 왕치(王治)가 요(遼)에 청혼하였는데, 요(遼)에서는 동경유수인 소긍덕(蕭?德, ?~996)의 딸을 그에게 시집보내는 것을 허락하였고, 고려는 그 신하인 한언경(韓彦卿)을 파견하여 요(遼)에 가서 납폐(納幣)하게 하였다. 이미 그리하였는데, 왕치가 죽자 요인(遼人)들은 그 폐백(幣帛)을 돌려주었다.

기축일(26일)에 고려에서 사신을 파견하여 요주(遼主)에게 문안(問安)하였는데, 이때에 요주(遼主)는 탄산(炭山, 河北 獨石口 밖으로 西北쪽 ?河上游)에서 더위를 피하고 있었다. 뒤에는 상례(常例)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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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달 읽은 책들은 다음과 같다. 





이 중 <조선인들의 청일전쟁>과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1권을 읽을 때 특히나 즐거웠다. 


<조선인들의 청일전쟁>은 리뷰, 페이퍼로도 글을 남겼는데 청일전쟁을 주제로 하여 중국, 일본을 비롯한 자료를 바탕으로 다양한 시각으로 뜯어볼 수 있게 하는 것이 장점이었다. 이 책을 읽으며  내가 아는 청일전쟁에 대한 지식이 얼마나 겉핧기 식이었는지 여실히 느꼈다. 청일전쟁이 일어나기 전의 역사적 배경과 시작, 전개, 그리고 결과와 영향에 이르기까지 통합적인 흐름을 엿볼 수 있어 많은 도움이 되었다.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1권은 15~18세기 유럽인의 일상 생활에서의 소비 생활을 엿본다. 일상 생활이라는 친숙한 소재인데다 우리가 현재에도 사용하는 다양한 물품들이 어떤 식으로 시작되고 퍼져나갔는지 확인해볼 수 있었다. 음료인 커피나 차, 소금, 설탕, 후추 등의 식재료를 비롯한 먹거리, 집, 가구, 의복, 사치품 등 다양한 사례를 통해 당시 흥미로운 소비 생활을 확인할 수 있다.


2달 동안 함달달 모임 원서로 <Three Keys>를 읽었다. 원래도 씩씩했던 미아였지만 난관에 빠진 친구 루페와 그의 가족을 위해 적극적으로 뛰어드는 모습이 정말 인상적이었다. 나라면 인종 차별이 일상인 그 곳에서 그런 적극성을 발휘할 수 있었을까. 생각은 할 수 있어도 행동으로 뛰어들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이 책 덕분에 미국의 이민자들에 대한 입장과 미국 사회의 문제점에 대해서 여러 생각을 해볼 수 있었다.



며칠 전 책을 주문했다. 스트레스를 받을 땐 역시 책을 사는 게 답인가. 


<When Stars Are Scattered>는 이 달에 읽기로 한 함달달 원서 책이다. 표지도 넘 좋고 안의 내용도 좋을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 <키메라 - 만주국의 초상>은 장바구니에 계속 담겨 있었던 책이었는데 도서관에 신청해서 빌려보기에는 아까울 것 같아 과감히 질렀다. 만주국에 대한 통합적인 이해를 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현대중국의 탄생>도 마찬가지! 근 몇 달간 장바구니에 담겨 있었고 도서관에는 가격 때문에 받아주지 않는 책이라 그냥 샀다. 




지난 달부터 일이 폭풍처럼 밀려들어 며칠 전부터 야근이다 밤샘이다를 반복하고 있다. 이 달에는 더욱 중요한 일들이 많다. 어쨌든 걱정한다고 달라질 일은 없고 닥친 일을 수습해나가자는 생각을 갖고 있다.





철쭉이 떨어지기 전 아파트 근처에서 찍었다. 


친구분들 모두 5월도 행복하게 지내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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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수 2024-05-06 13: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야근에 밤샘에 저 많은 책과 벽돌책을 어찌 읽으신거죠???
대단하십니다!^^
보기만 해도 뿌듯한 북결산이네요.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1>은 저도 얼른 읽고 싶은 책입니다.
5월도 응원합니다.
건강 챙기시며 행복한 독서생활 하시길요~~

거리의화가 2024-05-09 18:15   좋아요 1 | URL
초반에 읽은 것들이 많습니다. 주말 근무까지는 아직 하지 않아서 그나마 책을 읽고요. 주중에는 진짜 쉽지 않네요^^;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1> 읽기 시작하신 것 같더군요. 즐독하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은하수 님도 건강 잘 챙기시고 행복한 5월 보내세요.

자목련 2024-05-07 10: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5월에는 야근과 밤샘이 없기를 바라요.
건강 잘 챙기시며 초록초록한 기분으로 채워지길!!

거리의화가 2024-05-09 18:16   좋아요 0 | URL
야근은 괜찮은데 밤샘만 없었으면 좋겠어요^^;
자목련 님 행복하고 건강한 나날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2 - 교환의 세계, 제2판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2
페르낭 브로델 지음 / 까치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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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로델은 마르크 블로크가 제안한 ‘장기 지속’이라는 개념을 받아들여 15~18세기에 걸쳐 다양한 공간을 배경에서 일어난 경제 활동을 역사적으로 비교한다. 거기에서 그는 하위에 존재한 일상의 교환 경제와 상위의 고차원의 경제가 구분되어 있으며, 그 사이에 대립이 존재한다 결론을 내린다. 그리고 두 층에는 각기 다른 사람과 경제 활동가들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상위에는 자본주의가 존재하고 하위에는 일상 생활에 존재하는 경제 활동(저자의 표현에 의하면 ‘물질생활’, 非경제)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둘 간의 비율은 물질생활이 훨씬 더 크게 자리하는 구조이다. 


다만 ‘자본주의’라는 명칭에 대해서는 독자들이 의문을 표시할 수도 있음을 이야기한다. 마르크스가 ‘자본론’이라는 책을 쓴 이후, 그러니까 20세기 이후나 되어야 자본주의가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에 대해서 15’~18세기에 진정한 시장 경제의 영역과 반대의 내용을 가진 이 영역에 대해서도 그것을 가리키는 특별한 말로 거부하기 힘든 말이 자본주의’라고 말한다. 논쟁이 있음에도 일부러 피할 필요가 없다고도 이야기한다. 궁금증을 가지면서 이 권을 읽기 시작했다.


1권이 아래 층인 ‘물질문명’과 일상 생활의 소비에 대해서 다루었다면 2권은 상위 층인 자본주의 활동에 대해서 다룬다. 생산과 소비 사이에 교환 활동이 존재한다. 교환 활동은 시장 경제의 초기적 모습이라고 할 수 있겠다. 시장 경제는 늘 균형을 고집하고 어쩌다 균형에서 벗어나더라도 곧 제자리로 되돌아가는 하나의 총체를 이루지만, 동시에 변화와 혁신의 영역이다. 마르크스는 이를 유통권이라고 지칭했는데, 나는 이 표현이 아주 적절하다고 생각한다(P23).


18세기가 되면 상점이 유럽의 도시를 비롯하여 시골 구석까지 생겨난다. 어느 곳에서나 상품 분배가 크게 늘어났고, 상점과 정기시(상설 시장)를 통해 교환이 가속화되었으며, 서비스업이 증가했다. 어느 한 곳에 상점 수가 늘다가 거리를 장악하여 포화되면 다른 곳으로 이주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이 모든 것은 경제의 전반적인 발전으로 이어졌다. 행상 같은 떠돌이 상인이 아니라 고정된 가게에서 상품을 팔기 시작하면서 마을에 인구가 증가하였다. 게다가 물건만이 아니라 연극 등 볼 거리가 덧붙여져 문화를 경험할 수 있는 기회가 늘어났다. 또한 상점들은 고객들을 유치하기 위해 신용 거래(외상)를 기꺼이 감수했다. 상인은 그에게 빚진 사람들과 그가 빚을 지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 불안정한 균형을 이루며 살아간 것이다. 물론 잘못되면 파산으로 가기도 했다.

17세기에는 주식 투자가 등장했다. 이 때도 일부 사람들은 거래소를 “바람장사”로 부르거나 ‘투기’ 등으로 비방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그러나 (실물) 화폐는 교환 기능을 모두 처리하기에는 불충분했다. 이 문제의 해결 방안은 상품-화폐-다른 모든 상품이 반영되며 측정되는 거울과 같은 존재-이상의 것을 만드는 것이다. 그것은 표시-화폐를 의미한다. 유럽의 대도시는 13세기부터 환어음(lettre de change)이 등장했고 공채나 은행 증권이 등장하기도 한다. 이 때문에 거래소는 지폐와 금속화폐 간에 전환 등 중요한 기능을 하는 곳으로 자리했다.


이제 생산 영역에 대해서 다루려면 자본과 자본가, 자본주의의 개념에 대해 정확히 알 필요가 있다. 세 개념은 거의 순서대로 만들어졌다. 

자본은 12-13세기경 등장했는데 이 때는 자금, 상품 스톡, 많은 금액의 돈, 혹은 이자를 가져오는 돈이라는 뜻이었다가 점차 회사나 상인의 화폐 자본을 뜻하게 된다. 이 중 자금(빌려준 돈 중 자본은 포기하고 이자만을 받는 상태에 이른 것)이라는 말이 오랫동안 가장 많이 쓰였다고 한다. 18세기가 되면 자본이라는 단어가 점차 다른 단어를 압도하게 된다. 포르보네는 이미 “생산자본”이라는 말을 썼고 케네는 “모든 자본은 생산수단이다”라고 단언했다. 그리고 일상적인 언어에서도 이 말이 비유적인 이미지로 쓰이고 있었다. 예컨대 볼테르가 죽기 몇 달 전인 1778년 2월에 트롱생 박사가 정확히 진단한 것처럼 “볼테르 씨는 파리에 온 이래 그의 재능이라는 자본을 소진시키면서 살고 있었으며” 친구들은 “그가 그 자본의 소득만으로 살기를 바랐다”고 말하는 식이다. 20년 뒤에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이탈리아에서 전쟁 중일 때 한 러시아 영사는 혁명 프랑스의 예외적인 상황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했다. “프랑스는 ‘자기 자본을 가지고 전쟁을 수행하지만’ 적국들은 단지 ‘그들의 수입만 가지고’ 전쟁을 한다!” 이 명철한 판단 속에서 자본의 뜻은 한 국가의 재산이나 부를 바리킨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P323). 

자본가라는 말은 17세기 중반에 시작된 것으로 “공채”, 동산, 또는 투자할 돈을 가진 사람 등 다양한 의미를 지녔다. 그러다 대체로 돈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것을 사용하여 더욱 많은 돈을 벌려는 사람이라는 부정적 늬앙스를 가진 말로 좁혀졌다. 

자본주의는 20세기 초에 사회주의에 대한 반대어로 정치적 단어로 등장하였다. 탁월한 역사가인 히튼은 이 용어를 단순히 배제시켜버리려고 했다. “모든 -ism이 붙는 말 중에 가장 소란스러운 것은 자본주의(capitalism)이다. 불행하게도 이 말은, 제국주의(imperialism)라는 말이 그렇듯이, 너무 많은 뜻과 정의가 섞여버린 잡탕이 되어서 이제 존경할 만한 학술용어로서는 배제해야 한다.” 뤼시앙 페브르도 이 말이 너무 남용되기 때문에 버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저자는 그렇다고 이 말을 버리는 것은 아깝다고 이야기한다. 자본주의는 그 자체를 둘러싸고 있는 사회적, 경제적인 총체와 비교하면 상이하고 낯설기까지 한 독립된 세계이다. “자본주의”의 정의는 나중에 발전해나올 새로운 자본주의적인 형태와 비교할 뿐 아니라, 앞에서 말한 사회적, 경제적인 총체와 비교해서 이루어져야 한다. “진정한” 자본주의는 19세기에 가서야 등장했다고 주장하면서 이와 같은 지난날의 경제의 이중성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자본주의의 과거 위상이라고 부를 수 있을 이 경제를 분석하는 데에 핵심적으로 중요한 포인트를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P329~331). 


자본주의는 일찍부터 유럽의 도시 뿐 아니라 시골을 포함한 주변 지역에서 시작되었다. 귀족들은 도시 근처의 땅을 사서 자산을 확보했다. 오늘날 돈이 있으면 토지에 투자하려는 사람들의 패턴이 떠오르기도 한다. 땅은 어디 도망가지 않으니 안전한 투자 방법이라고 생각하는 것이겠지. 농민과 영주가 활동하던 유럽에서 자본주의는 새로운 질서였다. 그것에 성공한 영국의 농촌은 다음과 같은 변화를 보였다. 첫째, 토지에 들러붙어 있던 예속성을 털어버리고 국가에 대해서는 농민과 다른 사람들에게서 세금을 거둘 수 있도록 해줌으로써 보상해주었다. 그리고 봉건적인 자격으로 소유하던 재산을 근대적인 의미의 사유재산으로 요구했다. 둘째, 계약을 통해서 토지를 자본주의적 차지농에게 임대하면 이 차지농이 자신의 책임하에 경영한다. 셋째, 프롤레타리아의 면모를 띠는 임금노동자들을 고용한다. 넷째, 수직적 분업이 이루어진다. 지주는 땅을 임차해주고 임대료를 받는다. 임차인은 경영자가 된다. 그리고 임금노동자가 이 분업의 마지막 자리를 차지한다(P390). 그렇지만 이런 대도시 등 몇몇 곳을 빼면 수 세기동안 대부분은 주변 지역이었다 할 수 있다. 주변지역은 영주제적이며 동시에 봉건적 성격으로 후진성을 벗어나지 못했다. 유럽 전체로 따지면 농업자본주의는 아주 소수를 차지했다. 


산업이라는 단어는 노동, 활동, 숙련 등 이전의 뜻과 혼동되어 있었다. 그러다가 기술, 메뉴팩처, 공장이라는 단어와 오랫동안 경쟁하던 끝에 18세기경에 가서 오늘날 우리가 부여하는 뜻을 가지게 되었다. 19세기에 산업은 점차 대규모 산업을 지칭하게 되었다. 이에 저자는 전(前)산업이라는 용어로 앞선 세기의 활동을 지칭한다. 선구산업이란 현재 또는 가까운 과거에 자본과 이익, 노동력을 자신에게 끌어모으는 산업이며, 원칙적으로 그 산업이 크게 발전하면서 주변 영역에 영향을 미치고 발전을 이끌어줄 수 있는(가능성만을 말하고 있음에 주목하라) 산업을 말한다. 과거의 경제는 사실 통합성이 부족해서, 오늘날 저개발 국가들에서처럼 흔히 분해되어 있었다. 그래서 한 분야에서 일어나는 일이 반드시 그 경계를 넘어 이웃 영역에 영향을 미치지는 않는다. 그 결과, 전산업화 시기의 세계는 현대 산업처럼 분야 간에 차이가 생기고 또 대단히 앞선 분야가 있는, 기복이 심한 면모를 가지고있지 않았고 또 가질 수도 없었다는 점을 우선 확인할 수 있다. 게다가 전산업은 상대적으로는 중요성을 가진다고 해도 전체적으로 보면 경제 전체를 자기 자신에게로 이끌어오지 못했다. 실제로 산업혁명기까지는 전산업이 결코 경제성장을 지배하지 못했다. 오히려 불확실한 성장을 보이는 데다가 고장과 급정거를 겪는 경제 전체가 전산업을 지배했다. 전산업이 주춤거리는 발걸음을 옮기고 툭툭 끊어진 곡선을 보이는 것이 그런 이유에서이다. - P430


상업의 근대화로 경제 생활이 발달하면서 시장 규모가 확대되고 교환이 증가하면서 분업이 증가했다. 상인들은 전략적 거점을 마련하고 가능한 빨리 새로운 정보를 모으는 위치에 있었다. 그들은 특권을 이용하여 국가나 기업과 공모하며 원거리 무역(저자는 1등 복권이라고 표현한다)을 행했고 이는 독점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상사는 자본주의와 직접 연관을 가지며, 자본주의의 진화를 이끌었다. 대규모 회사(동인도 회사 등)는 자본과 국가에 동시에 관련되어 있었다. 전 세계적으로 바다가 뚫리며 후추, 향신료, 곡물, 금/은 등을 얻기 위한 무역 경쟁에 뛰어든 유럽은 세계의 계서화에 상층부를 담당하게 된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지만 특권층은 언제나 아주 소수였다. 전체 잉여는 증가하더라도 사회 상층의 소수 인구가 증가하는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자본주의는 그 자신이 유래한 자유경쟁을 완전히 배제해버리지는 않는다. 자본주의는 자유경쟁의 위에서 그리고 옆에서 공존한다. 왜냐하면 15-18세기의 경제-옛날부터 발달해온 몇몇 “중심들”로부터 시장경제와 교환경제의 승리를 통해서 공간을 정복한-역시 레닌이 19세기 말의 “제국주의”를 이야기하면서 제시한 수직적인 구분과 마찬가지로 두 개의 층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상의 혹은 법률상의) 독점과 경쟁이 그것이며, 달리 말하자면 내가 정의하는 바의 자본주의와 발전 중인 시장경제가 그 두개의 층이다(P802). 


베버에게 자본주의는 경제발전이 마침내 찾아서 도달하게 된 약속의 땅이며 진보의 최종적인 만개로 보였다. (내가 잘못 읽은 것이 아니라면) 그는 자본주의를 결코 취약하거나 일시적인 체제로 보지 않았다. 오늘날에는 자본주의의 죽음, 혹은 적어도 일련의 연속적인 격변이 그렇게 불가능해 보이지 않는다.

그것들은 현재 우리의 눈앞에서 진행 중이다. 어쨌든 그것은 "이제 더 이상 역사 발전의 최종 단어로 보이지는 않는다. - P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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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지속은언젠가는 깨진다. 그것은 단번에 전체가 깨지는 방식이 아니라, 서서히 금이가면서 깨지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카스티야의 블랑슈와 성왕 루이 9세의 시대에 파리 주변의 농노(여기에서 농노는 인두세, 결혼세, 상속세의 세 가지 봉건 부담을 지는 사람이다)와 자유농으로 구성된 농민이 영주에 대항하여 자유를 획득한 것과, 농노해방(affranchissement, manumission)이 증가했다는 것-사실 자유민이 농노와 섞여 있으면 언젠가는 그들 자신도 농노가 - P353

될 위험이 있었다 이 결정적인 중요성을 띤다. 그리고 오를리, 쉬시-앙-브리, 부아시 등지에서처럼 농민이 유리한 경제적 배경을 이용하여 돈으로 그들의 봉건부담을 사버렸다는 것 역시 결정적으로 중요한 일이다. 이런 움직임들은 넓게 퍼져갔다. 그와 마찬가지로 중요한 것은 농민의 자유는 마치질병처럼 유럽 일부에 퍼져서 우선 경제활동이 활발한 지역부터 먼저 건드리고 그다음에는 이웃 마을과의 교류에 힘입어 덜 활발한 지역까지 건드리게 되었다는 점이다. - P354

서유럽 세계가 명백한 후진성을 드러내는 곳은-아라곤이라는 예외적인 곳을 빼면 모두 주변(périphérie) 지역이다(그러나 아라곤의 경우도 이베리아라는 복합적인 세계 속에서는 수 세기 동안 주변 지역이었다). 소수에 불과하며 아주 좁은 지역에 한정된 선진지역과 변두리에 몰려있는 후진지역을 나타낸 지도를 상상해보자. 정체해 있거나 아주 느리게 진화하는 지역, 즉 영주제적이며 동시에 봉건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고, 시대에뒤처져 있지만 그러면서도 서서히 변화해가는 그런 지역들은 이 지도상에서특별한 색깔로 칠해져야 할 것이다. 유럽 전체를 보면 농업자본주의가 차지하는 부분은 결국 아주 소수이다. - P406

선구산업이란 현재 또는 가까운 과거에 자본과 이익, 노동력을 자신에게 끌어모으는 산업이며, 원칙적으로 그 산업이 크게 발전하면서 주변 영역에 영향을 미치고 발전을 이끌어줄 수 있는(가능성만을 말하고 있음에 주목하라) 산업을 말한다. 과거의 경제는 사실 통합성이 부족해서, 오늘날 저개발 국가들에서처럼 흔히 분해되어 있었다. 그래서 한 분야에서 일어나는 일이 반드시 그 경계를 넘어 이웃 영역에 영향을미치지는 않는다. 그 결과, 전산업화 시기의 세계는 현대 산업처럼 분야 간에 차이가 생기고 또 대단히 앞선 분야가 있는, 기복이 심한 면모를 가지고있지 않았고 또 가질 수도 없었다는 점을 우선 확인할 수 있다.
게다가 전산업은 상대적으로는 중요성을 가진다고 해도 전체적으로 보면 경제 전체를 자기 자신에게로 이끌어오지 못했다. 실제로 산업혁명기까지는 전산업이 결코 경제성장을 지배하지 못했다. 오히려 불확실한 성장을보이는 데다가 고장과 급정거를 겪는 경제 전체가 전산업을 지배했다. 전산업이 주춤거리는 발걸음을 옮기고 툭툭 끊어진 곡선을 보이는 것이 그런 이유에서이다. - P430

몇 가지 예외가 있지만 자본가들다시 말해서 다양한 활동을 무차별적으로 하던 "대상인들은 생산에 전적으로 참여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결코 대지에 두 발을 굳건히 뿌리 박은 지주가 아니었다. 간혹 지대 수취인인경우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진짜 이익을 얻고 신경을 쓰는 곳은 다른곳이다. 이들은 또 자기 일에 갇혀 있는 수공업 작업장의 주인이나 수송업경영자 같은 사람이 아니었다. 이러한 사업가들 중에 누군가가 배를 한 척소유하든가 혹은 배의 일부 지분을 소유하고 있다면, 또 선대제를 가까이에서 통제했다면, 그것은 참된 그의 모습과 관련을 가질 때에 한정되어서의일이다. 그의 참된 모습이란 시장, 거래소, 상업망, 긴 교환의 연결망 등에서찾을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분배야말로 이익을 내는 참된 분야인 것이다. - P508

우리가 받는 인상(자료가 분산되어 있고 불충분하기 때문에 단지 인상만을이야기할 수밖에 없다)은 언제나 이윤이 높은 경제 분야가 있게 마련이지만그런 분야들이 변화한다는 것이다. 매번 경제 자체가 변화함에 따라 이윤율이 높은 분야도 변화하면, 그때마다 활동적인 자본이 이것들을 좇아가고 이곳에 머물고 번영을 구가한다. 일반적인 법칙으로 알아두어야 할 것은 자본이 그런 영역을 창조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 P593

유럽 어디에서나 편재하는 밀을 보더라도 우리의 관심을 끄는틀에 따라서 다음과 같이 구분된다. 그것은 자체 소비의 대상으로서 물질생활이라는 1층에 머무를 수 있다. 그것은 또 대개 일상적인 곡창지대로부터가까운 도시-이 도시는 주변 농경지대에 대해서 "위치상의 우위를 가진다까지의 교역과 같은 근거리 사이의 규칙적인 교역품이 되기도 한다. 다음으로는 지방 간의 불규칙적인 그리고 때로 투기적인 교역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기근이 심화되고 반복되는 위기의 상황에서 원거리상으로 일어나는 대단히 큰 규모의 활기찬 투기 대상이 되기도 한다. 상업세계 내에서 층이 바뀔 때마다 다른 경제주체들과 다른 경제 행위자들이 개재되는 것이다. - P630

왕정은봉건제의 마그마로부터 나온 것이다. 프랑스 국왕은 영주들 중에 한 명으로서 단지 그들 중에서 뛰어난 인물일 뿐이며, 그들의 언어와 원칙을 함께 나누어 가지면서 동시에 그들을 뛰어넘은 자이다. 이런 식으로 국왕은 그 기원의 영향을 받고 있기 때문에 "귀족은 국왕과 동질적이다." 국왕은 귀족과 싸우지만 그들과의 관계를 끊을 수는 없다. 그는 궁정의 화려한 허식 속에 귀족들을 가두어두지만 그들과 함께 그 역시 갇혀 있는 셈이다. 국왕은 귀족을 근원으로부터 단절시키지만 반대로 귀족에게 상업의 문을 활짝 열어주지도 못한다. 그러면서도 이들을 거두어서 책임을 져야 했다.
도시에 대해서 국왕은 특사와 특권을 많이 부여하면서도 한편으로 세금을 부과하고 소득의 일부를 앗아간다. 그러나 도시로서는 조금씩 형성 중인전국시장으로부터 이익을 보았다. 또 도시귀족과 부르주아지는 상업의 독점권을 누린다. 이것은 작은 일이 아니다. 마지막으로 국왕은 그의 권력의일부를 "상품으로서" 판다. 국왕의 관리들은 도시 출신이다. 도시민은 관직을 샀다가 다시 팔아버리거나 자손에게 물려준다. 관직 매매는 부르주아지의 일부를 봉건화했다. 관직은 마치 예전에 토지 조각들을 봉토로 주는것처럼 국가가 양도하는 공적인 권위의 조각들이다. 관직 매매는 피라미드처럼 위로 쌓아가는 왕정사회를 형성했다. 이 피라미드의 상층에는 성격이모호하지만 어쨌든 중요한 계층인 법복귀족이 자리 잡고 있는데, 이 귀족은국왕의 변덕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아주 느리기는 하지만 핵심적인 행정기관이 발달하고 국가의 필요가 생기면서 만들어졌다. - P763

나 자신의 말로 바꾸어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자본주의다소의정도 차이는 있으나 독점의 성격이 강한 과거와 현재의 자본주의 모두는그 자신이 유래한 (게다가 그것을 먹이로 삼고 있는) 자유경쟁을 완전히 배제해버리지는 않는다. 자본주의는 자유경쟁의 위에서 그리고 옆에서 공존한다." 왜냐하면 15-18세기의 경제 옛날부터 발달해온 몇몇 "중심들"로부터시장경제와 교환경제의 승리를 통해서 공간을 정복한 역시 레닌이 19세기말의 "제국주의"를 이야기하면서 제시한 수직적인 구분과 마찬가지로 두 개의 층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상의 혹은 법률상의) 독점과 경쟁이 그것이며, 달리 말하자면 내가 정의하는 바의 자본주의와 발전 중인 시장경제가그 두 개의 층이다. - P802

베버에게 자본주의는 경제발전이 마침내 찾아서 도달하게 된 약속의 땅이며 진보의 최종적인 만개로 보였다. (내가 잘못 읽은 것이 아니라면) 그는 자본주의를 결코 취약하거나 일시적인 체제로 보지 않았다. 오늘날에는 자본주의의죽음, 혹은 적어도 일련의 연속적인 격변이 그렇게 불가능해 보이지 않는다.
그것들은 현재 우리의 눈앞에서 진행 중이다. 어쨌든 그것은 "이제 더 이상역사발전의 최종 단어로 보이지는 않는다. - P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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