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헌터 - 어느 인류학자의 한국전쟁 유골 추적기
고경태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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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는 없지만 매년 마음 속으로 간절히 죽은 이들의 영면을 비는 날이 있다. 특히 6월 25일이 그렇다. 한국 전쟁이 발발한지 올해로 74주년, 강산이 몇 차례가 변할 만큼 많은 시간이 흘러 이제는 생존자들도 거의 남아 있지 않을 정도가 되었다. 그나마 남아 있는 생존자도 여전히 발설 시 받을지 모를 불이익에 진실은 은폐되었고 대중들에게는 잊혀진 일이 되어가고 있다.


본 헌터란 무엇인가. 뼈에 눈을 번뜩이는, 숨은 뼈를 찾아내는 사냥꾼이다. 그 뼈에 담긴 수수께끼를 푸는 추적꾼이다. 


책 제목이 ‘본 헌터‘인데 표지를 보지 않았을 때만 해도 ’Born Hunter’인 줄 알았다. ‘타고난 사냥꾼‘, 그래서 스릴러나 추적물을 생각했는데 실상은 ’Bone Hunter’로 ‘뼈 사냥꾼’이다. 물론 책의 내용을 보면 스릴러나 추적물로 생각해도 말이 되는 것 같이 느껴지니 작가가 이중적 의도를 가지고 쓴 것은 아닌가 싶기도 했다. 작가는 한겨레 신문에서 베테랑 기자로 오랫동안 일해온 분으로 책도 여러 편 내셨다. 


이 책의 주인공은 1950년 아산 부역 혐의로 희생된 민간인들과 이를 발굴한 방선주 박사다. 


한국 전쟁 중 많은 학살 피해가 있었다고 알려져 있지만 그 실태를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조사하기 시작한 것은 불과 20여년도 되지 않았다. 그 중 충남 아산에서 벌어진 민간인 학살 사건 현장을 특정 짓고 유해의 주인공의 시점에서 당시 과거를 복기한다. 계기가 된 것은 2023년 무려 73년 만에 206개의 온전한 형태의 뼈가 드러난 A4-5 때문이었다. 작가는 이를 바탕으로 발굴 현장에서 만난 유해들 속의 사연과 발굴을 담당한 방선주 박사의 이야기를 엮어 글로 담아 냈다. 


방선주 박사는 아내에게 반해서 만난 지 얼마 안 되어 혼인 신고를 한 뒤 (처가가 있는) 미국으로 이민을 건너 가 체질인류학 연구에 뛰어든다. 역사학, 고고학에 이어 운명처럼 만난 전공이었다고. 방 박사는 어릴 때 몸이 허약해 몸과 마음을 단련시키기 위해 합기도의 매력에 빠져 유단자가 되었지만 폐결핵을 앓아 죽을 고비를 넘겼고 한 때 집이 망해 광주대단지(지금 성남의 ‘모란’)에서 8개월을 어렵게 사는 등 순탄치 않은 세월을 보냈다. 


그의 인맥은 지금 독자의 기준으로 보면 화려하기 그지 없다. 유명한 등장 인물들이 줄줄이 나와 놀라서 절로 혀를 내밀게 된다. 화석 ‘루시’를 발견한 장본인이었던 요한슨과도 친분이 있었다고. 인맥 중 손보기 박사는 저자가 고고학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는 데 중요 역할을 했던 스승인 점에서 특히나 인상 깊었다. 


손보기 박사는 석장리 유적을 발굴한 장본인으로 고고학계의 거물이자 방선주의 스승이었던 사람이다. 윤동주, 최현배 등과 친분 관계가 있었던 만큼 우리말 사랑에 남달랐다고. 고고학계 용어를 한글로 풀어 쓰는 등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게다가 윤동주의 연희전문 동문이어서 후일 연세대에 윤동주 시비를 건립하기도 했다 


아산 부역 혐의 민간인 학살 피해 사건의 주인공은 앞서 말했듯 성재산 A4-5다. 유해 발굴 현장에서 붙여진 식별 번호라고 한다. 나이는 18~22세, 키 165cm 남성으로 추정된다. 1950년 10월 아산 성재산에서 산을 등진 방향으로 쪼그려 앉아 두 손을 삐삐선으로 감긴 채 발견되었다. 이를 비롯해 성재산에서는 A5-4, A17,A18,A19가 나왔다. 


A5-4는 뭉크의 절규가 떠오르는 모습으로 세상에 나온다. 25~~29세로 추정되며 머리뼈에 세 개의 구멍이 뚫려 있는 상태로 발견되었다.


A17, A18, A19는 16~~20세 나이로 교복 단추가 발견된 것으로 짐작컨대 천안농업중학생들로 추정된다. 


성재산에서 10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던 황골 마을에도 희생자들이 있었다. 새지기 사건으로 1950년 추석 기간 3~4일 사이 80여명이 희생되었다. 얼마 전 타계한 홍세화도 가족, 친지들이 희생을 입었다고 한다. 사건 발생 당시 불과 3살의 나이였다고. 살아 남은 아이는 부역자의 가족으로 갖은 고초를 겪었기 때문에 분노가 컸다. 그는 말한다. ‘우리는 이성의 빛을 품고 있는가.’ 이 문장을 읽고 한동안 멈춰 있었다.


설화산 은비녀로 명명되는 유해는 엄마가 아이를 안고 사망한 경우다. 1.4 후퇴 때 부역 혐의 가족 딱지를 붙여 살해된 경우다. 이런 일이 얼마나 많았을까 생각하면 마음이 너무나 무겁다.


이처럼 당시 충남 아산에서는 부역 혐의로 몰려 희생된 많은 민간인들이 있었다. 사건은 1950년 9.28 수복 이후 1951년 1.4 후퇴 때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다. 주민들은 인민군 점령 시기에 부역했다는 혐의가 씌워졌고 당사자는 물론 가족이라는 이유로 온양경찰서 및 각 지서 경찰과 대한청년단, 청년방위대, 향토방위대, 태극동맹 같은 각종 치안 단체가 가담하여 감금되었다가 성재산, 설화산, 황골 새지기 공동묘지 등에 끌려가 집단학살 당했다. 진실화해위원회에 의하면 신원 확인이 된 희생자(77명) 연령 중 10세 미만이 가장 많았다고 한다. 신원 확인이 안 된 희생자는 최소 800명 정도일 것으로 추정한다. 피해자 중 여성과 노인, 갓난아이와 어린아이까지 일가족 전체가 몰살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하니 그 참담함을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이런 일이 가능했던 이유는 지주와 소작인 간의 원한 관계에 의한 계급 갈등이 씨앗이 된 경우도 있지만 나중에 가면 내가 죽지 않기 위해서 남을 죽이는 인간 사냥 형식이 되었다고 보여진다. 


그 혼란스러운 세상 속에 부역자 재판을 맡았던 유병직 판사가 특히 기억에 남는다. 당시 인민 재판은 마구잡이 처형 식으로 이루어졌다. 검사는 사형 구형을 남발했는데 그는 무죄를 선고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그가 가진 판사로서의 철학에 숭고함이 일었다. 

재판이라는 것은 사실과 맥락에 대한 사색으로부터 시작해 사회적 압력에 굴하지 않는 용기와 결단의 과정을 거친다. 그래야 소신을 지킬 수 있다. 물론 부역자 처리는 보통 고민되는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이것이 민족의 근본 문제에 관계되는 일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부역범을 처벌하려고 만든 ‘비상사태하범죄처벌에관한특별조치령’(특조령)의 내용을 들여다보니, 어떤 면에서는 민족을 해치는 어마어마한 법이었다. 단독판사, 단심제에 단시간 내 처리라니.

이런 분이 있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반면 충남 온양 신창 지서 주임이었던 유해진은 가해자의 면모를 제대로 알 수 있는 사람이다. 닥치는 대로 주민들을 잡아들였고 죽였다. 당시 주민들은 그를 보기만 해도 치를 떨었다고 한다. 


김광동 진실화해위원장에 대한 소식은 알고 있었는데 글로 다시 보니 분노가 더 치밀었다. 이런 사상을 가진 사람이 하필 진실화해위원장이 되다니. 이런 식의 논리라면 학살은 불가피한 것이었다는 것을 당연시하는 것 아닌가. 수많은 사람들의 피와 땀을 가볍게 여기는 것이 아닌지 곱씹을수록 화가 난다.

내가 ‘학살’이라 쓰면 당신은 ‘평화’라 읽는다. 2023년 6월 9일의 어느 강연장에서 당신은 나와 같은 이들의 죽음에 관해 이렇게 평했다. "침략자에 맞서서 전쟁 상태를 평화 상태로 만들기 위해 군인과 경찰이 초래시킨 피해였다"고. 새로운 관점이다. 나는 전쟁 상태를 평화적으로 전환하려는 군인과 경찰에 의해 불가피한 피해를 입은 셈이다.


중후반 이후에는 방선주 박사가 참여한 여러 유해 발굴 사건을 다룬다. 그는 1997년부터 2015년까지 홋카이도 현장에서 강제징용 민간인 희생자 발굴을 했고 2000년부터 2006년까지 국군 전사자 발굴을 했다. 2007년부터 2009년까지 진실화해위원회와 함께 한국전쟁기 민간인 희생자 발굴을 했으며 장준하 의문사 진상 규명을 위한 일을 하기도 했다. 2014년부터 2023년까지 각종 시민단체나 진실화해위원회와 함께 민간인 희생자 발굴 현장을 누볐다고. 특히 선감 학원, 세월호 인양 발굴, 안중근 유해 발굴에도 참여하셨다고 한다. 그가 이렇게까지 뼈를 찾아다니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를 이끄는 힘은 역사의식이나 정의감이 아니었다. 사실을 직접 확인하고 싶은 탐구 정신이었다. 군경에 의한 민간인 희생이든, 적 군인과 교전을 치른 국군 전사자든, 유해 발굴 현장에서는 수수께끼를 풀려고 하는 탐정의 태도로 임했다. 매번 발굴을 통해서 무얼 배울 수 있을까 기대하는 젊은 학자처럼 눈을 반짝였다.


선주가 강조하는 개념은 ‘모던 미스’였다. 우리가 사실처럼 알고 있는 어떤 지식이 꾸며진 이야기일 수 있다는 것이다. "어디에서 몇 명이 죽었다더라" 하면 절대 곧이곧대로 믿기 보다는 문헌과 증언을 비롯한 갖가지 기록과 직접 땅을 파보고 유해를 뒤져본 뒤의 결과로 사실 여부를 검증하려고 했다. 모던 미스를 넘어서려는 신조는 그가 작성한 모든 유해 발굴 보고서 맨 끝에 이런 표현으로 적혀 있다. "진실의 반대는 거짓이 아니라 꾸며진 이야기라는 말을 새기며…."


책의 화자가 1인칭 시점이라 타인의 일기를 들여다보는 느낌이 든다. 어떻게 보면 다큐멘터리나 르포 같기도 하다. 책을 읽는 것이 쉽지만은 않았다. 피해자를 생각하면 가슴이 무거워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여전히 그들은 사건을 밝히기를 두려워한다. 윤석열 정부가 들어선 뒤 괜한 불똥이 튀지나 않을까 노심초사하는 마음,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유해와 진실을 파헤치는 사람들의 진심이 와 닿아 마지막 장을 덮을 때쯤에는 뭉클한 감정이 인다. 대한민국의 영토에는 여전히 빛을 보지 못한 수많은 유골이 남아 있다. 모쪼록 정부와 민간의 노력이 계속 이어져서 유해를 찾고 가려진 진실을 찾을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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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4-06-25 12:2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어휴 잘 읽었습니다, 거리의화가 님!

거리의화가 2024-06-25 15:38   좋아요 0 | URL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락방 님^^

은하수 2024-06-25 18: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요... 저도 너무너무 잘 읽었습니다.
한 자, 한 자 정성껏 써 주셔서 제가 다 감사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거리의화가 2024-06-26 07:45   좋아요 0 | URL
공들여 읽어주셔서 저도 감사한 마음입니다^^

희선 2024-06-28 05:4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전쟁이 일어났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을지 다 아는 건 아니군요 민간인 학살이 있기도 했다니, 지금도 전쟁이 일어나는 곳에서는 그런 일이 있겠네요 그런 일을 밝히려고 하는 사람이 있어서 다행이기도 합니다 지금도 땅에 묻히고 잊힌 사람이 많겠습니다


희선

거리의화가 2024-07-01 13:32   좋아요 0 | URL
한국 전쟁에서 이념 간에 충돌로 인한 문제만 생각을 했었는데 생각보다 계급에 의한 문제로 사적인 원한이나 복수에 의해서 갈등이 심했었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정부 측에서 그동안 쉬쉬하거나 했던 부분이 많아서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여전히 밝혀야 할 부분이 많아 보이는데 이런 분들의 노력이 있어서 다행이에요.
 

5장 밑줄

‘국민군‘people‘s army을결성하거나 국민강제징집을 도입하는 것이 광범위하고도 다양한 개인과집단을 위한 정권과 정부를 합법화하는 주요 방법이었다."
이것이 말하고 있는 바는 군대 참여와 시민권 사이에 반드시 직접적인연관성이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사회 안에서 누군가의 권리와 위치를 결정하는 것은 군 참여 여부가 아니라 어떤 능력을, 그리고 시민권력의원천이 될 어떤 대안을 지니고 있는가이다. - P177

여성들은 종종 근대성을 상징하는 존재가 된다.
1917년 케말 아타튀르크Mustafa Kemal Atatürk는 터키 혁명 당시 터키를 근대민족국가로서 구성하려는 목적에서 여성들의 베일 착용을 금지했는데, 당시 중동의 무슬림 근본주의자들이 베일 착용을 중요시해 온 만큼 이 정책은 중요했었다. 여성들의 군 편입도 이와 비슷한 역할에 충실했는데, 그 예로리비아나 니카라과, 에리트레아 Eritrea‘를 들 수 있다. 이러한 조건에서 여성들의 군 편입은 두 가지 메시지를 지닌다. 첫째는 여성이 적어도 상징적으로는 국가 집단체의 동등한 구성원이라는 점이다. 둘째는 아마도 더 중요한 문제일텐데, 국가집단체의 모든 구성원들이 적어도 상징적으로는 군에 편입되어 있다는 점이다. - P179

밸런타인 모가담(Moghadam,2000)은 혁명 운동을 두 종류로 구분했다. 첫째는 여성을 해방과 근대화의상징으로 이용하는 경우로, 여성들에게 군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것을 독려한다. 두번째는 여성을 간직해야 할 민족 문화와 전통의 상징으로 이용하는 경우로, 이때 여성들은 사실상 공식적 참여에서 제외되고 내조 역할의성격도 심하게 통제받는다.
그러므로 군에서의 여성의 신분을 전시/비전시, 전방/후방이라는 이분법의 언저리에서 구성한다는 것은 사회 내에서 여성성과 남성성을 이데올 - P188

로기적으로 구성한 결과에 더 가깝지 전투임무에 여성을 편입시키는 데 있어서 발생하는 객관적 어려움을 근거로 고려한 결정의 반영은 아니다. - P189

인구의 군사화는 사회 전반에 가정폭력을 비롯한 여러 폭력을 일으킨다는 사실이 종종 발견되곤 한다. 군대가 점차 현대의 정교한 산업복합단지와 유사해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명백히 공격과 복종의 원칙을중심으로 조직된다. 군이 사회에서 부각되면, 개인의 정체성과 개인 간의행위 및 젠더 간의 행위의 양식이 시민사회 내부에 확산될 수밖에 없다. - P193

남성을 공격적이고 폭력적이라 보는 본질주의적 구성은 민족주의-군사주의 신화와 잘 맞아 떨어진다. 즉, 남자들은 ‘여성과 아이들‘을 위해 싸운다(Enloe, 1990)는 ‘보호받는 이-보호하는 이‘의 신화(Stiehm, 1989)가 바로 그것이다. - P201

군에서의 젠더 관계에 대한 어떤 논의도 ‘여성‘과 ‘남성‘을 논하는 이러한 일반적 수준에 머물 수는 없다. 국가, 민족, 인종, 계급, 지역, 나이그리고 능력의 구분들은 군과 전쟁에서 특정 개인 및 여성 집단들의 위치설정에 남성들만큼이나 중요하다. 이들의 특정 사회 관계들을 고려하지 않고 여성이나 남성이 이러한 주요한 사회적·정치적 각축장에서 어떤 영향을 받는지를 이해하는 데 그친다면 그것은 부분적이거나 오해가 될것이다. - P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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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사회 - 우리에게 한국전쟁은 무엇이었나?
김동춘 지음 / 돌베개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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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책은 유독 기다림이 긴 경우가 있다. 물론 집에 있는 책 중 상당수가 비치만 된 채 손길을 기다리고 있기에 나의 주절거림이 변명처럼 느껴질 수 있겠다. 어쨌든 이 책도 그런 책 중 하나다. 그래도 이 책은 다른 책과 비교할 때 상대적으로 구입은 얼마 되지 않은 쪽에 속한다. 그렇다해도 오래 전부터 읽어봐야지 생각했던 책임에는 분명하다. 


우연히도 다른 책을 읽으려다 이 책을 이번에야말로 읽어야겠다 결심하게 되었다. 이처럼 독서의 계기는 얼마든지 만들어질 수 있다.

초판이 2000년, 개정판은 2006년이라 최신 자료가 반영되어 있지 않은 점은 감안해야 한다. 그렇다 해도 이 책은 독특한 위치성을 가진다는 생각을 했다. 저자가 밝히듯 기존에 한국 전쟁을 다룬 책은 그 기원과 배경, 전투 과정과 결과, 영향에 주목했다. 그에 반해 이 책은 한국 전쟁이 한국 사회에 미친 영향에 주목한 점이 다르다. 


우리는 한국 전쟁을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과연 그런가. 실상은 6월 25일 전쟁이 시작된 이후 9.28 수복, 1.4 후퇴, 흥남 철수 등 몇몇 전투를 외우고 목록화할 뿐이지 전쟁으로 인해 다치고 죽어간 사람들은 잊고 외면하지 않았던가. 전쟁이 한국 정치, 사회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끼쳤는지 우리는 피부로 느끼지만 사회적으로 언급하고 거론하는 것은 여전히 꺼리지 않나 싶다. ‘동족’이라는 단어가 구태의연하고 옛스럽게 느껴지지만 굳이 언급하자면 한반도 내에서 살던 이들이 색깔로 인해 구분되어 희생된 이들이 많았기에 그 뿌리 깊은 애증이란 쉽사리 떨쳐지지 않는 것이 아닌가 한다. 


이제는 6.25보다는 한국 전쟁이라는 명칭이 더 자주 불리는 것 같지만 여전히 남한 사람들에게는 전쟁의 휴전일보다는 개전일이 더 기억되고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 이는 정치권에서 남한이 전쟁을 도발한 북한과 공산주의를 문제시하고 국군 등을  영웅시하며 정치적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시민들에게 각인시키려는 의도가 숨어 있다고 여긴다. 


전쟁은 정치적 갈등이 폭력으로 극대화되어 발화된 사건이다. 정치는 경제와 사회와 따로 떼어서 생각할 수 없는 만큼 전쟁의 이면에는 경제와 사회가 있다. 한국 전쟁 이전 남북한은 미소군정 체제 경쟁 속에서 이루어짐으로써 안보 위기와 군사 대결을 내부 사회 통제로 이용했다. 한국 전쟁은 남북한이 협상에 의한 통일이 불가능해졌다고 판단한 상태에서 이루어진 선택의 결과물이었다. 이처럼 1부는 전쟁이 곧 정치이며, 경제와 사회를 들여다보는 것이 중요함을 이론적으로 설명해준다.


이 책의 핵심은 2부부터 4부까지의 내용이라 생각한다. 


2부는 전쟁이 시작되고 나서 피난을 앞둔 상황을 보여준다. 이승만을 비롯한 최고위층은 국민을 기만하고 수도를 버렸지만 말단 지배층과 군 장성 및 병사들은 본인의 자리를 지키며 국민을 보호하려 애썼다. 인민군이 수도에 가까워진 만큼 국군 통수권자가 잡혀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이해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국군의 대응이 잘 이루어지고 있으니 국민은 자리를 지킬 것을 종용하며 정작 본인은 달아나는 행태는 결코 용서할 수 없는 일이라 생각한다. 개전 초 군대의 대응이 혼란스러웠던 반면 이승만을 비롯한 권력층, 미군은 북한의 동태를 잘 알고 있었다. 다만 미군은 북한이 쳐들어오기 전 자국민을 일본으로 대피시킨 반면 남한 정부는 그런 준비를 일절 하지 않았다. 이승만과 자유당은 5.10 총선거에서 참패한 뒤 재기를 노리고 있었는데, 전쟁은 불리한 형세를 뒤집을 찬스 중 하나였다.

1차 피난이 정치적인 선택에 의한 것으로 정치적, 계급적 동기에 의해 지배층 중심으로 이루어졌다면 2차 이후 피난은 생존을 위한 피난으로 미군의 무차별 폭격을 피해, 1.4 후퇴 이후 남한 정부에 협력한 것으로 인민군에게 보복 당할 위협 때문에 대규모 민중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3부는 남한과 북한이 본격적으로 전투를 전개하며 점령이 교체되는 동안 벌어진 상황을 다루고 있다. 북한은 남한에서 소작인 등 하위층을 중산층으로 끌어올리고 기존의 지주 계급을 타파시키려는 정책을 펼치려 했다. 그러나 김일성 정부는 인민군은 남한 국가 기구 핵심 구성원인 군인, 검사, 경찰, 우익 단체, 정당 간부 등을 반동 분자로 몰아 처형했다. 남한 정부도 서울 수복 후 서울에 남아 있던 사람들을 사상을 문제 삼아 부역자로 간주해 처형했고, 부역자의 가족과 친지는 1980년대까지 연좌제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이같이 반복되는 정복과 해방의 과정에서 국민은 무척 혼란스러웠을 것 같다. 어느 날은 태극기가, 어느 날은 인공기가 걸려 있는 상황에서 대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말이다. 


4부는 전쟁 시기 벌어진 학살의 참상을 다룬다. 학살은 군경에 의한 작전에 의한 것, 인민 재판과 군의 재판권 행사에 따른 것, 군경이나 준군사 조직에 의한 비공식 작전에 의한 것, 사적인 보복에 의한 것처럼 그 형태가 다양했다.충북 영동 노근리 학살이나 북한의 신천 학살, 미군의 공중 폭격 등에 의한 피해는 대표적인 공식 작전에서 나온 학살이다.

보복으로서의 학살은 단지 이념 간 대립에 의한 것이 아니라 원수가 된 개인과 가족, 씨족 간에 발생하여 그 참담함을 더한다. 특히 이 경우 공식적으로는 사적 테러를 묵인, 방조하는 과정 속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더 안타까운 것 같다. 

학살은 국가 건설 과정 속에서 혁명이라는 미명 아래, 남북 간 내전의 형태로 이루어졌다. 게다가 시간이 더할수록 반공주의의 색깔론이 덧칠해지며 반역자를 처단한다는 오명 하에 심해진 측면이 강하다고 여긴다.


저자는 한국 전쟁을 국가주의 틀에서 벗어나 인간의 생존권과 평화적 관점, 탈냉전 정치 공동체적 전망 속에서 새롭게 접근해야 한다고 말한다. 한국 전쟁은 분단 이후 현대 한국의 국가와 정치, 사회를 구조화한 출발점이 된 사건이었다. 물론 전쟁 이전 1945년부터 5년 가까운 시간 동안 벌어졌던 여러 사건들이 전쟁의 도화선이 된 것은 알려진 사실이다. 그럼에도 지배층에 의한 강요된 관점이 아닌 대중의 목소리와 실체를 통해 전쟁이 재구성되어야 함은 나도 동감하는 바다.

 

대다수의 국민을 피해자로 만들어 버린 한국 전쟁은 국가, 영토, 주민을 그야말로 초토화시켰다. 요즘 남북한의 위험한 줄타기를 보고 있으면 가슴이 철렁할 때가 한 두번이 아닌지라 이 책을 읽는 마음이 무거우면서도 한편으론 의미가 있는 독서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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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과 사의 경계 구성 그 자체가 정치행위다. 고유한 역동성을 지닌 정치권력 관계는 일차적인 사회 관계 안에서뿐만 아니라 보다 비개인적이고 이차적 사회 관계들인 민간 영역과 정치 영역 안에서도 작용한다. - P149

학문 안에서처럼, 정치 안에서도 ‘상아탑‘은 없다.
횡단의 정치는 차별적인 입장에 처한 이들에 의해 이뤄지는 대화를 통해 습득한 지식에 기초하여, 정착과 이동의 기술을 이용하고 나서, 풀뿌리운동의 수준에서든, 국내에서든, 초국가권력의 중심에서든, 모든 정치활동주의에 대한 지침서가 되어야 할 것이다.
시민권은 사회 영역과 정치 영역 모두에 걸쳐 있다. 사회적 조건들을
‘가능하게 해주지 못하는 정치권은 공허할 뿐이다. 동시에 의무가 없는 시민권 권리 역시 사람들을 소극적이고 의존적인 존재로 구성할 수 있다. 시민의 가장 중요한 의무는 그러므로 자신의 정치권을 행사하고 자신의 집단체, 국가, 사회의 궤적을 결정하는 데 참여하는 것이다. - P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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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필생의 연구과제이기도 했다. 사람이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사람의 뼈였다. 선주는 혼잣말처럼 말하곤 했다. "나는 사람을 할 거야." 선생님에게도 말했다. "저는 사람을 하겠습니다."

나는 A4-5다.
왜냐고 묻지 마라. 붙인 사람 마음이다. 처음으로 사람의 조각이 발견된 날, 그 자리에 폴대가 꽂혔다. 나와 동료들이 묻혔던 곳의 라인이 포착된 뒤, 폴대가 있는 곳부터 1미터 단위로 구역이 나뉘었다. A1구역에서 나는 4미터 북쪽으로 떨어진 A4구역에 있었다. 그리고 서쪽에서부터 다시 번호가 매겨졌다. 그렇게 내 앞에 누워 있던 네 명의 동료는 각각 A4-1, A4-2, A4-3, A4-4의 이름이, 나는 맨 끝에 있었으므로 A4-5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나는 특별했다. 73년 전 이 산에 끌려온 인물 중에 가장 먼저 처형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나는 중요한 사람이었다. 놈들에게 미움을 살 짓을 했던 것일까. 놈들은 나를 주동자급이라고 판단했던 것일까. 그래서 방향을 달리해 나만 참호 안에 특별하게 앉혀놓고 죽인 것일까.
내가 쪼그려 앉아 있던 자리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증명하는 물건들이 나왔다. 미국제 M1 소총 탄피 5개가 나왔다. 북한제 모시나강 소총 탄피 2개가 나왔다. 분류가 안 되는 탄피 2개도 나왔다. 조각난 탄창 1개도 나왔다. 나를 분석한 전문가는 무릎과 가슴에 총을 맞은 것 같다고 했다. 허벅지와 정강이가 만나는 연결 부위 위아래에서도 총탄 자국이 많이 발견되었다. 머리뼈에서는 총탄 자국이 나오지 않았다. 나의 몸통은 무차별 난사당했다. 갈비뼈와 등뼈가 파손되었다. 발가락뼈도 끝이 부서졌다. 그럼에도 내 뼈는 206개가 다 나왔다. 부분적으로 파손되었을 뿐이다. 이렇게 온전한 형태로 노출되고 수습된 경우는 전례가 없다고 했다.

손 선생 덕분에 고고학은 우리나라 학문 분야에서 보기 드물게 순우리말 용어를 널리 쓰는 분야가 되었다. 손 선생은 일본어에 대한 거부감이 컸다. 공주 석장리 유적지에 일본 사람이 견학을 오면 손 선생은 영어를 썼다. 식민지 시절에 태어났고 심지어 해방 직전 규슈제국대학에서 유학했으므로 일본어가 통하지 않을 리 없었다. 그럼에도 굳이 영어를 썼다. 일본 학자들이 영어가 짧다고 하면 통역을 구해오라고 했다.
발굴 현장에서 어떤 자세로 임해야 하는지도 손 선생에게 배웠다. 손 선생은 발굴단장이라고, 교수라고 뒷짐을 지지 않았다. 대신 직접 지게를 지고 흙을 퍼 날랐다. 챙이 좁은 모자에 청바지와 장화 그리고 점퍼 차림으로 현장에 나왔다. 영락없는 흙일꾼이었다. 힘든 발굴을 마치고 나면 밤늦게까지 유물 정리를 했다.

승완은 생전에 툭툭 던지듯 말했다. "낫으로 죽였어." 승완과 어울려 지냈던 동네 어른들이 대꾸했다. "OOO이가 쇠뭉치를 휘둘렀지." "몽둥이로 때려 죽였어." "OOO가 아주 잔학했지." "얼마나 잘 먹었으면 이렇게 두드려 패도 안 죽냐는 말까지 하며 죽였다고 했어." 그리고 또 그 이름들을 댔다. "OO이 대한청년단장을 했지. 그 사람 형님 위세가 대단했어." "OO집도 있지. 거기도 형제야. 인민군 때 부역하다 인민군 물러가니까 부역자 잡겠다고 돌변해서 사람들을 죽였어."
죽인 사람들은 죽은 사람들의 집을 차지했다. 신팥집만 그런 게 아니었다. 승우의 사촌동생 승완도 죄인이 되어 집에서 쫓겨났다. 인민위원장을 지냈다 하여, 인민위원회를 위해 밥을 해줬다 하여, 아들이 좌익 운동을 한다고 소문이 났다 하여, 인민군 점령기에 완장을 차고 양반을 모욕했다 하여 죽임을 당하고 재산을 빼앗겼다. 죽거나 쫓겨난 사람 집에 가해자 쪽 사람들이 들어와 살았다.

검사는 사형 구형을 남발했다. 나는 무죄를 선고하는 경우가 많았다. 나는 판사로서 철학이 있다. 재판이라는 것은 사실과 맥락에 대한 사색으로부터 시작해 사회적 압력에 굴하지 않는 용기와 결단의 과정을 거친다. 그래야 소신을 지킬 수 있다. 물론 부역자 처리는 보통 고민되는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이것이 민족의 근본 문제에 관계되는 일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부역범을 처벌하려고 만든 ‘비상사태하범죄처벌에관한특별조치령’(특조령)의 내용을 들여다보니, 어떤 면에서는 민족을 해치는 어마어마한 법이었다. 단독판사, 단심제에 단시간 내 처리라니.

승만에게 한국전쟁은 거대한 청소의 시간이었다. 눈엣가시 국회의원들을 남로당 프락치로 모략해 이 땅에 머물지 못하도록 했다. 프락치 사건이 조작이었다는 것을 밝히지 못하고 1992년 눈을 감아 원통할 뿐이다. 구속의 칼날을 피한 국회의원들은 전시에 ‘사형금지법안私刑禁止法案’ 등을 제안하며 폭주하는 승만의 정부를 견제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상처받고 외롭게 남은 나는 재기할 수 없었다. 1952년부터 1988년까지 선거에 출마했지만 떨어지기만 했다.
아산에서 꿈을 꾸던 고향 사람들도 한동안 재기할 수 없었다. 그때 너무 많이 죽이고, 죽이고, 죽이고, 죽이고, 죽였으니까.

엄마 품에 안겨 있던 창고 풍경은 지옥이었다. 엄마와 가족들은 사람 대접을 받지 못했다. 한쪽에서는 매타작이 끊이지 않았다. 청년단원들이 장작개비로 손목이 묶인 사람들을 때렸다. 신음 소리, 우는 소리가 모든 이들의 공포심을 자극했다. 그때 오빠는 옆 향토방위대 사무실에서 밤을 새면서 이 소리를 들었다고 했다. 나를 안고 있던 엄마도 때렸을까. 엄마는 울면서 기도를 했다. 찬송가를 읊조리기도 했다. 엄마의 간절한 기도는 소용 없었다.

그는 처형자들을 지엠시GMC 트럭으로 이동시킨 청년단원 중 한 명이었다. 그는 말했다. "이 사람들이 무슨 죄인지 아무것도 알지 못했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 다고. "나와 내 가족은 절대 이렇게 손가락질당하면서 죽으면 안 돼. 나는 살아야지. 내 가족은 살아야지"라는 오직 그 생각뿐이었다고.

갓난아기를 업고 일행과 함께 끌려가던 젊은 엄마가 어둠을 틈타 옆 콩밭에 잽싸게 숨었다. 갓난아이가 울면 끝장이었다. 그러나 아기조차 울지 않더라고 했다. 정적, 갓난아이조차 입을 닫게 만든 그 정적은 얼마나 두렵고 공포스러웠을까. 21세기를 사는 현대인들은 상상할 수 없는 공포다. 이 콩밭 이야기는 새지기 사건이다. 그러나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마을 사람 중 아무도 나를 만나주지 않았다. 비협조를 넘어 적대적이었다. 날이 서 있었다. 다른 지역의 참고인들이 새지기에 관해 진술해줘 그나마 다행이었다.

국민은 국가에 요청받은 납세와 병역 등 여러 의무를 수행한다. 그렇다면 국가는 국민에게 무엇을 해줘야 하는가. 전쟁에 나가 죽어서 돌아오지 않은 이가 있다면, 주검이라도 찾아서 가족에게 돌려주려 최선을 다해야 한다. 국가가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면 계약 위반이다. 선주는 이런 과정을 통해 국가가 자기 정체성을 확립하고 이를 내부 구성원에게 증명시켜줄 수 있다고 보았다. 이름 없는 군인의 유해는 대한민국 국가 정체성을 드러내는 표식이었다.

나는 태아다. 세상에 나와 엄마 젖을 먹어보지도, 울음을 터뜨려보지도 못했다.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모른다. 그저 하나의 수정란 세포가 되어 엄마의 자궁 내벽에 착상된 지 36주였다. 자궁을 찢고 세상에 나가기 딱 한 달 전, 나를 배 속에 품었던 엄마는 처형당했다.
태어났다면 맹씨네 일원이었다.

23년간 발굴된 피아 군대의 1만 3121구 중 최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유해가 있다. 바로 승갑이다. 선주는 한 편의 감동적인 드라마였다고 회상한다. 이 드라마는 실제로 영화가 되었다. 승갑에 관해 물어볼 때마다 선주를 비롯해 그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게 되었다.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의 모티브가 되었죠."

내 이름은 세화다.
세계 평화를 소망하며, 아버지가 지어주었다. 세상은 평화랑 정반대였다. ‘세계 평화’는 태어난 지 얼마 안 돼 전쟁의 칼날 위에 섰다. 가스실에 들어갈 준비를 하는 유태인 아이의 처지가 나와 같았다. 내가 갇혔던 황골의 작은 공회당 창고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였다. 손가락 하나로 삶과 죽음이 결정됐다. 그날로부터 73년, 내가 여태껏 살아남아 있다는 사실이 기적이다.
나는 방황했다. 그리고 반항했다. 정해진 코스를 거부했다. 1977년부터 한국민주투쟁위원회(민투) 맹원을 거쳐 남조선민족해방전선(남민전)의 전사가 되었다. 1979년 무역회사인 대봉산업의 해외 지사 근무원으로 독일 뒤셀도르프에 이어 프랑스 파리로 갔고, 얼마 안 돼 남민전 사건이 터졌다. 나는 직장을 잃었다. 한국에 돌아올 수 없었다. 거대한 파도가 내 인생을 덮쳤다. 생존해야 했다. 파리에서 택시 운전대를 잡았다. 나는 생각한다. 이 모든 것은 황골에서 시작되었다.

슈마리나이는 1940년대 우류댐 건설로 조성된 일본 최대의 인공 호수다. 담수 면적이 2373헥타르나 된다. 1938년부터 댐 공사와 함께 철도 공사가 시작되었고 일본 하층 노동자들과 징용된 조선인 노동자들이 동원되었다. 1943년까지 조선인 노동자들의 수가 3000여 명이나 되었다. ‘타코베야’, 즉 문어 항아리라 불리는 합숙소의 열악한 노동조건과 배고픔, 추위, 구타를 견디지 못하고 사망한 조선인 노동자들은 공동묘지에 가지도 못하고 그 바깥에 있는 조릿대(대나무의 일종) 덤불 밑에 아무렇게나 묻혔다.

왜 꼭 그 유해들을 데려와야 하는 것일까. 도노히라는 ‘역사와 목숨에 대한 상상력’을 말하곤 했다. 그것은 도리와 상식에 대한 상상력이었다. 가령 타지에서 온 사람이 죽으면 고향에 연락해주어야 하는 게 도리다. 슈마리나이 우류댐 공사에 자본과 기술을 댔던 왕자제지(오지제지)와 일본 정부는 도리를 다하지 않았다. 심지어 조선인들을 강제 노동이 아닌 정당한 모집과정을 거쳐 고용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선주는 체질인류학자이기 전에 사학도로서 그 말이 어이없다는 이야기를 자주 했다. 제국주의 침탈은 그 자체로 강제 약탈이었다. 그것이 상식이었다.
70년 만의 귀향은 도노히라가 말했던 ‘역사와 목숨에 대한 상상력’을 세상에 전파한 멋진 퍼포먼스였다. 홋카이도의 3인, 즉 도노히라·병호·선주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었다.

인민군이 아산을 점령하자마자 다수의 우익 쪽 사람들이 체포되어 대전형무소로 이송되거나 9월 초 인민위원회 궐기대회에 회부되어 희생됐다. 인민군 후퇴기인 9월 27일엔 신창읍 한티고개에서 유엔군이 인민군에게 의외의 패퇴를 당하면서, 도망가다 되돌아온 좌익 세력에게 죽은 사람들도 적지 않다.
인민군이 물러가고 부역 혐의자와 그 가족을 대상으로 한 보복이 시작되었다. 9월 29일 밤부터 10월 초까지가 1차 시기라면, 10월 중순부터 12월 초까지가 2차 시기였다. 그리고 이듬해 1·4 후퇴 때가 마지막 3차였다. 1·4 후퇴 때는 특히 가족 단위의 처형이 많았다. 이때엔 아산 둔포면을 지나던 피난민 300여 명이 미군 폭격으로 비명횡사하는 일도 있었다.

대통령 정희는 나에게 아산시장 자리를 제안했다. 주변에서는 국회의원에 나가보라는 권유를 했다. 나는 거절했다. 사람들은 내가 좌익 경력이 드러날까 봐 그냥 조용히 살았다고 쑥덕거렸다. 글쎄다.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종손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살아야 한다"라는 선친의 가르침을 따랐다면 이해해줄까. "문중을 위해 봉사하고 헌신하며 살기로 했다"면 납득해줄까. 어느 날 아들 재국과 결혼한 며느리가 나에게 ‘북한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나는 북한도 싫다고 했다. 이론과 현실은 다르다.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북한 사회주의는 다르다.
나는 1993년 1월 17일 서울대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칠순이 되던 1984년부터 심한 천식을 얻어 거동할 수 없었다. 내 인생의 마지막 10년은 기나긴 투병의 나날이었다. 79세였다. 이제 나는 무엇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남았는가. 독립운동가? 사회주의 운동가? 부역 혐의자?

선감학원은 아동과 청소년에 대한 국가 폭력을 상징하는 공간이었다. 1982년까지 40년간 경기도가 운영한 수용시설에서 5000여 명에 이르는 8~19세 아이들이 강제 노역과 폭력에 시달렸다. 수백 명이 병사하거나 탈출하다가 익사했다. 2014년의 평화로운 봄날엔 여객선을 타고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가던 고등학생 250명이 바다에 빠져 죽었다. 세월호는 청소년 보호에 대한 국가의 무책임과 무능을 상징했다. 국가는 선감도에서 악질이었고, 침몰하는 세월호에서는 아예 부재했다. 바다에 빠져 죽어서도 구조되지 못한 이들이 선주를 기다렸다.

내가 ‘학살’이라 쓰면 당신은 ‘평화’라 읽는다. 2023년 6월 9일의 어느 강연장에서 당신은 나와 같은 이들의 죽음에 관해 이렇게 평했다. "침략자에 맞서서 전쟁 상태를 평화 상태로 만들기 위해 군인과 경찰이 초래시킨 피해였다"고. 새로운 관점이다. 나는 전쟁 상태를 평화적으로 전환하려는 군인과 경찰에 의해 불가피한 피해를 입은 셈이다.

나는 선사 시대와 근현대사의 사람과 유적이 묻힌 현장을 추적해 발굴하고 증언해왔다. 매개체는 뼈였다. 나는 체질인류학자다. 나는 본 헌터다.

그를 이끄는 힘은 역사의식이나 정의감이 아니었다. 사실을 직접 확인하고 싶은 탐구 정신이었다. 군경에 의한 민간인 희생이든, 적 군인과 교전을 치른 국군 전사자든, 유해 발굴 현장에서는 수수께끼를 풀려고 하는 탐정의 태도로 임했다. 매번 발굴을 통해서 무얼 배울 수 있을까 기대하는 젊은 학자처럼 눈을 반짝였다.

선주가 강조하는 개념은 ‘모던 미스’였다. 우리가 사실처럼 알고 있는 어떤 지식이 꾸며진 이야기일 수 있다는 것이다. "어디에서 몇 명이 죽었다더라" 하면 절대 곧이곧대로 믿기 보다는 문헌과 증언을 비롯한 갖가지 기록과 직접 땅을 파보고 유해를 뒤져본 뒤의 결과로 사실 여부를 검증하려고 했다. 모던 미스를 넘어서려는 신조는 그가 작성한 모든 유해 발굴 보고서 맨 끝에 이런 표현으로 적혀 있다. "진실의 반대는 거짓이 아니라 꾸며진 이야기라는 말을 새기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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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4-06-23 19: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이 책을 시작하셨군요! 그렇네요. 거리의화가 님이라면 이 책의 존재를 아는 이상 반드시 읽어보고 싶으셨을 것 같아요. 다 읽고 리뷰 적어주세요!!

거리의화가 2024-06-24 16:51   좋아요 0 | URL
완독은 어제 다 했고 리뷰는 조금씩 쓰는 중이에요. 말씀하신 대로 이 책은 꼭 읽어보고 싶었는데 이번에 기회가 닿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