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장

니체에게 영원회귀는 스토아적 영겁회귀가아니라 바로 차이생성, 보다 구체적으로는 힘에의 의지의 영원회귀이다. 모든 것은 힘에의 의지라는, 삶의 가장 본질적인 성격으로 되돌아온다.36)그렇다면 힘에의 의지에로의 영원회귀란 무엇인가? 그것은 곧 추상적으로는 차이생성으로의 회귀이며, 생명/삶의 구체적 맥락에서는 자기 극복을 요청하는 상황으로의 끝없는 회귀이다. - P113

베르그송이 인식론에서의 직관을 보완해서 윤리학/도덕철학의 원리로 제시하는 능력은 곧 ‘창조적 정서(émotion)‘이다.
베르그송에게 창조적 정서는 과학, 예술, 철학 등으로 구체화될 빼어난 직관, 영감으로서의창조적 정서이다. 그것은 아직 악보로 그려지지 않았지만 작곡가의 마음속에서 장대하게 울려 퍼지는 잠재적 선율과도 같은 것이다. 그리고 이 창조적 정서의 가장 위대한 경지는 바로 살신성인(殺身成仁)해서 윤리의 새로운경지를 여는 행위의 영웅들에게서 발견된다. 이러한 창조적 정서는 지능이하의 정서가 아니라 지능 이상의 정서이다. "새로운 도덕 이전에, 새로운 형이상학 이전에 정서가 먼저 있고, 이 정서가 의지의 편에서는 약동으로 지능의 편에서는 풀어설명하는 표상으로 이어진다." (MR, 46) 따라서 베르그송에서의 열린 도덕의 근저에는 ‘생명의 약동‘이, 새로운 뉘앙스를 띠게 되는 약동이 존재한다. - P130

의미란 바로 명제에 있어 표현된 것 즉 사건이다. 의미는 말과 사물/사태의 지시관계, 주체와 그 현시물 사이의 현시관계, 그리고 기호들의 변별적차이들의 구조로 해소되지 않는다. 의미의 네 번째 차원, 사실상 이 세 의미론이 바로 그것을 둘러싸고서 성립하는 중심 지점이 존재한다. 의미란 정확히 주체와 사물과 기호 삼자의 한가운데에 존재하며, 주체와 대상 사이에서 발생해서 기호로 표현된다. 의미란 바로 사건에 다름 아니다." - P145

이접적 종합에서는 "일련의 술어들이 한 사물로부터 그 개념적 동일성에따라 배제되는 대신, 각각의 ‘사물‘이 그것이 통과하는 무한한 술어들에로스스로를 개방하며, 동시에 그 중심을 즉 개념으로서 또는 자아로서의 그동일성을 상실한다." 이것은 곧 술어들의 배제(철수는 건축가이다. 따라서 비건축가가 아니다.)가 사건들 사이의 소통(철수는 건축을 하거나 또는 음악을 하거나 또는)으로 대체됨을 뜻한다.(계열 24) 이는 배제적 이점이 아니라 종합적 이점의 논리이다. 이렇게 발산하는 계열들을 가로지르면서 그것들 사이의 거리를 긍정하는 것, 사건들 사이의 소통을 도래시키는 것은 곧 스스로를 우발점으로 만드는 것을 뜻한다. 이것은 곧 (내재적 가능세계론에서) 여러 가능세계들을 가로지르는 것을 뜻한다. - P161

다자들은 부분집합들일 뿐 원소들은 아니다. 그리고 또한 상황의 부분이 아니라 오로지 원소이기만 한, 즉 현시되기만 할 뿐 재현시되지는 않는 항들도 존재한다. 이 세 종류의 항들을 바디우는 ‘정규적인‘ 것들, ‘돌출적인‘ 것들, ‘특이한‘ 것들이라 부른다. ① 현시되는 동시에 재현시되기도 하는 항들은 ‘정규적인(normal)‘ 것들이다. ② 재현시될 뿐 현시되지는 않는 항들은 ‘돌출(excroissance)‘을 형성한다. 돌출은 상황에 포함되지만 그것에 속할 수는 없다. ③ 현시되지만 재현시되지는 않는 항들은 ‘특이한(singulier)‘ 것들이다. 특이한 것들은 상황에 속하지만 그것에 포함될 수는 없다. 상황상태는 이것을 그것의 일자로서 인식할 수가 없다. 특이한 것들은 사건, 진리, 주체의 성립에 핵심적이다. - P173

주체는 명명행위를 통해서 진리를 지식의 차원으로 전환시키며, 그로써지식의 차원을 변화시킨다. ‘당‘, ‘혁명‘, ‘정치‘ 같은 레닌의 개념들, ‘집합‘, ‘서수‘, ‘기수‘ 같은 칸토어의 개념들이 그러하다. 이런 개념들이 첨가됨으로써 지식의 체계는 바뀌게 되는 것이다. 이런 명명행위는 당연히 기성 지식의저항에 부딪치게 되며, 이때 주체는 진리의 전미래 시제를 끈질기게 지탱해나가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주체는 항상 전미래에서의 의미를 표명한다.").
그래서 주체의 본질은 바로 ‘진리사건‘에의 충실성에 있다고 할 수 있다. - P189

현대 합리주의는 과학적 인식에 구성적인 측면이 가미된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구성주의가 인식에서의 존재론적 무게중심에서 너무 멀어져 과학적 인식을 과하게 주관적인 것으로, 사회적-역사적인 것으로 "폄하"하는 것을거부한다. - P219

아울러 현대 합리주의는 보다 근본적인 존재론적 함축을 띤다. 이는 곧실재가 플라톤적 형상들로 되어 있다는 가설을 더 이상 확신하지 않는다는점이다. 비판적 합리주의에서의 ‘비판적‘은 명시적이지는 않지만 암암리에생성존재론을 함축한다. 세계의 근원은 생성인 것이다. 당대에 베르그송과 더불어 프랑스 철학의 두 축(비합리주의와 합리주의)을 형성했던 브렁슈비크에게 구키 슈조는 그와 베르그송의 관계를 대립적으로 언급했다. 그러나 브렁슈비크는 구키에게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베르그송의 제자입니다." 이는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겠지만, 지금의 맥락에서 볼 때 현대의 합리주의, 비판적 합리주의는 세계에 대한 베르그송적 생성존재론을 전제하고서, 그러나 그 생성의 수학적 결을 찾아가는 것임을 뜻했다고 볼 수 있다. - P220

바슐라르의 인식론은 현대 과학, 특히 양자역학이 실증주의의 한계를 넘어서는 정초를 요청한다는 사실에 응답한 사유였다. 이 인식론에서 그는 인식론적 단절을 통해서제2종 인식을 제1종 인식으로부터 설득력 있게 분리했다. 그러나 언급했듯이 그는 지각과 이미지의 세계에도 별도의 위상을 부여하고자 했으며 (양자에서 ‘물질‘ 개념이 전혀다르게 파악되고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이는 그의 현상학적-시학적 작품들로 나타났다.("아니무스와 아니마") 그러나 그의 사유의 문제점은 정작 이 양자 사이의 담론공간이 통째로 배제되어 있다는 점이다. - P223

러셀에게서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사유의 정향은 곧 ‘외연성(extension)‘ 지향의 사유이다. 모든 언어를 정확한 외연을 갖춘 언어로 환원해 애매성과 모호성을 완전히 제거하려는 시도라 할 수 있다. 무엇이든 기하학적 공간에 놓고서 분석할 때 최고의 명료성을 획득할 수 있다. 베르그송 역시 과학적 지능의 핵심을 바로 이기하학에서 찾았다. 그러나 러셀과는 정확히 반대로 베르그송은 이런 외연성의 사유의한계를 지적하기 위해 그것을 논했다. ‘시간의 공간화‘에 대한 비판, 등질적 공간과 다질적시간의 대비, 양적 다양체와 질적 다양체의 엄격한 구분 등이 그의 사유의 초석을 이루는 것도 이 때문이다. 현대 철학은 러셀의 길과 베르그송의 길로 분열되었다고도 할 수있다. 러셀이 볼 때 베르그송 식의 사유는 애매모호하다. 베르그송이 볼 때 러셀 식의 사유는 피상적이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화이트헤드의 경우는 흥미롭다. 사유의 전기에 그는 러셀과 더불어 현대 논리학을 정초했지만, 사유의 후기에는 베르그송의 영향 하에서유기체 형이상학을 전개했기에 말이다. 바디우는 외연성을중시한 사유이고, 들뢰즈의 사유는 이 두 극의 중간 정도에 위치한다. - P260

분석적 철학 전통은 일상 언어를 형식화해 논리학화하려는 의지, 깔끔 - P294

한 외연성의 사유로 환원하려는 의지로 점철되었다. 이것은 곧 일상 언어와는 상이한 성격을 띤 수학적인 언어를 구축하려는 시도이며, 또한 사유를 공간화함으로써 말하자면 논리적으로 범-기하학화하려 한 시도라고 할수 있다. 이런 경향은 컴퓨터의 발명 이래, 형식언어를 구축하려는 오늘날의 각종 시도로 이어져오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 이런 흐름과 각을 세우면서 추상적인 형식화보다는 일상 언어가 내포하는 역사성, 다양한 맥락들,
미묘한 뉘앙스들, 화자와 화자 사이의 구체적인 관계, 사회-정치적 함의들등을 있는 그대로 살리면서 이해하려는 노력들 또한 지속적으로 이어졌다.
일상 언어는 그 자체 복잡하고 미묘한 논리를 내장하고 있으며, 형식언어의 ‘정확성‘과는 다른 형태의 ‘정확성‘을 갖추고 있는 것이다. 현대의 언어철학은 이렇게 논리학을 기초로 단단한 형식언어를 구축하려는 경향과 일상 언어의 비-형식적인 구체성과 미묘한 정확성을 살려 이해하려는 경향이 길항해왔다. - P295

들뢰즈의 잠재성은 언제나 현실성과 더불어 생성하는 ‘실재‘이다. 들뢰즈에게 현실적으로 나타나는 ‘외연‘ 및 ‘질‘에 입각한 사유는 (문자 그대로의 의미에서) 피상적인 표면적인것이다. 외연들과 질들은 그 아래에서 생성하고 있는 ‘강도적인 과정‘의 끝에서 나타난 결과일 뿐이다. 강도적인 과정은 이 과정의 끝에서 사라지기때문에 (물론 소멸되는 것이 아니다.), 피상적인 눈길에는 당연히 보이지 않는다. - P339

내재적 가능세계론: 현실세계 = (그 외연이 다양하게 상대적으로 규정되는)한 주체의 경험세계, 가능세계들 = 타 주체들의 경험세계들

들뢰즈의 가능세계론: 현실세계 = 현실성(내재적 현실세계 및 가능세계들전체), 가능세계 = ①잠재성 또는 ② 형이상학적 표면 또는 ③ 가능세계들

가능세계 형이상학: 현실세계 = 현실성 + 잠재성 전체, 가능세계들 = 논리적으로 구성된 세계들 - P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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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무가 존재와 분리되어 존재 바깥을 감싸는 경우가 아니라 존재 사이사이에 분배될 때 생성이 성립한다. 정확히는 단지 사이사이에 분배될 뿐만 아니라 존재-무-존재-무⋯⋯를 경계 짓고 있는 선들이 계속 무너질 때 생성이 성립한다. 존재와 무는 절대 모순을 형성하며, 존재가 존재이고 무가 무일 때 생성은 성립하지 않는다. 그리고 무는 무이므로(없으므로) 존재만이남는다. 무가 존재 사이사이에 분포하고 그 경계선들이 무너져갈 때 차이생성(differentiation)이 도래한다. 모든 생성은 차이생성이다. 그리고 이때 ‘존재한다‘는 것은 사실상 ‘생성한다‘는 것과 동일한 것이다. - P23

경험론적 형이상학자들은 한편으로 ‘경험‘에 충실하되, 이런 주체중심주의를 벗어나 경험의 심층을 응시한다. 그러나 이들은 실재를 인식하기 위해 경험을 피상적인 것으로서 벗겨내고 그것과 불연속을 이루는 실재를 찾으려 하지 않았다. 그런 실재를 찾는 한 본질과 현상의 이율배반과그것과 맞물려 있는 신체와 정신의 이율배반)은 피할 길이 없을 것이다. 이들은어디까지나 경험과 연속되는 그것의 심층을 구체적으로 인식해 들어가려했다. 이렇게 경험과 연속적으로 파악된 실재는 곧 ‘생성‘이었다. 경험론적형이상학의 구도를 통해 새롭게 성립한 형이상학 즉 생성존재론은 현대 철학/탈근대 철학의 핵심적인 성취에 속한다. - P49

오늘날 생성존재론의 구도는 ‘존재‘로부터 ‘생성‘으로의 이행 과정이 아니라, 오히려 ‘차이생성‘으로부터 ‘동일성들의 발생 과정을 설명하는 데에 있는것이다. 뒤에서 (6장, 1절) 논할 들뢰즈의 ‘잠재성의 철학‘은 이 과제에 답한각별히 정교한 시도에 속한다.
생성존재론의 또 하나의 의의는 이 존재론에 이르러 마침내 서구적 사유와 동북아적 사유가 서로 통(通)하게 된 점에 있다. 동북아의 형이상학은 처음부터 생성존재론의 형태를 띠었다. 이 전통은 ‘氣‘를 근본 실체로서 생각했고, 기는 반드시 ‘氣化‘로서만 의미를 가지는 것으로 이해했기 때문이다. 서구에서 생성은 생성하지 않는 진실재의 ‘타락‘한 모습이었으나, 동북아에서는 정확히 반대로 ‘物‘의 고정된(고정된 듯이 보이는) 모습은 ‘氣‘의 흐름이 일정한 형태로 굳어진 것일 뿐이었다. 세계에 대한 이런 직관은 ‘易‘의 개념으로써도 표현되었다. - P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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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서 태어나 그 생명을 축복받은 아이가 대체 얼마나 있을까? 나는 아이를 가지거나 지운 적은 없지만 주변을 보면, 스스로를 빛 쪽에 있다.
고 생각하는 여자는 아이를 낳고, 스스로를 어둠 쪽에 있다고 생각하는여자는 낙태를 한 것 같다. 여자는 경제적 사정에 이런 알파를 더해 애를 낳을지 말지 정한다. - P193

여자가 자연에 좀 더 가깝다고 보는 근거는 여자의 비생산적인 가치관, 사고방식이 문명이라는 것에 해를 입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자의비생산성은 여자의 존재 자체가 총체적인 것에, 여자가 남자처럼 사고를 기계적으로 분리하지 않는다는 점에 기인한다. 남자는 이론(말)으 - P205

로 총체성을 획득하려 하나, 여자는 그 존재 자체가 총체성을 갖고 있다. - P206

여성해방이란 여자들이 힘을 모아 여자가 살기 힘든 현실을 깨부수는 것이며, 동시에 서로 갈등하고 미워해온 여자와 여자의 관계성 속에 에로스를 되살리면서 주체성을 확립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여자에게 에로스는 나의 자궁, 즉 나의 자연과 내가 서로 소통하는 가운데 나온다. 소통은 ‘여자인 것‘에서 오는 아픔과대화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 P214

1960년대의 투쟁은 비일상적인 정치 공간에서 나 스스로를 보편적으로 대상화하려는 투쟁이었다. 그러나 이건 표면상 하는 말이다.
‘00일 투쟁하자!‘는 식으로 1년 365일 중 며칠 정도만 투쟁해서 자신의 비참한 일상성을 승화하려 한다.
우리가 투쟁에서 잘못 내디딘 첫 번째 걸음이 바로 이것이다. 애초에 총체적인 권력의 이러한 총체성이 일상에서 나타나는데도, 머리로만 억압을 밝히려고 하여 문제를 정치적 과제로 집약해서 정치권력을물리적으로 분쇄하려 했다. 그렇게 해서 승리를 얻고 해방을 향해 최단 거리로 질주하려고 했기 때문에 결국 투쟁에서 멀어지고 벗어나 버린 것이다. 투쟁을 하면 언제나 투쟁을 담당한 주체가 품은 생각이 밖으로 드러난다. 정치권력으로 곧 귀결하는 그런 사고방식은 어떤 주체가 있어서 나온 것일까? 이런 주체는 대의를 위해 나를 버린다는 일본전통의 정신 풍토와 근대 합리주의 사고가 합쳐져 나온 것이다. - P228

혁명과 파시즘은 종이 한 장 차이다. 이 둘은 양극으로 보이지만,
실은 둘 다 비일상적인 공간 속에서 극한까지 그 생명의 가능성을 불태워다 쓰고 싶은 바람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둘 다 따분한 일상, 시시한 일상, 곧 오르가슴이 없는 일상이 있어야 한다. - P233

맞벌이. 이것은 여자가 휴일인 일요일에 산더미처럼 쌓인 빨래를해야 할 이유이고, 직장 퇴근 후 백화점이 문 닫는 시간에 아슬아슬하게 뛰어 들어가야 할 이유이다. 또 콘돔을 사용하는 이유이고, 여자가경제력을 갖게끔 하는 이유이다.
맞벌이 여자에게 맞벌이란 실은 일상의 모든 구석구석을 샅샅이보살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남자에게는 어떤가? 여자가 "맞벌이하는데 신랑이 집안일을 도와주고 있어요." 하는 말을 들으면 그 답은 묻지 않아도 알 수 있다. - P240

나의 어렴풋한 기억에 따르면 적군파가 생긴 직접적 계기는 1969년 4월 28일 ‘오키나와의 날(오키나와 반전의 날)‘이다. 그날의 패배에18대한 총괄에서 적군파가 나왔다. 앞서 1월 18, 19일에 도쿄대 야스다 강당 투쟁 공방이 극적으로 전개되었기 때문에 그때까지 활발히활동을 하던 신좌익은 이제 지는 해에 가까워졌음을 예상하고 있었다.
그러고 나서 4월 28일 당일에 적이 압도적으로 퍼부은 물량 공세에 신좌익은 박살이 났다.
"오키나와의 날에 벌인 대중적인 무력 투쟁이 패할 수밖에 없었을 - P241

때 자연 발생적으로 도달한 군사적 투쟁의 한계성이 분명히 드러났다.
또 소시민인 투쟁 주체의 한계성 또한 확실히 드러났다. 남자의, 남자에 의한, 남자를 위한 투쟁의 약점이 백일하에 드러났고 혁명이 ‘남자다움‘을 상징하는 시대도 종언을 고했다."
위는 당시 내가 쓴 전단지 내용이다. 생각해 보니 1969년 4월 28일에 신좌익은 그전까지 갖고 있던 모든 것들을 잃고서 어쩔 수 없이 풍부한 ‘0‘의 지점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지는 저녁놀 가운데적군파와 여성해방운동이 태동했다. 이 둘은 신좌익 운동의 아이들로태어났다. - P242

나의 어둠과 타인의 어둠 즉 내가 살아가는 모습과 타인이 살아가는 모습이 경합하는 가운데 ‘우리의 내일‘에 빛이 싹튼다.
‘가해자 논리‘는 피억압자 자아를 버리게 할 우려가 있다. 억압자인 동시에 피억압자인 모순 속에 투쟁의 변증법이 숨 쉬고 있는데, 자신을 억압자일 뿐이라고 한쪽으로 기울여 고정하고 굳혀 버리면, 겉으로 내세운 명분밖에 없는 혁명 대의를 사명감으로 갖게 되며, 그런 대의에 나를 바치게 된다. 이런 과정에 ‘가해자 논리‘의 범죄성이 있는 것이다. 내가 실감한 것은 억압자라는 것은 철저히 겉으로 내세운 명분일 뿐이란 점이었다. 이는 늘 깔끔하게 딱 떨어지는 논리였고, 남자들한테 남자다움과 혁명가에 대한 기대를 만족하게 해 주는 논리이다. - P254

‘오늘 내가 느낀 비참함을 그대로 두고 ‘내일 만약에‘로 바꾸는 사람들 가운데에서 파시즘이 싹튼다. - P259

예전에 일본 여자들은 나라를 위하고 가족을 위한다는 대의명분으로 몸과 마음을 다 갖고 있는 총체적인 존재인 자기 자신을 배신했다. ‘정숙한 여자‘는 ‘일본의 어머니‘가 되어 전쟁터 후방에서 침략 전쟁을 지원했다. 그렇게 하는 동안, 전쟁터에서 황군 위안부들은 남성의성을 풀어 주는 역할, ‘신국 일본‘이라는 대의를 지키는 그림자 역할을해야 했다.
앞서 썼듯 위안부 대부분은 본국에서 잡아 온 조선인 여자들이었다. 그리고 지금 일본 국내에서는 남자의 배설 행위일 뿐인 ‘프리섹스‘
가 폐지된 집창촌을 대신한다. 한편으로 이런 ‘경제적 동물‘들이 동남아, 대만, 한국에 가서 그 땅의 여자들을 변소 대신으로 삼는다. - P264

문제는 ‘내 생각과 좀 다른데‘ 싶을 때나 놀랐을 때, 그걸 그대로 솔직하게 밖으로 표출할지 말지이다. 말을 가진 여자는 말을 삼키는 여자이기도 해서, 자신이 하는 말이 이치에 맞지 않거나 창피하다고 여기며 본심을 감춘다. 인텔리는 어찌 됐건 자신이 엉망이 되는 상태를 잘피하며, 잘 회피할 수도 있다. 그런데 밥그릇을 설거지하는 방법만 해도 사람이 열 명이면 설거지법도 열 가지다. 각자 예전부터 해온 방식에 각자의 과거가 녹아 있다. 그래서 이렇게 하자고 할 때 그건 암묵적으로 나 자신의 방식을 주장하는 것이므로 상대가 놀랄 때도 일상다반사로 있다. 둥글게 살자, 사람들한테 맞추자 하고 마음을 먹고서 내 뜻을 드러나지 않게 하려 해도 그리 길게 가지 않는다. 사람은 일상적이지 않은 일은 남을 속일 수 있어도, 일상적인 일로는 그러지 못하는 법이다. - P286

인간은 자신에게 의미가 있는 것을 추구하는 가운데 모든 사람에게 의미가 있는 세계를 만들 수 있다. 내가 있고 나서 남이 있는 것이고, 만사가 있고 세계가 있는 것이다. 이렇게 멋스럽게 이야기를 해 본다 한들, 애초에 나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 고집스럽게 내 이야기를 하는 모습이 마치 자기 꼬리를 물려고 빙글빙글 도는 개 같다. 그런데 아무리 해도 자기 꼬리를 물 수가 없어서 짜증이 난다. 자신의 약점, 되풀이하는 실수에 혀를 차면서도 우리는 그렇게 헛도는 모습 속에서 자신의 가능성을 찾아 왔다. - P290

공동체 생활의 마음가짐은 어쩌면 내일 내가 혼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삼고 지금 이 시간, 이 만남을 소중히 하는 것이다. - P297

평범한 가정에서는 평범한 부모가 평범하게 아이를 가르친다. 즉 평범한 가정에서는 딸에게 장래에 좋은 아내이자 좋은 엄마가 되라고 한다. 어린완벽주의자 여자들은 어떻게든 부모의 기대에 부응하려고 애를 쓴다. 그러다가 좌절하면 자신을 한심하다고 여기고 스스로를 철저히 벌하려고 또 애를 쓴다. 한 되씩이나 되는 밥을 먹고서는 토해 낸다.
강조하고 싶다. 세상 어디에도 없는 가정이 이상이 된 현실이 바로 이병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 P3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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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개인사

생명의 가능성이란 나 자신과 남이 제대로 만나기를 갈망하는 것이다. 여자가 생명으로 살 수 있는 방식은 남자처럼 바다로 나아가며 자아를 찾아가는 방식에 있지 않다. 나 자신 속에 바다를 품고 내 속의 바다에서 나 자신을 찾아가는 방식에 생명의 가능성이 있다.
-> 이 방식에 나는 의문이 있다. 여자는 왜 바다로 나아가면 안 되는가?

일본에 있는 외국인 가운데서도 유럽이나 미국인한테는 한없이 관용적이면서도(그렇다고 해도 반전 활동을 하는 이들에게는 관용을 베풀지 않는다), 재일조선인을 비롯해 일본에 있는 아시아인들한테는 마치 자기가 생사여탈권이라도 가진 것마냥 군다. 출입국관리법에는 낡아빠진 소위 ‘신국 일본’의 행태가 노골적으로 보였다. - P136~137
-> 근대 일본 제국주의는 서구를 따르고 동양의 평화를 운운하며 리더임을 표방하고 다른 동양의 민족을 억눌렀다.

당시 나는 내가 끝까지 못 싸운다는 것, 그러니까 각목을 들지 못하는 자신을 아주 창피하게 여긴 것 같다. - P138
-> 시위, 데모를 하러 나가는 것 자체가 큰 결심이 아닐까. 어떤 의도에서 시작되었든 내가 거기에 조금이라도 몸 담았다면 말이다.

나는 어디까지나 내가 저지른 죄상이 무엇인지 전혀 추측조차 못하는 죄인이었다. 나는 열심히 어떻게 된 일인지 이해하려 했다. 엄마가 자꾸 묻는 바람에 벽에 딱 붙어서. 그런데 뇌리에는 "다른 사람들한테 말하면 안 돼!" 하고 무서운 표정을 한 엄마의 말만 남아 있었다. - P103

아무리 머리로 제국주의와 싸우는 피억압 인민들이 있다고 확실히 알고 있다 한들, 한쪽 다리를 잃어버린 사람은 잃어버린 사람은 잃어버린 한쪽 다리에서 모든 것을 출발하는 것이지, 논리로는 잃어버린 자기 다리를 대체할 수 없는 것이다. 지금 아픈 사람은 항상 미시적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거시적 대상황과 미시적 소상황을 합쳐 문제시해야 한다. - P124

1969년 1월 18일 도쿄대학 야스다 강당을 점거하고 농성 중이던 학생들을 체포하는 강제 진압이 일어났다. 그날 밤 나는 밤새 친구와 기동대가 빙 둘러싼 도쿄대 주변을 배회했고 이튿날 오차노미즈에서 벌어진 투쟁에 참가했다. 현기증을 느끼면서도 나는 지금 내가 역사의 모든 것을 묻는 투쟁을 벌이고 있다는 직감이 들었다. - P127

어디에 있든 완벽히 사회에서 자립한 주체라는 것은 있을 수가 없고 각자가 가진 노예의 역사성, 교태를 부리며 살아온 역사성을 짊어지고 걸어갈 수밖에 없다. - P133

남자들은 "만약 내가 결혼을 한다면 운동을 하지 않는 여자랑 할 테야."라고 거리낌이 없이 큰소리쳤다. 그런 남자들을 위해 조그맣게 움츠러들어 바리케이드 시위에서조차 밥을 짓고 변소를 청소하는 역할을 담당한 이들이 ‘여자’라는 이름의 암컷들이었다. 어머니의 너그러움과 창녀의 교태를 두루 갖추고 남자들의 혁명 지도부를 떠받쳐 온 ‘엉클 톰’ 같은 여자들. ‘만일 혁명이 된다면’ 하고서 그 환상을 위해 자신을 바친 신좌익 내부의 신데렐라들. - P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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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곡 - 지옥.연옥.천국 귀스타브 도레 삽화 수록본
단테 알리기에리 지음, 귀스타브 도레 그림, 김운찬 옮김 / 열린책들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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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꿈꾸면서 무엇인가 보는 사람이 꿈을 깨고 나면, 각인된 인상만 남고 나머지는 전혀 기억나지 않는 것처럼, 내가 바로 그러하였으니, 나의 환상은 완전히 끝났으나 거기서 나온 달콤함은 지금도 내 가슴속에 흐르고 있는데, 마치 햇살에 눈이 녹는듯하고 바람결에 가벼운 나뭇잎에 적힌 시빌라의 응답이 흩어지는 듯하였다.


단테의 신곡은 ‘지옥’, ‘연옥’, ‘천국’ 세 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서구 (특히) 중세 작품을 읽을 때, 신곡은 필독서이자 교양서처럼 되어 있다. 사실 중세의 역사는 너무 재미가 없어서 매번 공부할 때면 고역이었다. 그럼에도 문학 작품을 읽을 때, 또는 현대 작품에서도 신곡이 수시로 언급되곤 해서 언젠가 제대로 읽어야지 생각하고 있었다. 다행히 이번에 신곡을 읽으면서 예전에 한 번 읽었던지 ‘지옥’ 중간까지는 좀 익숙했다. 아마도 직접 읽었지만 내용이 기억에 남아 있었거나 알음알음 들은 내용이 남아 있는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이번에 읽을 때는 부디 이해를 하지 못하더라도 끝까지 읽어내자 생각하며 읽었다. 신자의 입장이라면 더 익숙했겠지만 무신론자인 나도 일상적으로 주변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며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지라 ‘지옥’편에서 만난 이들의 입장이 이해가 되었다. 


이때부터 내가 보았던 것은 언어를 초월했으니, 그 광경에는 언어도 굴복하고, 그 엄청남에는 기억도 굴복해야 하리라.


오, 탐욕이여, 너는 인간들을 네 밑에 잠기게 하여, 누구도 네 물결 밖으로 눈을 돌릴 수 없도록 만드는구나!


질투와 탐욕, 수시로 찾아오는 분노를 참으며 매 순간을 살아내는 나는 어쩌면 이성과 감정의 충동 사이에서 타협해야 한다는 명제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인간이다. 책에서 신자의 최고봉에 자리한 수도사조차도 권력의 유혹에서 자유롭지 못해 부패의 길로 나아가는 걸 보니 인간이란 어쩔 수 없는 건가 생각하기도 했다.


인간의 육신은 너무나 약한 것이기에 지상에서는 시작이 좋아도 참나무가 싹터서 도토리를 맺을 때까지 지속되지 못하지요. 


<신곡>이 계속 읽히는 이유는 첫 번째로, 나 같은 무신론자라도 이성적이든 감성적이든 어떠한 방면에서든 읽힐 수 있을 만한 보편적인 인간의 고민이 얽힌 명제를 담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사물 이면에 본질을 보지 못하는 인간은 어떤 것이든 확답을 받기를 원한다. 그러나 답을 구하는 명제란 한정적이고 질문을 품은 명제는 오래 걸려도 답을 구할 수 없음을 인간은 살아갈수록 느끼고 ‘그러면 대체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건가?’라는 고뇌에 휩싸일 수밖에 없다. 이는 누구나 겪는 본질적인 고민이자 실존적인 명제다.


단테는 스승인 베르길리우스를 따라 지옥 여행을 시작한다. 지옥의 여러 단계를 거치며 고통에 빠진 인간들의 천태만상을 통해 스스로의 삶을 회고하고 뉘우치는 과정을 거친다. 연옥을 거쳐 단테는 사랑하던 베아트리체를 천국에서 만나 계속 여행을 한다. 여행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의 현재와 과거를 만나며 그는 자신의 삶을 자연스레 돌아보게 된다. 


개인적으로 신곡이 읽히는 또 하나의 이유는 미지의 탐색을 향한 인간의 욕망을 건드리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의 입장에서 잡힐 수 없었다고 생각한 우주는 중세의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에서 시작했다. 우주의 중심은 ‘나’, ‘우리’에서 시작하여 지구가 중심이 아니라는 지동설이 탄생할 때까지 오랜 세월을 거쳐야 했다. 나는 어디로 향할까, 이 땅이 아닌 다른 곳을 향할 수 있을까 끊임없는 고민을 거듭한 끝에 근대, 현대를 거쳐 지금의 우주 과학 이론과 실천이 뒤따랐다. <신곡>의 지옥, 연옥, 천국 장소의 위치를 설명하는 부분에서 다양한 물리 이론을 비롯한 흥미로운 이론과 지각이 뒤따른다. 


그렇다고 해도 솔직하게 고백해야 하리라. 지옥 > 연옥 > 천국 편으로 읽을 만했음을. 천국 편의 서두에는 이런 글귀가 자리하고 있다.


단테는 철학이나 신학의 교양이 부족한 독자에게는 천국이 어렵게 보일 수도 있다고 미리 말해준다. 잘못하면 길을 잃고 헤맬 수도 있으므로 미리 돌아가라고 권한다. 


신에 대한 믿음이 없는 나는 천국 편을 읽는 것이 도무지 쉽지 않았다. 읽는 내내 자꾸만 졸음이 밀려왔고 피곤했다. ‘대체 어쩌라는 거야?’ 하는 말이 머릿 속에 떠나질 않았던 것이다.


그럼에도 단테가 베아트리체를 만난 이유, 베아트리체가 천국에서 단테를 이끈 이유가 무엇일까 ‘천국’ 편을 읽으면서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어서 소득이 있었다.


그를 돌이키려고 꿈이나 다른 방법으로 

영감에 호소하는 것도 소용없었으니,

그는 그런 것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오!


너무나도 아래로 떨어졌기에, 그에게는

길 잃은 사람들을 보여 주는 것 외에

어떤 수단도 구원에 미치지 못했지요.


그 때문에 나는 죽은 자들의 입구를

방문했고, 그를 이곳까지 인도해 주었던 

사람에게 울면서 부탁했던 것입니다.


베아트리체는 하얀 올리브 가지를 두르고 영롱한 불꽃 같은 모습으로 단테 앞에 나타난다. 그녀를 그리워한 단테는 연신 놀라움에 떠는데 마치 예수 앞에 엎드린 신자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 단테에게는 베아트리체가 신비로운 영력을 지닌 거대한 신과도 같은 존재라 할 수 있다. 


10년도 더 된 이야기지만 어머니가 크게 병을 앓으시고 나서 기독교 신자가 되셨고, 집안에 늘 풍파를 일으키던 아버지도 열렬한 신자가 되셨다. 자식이 당신 곁을 떠나고 더 이상 내 몸이 내 몸 같지 않아 병마에 시달리면 무언가를 잡고 싶은 것인가 곱씹어 보게 되었다. 부모님은 내게 종종 믿음을 권유하시지만 나는 손사래를 치며 거부하는 일을 반복한다. 나는 인간은 고독한 존재라는 것을 알고 사는 사람이고 언제든 나를 지켜 주는 이들이 떠난다는 것을 연신 생각하고 사는 사람이다. 보이지 않는 존재를 믿는다는 것에 여전히 회의적인 사람이라는 뜻이다. 물론 생각과 실천은 다르다. 인간은 냐약하고 보이지 않는 존재라도 어딘가에 기대고 싶기 마련이라는 것을 이해는 한다. 


우리 괴로움은 단 한번이 아니라

이 둘레를 돌고 나면 새로워지는데,

괴로움이 아니라 위안이라 해야겠지.


<신곡>이 대단한 저작으로 평가되는 또 하나의 이유는 단테의 지식력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앞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당시 최신이라고 언급될 수 있었던 (우주) 과학 지식이 있었는데 뿐만 아니라 과거부터 이어져온 이야기의 소재와 관련 등장 인물들이 끊임없이 등장한다. 읽다 보면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다. 대체 이 사람은 이 많은 정보를 얻고 정리하고 자신만의 문학에 얼개로 짜 맞추어 넣기까지… 그 과정을 생각하면 더 놀라울 수밖에 없다. 


게다가 오늘날에도 유효한 여러 가지 질문들을 하고 있다. 


법은 있지만 누가 그걸 지키게 합니까?

아무도 없고 따라서 인도하는 목자는

되새길 수 있지만 갈라진 발굽이 없지요.

사람들은 자기 안내자가 그런 선에만

탐내어 기우는 것을 보고, 자기들도

그것만 먹고 그 이상을 요구하지 않아요.

이 세상을 사악하게 만들었던 원인은

그대들에게서 타락한 본성이 아니라

잘못된 통치임을 잘 알 수 있으리다.


미래가 없을 것만 같은 현실의 정치를 보면서 한숨을 짓다가 이런 구절들을 만나면 그 시절에도 이런 고민을 했구나 여기게 되면서 ‘그렇지!’ 탄성을 부르짖는다. 


살아 있는 그대들은 온갖 이유를 저 위 하늘로 돌리지요. 마치 거기에서 모든 것을 필연으로 움직이는 것처럼 말입니다.


인간에게는 자유 의지가 있다. 과거는 선택할 수 없었다고 해도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현재와 미래는 충분히 바꾸어나갈 수 있다고 긍정하고 싶다. ‘하늘’로 돌린다는 말은 ‘남’ 탓을 한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고 여긴다. 이미 주어진 삶을 바꾸어 나갈 수 있는 것은 내 몫이다. 


신곡에서 다룬 여러 명제들 중 내가 얻은 최소한의 정보이다. 너무 부족하지만 어찌되었든 완독해냈는데 부끄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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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4-11-18 12: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완독 축하드려요~♡
다른 책들도 마찬가지지만, 볼수록 새로운 것들이 나타나는 책인듯 합니다.^^

거리의화가 2024-11-18 22:01   좋아요 1 | URL
재독을 넘어 N독을 할수록 더 깊어지는 책들이 있죠. 고전이 된 데는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저도 생각합니다.
그레이스 님 감사합니다^^

다락방 2024-11-18 12: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완독 축하드립니다, 거리의화가 님!! 벌써부터 천국 부분 읽기가 두려워지네요. 아직 지옥 의 첫부분인데 말입니다.
저도 인간은 고독한 동물이라는 것을 알고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것과 별개로 신앙을 가지진 않았지만, 신앙을 가진 사람들에게 그 신앙은 당연히 힘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느 부분에서 우리는 각자가 믿는 부분이 있을거고요. 이를테면 제 경우, 주말에 산을 다녀오면서 돌들로 탑을 이룬 곳에 서서 저 역시 돌을 하나 올리고 소원을 빌었습니다. 이런걸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편입니다. 여행갔다가 성당이나 교회가 나오면 들어가서 기도도 하는 편이고요.

다시한번 신곡 완독 축하드립니다. 저도 어서 완독 하고 싶네요.

거리의화가 2024-11-18 22:06   좋아요 0 | URL
저도 신자인 분들을 보면서 그들에겐 신이 믿음의 영역이구나 이제는 받아들이고 있어요. 저희 부모님이 그랬던 것처럼...
인간에게 고독은 필연이지만 그럼에도 믿음을 찾는 데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간 순간 찾아오는 불안과 공포 등에서 버틸 동아줄 같은 역할이 아닐까 그런 생각도 해 보았습니다.
종교가 없더라도 누구나 어떤 소망을 바라잖아요. 그것이 이뤄지길 바란다기보다는 그 행위 의식 속에서 마음을 다잡거나 또는 위안(위로)의 보듬는 형식이란 생각도 하게 됩니다. 다락방 님 좋은 말씀 감사드려요. 완독 응원드립니다^^

자목련 2024-11-18 14: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완독, 축하드립니다. 자체로 대단하십니다.

거리의화가 2024-11-18 22:06   좋아요 0 | URL
자목련 님 말씀이 위로가 되고 힘이 됩니다. 감사드려요^^*

희선 2024-11-27 02: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번에 《신곡》을 끝까지 만나셨군요 몇 해 전에 오에 겐자부로 책 《읽는 인간》을 보고 ‘신곡’ 한번 봐야 할 텐데, 하는 생각만 했습니다 아직도 못 봤네요 많은 게 담긴 듯하네요 오랫동안 이 책을 썼다는 말을 본 것 같습니다 신을 믿지 않아도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나 하는 생각을 끊임없이 하는 게 좋겠지요 그런 생각을 안 하는 사람보다는 덜 나쁘게 살려고 하겠습니다


희선

거리의화가 2024-11-28 07:59   좋아요 0 | URL
신곡을 읽으면 이 사람이 오래 연구한 결과물임을 확연히 느낄 수가 있더군요.
희선 님 말씀처럼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라 믿을 주체를 찾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신이든 그것이 다른 형태든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