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랑하는 우리의 "다른 반쪽을 재평가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들이 우리에게 공헌한 바를 밝히는 작업은 모두 우리 정착민들이 이동하며 사는 사람들에게서 배운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며, 우리가 협력에서 얻은 것이 얼마나 많은지도 보여준다. 또한 그것은 그들이 가볍게, 그리고 보다 자유롭게 살아갔다는 점에서, 환경에 순응하고 행동할때 기민함과 유연함을 발휘하는 법을 터득했다는 점에서, 그리고 자연계와 지속적으로 균형을 맞춰갔다는 점에서삶의 또다른 방식, 인류의
"다른" 반쪽이 먼 과거의 비옥한 정원에서 하나의 단일 집단으로 사냥하며 살았던 시대 이후로 줄곧 유지해온 삶의 방식도 엿볼 수 있게 해준다. - P23

지표 투과 레이더로 탐사한 결과, (테베) 유적지에는 170여 개의 돌기둥들이 있었다. 현재는 그 유적지가 수백 년 동안 사용되다가 버려졌을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그 기념물들이 사라지지 않고 오늘날까지 남아 있을 수 있었던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는데, 그중 하나는 그곳을 계속 사용하고 개발하는 과정에서 생긴 쓰레기와 파편들에 기둥들이덮여 있었다는 것이다. 또한 훗날 그곳에 다른 주요 정착지가 세워지지않아서, 채석되어 잘라진 기둥들을 재사용하려는 사람이 없었으리라는점도 유적이 남는 데에 도움이 되었다. - P38

괴베클리 테페가 지어질 당시 에덴을 벗어난 강의 동쪽, 그러니까 그곳의 주변 경관은 오늘날보다 비옥했다. 야생풀, 밀, 보리가 자라는 초원을상상하면 무리가 없을 것이다. 참나무, 그리고 이제는 그 지역에서 집약적으로 재배되는 아몬드 나무와 피스타치오 나무들의 관목숲에 흐름이끊기기도 한 그 초원은 가젤과 오록스의 터전이었고, 이주하는 거위들,
식용 가능한 다른 많은 새와 동물들, 그리고 유적지에서 나온 뼈의 퇴적물로 드러났듯 인간을 위협한 일부 동물들의 서식지였다. 슈미트 교수도한 차례 이상 말했듯이 그곳은 "낙원과도 같은" 풍요로운 땅이었다. 이풍요로움은 인간이 먹고살기 위해 멀리까지 방랑할 필요를 없게 만들었다. 배회할 필요 없이 성역을 개발하면서 정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괴베클리 테페는 인간들이 살고 죽은 곳이었다. 정착은 완전히 새로운 존재양식을 가져다주었다. - P40

우리는 멸종을 우리 시대에우리가 야기한 문제라고 생각하지만, 지구상의 대형 짐승들 중 절반 정도를 차지했던 거대한 검치호랑이와 우람한 땅늘보는 괴베클리 테페에동물 조각 기둥이 세워질 무렵에 이미 사냥으로 멸종된 상태였다. 그곳의 성역도 어쩌면 돌에 새긴 일종의 회한문悔恨이었을지도 모른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농업은 인류에게 거대한 도약이 아니었을 소지가있다. 그보다는 자신들이 거둔 성공으로 식량 공급이 대폭 줄어든 수렵채집인들이 취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 필사적인 위기관리였을지도 모른다. - P55

문자가 발명되고, 산처럼 거대한 지구라트가 처음 지어지며, 최초로 원통인장이 사용되고, 오늘날 우리가 시간을 측정(초와 분)할 때에 사용하는60진법 숫자 체계, 각angle, 지리 좌표가 창안된 곳이 우루크였다. 또한 우루크에는 자연계가 제압되고, 하천이 통제되어 땅을 경작할 수 있게 되며, 삼림이 베어지고, 야생동물과 야생인간들이 길들여지거나 살해되거나 추방되던, 기원전 2500년 이전에 우루크를 다스렸던 길가메시라는 역사상의 왕도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길가메시가 느꼈을 비통함도 어느정도는, 그와 그의 백성들이 세계를 바꾸고 있고, 그리하여 이제는 아무것도 이전과 같지 않을 것임을 깨달은 데에서 비롯되었을 수도 있다. 심지어 그 당시에도 길가메시 왕과 그의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도시와정착에 대한 욕구 그리고 자연계와의 접촉의 상실이 조화를 이루기가 매 - P71

우 어렵다는 점을 이해하고 있었을 것이다. - P72

유목민과 정착민, 옥토에 사는 사람들과 황무지에 사는 사람들의 투쟁, "최초의 형제 살해"를 범한 오시리스와 세트, 그리고 카인과 아벨의투쟁 사이에는 두드러진 공통점이 있다. 그러나 세트와 카인에 대한 평가에는 중대한 차이가 있다. 카인은 추방된 반면, 세트는 수천 년간 이집트인들의 숭배를 받은 것이다. 이는 이집트인들의 숭배가, 그 투쟁을 단순히 선과 악으로만 이해했던 로마와 기독교 시대보다 더욱 다양하고,
복잡하며 미묘한 반응이었음을 시사한다. 그리고 이는 그보다 1,000년앞선 메소포타미아인들이 강력한 왕 길가메시와 그를 억제할 야생의 인간 엔키두가 모두 필요하다고 인식했듯이, 초기 이집트인들도 비정착민들의 창의력과 땅의 경작자들이 가져온 질서와 다양성이 모두 필요하다는 점을 인식했음을 보여준다. 경작자와 목축인, 정착민과 유목민. 이집트인들이 직면했던 중요하고 영속적인 도전은 이 둘 간의 균형을 어떻게유지하느냐에 달려 있었다. - P92

문자적으로나 상징적으로나 낙원을 뜻하는 파이리 다에자pairi-daeza, 아버지와 아들이 오래 전에 심은무화과와 포도 나무들 사이에서 오디세우스의 길고도 험난했던 여정은막을 내린다. 유목민의 스텝 세계 쪽을 돌아보는 대신에 인도유럽인의신념과 관습이 지중해 세계로 흡수되는 정착적 미래, 유목민과 정주민이조화와 결합을 통해서 우리가 고대 그리스 문화와 현대 서구 세계의 토대라고 알고 있는 세계를 고대하면서. - P105

페르세폴리스는 제국 문화의 다양성을 돌로 찬양한 곳이었고, 그것이 바로 알렉산드로스가 바빌론이나 수사와 같은 제국 도시들은 온전하게 남겨두고 페르세폴리스만 확실하게 파괴한 이유일 것이다. 알렉산드로스는 페르세폴리스의 기단에 깃든 신성함을 이해하고 있었고, 그러니 그것의 중요성 역시 인식하고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동방 원정에 나서기 전 올림포스 산의 낮은 경사면에 페르세폴리스와 흡사하게조성된 기단의 성소에서 제우스 신에게 희생 제의를 올렸다. 그 시대에는가장 웅변적이고 설득력 있게 취지를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이 상징이었고,
그랬던 만큼 알렉산드로스가 페르세폴리스를 파괴한 것은 아케메네스왕조와 그들의 낡은 세계질서에 사망 선고를 내린 행위였다. - P117

유목민, 즉 바르바로이barbaroi(이어족異 혹은 야만족)에는 도시 밖에서 충일하지 않은 삶을 사는 "열등한 종족"이라는 뜻이 함축되어 있다.
그들이 살아가는 자연은 접근하기 어렵고 극한의 경관과 기후를 가진 외딴곳이었다. 그들에게는 읽고 쓰는 능력도 거의 없다시피 해서, 플라톤의 견해로는 도시 성벽 내 사람들이 거둔 위대한 두 성과, 즉 예술과 산업도 일으키지 못했다. 하지만 산업혁명 때와 우리 시대에도 일어난 일이듯이, 그러한 성과가 정신에는 만족감을 주었을지언정, 그 진보를 이루기위해 치른 대가에는 예전의 순수했던 생활 방식, 자연계의 아름다움 속에서 살았던 삶을 희생시킨 것도 포함되어 있다는 꺼림칙한 우려가 항상함께했다. 19세기 초에 윌리엄 블레이크와 20세기에 브루스 채트윈이 그랬듯이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이 성벽 너머의 잃어버린 황야, 아르카디아,
보다 순수하고 무구했던 먼 옛날 우리의 상태를 동경의 눈으로 바라보지않을 수 없었던 것도 그래서였다. - P124

흉노와 서쪽에 있는 그들의 짝 스키타이인은, 헤로도토스와 사마천이 말하는동과서의 세계를 연결하면 혜택이 생긴다는 점을 이해하고 있었다. 스텝 민족은 사치품 교역을 이끌어간 초기의 견인차였다. 성벽 내에 사는 사람들은 대부분 자국민 위주로 유대를 형성했다. 하지만 이주의 필요성 때문에 부득불 말 타기의 명수가 되고 수레와 전차를 발명했던 스텝 민족은방대한 거리를 횡단하는 습성이 있었다. 그들은 마음을 가라앉히는 법을알고 있었고, 낯선 것에도 편안해했다. 또한 생소한 관습을 용인할 줄 알았고 이해할 수 없는 언어들을 우회하는 방법을 찾아냈다. 그들이 볼 때 - P152

그리스인, 로마인, 중국인, 그리고 심지어 페르시아인은 자연계를 외면하고 성벽 너머에 사는 사람들, 하늘에 버림받은 종족이었다. 신이 그들을 벌하기 위해서 채찍(아틸라)을 보낸 이유도, 동쪽에서 다가오는 로마인들에 대해서 우려했던 이유도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때쯤에는 "우리의 사치품과 우리 여인네들이 지불한 대가에 대한 대플리니우스의 탄식도 무의미해 보였다. 실크로드 무역은 제국으로서는 사소한 문제였기때문이다. - P153

유적 속에서 골라낸 길, 다시 말해서 역사의 고속도로는 우리로 하여금 기원전 1만 년의현저한 업적 모두가 정착민들의 성취라고 믿게 만든다. 하지만 괴베클리테페의 건설자들로부터 로마 제국의 종말을 재촉한 훈족에 이르기까지, 유목민, 이주자, 그리고 이동하며 살았던 그 밖의 종족들 역시 최초의 석조기념물을 세운 것에서부터 말을 길들이고, 그 말과 연결해 수레 및 전 - P168

차를 만든 것에 이르기까지 문명의 진보에 상당한 기여를 했음을 우리는알고 있다. - P169

아랍인 무슬림 세력의 극적인 확대는 기존의 세계질서를 바꾸었다. 할리드가 여러 전투에서 승리하고 예언자 무함마드가 사망한 지 1세기가조금 지난 700년대 중엽에는, 로마 제국이 콘스탄티노플의 일부 지역과발칸 반도의 오지로 규모가 축소된 반면, 아랍의 지배권은 인더스 강에서부터 대서양까지 뻗어나가 이전의 어느 제국보다 커졌다. 하지만 이 신생 제국의 가장 놀라운 점은 제국의 크기가 아니라 그 제국이 이동하는습성을 신속한 정복으로 이끌어간 사막인, 유목민이 쟁취한 것이라는 점이었다. 핵심 측근과 장군들의 대다수는 도시 정착민이었지만, 아랍인의85퍼센트와 8세기 무슬림들은 대부분 이동하는 삶을 살거나 유목민의전통으로 단련된 사람들이었다. - P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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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 25주년 기록을 보면서 가입 이후 경과한 기간과 활동 시간은 다를 수 있음을 다시금 느끼게 한다. 2022년부터 본격적으로 서재 활동을 시작하면서 짧은 기간 내 많은 책을 사들이고 읽고 써왔다. 알라딘의 긍정적 효과는 역시 '서재'와 '북플'이 중요하다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내가 만약 서재 활동을 시작하지 않았다면 이만큼이나 읽고 쓸 수 있었을지 모르겠다. 다른 분들의 기록 글을 보면서 느낀 것이지만 내가 사는 동네에도 책 읽는 분들이 많은 것인지(아이가 있는 학부모들이 많아 관련 책을 사시는 분들이 많은듯) 앞으로도 상위권에 들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최근 들어 소설을 많이 읽었더니 좋아하는 분야에 소설(한국소설 2위, 영미소설 5위)이 급부상했고 이동 시간이 늘어나면서 전자책을 많이 읽게 된 것이 작년과 다른 점이다. 



4월 중순 무렵부터 일이 바빠져 몸과 마음이 피로하여 읽고 쓰는 페이스를 잃어서 요즘은 스스로가 영 만족스럽지가 않다. 그럼에도 상반기에 내가 무얼 읽었고 인상적인 책은 무엇이었는지 정리는 해야겠기에 결산을 해 보려고 한다.


분야로는 당연히 '역사'가 압도적이지만 근래 들어서는 '소설'을 꽤나 읽었던 것 같다. 이 중 얇은 책 시리즈는 하나로 묶어서 총 58권 읽었다. 그래도 초반에 많이 읽어뒀기에 가능한 숫자가 아닌가 싶다. 


이 중 기억에 남는 책들을 몇 권 꼽아보자면 다음과 같다. 



<1945년 해방 직후사>는 해방 직후 1945년 한국 정치와 사회를 살펴봄으로써 현대 한국의 원형을 추적한다. 해방 후 조선은 탈식민, 탈제국, 탈계급 등 무수히 많은 과제들에 둘러싸여 있었다. 식민지 하의 근대를 과거와 제대로 된 결별을 하지 못한 상태에 제국의 탄압과 수탈, 교묘한 정책으로 계급 간의 갈등은 더 심화되었다. 이 책은 지금까지 알려진 통념과 다른 사실들을 확인할 수 있다. 1945년 8월 10일부터 15일 사이에 총독부가 종전 대책 수립을 위해 여운형과만 교섭을 한 게 아니고 여운형과 한민당계가 교섭을 진행했으며 해방 후 여운형과 한민당, 총독부 간에 건준의 방향성을 둘러싼 협의와 교섭이 긴밀하게 진행되었다. 또한 주한미군사령관 하지와 초반에 개인 정치고문으로 일했던 윌리엄스 소령이 미군정의 인사를 좌지우지하면서 정책의 방향을 결정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하지의 공식 통역인 이묘묵, 조선총독부의 공식 영어 통역관 오다 야스마, 사상 전담 검사인 나가사키 유조 등은 여운형과 건준, 인공을 친일정권이자 공산주의자라고 매도했으며 한민당은 친미적이고 좋은 교육을 받은 민주주의자 애국자로 둔갑시켰다. 그러면서 미군정 하의 권력을 꿰차고 승승장구했다. 이와 비롯해 기존에 미처 알지 못했던 다양한 이야기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잘 알려진 한국 현대 통사와 근래에 나온 <애국의 계보학> 같은 책과 같이 보면 더 좋을 것 같다.



<북으로 간 언어학자 김수경>은 기존에 알려졌던 이희승, 김두봉 등의 국문학자들 말고 새롭게 김수경이라는 인물을 알 수 있는 기회였다. 김수경이라는 사람이 어떤 궤적을 그리며 살았는지, 그가 언어학자로서 어떤 성과물을 내었는지 확인할 수 있다. 그의 가족사는 근현대 한국인이라면 풍문으로 들어보았을 법하다. 그래도 그는 철학을 전공하고 도쿄제대 문학부 대학원에 진학할 정도로 엘리트 지식인이었으며 북으로 넘어간 이후에는 현대 조선어(북한어)의 기틀을 마련한 학자였기에 그 끝이 그나마 나았던 게 아닌가 싶다. 김수경이 지향한 조선어학은 당시 세계적으로 트렌드였던 규범화, 구조화에 기반한 국제주의의 성격을 띠었다는 사실이 놀랍다. 물론 이후 김일성 유일체제가 시작되고 나서는 그에 맞춰서 조선어도 변화의 흐름을 맞을 수 밖에 없었지만. 책의 배치가 단연코 눈에 띄는 부분은 개인사와 조선어의 역사를 교차하여 배치했다는 사실이다. 조선어의 역사가 문법 설명이 많아서 어려울 수 있는데 문법 이론에 관한 부분이 지루한 독자들을 위해 출판사 및 편집자가 이런 배치를 결정했을 것 같은데 현명했다 보인다.



<근대 용어의 탄생>은 근대 문명의 키워드가 된 ‘말’의 역사를 다룬 책이다. business, constitution, democracy, president, project, revolution, university 등. 현대에도 사용되고 있는 이 말들의 기원이 되는 단어는 무엇이고, 이후 어떤 발전 과정을 거쳐서 지금의 의미로 변화되었는지를 들여다본다. 지루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더 재밌게 읽었고 무엇보다 잘 읽히는 책이었다. 대부분의 말은 어원과 현재 쓰고 있는 의미가 달라진 경우가 많아서 어원과 현재의 의미가 같은 것을 찾는 것이 더 어렵다는 사실이 흥미로웠다. 근대 용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원어의 의미와 달라져 오류처럼 혼선을 주게 된 말들도 있다. 라틴어나 그리스 원어에서 영어나 프랑스어로 번역되고, 또 그것이 한국어로 번역되기까지 과정을 보는 즐거움도 있다. 그 과정에서 일본인들의 역할이 컸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고. 번역된 말이 아예 우리말처럼 현대에 굳어져 버린 말들도 있다. 이 책을 읽으며 <그 많은 개념어는 누가 만들었을까>, <서양사정>, <평생공부가이드>, <개념어 해석> 등과 함께 읽어도 도움이 될 것 같다. 



<조선인들의 청일전쟁>은 청일전쟁을 좁은 시점이 아니라 확장해서 들여다볼 수 있게 도움을 준 책이었다. 청일전쟁의 장소가 주로 한반도에서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조선인들의 피해와 목소리가 담긴 책은 드물었던 것 같다. 기존에 재야 사학사들을 중심으로 동학농민전쟁에 대해서는 중점적인 연구가 이루어져 관련 책들이 나온 바 있으나 오히려 청일전쟁에 대해서는 특정 사건을 중심으로 한 단편적인 서술들만 지배적이어서 아쉬움이 많았다. 현대 중국과 일본 학자들이 청일전쟁에 대해서 많은 연구를 진행해왔는데 저자는 이런 기존 연구나 사료들을 바탕으로 최신 트렌드까지 확인하여 청일전쟁의 흐름을 전체적으로 잡아낼 수 있도록 도움을 준다. 이 책은 전쟁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시작되었고 개전 후 청과 일본이 전쟁에서 보인 모습이 각각 어떠했는지, 그 과정에서 일본 언론의 역할이 어떠했는지 주목하게 한다.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청일전쟁이 과연 진실에 가까운가 생각하면 회의적이라 느껴진다. 비록 많은 시간이 흘러 사료적인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겠지만 이런 책들이 계속 나와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더해지는 고마운 책이었다. 



<물질문명과 자본주의>는 중세와 근대의 산업 혁명 이전까지 물질문명과 자본주의의 역사를 확인할 수 있는 책이다. 문명사에는 관심이 있지만 경제가 너무 재미 없어서 이 책을 읽어야지 하면서도 그동안 미루고 읽지 못하고 있었다. 펀딩을 했으니 망정이지 안 했으면 아마 읽는 시기가 훨씬 뒤로 미뤄졌을 수도 있을 것 같다. 막상 읽어 보니 거시적 흐름을 다루면서도 언급되는 내용은 실제 사례에 기반한 미시사적 내용이 많아 충분히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다. 재미로만 따지면 1권이 일상적 공간에서 다루는 소비물들이라 흥미로웠다. 2권은 유럽 자본주의 시장 경제의 흐름을 통해 마르크스가 말하는 자본론이 발표되기 이전 유럽은 정기시를 비롯한 시장, 신용 대출, 이자, 스톡 등이 등장하면서 자본주의가 태동하여 활발했음을 보여준다. 3권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주도하는 지역별로 거시적인 경제사를 다룬다. 북부 이탈리아인 베네치아, 피렌체에서 안트베르펜, 제노바, 암스테르담 등 중북부 유럽으로 세계 경제 흐름이 바뀌어가는 것을 확인해볼 수 있다. 



<현대 중국의 탄생>은 청 제국부터 지금의 시진핑 시기까지 아주 넓은 시기를 다루고 있는데 그 시작이 16세기부터인 이유는 현대 중국의 기원을 청 제국부터 바라보기 때문이다. 최근의 범위까지 역사적으로 다루기 때문에 근현대 중국의 역사를 이해하고 공부하는데 입문서 떼고 전문적으로 들어갈 때 이만한 책이 없다 생각한다. 특히 과거의 민족주의나 반식민주의, 반제국주의적 흐름과 오리엔탈리즘적 시각도 아니고 신중국사적 흐름도 아닌 중립 지향적 기술이 돋보였다. 구체적으로는 19세기 중국이 쇠퇴했던 까닭을 비롯하여 20세기 혁명의 물결을 지나 현대의 중국이 발전해올 때까지 압축적인 역사를 확인해볼 수 있다. 아무래도 바로 옆에 있는 국가인데다가 최근 들어 북한과 러시아, 일본, 미국 등 정세가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기 때문에 근현대 중국을 알고 이해하는 것은 필수라고 여겨진다. 최근에 <마오주의>를 읽었는데 이 책을 미리 읽어둔 덕분에 비교적 더 친숙하게 읽을 수 있었다. 



도스토옙스키의 <백야>는 열린책들 35주년 기념 세트에 들어 있는 책 중 가장 좋았던 책이었다. '도스토옙스키가 이런 말랑한 이야기도 쓸 수 있다고?' 그래서인지 신선하고 놀라웠다. 앞서 읽은 '가난한 사람들'은 초기작인데도 불구하고 도스토옙스키 특유의 감성과 날카로운 시선 등이 잘 드러나는 작품이었다면 백야는 결이 정말 너무 다른 느낌이었다(물론 배경은 음울한 특유의 분위기가 있지만). 주인공이 하는 행동 중 유일하게 나와 비슷한 점이 있다면 산책을 하며 주변에 시선을 주는 것 정도? 주인공은 현실가라기보다는 이상가나 몽상가 쪽에 더 가까웠다. 소설을 보는 이유는 나와는 다른 캐릭터를 보는 묘미에 있는 것 같다. 뻬쩨르부르그의 골목의 구석구석을 누빈다는 느낌으로 읽고 있다가 주인공이 한 여인에 눈길을 준 뒤로는 그 마음이 어떻게 흘러갈지 궁금해서 읽었다. 어쩌면 사랑이라는 감정은 성공률이 극히 희박한 것이 아닐까 생각하게 만든다.



마지막으로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을 꼽아 보았다. 소설 속 등장인물은 우리가 충분히 일상 속에서 만날 수 있는 인물들이고 상황도 딴 세상 이야기가 아닌 우리 근처에서 만날 수 있는 이야기다. 평범해서 진부함이 떨어질까봐 우려했는데 그러지 않았다. 연애와 결혼 제도, 교육, 엔터테인먼트 등 현대 한국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다양한 주제를 교묘하게 드러내고 있다. 더 이상 보편이라는 이름으로 획일화된 체제를 강요할 수 있는 시기는 지났음에도 대한민국은 여전히 구시대적 사고로 구성원 간에 갈등이 깊어져가고 있다. 물론 이를 깨부수려는 사람들의 노력은 이어지고 있으므로 희망적이라 할 수는 있는데 그나마 문학이 가진 힘이라면 조금씩 틀을 깨려는 노력이 아닐까. 보편화된 평범함이 아닌 다양한 색깔을 지닌 평범함을 느낄 수 있어 좋았다. 김기태 작가가 앞으로도 계속 좋은 작품들을 써서 내주기를 독자로서 바란다.  




시리즈 중 상반기에 끝내지 못한 책들은 '도스토옙스키 전집'과 '세계철학사'인데 하반기 안에는 꼭 읽는 것으로 해야겠다. 사실 작년 말 집안의 묵은 책들을 털어내자는 계획이었는데 이는 역시 과도한 계획이었던 것 같다. 일부 책을 정리했음에도 구입한 책들로 책장이 채워지고 있어서(그나마도 책장을 또 하나 더 샀음) 이제는 그냥 끌리는 대로 읽는 것이 답인가 싶기도 하다. 모쪼록 하반기에는 덜 바빠서 책을 읽을 수 있는 시간이 늘어났으면 하지만 함부로 예단할 수 없겠지. 

참! 영어와 중국어 책을 계속 읽어나가고 있는 것이(영어는 함달달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는 것이 크다) 그나마 다행이라 하겠다. 중국어는 자주 나오는 일상 속 단어들이 들릴 정도가 되었으나 여전히 읽는 것은 답보인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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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쟝쟝 2024-07-04 21:0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무슨 상반기 책 목록이 일케 웅장합니까!!! 화가님 스케일 짱짱 🤪

거리의화가 2024-07-08 13:53   좋아요 1 | URL
부끄럽습니다^^ 아무래도 역사책 위주다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네요. 하반기에는 좀 더 열심히 읽어보는 것으로. 쟝 님도 응원합니다!

단발머리 2024-07-04 21: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물질문명과 자본주의>가 세 권짜리인가봐요. 전 ‘읽고 싶어요‘만 표시해두었는데, 거리의화가님이 흥미롭다고 하시니 언젠가 도전해보고 싶네요.
너무 멋진 상반기 목록이에요!! 거기에 영어와 중국어까지~~ 거리의화가님만 하루에 48시간인 건가요? ㅎㅎㅎ

거리의화가 2024-07-08 13:59   좋아요 0 | URL
네 단발머리 님^^ <물질문명과 자본주의>는 중세 이후 근대까지 경제사에서 빠짐없이 거론되는 책이라서 도움이 되실 겁니다.
영어, 중국어는 이동 시간에 조금씩 하고 있어요.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늘텐데 그러기는 체력이 안되고 이렇게라도 해야 현상유지다 싶어 조금이라도 하자 생각하며 자족을 하고 있습니다!ㅎㅎ 저는 집을 팽개친 나이롱 주부라 가능한 것 같아요^^;;; 감사합니다.

독서괭 2024-07-05 13: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화가님 멋진 기록이네요!! 바빠서 많이 못 읽으셨다 해도 목록이 충실한 것 같아요^^ 열린책들 세트 완독 축하드립니다 ㅎㅎ 저 세트 예쁘고 좋았어요. 함달달도 파이팅~!

거리의화가 2024-07-08 14:00   좋아요 0 | URL
괭 님 감사합니다. 저런 기획 세트 알차고 좋은 것 같아요. 얇아서 부담 없어서 한 권을 하루에 읽는 것이 가능해 좋더군요. 함달달 반 정도 읽었는데 이번 책은 아직 감이 안 오네요ㅠㅠ 뒷부분으로 가면 좀 더 재밌으려나 생각하며 읽고 있습니다.
 

나는 현실과 긴장 관계에 있다. 좀더 심각하게 말하자면, 나는 줄곧 현실을 적대적인 태도로 대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마음 속의 분노가 점차 사그라지자, 나는 진정한 작가가 찾으려는 것은 진리, 즉 도덕적인 판단을 배격하는 진리라는 걸 깨달았다.작가의 사명은 발설이나 고발 혹은 폭로가 아니다. 작가는 독자에게 고상함을 보여줘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고상함이란 단순한 아름다움이 아니라, 일체의 사물을 이해한 뒤에 오는초연함, 선과 악을 차별하지 않는 마음, 그리고 동정의 눈으로 세상을 대하는 태도다.

사람은 다 마찬가지라네. 손을 뻗어 다른 사람 주머니에서 돈을 긁어낼 때는 미간을 펴고 웃음을 짓지만, 자기가 돈을 내줄차례가 되면 하나같이 울상이 되거든

젊었을 때 난 정말 개같은 놈이었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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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주의 - 전 세계를 휩쓴 역사
줄리아 로벨 지음, 심규호 옮김 / 유월서가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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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주의'란 무엇인가. 영어에서 마오주의자 또는 마오주의란 두 용어는 미국에서 냉전시기 중국을 분석하는 데 널리 사용되었는데, 이는 본질적으로 일종의 외부 위협을 의미하는 '붉은 중국'을 유형화하고 정형화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마오쩌둥 사망 이후, 그것은 1949년부터 1976년까지 일원화된 권력에 의한 억압의 광기로 간주되던 모든 것들을 일축하는 포괄적인 단어가 되었다. 그러나 본서에서 말하는 '마오주의'는 지난 80년 이래로 마오쩌둥과 그의 영향력에 기인하는 광범위한 이론과 실천을 모두 포함하는 포괄적인 용어이다(P20). 책을 주문하면서도 그랬지만 책을 받고 나서도 저자가 과거 서구가 바라보는 중국, 그러니까 냉전적 시각에 의한 마오주의를 다룰까봐 우려스러웠다. 그러나 저자도 밝히듯 책은 후자적 방향으로의 마오주의를 다루고 있는데, 개인적으로도 이에 더 관심이 있었기에 다행이다 싶었다. 저자는 마오주의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견지하면서도 그 영향력에 대해 부인할 수는 없다는 태도를 보인다. 


이 책은 중국 혁명의 역사와 영향(과 평가)으로서의 마오주의를 다루고 있다. 소련을 비롯한 동구 공산권인 국제 공산주의는 무너졌지만 중국은 살아남았다. 그 중심에 마오쩌둥이 있고 마오주의가 있다. 마오주의는 끝내 살아남아 아시아, 아프리카, 남미 등 공산권에 영향을 미쳤고 자국 내 신마오주의가 부활함으로써 그 영향력은 지속 확대되고 있는 중이다. 저자는 기존에 퍼져 있던 마오주의에 대한 분석은 빠져 있거나 왜곡된 이야기가 많다고 이야기하며, 가장 큰 문제는 마오주의를 글로벌적 관점에서 보지 않는 것에 문제점이 있다 진단한다. 


마오주의의 시작은 에드거 스노의 '중국의 붉은 별' 저작에서부터다. 그가 없었다면 중국 내외의 마오쩌둥에 대한 숭배를 상상하기 힘들다. 스노는 이른 시기부터 중국공산당을 국제적인 홍보의 천재로 조명했고, 마오쩌둥의 사상과 실제 성격과는 다른 그의 페르소나를 묘사하여 국경과 언어, 계층을 넘어 전 세계의 추종자들을 끌어들이는데 일조했다. 중산 기득권층의 성장 배경에서 자란 그는 프리랜서 기자로 돈을 벌기 위해 1928년 상하이에 입국했다. 초반에는 중국에서 어렵게 지내다가, 1930년대 초 들어 쑹칭링(쑨원의 부인)을 만난 것을 기회로 삼아 이후 중국 정치계 인물들을 두루 만나게 된다. '중국의 붉은 별'에는 스노가 공산당 근거지로 잠입하는 과정과 중국공산당의 생존을 위한 투쟁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 중국공산당을 인간적인 모습으로 다루며 좋은 이미지를 확산시켰다는 것이 중요하다. 저작에는 마오쩌둥 개인에 대한 옹호를 넘어선 추종도 포함되어 있음은 물론이다. 


마오쩌둥이 중국 공산당 내 자신의 이름을 높여가다 결정적인 계기를 만든 것은 정풍운동 때문이다. 1942년 정풍운동은 문화대혁명의 전신이라 불리는데 형태를 보면 문화대혁명과 너무나 흡사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정풍운동'은 마오쩌둥이 1941년 공산당 최고 영도자가 된 이후 처음으로 당내 기율을 확립하기 위한 것이었다. 공격 목표를 고립시키고 왕년의 동료들을 비판 공격에 가담하도록 권유하며, 대중집회(중국의 군사적 용어로 말하자면 비판투쟁대회이다)를 개최하여 공개적으로 '적'에게 굴욕을 가함으로써 다른 이들이 이와 유사한 행동을 하지 못하도록 경고하고, 강제적으로 대중의 집단적 조롱을 유도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정풍운동'은 "역사상 가장 야심찬 인간조작 시도 가운데 하나"로 바뀌었다. 1950년대 미국은 이런 운동을 '세뇌'라고 불렀고, 중국은 이를 '사상개조'라고 불렀다(P69). 


1950년대 중국과 세계는 '세뇌'와 '도미노 이론'으로 대표할 수 있겠다. 중소동맹이 맺어지자 미국은 한 지역에서 공산주의가 시작되면 다른 나라도 연쇄적으로 공산주의가 팽창하며 도미노처럼 무너진다는 '도미노 이론'을 펼치며 색깔론을 주장했던 것이다. '세뇌'는 에드워드 헌터가 지은 두 권의 저작인 '붉은 중국의 세뇌(1951)', '세뇌:저항하는 사람들의 이야기(1956)'로 대표된다. "중국이 자유 세계를 향해 심리전을 벌이고 있다."고 저자는 주장했다. 에드거 스노에 이어 에드워드 헌터의 저작으로 마오주의는 강화될 수 있었다. 

중소 갈등은 냉전을 앞당겼고, 마오쩌둥은 중국에서 소련의 영향력을 근절하기 위해 급진적인 문화 대혁명을 일으켰다. 그 결과, 대기근으로 스스로 정치적 위기에 몰리자, 자신의 정적이었던 류사오치와 덩샤오핑 등을 끌어내리며 피바람을 일으켰다. 


1960년대 중국의 국내 선전 매체에는 세계 혁명에 대한 언급으로 넘쳐났다. 영화와 다큐멘터리, 심지어 음악과 수학 교과서, 연극과 보드게임에 이르기까지 중국의 지도자가 세계 혁명의 공동체를 영도하는 형상으로 가득찼다. 1960년대 중반에 성인이 된 세대는 특히 이런 선전을 잘 받아들였다. 중국 신문 및 방송 매체는 도처에서 그들 부모 세대가 참전하여 누렸던 영광스러운 군사적 희생(제2차 세계대전, 국공내전, 한국전쟁)을 그들도 놓칠 이유가 없으며 세계 무장투쟁의 혁명가가 될 수 있다고 끊임없이 말했다. 저자는 마오주의가 세계적 보편성을 표방했으나 단지, 지역성을 띤 국제화 형식이었다 말하며 이를 '고등 마오주의'라고 말한다. 당시 한국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싶다. 나의 부모님도 전후 세대로 어려움을 극복하고 대한민국이 이만큼 성장한 것에 대해 늘 자랑스러워하셨다. 아직도 어릴 적 부모님이나 주변 어른들로부터 전쟁과 이념에 대한 색깔론을 소리 높여 들을 때가 악몽처럼 떠오르곤 한다. 


마오주의의 영향력은 베트남과 캄보디아에도 이어졌다. 북베트남은 중국의 토지개혁과 비슷한 개혁을 실시했으나, 가혹하고 폭력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지며 사회적인 양극화를 불러 일으켰다. 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승리한 북베트남에 중국의 영향력은 막강했다. 이는 결과적으로, 제네바 협정에서 중국이 인도차이나에 개입하기를 꺼렸던 미국이 베트남 공산당의 통일화 연기를 미루도록 설득하여 베트남 분단이 확정되도록 만들었다. 1960년대 들어서 중국의 국내 정책(문화 대혁명 등)에 의구심을 품은 베트남은 중국과 갈등하게 되고, 이는 양국이 미국과 화해를 시도하는 한 계기가 되었다. 

마오쩌둥은 1975년, 크메르 루주(캄푸치아공산당)의 총서기인 폴포트와 회견했다. 당시 크메르 루주 지휘부는 모든 도시의 주민들을 농촌으로 소개시켰으며(그 과정에서 프놈펜에서만 약 2만여 명을 즉결 처형했으며, 수많은 주민들이 굶주림과 질병으로 사망했다.) 화폐와 시장을 폐지하고, 집단화를 강제했다. 중국은 캄보디아를 베트남에 대항할 국가 세력으로 간주하여 크메르루주의 행동을 용인했다. 이는 중국과 베트남의 관계를 악화시키게 만들었다. 이후 크메르루주는 1977년 베트남과 관계를 단절한다. 


1965년 인도네시아 공산당 학살 사건이 벌어지자 영국과 미국이 개입했다. 공산주의자 동조자명단을 인도네시아 군부에 넘기고 준군사조직인 암살단에 자금을 지원하며, 왜곡된 선전 방송으로 인도네시아 공산주의 공포와 혐오를 확산시키는 방식이었다. 이 때 인도네시아 국내 학살은 은폐되고, 공산주의자들이 정당 방위로 벌인 일임이 강조되었다. 학살 전 인도네시아 사회는 군부와 인도네시아 공산당 사이 양극화로 인해 민간인들은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으며, 이로 인해 폭력은 더 극성스러웠다. 1년 동안 군대와 민병대의 폭력으로 인해 최소 50여만 명이 사망했다는데, 장소만 다르지 한국도 이와 비슷한 일이 벌어진 적이 있기에 씁쓸함이 일었다.


남아시아의 마오주의 현상은 두 가지 중요한 점에서 전 세계 마오주의에 대한 이미지를 보다 선명하게 드러낸다. 우선 그 사상이 국경, 민족, 언어, 사회를 넘어 사방으로 퍼져나가는 놀라운 전파력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남아시아에서 문화대혁명의 이론과 실천은 국가와 사회를 지속적으로 변화시켰다. 남아시아에서 마오주의는 인도 사회의 카스트제도와 인종차별에 적응해야만 했기 때문에 "교과서적인 마르크스주의자들을 절망하게 만들었다. 마오주의 정치는 사회 저변의 불만과 결합했다. 예를 들어, 인도의 마오주의자들은 탈냉전 시대에 냉전 이데올로기에 기반한 정치운동을 구축하는 데 성공한 것처럼 보였으나 오히려 그들은 가난한 농촌을 고통에서 해방시키겠다고 주장했으나 오히려 빈곤한 농촌사회가 더욱 심각한 폭력에 시달리게 만들었다. 네팔 마오주의는 1940년대에서 1950년에 이르기까지 탈식민지화, 중국의 공산주의 혁명, 네팔 왕조의 종말 등으로 급격한 전환을 맞았고, 1960년대 문화대혁명과 그 여파로 시작되었다. 네팔 마오주의자들 중심에는 여성이 있다(물론 네팔 뿐만은 아니다). 카말라(프라찬다라는 별명을 가짐)라는 여성에 대한 이야기가 인상 깊었는데 그는 네팔공산당의 일원이 되어 향후에는 마오주의 반란을 이끄는 리더가 된다. 그녀의 해방 운동의 시작은 구조적인 불평등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인생은 왜 이렇게 불공평한가요? 왜 오빠만 학교에 갈 수 있고, 나는 안 되지요?" 그녀가 한 말이다. 어느 곳이든 가부장제 하에서 여성은 불평등의 밑바닥에서 시작되고 이는 자유를 꿈꾸게 만들며 해방을 꿈꾸게 한다는 생각을 새삼 하게 되었다. 


아프리카 여러 나라에도 마오주의가 퍼져 있었다. 식민지에서 벗어나 현대 경쟁 사회로 뛰어들어야 했던 때 반식민, 반서구주의에 입각한 중국의 메시지가 먹혀 들었던 것이다. 1960년까지 아프리카에서 매주 15시간씩 선전방송이 나왔고, 신문 매체는 중국과 아프리카의 각종 합작에 대한 기사나 사진으로 홍수를 이루었다. 마오쩌둥 서적이 전국적으로 배포되었으며, 무엇보다 중국의 전폭적인 경제 지원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중국에 의한 아프리카 현대화 시도는 실패했다. 탄자니아는 기근이 일어났고, 짐바브웨는 일당 독재와 경제적 재앙이 나타났다. 두 국가 모두 안정적인 정치, 경제적 통치 체제를 원했으나 모두 원하는 결과를 이끌어내지 못했다. 


1960~1970년대 서유럽과 미국의 젊은이들은 자유에 의한 갈망과 해방으로서의 분투와 저항 행동을 일으켰다. 문화대혁명은 젊은이들에게 "반란에는 이유가 있다. 세상은 당신들의 것이다"라고 부추겼다. 유럽과 미국인들은 문화대혁명의 목표를 자신들의 그것과 동일시했지만 이는 마오쩌둥의 정치 자체에 대한 진정한 이해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마오쩌둥의 정치를 멀리서 지켜본 이들에 대한 이야기가 대부분이다(이것이 팩트가 아닐까). 

1980년대 페루 정부는 무능했고 부패했다. 이 틈을 파고든 것은 '빛나는 길'이었는데 그들을 이끈 구스만은 대의를 위해서라면 그 어떤 희생도 마다하지 않는 비타협적 전쟁 모델을 선택했다. 이후 구스만은 페루 공산당을 창당하며 수장의 자리에 오른다. 그는 국가 기구를 압살하고 도시와 농촌, 백인과 메스티소, 인디언 사이 갈등을 조장하여 뿌리 깊은 차별을 만들어냈다. 인종과 계급을 넘어선 평등을 내세운 공산주의가 오히려 차별을 조장했음은 아이러니를 불러일으킨다.


마오쩌둥은 보시라이에 의해 부활했고 마오주의는 시진핑에 의해서 더욱 그 흐름이 강화되었다. 그렇다면 신마오주의는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일장일단이 있을 것이다. 현대 신마오주의자들이 흔히 하는 말에 따르면, '대중민주주의'는 문화대혁명의 '네 가지 자유', 즉 '자유로운 발언', '자유로운 조직과 활동', '자유토론', '대자보'를 통해 실현할 수 있다. 그들은 이러한 '언론 자유'를 통해 자연스럽게 대중이 여론을 통제하는 것을 촉진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대중민주주의에서 언론의 자유는 '사회주의적'이고 '애국적'이어야 한다는 전제 조건이 있었다. 따라서 언론은 거의 모두 필연적으로 민족주의 색채를 띨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현재 중국에서는 마오쩌둥과 마오 시대에 대한 공식적인 해독에 이의를 제기하거나 중국공산당의 권위에 도전하는 사람은 누구나 위험에 처할 수 있다. 얼마 전 베이징에서 관광객이 무심코 사진을 찍었다가 잡혀 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소셜미디어가 강화되면서 중국 정부와 언론은 이를 경계하는 흐름을 더 강화하는 것 같다(위챗 등).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에도 여전히 마오주의가 유효한 이유와 그 특징이 무엇일까 나름대로 생각해 보았다. 첫째는 반제국주의의 물결로 그 영향력이 컸다. 둘째는 제3세계에서 더 유효했다는 점. 셋째는 반공주의에 대항 기저로 공산주의가 더 확산될 수 있었다는 점. 넷째는 공산권이 무너졌음에도 중국이 살아남았다는 사실에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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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쟝쟝 2024-07-04 21: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역시! 물흐르는 듯한 정리!!! 박수를~~!!!
탈식민 공부하면서 꼭 참조할 레퍼런스 중의 하나로 넣어야 할 것 같은 책 이네요 ㅠㅠㅠ 아직은 멀었지만…! 중국에 관해서는 여러가지 생각과 복잡한 맘이 듭미다 ㅠㅠ

거리의화가 2024-07-08 13:47   좋아요 1 | URL
칭찬에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저도 중국에 대해서는 특히나 복잡한 마음이 듭니다. 일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고. 그러나 냉철하게 평가할 것은 평가하되 껴안아야 할 것은 껴안아야 하는데 한쪽으로 쏠리기 쉬운 것 같아요. 그럴수록 잘 알려고 노력해야지 하는 생각이 큽니다. 탈식민 공부할 게 너무 많아요ㅠㅠ 쟝 님 앞으로도 화이팅!
 
마오주의 - 전 세계를 휩쓴 역사
줄리아 로벨 지음, 심규호 옮김 / 유월서가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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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혁명의 역사와 영향(과 평가)로서의 마오주의를 다루는 책이다. 현대까지 마오주의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인지 그 기원을 살피고, 마오쩌둥을 비롯한 전 세계에 퍼져 있었던 마오 키즈를 소환한다. 마오주의를 글로벌적 관점에서 바라보자는 시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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