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2 - 정승화, 장태완 등 관련자 100인의 증언과 사진으로 재구성한 12·12 그날의 진실
이계성 지음 / 폴리티쿠스 / 2024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만난 매스컴 사진 및 영상 중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다. 죄수복을 입은 두 사람, 전두환과 노태우다. 어릴 때라 무슨 일인지는 자세히 알지 못했음에도 뇌리에 강렬했던 모양이다. 그 때는 그저 그들이 부패한 죄로 사법대에 올랐다고만 생각했다. 정치는 무관심이었고 그저 노래 듣고 부르기 좋아하는 어린 아이일 뿐이었으니 말해 무엇하랴.


이 책은 30 년전 5.18 진상 조사로 전두환과 노태우가 사법 심판대에 올랐을 때쯤 출간되어 나왔다가 올해 5.18 무렵 수정되어 다시 나왔다. 작가가 영화 <서울의 봄>을 보고 당시 상황을 궁금해 하는 젊은 층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프롤로그와 에필로그에 12.12 쿠데타 전후 사정을 실고 각주 등을 보충하는 등 작업을 추가했다고. 12.12를 잘 모르거나, 타이틀만 알고 있거나, 안다 해도 단순하고 피상적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충분히 도움이 될 책이다. 작가가 기자라 그런지 글이 마치 르포나 영화를 보는 것처럼 현장감이 넘쳐서 쉴 틈 없이 읽어내려갈 수 있었다. 


신군부 세력은 12.12를 왜 일으켰는가? 그들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없었는가? 궁금증을 위해서는 그 배경을 살펴보는 작업이 필요하다. 대체로 10.26 이후 전두환 및 신군부 세력이 정권 장악을 준비했다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기에는 '꼭 쿠데타여야 했는가.'를 답하기 쉽지 않다. 책에서도 살펴보듯 군 내부, 정부 부처 인맥 간의 갈등에서 비롯된 씨앗임을 알아야 비로소 사건의 본질에 가 닿을 수가 있다. 

사건의 발단은 윤필용 사건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윤필용 사건은 1972년 유신 마무리 후 1973년 유신의 주역이었던 세력 간의 권력 다툼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당시 박종규는 경호실장, 강창성은 보안사령관이었고 윤필용은 수도경비사령관이었는데 중앙정보부장인 이후락과 윤필용 간에 밀착이 이루어지자 박종규는 위기감을 느꼈다. 이에 윤필용이 유신 자축 모임에서 이후락에게 한 '각하(박정희)가 노쇠하였으니 다음은 이후락(형님) 차례' 발언을 꼬투리 삼아 그를 끌어내리고자했다. 발언 소식을 들은 박정희는 강창성 보안사령관에게 사건을 조사하라 지시했고, 이 과정에서 군 세력이 경상도 출신으로 걸러지게 되었다. 전두환과 노태우를 비롯한 하나회 세력에게는 기회가 된 셈이다.   


책을 읽으며 12.12와 관련하여 역사의 물줄기를 바꿀 수 있었던 여러 순간들을 정리하다 보니 자연스레 질문이 생겨나더라. 


먼저, 안타까웠던 순간들을 꼽아보자면 다음과 같다. 


1. 가장 놀랐던 것은 정승화 총장이 쿠데타 당일 오후 전두환을 불러 미팅을 했다는 것이었다. 이 때 전두환의 숨은 의중을 파악했어야 하는데... 


2. 정승화 총장 납치를 위해 온 보안사 인력과 방어 세력 간의 충돌로 총격전이 벌어지자 순찰 중이던 경비대는 분주히 움직였다. 그러나 공관경비대장인 황인주 소령과, 반일부 준위는 반대편 방향에서 몰려오는 육본 헌병 병력(33헌병대 소속 병력)과 마주쳐 그들에게 무차별 공격을 당했다. 육본 병력은 정승화 총장 연행 때 문제가 될까봐 합수부에서 파견한 인력들이었다. 이들이 약간의 시간차로 부딪치지 않았다면 납치되던 정승화 총장의 차가 빠져나가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면?


3. 전두환은 반란에 대한 최소한의 명분을 얻기 위해 최규하 대통령을 찾아 갔다. 최규하는 국방부 장관의 동의를 얻어 오라며 재가를 거부하며 버텼으나 결국은 막판에 전두환의 손을 들어줬다. 최규하가 끝까지 재가를 허락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꽤 오래 버티기는 했지만)


4. 윤성민 참모차장은 사태를 확인하고 반란군을 단호히 진압하기로 결심한다. 정병주 특전사령관에게 휘하 병력을 확실히 장악하라고 지시를 내리고 국방장관에게 계속 연락을 취했으나 실패하자 총리 공관에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대통령 비서실장로부터 통화를 거부당하고 말았다. 대통령과 참모 차장이 직접 통화를 할 수 있었다면?


5. 육본 지휘부 세력은 일사분란하게 움직이지 못하고 쿠데타 대응에 철저히 실패했다. 리더가 부재했다고는 하나 신군부의 쿠데타임을 인지하여 공격을 감행하는 식으로 전두환 측에 대응했다면? 


6. 노재현 국방부 장관은 자리를 옮겨 다니며 사태 마지막까지 본분을 지키지 않았다. 이 때문에 초기 진압 작전은 이루어질 수 없었고 신군부 세력의 쿠데타는 성공했다. 그가 최소한 자리를 지켜 지휘권을 행사했다면 어땠을까? (본인의 소임을 다 했다면)


7. 신군부는 1공수여단을 서울로 진입시켰다. 이에 장태완 수경 사령관은 30사단 박희모 소장에게 여러 차례 전화를 걸어 병력을 동원하여 1공수여단의 서울 진입을 막아달라 요청했다. 그러나 박 사단장은 육본과 합수부 사이에서 갈등을 하다 결국 합수부 측의 지시를 따라 서울 주요 통로에 병력을 배치하지 않았다. 그가 장태완 수경사령관의 지시를 따랐다면?


다음과 같이 질문이 떠오르거나 인상 깊은 장면도 많았다.


1. 전방에 있던 9사단과 제2기갑여단을 서울로 불러들인 합수부 측은 과연 국가를 위한 선택이라 말할 수 있나? 권력을 빼앗기지 않고 오히려 반격의 주도권을 잡기 위한 과정에 의한 수단이 아니었나.


2. 쿠데타 당일 밤 육본 참모회의가 열렸다. 전방 사단 병력들은 장관 없이 병력 동원 지시를 따르지 않겠다 고집을 부리는 상황에서 윤성민 참모차장은 참석자들에게 의견을 물었다. 장태완 소장은 명령부터 내려야 한다고 단언했고 이 의견에 찬성한 것은 유일하게 군수 참모부장인 안종훈 소장 뿐이었다. "군인의 사명에 따라야 하는 우리 고급 장성들이 우리만 살겠다고 쿠데타군에 손을 들자는 거요?"(P299) 그의 말은 백번 옳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종훈 소장은 5.17 전국 계엄 확대 회의 때도 소신 발언을 했다는 것에 눈길이 가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중심을 지키는 군인들은 내쳐지고 권력 맛을 아는 인간들만 승승장구를 했으니 참...


3. 전두환은 쿠데타 이전부터 군 개편을 구상했고 정승화 총장의 혐의가 없음을 알면서도 박정희 시해 동조자로 몰아 반란의 명분으로 삼았다. 하나회를 중심으로 선배 장성들을 모으면 정승화를 연행하는 데 별 어려움이 없었다고 생각한 그 자신감이 소름끼친다.


4. 신군부는 미국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고 12.12 승인을 받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당시 한미연합사 사령관인 위컴은 전방 부대를 서울로 진입시킨 것에 특히 분노했다. 군 핵심 전방 부대를 쿠데타를 위해 사용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는다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두환은 12.12 사태를 10.26 사건 수사 과정에서 우발적으로 발생한 사건으로 축소시키고, 신군부는 이후 정치에 가담하지 않을 거란 약속을 하며 빠져나갔다.


1980년 3월 5일 정승화 총장은 내란방조죄 혐의를 받아 재판부에 넘겨졌다. 그러나 재판부는 '김재규가 박정희 대통령 시해 범인임을 알고도 나라의 실권자가 될 것으로 판단해 그의 내란 행위를 도왔다.'고 공소 이유를 밝혔다. 그러나 정승화 변호인 측은 내란 행위 여부가 논란인 상황에서 공판은 대법원 판결 후로 연기해야 한다며 공판 기일 변경 신청을 했으나 재판부는 그 요청을 기각해버렸다. 군검찰은 내란방조죄를 적용해 징역 10년형을 선고받았으나 물증이 아닌 심증만으로 불충분함이 발견되어 확인 과정에서 7년형으로 확정됐다.  


같은 해 4월 14일 전두환은 기존 보안사령관에 중앙정보부장 서리까지 겸직하게 되면서 막강한 권력자의 지위에 오른다. 바깥은 개혁의 바람으로 일명 '서울의 봄'이었지만 그는 사실상 권력의 정점에 오르며 국가를 자신의 입맛대로 만들기 위한 준비를 착착 해 나가고 있었다. 

전두환이 중앙정보부장 겸직 요구를 관철하려할 때 청와대가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고 한다. 최광수 비서실장을 압박하는 등 여러 사정이 있었다는데 과연 최규하 대통령은 이 때 전두환을 올리는 일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지 궁금하다. 이제는 다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일까. 


12.12 쿠데타 사건을 책을 통해 복기하면서 노재현 국방 장관과 최규하 대통령의 진심이 정말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끝까지 진실을 밝히지 않고 사망한 두 사람의 마음은 대체 무엇이었는지.


의도한 것은 아닌데 영화 <서울의 봄>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 이 책을 완독하고 이제서야 보았다. 영화는 빠른 전개로 쉴틈없이 몰아치지만 아무래도 등장 인물이 가명을 사용하고 사건을 아무래도 압축적으로 표현하는 부분에서 설명이 부족할 수밖에 없다. 이 책은 보충 자료로서 충분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3장

여성의 경제 활동 참여 유형에 관한 최근의 연구들(이효재 · 조형,
1976: 김애실, 1981: 주경란, 1983)에서 공통적으로 지적되고 있는 것은 현대 교육의 보급률에 비하여 고등 교육을 받은 여성들의 취업률이 높지 않다는 점이다. 특히 1970년대의 급격한 국민 경제 규모의확장에 따라 여성 인력의 현저한 양적 증가가 기록되었으나 질적인면에서는 거의 아무런 변화를 보이지 않고 있음이 주목되어야 할 것이다. - P137

여성을 위한 조직의 경우 여성들이 중심이 되는 조직을 이루게 되는데 이러한 조직은 민주적인 운영을 해나갈 잠재력이 매우 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1) 인간 관계에 대한 관심이 필요 이상으로 작용하여 업무상 능률이 낮아지고 (2) 여전히 특수주의적 원리가 지배적이며, 직업 및 가족에 관한 의식면에서 나타나는 큰 차이를 줄일 효과적 기제를 아직 발전시키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시어머니 체제‘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지적이 있었다. 이는 현재의 여성 주도적 조직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 소수 엘리트층 여성들의 사고방식과 이 조직이 강자 집단을 모방해야 하는약자 집단의 조직이라는 특성과 관련하여 앞으로 더 깊이 파악되어야 할 문제로 보인다.
남성 주도적 조직에 여성이 진출하는 경우에는 채용시부터 남성보다 더 까다로운 심사를 거치게 된다. 예를 들어 실력 외에 결혼 여부·가정 배경 등의 조건이 고려되며 ‘팔방미인‘ 적 여성, ‘분위기‘를맞출 수 있으며 공격적이지 않은 성격이 선호된다. - P179

전문직 여성들은 직장내에서 여전히 강하게 작용하는 남녀관의 압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첫째로, 여성에 대한 선입관이 여전히 작용하여 능력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는 한편, 여성의 모성적 역할의 강조가 직장에서도 똑같이 요구되어 자신의 의사와는무관하게 양보의 미덕을 또는 중재의 역할을 떠맡게 된다. 남녀 유별의 전통 때문에 직업 동료로서의 남녀 관계는 아직 확립되어 있지 못하며 이에 따른 혼란과 갈등 역시 무시 못할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둘째로, 조직체에서의 진출 양상을 살펴보면 우리나라의 경영 방식 - P187

에 있어서 연줄을 통한 비공식적 관계가 여전히 큰 비중을 차지하고있으므로 보편적 기준에 의한 고용이 어려우며, 일 처리에 있어서도뒷거래가 성행하여 다수의 여성은 불리한 위치에 있다. - P188

직업 활동을 포기하지 않고 ‘성공적‘으로 지속해나갈 수 있는 여성은 현재로서 선택된 집단에 국한되어 있다. - P196

여성들은 어릴 때부터 집단 활동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으며 따라서 조직 생활을 위한 훈련이 거의 되지 않은 채 성장한다. 한편 기회가 부여된 경우에도 어려움을 겪는다. 이들은 조직의 이방인. 주변인으로서 자신의 전문적 역할 외에 여성이라는 신분에 따르는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 동시에 ‘통계적 불평등‘ 때문에 갖는 ‘고립‘과 ‘눈에 뜨이지 않으려는‘ 방어적 처신으로 조직내에서 어려움을 겪게 된다. 큰 조직체내에서 활동하는 유능한 여성들이 기업의 중심 계열에 들기보다 고문이라든가 스탭이라는 주변적 위치에서 활동하기를 원하게 되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권력, 기회 구조, 그리고 숫자의 문제와 관련된다. - P200

여성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현실적인 선택들, 바라는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따라가야 하는 진로, 그리고 지불해야 할 대가와 얻게 될 보상에 대하여 냉철하게 따져보면서 개인적 적응과 성장을, 그리고 조직체의 구조 개선을 도모해나가야 할 것이다. 이 작업에 있어 여성들간의 유대와 협력은 필수적이다. - P20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장 한국의 가부장제에 관한 해석적 분석

1. 조선의 가부장제
여성은 어머니로서만 인정되었다. 그러나 조선 중기 이후 강한 생활력, 적극적 지탱자로서 여성의 역할의 폭이 확대되었다.

조선후기 경제활동이 없는 남성들을 대신하여 여성의 활동이 넓어졌다는 분석이 흥미로웠다. 단, 정치적 활동이 아닌 경제적 활동 위주였다.

’자궁 가족‘은 번역한 용어가 와 닿지는 않았다.

2. 근현대 가부장제
근대 초기 여성의 권한은 높아졌으나 중심 가치는 신분 의식, 가부장제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고 자본주의 이데올로기가 더해졌다.
현대는 현모양처 이데올로기가 정착되며 여성의 나약화, 한편으로는 자립화가 이어졌다.

남아선호가 일방적으로 여성이 강요받았던 측면이 컸다고 생각했는데 여성이 자발적으로 유리함에 의해 선택했다는 측면은 약간 놀랍기는 했다. 하긴 예전에는 딸은 시집을 가면 그만이라고 나조차도 그런 이야기를 심심치 않게 들었었다. 내 어머니조차도 할머니께서 아들을 둘 반드시 낳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어도 남성이 집에 있어야 한다는 그런 의식이 당연히 작용했을 거라 생각한다.

공식적인 부자 관계에 대비된 가족적 모자 관계 내지 ‘자궁 가족‘을 통해 여성은 상당한 권한을 가질 수 있었다. 특히 유교 윤리의 실천이 사회적 지위 상승에 중요한 변수로 부각됨에 따라, 여성은 적극적 행위자로서 ‘열녀‘ ‘효녀‘ 등의 공적 인정을 받을 기회가 생겼으며, 또한 ‘선비상‘을 이상으로 하는 사회에서 ‘세정‘을 모르는 남성의 보완자로서 경제 생산적 활동을 포함하여 일상 생활을 꾸려가는데 있어서 여성 역할의 비중은 매우 컸다. 여성은 어려운 단절적인시집살이를 이겨나가야 했던만큼 성취적이고 강한 인성을 지니게 되었으며 여성만의 안채 문화는 그들 나름의 갈등과 불만을 해소하는기능을 수행하여왔다.
궁극적으로 혈통을 극도로 중시한 당시의 체제에서는 대가족내의연장자이자 혈통 계승자의 어머니로서 여성의 지위와 활동에 상당한권한을 부여한 셈이며 여성들은 이 여자를 십분 활용하여 가부장제의 유지를 적극적으로 도와왔던 것이다. 여성이 인격으로서가 아니라 어머니로서만 인정되었다는 점과 여성 자신들이 조선 중기 이후의 붕괴하여가는 체제를 강한 생활력으로 보완하며 적극적인 지탱자가 되어왔다는 점을 이해하는 것은 가부장제의 현대적 변형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 P100

한국 사회에서의 가부장제 극복의 과제가 무엇인지는 매우 분명해진다. 첫째는 조선 시대로부터 사회 구성의 이념적 기본이 되어온 엄격한 공공/가정 그리고공/사"에 대한 인식, 그리고 그런 인식을 토대로 형성되고 재형성되어온 사회적 관계 구조, 특히 성과 부권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두번째는 새롭게 확대되고 있는 산업 자본주의적 여성 통제의 기제즉, 미시적으로는 낭만적 사랑에 근거한 핵가족 이데올로기와 거시적으로는 국가 및 기업 등 조직의 확대에 따라 더욱 강화되는 인간의도구화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나갈지가 문제가 된다. - P127

울프 Wolf(1972)는 중국 여성의 삶에 성취적· 획득적인 성격이 두드러진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자궁 가족 uterine family‘ 의 개념을 소개하였다. 남편의 집에 편입된 가장 낮은 지위에 있던 젊은 여성은점차 자신이 낳은 ‘핏줄‘을 이 집안에 더해감으로써 자신의 세력권을구축해간다. 자궁 가족내에는 자신이 낳은 자녀들과 며느리가 포함되며 남편은 별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지 못한다. 이 가족은 먼 조상까지를 포함하여 연속성이 중시되는 남성들의 가문과는 별 관계가없는 사적인 가족으로 어떤 뚜렷한 이데올로기나 형식적인 구조도갖고 있지 않다. 가족 유대는 주로 감성과 충성심에 기초한 것이나, 주목할 점은 그것이 구성원에게 공식적 가족 못지않은 구속성을는다는 점이다. 울프(1972: 37~38)는 여성을 철저히 배제시킨 것으로 보이는 유교적 가부장제가 여성을 상당히 성공적으로 흡수할 수있었던 근거는 바로 자궁 가족과 공식적 가족의 목표가 다행스럽게도‘ 잘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 P8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9월에 車駕가 궁중으로 돌아왔는데, 황제가 執金吾 寇恂에게 이르기를"
潁川지방은 京師(洛陽)와 매우 가까우니, 마땅히 제때에 평정하여야 한다. 생각건대 오직 만이 평정할 수 있으니 九卿으로부터 다시 外職으로 나가서國事에 매진하는 것이 가하겠는가?" 하였다. 恂이 대답하기를 "潁川의 도적들이 폐하께서 隴과 蜀을 정벌하시는 일이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 때문에 미친 자들이 틈을 타고서 서로 속이고 그르친 것일 뿐이니, 굳이 병력을 동원하여 토벌하지 않아도 만일 乘輿가 남쪽을 향해 오신다는 말을 들으면 도적들이 반드시 두려워하여 명령을 따를 것이니, 신은 원컨대 예리한 병기를 잡고 선봉이 되겠습니다." 하니, 황제가 그 말을 따랐다.
庚申日에 車駕가 남쪽을 정벌하니, 潁川의 도적이 모두 항복하였다. 寇恂이 끝내 郡守에 임명되지 않자, 백성들이 길을 가로막고 말하기를 "원컨대폐하로부터 寇君을 다시 1년 동안 빌리고자 합니다." 하였다. 이에 寇恂을 長에 남겨 두어 관리와 백성들을 鎭撫하게 하고 나머지 항복하는 자들을받아들이게 하였다.

東郡과 濟陰에도 도적이 일어났으므로 황제가 李通과 王常을 보내어 이들을 공격하게 하였는데, 耿純이 일찍이 東郡守가 되어 위엄과 신의가衛지역(東郡)에 드러났다 해서 使를 보내어 耿純을 太中大夫로 임명하여 軍과 東郡에서 만나게 하였다. 東郡에서는 耿純이 경내로 들어온다는 말을 듣고는 도적 9천여 명이 모두 耿純에게 나아가 항복하니, 大軍이 싸우지 않고돌아오자 親書를 내려 다시 耿純을 東郡守로 임명하였다. - P30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노마드 - 문명을 가로지른 방랑자들, 유목민이 만든 절반의 역사
앤서니 새틴 지음, 이순호 옮김 / 까치 / 2024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주말에 영화 <노매드랜드>를 보았다. 몇 달전 봐야겠다고 생각을 했었지만 놓쳤었는데 이번에 책 <노마드>를 읽으면서 자연스레 떠오른 것이다. 사실 책의 내용과 영화 내용은 관련이 없다. 그렇지만 연결되는 지점은 있다. '떠나는(방랑하는) 삶'에 대해 생각해볼 거리를 던져준다는 점에서 그렇다. 몇 년전부터 부쩍 몸이 하나둘씩 고장이 나고 회복 속도가 느려지는 것을 느끼면서 나이듦을 절실히 느끼고 있다. 만남보다는 헤어짐이 더 많아진다는 것도 그렇다. 그러면서 죽음을 생각할 때가 많은데 가능하면 가까운 사람들과 덜 아프게 헤어지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죽음을 목전에 둔 이, 자식 등 가까운 사람들을 먼저 떠나 보낸 이들 등 상실을 경험한 사람들이 영화의 등장인물들로 나오는데 보면서 느끼는 바가 많았다. 그동안 어딘 가에 주거하며 정착하는 삶이 안정적인 것이라고, 당연하다고 생각해왔다. 그런데 20년을 넘게 일하면서도 내 집 하나 없는 지금의 삶은 이미 그런 이상과는 거리가 멀어져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다. 영화에서도 은퇴하면 여행하려고 요트를 사두었으나 어느 날 병을 얻어 죽는 바람에 요트는 쓸모 없는 것이 되어버린다. 그러면서도 가진 것들을 놓은 채 훌쩍 떠날 수 있을까 고민이 되었다. 자원의 소비와 순환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거리가 많았다. 지구의 자원을 쓸 줄만 알았지 이를 자연에 어떻게 돌려주어야 할 지 고민하지 않는 민망한 지구인으로 살면서도 깨닫는 바가 없다면 이 지구는 앞으로 누가 책임질 것인가에 대해서 말이다. 영화 속 풍경은 슬프도록 아름답다. 영화관에서 더 큰 화면으로 보았다면 훨씬 좋았겠다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너른 하늘과 대지는 복잡한 도시에서 살아가는 나란 인간이 얼마나 작은 존재인가 느끼게 만든다. 


<노마드>의 저자는 21세기 이란의 자그로스 산맥에 방문하여 경험한 바를 책의 서두와 말미에 썼다. 그곳의 풍경을 보면서 마치 영화 속 풍경(물론 위치는 완전히 다르지만)과 비슷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을 했다. 책의 내용을 압축하여 말한다면 유목민들의 역사일텐데, 유목민과 정착민 간의 관계에 기반하여 기술했다는 것이 특징적이다. 기원전 8천년 전부터 20세기에 이르기까지 아주 긴 문명사를 요약해놓았다. 인물, 사물을 묘사하듯 그려서 지루함을 덜하게 하고, 세계사답게 특정 연도에는 세계 곳곳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기술하는 것도 독자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괴베클리 테페는 고대 문명사를 다시 썼을 정도로 지금은 중요한 유적이 되었다. 이곳은 인간이 어떻게 정착하게 되었는지 알려주는 유적이어서 특히나 중요하다. 수렵-채집, 이동 중심의 생활을 하던 인간이 정착하는 인간이 된 것은 농경의 시작이라고 배워왔다. 그러나 어떤 문화도 과거와의 단절에서 시작하지 않는다. 수렵-채집을 하면서도 농경으로 잉여 생산이 늘어나면서 점차 정착으로 이어졌다고 봐야할 것이다. 


예로부터 유라시아 스텝 지역은 수많은 유목민들이 거쳐가는 대자연이었다. 초원을 끊임없이 이동하며 사는 사람들은 여러 모로 말이 중요 자원일수밖에 없었다. 말은 1차적으로 인간의 이동 수단이 되었는데 말에 바퀴가 결합함으로써 마차 또는 전차로 변화하면서 인간의 이동 수단을 확장시켰다.


메소포타미아 우르크 성벽은 길가메시 신화가 서성이는 공간이다. 우리는 길가메시를 인간을 대표하고 엔키두는 자연을 대표하여 문명 대 야만으로 쉽게 치부해왔다. 하지만 엔키두의 무시무시한 능력을 위협으로 느끼면서도 이를 교화의 대상으로 생각하는 것은 생각해보아야 하지 않을까.


오시리스 신화는 홍수를 통제하는 법을 알려주는 존재인 '오시리스'와 사막을 지배하는 '세트'가 나온다. 이집트는 오늘날에도 문명사적으로 중요하게 다뤄진다. 과연 이집트인들 스스로도 자신들이 일구어낸 문명을 중요하게 여겼을까. 어쨌든 힉소스인들이 이집트를 정복한 것은 뼈아픈 실패처럼 여겨졌고 이는 신화로 남았다.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도 그런 구도를 담고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오디세이아는 주인공이 전투가 끝나고 온갖 모험을 하며 귀향하는 이야기로 유목민과 정주민 간의 갈등 끝에 정주민으로 귀착된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일리아스는 그리스 연합군과 페르시아 간 벌어진 트로이 전쟁을 다루는데 그저 모험과 전쟁 이야기로만 생각했었는데 유목민적 삶의 특징에서 볼 수도 있다는 지점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기에 흥미로웠다.

(페르시아는 키루스 대왕 시절부터 국력을 키우다가 크세르크세스 때가 되면 수도인 페르세폴리스를 건설할 정도가 된다. 페르세폴리스는 온갖 물자가 드나들어 부유했고, 여러 문화를 경험할 수 있는 곳으로 다양성을 지닌 곳이었다. 페르세폴리스는 당시 유목 세계를 대표하는 곳이었으나 알렉산드로스 1세에 의해 파괴되면서 유목 세계가 파괴되었다.)


흉노와 서쪽에 있는 그들의 짝 스키타이인은, 헤로도토스와 사마천이 말하는 동과 서의 세계를 연결하면 혜택이 생긴다는 점을 이해하고 있었다. 스텝 민족은 사치품 교역을 이끌어간 초기의 견인차였다. 성벽 내에 사는 사람들은 대부분 자국민 위주로 유대를 형성했다. 하지만 이주의 필요성 때문에 부득불 말 타기의 명수가 되고 수레와 전차를 발명했던 스텝 민족은 방대한 거리를 횡단하는 습성이 있었다. 그들은 마음을 가라앉히는 법을 알고 있었고, 낯선 것에도 편안해했다. 또한 생소한 관습을 용인할 줄 알았고 이해할 수 없는 언어들을 우회하는 방법을 찾아냈다. - P152


4세기 초 기후 변화로 세계적으로 강우량이 급격히 줄어들었다. 이 때 목초지나 물을 찾아 이동하는 유목민들이 늘어나 고트족, 훈족은 도나우강을 넘어 동쪽에서 서쪽으로 진출하였다. 기번은 훈족을 부정적으로 묘사하였으나 훈족은 BC451년 로마와 고트족 연합군을 격파하면서 로마 힘을 약화시킨 이력을 가지고 있다.


이븐 할둔은 <역사서설>을 통해 다양성과 변화를 포용하는 유목민의 능력에 관심을 두었고 그 중 아랍인들을 유목민들 중 가장 굳센 종족이라 생각했다. 아랍인들에 대한 인식은 그의 책을 통해서 비롯된 것들이 크다. 

아랍인 무슬림 세력의 극적인 확대는 기존의 세계질서를 바꾸었다. 700년대 중엽에는, 로마 제국이 콘스탄티노플의 일부 지역과 발칸 반도의 오지로 규모가 축소된 반면, 아랍의 지배권은 인더스 강에서부터 대서양까지 뻗어나가 이전의 어느 제국보다 커졌다. 하지만 이 신생 제국의 가장 놀라운 점은 제국의 크기가 아니라 그 제국이 이동하는 습성을 신속한 정복으로 이끌어간 사막인, 유목민이 쟁취한 것이라는 점이었다. 핵심 측근과 장군들의 대다수는 도시 정착민이었지만, 아랍인의 85퍼센트와 8세기 무슬림들은 대부분 이동하는 삶을 살거나 유목민의 전통으로 단련된 사람들이었다. - P193


아바스 왕조 때가 되면 종이가 전해져 필사가 가능해진다. 이후 타타르인 몽골이 부상하는데 중국, 위구르에 이어 호라즘까지 섭렵하며 힘을 키우다 나중에는 캅카스부터 카스피해에서 고려까지 7000km가 넘는 영토에 다다를 정도가 된다. 몽골의 중요 도시는 카라코룸과 사마르칸트다. 두 도시 모두 방대한 제국을 대표하는 도시이면서도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교류할 수 있는 개방성 있는 도시였다는 것이 특징이다.  

빌럼 수도사가 중앙아시아를 거쳐 몽골까지 한 여행기, 마르코 폴로의 여행기 등을 통해서 몽골이 세계 중심이자 문화적, 경제적으로 확장성을 지닌 곳이었음을 여실히 느낄 수 있다. 비잔틴 제국의 수도였던 이스탄불을 무너뜨린 오스만은 제국의 길에 들어선다. 그들은 천막, 말 중심의 유목민 뿌리를 잊지 않고 정체성을 지키며 살았다. 


대서양 횡단이 시작된 이후 베이컨과 갈릴레오를 비롯한 지식인들은 자연을 통제하는 것에 대한 노력을 기울여야한다고 주장했다. 프랭클린은 '근면'을 신념으로 삼았는데 원주민을 게으르고 방랑적 기질이 있는 이들로 치부했다. 새뮤얼 존슨은 18세기 말 영어 사전을 만들며 노마드, 유목, 방랑을 배제하여 편견을 고스란히 드러냈다(존슨 박사에 대해서는 두 가지 견해가 존재한다. 하지만 두 견해 중 어느 것도 그가 왜 "nomad"를 사전에 등재할 가치가 없다고 여겼는지를 설명해주지는 못한다. 그는 사하라를 본 적이 없고, 엠티쿼터 나고비 사막을 걸어본 적도 없었다. 그런데도 그가 사막desert을, "황무지, 황야, 황폐한 고장, 사람이 살지 않는 곳"으로 사전에 실었다. 방랑자wanderer는 "방랑을 직업으로 하는 상인과 같은 사람이면서, 그와 동시에 토지나 일터로는 쓸모없는 모든 곳에 존재하는 사람"으로 사전에 등재되어 있다. 그는 이동 방목을 뜻하는 transhumance도 그의 고향 마을에서 행해진 일이었는데도 사전에 포함시키기에는 부적절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심지어 migration도 싣지 않았다: P345~346). 빙켈만은 고대예술사를 통해 유럽의 고대 문명의 위대함을 찬양한다. 


기계식 파종기와 제니 방적기가 발명되고 공장식 대량 생산이 가능하게 되면서 영국의 생산력은 급격하게 늘어난다. 이후 도시로의 인구 유입이 증가하여 생활비가 늘어나면서 부익부빈익빈으로 구성원 간 불평등이 심화한다. 미국에서는 라이플(총기)이 개발되고 철도가 깔리면서 들소 등이 내몰리고 원주민이 삶의 터전을 잃고 무너뜨리는 것이 훨씬 쉬워졌다. 리틀 빅혼 전투에서 원주민을 상대로 미군이 패배하면서 희대의 학살극이 벌어졌고 이후 살아남은 이들은 보호구역으로 강제이주당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곱씹을수록 문명과 야만의 기준은 누가 만든 것이며 이는 일방적인 잣대가 아닐까 생각하게 한다. 유목민의 세계는 우리 생각 이상으로 넓고 큰데도 여전히 이들의 역사는 정주사보다 모호한 경우가 많다. 아무래도 유목민들 자체의 기록이 부족하기 때문이 크다. 저자도 서두에 밝혔듯 이 책의 서술도 서구의 사료를 이용했기에 한계가 있다고 말한다. 동방과 서방의 기준도 오랫동안 서방이 기준인 것처럼 이어져왔듯 정주사와 유목사도 그래왔다. 그래도 최근에 와서 문명에 대한 비판이 많이 이어지고 있음을 느낀다. 무엇보다 인간의 이기심으로 파괴되는 자연과 기후의 영향이 그렇다. 순환이 중요함을 알았던 유목민들의 지혜가 앞으로는 정말 필요한 때가 아닐까 생각한다.


방랑하는 우리의 "다른 반쪽을 재평가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들이 우리에게 공헌한 바를 밝히는 작업은 모두 우리 정착민들이 이동하며 사는 사람들에게서 배운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며, 우리가 협력에서 얻은 것이 얼마나 많은지도 보여준다. 또한 그것은 그들이 가볍게, 그리고 보다 자유롭게 살아갔다는 점에서, 환경에 순응하고 행동할때 기민함과 유연함을 발휘하는 법을 터득했다는 점에서, 그리고 자연계와 지속적으로 균형을 맞춰갔다는 점에서삶의 또다른 방식, 인류의 "다른" 반쪽이 먼 과거의 비옥한 정원에서 하나의 단일 집단으로 사냥하며 살았던 시대 이후로 줄곧 유지해온 삶의 방식도 엿볼 수 있게 해준다. - P23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바람돌이 2024-07-08 22: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안 그래도 이 책 내용 궁금했는데 화가님 덕분에 궁금증을 풀었네요. ^^

거리의화가 2024-07-09 08:43   좋아요 1 | URL
바람돌이 님 오랫만에 댓글로 만나니 더 반갑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한데 궁금증을 푸셨다니 다행이에요^^ 감사합니다.

희선 2024-07-09 03: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예전엔 옮겨다니면서 수렵과 채집으로 살았군요 그건 사람이 적어서 그럴 수 있지 않았을까 싶기도 합니다 그런 사람은 더 많이 늘지 않았을지... 인류가 죽 그렇게 살았다면 지금 어떤 모습일까 싶기도 하지만... 그런 일은 생각하지 않는 게 낫겠습니다 역사는 바꿀 수 없으니...

한곳에 산다 해도 그렇게 여기 저기 다니면서 살고 싶은 사람도 있겠습니다


희선

거리의화가 2024-07-09 08:47   좋아요 1 | URL
수렵-채집 생활에서 시작한 인간이 정착을 주로 하게 된 이후 제법 많은 세월이 흘렀지만 그럼에도 수렵-채집 기간이 훨씬 길었을거란 생각을 합니다. 일장일단이 있을텐데 미래인들이 과거와 현재를 어떻게 평가할까 궁금하기도 해요. 그러나 지구를 망가뜨렸다는 것에서는 자유로울 수 없겠지요. 희선 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