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파니샤드』는 우리를 브라흐만(한정적 브라흐만)으로 인도하는 구절들로 가득 차 있다. 여기에서 핵심은 결국 욕망/욕심을 극복하는 것이다. 우파니샤드의 사유는 욕망을 부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아르타‘와 ‘카마‘를충족시켜야 그 후 ‘다르마‘와 ‘모크샤‘도 이룰 수 있다. 그러나 욕망/욕심 - P512

은 끝내는 극복해야 할 무엇이다. 욕망은 업이 사라지지 않는 한 역시 사라지지 않으며, 업 또한 욕망이 있는 한 계속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윤회란 결국 욕망과 업의 윤회이다. - P513

힌두교는 브라만적 우주관을 다시 세우고 ‘범아일여‘의 사유를 다시 다듬었다. 세계는 주기적 해체와 재창조를 계속한다. 해체는 브라흐만이 세 현현을 거두어들이는 과정이고, 재창조는 다시 세 현현을 시작하는 과정이다. - P524

붓다의 가르침은 ‘사제(四)‘라 불린다. 처음에 붓다 사유의 출발점은 모든 것이 ‘고‘라는 ‘고제(苦諦)‘였다 일체개고. 그리고 삶의 고뇌가 어떤 이치로부터 생겨나는가를 12연기설을 통해 통찰하는 것은 ‘집제(集諦)‘이다 제행무상. 그리고 고뇌로부터의 벗어남을 12연기를 거꾸로 생각해봄으로써 이해하는 것은 ‘멸제(滅)‘이다-제법무아. 마지막으로 멸제를 이룰 수 있는 길로서 제시된 8정도가 ‘도제(道)‘를 이룬다 열반적정 (涅槃寂靜). 붓다의 이 4제는 우파니샤드의 사상과, 그리고동시대에 나란히 등장한 지중해 문명에서의 소크라테스 ·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동북아 문명에서의 노자 · 공자의 가르침과 더불어 고대세계의가장 위대한 가르침들 중 하나로 손꼽힌다. - P541

업과 윤회의 사유에서, 붓다의 사유와 플라톤의 사유는 유사하면서도 대조적이다. 붓다와 플라톤은 공히 이승과 저승을 연속으로 보았다. 윤회와상기설은 삶의 차원과 죽음의 차원에 연속성의 가교를 놓는다는 점을 공유한다. 플라톤에게 이 연속성은 죽음으로 인한 단절을 오히려 해방으로,
"영혼의 감옥으로부터의 탈주로 이해하게 해준다. 그러나 영혼은 자신이지은 업에 입각해 육체의 감옥으로 되돌아와야 한다. 붓다에게도 역시 개아는 업의 상태에 따라 상이한 방식으로 윤회의 고리를 따라 다시 생을 살아야 한다. 그러나 이들에게 이 연속성의 끈은 정확히 반대의 뉘앙스를 띤다. 붓다에게 윤회의 고리는 어떻게든 끊어야 할 끈이며, 이런 해탈은 업을완전히 씻음으로써만 가능하다. 반면 플라톤은 삶은 ‘고‘라는 붓다의 직관을 공유하고 있지 않으며, 이는 그가 곧 윤회를 고통으로만 보지 않음을 함축한다. - P544

아비달마불교는 세계의 근본 실체들을 분석해내고 현상을 그 실체로 환원해 현상에 대한 집착, 특히 자아에 대한 집착을 벗어나고자 했다. 그리고그런 벗어남을 위해 교단을 조직하고 일정한 계(戒). 정(定)·혜(慧)를 닦아열반에 이르는 길을 추구했다. 아비달마불교는 여러모로 에피쿠로스학파 - P556

를 연상시킨다. 또, 세계를 그 존재요소들로 세분하고자 했다는 점에서는니야야 - 바이셰시카 학파에 근접하고, 현상세계를 환(幻)으로 보고 그 너머의 실재를 강조했다는 점에서는 베단타 - 미맘사 학파(특히 샹카라학파)에 근접하기도 한다. 아비달마불교는 세계의 존재론적 층위들(ontologicallayers)의 복합성이나 존재론적 분절(ontological articulation)의 상대성 등에관련해 현대 존재론의 시선으로 보면 단순한 형태의 환원주의로 보인다.
또 불교 자체 내에서 볼 때, 후대 불교 학파들이 비판했듯이 실체주의를 벗어나려 했던 붓다의 본지에 거슬러 실체주의적인 경향으로 흘렀다. 그리고 그들이 실체로 지목한 일부는 다른 학파들의 관점에서는 사유의 산물일 뿐인 것으로 보이기도 했다. 즉, 아비달마불교는 6경 중의 ‘법‘에 속하는 것들을 실재로서 본 것이다. 그러나 아비달마불교는 경험세계를 꼼꼼하게 분석해 ‘무아‘를 집요하게 증명하려 했다는 점에서 역시 불교적 사유의한 핵심 갈래를 형성한다고 할 수 있다. - P557

나가르주나는 우리가 실체화하는 이원성은 착각임을, 진상(tathatā)은 ‘불이(不二)‘의 차원 즉 ‘공‘에 있음을 역설한다. 이는 아비달마불교의 ‘아공법유‘에 대해 ‘아공법공‘을 분명히 하는 생각이며, 사실 바이셰시카 - 니야야학파를 포함해 세계와 자아 그리고 경험에 대한 ‘분별‘을 위주로 하는 모든 학파들에 대한 급진적인 비판이라고 할 수 있다. 나가르주나의 공사상은, 공 자체의 실체화를 포함해 인간이 행하는 모든 분석적 사유의 원초적인 한계를 논파하려 한다. 그에게 이런 논파는 ‘공‘의 진리에 도달하기 위한 것이고, 붓다의 가장 위대한 설법인 연기설이 그리고 그가 제시한 중도의 길이 다름 아닌 ‘공‘임을 증명하려는 것이었다. - P564

세계를 ‘전개‘의 측면에서 본다는 것은 상키야학파를 니야야 - 바이셰시카 학파와 구분해준다. 물론 어떤 사유에서나 그렇듯이 양자에는 모두 구조와 생성의 측면이 존재하지만, 니야야 - 바이셰시카 학파가 구조에 무게중심을 둔다면, 상키야학파는 생성에 무게중심을 둔다. 바이셰시카학파가무수한 원자들이 집적되어 사물들이 생겨가는 인중무과론적 사유를 펼쳤다면, 상키야학파는 단 하나의 원질(原質)인 프라크르티가 계속 전변해 세계를 만드는 인중유과론적 사유를 펼쳤다. - P580

굽타 왕조(4~6세기)는 인도의 고전 문화를 완성했으며, 이 시기에 마하바라타』, 『마법전』, 『바가바드기타』 등이 대성되었다. 그리고 6파 철학이그 온전한 형태로 구축되었다. 산스크리트어가 문화언어로 확고하게 자리를 잡게 되며, 불교학자들도 산스크리트어로 저술 활동을 하기에 이른다.
이런 과정을 통해 힌두교는 반석 위에 서게 되었다. 굽타 왕조는 이미 5세기 말에 사실상 저물게 되고, 이후 10~11세기에 무슬림들이 쳐들어오기전까지 인도 아대륙에는 굽타 왕조에 비길 만한 왕조가 들어서지 못했다.
이 혼란기에 인도에서는 상업이 크게 위축되었고, 상인 계층의 비호를 받던 불교와 자이나교도 그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반면 농촌 중심의보수적 성격의 힌두교는 이 혼란기에도 그 정체성을 계속 유지해나갔다. - P589

특정 교리를 떠나서 힌두교를 핵심적으로 특징짓는 것은 ‘아바타라‘
의 사상이다. 아바타라의 존재론은 개별자들의 동일성이 간단히 타자화됨으로써 세계의 존재론적 분절을 극단적으로 상대화하고 유동화한다. 개별자들이 서로 전변하는 세계에서는 어떤 동일성도 본질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사유는 본질들의 위계를 틀로 하는 지중해세계의 일신교들과 대조적이다. 이슬람교가 인도를 600년간 지배했음에도 종교적 통일을 이루지 못한 것은 두 종교의 이러한 이질성에서 기인한다. 이와 같은 전변의 세계는 개별화의 원리를 무력화함으로써 모든 것을 ‘두루뭉실하게‘ 만들어섞어버리며, 이 때문에 보다 철학적인 힌두 사상가들은 분명한 존재론적분절을 긋기 위해 노력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인도 사유의 근저에서 작동하는 아바타라의 사유. 차라리 이미지는 타자를 그 또한 전변에 불과한 것으로 만들어 자체 내에 녹여버리는 독특한 속성을 유지했다. 바로이런 이유에서 힌두교는 한편으로는 전변의 사유의 대척에 있는 이슬람교같은 절대 타자와는 결코 섞이지 않으면서,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자체내의 다양한 사상들을 모두 흡수해버리는 양극의 방향으로 진행되었다고볼 수 있지 않을까. - P607

일찍 잡아도 4세기 정도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그전에는 왜 불교의 서진(進)이 이루어지지 않았을까? 이는 철학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헬라스문명의 힘이 그만큼 강했기 때문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 독선적인 유대교조차도 그리스화되는 세계였던 지중해세계에, 또 정치적으로 "오리엔트"
쪽을 얕보던 헬레니즘세계에 불교가 쉽게 스며들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동방의 환경은 달랐다. 동방 특히 동북아는 ‘종교‘의 문명이 아니라 ‘정치‘의 문명이었다. 기성의 종교가 불교를 강고하게 막아설 수는 없었다. - P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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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서구의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 출발해 다문화주의 개념을 발전시킨 킴리카에 따르면, 다문화주의란 자유민주주의 사회가 사회 구성원의 개인적 - P21

권리를 보장해주기는 하지만, 그 속에서 소수자의 문화나 삶의 양태가 충분히 보호되지 못한다는 점을 고려해 특수한 집단의 권리 또는 집단에 부여되는 특권을 인정해주는 것이다(Okin, 1999). 그러한 권리는 예컨대 고유언어에 관한 권리, 정치적 대표권, 집단의 매체 운영을 위한 재정권, 과거 불의한 역사에 대한 보상권, 권력의 지역적 분배부터 특정 부분에 대한소수민 자치권까지 이른다(Kymlicka, 1999: 32). - P22

명예살인은 "가족의 명예를 다시 회복하기 위해 가족의 명예를 더럽혔다고 여겨지는 가족 구성원(특히 여성)을 살해하는 행위"로서(Zehet, 2007:2), 가족 구성원에 대한 폭력이라는 점에서는 일종의 가정 폭력으로 볼 수있으며, 가부장적 권력이 여성에 대한 통제권을 시위하고 관철하는 한양상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명예살인과 같은 관행에 대한 비판의 초점은가부장제에 맞춰져야 한다. - P29

본질주의적 문화 개념이 문화를 분화해서 보지 않고 하나의 동질적 단위로 상정할 때, 지배 권력은 자신의 문화를 그 사회 전체의 문화로 제시한다. 지배 권력은 단지 부분에 불과한 자신의 문화가 전체문화인 양 나타나게 하는 권리를 독점한다. 자신의 문화를 사회 전체의 문화로 제시하면서 그에 도전하는 모든 다른 형태의 문화를 무시하고 배제하며 추방해버린다. 또한 가부장적 권력의 문화를 그 사회 전체의 문화로 나타나게 하는 것은 반여성주의적 ·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에 속한다. - P33

우리에게 필요한 문화 개념은 다음과 같은 성격을 지녀야할 것이다.
①실체적으로 존재하는 지리적·민족적 혹은 종족적 경계에 입각해 규정된 본질주의적 문화 개념의 해체② 실체적으로 고정된 것이 아니라 문제의 맥락에 기초해 그때그때 작용하는 권력관계에 따라 새로이 설정되는 유동적 경계 개념의 내포 - P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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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학자들은 도가철학을 새롭게 개념화하면서 궁극적으로는 그것을 통해 유가철학을 새롭게 정초하고자 했다. 반면 죽림칠현은 진정한 유가적 심성을 간직하면서도 도가적 철학과 실천으로 힘겨운 시대를 뚫고나가고자 했다. 여기에는 양자의 ‘입장‘ 차이, 새로운 천하통일을 눈앞에두고서 새로운 정초를 꿈꾼 현학자들과 이미 썩어버린 유교제국에 맞닥뜨려 그것으로부터 탈주하고자 한 죽림칠현 사이의 차이가 있다. 내용상으로다르지만, 이런 관계는 일면 키케로와 세네카의 차이를 연상케 한다.
현학자들은 여전히 ‘천하‘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이론적 정초를 위해도가철학을 필요로 했지만, 그들의 주안점은 유가철학의 새로운 정초였고천하통일의 준비였다. 반면 죽림칠현은 ‘강호‘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여전히 본연의 의미에서의 유가적 심성을 간직했지만, 그들이 꿈꾼 것은 도가철학을 통한 강호에서의 탈주였다. 그러나 죽림칠현은 소요의 길을 꿈꿀 수 있었을 뿐 투쟁의 길은 걸어가지 못했다. - P485

서진(나아가 동진)의 역사는 또한 죽림칠현의 악영향, 정확히 말해 속화와 희화화의 과정이기도 했다. 속화(vulgarization)와 희화화(parody)는 그 어떤 사상에도 따라다니는 어두운 그림자이다.102) 당대의 많은 명사들이 죽림칠현과 같은 정치적 맥락과 내면적 고뇌도 없이 오석산(五)을 먹고, 술과 가무에 취해서 살면서, 온갖 사치를 부렸으며, 재치는 있으나 실질은 없는 청담을 일삼았다. 이는 미인 서시가 미간을 찌푸리고 다닌다고 뭇 여성들이 같이 찌푸리고 다니고, 선비 곽림종이 두건 한쪽을 폈다고 뭇 남성들이 같이 펴고 다니는 꼴이었다. 이 때문에 후대인들은 죽림칠현을 극히 부정적으로 평가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는 본류와 말류를, 본래의 사상과 그 속화·희화화된 것들을 구분하지 못하는 일이라 해야 할 것이다. 어쨌든 서진 왕조는 이런 분위기 속에서 ‘팔왕의 난‘과 ‘영가의 난‘을 겪으면서 속절없이 무너져버린다. - P486

사실상 AD 3~6세기에 걸친 긴 다원화 시대가 전개된 것이다. 정치적 - 군사적으로 이 시대는 AD 5~8세기의 지중해세계에서와 같은 암흑시대였다. 그러나 문화적 측면에서 볼 때면 놀랍게도 동북아의 이 시대는 오히려각종 문화가 다채롭게 꽃핀 시대이기도 했다. 이 흥미로운 대조는 어디에서 유래하는 것일까? 이 시대는 지중해세계의 암흑시대에서처럼 동북아에서도 북방의 이민족들 중원의 문화에서 본다면 야만족들이 남방으로 밀려온 시대였다. 또 이 시대는 한편으로는 사분오열된 북방과 다른 한편으로는 기존 중원 문화를 이어간 남방으로 나뉜 시대이며, 이 점에서도사분오열된 서방과 기존 로마 문명을 이어간 동방으로 나뉘었던 지중해세계의 역사와 흡사하다. 다른 차이들을 접어둔다면, 유라시아 동과 서의 같・시대에 유사한 구도의 역사가 진행되었다는 점이 흥미롭다. 그러나 문화적 특히 사상적 측면에서 본다면 동과 서는 판이하다. 왜였을까?
우선은 동북아 문명에서 ‘문‘의 우위와 이를 뒷받침하는 문사-관료들, 문사- 귀족들 즉 ‘사대부‘ 계층의 존재를 들 수 있다. - P489

지중해세계에서 이슬람이라는 새로운 종교가 도래했다면, 동북아세계에서는 불교라는 새로운 종교가 도래했다. 그러나 동북아에서는
‘기독교 vs. 이슬람교‘ 같은 격한 구도는 성립하지 않았다. 물론 도교와 불교는 서로 경쟁했고 때로는 대립하기도 했지만, 유교와 도교 그리고 불교는 종교전쟁을 일으키기는커녕 많은 수준 높은 사상적 - 문화적 결실들을가져왔다. ‘종교전쟁‘이 없었다는 것이야말로 동북아 문명의 위대한 측면이다. 지중해세계의 서방은 동방으로 십자군을 보냈지만, 동북아세계의 동방은 구도(求道僧)들을 서방=서역으로 보냈다. 이러한 차이를 통해 동북아세계의 ‘암흑시대‘는 오히려 문화가 찬란하게 꽃핀 시대, "빛나는 암흑시대"가 되었던 것이다. - P4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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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는 인(仁)의 도덕형이상학 사실 ‘도덕형이상학‘이라는 표현은 훗날의 - P211

맹자나 성리학자들에게 더 어울리는 말이지만을 세움으로써 ‘예‘를 철학적으로 정초했다. 공자는 단순히 주례를 복권시키고자 한 것이 아니라그것을 새롭게 정초하고자 한 것이다. "사람이 어질지 않다면 ‘예‘가 다 무엇이란 말이냐? 어질지 않다면 ‘악‘이 다 무엇이란 말이냐?"(人而不如禮何人而不如何공자는 법은 예에 의해 정초되어야 하고, 예는 인에 의해 정초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또 하나, 공자는 동북아 문명에인문세계라는 새로운 삶의 차원을 도래시켰다. 공자는 인간에게 먹고사는것, 싸우는 것, 권력을 잡는 것 등등 외에도 어떤 다른 세계, 인문학적 차원이 존재한다는 것을 말해주었다. 그가 교육했던 시, 예, 악 등은 예전과는다른 차원의 뉘앙스를 띤 것이었다. 그는 "시로 일으키고, 예로 세우고, 악으로 갈무리한다"(興於詩 立於禮 成於樂)고 했고, 이렇게 이루어지는 세계는 인간이 오직 인간이기 때문에 도달할 수 있는 삶의 또 다른 차원이었다.
한편으로 윤리의 근간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다른 한편으로 인문세계라는새로운 차원을 열었다는 점에서, 공자는 동북아 문명사에 결정적인 지도리를 만들어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공자는 그의 이 숭고한 가치를 순수학문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실제의 정치적/사회적 삶에도 구현할 수 있기를 갈망했다. - P212

가장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방식으로 가장 현실적이고 가치론적인 문제들을 해결코자 한 것이 소크라테스 사유의 핵심이다. 반면, 공자의 사유는 역사적이다. 공자 역시 인, 효, 충서, 예악 등등에 대해 새롭게 사유했으나, 그 양태는 논리적 정의가 아니라 ‘조술(祖)‘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주공단에 의해 정립되고 이후 계속 변해온 역사를 반추하면서 ‘경(經)‘들을 새롭게 정리하고 그 과정에서 당대의퇴락한 가치들을 새롭게 하려 한 것이다. 또한, 자신으로서는 ‘인‘이나 ‘군자‘를 비롯해 삶에 대한 근본적이고 보편적인 대안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공자는 바로 자신의 앞에 있는 제자들 또는 다른 인물들의 고유한 인품과 개성에 세심하게 주목하면서 가르침을 베풀었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그는 자로와 염구에게, 또 자장과 자하에게 각각 반대로 이야기했던 것이다. 이는 소크라테스와 대조적이다. 소크라테스 역시 자신이 대화를 나누는 인물(들)의 고유함 및 대화의 상황을 충분히 고려했지만, 그가 추구한것은 바로 그런 개별성과 상황성에 의해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보편성과엄밀성이었기 때문이다. - P243

지중해세계에서 소크라테스의 사유는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구체화 또는 변형되어 이어졌으며 주로상당 수준의 지식층에 의해 받아들여졌다. 근대 이후에도 ‘서구적 지성‘이라 할 만한 과학적 - 철학적 사유는 소크라테스의 사유를 그 근간으로 했다고 할 수 있다. 반면 대중적 차원에서 지중해세계와 훗날의 서구를 지배한 것은 유대-기독교 사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특히 미국의 경우에서 볼 수 있듯이 지금도 그렇다고 할 수 있다. 한편으로는 근대 이후의 자연과학적 전통 점차 즉물적 형태를 띠어가는 과학기술과 다른 한편으로는 유대 - 기독교적 가치가 기묘하게 공존하고 그 사이에서 소크라테스적 - 플라톤적 지성은 쇠잔해져버린 것이 오늘날 서구 문명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 동북아사회의 경우 공자의 가르침은 지식인들의 차원은 물론 이 사회/문명 전반에 스며들었다. 그것은 유가철학일 뿐만 아니라 ‘유교‘로서 동북아 문명을 지배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도교나 특히 불교가 유교를 압도했을 때도 있었지만, 동북아사회 전반을 이끌고 간 정신적축은 역시 유교였다고 할 수 있으며, 이는 어떤 면에서는 오늘날까지도그렇다. - P248

묵가사상은 강호의 철학으로 자리 잡기에는 너무나 비- 낭만적이었고, 종교가 되기에는 너무나 합리적이고 실용적이었다. 또, 혁명의 종교가 되기에는 너무 봉건적이었고, 아르카디아의 사상이 되기에는 ‘천하의철학‘의 성격이 너무 강했다. 또, 묵가의 논리학, 언어철학 등의 작업은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치기는 했으나 명가와 마찬가지로 결국 동북아 사상사의 굵직한 갈래로는 성립할 수 없었다. 동북아의 사유는 생래적으로추상적인 것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묵가는 유가와 같은 인문주의를 제공하지 못했고, 법가적 통치술로서 발전되지도 못했고, 도가적 자연주의로서 받아들여지지도 못했고, 자신의 장기인 논리학, 언어철학으로서 뻗어나가지도 못했다. - P298

모든 동물들은 각각의 종류에 따라 고유한 본성을 가진다. 인간 역시 마찬가지여서, 모든 인간은 공통의 본성을 가지는 것이다. 모든 인간이 순임금과 같이 될 수 있다. 물론 삶의 과정에서 이 본성은 발휘되지 못하고 어그러진 형태로 현실화될 수 있다. 하지만 황폐화된 산을 보고서 그 산이 본래 그랬다고 생각하는 것이 오류이듯이, 아무리 많이 일그러진 삶 앞에서도 그 안에 원래부터 깃들어 있는 성선을 보지 못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방심(心)‘을 극복하고 ‘존심(心)‘을 지향하라는 맹자의 가르침은 "네 영혼을 돌보라"라는 소크라테스의 가르침과도 통한다. 맹자의 이런 생각은 그 논변의 - P354

당성에서나(위의 논변들에 대해서는 여러 해석의 갈래들이 존재한다) 결론의 타당성에서나 많은 논쟁거리를 안고 있다. 맹자의 입장은 성의 미규정성을주장한 고자나 성악설을 주장한 순자 등에 비해 거의 지지를 얻지 못했다.
그러나 훗날 유가사상이 동북아세계의 주류로 자리 잡으면서 그의 입장은유가사상/유교의 기본 입장으로 자리 잡게 된다. - P355

장자가 추구하는 것은 (전국시대의 많은 사상가들이 추구했던) 논쟁에서 이기는 것도 아니요, 어떤 지식을 얻는 것도 아니요, 세상을 바꾸는 것도 아니었다. 장자는 꿈과 깨어남을 이야기했으면서도 그 자신이 실제 지적 타자들과 부딪치는 것은 달가워하지 않았던 듯하다. 그에게 ‘논쟁‘이란 삶의문제를 해결하는 데 별반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에게 문제가 된 것은 더 큰 타자성들이었다. 그래서 그의 학문은 맹자 등의 학문처럼 당대의현학(學)이 아니었다. 그가 원한 것은 그의 실존을 송두리째 바꾸어 삶과죽음의 질곡에서 해방되는 것이었다. 장자의 철학은 위대한 ‘변신‘의 철학이다. 그 변신이 향하는 곳은 물론 ‘실‘의 세계가 아니라 ‘허‘의 차원이다. - P366

맹자의 사유와 장자의 사유는상앙으로 대변되는 전국시대 변법의 질서에 대한 두 상이한 응답이었다고할 수 있다. 맹자는 민본사상을 역설함으로써 법가적 냉혹함에 저항하고자 했고, 장자는 무위사상을 전개함으로써 작위의 폭력으로부터 탈주하고자 했다. 그러나 역사는 비극적이게도 이 두 길이 아니라 상앙의 길, 진(秦)의 제국화라는 길을 걷게 된다. - P368

이익을 탐하는 것, 타인을 질시하는 것, 감각에 미혹되는 것, 이 세 가지가 인간을 악한 존재로 만든다. 순자는 인간이란 그 본성이 바로 이렇기에
‘예‘를 통한 교화에 의해서만 선해질 수 있다고 믿는다. 또는 달리 해석하면, 인간이 악하기 때문에 예가 필요하다기보다는 예가 없는 곳에서는 인간은 악할 수밖에 없다고 보는 것이다. 장자와 대조적으로, 문명/문화야말로 인간을 선하게 만든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순자가 생각하는 문화세계는 상대적으로 내면적이고 인문적인 공자의 것에 비해 보다 외면적이고사회적이다. - P382

군주가 허정(虛靜)한 마음을 유지할 때 거기에 도가 깃들게 되며, 마음이 빌 때 몸이 편하듯이 군주가 ‘무위함으로써 백관이 ‘유위‘할 수 있다.
북극성이 제자리를 지킬 때 뭇별들이 그것을 중심으로 돌 수 있는 이치와도 같다고 하겠다. 황로지학은 군주의 내업, 심술(心), 백심(心)을 통해무위지치의 정치철학을 정초하고자 했다.
이 구도를 기 중심으로 표현할 수도 있다. 황로지학에서 생명은 ‘정기‘
로 표현되며, 이 생명을 지키는 양생술이 핵심을 이룬다. 이 경우 도와 기그리고 심과 생/신은 거의 동일시되며, 도/기를 자신의 몸 안에 축적하 - P394

고 보존하고 발달시킬 때 ‘덕‘이 이루어지는 것으로 이해된다. - P395

법가사상의 요체는 형명지학 또는 ‘신상필벌‘에 있다. 법가 사상가들은상보다는 벌에 무게를 두긴 했지만, 상이 백성들의 충성을 끌어내는 방법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핵심적인 것은 신민이 제시한 목표(名)와 실제 이룬 업적(刑=形)이 일치하는가의 여부를 확인해 상벌을 공정하게 실시하는 것이었다. - P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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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중해세계의 경우 자연철학이 기저를 이루었고 때문에 인문 현상들도 ‘지스‘로 환원해서 설명코자했다면 (그 극한은 원자론이다), 동북아세계의 경우 인문학이 기저를 이루었기 때문에 자연 현상들도 그 의미에 기반을 두고서 해석되었다. 그런 만큼이 문명에서 자연(天地)은 그리스 철학자들이 탐구했던 객관적 대상으로서의 자연이 아니라, 우리에게 무언가를 말해주는 의미로서의 자연이다.
그리스의 자연철학자들은 우리에게 나타나는 현상 이면에서 어떤 본질을읽어내려 했고, 이 본질은 ‘실재‘였다. 반면 동북아의 ‘무‘ 등은 자연 현상에서 인간적인, 역사적이고 문화적인 의미를 읽어내려 한 것이다. 전자의경우 자연 현상 저편으로 넘어가 실재를 찾았고, 후자의 경우 자연 현상이편에서 그 의미를 읽어내려 했다. - P33

지중해세계와 지리적 구조는 전혀 달랐지만, 고대 동북아세계 역시 무수한 이민족들이 명멸한 공간이었다. ‘중국‘의 역사가 마치 어떤 공동의 틀 내에서 성씨들만 교체되어간 역사라고 보는 것은 훗날 중원 대륙을 차지한 사람들이 사후적으로 구성한 역사일 뿐이다. 사마천은 『사기』에서 ‘제‘ 황제, 전욱, 제곡, 요, 순ㅡ를 정립하고 하·은·주 삼대에 연속성을 부여했다. 아울러염제와 치우 등을 악역으로 배치함으로써 동북아의 역사를 일종의 선/악의 구도로, 정통/이단의 구도로 정립했다. 이렇게 본래 극히 이질적이고 역동적이었던 역사를 추후에 매끄럽게 재단하고, 또 선/악, 정통/이단의 구도로 구성해냄으로써 비로소 "중국"이라는 하나의 동일성을 마련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이전에 바로 『서경』이 이미 이러한 재구성의 원형을 마련했다고 할 수 있다. 상고 시대를 논할 때, 우리는 사후적으로 구성된 이동일성 아래로 내려가 다채롭고 역동적인 차이생성을, 실제 역사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동북아 ‘중원‘의 역사를 말할 수는 있어도 ‘중국‘이라는특정한 나라의 역사를 말할 수는 없다. 그리고 그 중원의 역사는 다양한종족들이 복잡하게 얽히면서 만들어낸 역사일 뿐이다. - P54

그리스 자연철학과 동북아 역학의 차이는 다음 인용문에 특히종합적으로 나타나 있다.
성인이 ‘괘‘를 긋고 ‘상‘을 관찰해 ‘사‘를 걺으로써 길함과 흉함을 밝히려 했다. 강함과 유함이 서로 밀어 (剛柔相推) 변화가 생겨나니, 그로써 길함과 흉함은 얻고 잃음의 상이요, 후회와 부끄러움(悔)은 안타까움과 짓눌림 (憂)의 상이요, 변함과 화함은 나아감과 물러남의 상이요, 강함과 유함은 낮과 밤의 상이다. 6효의 변화가 하늘·땅· 사람의 길(三極之道)을 세운다.
하여 군자는 ‘역‘의 배열에 입각해 편안히 안거할 수 있으며, 효사를 읽음으로써 즐 - P127

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다. 군자가 거할 때는 ‘상‘을 보고 ‘사‘를 즐기지만 동할 때에는 ‘변‘을 보고 ‘점‘을 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래서 "하늘이 그를 도우니 이롭지 않음이 있겠는가"라 한 것이다.(「사전 상」, 2장) - P128

동북아의 세계는 ‘작(作)‘의 세계가 아니라 ‘생(生)‘의 세계이다. 따라서 조물주 개념은 탈각된다. 역학에도 기학에도 조물주의 개념은 없다. 동북아에도 ‘신‘들은 있지만, 이들은 세계에 내재적 - P186

이다. 또, 이 ‘생‘의 사유에서 설계도 같은 것은 없으며 다만 기 자체에 내재해 있는 질서만이 인정된다. 이 때문에 기에 구현되는 선험적 질서로서의 이데아 개념 또한 없다. 다만 기 안에 잠재해 있고 기가 특정한 물(物)로서 개별화될 때 비로소 확인되는 내재적 질서만이 있을 뿐이다. 결국 기의세계는 코라의 세계이다. 물론, 이렇게 말할 경우 코라의 의미는 현저하게바뀐다. 그것은 단순한 재료가 아니라 물질성, 생명성, 정신성을 내함(含)하고 있는 유일의 실체이다. - P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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