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장 영국의 베일 논쟁

1960년대 초까지만 해도 영국은 이민정책으로 ‘문화적 동화(cultural as-Similation)‘ 정책을 실시해 이민자들을 영국의 주류 문화로 흡수하고, 다인 - P205

종·다문화 사회의 문제점을 해결하려 했다. 그러나 동화만을 고집해온 프랑스와 달리 영국은 통합 대상의 규모가 적정선을 넘어서면 동화가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판단하에 실용주의 노선을 취했다(Weil and Crowley, 1994:117).

1960년대 중반부터는 다문화주의 통합 정책이 기저를 이루고 있다. 1966년 노동당 정부의 내무장관 로이 젱킨스(Roy Jenkins)는 "통합이란 동화라는 획일적 균등화의 과정이 아니라 상호 관용의 분위기 속에서 문화적 다양성이 수반되는 동등한 기회"라고 정의함으로써 영국 이민자 통합의 방향을 제시했다(Jenkins, 1967: 267). - P206

영국 사회 무슬림 집단의 가장 큰 불만은 인종차별을 다루는 인종관계법이 그들의 차별 문제를 보호해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현재 영국의 이민자 집단은 다양한 문화 · 종교 · 만족. 인종에 기초하고 있음에도 인종관계법은 피부색에 따른 인종만을 기준으로 삼는다. 예컨대 피부색을 문제 삼아 흑인을 차별하면 법적으로 처벌받지만, 종교적 이유로 무슬림을 차별하는 것에 대해서는 법적 처벌 기준이 마련되지 않았다(정희라, 2007: 19).
게다가 무슬림과 같이 종교적 성향으로 구분되는 이민자 집단들은 인종관계법의 보호를 받지 못한 반면, 시크교도와 유대인은 인종으로 구분되었다. 그 결과 유대인 남성의 모자와 시크교도의 터번은 종교적 상징이 아니라 인종적 정체성의 상징으로 인정된 반면, 이슬람 여성의 베일은 순수하게 종교성을 나타내는 것으로 간주되었다(염운옥, 2010: 16; Abbas, 2005:52). - P211

1990년대 말, 수전 몰러 오킨(Susan Moller Okin)은 소수 이민자 집단의문화적 다양성을 보호하기 위한 다문화주의 정책이 집단 내부의 차이를고려하지 않음으로써 여성의 권리와 이익을 훼손할 수 있다는 주장을 제기했다(Okin, 1999).

레티 볼프(Leti Volpp)는 페미니즘과 다문화주의를 대립항으로 파악하 - P213

면 소수집단의 여성을 해당 문화의 ‘희생자‘로만 보게 될 뿐 ‘행위 주체‘로서 여성을 보지 못한다고 지적하며, 페미니즘과 다문화주의는 상호 보완적이어야 하고 양자 간 건설적 대화가 필요하다고 제안한다(Volpp, 2001).
서구 대 비서구, 현대 대 전통이라는 이분법적 대립 구조 속에서 제3세계의 소수 문화가 여성 억압적이며 열등하다는 시각이 다문화주의와 페미니즘 간 갈등을 강화한다는 주장도 있다. - P214

실제로 여성 억압적 관행들은 주류 문화와 갈등하는 소수 문화의 문제가 아니라 가부장제에 의한 ‘젠더폭력‘ 문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다문화주의의 위기 속에 젠더 이슈가 소수 문화와 종교에 대한 비판의 형태로 제기되면서 여성의 인권이 그에 대한 명분으로 이용되고 있다. 여성억압적 젠더 이슈들이 소수 문화의 본질적 특징이라고 가정하는 것은 경제적·사회적·문화적 · 젠더적 불평등이 교차 · 중첩된 현실을 지나치게 단순화함으로써 주류 문화와 마찬가지로 소수 문화도 내적 다양성과 변화가능성을 지닌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이다. - P215

단순히 소수집단의 수적 증가만으로 다문화주의를 둘러싼 갈등이 증폭되지는 않는다. 스트로를 비롯한 정치인들의 니캅 발언에서 볼 수있듯이, 이러한 갈등들은 문화적 차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집단에 의해 비로소 사회문제화되는데, 특히 경기후퇴기에 이들의 선동은 사회적소수를 둘러싼 갈등을 증폭시키고, 모든 비난을 쏟아부을 희생양으로 이주민을 선택해 공격하도록 유도한다(김남국, 2009: 286). - P220

영국에서 베일에 대한 법적 규제를 할 것인지 여부는 핵심 사안이 아닐 수있다. 오히려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베일 논쟁이 그동안 영국이 공식적으로 표방해온 다문화주의 정책을 전면적으로 재검토하라는 여론을 조성하는 데 기여한다는 사실이다. 즉, 베일 논쟁이 순수한 젠더 이슈로 논의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 통합 정책으로의 여론 조성이라는 다문화 이슈의 방패로 이용되고 있는 것이다. - P223

여성은 직접 히잡 착용을 선택할 권리가 있으며, 그 선택이 교육권과 같은 다른 권리를 실행하는 데 어떤 영향도 끼쳐서는 안 된다는 점, 즉 머리카락을 가리는 것은 문화적·종교적 자유이고, 이러한 자유에 사회가 어떤차별이나 위협을 가하면 안 된다는 젠더 평등(여성의 인권·평등)이 전제될때 젠더 이슈는 문화적 다양성의 존중이라는 다문화주의와 비로소 동등한공존 관계를 형성할 수 있을 것이다. - P22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9세기 이래 민족 형성을 촉진하기 위해 어떠한 상징적, 물리적 폭력이 필요했는지를 보여 주는 다수의 탁월한 역사 연구가 있다. 이 연구들에 따르면 민족 형성은 이미 존재하는 다양성을 거슬러 성취해야 했던 동질화였다. 이를 위해서는 다양한 영역, 다양한 수준의 방대한 개입이 필요했다. 물질적, 정서적, 문화적 동질화가 요구되었던 것이다.

비판적 역사학의 진영에서는 민족이 결코 완성된 적이 없다는 증거를 찾으려고 노력했다. 민족은 충족된 적이 없다. 다시 말해 동질 사회가 완전히 동질적인 적은 없다. 그러나 비판적 역사 연구가 전하는 이 모든 통찰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비판적 역사학자들은 절대 과소평가해서는 안 되는 본질을 간과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민족이 잘 기능하는 허구라는 사실이다.
동질 사회라는 상상은 언제나 허구였다. 그러나 잘 기능하는 허구였다. 민족은 게다가 기능이 대단히 뛰어난 허구였다.

서구의 민주화된 민족 국가에 살고 있는 우리 모두는 이중화되어 있다. 우리는 부르주아(Bourgeois)이자 시투아앵(Citoyen)이다. 시민(Burger)이자 동시에 국민(Staatsburger)인 것이다. 시민으로서 우리는 모두 사인(私人)이다. 서로 구별되는 특징이 있는 개인이며, 이 특징이 우리를 분류한다. 우리는 남성이거나 여성이며, 가난하거나 부유하며, 공무원, 농부, 교사다. 어떤 경우에도 우리는 구별된다. 그러나 시투아앵으로서, 다시 말해 국민으로서 우리는 공인(公人)인데, 우리는 모두 동등하기 때문이다. 바로 여기에 민주주의의 본질 요소가 들어 있다. 이것이 우리를 추상적 동등으로 이끈다.

이전의 개인주의는 개인의 다른 유형을 만드는 일이었다. 법권리 주체, 유권자, 국민은 추상화를 통해 생성되기 때문이다. 개별 사인으로서 개인은 언제나 구체적이고 구별된다. 그러나 공인으로서 개인은 구별되는 특성들을 추상화함으로써 동등해진다. 다시 말해 특수한 차이들을 무시할 때에만 각각의 개인은 전체의 동등한 부분이자 주권을 구성하는 동등한 일부가 된다. 이 점에서는 개인 사이를 결합하는 요인이 바로 개인의 특수한 직분에 대한 추상화다. 우리를 구별하는 것들을 무시할 때에만 우리는 전체의 동등한 부분이 된다.

한 사회의 동질화는 단순히 단일화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차이가 부차화된다는 데 가깝다. 더는 차이가 없다고 해서 사회가 동질화되는 것이 아니다. 차이가 우선순위에서 밀려날 때, 공통된 것 앞에서 차이가 부차화될 때 사회는 동질화된다. 민족 유형이 제공하는 이 공통된 것은 유사성의 원칙에 기초한다. 공통된 형상 속에서 민족의 모든 구성원은 서로를 알아볼 수 있다. ‘상상된 공동체’는 이러한 유사성의 사회다.

민족 서사는 민주주의적 개인이 자기 자신을 공인으로 재인식할 외형을 제공한다. 이 외형의 윤곽은 가변적이다.
바로 이 형상이 우리가 같은 민족 구성원을 모두 안다고 믿게 한다. 우리는 같은 유형에 속하는 다른 모든 이들과 동일시한다. 이러한 형상이 존재하기에 민족이라는 환상이 작동했고, 바로 그래서 동질 사회라는 환상은 잘 작동했다.

프로이트 이래 우리는 당연하고 직접적이라고 생각하는 모든 소속이 허구의 속임수임을 알고 있다. "자아는 자기 집의 주인이 아니다."라는 잘 알려진 명제로 프로이트는 자아와 집 양자에 대해 본질적인 질문을 제기한다. 자아의 자명함을 문제 삼고, 자기 소유로서의 집에 대해서 의문을 던지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족은 바로 이 두 가지 환상을 전 국민이라는 거대한 규모의 집단에게 오랫동안 정당화하는 데 성공했다.

자기 집을 다른 단어로 표현하면 환경이다. 환경이란 주위 환경이다. 하나의 전체를, 하나의 통일체를 이루는 환경. 민족의 경우 이 하나의 환경이 전국을 에워싼다.

개인의 정체성에 관련해 지금의 변화는 다음을 의미한다. 동질 사회의 환경이 천천히 해체되면, 우리 모두는 더 이상 온전한 정체성을 갖지 못한다. 우리는 이제 온전하고 당연하며 분명한 정체성을 갖지 못한다. 온전하고 당연하며 분명한 소속도 없다. 더 이상의 허구는 없다.

민족의 귀환은 바로 다원화 사회에서 민족은 사라지는 대신 침식되고 있다는 증거다.
이러한 침식은 민족이라는 세계가 더 이상 유일한 환경도 아니고, 하나의 당연한 세계도 아님을 드러낸다. 민족은 더 이상 완전한 소속과 온전한 정체성에 대한 약속이 아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러한 환경이 다른 환경에 의해 쉽게 해소되지 않았으며, 민족 유형도 다른 유형에 의해 해소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단순히 새로운 주도 권력이 발달했다는 말이 아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단 하나의 유형으로, 단 하나의 환경으로 조직되지 않는다는 점이 변화의 가장 무거운 본질이리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5장

‘문화적 인종주의‘는 초기 생물학적 인종주의를 대체한 개념으로서 유럽중심의 백인 우월주의를 피부색이 아닌 문화적 차이로 설명한다. 이 용어는 1967년에 프란츠 파농(Frantz Fanon)이 처음으로 사용했는데, 실제 그개념이 확장되어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마틴 바커(Martin Barker)에 의해서라고 전해진다(Barker, 1981). 1970~1980년대 영국적 맥락에서 그는 문화적 차이가 적대적 인간관계를 만들어낸다고 보았고, 따라서 문화적 차이때문에 민족국가가 폐쇄된 공동체를 형성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문화적 인종주의가 하나로 경계 지어진 문화 단일체로서의 민족 건설이라는 개념에 토대를 둔다고 보았다. - P164

이슬람 관점에서 일반적으로 여성의 베일 착용은 이슬람을 지킨다는 종교적 의미, 무슬림 공동체에 속한다는 정치적 의미, 가족의 요구를 수렴한다는 사회적 의미, 성적으로 자신을 보호한다는 윤리적 의미가 있다(황병하, 2010: 61). 그뿐만 아니라 앞서 설명한 바처럼 서구 식민 경험이 있는국가에서는 베일 착용이 종교적 정체성 구현의 상징이자 저항의 도구로사용되기도 했다. 그렇다면 서구 이민 국가에서 무슬림 여성 이민자의 베일 착용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영국의 무슬림 베일 논쟁을 연구한 염운옥(2010: 23)은 영국 내 무슬림여성 이민자가 안전, 종교적 경건함, 정숙의 표시, 패션 등 다양한 이유로베일을 착용한다고 전한다. 하지만 최근 영국 사회에 이슬람 혐오 정서가높아지면서 무슬림 여성이 무슬림 공동체적 정체성에 귀속해 안정감과 안전을 얻으려는 동기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 P169

호주에서 정교분리는 헌법에 명시되어 있다. 그러나 기독교를 믿는 대다수 백인 호주인의 일상생활에는 기독교 문화나 관행이 자연스럽게 뿌리내려 있다. 아울러 호주 정부나 정치인들도 예나 지금이나 ‘유대-기독교(Judaeo-Christianity)‘적 전통이 호주 사회의 핵심 가치 또는 핵심 문화라는점을 명확히 하고 있다. - P171

호주에서 무슬림 여성의 베일 착용은 종교적 의미, 무슬림공동체에 속한다는 정치적 의미, 가족의 요구를 수렴한다는 사회적 의미,
성적으로 자신을 보호한다는 윤리적 의미 등 다양한 맥락에서 해석될 수있다. 이는 호주 무슬림 인구의 이민 시기, 이민국의 종교와 문화적 특성,
이민 배경, 호주 사회 내 사회적·경제적 배경이 다양한 만큼 베일 착용의의미 또한 다양하게 나타난다는 점을 알려준다. 하지만 베일 착용을 두고여성 개인의 자발적 선택이라기보다는 무슬림 공동체의 종교적·사회적압박에 의한 자발적 강제라는 시각이 부각되고 있다. 이렇듯 베일에 대한호주 주류 공동체의 부정적 시각은 베일을 착용한 무슬림 여성에 대한 인종적 타자화 현상을 심화시키고 있으며, 그로 인해 무슬림 여성의 안전과무슬림 정체성에 대한 위협이 호주 사회에서 확산되어간다고 볼 수 있다. - P190

무슬림 여성의 베일 착용 문제는 호주 사회 내 무슬림과 비무슬림 인구 간 갈등의 핵심에 놓여 있다. 베일을 둘러싼 논쟁에는 무슬림여성의 권리와 안전과 같은 페미니스트들의 언어가 등장하지만, 실제 두집단 모두 여성의 권리와 안전 향상에 귀결되는 주장을 제시하고 있지는않다. 특히 베일 착용 금지와 호주성을 둘러싼 비무슬림 호주인들의 논의는 그들이 세속주의, 반인종주의, 젠더 평등 수호라는 기치 아래 오히려 호주 사회에 깊이 내재된 백인. 기독교 · 남성 중심적 가치를 더욱 확대·재생산하려는 의도가 있음을 보여준다.
더욱이 호주 사회에서 무슬림 남성이 비무슬림 여성에게 저지른 성폭력범죄와 공동체 간 인종 분쟁 사건, 부르카를 이용한 범죄 등은 무슬림 공동체에 대한 인종적 타자화 현상과 함께 호주의 민족 정체성 유지·강화현상을 더욱 급속도로 진전시켰다. - P19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5장

"언어는 외부의 힘과 인간 화자 간의 연속성에 관한 것이라기보다는 언어 사용자들이그들끼리 창조하고 성취한 내부계가 되었다." 이러한 발견들로부터 언어학(philology)이 나왔고, 비교 문법과 어족으로의 언어 분류, 과학적추론을 통한 망각되어 가는 ‘조어들‘ (proto-languages)의 재구성 등의연구가 출현했다. 홉스봄이 옳게 관찰했듯이, 여기에 ‘진화를 그 핵심으로 여긴 최초의 학문‘이 있었다.
이 시점으로부터, 오래된 신성한 언어들인 라틴어, 그리스어, 히브리어는 일상어 경쟁자들이라는 잡동사니 평민 떼거리와 동등한 존재론적지위에서 섞이는 수밖에 없었고, 이러한 움직임은 일찍이 인쇄자본주의에 의해 시장에서 강등당한 것을 보완했다. - P117

귀족들과 지주 젠트리, 전문직, 관리, 시장의 사람들. 이제 이들이 언어학적 혁명의 잠재적 소비자들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고객층이 완전히현실화된 곳은 거의 없었으며, 실제 소비자들의 조합은 지역에 따라 굉장히 많이 달랐다. 그 이유를 알아보려면 일찍이 이야기했던 유럽과 아메리카들 사이의 기본적 대조점으로 돌아와야만 한다. 아메리카에서는 - P126

서로 다른 제국의 범위와 그 제국에서 쓰이는 일상어들의 범위가 거의완벽하게 같은 모양을 이루었다. 그러나 유럽에서는 이러한 일치가 드물었고, 유럽 내부의 왕조 제국들에는 기본적으로 일상어가 여러 개였다. 즉 권력의 영지와 활자어의 영지가 서로 상이하게 그려졌다. - P127

아메리카의뒤범벅된 덩어리로부터 민족국가들, 공화제들, 공민권들, 인민주권, 국기들과 국가들 등등의 상상된 현실들이 출현하는 한편, 이들의 개념적대립물들인 왕조 제국들, 군주제들, 절대주의들, 신민성(subjecthood)들, 세습귀족제들, 농노제들, 게토들 등은 청산되었다. 이러한 맥락에서보면 19세기 미국이라는 ‘양식‘에서 대규모 노예제가, 그리고 남아메리카 공화국이라는 ‘양식‘에서 공유된 언어가 일반적으로 ‘탈락‘하는 현상보다 더놀라움을 불러일으키는 일도 없다.) 게다가 청사진의 유효성과 일반화가능성은 독립 국가들의 다수성(plurality)에 의해 의심의 여지 없이 확증되었다. - P13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주자학이 새로운 왕조가 건설될 때 특히 큰 매력을 발휘한 것은 바로 우주와 인간을 잇는 웅혼한 규모의 사유, 지식인들의 영혼에 정체성을 불어넣는 인성론, 그리고 봉건사회를 정초해준 위계적 정치철학으로 구성된높은 경지 때문이었다. 이와 같은 측면이 새로운 왕조의 구축자들에게는최상의 패러다임을 제공했던 것이다. 명을 세운 주원장의 경우 외관상 농민반란의 형태를 띠었지만, 그 주도 세력은 지주 계층이었고 주원장 자신이 건국 이후 철저히 유교적 이념에 따라 신왕조를 구축했다. 조선의 경우고려를 무너뜨리고 신왕조를 세운 주축 세력이 정도전을 비롯해 모두 신진 사대부 계층이었다. 에도 막부의 경우에도 역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주자학을 받아들이면서 새로운 정권을 정비했다. 이처럼 주자학은 사대부(사무라이) 계층의 정신세계와 정치철학을 확고하게 지배한 철학 체계로서 동북아 전체에 걸쳐 일반 문법을 형성했다.
주자학이 이런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주자학 자체의 철학적 매력 때문만은 아니었다. 거기에는 또한 사대부 지식인들의 권력의지 또한 작용했다고 보아야 한다. - P741

이황의 경우 리사단과 기/칠정이 ‘호발(互發)‘한다고 할 수 있고, 기대승의 경우 사단을포함하는 칠정이 모두 리와 기에서 ‘공발(發)‘한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양자의 논쟁 결과를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1. 인간의 감정은 도덕적 감정인 측은지심, 수오지심, 사양지심, 시비지심과 비도덕적/인간적 감정인 기쁨, 성남, 슬픔, 즐거움, 사랑, 미움,
두려움으로 나뉜다. 그런데 이 양자의 관계는 무엇인가?
2. 도덕적 감정이든 비도덕적 감정이든 모두 세계의 근본 이치인 리와기에서 연유한다. 리와 기에서 발현한 감정은 아직 순선한 국면에서는 도덕적 감정으로서 나타나지만 기의 작용이 강해지는 현실적 삶에서는 점차 비도덕적 감정으로 화한다.
3. 현실적 삶을 살아가면서 도덕적 감정과 비도덕적 감정은 같은 선상에서의 정도차가 아니라 결국 두 갈래로 갈라져버린다. 이를 거꾸로투사해서 본다면, 두 종류의 감정이 공히 리와 기에서 나왔으되 본래부터 도덕적 감정은 리 쪽에 뿌리를 두었고 비도덕적 감정은 기쪽에 뿌리를 두었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따라서 양자는 탄생해서 진행하는 과정을 보면 리 · 기로부터 공발한 감정이 사단 국면에서 칠정 국면으로 변해간다고 할 수 있지만, 현실 속에서 나타나는 대립적 성격에주목해 다시 돌아가 생각해보면 애초에 도덕적 감정은 리에서 나오되기를 동반하는 것이었고 비도덕적 감정은 기에서 나오되 리를 동반하는 것이었다고 해야 한다. - P762

이황은 인심과 도심에 관련해 "인심이란 바로 칠정이 그것이요, 도심이란 바로 사단이 그것"이라 보았다. 그러나 사단과 칠정을 택일이 아닌정도의 문제로 본 이이에게 사단은 어디까지나 인심의 범주에 들어가며,
도심은 미발의 성으로 파악된다. 이는 이황의 ‘理氣隨‘를 ‘氣發理‘의입장에서 비판한 그의 사유 구도로 보면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성혼은 이황의 입장을 이어받아 이이에게 이의를 제기하게 되고, 양자의 서신 교환은 이황과 기대승 사이의 서신 교환이 그랬듯이 조선 철학사에서의 또 하나의 중요한 사건으로 남게 된다.
사단칠정론이 ‘정‘에 대한 논변이라면, ‘인심도심론‘은 ‘심‘에 대한 논변이다. ‘心性情‘의 구도에 입각해본다면, 전자는 심이 이미 발현해 나타나는 정의 두 종류인 사단과 칠정의 관계에 관한 논변이다. - P768

인심도심론이 성과 정을 나누지 않고 마음을 전체로서 다루었다면, 사단칠정론과 인물성동이론은 각각 감정과 도덕적 본성이라는 마음의 두 측면을 따로 다루었다. 정이 마음의 ‘이발‘의 측면이라면, 성은 마음의 ‘미발‘의측면이다. 따라서 인물성동이론은 미발 상태에서의 성에 관한 문제이다.
이성에 관련해 ‘인‘ 즉 사람과 ‘물‘ 즉 사람 외의 존재들(주로 동물들)의 동일성과 차이에 관한 논쟁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의 차이는 물론 근본적 차이를 뜻한다. 세부적 차이들은 너무 당연한 것이기 때문이다. 논쟁의핵심은 미발 상태에서는 인물이 ‘동‘하고 양자가 ‘이‘한 것은 이후 이발상태에서의 기의 문제라는 입장(인물성 동론)과 미발 상태에서 이미 인.물은 ‘이‘하다는 입장(인물성 이론)의 대립으로 정리할 수 있다. 이 논쟁은17~18세기에 걸쳐 길게 전개되었거니와, 이는 조선의 철학자들이 주자학을 얼마나 집요하게 심화해나갔는가를 잘 보여준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본다면, 즉 17~18세기가 이미 철학사적인 그리고 세계사적인 거대한 전환이 이루어지고 있던 때임을 생각하면, 이는 이들이 얼마나 어떤 일정한 테두리 안에 갇혀 스콜라적인 논변들을 계속했는가를 말해주기도한다. - P773

송·원·명의 성리학자들과 조선의 성리학자들은 다른 역사적 맥락을 띠고 있었다. 송·원·명의 성리학자들은 자신들의 사상을 실제 정치에 구현하지 못했으며, 그들의 복고주의는 대개는 이념이나 학문·문화로서만 전개되었다. 오히려 왕안석·장거정 등의 신법이 혁신적 역할을 했다. 그러나 조선의 성리학자들은 다름 아니라 조선이라는 왕조를 만들어낸 주역들이었으며, 이 왕조를 설계하고 운영한 주인공들이었다. 뛰어난 정치가였을 뿐만 아니라 수준급의 정치학자이자 철학자이기도 했던 정도전 같은인물이 그 전형적인 예이다. 그들은 주자학과 상고주의를 실제 이 세계에구현하고자 했다. - P785

왕수인이 생각하는 ‘앎‘이란 흔히 말하는 ‘지식‘이 아니라 무엇이 올바른 것인가, 어떤 행위가 올바른 행위인가를 아는 것이다. 왕수인은 누구나 이런 앎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다만 행위하지 못 - P796

하는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해 모르는 척할 뿐이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누구나 이미 알고 있다는 것이 왕수인의 확신이다. 그리고 그러한 앎을 자각한 사람은 당연히 그에 따라 행위한다는 것 또한 왕수인의 굳은 확신이다. 그렇게 행위하지 못하는 사람은 앎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 이 본연의 앎을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 사람일 뿐이다. 이와 같은 논지는 물의 예에서 알 수 있듯이 맹자의 성선설을 바탕에 깔고 있는 주장이다. 그리고 "물을 터주는 것이 치지"라는 말에서 주자학과 양명학의 근본적 차이를 느낄수 있다. 왕수인은 우리 모두가 갖추고 있는 이 앎 즉 윤리적/도덕적 직관을 ‘양지(良知)‘라 불렀다. 왕수인에게 천리는 곧 양지이며, 양지를 깨닫는것 자체가 이미 천리에 따라 행위한다는 것을 뜻했다. - P797

양명학의 문제점은 주관에 머문 데 있는 것이 아니라오히려 객관으로 너무 멀리 나아간 데에 있다. 더 정확히 말해, 객관으로훌쩍 뛰어 건너간 데에 있다. 우리의 철학사에서 여러 번 반복해서 언급했듯이, 내면으로부터 시작해 너무 먼 객체성 냉정한 시선으로 보면 다소상상적인 객체성으로 도약해 건너뛴 철학들이 철학사에 간간히 등장해왔다. 양명학의 문제도 이런 철학들과 동질의 것이다. 양명학의 문제는주관에 머문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관으로부터 ‘태허‘, ‘하느님‘으로 너무 쉽게 건너뛴 데에 즉 그 사이의 구체적 객체성으로서의 자연과 역사를건너 뛰어버린 데에 있다. 자연과 역사라는 구체적 객체성과의 고투가 결여된 철학은 흔히 이처럼 너무 가까운 내면과 너무 먼 초월을 즉각적으로이어버리곤 한다. - P820

자가준칙에 입각하는 양명학은 어떤 사상과 결합하느냐에 따라 매우 심각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만일 마음은 그 자체로 지선이고 악은 바깥에서 오는 것이라면, 이를 왜곡했을 때 나는 선하고 세상은 악하다는 것이 된다. 그리고 여기에서 다시 한 번 비약하면, 이 악한 세상을 바로잡기 위해 선한 내가 무슨 짓을 해도 된다는 이상한 논리가 나오는 것이다.34) 물론 제국주의, 파시즘 등과 결합됨으로써 - P823

인류에 해를 끼친 사상이 양명학만은 아니며, 따라서 이와 같은 식의 비판이 양명학에만 가해져야 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청일전쟁 이후일본 양명학의 흐름에는 이런 어두운 면이 들러붙어 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 P82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