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게 많지만 따뜻한 가슴이 없는 사람보다는 무지하지 - P76

만 애정이 있는 사람이 아이에게는 더 좋을 수도 있다. 그러나그 두 경우보다는 제대로 알면서 아이들을 좋아하는 사람이 훨씬 낫다.
(1931, 11, 13) - P7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조천일기 - 세계의 중심, 북경을 가다 서해문집 오래된책방 17
조헌 지음, 동아시아비교문화연구회 옮김 / 서해문집 / 2014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북경을 간 사신인 조헌의 여정을 담은 기행문이다. 누가 갔는지를 보지 않고 북경에 간 기록물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청이 들어선 이후 양국 간의 활발한 교류가 이루어졌던 시기라고 여기기 쉽다. 그러니까 북학파 등이 활동했던 시기다. 그러나 주인공은 조헌으로 선조 때 활동했던 관료다. 당시는 명과 조선의 조공-책봉 관계가 철저히 지켜지던 때라는 점이 중요하다. 

조헌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했다고만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조선 중기를 대표하는 문인 출신의 관료다. 그가 어떤 관료였고 어떤 족적을 남겼는지 지식이 별로 없는 상태에서 이 기행문을 읽는 일이 꽤나 도움이 되었다. 그가 만나는 사람들이나 교류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그의 삶을 간접적으로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먼저 조헌이란 사람이 누구인지 확인해보자. 그는 학문적으로는 이이를 계승했으며 정치적으로 자기 주장이 강했던 쪽에 속했던 것 같다. 소위 바른 말을 했다가 눈 밖에 여러 번 났다고. 그의 동료들조차 이러다 무슨 일 나겠다고 걱정을 했을 것 같다. 그는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격문을 지어 군사를 모집했고 문인들과 함께 각종 전투에서 왜구를 물리쳤으나 금산 전투에서 전사했다.


'조천일기'는 1574년 명나라로 가는 사절단에 그가 질정관의 역할로 참여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질정관이란 조선 시대 문서의 음운(音韻)이나 제도 따위에 대한 의문점을 중국에 질문하여 알아 오는 일을 하는 임시직이다. 비록 임시직이지만  쓰는 말과 소리 나는 말이 다른 언어를 기반으로 확인하고 질문하는 일은 중요할 수밖에 없다. 자칫 잘못하면 외교 문제로 커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한양에서 5월 11일 출발하여 다시 한양으로 돌아온 것은 11월이니 총 6개월의 시간이 소요된 셈이다. 실질적으로 이동 시간이 길고 북경에 있을 수 있었던 것은 단 1개월 뿐이었다. 북경에서 생각보다 짧은 시간 내에 일정을 소화하려면 쉽지 않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쉬운 것은 9월 14일 이후의 조헌의 기행기는 전하지 않고 있어서 사절사로 동행했던 허봉의 '조천기'를 참고하여 뒷부분이 정리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도 중국에서 있었던 일들은 모두 다 그의 눈과 귀를 통해 기록된 것이기에 그나마 다행이다.


조헌이 이용한 사행 경로는 요령을 지나 우가장을 거쳐 산해관으로 들어가 북경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그러나 이후 조선 후기가 되면 요령에서 우가장이 아닌 성경부를 찍고 산해관으로 들어가 북경으로 향하는 코스로 바뀐다고 한다. 아무튼 그는 첫 번째 코스로 이동했다.


가는 길에 여러 우여곡절이 있었다. 비가 많이 와서 지내던 곳의 지붕에서 물이 새 유숙을 하게 될 때가 있었는데 조헌은 그 와중에도 마치 동정호를 감상하는 기분으로 즐겼다는 기록을 보았을 때 놀라웠다. 그는 쉽게 좌절하지 않고 사태를 긍정적으로 바라보려는 자세를 가진 사람이라는 것이 느껴졌다. 


무엇보다 나는 그가 이전에 그림이나 책에서 만났을 중국의 여러 명승 고적지를 직접 보고 감상할 수 있었을 때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했다. 당시는 한자가 지식인의 기본 언어였으니 한자 문화권에 가서도 별 무리 없었을텐데, 그는 중국어로 듣고 말하는 일이 가능했다. 외국에 갔을 때 그 나라의 언어를 할 줄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은 경험의 폭에서 많은 차이가 난다. 그는 그런 의미에서 짧은 경치를 보더라도 더 깊은 경험을 가질 수 있었던 것 같다.

산해관의 망해정은 하늘과 바다를 구분할 수 없다고 했다.

백이숙제의 묘(현재의 하북성 노용현)를 찾아가 벅찬 감정을 토로하기도 한다. 백이숙제의 묘는 조선 지식인들이 답사를 하게 되면 필수로 찾는 코스였다고.


사행길에서 만난 사람들은 제각각이었다. 상술처럼 뇌물을 받아먹는 관리, 길을 지나가려면 돈을 내놓거나 합당한 선물을 당당하게 요구하는 사람들, 귀한 집 자식으로 태어나 백성의 고혈을 빨아먹는 공자가 있는가 하면 선정을 행하는 관리들도 있었다.  

특히나 조선과 중국 경계나 변방에 사는 백성들을 대상으로 자기 잇속을 챙기는 관리들을 보면서 그도 배우는 바가 많았을 것 같다.

개인적으로 조헌이 귀천을 막론하고 열심히 독서하는 유소년을 보면 가지고 있던 책 등을 선물하고 여러 조언을 하는 장면은 참으로 흐뭇했다. 사실 당시를 생각하면 신분 차별로 그 아이가 성인이 된다고 해도 할 수 있는 일은 한계가 있었을지 모른다. 그럼에도 격려를 아끼지 않았기에 그 아이는 평생 책을 놓지 않는 사람이 되었을 것이고 어쩌면 더 나은 삶을 살게 되었을지 모를 일이다.


그가 북경에 있었던 기간은 8월 5일부터 9월 5일까지였다. 당시 천자는 12살에 불과했는데 그런 어린 황제를 보고도 감격했다는 그의 감정을 생각하며 뭉클하기도 하고 놀랍기도 했다. 열대 과일인 용안과 여지를 맛보았던 일, 최고 교육기관인 국자감을 방문했을 때의 소회, 조선 사실들에 대해서는 특별하게 환송연을 2차례 열어주어 감읍했다는 소회까지 적혀 있다. 

조헌은 명황제인 만력제의 생일 축하를 기념하여 축하 인사를 전하기 위해 간 것이었다. 만력제를 보았고 다양한 중국의 모습을 보면서 소회가 남달랐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귀국길에 벼루와 부채 등을 주고 명의 사신을 통해서 책을 교환한다. 조선에서는 쉽게 구하기 어려웠던 중국의 각종 고전이나 서책을 갖고 싶다는 욕망이 컸을 것이다(나라도 그랬을 것 같다. 벼루나 부채는 어떻게든 구할 수 있지만 책은 쉽지 않으니까). 


조선 시대 역사서를 얼마만에 읽는 것인지 모르겠다. 역사서라고 하기에는 가벼울 수 있지만 어쨌든 조헌이라는 사람에 대해서, 당시 사행사들의 경로를 통해 중국과 조선의 풍속을 경험하는 일은 꽤나 흥미로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러셀의 유머 코드가 종종 보인다.

처세에 대한 이야기를 보고 웃었다. 타인과 협업을 하는 목적은 사랑, 두려움, 나머지 하나는 소유욕?이라 할 수 있다.
사랑을 제외하고 두려움, 소유욕은 타인의 환심을 사기 위함이 크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처세에 능하다고 평가받으며 성공의 길에 다다른다고 여기니까.
근데 러셀은 거기에 펀치를 날린다. 웃프지만 현실에서는 역시 타인의 눈치를 보며 굽실거리는 사람을 더 좋게 평가하는 것 같다.

오늘날 당신이 성공하기를 바란다면 과거에도 그랬듯이 대담하게 굴거나 독립적으로 행동하지 말고 소심하게 굴며 환심을 사야만 한다.

- P69

능한 한 영향력 있는 사람들을 가려서 사귀되, 그것이 여의치않다면 영향력이 커질 것으로 예상되는 사람들을 사귀어라.
이렇게만 하면 당신은 공동체의 최고 인물들 전원으로부터좋은 평가를 얻게 될 것이다.
나무랄 데 없는 충고이긴 하지만, 나로 말하자면, 이 충고를 따르느니 차라리 죽고 말겠다.
(1931. 11. 2) - P70

나는 우리가 매일 30분씩만 말없이 부동자세로 있을 수있다면 개인적 ·국가적 · 국제적 차원의 모든 사안을 지금보다는 훨씬 더 맑은 정신으로 처리할 수 있으리라 확신한다. - P7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경험이 선입견을 만들수도 있겠구나.‘

내가 내리는 결정들의 대부분은 경험에 의거한 것이 많다. 물론 이성과 기존의 지식에 의거한 것들도 있지만.
그러나 경험은 때론 위험하다. 특히나 좋지 않다고 여긴 경험이 나도 모르는 고정적 이미지를 만들어버릴 수 있다.

조금이라도 위험성을 낮추려면 충분한 자료 조사와 여러 차례의 경험이 더해져야함을 새길 것.

경험에서 진정으로 무언가를 배우려면 열린 마음을 가져야 한다. 과학을 하는 많은 이들에게 이런 태도가 다소 부족하긴 하지만, 열린 마음은 과학적 기질의 정수다. 경험에 바탕을 둔 과학은 경험을 예측할 수 있게 해주고, ‘소싯적’ 경험으로 알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들을 알게 해준다. - P56

대체로 세상은 우리가 생각하는 바와 같다. 우리의 이론이 세상을 빚어내며, 우리가 믿음으로써 그 이론은 진실이 될 수 있다. 다른 믿음이 지배하는 다른 사회에서는 세상이 아주 다르게 보일 것이다. 그러므로 당신의 선입견이 경험으로 확인된 것이라 할지라도 만일 전에 다른 경험을 했다면 완전히 다른 선입견을 확인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 P5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걷기의 인문학 - 가장 철학적이고 예술적이고 혁명적인 인간의 행위에 대하여
리베카 솔닛 지음, 김정아 옮김 / 반비 / 2017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걷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많다. 걷기는 여러 효능이 있지만 개인적으로 햇빛 아래에서 걷는 일은 우울감을 떨쳐버리는 데 정말 효과가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늘 어떤 일에 부딪치거나 관계상으로 어려움이 생길 때면 잠깐이라도 짬을 내어 걸었다. 그런데 나뿐 아니라 과거의 문인들이 걷기를 예찬하고 있다.

어쩌다보니 솔닛의 에세이를 오랜만에 읽었다. 처음 그녀의 에세이를 추천 받아 읽고 반해서 더 많은 작품을 읽어봐야지 했었다. 그러나 다른 책들을 읽느라 또 한동안 방치 상태가 되었다. 무심코 책장에 꽂아둔 이 책(구입한 것은 한참 전인데)을 발견한 것은 아마도 얼마 전 짧게나마 여행을 갔기 덕분인 것 같다. 걷는 것은 아무리 짧은 순간이라도 나를 들여다보고 세상을 만나는 또 하나의 여행이다. '한 편의 이야기와 한 번의 여행 사이에는 특별한 관계가 있다.' 


이 책에서는 다양한 걷기 예찬론자들이 등장한다. 그들이 어떠한 이유로 걷기를 하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확인하는 일은 꽤나 흥미로웠다. 나는 걷기하면 나처럼 스트레스를 받거나 해서 도피용으로 휴식을 위한 걷기만 있을 줄 알았는데 그것이 다가 아님을 이 책을 읽으면 누구나 이해할 수 있다. 


인간 불평등 기원론, 고백록을 지은 루소는 걷기를 하며 사유에 천착한 전형적인 경우다. 그는 평생에 걸쳐 여기저기를 걸어 다녔는데 여러 직업을 전전하고 여러 친구들을 만났다고 한다. 편집증이 있어 관계에 늘 어려움을 겪어서 걷는 행위를 통해 자신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승화시켰다고 보인다.

키르케고르는 루소처럼 다양한 지역을 유랑하지 않았고 자신의 지역지(코펜하겐)에서 지내며 틈틈히 걷기를 행했다. 그는 걷는 동안 아이디어를 많이 얻었기에 걷기와 생산 노동에 비슷한 점이 있음에 자연스레 주목했다. 그는 알려져서 사람들 눈에 띄기를 원했으나 스스로가 사람들로부터 외면당하고 있다고 느꼈다고. 죽는 순간에도 걷고 있었다는데 다른 사람이 보면 어떨지 모르겠지만 어쩌면 자신이 생각하는 최고의 결말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그러고 보면 루소, 키르케고르는 행동 패턴과 방식은 달라도 비슷한 결을 가진 사람이었던 것 같다.


18세기에 접어들면 걷기의 목적이 진화한다. 이때 이후 다양한 여행 코스와 안내서, 여행자 모임이 만들어지게 된 덕분이다. 앞선 사람들의 여행기를 통해 여행의 욕망을 키운 상태에서 여행 코스마저 다양해지니 다양한 루트로 여행을 할 수 있게 되었다고 보여진다. 또한 다양한 사람이 오가고 교류하니 자연스레 수많은 예술 작품도 쏟아져나오게 되었다. 그리고 남성에 비해 공간적, 사회적 활동의 제약이 컸던 여성들은 이때 조금씩 꿈꿀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워즈워스는 걷기가 여행의 수단이 된 대표적인 철학자다. 그는 자연과 시골, 유년기를 예찬한 시를 많이 지었다고 한다. 평생 걸은 거리가 29만 킬로미터에 육박한다니 참으로 놀라웠다(나는 과연 최후의 날이 되면 측정할 수 있는 걸음수가 얼마나 되려나 궁금해졌다^^;). 반면 디킨스는 전형적인 도시의 산책자였다. 그의 작품 배경이 런던이었던 만큼 오랫동안 그는 런던 시내를 걸어 다니면서 작품의 영감을 얻었다.

19세기에는 떠돌이와 방랑자들의 자기 고백이 이어지며 보행수필이 시장의 주류가 된다. 특히 장거리 보행자가 늘어나면서 공간의 확장에 따른 이야기의 상상력은 더욱 극대화된다. 등산 서사시와 등산 회고록 등이 나온 것도 이 무렵이다. 

발터 벤야민은 파리에 관한 연구를 진행하며 관련 책을 쓰기 위한 수집을 하고 <아케이드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벤야민이 연구를 진행할 때만 해도 파리는 보행자들을 위한 천국 같은 도시였던 모양이다. 그러나 솔닛이 가보았을 때는 자동차가 많아지면서 도시에 보행자들을 위한 기능이 많이 줄어서 아쉬웠다고. 다만 조금씩 파리가 산책자들을 배려하는 방식을 다시 도입중이라고 하니 다행스런 일이다. 


20세기 이후 도시의 개발화가 진행되면서 교외화가 심화되었다. 지금의 서울을 생각해보면 될 것이다. 서울은 주거비용이 비싸니 대부분의 사람들은 중심에서 벗어나 교외로 이동한다. 도심은 업무 시간이 끝나면 텅 빈다. 울산, 포항 같은 산업 도시는 공장 지역을 중심으로 생각하면 된다. 저자는 공장화, 기계화로 육체 기능이 점차 퇴화하지 않을까 우려를 표한다. 하긴 자동차가 생기고 나서는 가까운 거리도 자동차로 이동하는 경우가 많지 않나. 도시에 헬스장이 생긴다는 것은 과연 날씨가 안 좋아서 야외에서 부득이하게 운동을 할 수 없게 되어 선택해야 하는 대체장소이기만 할까. 저자는 헬스장이 근육과 피트니스를 생산하는 공장과 마찬가지로 육체의 부식을 막기 위한 미봉책이라고 말한다. '보행은 여러 가지 자유와 기쁨, 예컨대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시간, 닫혀 있지 않은 멋진 공간, 구속 받지 않는 육체라는 생태계의 지표종이다.'


여기까지였으면 이 책이 다른 책과 별반 다른 책이 아니었을지도 모르지만 솔닛은 역시 달랐다. 그녀는 자신을 위한 걷기가 아닌 모두를 위한 걷기를 이야기한다. 민주주의를 지켜내기 위해 과거 수많은 사람들이 걸었던 일, 환경을 지키기 위해 투쟁에 나서며 걷는 일 등등 말이다. 이때 걷기는 낯선 사람과 함께 걸으며 하나가 된다는 인식으로 걷게 되기에 앞선 걷기와는 완전히 다른 경험이 아닌가 생각한다. 

특히나 이 책에 언급되어 있는 1977년 5월 아르헨티나 광장에서 벌어진 어머니들의 행진은 뭉클했다. 마치 세월호 투쟁을 떠오르게도 했다. 사라진 자식을 돌려내라는 외침은 연대가 되어 공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한 하나의 디딤돌이 되었다고 믿는다. 이것이 혁명(육체가 되는 일)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여전히 온전한 사고 원인 규명은 이루어지지 못했지만 그 일을 계기로 많은 사람들이 생각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되서다.

또한 이제는 너무나 많은 곳에서 언급하고 있지만 여성들이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일에 대한 시선에 여전히 불편함이 따른다. 과거에는 단순히 치마를 입고 걸었다는 이유만으로 형벌에 처해지거나 성폭행 등에 노출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남성도 거리에서 공격의 대상이 되지만 여성은 그 빈도면에서 압도적이라고 생각한다. 혼자 걸어도 아무 문제 없는 사회가 정상이지 여성이 홀로 길을 걷는다고 해서 문제가 되어서는 안 된다. 


이처럼 걷기는 문화적 행위이기도 하는 동시에 인간의 존재 방식이기도 하다. 개인적으로 걷기가 연대이며 걷는 행위는 읽는 행위와 비슷하다는 이야기에 가장 크게 공감이 되었다. 나 스스로도 걷는 행위는 나를 일구어 변화를 일으키는 시간이자 경험의 순간이기 때문이다. '두 발로 읽는 것은 두 눈으로 읽는 것보다 실제적이다.' 오늘도 어김없이 걸으며 나와 세상을 만나보겠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2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희선 2025-06-12 04: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누군가는 걸으면서 글을 다 썼다고도 하더군요 이름 알았는데 잊어버렸습니다 옛날 사람은 걷는 게 생활이었겠지만, 예전 철학자는 자주 걸었네요 걸으면서 이것저것 많이 생각하고 글을 썼겠습니다 여성이 마음 편하게 걸을 수 있는 사회여야 하는데... 누구나 편하게 걸을 수 있어야겠네요 저는 거의 혼자 걷지만 누군가와 함께 무언가를 위해 걷기도 하는군요


희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