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장 애국주의와 인종주의

‘자연적‘인 모든 것에는 언제나 선택하지 않은 무엇이 있다.
이러한 방식으로 민족됨은 피부색과 성별, 부모, 태어난 시대 등 사람의힘으로는 어쩔 도리가 없는 저 모든 것들에 동화된다. 그리고 이러한 - P216

‘자연적 유대‘에서는 ‘게마인샤프트(gemeinschaft, 공동사회)의 아름다움‘이라 부를 만한 것이 감지된다.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하자면, 그러한 유대들은 선택된 것이 아니라는 바로 그 이유로 사심 없음의 후광을띤다.
접합된 권력 구조로서의 가족이라는 관념에 대한 많은 저술이 지난20년간 나온 것은 사실이지만, 인류의 압도적인 대다수에게 그러한 개념은 분명히 낯설다. 오히려 전통적으로 가족은 사심 없는 사랑과 결속의 영역으로 사고되어 왔다. 어느 계급 출신이든 보통 사람들 대부분에게 민족의 골자는그것이 이익과 무관하다는 점이다. 바로 그 이유로 민족은 희생을 요구할 수 있다.

20세기의 대전쟁들이 범상치 않은 이유는 사람들로 하여금 죽임을 행하도록 허용한 전례 없는 규모보다는 오히려 자신의 목숨을 내놓도록 설득된 이들의 어마어마한 수에 있다. 죽음을 당한이들의 수가 죽임을 행한 이들의 수를 엄청나게 상회한다는 점은 분명하지 않은가? 궁극적 희생이라는 관념은 숙명을 통해, 오로지 순수성이라는 관념과 더불어 온다. - P217

역사적 숙명으로, 그리고 언어를 통해 상상된 공동체로 보이는 민족은열려 있으면서 동시에 닫혀 있는 것으로 스스로를 나타낸다. - P219

모든 언어가 습득 가능한 것이라면, 그 습득은 한 사람의 삶에서 실제적 몫을 요구한다. 각각의 새로운 정복은 줄어드는 나날들에 기대어 측정된다. 다른 언어들에 대한 사람들의 접근을 제한하는 것은 언어들의 - P223

침투 불가능성이 아니라 사람들의 죽을 운명이다. 그리하여 모든 언어들은 일정한 프라이버시를 갖게 된다. - P224

식민지 인종주의는 왕조적 정당성과 민족적 공동체를 용접하고자 시도했던 ‘제국‘(Empire)이라는 관념의 주요 성분이었다. 그러한 시도는 선천적으로 유전되는 우월성의 원리를 일반화함으로써 이루어졌으며, 그 국내적 지위는 해외 영토의 광대함에 (얼마나 불안정하든)기반을 두고 있었다.

식민지마다 목격되는 것은 드넓은 저택과 미모사와 부겐빌레아가 가득 피어난 정원, 급사들과 남자 하인들, 정원사들, 요리사들, 유모들, 하녀들세탁부들, 그리고 무엇보다 말들이라는 조연급의 대부대를 배경에 거느리고 시를 읊는 부르주아 귀족(bourgeois gentilhomme)"이라는, 으스스하게 우스운 활인화(tableau vivant)였다. 젊은 총각이라든가 하는 이런 식으로 살림을 꾸리지 않았던 이들조차 농민 반란 전야의 프랑스 귀족에 맞먹는 화려하게 의심스러운 지위를 누렸다. - P227

늘 다정한 상상이라는요소가 있다는 점에서 애국심 (amor patriae)은 다른 애착의 감정들과 다르지 않다. (모르는 사람의 결혼 사진첩을 감상하는 것이 고고학자가 그린 바빌론 공중정원의 평면도를 공부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이유이다.) 사랑하는자의 눈, 그가 갖고 태어난 그 특정하고 평범한 눈은 애국자에게는 언어, 어떤 언어든 역사가 그의 모어로 만든 언어에 해당한다. 어머니의무릎에서 마주친 후 무덤에 가서야 헤어질 그 언어를 통해 과거가 복원되고, 동포애가 상상되며, 미래가 꿈꾸어지는 것이다. - P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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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 음식을 좋아하지 않는다.

옆지기는 1년 내내 아아를 비롯한 아이스 음료를 마시고, 음식도 찬 음식을 먹는다. 

나는 국물은 무조건 뜨겁게 먹어야 먹은 것 같고 찬 음식은 손이 잘 안 간다. 커피도 따뜻한 커피만 마신다. 아직 여름이 다 가지는 않았지만 올 여름도 단 한 번 아이스커피를 마셨을 뿐이다. 

중국 드라마를 보다 보면 몸이 안 좋거나 불편할 때는 거의 이 문장이 나온다. "따뜻한 물 마셔!"

물론 나도 평소에 미지근한 (정수) 물을 마셔오기는 했지만 '따뜻한(뜨거운) 물이 무슨 효과가 있다는 거지?' 생각하며 웃어 넘겨왔다.

그러다 얼마 전에 목이 간질간질 할 때가 있었을 때, 생리전증후군으로 힘들 때 뜨거운 물을 마셔봤는데 좋은 거다.

그래서 요즘은 따뜻한 물을 (호호) 불어 마시다보니 잘 안 먹던 물도 더 많이 마시게 되었다.

커피 마시는 양을 줄이고 차 마시는 것으로 대신하고 싶지만 그것까지는 어려운 것 같고...(그래도 커피 마시는 횟수는 정말 많이 줄였다)

3월에 대만 여행에서 사온 우롱차가 있었는데 조금씩 먹다 보니 '괜찮네' 하게 되었다. 하동 녹차나 제주 녹차를 현지 갔을 때 사와서 몇 번 마셔보았지만 녹차보다는 우롱차가 좀 더 나와 맞는 것 같다. 홍차도 마셔봤지만 녹차보다도 별로였다. 

앞으로는 우롱차를 마셔보는 것으로...



토요일은 새벽부터 일어나 걸었다. 덥기는 했지만 한낮에 땡볕에 걷는 것보다는 낫겠지 하며...

다 걸을 때쯤은 땀이 어느새...

아침 일찍부터 운동으로 시작한 하루는 역시나 상쾌했다. 

운동을 끝마친 후 샤워를 하고 나서도 하루의 시간이 충분하게 남아 있으니 즐거웠다.

신문을 읽고, 커피를 마시고 책을 읽었다. 

한 권의 책을 진득하게 읽고 싶지만 매 달 읽어야 하는 책이 있어서 여러 책을 읽어야 하는 경우가 잦다. 멀티는 안 되지만 읽는 순간 집중하면 된다.


일요일도 새벽부터 운동을 했다. 그러나 몸이 너무 무거웠고 책에 집중할 수 있는 컨디션이 아니었다. 전날 영상들을 보느라 12시를 훌쩍 넘긴 시간까지 깨어 있던 것이 문제였다. 게다가 잠을 설치기도 했고.

밀려 있던 책 리뷰를 쓰기로 했다. 써야 할 리뷰가 3개였는데 2개 쓰고 나니 피곤함이 배가 되는 것이...

책 한 권 집어들고 좀 읽으며 마무리했다.



 



최근에 <장상사>와 <엽죄도감>을 보았다. 두 드라마 모두 캐릭터들이 매력적이고, 서사가 훌륭해서 보길 잘했다 생각했다. 중드는 국내에 방영되기 전까지는 전용 ott를 이용해야 해서 불편함이 있다. 오늘부터 <장상사>가 한국 채널에서도 방영된다고 하여 재탕을 할 예정이다.

현재 원작을 읽고 있는데 세계관만 이해한다면 읽는 재미를 선사한다. 한 명의 여자를 두고 세 남자가 달려든다. 어떤 커플을 응원하느냐에 따라 해피 엔딩이기도, 새드엔딩이기도 한 묘한 작품이다. 

<엽죄도감>은 추리물 팬으로서 정말 강추다. 드라마가 탄탄하다 못해 쫄깃하다. 호러물이나 공포물 같이 무섭지 않고 추리 자체에 포커싱을 맞추면서도 '관계'와 '회복'에 대한 이야기이도 해서 다각도로 볼 수 있는 드라마였다.


드라마도 보고 공부도 하는 일석이조의 시간이라고 우겨 본다^^;;;



요즘은 이런 식으로 살아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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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4-08-19 19: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드라마도 보고 공부도 하고 일석이조 맞습니다!!

거리의화가 2024-08-19 20:55   좋아요 0 | URL
긍정 회로 돌리는거죠뭐^^ 그래도 여전히 EBS도 병행하여 공부 중이에요. 다락방 님 미드나 영드도 보시니 그것도 공부겠네요.

단발머리 2024-08-19 2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올 여름도 단 한 번 아이스커피를 마셨을 뿐이다.

여기에서 제가 이미 깜놀 ㅋㅋㅋㅋㅋㅋ 전 최근 2-3년간 아이스만, 사계절 내내 아이스만(왜냐하면 더 나이들면 아이스를 마실 수 없다는 이야기를 들은 바) 마시다가 큰 감기 만나 한 달을 핫으로만 마신 아픈 기억이 ㅋㅋㅋㅋㅋㅋㅋ 저희집은 보리차+옥수수차를 끓여 마시거든요. 저도 기회가 되면 우롱차에 도전해 보고 싶습니다.

거리의화가 2024-08-20 08:46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 다들 놀라지요. 이 더운 여름에 뜨아를 들고 지나가는 것을 보면 사람들이 다들 혀를 내둘러요!^^; 저는 얼음을 특히나 안 좋아하거든요. 아이스로 마셔도 얼음을 안 넣고 찬물에ㅎㅎ
감기나 독감에는 따뜻한 물이 확실히 도움이 되나봅니다. 보리차+옥수수차를 끓여 드시다니 대단하세요. 친가집도 이제는 정수기물 마십니다ㅋㅋㅋ
우롱차 고소하고 참 좋아요. 녹차나 홍차는 떯기만 해서 별로였거든요.

희선 2024-08-20 0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얼음 넣은 커피 딱 한번 마셔봤습니다 저는 집에서만 마시는군요 집에 얼음도 없지만, 이번에는 얼음을 조금 얼려둬서 한번 마셨습니다 드립백은 어쩌다 한번 마시고 거의 그냥 커피믹스 타 먹어요 커피를 타고 조금 식은 다음 마시면 괜찮더군요 차가운 물을 자꾸 마시면 배도 아픈 것 같고, 커피 따듯하게 마시면 괜찮아져요 차가운 물은 빨리 마셔서 그런 듯합니다 밖에 나가면 차가운 물을 마시고 집에서는 미지근한 물... 보리차 끓여 마시기도 했는데, 요새는 귀찮아서 그러지도 않는군요 우롱차 어떤 맛일지...

중국 드라도 추리물이 있군요 드라마 보면서 공부 하는 거죠 걷기에는 아침이 낫죠


희선

거리의화가 2024-08-20 08:50   좋아요 0 | URL
희선님도 역시 따뜻한 커피를 드시는군요^^ 저는 얼음 자체랑 친하지 않은 것 같아요!ㅎㅎ 그래도 하이볼 먹을 때는 술 자체가 독해서 희석하느라고 넣지만...
맞아요. 찬물이 장에 안 좋다고 하더라고요. 배탈나는 이유가 있는 것이죠^^ 보리차 끓여먹기 너무 귀찮아요. 티백 같은 경우는 은근 유통기한 짧아서 시간 넘기기도 하더라고요. 우롱차 구수하니 좋습니다. 언제 한번 도전해보세요^^
중국 드라마에 푹 빠져 있는 요즘입니다. 우리나라 추리물은 추리보다는 스케일에 초점이 맞춰져서 정작 포커싱을 못 맞춘다는 느낌이 들어요. 장면이 잔혹하기만 하고요ㅠㅠ 아침 걷기 요즘 최고로 좋습니다!

독서괭 2024-08-20 09: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유럽에서는 커피를 따뜻하게 마시는 게 당연해서 아이스커피는 잘 안 판다던데! 화가님은 이 더위에도 따뜻하게 드시는군요. 건강에는 그게 좋을 것 같아요. 저는 여름에만 아이스 마십니다. 물은 미지근하거나 따뜻한 걸 선호해요.
아침운동 참 좋죠~ 중국어공부 꾸준히 하고 계시네요. 화이팅입니다^^

거리의화가 2024-08-20 10:57   좋아요 1 | URL
여름 자체가 길어지다보니 1년 중 아아를 마시는 기간이 점차 늘어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물은 미지근하거나 따뜻한 게 좋아요. 찬물은 잘 안 맥히더라고요!ㅋㅋ
괭 님도 달리기 하시는 것 같던데 영어 공부도 꾸준히 하시고 알라딘 서재는 멋진 분들이 넘쳐납니다. 응원해주셔서 감사드려요. 괭 님도 화이팅!!!

자목련 2024-08-20 1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침에 일어나서 얼음 물 한 잔, 잠들기 전에도 얼음 물 한 잔.
화가 님은 허투루 쓰는 시간이 없는 것 같아요.

거리의화가 2024-08-21 09:04   좋아요 0 | URL
올해 여름은 처서매직도 사라졌네요. 8월 말까지는 더위가 이어질 것 같은데 잘 버텨봐야죠!^^;
자목련 님은 매일 투비에 글 올리시고 책을 읽고 쓰시잖아요. 저보다 훨씬 바쁘게 생활하시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코로나 재유행이라 건강 잘 챙기시길 바라요. 투비에도 글 업데이트해야하는데 자꾸 미뤄지네요ㅠㅠ
 

7장 유럽연합의 헤드스카프 논쟁

젠더 문제는 유럽통합 과정에서 유럽연합이 직면한 민주주의 결여 문제와 그 극복의 어려움에 관한 논의이며, 유럽적 가치와 정체성의 확립, 민주적 원칙과 소수의권리존중이라는 절차가 작동하는 과정에서 유럽적 연대와 충성심을 창출하는 데 가장 근본이 되는 논의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와 같은 유럽연합의젠더 평등 문제가 여성 이민자에게도 적용될 수 있을지는 논란의 여지가많이 남아 있다. - P232

오킨의 다문화 논의는 개인의 자율성을 우선시하는 자유주의의 전통에서 집단 내의젠더 불평등 문제에 주목한다(Okin, 1999:23).
"따라서 문화적 관습이라고 하는 것들이 통상 여성의 삶에 많은 영향을미치고, 문화적 관습으로 행해지는 다양한 형태의 폭력이 여성에 대한 억 - P235

압이며 여성에 대한 남성의 통제를 실현하는 기능을 수행한다는 점에서문화적 관습의 이름으로 정당화되는 여성에 대한 폭력은 많은 문제점을안고 있다는 것이다(Okin, 1999: 16).

이처럼 젠더 문제를 둘러싸고 남성 우월적 가부장제하에서 문화적으로정당화된 폭력에 대한 인식과 관점의 차이 문제는 이슬람 가치의 후진성과 서구 가치의 근대성을 이야기하기도 하는 이분법적 논의로 발전해 문화적 차이에 관한 논쟁으로 이어졌다. 이와 같은 유럽적 가치와 이슬람 가치간의 갈등은 또한 문화적 정체성 문제를 넘어 유럽적 가치, 유럽적 젠더 평등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Al-Habri, 1999; Honig, 1999). - P236

1990년대 말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정부는 부르카 착용을 의무화한것은 물론 여성의 사회 활동을 전면 금지하고, 심지어 여성이 혼자 또는여성끼리 집 밖에 외출하는 것도 막는 조치를 취했는데, 이에 따라 유럽에서 헤드스카프 문제는 무슬림 여성의 인권 문제와 신체를 가리는 문제를중심으로 논쟁이 진행되어왔다. 그러나 무슬림 여성의 헤드스카프 문제가유럽 내에서 미디어 이슈로 떠오르며 논쟁이 된 것은 9·11 테러 이후라할 수 있다. 특히 런던과 마드리드 테러 이후 과격한 이슬람 근본주의자에대한 두려움과 연결되어 긴장이 고조되면서부터다.
최근 무슬림 여성의 헤드스카프를 둘러싼 논쟁에서도 잘 알 수 있듯, 프랑스, 덴마크, 네덜란드, 독일, 영국 등 유럽의 주요 국가에서 이민자 사회와의 갈등이 표출되는 가운데 무슬림 여성의 헤드스카프 문제는 가장 격 - P237

렬한 논쟁 주제가 되고 있으며, 유럽의 가치 · 정체성 문제와 유럽 사회에거주하는 무슬림의 통합 문제가 전면에 부각되고 있다. - P238

대부분의 유럽 국가는 국적을 취득하지 않더라도 유럽 영토에 장기적으로 거주하는 이민자와 제3국인에게 유럽인과 유사한 권리를 보장한다. 유럽연합의 조약과 「기본권 헌장(Charter of Fundamental Rights)」을 근간으로 국적, 성별, 인종, 종교, 연령, 신체적 장애 및 성적 취향 등에 대한 유럽연합의 반차별 규정이 국가 차원에서 수용. 적용되고 있다. 그러나 유럽연합 차원에서 헤드스카프와 관련된 법적 규정은 아직 나오지 않은 상태이며, 각 정부의 입장과 이 문제를 다루는 재판소 및 일반 시민의 입장. 시각은 각국의 사회마다 차이가 있으며, 그에 따라 정책적 대응도 다르게 나타난다. - P241

프랑스와 터키를 제외한 대부분의 유럽 국가에는 헤드스카프와 관련된법적 규정이 없지만, 무슬림 여성의 머리나 전신을 가리는 헤드스카프 문제는 유럽 사회 내 다문화주의 토대에 근거해 각 국가의 종교와 젠더 평등정책을 가늠하는 바로미터로 작용한다. 그러나 최근 덴마크와 네덜란드의집권당 등이 기존의 관대한 규정을 없애는 행위나, 헤드스카프 금지를 위한 정당들의 상징적 시도들은 이슬람 소수집단을 같은 눈높이의 시민으로인정하려는 정당한 정책이라고 이해되기 어렵다. 기독교나 유대교의 복장과 관습은 서구의 보편적인 유럽적 가치로 당연시하면서, 무슬림의 가치들은 그 인종·문화성·종교성의 실제를 인정하지 않으려 세속주의와 중립주의를 주장하는 것은 아닌지 의심되는 부분이다. - P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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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장 마지막 물결

제국의 관제 민족주의가 낳은 역설은, 점점 더 유럽의 ‘민족사로 여겨지고 그렇게 서술되는 것을 식민지화된 이들의 의식 속으로 어쩔 수 없이, 때때로 개최하는 둔감한 축제들뿐만 아니라 도서실과 학교교실을 통해서도 들여올 수밖에 없었다는 점이다. 베트남 젊은이들은계몽사상가들과 프랑스 혁명, 그리고 드브레가 ‘독일에 대한 우리의 세속적인 적대감‘이라 칭한 것에 대해 배우는 과정을 피할 수 없었다. 마그나카르타, 모든 의회의 어머니, 그리고 명예혁명은 잉글랜드 민족의역사라는 색칠을 입고 영국 제국 전역의 학교에 들어갔다. 홀란드에 맞선 벨기에의 독립 투쟁‘은 콩고 어린이들이 어느 날엔가 읽을 학교 교 - P181

재에서 지워버릴 수 없는 것이었다. 필리핀에서의 미합중국 역사, 최후로는 모잠비크와 앙골라에서의 포르투갈 역사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아이러니는 이 역사들이 세기가 바뀔 무렵에는 유럽 전역에서 민족적으로정의 내려지고 있던 역사기술의 의식에 입각하여 쓰였다는 점이다. - P182

유럽에서나 식민지에서나 ‘청춘‘과 ‘청년‘은 활력과 진보, 자기희생적 이상주의와 혁명 의지를 의미했다. 그렇지만 유럽에서는 ‘청춘‘이 선을 그어 한정할 수 있는 사회학적 윤곽으로 작동했다고 하기힘들다. 중년이라도 청년아일랜드당에 속할 수 있었으며, 문맹이라도청년이탈리아당에 속할 수 있었다.

식민지에서는 사정이 전혀 달랐다. 청년이란 무엇보다도 유럽식 교육을 취득한 일정한 규모가 되는 수의 사람들의 첫 번째 세대라는 뜻이었으며, 이렇게 그들은 언어적·문화적으로 부모 세대와, 그리고 식민지의 같은 또래 절대 다수와 구별되었다(B. C. 팔을 떠올려볼 것). - P183

‘인란더‘는 어느 종족언어집단에서 왔든, 어느 계급 출신이든 동등하게 경멸의 대상이었다. 그렇지만 이러한 비참하게 평등한 상황에도 뚜렷한 둘레는 있었다. ‘인란더‘는 늘 ‘그래서 무엇의 원주민이라는 건데? 라는 질문을 던지기 때문이다. 네덜란드인들이 가끔 ‘인란더‘가 세계적 범주인 것처럼 이야기했다면, 경험은 그런 생각이 실제로는 지탱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인란더‘는 색칠된 식민지에 그어진 가장자리 선에서 멈추었다. 그 너머에는 가지각색의 ‘네이티브‘, ‘앵디젠‘, 인디오(indio)들이 살았다. 더구나 식민지의 법률용어에는 외국인 동양인 (vreemde oosterlingen, foreignOrientals)이라는, 마치 ‘외국인 원주민‘이라는 양 모조 동전같이 의심쩍은 울림으로 다가오는 범주가 들어 있었다. 주로 중국인 아랍인 · 일본인이었던 그런 ‘외국인 동양인‘들은 식민지에 살기는 했을지언정 ‘원주민 원주민‘ (native natives)들보다 우월한 정치적· 법적 지위를 보유하고있었다. - P187

‘앵도신‘의 식민 지배자들이 추구한 교육 정책에는두 가지 근본적인 목적이 있었고, 나중에 밝혀졌듯이 두 가지 모두는
‘인도차이나인‘ 의식의 성장에 기여했다. 한 가지 목표는 식민화된 민족들과 인도차이나 바깥의 인접한 세계 사이에 존재하던 정치적·문화적유대를 끊는 것이었다. - P190

교육 정책의 두 번째 목표는 정치적으로 믿음직하며, 은혜를 알고, 문화적으로 동화된 토착 엘리트로 복무할, 프랑스어로 말하고 쓰는 인도차이나인들을 신중하게 눈금을 잰 양만큼 생산하여 식민지의 관료제와대규모 영리사업체의 하위 직급을 채우는 것이었다. - P192

일부 민족주의자 이데올로그들의 방식대로 언어를 다루는 것, 즉 깃발이나 복장, 민속 무용 따위와 같이 민족됨의 휘장(emblem)으로 언어를다루는 것은 언제나 오해이다. 언어에 대한 훨씬 더 중요한 것은 상상된공동체를 창조해 낼 수 있는 그 역량, 요컨대 특정한 결속을 구축할 수 있는 역량이다. 따지고 보면 제국 언어들도 마찬가지로 일상어였고, 그리하여 여러 일상어 중의 특정한 일상어였을 뿐이다. - P202

스위스 민족주의는 버마나 인도네시아 민족주의보다고작 10년 정도 오래된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그것은 민족이 국제적 규범이 되어가던, 그리고 예전보다 훨씬 더 복잡한 방식으로 민족됨의 ‘모델‘을 가져오는 것이 가능해진 세계사적 기간에 흥기했다. 스위스의 보수적인 정치 구조와 후진적인 사회경제적 구조가 민족주의의 홍기를
‘지연‘시켰다면, 53 근대 이전의 정치제도에 왕조도, 왕정도 없었다는 사실은 관제 민족주의의 과잉을 막는 데 기여했다(제6장에서 논의한 시암의경우와 대조해 보라). 마지막으로 동남아시아 사례들에서처럼 스위스 민족주의는 20세기의 커뮤니케이션 혁명 전야에 출현했기에, 언어적 단일 - P208

성이 필요 없는 방식으로 상상된 공동체를 ‘표상‘하는 것이 가능하고도실용적인 일이었다. - P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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뭉우리돌의 들녘 - 국외독립운동 이야기 : 러시아, 네덜란드 편 뭉우리돌 2
김동우 지음 / 수오서재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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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나’만이 관심거리가 된 듯하지 않나. 진단이 틀렸기를 바라지만, 공감이 사라진 시대가 온 것 같다. 인간성은 종적을 감추었고, 그 탓에 사회 각 분야에서 전에 없던 파열음이 터져 나오고 있다. 삭막한 삶은 철학을 일상과 분리시켰으며 문학은 시들어 힘을 잃은지 오래고 역사는 극소수가 즐기는 변방의 취미 정도가 돼버린 느낌이다. 사진은 어떤가. 이미지 한 장에 깃든 정신과 사상에는 관심이 없고 온통 기술에만 눈길을 준다.

최근 아버지에게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광복 직전 일본 히로시마에 머물고 있었단 이야기를 들었다. 금시초문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 P11, 12


국외독립운동 사적지를 찾은 이야기 두 번째, 러시아와 네덜란드 편을 펼쳤다. 이번에는 바다가 아닌 들녘이다. 러시아는 중국을 제외하고 특히나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활동한 공간이다. 듣지 않고 보지 않으면 흘려버리고 말 일들이 많다. 저자의 할아버지 이야기도 아버지께서 이야기를 해주지 않았다면 영영 알 길 없는 일이 되었을지 모른다. 일본에 가게 된 이유가 강제 징용 때문인지 자발적 노동자로 간 것인지는 알 길이 없다. 어쨌든 시간은 흘렀고 공간은 사라졌을지 모른다. 그렇지만 이야기를 들음으로써 질문을 품는 기회가 되었을 것이다. 


러시아 이민은 1863년 연해주에 조선인들이 정착하면서 시작되었다. 1883년 조선 월강 금지가 해제되고 1884년 조러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면서 본격적인 한인의 이주가 시작되었다. 러시아는 1891년 한인을 3단계로 분류하는데 원호는 러시아 국적 취득자로 규정하여 관리했다. 원호들에게는 러시아 국적을 부여하고 가구 당 토지를 분배하고 조세, 부역, 군역 의무를 지게 하고 상투/댕기를 정리하도록 했다. 


연추는 조선인들이 최초로 정착한 곳이다. 최재형은 일찍부터 가족과 함께 연해주에 정착한 1세대 한인 중 하나였다. 이범윤은 1903년 간도관리사에 임명되여 러시아와 함께 일본과 싸우다가 전쟁이 끝나자 연추로 이동했다. 연추에서 그는 최재형의 식객으로 머무르고 있었다. 이후 동의회가 창립될 때 둘은 구성원 중 하나였다. 그러나 최재형과 이범윤은 물과 기름처럼 갈등했고, 결국 이범윤 측은 최재형을 제거할 계획을 세운다. 1909년 최재형은 총탄에 맞아 안타깝게 사망하고 말았다. 

저자도 말하지만 안중근에 대한 일화를 보니 영화 <영웅>에서 그가 의병 활동을 하다가 풀어준 일본 포로에 의해 본인이 오히려 쫓기는 사연이 나온다. 이걸 보고 있자니 그의 이론은 너무 거창했나 싶기도 하다. 나중에 그가 말했다던 동양평화론도 요원한 일이 아니었나 싶기도 하고. 거창한 논리 앞에 인간의 이기심은 너무나 무기력하고 속수무책인 것이 아닌지… 

연추의 포시예트 항구는 당시로 말하면 코리아 타운이 형성된 곳이었다. 지신허는 러시아 최초의 한인 마을이었는데 현재는 옛터만 남아 있다. 1937년까지 1천 7백여 명의 한인들이 모여 살 정도로 매우 큰 마을이었다. 이곳에 가수 서태지가 2004년 한인 러시아 이주 140주년을 기념하여 기념비를 세웠다고 한다. 무엇이라도 남아서 사진 작가가 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해주었다는 것에 저자는 감사함을 느꼈다고 한다. 직접 가볼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나도 아마 그런 감정을 느끼지 않을까. 


블라디보스토크를 선조들은 해삼위라고 불렀다. 신한촌 개척리가 세워지고 1910년 성명회를 조직하고 일부 한인들은 일본인을 상대로 무력 시위를 펼쳤다. 일본 영사관은 러시아 정부에 압력을 넣었고 1911년 개척리 철거를 확정한다. 3천 명의 한인들은 이때 철도 공사 현장이나 광산 노동 현장에 투입되기 위해 이동해야 했다고. 

1917년 러시아 내전 발발 후 1차 대전에 출전해 있던 러시아 내 체코 군단은 체코 독립운동 지도자의 의견에 따라 서부전선 합류를 할지, 동부 전선에 머물지 고민하다 체코 임시정부가 있는 프랑스로 가기 위해 블라디보스토크로 이동한다. 체코 군단은 짐을 줄이고 경비를 마련해야 했고 한인 독립운동가들은 무장 강화가 절실한 상황에서 서로가 이득이 되는 거래였다. 영화 <놈놈놈(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의 배경 이야기인 철혈광복단의 15만원 사건도 시작은 이에서 비롯된 것이다. 

엄인섭은 블라디보스토크 일본 총영사관에 파견된 중견 관료인 기토 가쓰미와 손을 잡고 1922년까지 밀정을 관리하며 독립운동에 혼선을 주었다. ‘15만원 탈취 사건’이 아니었다면 그의 밀정 노릇이 더 길게 이어졌을 것을 생각하니 끔찍하기 짝이 없다. 아무튼 일제는 더는 활용 가치가 없어진 그를 버렸다. 


네덜란드 헤이그는 현지명으로는 텐하그라고 불린다. 헤이그 만국평화회의는 본래 1906년에 열리기로 되어 이용익이 특사로 파견될 예정이었다. 그런데 다음 해로 연기되자 그 사이 사망한 이용익을 대신해 특사로 파견할 이를 구해야 했다. 이때 상동교회 교인 독립운동가들이 모여 있던 상동파가 적극적인 역할에 나섰는데 이준이 상동파 청년회장이었기에 헤이그 파견자로 낙점되었다. 이상설 이외에 부사이자 통역인 이위종, 거기에 선교사 호머 헐버트도 제4특사로 함께 했다. 러시아 초대공사였던 이범진은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한 헤이그 특사들을 위해 물밑에서 도왔다. 일제는 그를 갖은 고문, 협박, 회유 등으로 협력을 요청하였으나 끝내 거부한 채 러시아에 남아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1910년 경술국치가 단행되고 이범진은 10월 가진 재산을 모두 처분해 연해주 한인 사회를 비롯한 독립운동가들, 미국 동포들을 위해 자금을 보내고 장례 회사를 찾아가 자신의 장례 비용을 내밀었다고 한다. 그리고 유서 세 통을 작성한 뒤 한 작은 집에서 천장에 목을 매기까지… 그 마지막 가는 길이 얼마나 무거웠을지 상상하기조차 어렵다. 그의 유해는 1911년 2월 3일 상트페테르부르크 우스펜스키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헤이그에 이준열사기념관이 만들어지기까지의 과정도 참으로 드라마틱하다. 

1992년 네덜란드 한 신문에 이준 열사에 대한 기사가 실려요. 그걸 본 거예요. 그리고 한걸음에 드 용 호텔 건물을 찾았죠. 1층은 당구장으로 사용되고 있었고, 2층에서 3층은 무주택자 임시 숙소로 쓰이고 있었어요. 건물 상태는 다 허물어져 가고 있었지요. 당시 건물은 헤이그 시 소유였는데 재개발이 추진 중이었어요. 건물을 구매하려면 공매 과정을 거쳐야 했는데 입주자에게 매매 우선권이 있었어요. 당시 시장에게 헤이그 특사와 건물의 역사적 가치를 설명하는 청원서를 보냈죠. 다행히 시장이 이런 사정을 잘 이해해주었어요. 그렇게 시 협조를 얻어 이 건물을 사게 됐죠. - P208

박물관 원장의 가이드에 따라 저자는 이준의 무덤을 봉환한 뒤 남은 원래 자리에 방문하기도 했다. 1907년 사망한 이준의 사인은 여전히 불분명하다. 그가 순국한 방 벽에는 사망진단서가 걸려 있는데 사인이 빠져 있다. 7월 14일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타살인지 자살인지조차 알 수 없는 그의 죽음을 그저 황망히 생각할 따름이다. 방 한 구석에는 이준의 무덤에 처음 썼던 비석도 놓여 있다. 그 비석에는 이런 내용이 담겨 있어 눈길을 끈다.

*땅이 크고 사람이 많은 나라가 큰 나라가 아니고*

*땅이 작고 사람이 적어도*

*위대한 인물이 많은 나라가 위대한 나라가 되는 것이다.*


우수리스크에는 아픈 흔적이 많은 곳이다. 이상설이 눈을 감은 곳이고, 최재형이 처형된 곳이기도 하다. 이상설은 이런 유언을 남겼다.

*동지들은 합세하여 조국 광복을 기필코 이룩하라. 나는 조국 광복을 이루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나니 어찌 고혼인들 조국에 돌아갈 수 있으랴. 내 몸과 유품, 유고는 모두 불태우고 그 재마저 바다에 뿌린 후에 제사도 지내지 말라. - 이민원, <이상설>, 2017*


만주로 망명한 뒤 내내 국외를 떠돌던 이상설은 병석에서 가족과 상봉했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가족들과 이별한 채 그리움을 안고 사망했으니 말이다. 

이범진도, 이상설도 마지막 가는 길이 참담하지만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끝맺음이 아름답다는 것은 이런 경우를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닐까.

시 중심에서 떨어진 소비에트 스카야 언덕에는 1920년 4월 참변 당시 400여 명이 총살된 현장이고 최재형도 여기에 포함되어 있다. 아무 것도 없는 허허벌판 언덕을 무수히 올랐다는 저자. 짧다면 짧고 길다면 그 긴 시간 동안 어떤 생각들이 스치고 지나갔을까. 궁금증과 물음, 갈증으로 보낸 시간이 아니었을까 싶다.


자유시는 더 참담한 현장일 것이다. 간도 참변의 재현인 자유시 참변이 있던 현장이 아니던가. 참변 현장은 체스노코프역이고 독립군들이 매장된 곳은 클라드비세 공동묘지다. 자유시 참변 추모비는 현재 스보보드니 외곽 소벳스키 마을에 있다. 이 마을은 1937년 강제 이주 전까지는 한인 마을이었다고 한다. 과거 러시아 사람들은 ‘고려촌’으로 불렀다. 자유시 참변 당시 마을 인근에서 사망한 독립군이 묻힌 인연으로 2017년 6월 9일 추모비가 세워졌다. 생각보다 참 많이 늦었다. 비석에는 아래와 비문이 적혀 있다.

*다시는 우리끼리 싸우는 일이 없기를. 서력 1921.06.28. 흑강 자유시사건 독립군순절지. 1921년 이 땅에서 희생된 한인 빨치산 잠들다.*

같은 독립군들끼리 총부리를 겨누고 그 과정에서 발생한 안타까운 사건이었다. 어쩌면 남은 사람들은 그 때문에 더 충격에 빠졌을지 모른다. 한동안 해외 독립운동은 오랫동안 자취를 감추었다. 


하바롭스크는 김유천 거리, 조명희의 흔적, 한인사회당이 창당된 곳으로 기억되는 곳이다. 이제는 김알렉산드리아의 자취로도 알려진 곳이다. 김알렉산드리아는 1914년 홀로 우랄행 열차에 올라 혁명가의 길에 뛰어든다. 그녀는 현지 노동자의 인권과 처우 개선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1917년 러시아 10월 혁명 이후 볼셰비키 집행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어 책임서기, 회계에 선임되었다. 1918년 체코 군단이 반볼셰비키 봉기를 일으키자 일본-서구 연합군은 군사를 개입시키고 자국민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백군과 연합한다. 미처 피하지 못한 김알렉산드리아는 잡히고, 전향을 거부한 그녀는 31살의 나이로 순국한다. 김알렉산드리아의 처형지는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았다. 우초스 절벽 또는 죽음의 계곡으로 두 가지 설이 있을 뿐이다. 어디에서 사망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녀는 마지막에 죽을 자리를 스스로 선택했다. 주인 의식이 있었던 그녀는 마지막까지 참으로 아름다웠다.


다음 편은 중앙아시아와 중국 편이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 역시 기대되는 시리즈가 될 예정이다.


국외독립운동사적지를 기록하는 <뭉우리돌을 찾아서>는 일상의 관심 밖을 들여다보는 작업이다. 삶의 울타리를 넘으면 무관심의 들녘이 펼쳐진다. 거기서 내게 관심을 보이는 사람은 총을 든 경비원들 뿐이었다. 그를 피해 잠시 긴장을 놓으면 어느새 버스가 떠나버리기도 한다. 들녘을 터벅터벅 걸어 어렵사리 목적지를 찾아가면 황량한 빈터가 전부이거나, 누군가 두 팔 벌려 환영해줄지 모른다는 상상이 얼마나 허황된 것이었는지 재차 확인하는 순간이 온다. 그렇다고 아무렇게나 기록해놓을 순 없다. 또박또박 찍어 나가는 사진은 분에 넘치는 도구를 사용해야 한다는 원칙이 있다. 편하자고, 비용을 줄여보자고 카메라를 잘못 선택하면 두고두고 후회가 남을 것 같다. 누가 정해놓거나 시킨 게 아니다. 단지 당당하고 떳떳하고자 했을 뿐이다. 누구에게? 나보다 먼저 나라를 생각하며 지금을 존재케 한 과거의 그들에게. <뭉우리돌을 찾아서>는 내게 그런 작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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