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 번역하기
캐시 박 홍 지음, 정은귀 옮김 / 마티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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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읽는 일은 쉽지가 않다. 압축된 단어나 문장을 풀어내어 숨은 의미를 생각해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 읽기는 결국 독자가 읽고 생각하는 방향에 따라 달라진다.


캐시 박 홍의 첫 시집을 읽으며 시라는 것이 번역과도 닮았다 생각했다. 

외국어를 모국어로 번역하는 일은 아무리 원문을 그대로 살리는 노력을 한다 해도 번역가의 해석이 깃들게 마련인데 시도 마찬가지로 해석이 개입이 되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이었다. 

캐시 박 홍은 이미 국내에 출간된 산문집으로 이름이 알려진 작가인데 여러 권의 시집을 냈을 정도로 시인으로도 알려져 있다고 한다. 

산문집을 읽은 독자로 기대감을 갖고 있었기에 시는 어떤 느낌일까 궁금했다. 


한국에서 건너가 타국에서 이민자로 살아 온 저자는 여러 경험들을 중첩하여 겪었다. 

부모 세대를 통해 전해 들은 한국의 과거와 낯선 타국에서 다른 인종과 부딪치며 동양인(나아가 한국인)임을 인식하는 일은 두려움과 좌절을 동반한 혼란을 주었을 것으로 짐작한다.


시집의 시들은 대체적으로 하나의 결처럼 느껴졌다.

'대상화', '타자화', '어긋남' 등의 단어로 압축되었다.


번호를 매기고 평가를 하는 일은 어떤 기준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동물원의 동물들을 가두고 인간들은 그 앞에 서서 구경을 한다.

19세기 서양인들은 원주민 등을 동물 취급하여 가두고 평가를 했다. 대체 무슨 기준으로? 

자신들이 보고 싶은 대로 타인을 훓는 것은 난도질이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여성들은 남성들에 의해서 대상화되어 평가당해왔다.

말도 안 되는 오만함과 이기심, 탐욕이 투영된 시선은 타인을 무너뜨리게 한다.

정작 대상화되는 객체는 원하지도 않았던 일이었는데 말이다.

서양인은 동양인을 특이한(특별한?) 시선으로 훓(었)고, 이제 한국인은 이방인을 경멸적 시선으로 바라본다.


시간이 지나면 더 이상 쓰이지 않는 단어들이 생기는 것처럼 

미개하다 평가했던 과거를 부끄러워하는 일이 많아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생각 이상으로 공감 가는 내용의 시가 많았다.

인간에 대한 환멸.

같은 여성으로서 느끼는 공감대, 그리고 동양인으로서 느끼는 차별과 혐오.

고정된 시선과 구속, 속박에서 벗어나는 일탈의 어려움 등.


믿을 것이 점차 사라져가는 환멸만이 가득한 세상에서

슬픔과 고통을 내어 보이는 시는 독자에게 위로를 안겨주는 것 같다. 


저자의 시가 계속해서 번역되어 나오기를 소망해본다.

이민자의 혀
쇳소리 혹은 쉰소리로.

둘 다 싸구려 농담을 좋아하지 않았다.
"동양인들은 다 붙어 있어요?" "이 날카로운 핀을 잉의 목에 붙여서
두 사람 모두 고통을 느끼는지 좀 보겠습니다." "당신네들은 아기들을
양배추로 변신시킨다는데 진짜예요?" "우리는 착하고 교양 있는
사람들이에요. 우린 당신들한테 바나나를 주잖아요."

대학 다닐 때, 그녀의 수줍음은 ____________로 오해받았다,
그런 부분을 고치려고, 그녀는 피어싱을 했다.

전시 c: 내 입은 구피처럼 열렸다가
닫혔다. 동사들은 잃어버렸고, 생략부호들이
찌꺼기처럼 흘러내렸다.

산산이 부서진 집-상자-침대-속-미친-미친 년.

그는 한국의 방탕함을 일본에 탓했다:
"우리가 그 제국주의자 새끼들처럼 무분별하게 씹을 한다니까."

(내 할머니는 한때 일본 성을 가지고 있었다. 여자들은
탄광 노동자로 보내져 옷도 못 갖춰 입고 일했다)

도대체 인간이란 어떤 존재이기에
남아프리카의 한 노예 소녀가 팔리게 된 걸까

흥행사로부터 의사에게, 의사로부터 흥행사에게.
나는 그 냉기와 의사들의 손 때문에 죽은 거야.

그럼에도 그들은 내 썩은 몸뚱아리를 전시에 이용했지,
대체-인간이란-어떤-존재야.

우리가 몸과 먼저 연관짓는 것은 늘 고통이다,
가슴에 대고 누르는 주먹의 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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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4-10-01 03: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일제강점기 때 조선 사람을 우리에 넣고 전시한 적 있다고 한 듯해요 예전에 그런 일이 있었다니... 한국 사람이라고 안 좋은 일을 하지 않는 건 아니군요 그러지 않아야 하는데 사람은 안 좋은 걸 배우거나 따라하기도 하네요


희선

거리의화가 2024-10-01 21:45   좋아요 1 | URL
맞아요. 당시는 사람들을 가둬놓고 전시하던 끔찍한 시절이었습니다. 이것이 생각보다 얼마 안 되었다는 사실이 끔찍하지요.
희선 님 말씀처럼 한국인도 이제는 다양한 사람들에 대한 관용과 존중이 필요한데 과거의 안 좋은 내용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으니 반성할 부분이 많습니다.
 


<CH23>

독립 전쟁을 주도한 대륙 회의 대표들이 모여서 만든 헌법 초안이 미합중국의 헌법으로 공식 발효된다. 이는 공화정의 상하 양원의 의회 제도를 기반으로 한 입법, 행정, 사법부의 삼권 분립의 헌법으로 추후 공화정 국가들의 모델이 되었다.

조지 워싱턴은 1789년 미 합중국의 초대 대통령이 되어 1797년까지 미국을 이끌며 건국의 아버지라는 별명으로 불리게 된다.


<CH24>

영국 해군인 제임스 쿡 선장은 타히티에서 금성 관측에 성공한 뒤 1769년 뉴질랜드에 간다. 1770년 오스트레일리아 해안에 도착한 그는 그곳을 영국 땅으로 선언함으로써 식민지 건설의 시작을 이끌었다.

미국이 독립하면서 북아메리카 식민지를 잃은 영국은 오스트레일리아를 선점하고자 죄수를 보내는 것을 시작으로, 나중에는 서부 내륙으로 영역을 넓혀 간다.


<CH25>

재정 파탄에 직면한 루이 16세는 과세 제도를 고치려다가 평민들의 저항에 군대를 동원하여 제압하려 한다. 파리 시민들은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 프랑스 전역에서 농민 반란이 일어난 것이 프랑스 혁명이다.

국민 공회는 공화정을 선포하고 주도권을 잡은 자코뱅파의 로베스피에르는 개혁 정책으로 민중의 지지를 이끌고 반대파를 강력하게 숙청했으나 후에 반대파에 의해 형장의 이슬이 되었다.


<CH26>

표트르 3세는 러시아 황제 자리에 올랐으나 군대와 민중의 지지를 잃자 1762년 황후 예카테리나가 쿠데타를 일으켜 표트르 3세를 폐위시키고 새 황제로 등극하였다.

예카테리나는 법치주의를 강화하고 학문, 교육을 장려했으며 튀르크 전쟁에서 승리하며 영토를 넓혔다. 그러나 프랑스 혁명 후 통제를 강화하고 계몽 사상을 탄압, 농노제를 확장하여 인기를 잃었다.


<CH27>

증기 기관이 도입되고 대규모 공장이 들어서면서 대량 생산이 가능해짐으로써 영국은 산업 혁명을 주도하는 나라로 발돋움한다.

발명가 엘리 휘트니는 목화에서 씨를 분리하는 조면기를 발명했고, 통일된 규격의 부품을 제조하고 조립하는 총기 생산 방식을 발명해 무기의 산업화에 기여했다. 


<CH28>

1757년 청의 건륭제는 광저우 항구만 개방하여 허가 받은 상인만 교역할 수 있게 했다. 영국은 18세기 말부터 여러 차례 사절단을 보내 수교를 제안했으나 청의 입장은 변함 없었다.

영국은 중국과의 무역 적자로 고민하다 인도에서 재배한 아편을 광저우를 통해 중국 내로 들인다. 이에 중국 내 아편 수요가 증가하고 폐해가 늘자 1840년부터 아편 전쟁이 벌어진다.


<CH29>

나폴레옹은 국민공회를 강제로 해산시키고 제1통령의 자리에 오른 뒤 군사 독재를 실시한다.

1803년 재정 확보를 위해 북미의 루이지애나를 미국에 팔고 1804년 나폴레옹 1세로 등극한다. 숙적인 영국 정복을 위해 대규모 함대를 조직하고 출정했으나 트라팔가 해전에서 영국에 패배했다.


<CH30>

1697년 프랑스령이 된 서인도 제도의 생 도밍그, 프랑스 혁명으로 통제가 느슨해지자 흑인 노예들은 1791년 반란을 일으켰으나 나폴레옹이 보낸 진압군에 패한다. 이후 반란군을 이끈 장 자크 데살린은 영국과 손잡고 프랑스를 몰아내는 데 성공하여 1804년 아이티 공화국의 독립을 이끈다. 


<CH31>

영국의 산업화로 가내 수공업에 종사하던 사람들이 실직하여 도시로 몰려 들었다. 급격한 도시화로 노동 환경, 생활 수준은 열악했고 부익부빈익빈의 불평등이 심화되었다. 

1811년부터 영국의 주요 공업도시에서 기계를 파괴하는 일이 벌어졌는데 주동자인 러드의 이름을 딴 러다이트 운동은 1816년까지 산발적으로 지속되다 정부의 강력 진압으로 중단되었다. 이후 정부와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의 처우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고.


<CH32>

미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은 새로 편입된 서부 영토에 대한 탐사를 명령했고 이 조사 결과는 향후 서부 개척의 기본 자료가 되었다.

1800년 윌리엄 해리슨 인디애나 주지사는 주변의 인디언 추장들을 설득하여 '웨인요새 조약'을 체결한다. 그러나 쇼니족의 추장 테쿰세와 그의 동생은 이에 반대하여 미합중국 군대와의 여러 차례 대결 끝에 패배하여 인디언 영토 수호 작전은 실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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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괭 2024-09-30 12: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왓 역시 화가님 진도 쭉쭉!!
 

1934년 이후 공개적으로 부패를표명한 천도교다. 그리고 효율적인 부왜 활동을 부추기기 위해 중국대륙침략전쟁 뒤인 1937년부터 최린이 대표하는 천도교 신파에서는 이른바 ‘조선신궁‘을 ‘참배하고, ‘국기선양식‘에 참가하면서 전시 협력 활동에 적극적이었다. 황승봉 또한 그러한 교계 입장에 길을 같이했다. - P144

천도교 동화집 『새선물은 원전 확정과 독해의어려움을 감추고 있음에도 나라잃은시대 천도교 교계가 내놓은 희귀 동화집이다. 천도교 자장 아래서 동화를 창작한 작가는 적지 않다. 그러나 오롯 - P174

이 천도교 동화만을 써서 낱책으로 묶어 낸 경우는 없었다. 어린이를 위한교육동화의 경우, 가장 활발하게 내놓은 곳은 기독교 교계다. 그런 가운데서 황승봉은 평안북도 신의주(의주)의 간단치 않을 출판 환경을 딛고 천도교의 역사와 교리를 일깨우기 위한 뜻으로 『새선물』을 펴냈다. 신의주 지역문학의 사상적 다양성뿐 아니라 역내 천도교계의 유별난 역량을 증명하는한 본보기라 할 수 있다. - P175

이른바 ‘조국 해방 전쟁‘ 참전기와 종군소설을 통해 월북작가의 정치적이념적 선택이 옳았음을 알리고 싶었을 터이다. 그가 선악이분법이 확연한 종군소설이라는 문학적 전유 방식을 통해 독자들에게 각인시키고 싶었 - P222

던 숨겨진 의도는 자기가 떠나온 이남은 "미제 침략과 매국노의 쑥대밭"이고 새로 선택한 이북이야말로 "자유와 민주화를 위한 건설장"이라는 비속사회학적 문화 심리라고 판단한다.
하지만 이갑기의 다양한 창작활동은 그리 큰 문학적 역량을 발휘하거나 높은 평가를 받지는 못하였다. 개인숭배와 당문학을 중시하는 북 특유의 사회주의적 사실주의가 주류인 북한 문단에서 주변화되었다. 단편집『도솔봉』(1957)에서 해방기 좌익의 인민항쟁과 전쟁기 종군 체험을 창작하였으나 카프 시기 동지였던 한효에게 자연주의, 형식주의적 수법의 폐해를 지적받기도 하였다. 1930년대 한창 시절에 문학과 미술, 연극, 출판 등진보적 문예, 문필활동을 활기차게 전개했던 때와는 비교불가하게 주변으로 몰린 것이다. - P223

김상덕은 『세계명작아동극집』(1936)을 시작으로 『조선유희동요곡집』(1937)을 발행하고, 체제에 복무한 총후(銃後, 후방)의 아동 및 어머니상을 제시한『어머니 독본』(1941), 『어린이독본』(1942), 『어머니의 힘』(1943), 『안해의 결심」(동), 「암야의 등불』(동), 『가정야담 효부』(1944), 『어머니의 승리』(동), 시국적색체가 강한 미담집 소국민독본 이인석 상등병(國民讀本 李仁錫上等兵)』(1941)등을 다수 펴냈지만 본격적으로 연구되지 않았다.
한편으로 김상덕은 가네우미 소토쿠(金海相德)라는 창씨명으로, 「반도명작동화집(半島童話集)』(1943)과 『조선 고전 이야기(朝鮮古典物語)』(1944), 장편동화다로의 모험(太郞冒險)』(同, 1944) 등을 일본어로 간행해 주목된다. 이 글에서는 새롭게 발굴한 사화집 『그림이야기 외쪽눈 영웅物語 片英雄)』(1945)을 분석하였다. 특히 일본의 패망 직전에 발행된 일본어 조선 설화집, 고전소설집, 사화집은 모두 김해상덕 편, 현재덕 그림으로 발행되었고, 조선어로 조선적인 글을 간행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조선적인 것을 남기려는시도였다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들 작품집은 특히 서문에서 시국적 색채를 강하게 표출하며 전시체제에 편승했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 P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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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0년대에는 이탈리아의 많은 도시국가들과 공국들이 황제파(기벨린)와 교황파(겔프)로 갈라져 권력 다툼을 벌였다. 황제를 지지하는 세력을 의미하는 ‘기벨린’은 신성로마제국 황제를 배출한 호엔슈타우펜 가문의 영지 비벨링겐Wibellingen에서 유래했다. 비벨링겐의 이탈리아식 발음이 기벨리노Ghibellino였기에, 오늘날 영어식 발음인 기벨린을 황제파를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하는 것이다.

겔프와 기벨린이라는 이름이 이탈리아에 들어온 것은, 12세기 중엽 신성로마제국 황제 프리드리히가 이탈리아를 공격했을 때이다. 그의 지지자들은 ‘기벨린’으로, 이에 맞선 북부 이탈리아 도시들은 ‘겔프’로 불리게 되었던 것이다. 주로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눈독을 들였던 북부 이탈리아의 상업도시들이 자연스럽게 황제에 맞서 교황을 지지했고, 교황에게 위협을 많이 받았던 농업 지역들이 전통적으로 황제를 지지했다.

샹파뉴 정기시의 쇠퇴는 11~13세기 십자군 시대를 규정지었던 국제 교역의 큰 틀이 변화하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이제 새로운 구조와 특성을 지닌 국제무역이 등장하고 있었다. 십자군 시절의 이탈리아 상인이 지중해와 유럽 여러 시장을 돌면서 상품을 판매하는 ‘여행상인(순회상인)travelling merchant’이었다면, 이후의 이탈리아 상인은 직접 여행을 하지 않고 고향에 머물며 서신을 통해 현지 대리인의 상업 활동을 지시하는 ‘정주상인sedentary merchant’으로 변모했다. 그런 점에서 정기시 쇠퇴의 결정적인 요인이 새로운 사업 방식의 도입, 즉 서신을 통한 사업 관리 방식의 도입이었다는 지적은 매우 타당하다.

제2기는 무엇보다도 ‘해상혁명nautical revolution’의 시대였다.
4 이 해상혁명의 핵심은 수송비를 낮추기 위해 좀 더 튼튼하고 큰 선박을 건조하는 것이었다. 나침반의 사용과 추측항법의 도입, 해도海圖의 제작과 같은 항해술의 발전 또한 해상혁명의 중요 요소였다.
5
변화는 지중해와 그 너머 아시아 세계의 교역 구조뿐만 아니라 서유럽 내부에서도 일어나고 있었다. 직물 산업의 지리적 구조조정, 금화 주조와 같은 화폐시장의 변화, 봉건 왕조의 수도 파리와 같은 대규모 소비 시장의 부상, 상업이 안정되고 규모가 확대되면서 이윤율 하락 등의 변화들이 있었다.

13세기 후반에 이르러서는 이탈리아 상인들의 활동 영역이 지리적으로 더욱 확대되어 아시아 시장까지 포괄하게 되었다. 포르투갈의 항해가 바스쿠 다가마가 인도로 가는 해로를 개척한 15세기 말보다 한 세기 이상이나 앞서서 이탈리아 상인들은 인도와 중국 시장을 직접 경험했던 것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바로 몽골제국 덕분이다.

아시아로 가는 선교사나 외교사절들은 상인들과 동행하는 경우가 많았고, 그들이 이용한 길은 대체로 상업 노선과 일치했다. 제노바 상인들은 도미니쿠스와 프란체스코 수도사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유럽 상인들이 상관을 세우거나 꽤 활발하게 장사를 했던 곳은 킵차크한국의 카파, 타나, 사라이, 일한국의 수도 타브리즈, 흑해의 타나에서 대도로 가는 교통로에 위치한 우르겐치, 사마르칸트, 알말리크, 대원제국의 수도였던 대도, 중국 남부의 광주, 천주, 항주, 양주(양저우)와
††같은 항구도시들, 인도 북부의 델리, 인도 서부 해안에 위치한 카가, 타나, 퀼론 등의 항구도시들이었다. 이 도시들은 주교 관구管區가 설치되어 있거나 수도회가 활동하던 지역과 대체로 일치한다.

15세기 중엽 포르투갈 왕 알폰소 5세Alfonso V의 주문으로 베네치아 출신 수도사 마우로Mauro가 제작한 지도에는 아시아와 아프리카 대륙이 꽤 정확하게 그려져 있다. 콜럼버스와 다가마 이전에 아시아와 아프리카를 이렇게 자세하게 그려 낸 지도가 만들어질 수 있었던 것은, 몽골 평화시대에 베네치아 상인과 선교사들이 아시아를 직접 보고 얻은 지리적 정보 덕분이었을 것이다.

15세기 베네치아, 피렌체, 밀라노 등 이탈리아 상업도시들은 원료 공급지와 판매 시장을 확보하기 위해 팽창주의 정책을 선택했다. 그 결과, 중간 규모의 도시들은 주요 도시들의 위성도시로 전락했다. 베네치아는 15세기 초 북서부 이탈리아로 팽창해 베로나·파도바·라벤나를 정복했고, 피렌체는 300년 동안의 긴 싸움을 끝내고 1406년 피사를 병합하면서 막강한 해상 세력으로 부상했다. 이전까지 제노바 상선을 주로 이용해야 했던 피렌체는 이제 자국 선박을 이용해 장사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실제로 피렌체 정부는 베네치아 모델을 본떠 피렌체 정기 선단을 운영했다.
7
그러면서 베네치아, 제노바, 피렌체 등은 산업을 육성하기 시작했다.

중세 이탈리아 상인은 변화하는 시대에 적응하고 원활한 상업 활동을 방해하는 여러 장애물을 극복하면서 변화해 갔다. 15세기를 대표하는 이탈리아 상인은 12세기의 전형적인 이탈리아 상인과 질적으로 달랐다. 12세기 이탈리아 상인이 상품을 가지고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큰 수익을 노렸던 모험적 성격의 ‘여행상인’이었다면, 15세기 이탈리아 상인은 해외 각지에 주재원을 두고 현지에서 일어난 상업 거래를 복식부기로 작성된 회계장부와 서신으로 보고받으며 꽤 큰 자본을 투자해서 안정적인 규모의 이윤을 도모했던 정주상인이었다.

중세 말 이탈리아 상인들이 취급한 품목은 다양했을 뿐만 아니라, 수송비가 비교적 비싸 원거리 수송이 불가능했을 거라 여겨지는 여러 가지 농산물과 제조업 생산 원료, 완제품까지도 활발하게 거래되었다는 사실이 최근 연구들로 밝혀지고 있다. 이탈리아 상인이 주도했던 중세 지중해 무역에서 이슬람 세계와 기독교 세계를 상호의존하게 만들었던 것은 직물 산업이었고, 그 원료가 된 면화와 인디고, 명반은 동서를 하나로 묶어 주는 매개체였다는 아불라피아의 지적은 직물 산업의 원료와 완제품이 향신료 못지않게 이탈리아 상인들의 주요한 거래 품목이었음을 말해 준다.

베네치아는 시리아·이집트와의 교역에, 제노바는 비잔티움제국과 소아시아 반도와의 교역에 집중했다. 당연히 취급하는 상품도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베네치아 상인들에게 향신료가 있었다면, 제노바 상인들에게는 명반이 있었다.

명반은 주로 지금의 터키 일대인 소아시아 반도에서 생산되었는데, 명반의 주요 고객은 모직물 산업이 발달한 플랑드르와 잉글랜드 등 북서유럽 지역이었다. 결국 제노바는 소아시아에서 생산된 명반을 대량으로 대서양까지 수송하기 위해 당시로서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선박을 건조해야 했다. 또한, 가급적이면 직항로를 선택하여 수송비를 줄일 필요가 있었다. 이 때문에 동지중해에서 명반을 선적하고 대서양으로 향하는 제노바 선박은 가능한 한 본국을 거치지 않으려고 했다. 그 결과, 15세기 제노바 본토의 경제는 큰 타격을 받았던 반면 동지중해에 위치한 제노바 식민지들은 크게 번성했다. 이로 인해 재정수입이 줄어든 본토 정부는 이제 제노바 상인들의 상업 활동에 적극적으로 간여하거나 지원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런 점에서 명반은 중세 말 제노바의 경제적 명운을 결정한 상품이었다고 할 수 있다.

베네치아의 행운은, 오스만튀르크가 소아시아 일대를 장악하고 최종적으로 비잔티움제국을 몰락시킨 후 제노바의 명반 수급이 그 어느 때보다도 힘든 상황에 처하면서 찾아왔다. 물론 이때도 일부 제노바 상인들이 오스만제국 내에 위치한 명반 광산 대부분을 임차하여 운영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명반 교역에서 제노바 상인이 누렸던 독점적인 지위는 이제 무너지고 있었다. 결정적으로, 오스만 술탄은 포카이아를 점령한 후 제노바 상인들을 내쫓고 명반 광산 채굴권을 베네치아 상인들에게 양도했다.

베네치아 정부는 동지중해에서 들어오는 모든 상품을 우선적으로 베네치아 본섬으로 가져와야 한다는 규정을 만들어 이를 엄격히 시행했다. 이러한 정부 정책이 잘 실행될 수 있었던 것은 본섬과 가까운 곳에 소비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동방에서 베네치아로 들어온 향신료, 면화 등은 대부분 북부 이탈리아와 남부 독일로 팔려 나갔다.

소란초 형제상회는 15세기 초엽 베네치아를 대표하는 국제적인 규모의 중개무역상으로서, 베네치아 도시국가의 귀족이었던 소란초Soranzo 가문의 네 형제들이 함께 만들었다.(형제들의 이름은 도나도Donado, 자코모Giacomo, 피에트로Pietro, 로렌초Lorenzo이다.)
1 이탈리아어로 ‘프라테르나Fraterna’라고 하는 ‘형제상회’는 당시 베네치아에서 가장 일반적인 사업 형태였다.(‘프라테르Frater’는 라틴어로 ‘형제’를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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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와 부자 또는 삼촌이나 조카 등 혈연관계로 얽힌 가까운 사람들이 함께 자금을 출자하고 역할을 분담하여 안정적인 결속력을 자랑하는 것이 특징이었다.

동시대의 일반적인 이탈리아 상인과 달리 소란초 상회가 집중 투자한 상품은 바로 면화였다. 그렇다고 소란초 형제상회가 다른 상품을 취급하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다.
12 다만, 그들의 핵심 사업이 시리아 현지에서 원면(가공하지 않은 솜)을 구입해 베네치아에서 유럽 상인들에게 되파는 것이었다는 뜻이다. 소란초 상회의 사업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들도 다양한 종류의 면화에 분산투자했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은 하마스, 트리폴리, 아크레, 알레포, 라타키아(시리아 북부의 항구도시) 등 시리아의 여러 면화 생산지에 대리인이나 동업자를 두고 그들에게서 원면을 확보했다. 가장 중요한 거래처였던 하마스에서는 형제 중 한 명이 직접 면화 구입을 담당했다.

소란초 형제상회가 면화를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전문상인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상업과 수송에 대한 정부의 체계적인 지원과 후원 덕분이었다. 제노바 상인의 경우, 상품을 구입하고 이를 수송할 선박을 찾는 일을 모두 스스로 알아서 처리해야 했다. 상품의 안전한 수송을 감시하는 관리자를 선박에 동승시키는 사소한 일까지 모두 자비와 자력으로 해결해야 했다. 반면에 베네치아 상인들은 국가가 제공하는 정기적인 수송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었고, 상품에 꼬리표와 선적 송장만을 동봉해서 보내면 끝이었다. 상품의 안전한 수송은 정부와 정부 주도의 정기 선단 운영자들이 보장해 주었다.

베네치아는 기존 갤리선의 속도를 그대로 살리면서 화물 선적 능력을 증대시킨 새로운 형태의 갤리, 즉 ‘갤리 상선’을 건조했다. 당시 베네치아 사람들은 이 갤리선을 ‘대형 갤리’라 불렀다.
갤리선은 국가 소유였지만 ‘인칸토incanto’라 불리는 경매를 통해 투자자와 선장을 모집했다.

정부의 체계적인 후원과 지원 덕분에 베네치아 순례 선단은 전 유럽에서 명성을 얻었다. 당시 서유럽에서 가장 안전하고 확실한 성지순례 여행 상품이 베네치아 정부가 제공한 순례 선단이었다는 사실을 반박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매년 수백 명의 독일인과 영국인, 프랑스인, 이베리아인, 이탈리아인들이 이 순례 선단을 이용해 성지를 다녀왔고, 그중에는 이를 여행담으로 펴내는 이들도 있었다.

대리인들은 매일 일어나는 모든 거래를 일기장journal의 ‘차변debit’과 ‘대변credit’란에 나누어 이중으로 기록했다. 그리고 일기장의 내역을 다시 좀 더 큰 장부인 원장ledger에 옮겨 적었다. 일기장이 시간순으로 거래 내용을 정리한 것이라면, 원장은 동일한 사업이나 인물에 관한 내용을 일목요연하게 볼 수 있도록 함께 묶어서 정리한 장부였다. 한 마디로, 거래의 분석을 용이하게 하려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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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복식부기로 작성된 회계장부 덕분에 본국에 있는 상사의 대표는 해외시장에 파견한 대리인의 모든 상업 거래를 쉽게 파악할 수 있었다.

소란초 형제상회가 활동하던 15세기 초가 되면 이탈리아 상인들 대부분이 정주상인으로 거래를 주관한다. 본국에 거주하면서 해외에 파견한 대리인들의 활동을 관리·감독해야 하는 정주상인 입장에서는 모든 거래 내역을 자세히 알 필요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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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문에 이탈리아 상인들은 복식부기로 된 회계장부를 사용하게 된 것이다.

다티니의 최종 유언장은 그가 돈과 구원은 함께할 수 없다는 이데올로기에 굴복했음을 보여 준다. 그는 구원을 얻고자 자신의 전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유증했다.
†다티니가 참회를 한 것은 임종 직전이 아니라 죽기 10년 전쯤이었다. 당시 가난한 사람에게 모든 재산을 나눠 줄 좋은 방법을 찾던 그는 산 파비아노 수도원장에게 조언을 구했다. 수도원장은 두 가지 제안을 했는데, 첫 번째는 프라토 근처의 ‘라 사카’라 불리는 언덕 위에 있는 약간의 땅과 수도원을 사서 그것을 마음에 드는 교단에 기부하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유산 관리를 프라토 성직자들에게 맡기는 것이었다. 라포는 이 제안을 듣고 분개했지만 유언장은 그대로 작성되었다. 이후 2년 동안 라포는 다티니를 끈질기게 설득했다. 라포는 성직자들은 탐욕스러운 늑대라 여겼고, 그들에게 돈을 맡기면 헛되이 탕진할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결국 다티니는 1400년 유언장을 수정했다. 바뀐 유언장의 핵심 내용은, 유산 관리를 성직자의 손에 맡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당시 성직자에 대한 불신이 상당했음을 암시한다.

실제로 제노바의 쇠퇴 과정은 매우 느리게 진행되었다. 어떤 의미에서 제노바는 완전히 무너진 적이 한 번도 없었다고 말할 수 있다. 오스만제국이 중세 후반 제노바 상인들의 핵심 사업 무대였던 비잔티움제국을 무너뜨리자, 다수의 제노바 상인들은 북서아프리카와 이베리아 반도로 상업 거점을 옮기며 살아남았다. 이렇게 이동한 제노바의 인력과 자본은 포르투갈과 에스파냐가 새로운 대륙을 찾는 데 크게 기여했다.

제노바 상인들은 16세기 들어 은행과 금융업에서 새롭게 두각을 나타냈다. 제노바 상인들은 이전까지 지중해 무역에서 엄청나게 벌어들인 자금력을 기반으로 점차 국제적인 은행가로 변신해 갔다. 16세기에는 에스파냐와 손을 잡고 아메리카에서 나오는 은 거래를 담당했다. 18세기 초 제노바의 해외투자 규모는 유럽에서 네덜란드 다음으로 컸다.

브로델은 18세기에도 제노바는 다시 한 번 이탈리아 반도에서 가장 활기찬 모터 역할을 했으며, 이탈리아 통일운동 시기에는 산업을 창조하고 근대적인 해군을 만들었으며 이탈리아 은행도 제노바의 작품이라고 주장했다.

1530년대 이후 지중해를 통한 베네치아의 향신료 무역이 다시 한 번 활력을 되찾았기 때문이다. 16세기 중엽에는 15세기 최고 전성기 수준 또는 그 이상의 향신료가 베네치아로 수입되었다. 인도 항로를 경유한 향신료 무역이 지중해 향신료 무역을 영구적으로 무너뜨린 것은 17세기에 이르러서였다. 결국 베네치아는 인도 항로 개척 이후 한 세기 이상을 잘 버텨 냈던 것이다.
게다가 16세기 말에는 향신료가 베네치아 무역과 경제의 전부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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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과 그 이웃 중국 서남동양학술총서 51
유인선 지음 / 창비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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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을 통해 짐작할 수 있듯 베트남의 역사를 중국과의 관계를 바탕으로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책이다. 근현대 시기 역사부터는 익숙해도 그 이전까지의 역사는 잘 알지 못한다. 그나마 최근 들어 아시아의 역사 관련 책을 읽으면서 알게 된 지식이 조금 있을 뿐이다. 


베트남은 현재도 그렇지만 고대부터 중국과 밀접한 관련을 맺어왔다. 물론 베트남만 그런 것은 아니다. 한자 문화권을 바탕으로 중국의 주변 국가들은 서로 교류하며 눈치 싸움을 벌여야 하는 위치에 있었다. 중국 내부가 혼란하면 주변국은 힘을 발휘하여 뻗어나갈 기회가 생기고, 반대로 중국 내부가 평화로우면 주변국은 그 힘을 비축해야 하는 시기를 보냈다. 이는 한반도나 일본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다 보니 힘이 강해져서 반란을 일으키거나 더 나아가 독립을 하는 과정, 반면 중국 세력에 밀려 압박을 받아 부침을 겪을 때 같은 상황은 아니지만 자주 독립을 열망하고 평화를 꿈꾸는 베트남인들의 마음을 알 것 같았다. 한반도에 사는 사람들도 비슷했을테니 말이다.


지금의 베트남 영토가 되기 까지는 꽤나 오랜 시간이 걸린다. 신화와 농경의 시기를 거친 뒤에도 베트남은 지역별로 각각 쪼개져 있었다. 중국은 일찍부터 베트남의 지역 토호에 관리를 파견하였는데 이 중 조타라는 관리의 이력이 독특하다. 그는 중국인 관리였음에도 현지에 적응한데에서 나아가 새롭게 파견된 중국인 관리를 향해 마치 현지 사람인 것처럼 권리를 주장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렇지만 한(漢)은 결국 남비엣을 지배하려 들었고 이에 맞서 쯩자매가 봉기하였다. 한은 대응을 위해 마원을 내보낸다. 쯩자매가 나선 것을 보면 당시 사회가 모권 사회였음을 짐작하게 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는 결코 쉬운 일은 아니기에 베트남인들은 쯩자매를 영웅시한다고 한다.


한 정부는 반란 수습을 위해서 남비엣에 관리들을 파견하였는데 이들의 착취와 부패가 심해 반란의 불씨가 되었다. 사섭은 중국에 동탁, 조조, 손권, 유비, 관우 등이 활동하는 삼국 시기에 손권과 우호 관계를 맺으며 활동을 한 인물인데다 베트남 토착 사회에 지지를 얻었다고 하여 눈길이 갔다. 반면 도씨 3형제는 중국 왕조에 협력을 한 인물이다.

중국이 수나라로 통일되자 베트남을 확보한다. 당이 들어섰을 때는 안남도호부가 현지에 만들어지기도 했다. 그러다 십이사군 시대에 딘보린이라는 사람이 등장하여 스스로를 황제라 칭한다. 중국 황제에게도 충격을 주었겠지만 이후 베트남 왕조의 선례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을 것 같다. 


967년에 딘 보린은 장자인 리엔을 남 비엣 브엉(Nam Viet Vuong, 南越王)에 봉하고, 다시 1년 후에는 그때까지 사용하던 중국식 연호를 버리고 자신의 연호까지 제정하여 타이 빈(Thai Binh, 太平)이라 하였다. 남비엣 브엉이란 칭호는 전한(前漢) 초기 한에 대항했던 조타가 처음 사용한 것으로, 6세기 리본이 남 비엣 황제라고 칭한 것도 같은 맥락인데, 이는베트남인들에게 중국에 대한 저항이라는 상징적 의미를 갖는다. 어떤 연유에서인지 중국 사료들은 리엔이 남 비엣 브엉에 봉해진 것을 딘 보린이양위한 것처럼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딘 보린의 칭제를 몰랐든가 아니면 인정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한편 베트남에서 독자적 연호의 사용은 리본이 티엔 득이라고 한 경우가 처음이며 이때가 두번째인데, 이 역시 황제의 칭호처럼 중국 군주와 대등하다는 표시이다. - P130


중국의 원나라 시기에는 쩐 왕조의 쩐 홍 다오가 활약을 했다. 그는 고려의 대몽항쟁을 떠올리게 하듯 원과의 몇 차례의 전쟁에서 승리한다. 우리나라도 대몽항쟁 하면 삼별초의 영웅들을 떠올리듯 쩐 홍 다오는 베트남에서 영웅을 넘어 신으로 모셔진다고 한다. 

쩐 왕조가 원과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데에는 여러가지 요인이 있겠지만,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쩐 홍 다오였다. 그는 천부적 전략가로,

필요하다면 언제라도 수도까지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적의 힘이 강할 때에는 정면대결을 피하고 게릴라 전법으로 이들을 괴롭히다가 상황이 호전되면 전면공격을 하는 등 소수 병력으로 강대국의 침략을 저지했다. - P169~170


중국의 명나라 시기가 되면 영락제가 베트남을 문화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지배하게 된다. 이에 맞서 베트남도 잔딘데나 쩐 꾸이 코앙 등이 저항했다. 이후 명은 베트남 남부 지역까지 정복한 뒤 통치자에게 안남국왕이라는 칭호를 부여하였다. 

그렇다면 오늘날 기준으로 베트남 최초의 왕조는 언제이고 누가 열었을까? 

응우옌 푹 아인은 북진에 앞서 1802년 5월 푸 쑤언에서 제위에 오르고 연호를 자롱(Gia Long, 嘉隆)이라 정했다. 자롱이란 자 딘에서 탕롱까지란 의미로 베트남 전체를 뜻한다. 연호의 제정은 통일에의 그의 굳은 의지를 나타낸 것이다.

한편 황제를 칭하고 연호를 정한 응우옌 푹 아인, 즉 자롱 황제는 5월 아직 미해결로 남아 있는 떠이 썬 정권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청의 도움을 얻고자 찐 화이 득(Trinh Hoai Duc, 鄭懷德)을 여청정사(如淸正使)로 광둥에 보냈다. 그가 처음부터 청에 보낸 사절을 ‘여청사‘라고 한 것은 청과 대등하다는 태도를 취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 P257

그러니 사실상 현재의 베트남의 모습은 19세기 초가 되어야 비로소 확인할 수 있다고 보면 되겠다. 


베트남의 근현대사는 호찌민이라는 인물을 빼놓고는 이야기할 수 없을 것이다. 


1943년 11월 카이로회담에서 미국대통령 루스벨트가 종전 후 인도차이나를 신탁통치해야 한다는 뜻을 밝히며 장제스에게 전후 인도차이나 지역을 통제하에 둘 것인가를 묻자, 장제스는 그곳 사람들은 다루기가 어렵다고 하면서 냉담한 태도를 보였다. 직접 언급은 하지는 않았지만, 당시 장제스에게는 국내의 공산당과 군벌 같은 문제가 인도차이나보다 더 중요했다. 그때문에 장제스는 루스벨트에게 대신 제안하기를, 인도차이나가 전후에 독립할 수 있도록 중국과 미국이 공동으로 도와주어야 한다고 했다. 장제스의 이러한 제안은 1943년 중국 내의 여론과 맥을 같이하는 것으로 보인다. 당시 중국의 정치지도자들과 지식인들 대부분은 인도차이나에서 프랑스의 지배권은 박탈되어야만 한다고 하면서도, 과연 누가 그 자리를 대체할 것인가에 대하여는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고 있었다. - P308


베트남 공산당의 창당, 베트남 혁명 동맹회에서 베트남 민주공화국 정부가 출범하기까지 과정을 거쳐 영국군과 중국 국민당 군대가 베트남에 진주할 때 호찌민은 프랑스와 협상을 벌인다. 그러나 퐁텐블로 회담이 베트민(베트남 민주공화국) 위주로 이루어지자 호찌민 정부와 프랑스군은 충돌하며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벌어진다. 중국 대륙이 공산화되자 호찌민 정부는 디엔비엔푸 전투로 대응했다. 결국 제네바 협상으로 프랑스군은 철수하고 북위17도를 경계로 베트남은 쪼개지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그러나 응오딘지엠의 하노이 정부가 남부 공산당을 지원하면서 베트콩이 시작되었다. 

1963년 응오딘지엠 형제가 살해되고 케네디가 암살된 후 1964년 통킹만 사건을 발화로 베트남 전쟁이 시작되었다. 1968년 북베트남과 중국의 불화가 시작되었고 1975년 베트남 전쟁이 종료되기까지 베트남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물론 미국도). 


하노이정부는 캄보디아에 주둔하고 있는 군대가 캄보디아 왕정과 밀접한 관계를 맺는 가운데 베트남에서 훈련받고 귀국한 인물들이 론 놀에 대한 왕정의 저항운동에서 지배적 위치를 차지할 수 있도록 도왔다. 그렇지만 북베트남군의 주둔을 원치 않던 친중국 계열인 폴 포트(PolPot)의 크메르루주(Khmer Rouge)가 1971년 7월 베트남 공산주의자들과의 관계를 끊기로 결정하고 베트남과 가깝다고 여겨지는 캄보디아인들을 제거하기 시작하여 1972년에는 대대적인 숙청을 감행했다. - P417


북베트남 정부가 친소 정책을 펴자 중국은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않는다. 여기에 베트남과 중국 간 영토 분쟁까지 더해지며 1979년 양국 간 전쟁이 벌어졌다. 악화된 관계는 1980년대 말이 되기까지 이어진다.


1975년 통일 후 하노이 정부는 남부의 정치적 통제와 사회주의화 정책의 필요성에 의해 남부 화인의 통합을 위한 급격한 조치를 취했다. 이에 앞서 호찌민 시가 점령된 1975년 4월 30일 밤 중국인들의 거주지인 쩌런(Cholon) 지구에서는 중국 국기와 마오쩌둥 초상화를 들고 대대적인 시위가 있었는가 하면, 일부 중국인은 사회적 혼란을 틈타 물자를 매점매석하여 경제상황을 악화시켰다. 1976년 1월 베트남정부는 남부의 모든 화인들에게 국적을 등록하게 하고, 이어 2월에는 강제로 베트남 국적을 취득케 했다. 이에 응하지 않으면 고율의 세금을 부과하고 식량배급에서도 차등을 두었다. 다시 이듬해 2월 하노이정부는 베트남 국적 취득을 거부하는 화인들에게 직업을 제한하고 이주의 자유도 인정하지 않는 동시에 자유의사 형식으로 귀국시킬 방침을 세웠다. - P441

중국의 1979년 2월 베트남 침공은 승자도 패자도 없는 전쟁이 아니었는가 한다. 양국의 분쟁이 특별히 어느 쪽으로 유리하게 작용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양자는 전쟁의 승패를 떠나 언제까지 대립할 수만 없었다. 베트남은 전쟁을 통해 중국의 전통적 중화주의를 재삼 인식하면서 앞으로도 계속될 위협에 어떻게 공존할 것인가 생각하며 타협점을 찾지 않으면 안된다는 교훈을 얻었다. 더욱이 1980년대 중반이후 중소관계가 우호적으로 변해가고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이 몰락하면서, 베트남은 중국에 대한 외교정책을 재검토하지 않을 수 없었다. 중국은 베트남과 관계가 좋지 않으면 다른 동남아시아 국가들과의 긴장이 계속될 것을 우려했다. - P459


베트남과 중국 간 외교 정상화는 1991년 수교가 되면서 지금까지 이어진다. 이후 양국 간 활발한 경제 교류가 이어졌으나 중국이 국력을 신장시키면서 베트남을 포함한 주변국도 위협을 느끼는 중이다. 게다가 1992년 중국이 영해법을 통과시키면서 국경 분쟁이 일어나고 국제 사회에 남중국해라 선언한 뒤 군사까지 배치시키며 주변국 간에 갈등이 끊이지 않고 있다. 

앞으로 베트남의 역사가 어떻게 흘러갈 지 모르겠으나 중국과의 관계는 여전히 중요한 비중을 차지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베트남과 중국의 관계가 상당히 개선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양국은 계속해서 서로를 의혹의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다. 의혹의 많은 부분은 남중국해에서 일어난 충돌과 석유채굴권 문제이다. 베트남은 또한 중국의 급속히 성장하는 경제력과 군사력의 근대화 및 라오스와 캄보디아에 대한 영향력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다. - P4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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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4-09-25 21: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화가님 책읽는 속도가 정말.... 굉장합니다.
얼마전에 위안부 책 읽으셨는데 벌써 이런 분량의 책을.... 존경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