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렌스키 내각의 잔당들이 아무런 구원의 희망도 없이 공작석응접실에서 은거하고 있던 그 겨울궁전을 ‘급습‘한 전설적 사건은 차라리가택연금과 더 비슷했다. 볼셰비키당원 블라디미르 안토노프-오프세옌코Vladimir Antonov-Ovseenko가 이끌었던 그 습격은 예이젠시테인의 영화제작팀이 재연 과정에서 궁전에 입힌 것보다도 더 적은 피해를 입혔다. 볼셰비키의 습격이 시작되기 전에, 궁전을 수비하던 병력들 대부분이 굶주리고 실의에 빠져 이미 집으로 가고 없었던 것이다. 볼셰비키의 내란에적극적으로 참여한 사람들의 수는 크지 않았다(또 많은 인원이 필요하지도않았다). 아마도 궁전 광장에 모인 1만 명에서 1만 5000명가량의 노동자,
군인, 수병 정도였을 것이다. 비록 나중에 더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이 ‘습격‘에 가담했다고 주장하게 되겠지만, 그들 모두가 실제로 ‘습격‘에 참여했던 것은 아니다. 일단 궁전이 장악되자, 궁전과 궁전의 거대한 와인 저장고를 약탈하기 위해 많은 수의 군중이 후에 가담했던 것이다. - P146

그들의 관점에서 내전은 계급투쟁의 필수적인 단계였다. 그들은 내전을 더 집약적이고 군사적인 형태의 혁명의 연장으로 여기면서 환호했다.
트로츠키가 6월 4일 소비에트에 이렇게 선포했다. "우리 당은 내전을 지지한다." "내전이여 만세! 노동자와 붉은 군대……………를 위한 내전, 반혁명에 대한 직접적이고 무자비한 투쟁을 위한 내전.
레닌은 내전을 대비하고 있었고, 어쩌면 자기 당의 세력 기반을 세우기 위한 기회로 여기면서 환호했는지도 모른다. 그런 충돌의 결과는 너무뻔했다. 그것은 바로 나라 전체를 ‘혁명 지지세력‘과 ‘반혁명 지지세력‘으로 양극화하는 것이었다. 또한 국가의 군사력과 정치력을 신장시키는 것이자, 반체제 세력을 억제하기 위해 테러를 사용하는 것이었다. 레닌은이 모든 것이 프롤레타리아 독재통치의 승리를 위해서 필요하다고 보았다. 레닌은 파리코뮌의 실패의 원인은 내전 개시에 대한 코뮌 지도자들의실패였다고 자주 말했다. - P165

백군의 대의에 대해 공감하는 역사가들은 자주 백군에 대한 방해물을낳았던 ‘객관적 요인들‘을 강조한다. 붉은 군대는 수적인 면에서 압도적이었다. 그들은 명망 높은 수도가 있는 중부 러시아의 광대한 지역을 지배했다. 그곳에는 석유 시설은 아니더라도 나라 전체의 기간산업 대부분몰려 있었고, 그들의 병력을 이 전선에서 저 전선으로 자유롭게 이동시킬 수 있게 해주는 철도망의 핵심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와는 반대로 - P178

백군은 여러 전선에 뿔뿔이 흩어져 작전을 통합하는 것이 어려웠으며, 그래서 군수품 공급의 상당부분을 연합군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이 모든요인들이 작동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패배 근저에는 정책의 실패가 있었다. 백군은 대중의 지지를 얻을 수 있는 정책을 만들 수도 없었고, 만들려고도 하지 않았다. 백군은 볼셰비키의 선전 선동에 버금가는 도구를 전혀 갖고 있지 않았다. 붉은 깃발이나 붉은 별에 도전할 만한 그들 자신의어떤 정치적인 상징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들은 정치적으로 분열되어 있었다. - P179

볼세비키는 내전으로부터 다음의 것들을 물려받았다. 희생에 대한 숭배, 그들의 군사적 통치방식, ‘전선‘마다 끊임 - P183

없는 ‘전투‘와 ‘선전‘을 벌이는 방식, 외부의 적이든 내부의 적이든 도처에서 발견되는 혁명의 적에 대항해 끊임없이 싸워야 할 필요성에 대한강조, 농민들에 대한 볼셰비키의 불신. 그리고 노동의 군사화와 새로운사회의 창조자로서 국가를 보는 유토피아적 전망을 가진 계획경제의 원형을. - P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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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해 봄꽃이 피는데 언제나 봐도 좋다. 올해는 작년보다 빠르게 개화를 시작하여 벚꽃도 거의 반 이상이 폈다.
도심에 있으면 아무래도 삭막한데 이 시즌이 오면 만개한 봄꽃들을 볼 수 있다는 즐거움에 매일이 설레는 것 같다.
어제는 특히 날이 좋았다. 이틀 연속 날이 흐려서 피어난 꽃을 찍어도 우중충해서 아쉬웠는데 어제는 날이 쨍했기 때문이다. 미세먼지는 살짝 나쁨이었지만 봄 치고는 이 정도면 괜찮다 싶은 수준이었다.
점심 먹고 산책 나갔다 역시나 많은 인파에 놀란…!
사람들이 꽃을 배경으로 웃으며 사진을 찍는 모습을 보니 ’봄은 봄이네.‘ 싶었다.
물가는 고달프고 전쟁 소식 때문에 암울하지만 그래도 봄꽃이 핀다는 것이 사람들에게 잠시 행복 회로를 돌리게 하는 듯하다.
원래라면 벚꽃이 이번 주말이 피크일텐데 오늘 밤부터 비가 온다고 한다.
남은 봄 예쁜 풍경 많이 마주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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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고 2026-04-03 1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화사한 벚꽃길 예뻐요 여긴 아직 벚꽃은 군데군데 펴있기만 하거든요 아직 개나리가 대세. 다음주에 활짝 필 것 같아요😄 뉴스는 온통 암울하지만 그래도 봄은 봄이라 산책 나가면 참 좋더라고요ㅠㅠ

거리의화가 2026-04-04 09:47   좋아요 0 | URL
올해도 개나리가 만개하는 모습은 제대로 못 보고 지나쳐버렸어요. 이제 좀 피나 했는데 어느새 지고 있더라구요^^; 벚꽃은 역시 화사하죠. 뉴스 보면 안 좋은 소식뿐이라 한숨만 나오는데 산책하면서 그나마 힐링하고 있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일상을 소중히 여겨야겠어요. 망고 님도 남은 봄 만끽하시기를 바랍니다^^

책읽는나무 2026-04-04 08: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휴. 만개했네요. 봄이 풍성합니다.^^
산책로가 잘 조성되어있어 점심 먹고 잠깐 휴식삼아 걷기 좋겠어요. 도시는 사람이 만든다고 하더니 자연과 인공물을 조화롭게 잘 만든 듯합니다.ㅋㅋㅋ
그곳도 주말에 비소식이 있군요. 이곳도 자고 일어났더니 비가 오고 있네요.
비 그치면 기온이 계속 올라가겠거니. 봄이 참 짧다. 그런 생각을 해마다 더 자주하게 되는 것 같아요. 암튼 화가 님도 짧은 봄 어여 만끽하시길 바랍니다.^^

거리의화가 2026-04-04 09:50   좋아요 1 | URL
이제 정말 봄이죠^^ 회사 근처에 산책로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꽃피는 3, 4월이 되면 사람이 유독 몰리지만 그 또한 이 기간에만 볼 수 있는 광경이랍니다^^ 이곳은 비가 오긴 했는데 많이 내린 건 아니라서 다행히 꽃이 많이 날아가진 않을 것 같아요. 다만 바람이 변수지만ㅋㅋ 말씀처럼 봄은 정말 짧아요. 좋은 계절을 좀 더 길게 즐길 수 있으면 좋으련만 이제는 그것도 허락하지 않는 듯합니다ㅜㅜ 나무 님도 예쁜 풍경들 보며 행복한 일상 보내세요.

단발머리 2026-04-04 1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희 동네도 목요일, 금요일 화려하게 벚꽃 대잔치 중입니다. 저희는 상가에서 지하철역 가는 길에 쭈욱 피었거든요.
회사 근처의 산책로라니 너무 근사하네요. 이 정도면 거리의화가님을 위한 벚꽃 대잔치라고 해도 무방하겠어요~~~~
뉴스로 지친 마음을 꽃사진으로 달랩니다.

거리의화가 2026-04-05 18:25   좋아요 0 | URL
어제는 비오고 흐려서 밤산책을 하고 오늘은 날이 개었길래 낮산책을 했는데 제가 사는 동네도 이제 벚꽃이 절정이더라구요. 나무들이 쪼매나서 아쉽지만~ㅎㅎ 꽃보고 나무들이 푸르러지는 것을 보는 것이 요즘은 정말 힐링입니다^^
 

민중에게는 실질적인 지도자가 없었다. 사회주의 계열 정당은 불시에습격을 받았다. 그들의 주모자들은 유형을 당하거나 감옥에 갇히거나 망명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들의 조직원들 다수가 군중들 무리에 섞여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민중을 지휘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못했다. 군중 지도자는 거리에서 자체적으로 탄생했다. 역사교과서에 그 이름이 나오지않는 학생들, 노동자들, 사관생도들, 부사관들, 사회주의자들이 바로 그들이다. 군중은 ‘혁명‘에 대한 지지를 표현하기 위해서 단춧구멍 위에 리본을 달거나 붉은 완장을 착용했다. 주민들이 자신들의 부엌에서 ‘혁명가들‘에게 직접 밥을 해 먹였다. 가게주인들은 자신들의 가게를 군인들을위한 기지로 바꾸어놓거나 거리에서 경찰이 발포할 경우를 대비해서 시민들을 위한 피신처로 바꾸어놓았다. 아이들은 ‘지도자들‘을 위해 심부름을 다녔고, 참전 군인들도 그들의 명령에 복종했다. 마치 거리의 민중들이 보이지 않는 거대한 실타래에 갑작스럽게 한데 묶인 것만 같았다. 그리고 이것이 그들의 승리를 약속했다. - P111

2월 혁명은 군주정에 반대하는 혁명이었다. 2월 혁명으로 출범한 새로운 민주정은 군주정의 모든 특징을 부정함으로써 성립했다. 그 민주정의지도자들은 차르를 구 러시아의 어두운 저항과 연관시켰고, 차르의 제거를 자유 및 계몽과 동일시하는 수사법을 사용했다. 신문 1면과 포스터와현수막에 등장하는 혁명의 상징은 끊어진 사슬, 찬란한 태양, 그리고 넘어뜨려진 권좌와 왕관이었다. - P117

1917년 대부분의 시간 동안 민족주의자들이 요구했던 것은 독립이 아니라, 러시아 연방국가 내에서의 보다 큰 자유였다. 오직 폴란드와 핀란드만이 처음부터 독립을 요구했다.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국가의 문제보다 사회적인 문제가 더 절박했다. 민족주의는 계급 이익의 지지를 받는지역에서 가장 거셌다. 농민은 토지를 원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언어로말을 걸어오는 정치인을 선호했고, 외국 지주들과의 투쟁에서 자신들을돕는 민족주의자들을 지지했다. (소비에트 지도자들이 지지하는) 임시정부가더 많은 자유에 대해 협상을 거부하면서 독립에 대한 요구는 더욱더 커져갔다. 핀란드와 우크라이나에서는 민족주의 세력이 장악하다시피 한의회가 6월말경 독립을 선언했다. 폴란드의 경우는 이런 법칙에 대한 하나의 예외에 속했다. 여기에서 민족주의세력의 독립에 대한 요구는 이미 3월초부터 임시정부의 지지를 받았다. 왜냐하면 독일군과 오스트리아군이 점령한 폴란드의 경우에는, 폴란드인들에게 자유를 준다고 약속하더라도 잃을 것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정반대로, 군사 활동에 폴란드 주민의 지지를 얻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었다. - P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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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6년 무렵 황후와 라스푸틴의 영향력은 사회와 정부 간의 정치적 마찰을 일으키는 중대한 원인이 됐다. 베를린 정부와의 단독강화를 추진하고 있다고 전해지는 비밀조직이 황실 내에 있다는 소문이 퍼져나가면서군사령부에 반역의 음모가 존재한다는 생각은 힘을 얻게 됐다. 황후와 라스푸틴이 독일을 위해 활동하며, 그들이 베를린 정부와 직접적인 연락을취하고 있고, 차르가 자신의 숙부인 카이저 빌헬름Kaiser Wilhelm에게 러시아군의 이동 상황에 대해 보고하고 있다는 소문이 널리 퍼져 있었다. 로마노프 왕조의 황궁을 ‘친독일적‘이고 ‘부패했다‘고 비난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혁명을 애국적인 행위로 정당화하는 데 일조했다.
황실에서 벌어지는 성적 스캔들에 관한 소문도 비슷한 신빙성을 얻었다. 황후가 라스푸틴의 정부이자 자신의 시녀 안나 비루보바의 레즈비언 애인이었으며, 황후가 안나와 함께 라스푸틴과 난교행위를 벌였다는주장이 나왔다. 알렉산드라의 ‘성적 타락‘은 러시아 군주정의 병적 상태를 단적으로 증명하는 일종의 은유가 됐다. - P96

멘셰비키와 사회주의혁명당은 러시아에게는 자신을 방어할 권리가 있다는 점을 근거로 내세우며 군사활동을 지원하는 쪽(수호자파)과,
‘제국주의 전쟁‘의 종식을 국제적으로 펼쳐나가기를 원하는 쪽(국제주의자파)으로 나뉘었다. 이런 분열은 1917년 내내 두 당 모두를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또한 이런 분열 때문에, 1889년 이후로 유럽의 사회주의 정당들을 조직하고 통합했던 제2차 인터내셔널이 해체됐다. 그런 분열의 중심을 이루고 있었던 것은 민족적 이익보다 계급적이익을 우선하는 세력과, 민족국가의 합법성 및 민족국가들 간의 갈등의필연성을 주장하는 세력 간의 근본적인 세계관의 차이였다. 오직 볼셰비키만이 전쟁을 반대하며 결집을 이루었다. - P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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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1월 9일의 참사를 일컫는 ‘피의 일요일‘의 대학살을 규탄하는파업과 시위의 물결이 일었다. 그 한 달 동안만 하더라도 전국에서 40만명 이상의 노동자가 연장을 내려놓았다. 그것은 러시아 역사상 가장 큰노동자 시위였다. 그러나 파업은 제대로 조직되지 않았다. 파업이 진행되는 과정 중에 노동자들의 요구사항이 작성됐다. 게다가 사회주의 정당들은 아직도 대단히 허약했고, 유럽에서 망명생활을 하고 있는 정당 지도자들은 경찰로부터 지나치게 삼엄한 감시를 받고 있어서 선도적 역할을 하기는 불가능했다. 노동자들은 자력으로 혁명을 일으킬 수 없었다.
‘피의 일요일‘ 사건을 차르 정부 권위에 대한 혁명적 위기로 전환시킨것은 자유주의적인 중간계급과 귀족의 반응이었다. 1903년 이후 자유주의 성향의 전문직 종사자들과 젬스트의 활동가들은 국민의회에 대한 - P45

요구를 포함해 정치 개혁에 찬성하는 운동을 벌였다. - P46

레닌이 보기에, 1905년은 세 가지 사안을 분명하게 드러냈다. 첫째,
‘부르주아의 파탄 및 전제정치 권력에 대한 정치적 저항세력으로서의 부르주아 자유주의 정당들의 파탄. 둘째, 농민층의 어마어마한 혁명적 잠재력. 셋째, 제국의 기반을 치명적으로 허물 수 있는 국경지역 내 민족주의세력의 잠재력.
그리고 그런 결론에 이르자 레닌은 근본적인 볼셰비키의 사상(정통 마르크스주의와 비교할 때 이단이라고 할 수 있는)을 전개했다. 즉 노동계급의 ‘전위대‘는, 구체제를 무너뜨리기 위해 농민들 및 여러 민족들과 연합체를구성하는 경우에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을 우선적으로 거치지 않고도권력을 장악하고 사회주의 혁명을 수행할 수 있다는 견해였다. - P60

트로츠키는 러시아에 세워질 노동자들의 국가가 자본주의 국가들의 조직적인 저항을 견뎌내지 못할 것이라고생각했다. 러시아에 들어설 노동자 국가의 존립은 그것의 국제적인 발전에 좌우될 운명이었다. - P61

스톨리핀은 구 엘리트 정치인의 전통적인 특권을 무시함으로써 그들을 멀리 떠나가게 했고, 두마가그의 앞을 가로막자 두마를 억압함으로써 자유주의자들을 멀어지게 했다. 이런 정치적 단호함은 그의 관료로서의 좁은 안목과 차르에 대한 의존에서 비롯됐다. 스톨리핀은 행정적 지시를 통해 개혁을 이룰 수 있을것이라고 생각했고, 보다 광범위한 사회적 지지층을 동원하기 위해 관료사회 바깥으로 나가본 적이 없었다. 그는 만약 개혁의 수혜자인 농민들을 조직했다면 성공했을지도 모를 자신의 고유한 정당을 세우는 일에 실패했다. 스톨리핀 개인은 존재했지만, 스톨리핀 추종자들은 전혀 없었다.
따라서 스톨리핀이 숨을 거두자, 그의 개혁 또한 그를 따라서 소멸했다. - P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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