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에게는 실질적인 지도자가 없었다. 사회주의 계열 정당은 불시에습격을 받았다. 그들의 주모자들은 유형을 당하거나 감옥에 갇히거나 망명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들의 조직원들 다수가 군중들 무리에 섞여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민중을 지휘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못했다. 군중 지도자는 거리에서 자체적으로 탄생했다. 역사교과서에 그 이름이 나오지않는 학생들, 노동자들, 사관생도들, 부사관들, 사회주의자들이 바로 그들이다. 군중은 ‘혁명‘에 대한 지지를 표현하기 위해서 단춧구멍 위에 리본을 달거나 붉은 완장을 착용했다. 주민들이 자신들의 부엌에서 ‘혁명가들‘에게 직접 밥을 해 먹였다. 가게주인들은 자신들의 가게를 군인들을위한 기지로 바꾸어놓거나 거리에서 경찰이 발포할 경우를 대비해서 시민들을 위한 피신처로 바꾸어놓았다. 아이들은 ‘지도자들‘을 위해 심부름을 다녔고, 참전 군인들도 그들의 명령에 복종했다. 마치 거리의 민중들이 보이지 않는 거대한 실타래에 갑작스럽게 한데 묶인 것만 같았다. 그리고 이것이 그들의 승리를 약속했다. - P111

2월 혁명은 군주정에 반대하는 혁명이었다. 2월 혁명으로 출범한 새로운 민주정은 군주정의 모든 특징을 부정함으로써 성립했다. 그 민주정의지도자들은 차르를 구 러시아의 어두운 저항과 연관시켰고, 차르의 제거를 자유 및 계몽과 동일시하는 수사법을 사용했다. 신문 1면과 포스터와현수막에 등장하는 혁명의 상징은 끊어진 사슬, 찬란한 태양, 그리고 넘어뜨려진 권좌와 왕관이었다. - P117

1917년 대부분의 시간 동안 민족주의자들이 요구했던 것은 독립이 아니라, 러시아 연방국가 내에서의 보다 큰 자유였다. 오직 폴란드와 핀란드만이 처음부터 독립을 요구했다.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국가의 문제보다 사회적인 문제가 더 절박했다. 민족주의는 계급 이익의 지지를 받는지역에서 가장 거셌다. 농민은 토지를 원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언어로말을 걸어오는 정치인을 선호했고, 외국 지주들과의 투쟁에서 자신들을돕는 민족주의자들을 지지했다. (소비에트 지도자들이 지지하는) 임시정부가더 많은 자유에 대해 협상을 거부하면서 독립에 대한 요구는 더욱더 커져갔다. 핀란드와 우크라이나에서는 민족주의 세력이 장악하다시피 한의회가 6월말경 독립을 선언했다. 폴란드의 경우는 이런 법칙에 대한 하나의 예외에 속했다. 여기에서 민족주의세력의 독립에 대한 요구는 이미 3월초부터 임시정부의 지지를 받았다. 왜냐하면 독일군과 오스트리아군이 점령한 폴란드의 경우에는, 폴란드인들에게 자유를 준다고 약속하더라도 잃을 것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정반대로, 군사 활동에 폴란드 주민의 지지를 얻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었다. - P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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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6년 무렵 황후와 라스푸틴의 영향력은 사회와 정부 간의 정치적 마찰을 일으키는 중대한 원인이 됐다. 베를린 정부와의 단독강화를 추진하고 있다고 전해지는 비밀조직이 황실 내에 있다는 소문이 퍼져나가면서군사령부에 반역의 음모가 존재한다는 생각은 힘을 얻게 됐다. 황후와 라스푸틴이 독일을 위해 활동하며, 그들이 베를린 정부와 직접적인 연락을취하고 있고, 차르가 자신의 숙부인 카이저 빌헬름Kaiser Wilhelm에게 러시아군의 이동 상황에 대해 보고하고 있다는 소문이 널리 퍼져 있었다. 로마노프 왕조의 황궁을 ‘친독일적‘이고 ‘부패했다‘고 비난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혁명을 애국적인 행위로 정당화하는 데 일조했다.
황실에서 벌어지는 성적 스캔들에 관한 소문도 비슷한 신빙성을 얻었다. 황후가 라스푸틴의 정부이자 자신의 시녀 안나 비루보바의 레즈비언 애인이었으며, 황후가 안나와 함께 라스푸틴과 난교행위를 벌였다는주장이 나왔다. 알렉산드라의 ‘성적 타락‘은 러시아 군주정의 병적 상태를 단적으로 증명하는 일종의 은유가 됐다. - P96

멘셰비키와 사회주의혁명당은 러시아에게는 자신을 방어할 권리가 있다는 점을 근거로 내세우며 군사활동을 지원하는 쪽(수호자파)과,
‘제국주의 전쟁‘의 종식을 국제적으로 펼쳐나가기를 원하는 쪽(국제주의자파)으로 나뉘었다. 이런 분열은 1917년 내내 두 당 모두를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또한 이런 분열 때문에, 1889년 이후로 유럽의 사회주의 정당들을 조직하고 통합했던 제2차 인터내셔널이 해체됐다. 그런 분열의 중심을 이루고 있었던 것은 민족적 이익보다 계급적이익을 우선하는 세력과, 민족국가의 합법성 및 민족국가들 간의 갈등의필연성을 주장하는 세력 간의 근본적인 세계관의 차이였다. 오직 볼셰비키만이 전쟁을 반대하며 결집을 이루었다. - P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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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1월 9일의 참사를 일컫는 ‘피의 일요일‘의 대학살을 규탄하는파업과 시위의 물결이 일었다. 그 한 달 동안만 하더라도 전국에서 40만명 이상의 노동자가 연장을 내려놓았다. 그것은 러시아 역사상 가장 큰노동자 시위였다. 그러나 파업은 제대로 조직되지 않았다. 파업이 진행되는 과정 중에 노동자들의 요구사항이 작성됐다. 게다가 사회주의 정당들은 아직도 대단히 허약했고, 유럽에서 망명생활을 하고 있는 정당 지도자들은 경찰로부터 지나치게 삼엄한 감시를 받고 있어서 선도적 역할을 하기는 불가능했다. 노동자들은 자력으로 혁명을 일으킬 수 없었다.
‘피의 일요일‘ 사건을 차르 정부 권위에 대한 혁명적 위기로 전환시킨것은 자유주의적인 중간계급과 귀족의 반응이었다. 1903년 이후 자유주의 성향의 전문직 종사자들과 젬스트의 활동가들은 국민의회에 대한 - P45

요구를 포함해 정치 개혁에 찬성하는 운동을 벌였다. - P46

레닌이 보기에, 1905년은 세 가지 사안을 분명하게 드러냈다. 첫째,
‘부르주아의 파탄 및 전제정치 권력에 대한 정치적 저항세력으로서의 부르주아 자유주의 정당들의 파탄. 둘째, 농민층의 어마어마한 혁명적 잠재력. 셋째, 제국의 기반을 치명적으로 허물 수 있는 국경지역 내 민족주의세력의 잠재력.
그리고 그런 결론에 이르자 레닌은 근본적인 볼셰비키의 사상(정통 마르크스주의와 비교할 때 이단이라고 할 수 있는)을 전개했다. 즉 노동계급의 ‘전위대‘는, 구체제를 무너뜨리기 위해 농민들 및 여러 민족들과 연합체를구성하는 경우에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을 우선적으로 거치지 않고도권력을 장악하고 사회주의 혁명을 수행할 수 있다는 견해였다. - P60

트로츠키는 러시아에 세워질 노동자들의 국가가 자본주의 국가들의 조직적인 저항을 견뎌내지 못할 것이라고생각했다. 러시아에 들어설 노동자 국가의 존립은 그것의 국제적인 발전에 좌우될 운명이었다. - P61

스톨리핀은 구 엘리트 정치인의 전통적인 특권을 무시함으로써 그들을 멀리 떠나가게 했고, 두마가그의 앞을 가로막자 두마를 억압함으로써 자유주의자들을 멀어지게 했다. 이런 정치적 단호함은 그의 관료로서의 좁은 안목과 차르에 대한 의존에서 비롯됐다. 스톨리핀은 행정적 지시를 통해 개혁을 이룰 수 있을것이라고 생각했고, 보다 광범위한 사회적 지지층을 동원하기 위해 관료사회 바깥으로 나가본 적이 없었다. 그는 만약 개혁의 수혜자인 농민들을 조직했다면 성공했을지도 모를 자신의 고유한 정당을 세우는 일에 실패했다. 스톨리핀 개인은 존재했지만, 스톨리핀 추종자들은 전혀 없었다.
따라서 스톨리핀이 숨을 거두자, 그의 개혁 또한 그를 따라서 소멸했다. - P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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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텔리겐치아가 마르크스주의에 이끌렸던 이유는 그것의 ‘과학적‘인성격 때문이었다. 리디아 단의 표현을 빌리면, 그것은 빈곤과 후진성의고통에 "객관적인 해결책을 제시하는 "이성의 진로"로 비쳤던 것이다.
또 다른 이유는 러시아가 서유럽 자본주의 국가들과 비슷해질 것이라고마르크스주의에서 약속했기 때문이었다. 러시아 내에서 마르크스주의운동에 가담했던 어느 활동가는 이렇게 회상했다. "우리의 마르크스주의의 유럽적 성격에 매혹됐다. 그것은 우리의 토속적인 외형과 지방적 편협성의 냄새와 맛을 풍기지 않았으며, 새롭고 신선하고 흥미로웠다. 마르크스주의는 우리가 절반은 아시아적인 나라로 머무르지 않을 것이며, 자유 - P33

주의적 정치체제의 문화와 제도와 속성을 가진 서유럽의 일부가 될 것이라는 약속을 제시했다. " - P34

레닌은 훗날 그의 수사학의 고유한 특징으로 자리 잡게 될폭력론으로 경제주의를 공격했다. 레닌은 경제주의의 전략이 사회주의와 혁명을 파괴할 것이며, 사회주의와 혁명은 인민의 의지당의 형태를 따르는 잘 훈련된 전위당의 중앙집권화된 정치적 지도 아래에서만 성공할수 있다고 주장했다. 경찰 정권을 타도하려면, 당 또한 중앙집권화되고제대로 된 규율 아래 놓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었다. 즉, 당은 차르 정부에 필적할 만한 수준이 되어야 했다. - P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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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 동학농민운동 제1차 봉기는 기존 정부에 대한 불만을 가진 농민들이 주도한 무장개혁 운동으로서 기존의 민씨 척족 정권을 무너뜨리고 그 대신 흥선대원군을 받들고 새 정부를 세우려 했다. 동학군의 1차 진주성 전투 성공을 계기로 조선 조정은 청군에 파병을 요청한다. 동학군은 군사적으로 일본군의 맞수가 되지 않았지만 나약한 조선 조정은 그런 농민조차 감당할 수 없었다.(이이화의 동학농민혁명사2, P21) 1885년 맺은 텐진조약의 조항에 따라 일본군은 경복궁을 점령하고 고종을 유폐, 대원군을 옹립한 뒤 조선에 개화 정권이 들어선다. 일본은 국제적 비난을 피하기 위해 주한 외교관을 보호하고 공사관 피해를 막으라는 지시를 내렸으며 만일의 불상사에 대비한 고종 보호 예방 조치에 대한 지령을 내렸다. 일본군은 부산에서 서울까지 전선을 가설하면서 경비를 이유로 현지에서 인부를 구하고 나무를 함부로 베거나 사유지에 함부로 전신주를 시우는 등 추태를 부렸다. 


그동안 남접과 북접 동학군은 따로 움직였는데 이제는 각 지도자 측에서도 힘을 합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전봉준은 동학 북접 교단과 연합작전을 모색하면서 흥선대원군 계열과도 접촉한 사실이 일본 첩자들에 의해 포착되었다. 동학교도 장두채라는 인물이 흥선대원군을 만났고 흥선대원군이 청나라군과 합세해 일본군을 격퇴하기로 뜻을 맞춘 뒤 김덕명, 김개남, 손화중 앞으로 봉기를 촉구하는 편지를 보낸 사실이 드러났다. 

흥선대원군이 전봉준에게 사자를 보낸 사실도 포착되었다. 1894년 8월에 전봉준이 태인에 있을 때 두 사람이 찾아와 흥선대원군의 친서를 내밀었다. 서찰에는 "서울에 있는 일본군을 몰아내야 하니 곧바로 서울로 진격해달라"고 쓰여 있었다. 

또 8월에는 흥선대원군이 경상도, 충청도, 전라도 농민군에게 겉으로는 효유문을 보내 해산을 종용했으나 뒤이어 재봉기를 당부하는 글을 은밀하게 보냈다. 흥선대원군의 수족들도 눈에 띄지 않게 조용히 움직이며 양쪽의 뜻을 전했다. 9월 초 무렵 전봉준은 송희옥의 편지를 받았고 이어 흥선대원군의 밀사인 박동진과 정인덕이 전주로 내려와 전봉준에게 재봉기를 당부했다.(이이화의 동학농민혁명사2, P76~77)


흥선대원군이 전봉준에게 친서를 보내고 직접적이지는 않지만 전봉준 계열의 동학 인사가 흥선대원군과 정말 접촉을 했을까. 일본 첩자들에 의해 포착되었다는 부분이 걸린다. 다만 흥선대원군이 전봉준에게 연락한 것은 어느 정도 사실로 보여진다. 


제2차 봉기는 흥선대원군이 전봉준을 사주했거나, 적당한 때를 알렸다는 주장도 있다. 이상백에 의하면 '대원군은 전봉준의 처족 8촌이자 전주대도소 도집장 송희옥을 선공주사로 임명하고 대원군의 측근인 박동진과 정인덕은 이 송희옥과 접선하여, 전봉준에게 밀지(密旨)를 보내 대원군의 뜻에 따라 재봉기할 것을 주문하였던 것이다. 김개남에게는 대원군의 손자 이준용을 통하여 전 승지 이건영과 접촉하고 이건영은 김개남을 만났다. 이에 전봉준, 김개남이 적극 호응하였음은 물론이다. 체포된 이후 전봉준은 이를 부정하고 있으나 김개남은 대원군의 지시에 의한 것임을 자백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역사넷 '동학농민운동' 中)


위 사료를 보면 책의 전개 내용과 상당히 비슷함을 알 수 있다. 정말 대원군은 효유문을 내려서 표면상으로는 동학군의 봉기의 흐름을 억제하려하면서도 이면으로는 봉기를 계속 가져다주길 바랐을까. 사실 개인적으로는 대원군이 설사 그런 제스처를 취했다고 해도 온전한 마음이었을지는 회의적이다. 아무리 무너져 가는 조선 왕조였다고 해도 왕조 국가의 최고 수장자의 눈에 동학군의 봉기가 곱게 비칠리 없기 때문이다(2차 봉기 때 공주에서 일어난 전투 상황을 보면 조선 조정은 관군과 일본군과 함께 지방 사족과 유생에 힘을 빌어 농민군을 탄압하는데 혈안을 올렸다).  


남접집단이 9월 10일 삼례 재기포를 단행하고 북접교단이 9월 18일 기포령을 발하였으나, 두 집단 모두 일본군과 관군의 공세를 막아낼 방법이 묘연했다. 게다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대원군 효유문과 더불어 고종의 선참후문 교서 등이 삼남일대에 전해지자 갑오변란 이후 척화거의를 도모했던 척사유생들조차 항일연대는 커녕 도리어 반동학군 활동에 적극적인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 몇몇 호남 지역의 북접계 지도자들이 남북접 연대에 적극적인 관심을 보인 것은 남접계 동학군의 집요한 ‘동참 요구’ 때문이었다. ... 9월 18일 기포령 이후 북접교단 휘하의 동학군도 관아를 습격하여 무장을 갖추기 시작했으나 본격적으로 무장대를 편성하기 시작한 것은 공주 점거투쟁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지는 9월 그믐 이후였던 것으로 보인다.(1894년 남북접 공주 점거투쟁 中)


호남에 속한 김낙철 등은 남북 교단의 조화방법을 모색해 김방서, 유한필, 오지영 등을 먼저 전봉준에게 보내 화해를 건의했다. 고대하던 전봉준을 이를 받아들여 전라도 지역 북접 인사에 대한 압박을 중지하고 세 사람을 최시형에게 보내 타협을 모색했다.

신중을 기하던 최시형은 이들을 만난 뒤 김연국, 손병희, 손천민 등 교단 지도자들을 불러 상의했다. 여러 북접 지도자는 논의 끝에 대세가 어쩔 수 없다고 판단했다. 더욱이 조정에서는 집강소 기간에 경기도, 충청도 등지에서 남접 북접 교도들을 가리지 않고 한통속으로 보아 탄압했고 교단 지도자들을 체포하려고 포교들을 풀어놓은 상황이었다.

최시형은 손천민을 전봉준에게 보내 진의를 확인했고 손천민은 이를 최시형에게 알려 연합전선을 펴야 한다고 건의했다. 손병희는 대세를 거론하며 남북접이 함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하여 최시형은 마침내 전국의 교도들에게 남북접이 손을 잡고 항일전선에 나서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를 대동원령이라 한다.(이이화의 동학농민혁명사2, P85)


북접 선봉장 이종훈은 10월 중순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장내리에 도착하여 사흘 동안 진을 치고 머물렀다. 해월신사께서 군사 지휘부를 정할 때 의암 선생에게 대통령기호를 받게 했다. 전규석을 선봉으로 삼고, 나는 중군으로, 이용구를 후군으로 삼았다. 의암 선생의 말씀을 준칙으로 받들어 논산으로 내려가 전봉준과 군대를 합했다. 두 군이 진용을 합한 지 사흘 만에 의암 선생께서 해월신사를 모시고 오셔서 진중에 주둔하고 머물러 계셨다.(이이화의 동학농민혁명사2, P97~98)


남북접 연합의 세력은 차이가 있지만 그 과정은 비슷하게 기술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이후 기존은 동학동민군의 삼례 봉기를 주목했다. <이이화의 동학농민혁명사2>도 역시 삼례 봉기에 상당 부분을 할애한다. 이에 반해 <1984년 남북접 동학군의 공주 점거투쟁>에서는 삼례 봉기와 비슷한 시기에 이뤄진 공주, 이인 등지의 충청 지역에서 일어난 봉기의 규모가 훨씬 컸기에 더 중요하게 다뤄져야 한다고 본다. 결과적으로 대부분의 전투에서 동학군이 패배했다. 첫째로, 일본군과 관군이 우금치 주변을 에워싸고 있었고 공주로 들어오는 통로를 봉쇄하여 외부와의 연락을 차단시켰다. 농민군은 같은 포위 작전을 폈지만 일본군과 관군에 비해 그 변경 범위가 넓어 압박하는 효과가 크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둘째는 무기의 열세 차이도 있었을 것이다. 다음으로 지방의 사족이나 유생들 대부분은 관군과 일본군에 협력했다(물론 일부는 동학군의 편에 서기도 했지만). 동학군이 내건 기치가 그들에게 먹히지 않았기에 혁명을 위한 탄력을 받기에 부족했다. 그리고 남북접 내부 세력의 충돌과 갈등도 한몫을 했을 것이다. 북접과 남접 간에만 갈등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 같은 북접끼리, 같은 남접 끼리도 세력 다툼이 있었다. <이이화의 동학농민혁명사2>는 패전의 원인 중 가장 먼저 2차 봉기 준비 과정에서 삼례에서 시일을 너무 끌었던 이유를 대었다. 북접 지도자와의 호응과 동의를 얻는데 시간을 빼앗겨 정작 일본군과 관군이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을 벌어 주면서 우위에 서게 했다는 이유다.  


공주 전투 후 전봉준은 포기하지 않고 물러나 다시 몇 차례 공격했으나 원평, 태인 전투에서 패한 것을 끝으로 해산 명령을 내렸다. 


이렇게 <이이화의 동학농민혁명사2>는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한 뒤 청일전쟁을 치르는 일을 시작으로 동학농민군의 2차 봉기 운동이 실패하고 전봉준이 재판을 받는 결과까지가 그려진다. 이 책은 동학농민운동의 전개 과정을 전반적으로 확인할 수 있고 전국적인 관점에서 일어난 봉기 내용들을 다룬다는 점에서 장점이 있다 느꼈다. 전라, 충청 지역 뿐 아니라 경기, 황해 등 다른 지역의 상황도 다룬다.

<1894년 남북접 공주 점거투쟁<은 제목과 노선의 파격적인 내용 때문에 급진적 관점이라는 생각이 들지만 적어도 2차 봉기 중 북접 진영의 더 상세한 상황과 공주 중심의 전투 과정을 상세히 파악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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