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의 가을 - 중국과 서양, 그리고 태평천국 전쟁의 역사 걸작 논픽션 33
스티븐 플랫 지음, 임태홍 옮김 / 글항아리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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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제목에 오랜만에 감탄했다. 특히 '천국'은 기독교의 '천국'과 태평천국의 '천국'으로 중의적인 의미를 담은 것 같아서 그렇다. 그치만 가을을 붙인 이유는 잘 모르겠다. 홍수전이 태평천국을 공식적으로 선포한 해는 1851년이지만 사실 운동의 시작은 1850년부터 주요 흐름으로만 따져도 4년여간 이어졌기 때문에 딱히 가을을 붙이기에는 애매함이 있지 않나 싶어서다. 


이 책은 태평천국운동(입장에 따라 운동이라는 글자 대신 다양하게 부르지만 그나마 운동이란 단어가 중립적인 것 같다)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배경으로 한 논픽션이다. 중국의 역사를 연구하는 외국 학자들이 이젠 제법 많아져서인지 다양한 저서들이 많이 나오고 있다. 논픽션은 사건을 그저 서술만 하지 않아 딱딱하지 않게 읽을 수 있고 중요 사건은 좀 더 강조하여 마치 드라마 같은 느낌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장점이라 할 수 있다. 일반 역사서였다면 이 정도 페이지의 분량을 며칠은 걸려서 읽어야할텐데 덕분에 2~3일 투자해서 읽을 수 있었다.


태평천국운동이 있던 시기 청은 대내외적으로 혼란에 빠진 상황이었다. 1842년 영국과 맺은 난징 조약을 시작으로 프랑스, 미국 등과도 관계를 맺으며 세계 경제 체제에 합류하게 되었다. 내부는 곳곳에서 민란이 발생하고 있었다. 


책은 역사적 시간의 흐름에 따라 순서대로 배치하지 않고 인물과 얽힌 이야기를 소개하며 이목을 끌었다가 다음엔 특정 사건(전투)을 설명하는 식으로 나열되어 있다. 목차를 보지 않으면 어떤 이야기가 나올지 모르기 때문에 독자로서는 더 신선하게 읽을 수 있지 않나 싶다.


홍인간은 스웨덴 선교사인 테오도레 함베리에게 세례를 받았고 홍콩에 갔을 때 만난 스코틀랜드 출신 선교사인 제임스 레그 등을 통해 이야기를 듣기도 하고 관련 책도 읽어서 서양 문화와 문물에 아주 익숙한 인물이었다. 외국어도 능숙했다니 재주가 있었던 인물임에는 틀림 없는 것 같다. 레그는 홍인간에게 전도와 공부에 집중하라고 권했지만 홍인간은 정치적 욕망이 있었던지 뿌리치고 홍수전을 만나기 위해 떠난다. 

홍수전이 신을 만난 이야기는 마치 무슨 신화나 전설처럼 많은 이야기가 떠도는데 어쨌든 배상제회를 중심으로 모인 신도들은 그를 영적인 지도자로 여겼고 이후 태평천국은 점점 확장되어 나갔다. 1851년 1월 홍수전은 기독교 개종과 만주족 타도를 기치로 태평천국을 수립하며 스스로 천왕이란 자리에 올랐고 홍인간에게는 간왕이라는 직함을 내렸다. 홍인간은 이 무렵 논설을 통해 태평천국이 나아갈 방향이자 뚜렷한 목표로 근대 산업 강국으로 내세우며 비전을 제시했다. 사촌인 홍인간이 상대적으로 한 자리를 얻기 쉬웠다면 충왕인 이수성은 홍수전의 신임을 얻기 위해 바닥부터 무진장 노력하여 마침내 장군 자리에까지 오른 사람이다.  


태평천국운동 초기 영국은 청 정부군과 태평천국군 중 어느 한편에 힘을 실어주지 않고 중립적인 태도를 견지했다. 다만 당시 상하이에 있던 영국 최고위직 프레더릭 브루스는 청 정부군 고위직에 있던 '오후'의 부탁으로 청군을 지원하는 편에 섰다. 물론 상하이에 있던 영국인들을 보호하겠다는 명분도 있었을 것이다. 이에 반해 미국인 지휘관인 프레더릭 타운센드 워드는 중국인 상인 집단의 손을 잡고 외국인 중심의 민병대를 꾸려 태평천국군 편에 서서 청 정부군을 몰아내려 했다. 그리고 청에 들어와 있던 선교사들은 태평천국 편에 섰는데 중국이 기독교로 개종해야 한다는 생각과 서양에 우호적인 방향성이 대체적으로 부합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2차 아편전쟁으로 다구포대에서 패배한 영국은 청에 설욕하기를 원했기에 중립 노선을 내려놓고 당시 영국의 식민지인 인도와 프랑스 함대까지 동원해 베이징으로 향했다. 이들에 대항하기 위해 증국번은 청의 상비군을 이용하지 않고 자체 군대를 새롭게 조직하였다. 자체 규율로 충성을 하지 않으면 안되게끔 세뇌를 한데다 구성원이 마을, 가족 단위였기에 서로 서로 감시하는 역할까지 더해져 결속력이 강한 군대가 되었다. 덕분에 태평천국군에 승리하여 황제의 주목을 받았지만 함풍제는 얼마 후 사망하고 너무 어린 황제를 대신해 서태후(와 동태후)가 정치 무대에 메인으로 등장하기에 이른다. 


1861년 미국에 남북전쟁이 시작되자 영국산 면직물 가격이 폭등하여 중국으로 수출하는 물량이 급감하는 등 실물 경제가 요동쳤다. 링컨이 남부연합의 모든 항구를 봉쇄하자 영국은 중국의 조약항들이 자신들을 구할 수 있는 마지막 보루라고 여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보복이라도 하듯 영국이 미국 남부연합의 교전국 지위를 인정한다고 발표하자 결과적으로 이는 태평천국의 주권도 인정하겠다는 꼴이 되었다. 태평천국군으로서는 호재가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이홍장은 증국번의 군대와 비슷한 성격의 민병대를 안후이성에서 조직하기 시작했다(규칙까지 복붙). 서태후와 어린 황제는 증국번에게 정부군 지휘 책임을 맡겼는데 정황상 그럴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1862년이 되면 영국군과 프랑스군, 프레더릭 타운센드 워드가 힘을 합해 태평천국군이 점령한 상하이를 탈환하기 위해 뛰어들며 접전이 벌어진다. 1863년에는 피난민이 몰려들어 상하이에는 콜레라가 창궐했다. 이는 톈진에서 베이징까지 확산되었고 군대도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었다. 증국전의 기습 공격을 시작으로 위화타이의 석축 요새를 점령한 이후 청군은 계속 세력을 뻗어나가며 태평천국군이 빠져나갈 출구를 장악해나갔다. 1864년 홍수전은 이미 병으로 사망한 뒤였던 때 좌종당 부대가 프랑스의 지원을 받아 항저우를 탈환하고 이수성이 증국번에 의해 잡히고 난 뒤 사실상 전쟁은 종결되었다. 이수성은 태평천국군의 거의 마지막을 지휘한 반면 홍인간은 이때가 되면 초기의 진취적인 기운도 없어졌다는 식으로 묘사가 되어 있다. 


앞서도 설명을 했지만 개인적으로 홍수전의 사촌이자 태평천국에서 간왕 노릇을 한 홍인간과 충왕 이수성에 대한 에피소드를 재미있게 읽었다. 태평천국운동이 진행되는 동안 다양한 인물이 등장하지만 그동안 사실 홍인간에 대해서는 뚜렷한 인상을 받지 못했었다. 이 책에서는 홍수전은 오히려 약간 뒷배경처럼 배후 같게 그려지고 홍인간이 메인에서 지휘를 이끄는 실세처럼 그려져 있다. 충왕 이수성의 역할도 제법 비중 있게 다뤄진다. 물론 약간의 과장이나 축소를 감안해야겠지만 태평천국운동을 조금 더 상세히 뜯어볼 수 있게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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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생학은 언제나 극히 기민한 이데올로기였다. 우생학은 스스로 힘을 실어주기도 하고 동원되기도 한 운동들, 즉 국가주의, ‘개혁 지향‘ 자유주의, 절대적인 동성애 혐오, 백인우월주의, 여성 - P56

혐오, 인종주의와 따로 떼어낼 수 없다. 우생학이 오래도록 살아남은 것은 순전히, 어떤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오명을 뒤집어쓰더라도 나머지 사람들은 다치지 않는다는 이유로 이런 운동들과공모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우생학이 모든 유형의 편견에 호소력이 있다는 것은 배제나 유전적 추정이나 외과 수술의 대상으로 지목된 개인들이 대부분 다중적 정체성을 가지며, 어느 하나가 아니라 그 이상의 표적 집단에 속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 P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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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이야기 1-2 - 동양문명, 수메르에서 일본까지 월 듀런트의 문명 이야기 1
윌 듀런트 지음, 왕수민.한상석 옮김 / 민음사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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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 이야기 동양 두 번째 편을 읽었다. 1편이 초기 인류 문명 중 서아시아, 북아프리카, 지중해 부근을 다루었다면 2편은 인도, 중국, 일본 문명을 다루고 있다. 이것으로 사실 동양 문명을 포괄한다고 하기에는 부족함이 있다는 생각이지만 그럼에도 2편은 인도, 중국, 일본 문명을 꽤나 공들여 상세하게 다루고 있다. 분량으로만 따지면 사실 인도가 가장 비중이 높고 그 다음이 중국, 일본 순인 것 같다. 


인도는 아라비아 숫자가 탄생하고 십진법이 탄생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음수 개념도 찾아내 수학의 기초가 마련되었다고 볼 수 있다. 아라비아 숫자는 인도에서 아랍을 거쳐 유럽이나 다른 아시아로 향한 것이다. 

인도의 종교는 불교에서 출발하여 힌두교와 이슬람교를 거쳤다. 불교를 탄생시킨 부처는 극단적 금욕주의를 실천하고자 했다. 인생은 고통이며 고통은 욕망에서 비롯되기에 지혜는 모든 욕망을 잠재우는 데 있다는 것이다. 

부처 사후 불교는 대승불교와 소승불교로 나뉘어졌다. 이후 인도는 힌두교와 이슬람교로 대체되었으나 역설적으로 주변 국가들로 불교가 확산되며 그 명맥을 이었다. 

힌두교는 창조를 뜻하는 브라만(여기서도?), 보존을 뜻하는 비슈누, 파괴를 뜻하는 시바를 3대 신으로 모신다. 

이슬람교는 쿠샨 족 등 이슬람인들이 들어오면서 상당 기간 동안 인도를 지배하며  다양한 문화를 낳게 했다. 


인도에서 지금도 여전히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카스트 제도는 계급에 따른 일상 생활의 모든 규범과 의무를 규정해놓은 것으로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 신분이 세습된다는 특징을 가졌다. 가장 상위를 차지하는 계급인 브라만 관점에서 규정이 정해졌기 때문에 하위 계급은 브라만을 존중하는 등의 조항도 들어가 있다. 

인도의 철학은 대표적으로 베다, 우파니샤드에서 출발했다. 베다는 '지혜들'을 뜻하며 지혜에 관한 책에서 기원했다. 베다는 네 가지 내용(만트라, 브라마나, 아라냐가, 우파니샤드)으로 되어 있다. 

'우파니샤드'란 '우파'(가까운), '샤드'(앉다)로 스승에게 가까이 앉아 있음을 뜻하는 말로 스승이 제자들을 불러놓고 한 가르침의 내용이다. 그곳에는 BC 800~500년 활동하던 다양한 성인과 현자들의 강론이 실려 있다. 

우파니샤드 철학은 이성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가르침이다. 1단계는 아트만으로 자아의 본질은 내면에 자리잡고 있는 무형의 침묵하는 존재이며 2단계는 브라만으로 어떤 것에든 자리하며 중성의, 인격과 무관한, 모든 것의 근간이 되는 무형의 세상의 본질이자 태어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 영혼이다. 3단계는 아트만과 브라만의 통합을 지향한다. 

브라만 철학 체계는 사실 읽었지만, 읽어도 무슨 말인지 어려웠다(발음이 어려운 탓도 있는 듯). 그래도 이 중 부처 시대에 번성했다는 요가 체계(요가는 지금 요가 교재로도 사용하는 그 요가 맞다. 요가 경전인 요가수트라에는 요가 체계의 실천사항과 전통을 담고 있다)와 우파니샤드 철학에 논리를 제공하고자 탄생한 베단타 체계는 기억에 남는다. '베단타'란 '우파니샤드의 끝'을 의미하는 것으로 신과 영혼은 하나이니 브라만과 합일되려는 열망으로 우리는 탐구하고 생각하려는 자발적인 태도를 가지고 자제력과 평정심을 꾸준히 갖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말한다. 

서사시로 지금도 알려져 있는 것은 아마도 마하바라타와 바가바드기타가 아닐까. 마하바라타는 폭력과 도박, 전쟁에 대한 이야기다. 바가바드기타는 개개인이 나라를 위해 일어서야 한다는 메시지를 강조하는 것이다. 예전에 바가바드기타는 발췌본으로 읽어서인지 그런 메시지는 느끼지를 못했던 것 같다.

인도 관련하여 이보다 더 많은 이야기가 있지만 이 정도로 하는 것으로 한다.


중국은 역시 철학 체계가 가장 흥미로웠다. 예전에 읽었던 중국철학사와 비슷한 결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겠다. 책의 비중도 철학 쪽에 치중되어있다는 느낌이었다. 고대 분열과 통합의 시기가 끊임없이 오갈 때 혼란의 시기마다 공자, 맹자, 노자, 장자 등 철학자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 중 역시 공자의 영향은 막강했다. 공자 사후 공자를 주해한 책들이 쓰여지면서 중국 내 뿐 아니라 주변 국가에도 공자의 사상이 알려지게 되었다. 공자를 추존하는 사당이 여기 저기 만들어진 것은 물론이다. 

여러 시인이 탄생된 시기는 당나라였다. 당시는 간결하면서도 섬세한 표현과 절제된 감정이 특징이다. 이태백, 두보, 도연명, 백거이 등 유명한 시인들이 있고 이들의 당시는 지금도 많은 이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다. 

송나라는 종이, 먹, 도장이 개발되고 목판 인쇄가 가능해지면서 학문이 전수될 수 있는 길이 열린 시기다. 옥과 돌을 다루는 기술이 최상급이었으며 특히 칠공예가 시작된 시기이기도 하다. 그림에는 북종화와 남종화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두루마리 형태도 있었지만 병풍 형태도 있었다. 서양화와는 달리 원근법이 무시되었으며 선과 먹의 농담으로 사물과 자연을 암시하여 간접적으로 묘사하는 것이 특징이다. 사실상 동양 수묵화가 시작된 것이 이 시기가 아닐까 싶다. 이들의 영향은 한반도의 고려, 조선에도 이어져 유학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유교가 정착되면서 하늘을 숭배하던 이들이 조상을 숭배하게 되었으나 점술을 비롯한 신비주의는 사라지지 않았다. 아무래도 역경을 바탕으로 한 도교의 영향이 있을 것 같다.


일본은 천황을 중심으로 쇼군, 영주, 가신, 무사 계급으로 중세 이후 체계가 근대 시기로 오기 전까지 지속되었다. 이 중 사무라이는 국가에 대한 충성을 강요 받는 것 말고는 노역을 받지 않았고 검을 소지하면서 하층민을 죽일 권한을 가졌다. 

일본은 9세기 가타카나 문자를 개발하기 전까지는 한자를 사용했다. 현재도 명맥을 잇고 있는 대중 연극인 가부키 시바이는 18세기 승려들이 의식에 합창곡을 더하고 연기자에게 연기를 하도록 한 3부작 연극을 기본으로 막간인 소극이 더해져 지금의 형식이 만들어졌다. 단카와 하이쿠 문화도 있다. 중국, 조선에서 건너간 도자기 문화는 현재도 일본을 대표하는 예술 작품으로 남았다. 건축은 소담한 정원이 떠오른다. 아기자기한 멋으로 일본의 차와 함께 대표적인 문화 예술이 되었다. 호쿠사이, 히로시게를 대표 작가로 하는 우키요에 판화는 서양의 인상파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준 것으로 유명하다. 

후지와라 세이가, 하야시 라잔, 무로 규소, 가이바라 엣켄에 의해 주자학이 전래되고 일본 내 정착되었다. 나카에 도주 등에 의해 양명학이 수용되기도 했다. 이렇게 친중국적인 학자들이 있기도 했지만 근대 시기로 갈수록 친일본 경향으로 애국(심)을 강조하는 학자들의 수가 늘어난다. 마부치, 모토오리 노리나가, 히라타에 이르기까지 이들은 일본과 일본성의 우월을 주장했다. 이는 일본이 사실 메이지 이후의 근현대 시기 봉건 사회를 탈피하여 산업 사회로 이행하면서 걸었던 제국주의의 기치의 모습과도 연결된다.


아무래도 한반도와 더 지리적으로 가깝기도 하고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으로도 교류가 많았던 지역이어서인지 그 역사도 조금 더 익숙해서 편하게 읽을 수 있었다. 

그리고 역시 정치사보다는 사회, 철학, 종교, 문학을 다룬 쪽이 더 재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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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시인들은 중국 철학의 엄숙주의에 대해 속죄하기로 마음먹은 사람들이었다. - P420

무대에는 소품이나 무대 장치가 거의 없었으며 출구도 없었다. 엑스트라를포함한 모든 출연 배우가 연극이 끝날 때까지 무대 위에 앉아 있다가 차례가되면 일어나 연기를 했다. 경우에 따라서는 보조자가 그들에게 차를 대접하기도 했다. 다른 직원들은 관객 사이로 다니면서 담배와 차, 과자를 팔기도 하고여름밤에는 얼굴을 닦을 뜨거운 수건을 제공하기도 했다.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이야기를 나누다가 이례적으로 훌륭한 연기가 이루어지거나 큰 소리가 나면 무대에 집중했다. 배우들은 대사가 들리도록 큰소리로 고함치듯 해야 하는경우가 많았다. 아울러 사람들이 배역을 잘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가면을 썼다. … 배우들은 곡예와 춤의 전문가가 되어야 했다. - P439

중국에서 지혜 추구란 공허한 형이상학이 아니라 개인 계발과 사회 질서를 목표로 삼는 실증 철학을 의미했다. 마찬가지로 아름다움을 향한 열정이란 인간사와 무관하게 예술 형태만 추구하는 어설픈 예술 애호주의나 비전적(的) 예술 지상주의가 아니라 아름다움과 실용성을 현실적으로 접목시켜 일상생활에서 사용되는 물건이나 도구를 장식하려는 노력이었다. 중국은자체의 이상들을 굽히고 서구의 영향을 받아들일 때까지는 예술가와 장인 혹은 장인과 일꾼을 구별하지 않았다. - P454

말이 변하고 다양해졌음에도 동일한 글자체가 이렇게 계속 유지된 덕분에 중국은 사상과 문화를 보존할 수 있었으며, 동시에 보수주의가 강력한 힘을 갖게 되었다. 그 덕분에 유서 깊은 사상들이 중국을 지배하며 젊은 세대의 정신세계를 형성할 수 있었다는 얘기다. 중국 문명의 특징을 상징적으로보여주는 것이 바로 독특한 글자체가 지닌 이런 현상적 특성인데, 다양성과 성장 속에서의 통일성과 철저한 보수주의, 짝을 찾을 수 없는 연속성이 그것이다.
이 글 체계는 어떤 의미에서 보더라도 대단한 지적 업적이었다. 그 체계는 (사물과 활동, 속성으로 이루어진) 온 세상을 뿌리가 되는 "부수"라는 몇 백 개의 부호로 분류해 놓았고, 그 부수들을 1500개 정도의 서로 구별되는 표지들과 결합시켜 완성된 형태를 통해 문헌과 삶 속에서 사용되는 개념을 모두 표현할 수있게 만들어 놓았던 것이다. - P498

그들은 조상을 존중하지만 도교와 불교의 사원에 대해서는 승려들과 일부 여자들만 관심을 보일 뿐이다. 그들은 역사상 가장 세속적 정신을갖고 있다. 그들이 관심을 갖는 것은 이생이다. 그들이 기도할 때 구하는 것은낙원의 행복이 아니라 여기 이 땅의 복이다. - P515

그들은 서양의 과학과 방법론, 역사, 사상 등을 가르치는 신식교육을 감사하고 흠모하며 마음껏 받아들였다. 주변에서 보는 편의 시설과 활기찬 생활, 서양인의 개인의 자유, 국민들의 참정권을 보고 깜짝 놀랐다. 서양철학을 공부했으며 조상들의 종교에 대한 믿음을 잃었다. 아울러 조국의 문명이 지닌 모든 요소에 반기를 든다는 면에서 교육자로서의 위상과 새로운 환경의 격려받는 존경스러운 진보론자라는 위치를 즐겼다. 해마다 국적을 잃은 이런 수천 명의 젊은이가 중국으로 돌아와 조국의 느린 속도와 물질적 퇴보에 대해 불만을 쏟아 놓으며 모든 도시에 연구와 반항의 씨앗을 뿌렸다. - P540

이 나라는 화려함과 몰락, 죽음과 부활을 되풀이하며 3000년의 세월이 흘렀음에도, 가장 창조적이었던 여러 시대에서 볼 수 있는 모든 물리적 정신적 활력을 지금도 여전히 보이고 있다. 세상에서 이들보다 더 활기차거나 보다 지적인 민족은 없다. 여건에더 잘 적응하거나 질병에 대한 저항력이 더 크거나 고통을 더 잘 이겨 내거나, 역사를 통해 차분하게 인내하고 끈질기게 회복하는 법을 더 잘 배운 민족은 없다. - P556

신도는 어떤 신조도 정교한 의식도 도덕률도 없었다. 특별한 제사장 제도도, 불멸의 존재나 하늘에 비위를 맞추는 교리도 없었다. 신자에게 요구된 것은 이따금의 참배, 조상과 천황과 지난 과거에 대한 숭상이 전부였다. - P566

일본 봉건 사회를 움직인 기본 원리는 신사(神)는 모두 병사이고 병사는 모두 신사라는 것이었다. 신사는 병사이기보다 학자여야 한다고 생각한 평화 시대 중국과 일본의 가장 두드러진 차이점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 - P583

이 고대와근대 간의 전쟁에서 근대는 고대인을 드높여 찬미함으로써 승리를 거두었다. 간가쿠샤, 즉 (친)중국적인 학자들은 자기 나라를 야만으로 폄하하고 모든 지혜는 중국에 있다고 주장하면서 중국 문헌과 철학을 해석하고 주석을 다는 것으로 자족했다. 와가쿠샤, 즉 (친)일본적인 학자들은 이런 태도를 반계몽적이며 비애국적이라 비난하고, 국민에게 중국을 배격하고 자체의 시와 역사 속에서 힘을 되찾자고 호소했다. - P616

이들 판화는 처음에는 손으로 색깔이 덧입혀지다가 1740년경에 세 개의 목판이 사용되었는데, 첫 번째 목판에는 무채색을 두 번째는 일부분 장밋빛 붉은색을 그리고 세 번째는 군데군데 초록색을 칠해 종이를 눌러 찍었다. 그리고 1764년에 마침내 하루노부가 최초로 다채색 판화 제작에 성공해 호쿠사이와 히로시게의 생기 넘치는 소묘를위한 초석을 닦고, 문화적 병목 현상에 걸려 새로움을 갈구하던 유럽인에게 시사적이며 자극적인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우키요에(浮世), 즉 풍속화는 이렇게 탄생했다. - P655

한 민족의 제도와 관습, 예술, 도덕은 수많은 시행착오가자연스럽게 정선되고 전 세대의 정형화되지 않은 지혜가 축적된 결과로서, 한철학자의 지성이나 연구자의 지력으로 충분히 이해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하물며 공정하게 평가한다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다. - P6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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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황제와 함께 도피 길에 올랐던 바로 그 참모들이었고, 청나라 안에 유럽인들이 들어와 있는 것을 몹시 싫어한 바로 그 만주족매파였다. 그들은 새로운 조약의 폐지를 꿈꾸었고, 외국인들에 대한공친왕의 온순해 보이는 태도를 의심스러워했다. 그들이 권력을 잡게되자, 외교 기관을 신설하려는 그의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 그는 유럽인들을 달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다 하려고 전담 기관을 따로 만들어놓고 청나라의 남은 힘을 태평천국과의 전쟁에 다 쏟아붓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중국에게는 그 섭정들이 정부를 맡는 것이 매우좋은 징조였다. 황제의 궁에 있는 그의 주요 후원자 숙순이 새 섭정의일인자였기 때문이다. - P411

양쯔강에서는 외국 증기선이 돛과 노를 사용하는 중국인들의 배보다 경쟁에서 훨씬 더 유리한 위치를 점할 수 있었다. 미국남북전쟁의 발발로 중국의 조약항들이 영국의 무역 경제 붕괴를 막아줄 수 있는 미개발 자원으로서 새로운 중요성을 띠게 되었다. 그런데어쩌다보니 그 항구들은 중국 전쟁 지역의 한복판에 위치해 있었다.
미국이 점점 더 깊은 혼란에 빠지면서, 이 상황은 영국이 이전에 중국에서 취했던 느긋한 정책에 대한 재평가를 촉발했다. - P426

1861년 4월 17일, 에이브러햄 링컨은 남부연합의 모든 항구를 봉쇄한다고 발표했다. 이는 하나의 전쟁 행위로서, 국제법상 이분쟁이 단순한 반란이 아니라 내전임을 분명히 한 것이다. 이에 영국정부는 5월 13일 남부연합의 교전국 지위를 인정한다고 발표했다. 이 - P426

것은 영국이 미국 남부를 불법적인 반란군이 아니라 권력을 다투는별도의 정부로 대하겠다는 의미였다. 빅토리아 여왕의 이름으로, 영국은 자국민들에게 양측 사이에서 중립을 지킬 것을 요구했다. - P427

그에게 굉장한 지위와 명예를 내린 것은 중앙 정부가 그로 하여금 목숨 바쳐 청나라를 반란군으로부터 지키게 하려는 가장 강력한유인책(사실 유일한 유인책)이었다. 그리고 난징은 가장 큰 상이었다.
난징은 단지 반란군의 수도가 아니라, 전통적으로 장쑤성, 안후이성,
장시성을 관할하는 총독의 권좌가 위치한 곳이었다. 태평천국이 패배한다면 그곳은 증국번의 것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동생 증국전이 난징을 치기 위해 후난성에서 새로운 군대를 모집할 때, 그리고 제자 이홍장이 새로운 안후이군을 조직할 때, 증국번은 태평천국 수도의 탈환과 그곳에서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는 영원한 개인적 영광(자기 자신과사랑하는 형제들과 자기 가문과 그 가문의 후손들을 위한)에 온 마음이 쏠려 있었다. 다른 무엇보다 이것이 증국번으로 하여금 청나라에 계속충성하게 하는 이유였다. - P464

겨울 중에 태평천국의 공격이 있을 게 거의 확실시되고 영국과프랑스의 보호를 받는 것이 보장되지 않는 가운데, 상하이의 부유한중국인들은 프레더릭 타운센드 워드 휘하의 돈이 많이 드는(그러면서도 거의 효과가 없는) 외국인 용병 외에는 의지할 데가 없었다. 세일럼태생의 ‘필리버스터‘ 워드는 높은 보수와 무제한적 약탈에 대한 계속된 약속에 이끌려, 그의 용병 활동을 멈춰 세우려는 영국 정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활동을 계속했다. - P470

증국번과 상하이 향신은 마침내 일치점을 찾았다. 향신은증국번의 군대가 강 하류로 내려와 자신들의 집과 생계를 지켜주기를바랐고, 증국번은 상하이를 난징 원정을 위한 자금 조달 수단이자 쑤저우 공격의 거점으로 여겼다. 양측 모두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었지만, 그들의 당면 목표는 같았다. - P486

그들이 목표로 삼은 언덕은 꼭대기의 석축 요새에 의해 지켜지고있었고, "꽃이 비처럼 쏟아지는 누대"라는 뜻의 ‘위화타이‘로 알려져 있었다. 이 이름은 옛날, 숲이 우거진 언덕에서 설법하던 한 승려가 하늘을 크게 기쁘게 하자 하늘에서 꽃잎들이 떨어져 화사한 소나기처럼 그의 주위에 나부꼈다고 전해지는 행복했던 시절에 붙여진것이다. 이제 나무들은 울타리와 감시탑을 세우는 데 쓰이느라 모두베인 상태였다. 꽃은 없었다. 비라고는, 후난군 병사들이 진지를 구축하고 기슭에 참호를 파기 시작할 때 그들 발밑의 갈색 흙을 진흙으로만든 축축하고 우중충한 보슬비뿐이었다. - P524

파머스턴은 5월 20일 하원에서 자랑스럽게 말했다. "중국과의 무역이 우리에게 상업 활동의 광대한 장을 열어주리라는 생각은 오래전부터 있어왔으며, 무엇보다 대중국 무역이 크게 확대된 덕분에 우리가 미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로 인해 우리의 상업과 제조업이 받은 불행한 방해를 재앙 없이 헤쳐나갈 수 있었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78 즉, 한쪽 문이 닫혔을 때 다른 쪽 문이 열렸다는 것이다.
그러나 영국 정부의 관리인과 하인들이 국가적 양심을 놓고 갈등할 때도, 또한 그 갈등이 지구 반대편에서 혼란스럽고 모순적인 정책들로 표출될 때도(중국에서 전진했다가, 후퇴했다가, 용병처럼 되었다가.
원칙을 따랐다가, 만주족 왕조를 응원했다가, 그 왕조를 매도했다가), 증국번과 그의 군대는 단일한 불굴의 목표에 끊임없이 집중했다. - P590

7월 28일 증국번이 심문을 넘겨받았을 때, 마침내 내전의 두 총지휘관, 비바람을 견뎌낸 백발의 두 총지휘관이 처음으로 직접 마주하게 되었다. 한쪽에는 떡 벌어진 어깨의 증국번이 있었다. 그는 피곤한 눈의 학자였고, 그의 긴 수염은 회색빛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다른쪽에는 강단 있어 보이고 안경을 쓴 이수성이 있었다. 그는 숯 굽는일을 하다가 한 나라의 군대를 지휘하는 인물로 떠올랐다. 그러나 이것은 미국의 남북전쟁이 끝나던 때와는 너무도 달랐다. 이 대등한 두인물 사이에는 회한과 존중의 애틋한 분위기가 감돌지 않았다. 패배자에게 그것은 화해의 서곡도, 굽이치는 농장에서의 황혼기의 서곡도아니었다. 이 전쟁은 항복이 아니라 전멸로 끝났다. - P617

결국 외세의 개입과 태평천국의 몰락은 잘못된 확신에 대한이야기일지도 모른다. 이는 문화와 거리를 초월하여 우리가 인지하는 관련성(근본적으로 인간의 덕성은 매한가지라는 우리의 바람, 내면으로들어가면 우리는 어쨌든 모두 같다는 우리의 믿음)이 때로는 우리의 상상이 만들어낸 허구에 불과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이야기다. 또한우리는 우리를 다른 문명과 분리하는 어두운 창문을 꿰뚫어보는 것을기뻐하고, 저편에 드리운 그림자 속에 숨어 있는 익숙한 형상들을 발견하며 신이 나기도 하지만, 때로는 우리가 단지 우리 자신의 반영을보고 있을 뿐임을 깨닫지 못한 채 그렇게 한다. - P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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