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임브리지 몽골 제국사 2 - 주제별 역사 케임브리지 몽골 제국사 2
미할 비란.김호동 엮음, 최소영 옮김 / 사계절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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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임브리지 몽골 제국사 2권은 주제별 역사 중 이념과 제도, 종교와 과학, 사회/경제, 여성의 지위를 다룬다. 1권이 주로 몽골이 통일 제국을 형성했다가 분열한 이후의 역사를 정치에 집중해서 다루었다면 2권에서 이를 좀 더 주제별로 더 깊게 들여다보는 시도라 할 수 있다. 나는 상위 챕터의 묵직한 주제만큼 여성의 지위를 동등하게 챕터로 다룬 점이 인상적이었다. 그만큼 몽골 제국의 여성에 대해 다룰 비중이 크다 여겼기 때문이리라.

몽골 제국은 통일 제국에서도, 4개의 칸국으로 나뉘어진 제국에서도 기본적으로 같은 정치 구조 및 통치 제도를 유지했다. 몽골은 가족 및 가축과 함께 이동하는 텐트 복합체인 오르도를 운영했다. 어느 한 곳을 근거지로 정주하며 제국을 운영하는 경우가 익숙하지만 유목민은 보통 움직이며 생활하는 데다가 몽골은 통일되는 과정, 그 이후의 과정도 정복의 연속이었으므로 대상지 근처에 오르도를 옮겨 다니는 것이 더 나았으리라 판단했을 것이다. 물론 우구데이 때 수도인 카라코룸을 건설하기는 하지만 기존의 오르도 방식의 궁정은 계속되었다. 정복지에는 행정업무와 세입징수를 담당하는 ‘다루가치‘, 법적 문제를 판결하는 ‘자루가치‘를 배치하여 통치의 효율성을 높였다. 칸은 야를릭(칙령)과 우게(영지/명령)등을 통해 자신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역참 제도(칭기스칸 이후 계속되어 뭉케 때 확장됨)를 운영하여 제국의 각 지역에 사신과 물품 운반을 이동하게 하였다.
통일제국 시기의 몽골군은 알긴치 (alginchi, 복수형은 alginchin)와 탐마, 정규군, 비유목민 군대, 카라울(qara‘ul) 혹은 카라굴(qaraghul), 케식 등 다섯 개의 주요 그룹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알긴치와 탐마는 변경과 불안정한 지역에 주둔하는 부대였다. 정규군은, 예상되는 바대로 침략과 정복을 위한 군대였고 유목민으로 구성됐다. 비유목민 군대는 비슷한 형태의 부대로 편성되었다. ˝카라울 혹은 카라굴은 ˝국경 수비대와 도로 순찰대 역할을 결합한 것으로 주력 부대의 일부로 기능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케식, 즉 칸의 친위대는 군주의 개인 경호뿐 아니라 다른 많은 역할을 수행했다. 통일 제국의 해체 이후에도 전체적인 구조는 유사하게 유지됐다. 알긴치, 카라울, 케식 부대가 그대로 존재했으며 비유목민 군대도 마찬가지였다. 탐마는 몽골의 정복 활동이 줄어들면서 쇠퇴했을수 있지만 군대의 핵심 요소는 계속해서 기마궁사였다. 해군을 운영한 것은 대원 울루스가 유일한데 이는 고려의 우수한 선박과 항해술의 기반이 있기에 가능했다.

어느 국가든 국민을 통합시키기 위해서 통치 이념을 만들기를 추구한다. 몽골은 ‘영원한 하늘‘이라는 ‘텡그리‘의 힘을 받들어 믿게 하여 타 종교와는 다른 믿음의 영역으로 구분시켰다. 하늘은 제왕(칸)의 힘과 카리스마를 돋보이게 하는 데 제격이었던 것이다. 이는 과거 한반도의 왕조도 마찬가지였다.
몽골인들의 이념적 메시지가 목표를 달성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것이 신화, 종교적 신념, 정치적 원칙들의 혼합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이들 중 대부분은 광범위한 지리적 범위를 가진 실제현상이었으므로, 세부 사항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민족들에게 인식되고 이해될 수 있었다. 즉, 다른 전근대 제국과 마찬가지로 몽골이 건설한 제국은 헌신적인 활동가들로 이루어진 핵심 집단, 열정적이면서도 계산적인 합류자들로 이루어진 훨씬 더 큰 집단, 그리고 신들의 헤아릴 수없는 계획과 정복자들의 뛰어난 행운에 대개 어쩔 수 없이 복종한 수많은 신민들로 이루어져 있었다(P102).
몽골은 타 종교에 대해서 대체로 상대주의적 관점을 견지하고 관용성을 보였기에 다양한 종교 간 상호작용이 활발했다(물론 무슬림으로 개종한 칸의 경우 종종 이슬람교를 제외한 다른 종교에 대해서 배타성을 보이기도 했다). 이는 비단 종교에서 그치지 않고 과학 및 기술에도 적용되었다. 예를 들어 본다면 과학, 예술 분야가 아닐까. 이는 실용성을 중요시했던 몽골인들의 지혜를 보여준다. 덕분에 의학, 천문학, 점성술 등 서아시아와 중국의 지식이 교류되어 다양한 결과가 축적될 수 있었다.

산업화 이전(더 구체적으로, 은행 제도 확산 이전)의 화폐 체계는 하위 수준(지역 내) 시장과 상위 수준(지역간) 시장의 교환 수단이 별도로 구성돼 있었다. 일반적으로 이 두 체계는 근거리와 원거리 교역의 규모, 빈도, 계절성의 상당한 차이로 인해 별도로 작동했다. 몽골 정권은 하위 시장에는 크게 영향을 미치지 않았지만, 제국 전역의 공납 이동과 도량형 체계 통일을 결합원거리 교역에서의 화폐 통용성을 구축했고, 그 결과 전체 교역시스템에서 일련의 글로벌한 변화를 이끌어냈다. - P155
은이 세계 공통 화폐로 쓰여지기 시작한 것은 13세기 후반부터였다. 고대 시기에는 물물 교환으로 교역이 이루어졌다면 그 이후에는 화폐가 쓰였겠지만 그마저도 공통 기준은 없었다. 은이 쓰였다고 해서 모두 동전 형태의 은화가 쓰인 것은 아니고 은괴, 은화, 동전의 3층 구조로 이루어졌다. 이무렵 세계 각지에서 은광이 발굴되고 유라시아가 교역로로 연결됨으로써 가능해진 일이다.
몽골인들과 그들의 제국은 유라시아 전역에서 종교가 실천되는 방식과 장소뿐만 아니라, 인간 활동의 더 넓은 틀 안에서 종교가 이해되는 방식도 영구적으로 바꿔놓았다. 전자의 예는 이슬람 세계를 보면 충분한데, 그곳에서 아바스 칼리프조의 파괴와 그에 이은 몽골인들의 이슬람 개종은 수피즘의 부상뿐만 아니라 시아파 정치 권력이 부상하는 길을 열었다˝ 이 두 가지 발전은 근대 초기 이슬람 세계의 역사를 크게 변화시켰으며, 그 파장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마찬가지로 몽골인들은 유럽 기독교인들의 종교적 상상력을 자극하고 변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함으로써 인류에 대한 완전히 새로운 관점을 열었으며, 이는 초기 근대 세계의 형성과 창조에 근본적인 역할을 했다.˝ - P240
금속공예, 도자기, 건축, 직물, 필사본 삽화 등에서 유라시아 전역의 기술과 양식이 혼합 및 전파되었다는 사실도 흥미롭다. 원 지역의 문화에 티베트 불교/이슬람/기독교(천주교, 정교회 등) 양식이 더해졌을테니 상상해보면 다채로운 문화 양식이 공존했던 때가 아니었을까 싶다.

몽골 황실에서는 여성들이 때때로 주도적인 활약을 하였다. 칸의 지위를 둘러싼 갈등과 이해 충돌이 자주 발생하였기 때문에 칸이 공석일 때 황실의 여인이 대신하는 경우가 많았다. 정치 경제적으로 황실 여성들은 칸과 마찬가지로 쿠릴타이에 참석하고 정치적 조언을 했으며 독자적인 영지를 관리하면서 칙령을 내릴 권한을 가졌다. 또 사회적으로는 종교 활동을 후원하고 빈곤층을 구제하며 남편을 대신해 권위를 행사하거나 외교적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다.
씨족, 부족 간 전략적 혼인을 통해 형성된 가족 관계는 남성들 사이의 정치적 동맹을 강화하는 역할을 했다. 특히 몽골 제국 통치하에서 칭기스 가문의 여성과 혼인하는 영예를 얻은 남성은 황제의 구레겐(giüregen, 부마)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부마들은 통치자와의 긴밀한 사적 관계, 자신의 추종자들로 구성된 더 큰 부대를 지휘하는 군사적 특권, 그리고 이후 다시 자신의 자녀를 황실 가문과 혼인시킬 수 있는 사회적, 정치적 혜택을 누렸다. - P384
고려 시기 원 황실과의 정략적 혼인을 통해 고려 왕이 동시에 몽골의 부마가 되는 예를 떠올리면 된다. 부마 뿐 아니라 원의 마지막 황후였던 기황후는 고려 출신으로 원의 조정을 장악하기도 했다.

다만 몽골 시기 이후 여성의 지위가 상승했다고 보기에는 어렵다.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깝지 않나 한다. 이전인 중국 당대(618~907)의 시각 및 문헌 자료들은 상류층 여성을 말을 타고 폴로를 즐기는 풍만한 모습으로 묘사하는 반면, 송대(960~1279)의 자료들은 날씬하고 심지어 연약해 보이는 신체를 강조한다. 중국에서 말타기는 여성과 완전히 무관하고, 심지어 남성들에게도 드문 일이 됐는데, 이는 금과 몽골의 침입으로 북방의 말 사육지가 중국의 통제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 상류층 가문에서는 아내와 딸의 생활 공간을 분리하는 게 규범이 됐다. 비상류층 여성들은 상황에 따라 농사, 가게 운영 등을 맡기도 했지만, 이후 수세기 동안 여성이 공공장소에서 보이는 경우는 훨씬 줄어들었다. 송대에는 전족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전족의 기원은 여전히 불분명하며 지역마다 다소 달랐지만, 문헌 증거와 고고학 증거 모두 12세기에 자리 잡기 시작해 상류층에서 모든 계층의 한인 여성으로 빠르게 퍼져나갔음을 보여준다(하카, 위구르, 만주, 그리고 다른 소수 민족들은 수 세기 동안 전족을 하지 않았다)(P416~417). 송대 이후로 강화된 유교 규범 문화의 영향이 아닌가 생각한다. 몽골의 점령은 중국의 혼인법에도 장기적 영향을 미쳤다. 1271년 쿠빌라이 카안은 모든 민족 집단에 대해 몽골의 수계혼 관행을 합법화했고, 치열한 법적 다툼과 소송의 홍수 속에서 과부의 정절은 중국 여성들이 수계혼에 저항할 수 있는 법적 수단으로 부상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수계혼은 중국에서 불법이 됐고, 과부의 정절을 지지하는 법들은 중국의 왕조 시대가 끝날 때까지 지속됐다(P417).

앞선 1권이 전체적인 몽골 역사의 훓어보기 성격이라면 2권은 주제별로 정리해놓았기에 관련 분야를 찾고 싶을 때 참고하기 좋을 것 같다. 다만 저자마다 편차가 있어서 글의 밀도가 떨어진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었다. 이는 최대한 일반 독자를 위해 더 깊은 이해 수준을 위한 내용에 대해서 일반적으로 기술해서이지 않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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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시와 물질 문학동네 시인선 229
나희덕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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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물질>이라니. 도무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제목이었다. 시와 친하지 않고 시를 막상 읽으면 무슨 말인지 뜬구름 같이 느껴져서 아마 평생 읽은 시집이 손에 꼽을 것이다. 근데도 이 시집의 제목을 보니 궁금하고 계속 눈길이 가서 참을 수가 없었다. 유혹할 땐 읽어줘야지. 초반에는 좀 진도가 안 나가다가 이후에는 의외로 쭉쭉 읽었다. 희한한 경험이었다. 시가 이리 두루뭉술하게 느껴지지 않다니. 피부로 와 닿는 느낌이라니. 내겐 좀 특별한 경험이었다.

왜 그런가 생각해봤는데 저자가 인용하는 책, 기사, 사건 등이 우리의 현실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었다.

자본과 이익을 위해 욕심을 부리는 인간, 환경을 뒷전으로 하고 개발에 앞장서며 돈벌이 수단으로만 보려는 자들에게 일침을 날린다거나 노동자를 가벼이 여기는 관행에 분노를 내뿜기도 한다. SPC 노동자 이야기는 시를 읽으면서 주먹을 불끈 쥐게 되기도 했다(나는 그 이후로 파리바게뜨, 삼립, 쿠팡은 계속 불매 중이다). 예전에도 그래왔으니 계속 그래도 된다는 가벼운 생각은 선택하기 쉽지만 미래를 후퇴하게 만들 수 있다. SPC 공장에서는 불과 얼마 전에도 또 노동자의 사고가 발생하지 않았나. 대체 이런 관행은 언제나 바뀌는 건지.
광장은 위치가 변하고 목적도 변화하였지만 진화 중이라는 생각을 한다. 적어도 후퇴하는 광장터를 만들지 않고 불의를 참지 않기 위해 모인 시민들이 보여준 단결과 의지는 자랑스러운 문화가 되지 않았나 생각한다. 정치는 지지부진하고 후퇴한다 해도 시민 의식이 살아 있는 한 정치는 갈 길을 잃지 않을 거라 여긴다.
한국이 참전한 베트남 전쟁은 (정부가 외면하고 싶은) 불편한 진실을 품고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진실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하미와 퐁니, 퐁넛에서의 민간인 학살을 시간이 오래됐다고 해서 덮어두기만 할 것인가. 여전히 피해자의 유족 및 후손들은 진실을 위해 목소리를 내고 있다. 더이상 외면하지 말고 부끄러운 과거를 인정하는 것부터가 시작일 것이다.
히잡을 쓰지 않았다고 구금된 뒤 구타로 3일 만에 사망한 아미니의 이야기도 있다. ‘머리카락 깃발‘이란 제목과 내용을 보며 눈물이 났다. ‘자유‘라는 두 글자에 무게감과 고통을 또 한 번 느꼈다.
몰랐던 사건도 있었는데 대표적인 것이 호주에 있는 ‘사과의 날‘이었다. 호주는 백인과 원주민 사이에 태어난 혼혈 아이를 가족으로부터 분리하는 정책을 자그마치 100년 간 시행했다고 한다. 정책은 1960년대 종료되었으나 실태 조사가 시작된 것은 1990년이 되어서야 시작되었다니... 이들을 도둑맞은 세대라 부른다고 한다. 흑백 분리, 인종 차별... 눈에 보이는 차별이 문제라고 인식한 지 얼마되지 않은 것 같다. 이제 조금씩 눈에 보이지 않는 차별도 문제임을 깨닫고 개선해나가는 중이라 여긴다.
조지 오웰의 장미라던지, 사울 레이터의 사진을 보고 영감을 받아 쓴 시도 반가웠다.
시의 이름은 정확하지 않지만 죽음에 대해 여러 번 생각하기도 했다. 장례식의 풍경이 떠오르기도 했는데 그때마다 아주버님이 가는 길이 떠올랐다. 옆지기는 그때 무척 힘들어했다. 만난 뒤 처음으로 마주한 그의 눈물을 보면서 죽음의 무게를 느끼기도 했다. 항상 아주버님에 대해 불만이 많던 그였는데 막상 그가 떠났을 때 빈자리를 가장 크게 느낀 것은 옆지기였나보다.

시가 아니라 마치 저자와 대화하는 느낌이랄까. 에세이 같기도 하고. 내겐 너무 명쾌해서 이해하기가 쉬웠다.
독자에 따라 이 시들이 호불호가 갈릴 수도 있겠지만 나는 ‘호‘였다. 인간은 결코 단독으로 살 수 없고 세계는 이어져 있음을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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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목련 2026-05-15 1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희덕의 이 시집은 읽지 못했는데 좋은 시집 같아요. 화가 님의 서재에서 시집을 만나니 더 좋고요!

거리의화가 2026-05-15 11:05   좋아요 0 | URL
몽글몽글하거나 감상적인 시가 아니고 사회, 환경 문제 등을 담고 있어서 현실적이라 저는 좋더라구요. 시에서조차 이런 답답한 내용을 만나야 하나 생각할 수는 있을 것 같지만요. 자목련 님은 어떻게 느끼실지 궁금합니다^^
 
케임브리지 몽골 제국사 1 - 정치사 케임브리지 몽골 제국사 1
미할 비란 외 엮음, 루스 던넬 외 지음, 조원희 옮김 / 사계절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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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임브리지 몽골 제국사는 오래도록 몽골사에 몸담은 권위 있는 연구자들이 참여하고 최근 학계의 내용과 의견을 담은 만큼 몽골 제국사의 종합판이라 할 만하다. 제1권은 주제별 내용 중 앞부분에 해당하는 정치사로 몽골 제국의 왕조사를 정리해놓았다. 구체적으로는 칭기스칸이 부족을 통일한 이후의 제국에서 4개의 칸국이 성립하고 멸망할 때까지의 역사를 담고 있다. 

몽골사를 다시 이렇게 빠른 시일 내에 읽게 될 줄 몰랐는데 어쩌다보니 펀딩에 참여하였고 기간 내 읽어주는 게 마땅하다 여겼다. 적절한 타이밍에 연휴 기간이 있어서 모두 읽을 수 있었다.


몽골 제국 이전에도 유라시아 역사에 요, 금 등의 유목 제국이 있었다. 하지만 몽골 제국이 이룬 성과는 지리적으로도 앞선 국가를 앞설 뿐 아니라 향후 제국의 역사에 기반이 되는 제도와 장치를 만들어냈다는 점에서 영향력이 컸다고 할 수 있겠다. 그래서 몽골의 시대는 과거의 종말이자 새로운 세계의 탄생으로 여겨졌으며, 최근에는 세계화를 향한 도약의 초기 형태로 평가받고 있다(P167). 


몽골은 유목민의 사냥, 전쟁, 사회 조직 기술을 제국 시스템에 통합하였다. 칭기스, 우구데이, 구육은 초기 제국 내 규범을 구축하는 데 노력을 기울였다. 칭기스칸은 흩어져 있던 부족을 통일한 뒤 1206년 몽골 제국을 선포하고, 십진법 기반의 군대 조직과 천호제, 황실 친위대(케식) 등을 도입하며 국가 기틀을 마련했다. 또한 서하(탕구트)를 복속시키고 금 원정, 중앙아시아 호레즘 정벌 등을 통해 영토를 확장했다. 칭기스칸은 죽기 전 네 아들에게 땅을 분배했다. 주치에게는 호레즘에서 카스피해 북쪽과 서쪽의 킵착초원을 부여했고, 차가다이에게는 위구르와 트란스옥시아나를 주었다. 우구데이에게는 몽골의 고향 땅을, 톨루이에게는 우구데이 영토에 인접한 중앙 지역을 주었다. 우구데이 카안은 수도 카라코룸을 건설하고 행정 관리 시스템을 구축했다. 뭉케 칸은 제국 전역에 인구 조사를 실시하고 분할된 통치 체제를 재조정하여 중앙집권화를 강화했다.


카안(대칸)이라는 칭호는 칭기스가 죽은 이후, 아마도 그의 손자 쿠빌라이에 의해 1264년경에 수여됐을 것이다. 알타이 민족들은 백색과 9라는 숫자를 길한것으로 여겼기 때문에, 아홉 개의 꼬리를 가진 흰 깃발인 툭(tuq)은 초원 민족들에 대한 칸의 독점적 주권의 상징이 됐다. 1211년 이전부터 몽골인들은 자신들의 정치 체제를 대몽골국(大蒙古國, YekeMongol Ulus), 즉 몽골 제국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는데, 이는 금의 중국식 명칭인 대금국(大金國)을 모델로 삼은 것이며, 한문 사료에는 대몽골국 또는 대조(大朝)로 기록됐다. 몽골의 집회에서 필수 요소라고 할 수 있는 잔치를 베풀고 상을 배분하면서, 이들은 제국 설립과 새로운 지배 엘리트의 추대를 위한 기반을 명문화하고 신성화했다. 몽골 사회의 무법과 폭력을 질서와 규율로 대체하려는 욕구는 곧 칸의 제도 개혁의 추진력이 됐다. 여기에는 초원 민족을 재편성하기 위해 칭기스 칸의 추종자들, 특히 영웅적인 행적을 보인 인물과 눈에 띄는 충신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의례도 포함됐다. - P52~53

몽골이 영토를 급속히 확장하고 그에 따라 많은 비유목 민족들과 땅들을 흡수하면서 기회와 위기가 동시에 발생했다. 칭기스칸이 고향을 떠나 진군했을 때의 원래 목적(복수와 약탈)은 변화했다. 정복은 이제 신성한 사명이 됐다. 유라시아 초원은 점차 온전한 통일을 향해 가고 있었으며, 이는 우구데이에 의해 완성됐다. 이로 인해 초원 주변의 정주 문명들은 칭기스의 후계자들이 계속 확장해나가는 제국에 저항하기 어려워졌고, 결국 그 일부로 편입될수밖에 없었다. - P95


앞선 통일 제국 시기(1206~1260년)를 지나고 이제 후계자들에 의한 통치가 이어지게 된다. 


먼저 대원 울루스(1260~1368년)로 이곳은 우리에게 원나라로 익숙하다. 뭉케에 이어 아릭부케와의 승계 전쟁에서 이기고 집권한 쿠빌라이는 국호를 '원'으로 정하고 대도(베이징)로 수도를 옮겼다. 그는 몽골의 공식 언어인 ‘팍바문자’를 도입(공식 문서 등 대외용 문자)했다. 그리고 대외적으로 남송 정복을 시작으로 일본, 베트남, 참파, 버마, 자바까지 진출했다. 원은 화폐를 발행하기 시작한 뒤 대내외 활동으로 화폐 양은 폭발적으로 늘었다. 그러나 14세기 무렵이 되면 계속되는 해외 원정으로 국가 재정이 적자에 빠진다. 이후 제국은 기근, 역병이 들어 도적과 무장 집단이 증가하였고 지역 군벌들이 힘을 키우며 자연스레 제국 중앙의 힘은 빠지게 되었다.

쿠빌라이는 집권 말기에 실패를 거듭했지만, 그의 남중국 정복은 카안의 울루스에 몽골 세계의 유일무이한 지위를 부여했다. 이는 제국의 원래 중심지인 몽골과 멀리 떨어진 해외 조공국들을 모두 아우르는 권위였다. 또한 이 정복은 몽골 통치자들에게 해양세계에 대한 인식을 열어주었고, 몽골 시대의 유명한 문화 교류를 활성화한 제도들의 정점이 됐다. 페르시아와 중국의 톨루이 계열통치자들은 이 전례 없는 해상 연결을 통해 중동과 동아시아 문명의 독특한 융합을 이루어냈고, 이는 청에서 오스만튀르크에 이르는 후대 유라시아 정권들에 영향을 미쳤다. - P294


뭉케는 훌레구에게 지금의 이란 지역의 총독을 맡겼다. 훌레구의 임명은 훌레구 울루스(1260~1335년)의 형성으로 이어졌다. 훌레구 울루스는 일 칸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일 칸’이라는 용어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석이 있는데, 이는 ‘칸’이 아니라 ‘일’에 대한 해석 차이에서 기인한다. 일반적으로 ‘일’은 종속의 표시로 훌레구의 지위가 형 뭉케와 쿠빌라이에 비해서 낮음을 일컫는 것이다. 그렇지만 훌레구 울루스는 화폐에 ‘일 칸’이라는 용어를 왕조 초기부터 꾸준히 사용하였다. 아무튼 훌레구가 세운 이 왕조는 이란과 아제르바이잔을 중심으로 서남아시아에 영향력을 미쳤다. 가잔 칸은 과세 방식 개선, 도량형 표준화 등 개혁을 통해 국력을 키우기 위해 노력했다. 이후 아부사이드 치하에서 왕조는 이슬람 문화를 기반으로 번영했으나 후손이 끊기며 막을 내렸다. 보시다시피 훌레구 울루스는 다른 울루스에 비해 그 역사적 기간이 짧다. 우선 훌레구 울루스 대부분의 시간 동안 이란과 중앙아시아 사이의 국경이 불안정했다. 차가다이 세력은 주기적으로 습격하였고 주치 가문 역시 울루스 북부를 지속적으로 위협했다. 또 이집트의 맘룩 왕국은 주치 가문과 상호 의존 동맹을 맺으며 위협에 힘을 보탰으니 훌레구 울루스는 오래 유지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훌레구 울루스는 이슬람 신학과 철학을 넘어서, 동방 이슬람 세계의 다양한 문화적 표현이 발전하는 중요한 전환점이 됐다(P389)는 의의를 가진다. 


금장 호르드에 소속된 민족들은 주치의 이름을 따라서 주치 울루스라고 불리기도 한다. 주치는 처음에 서몽골과 시베리아 삼림 지역을 기반으로 시작하였는데 나중에 호레즘의 오아시스와 서부 초원을 받은 데 이어 정복 활동으로 러시아의 여러 공국, 크림반도, 볼가-우랄 지역, 북캅카스까지 몽골 지배 하에 두게 되었다. 금장 호르드(주치 울루스: 1260~1502년)는 이슬람교를 수용하여 중앙아시아, 동유럽, 러시아에 이를 확산시켰다. 바투의 동생 베르케 때 이슬람으로 개종한 뒤 이후 금장 호르드의 통치자들은 자신을 술탄이라 부르며 주화에 새겼다(물론 칸이라는 용어도 썼다). 또한 지배층은 무슬림의 다양한 행정 인력을 등용하여 실용적이고 효과적인 시스템을 구축했다. 동슬라브 지역에 있던 공후들은 칸들과 혼인 동맹을 맺고 군사 지원과 면세 혜택을 받으면서 점차 부상했다. 이는 특히 모스크바 공국의 출현을 이끌어냈다. 우즈벡 칸 시대에 황금기를 맞이했으나, 이후 흑사병의 유행과 내부 갈등, 티무르의 견제 등으로 쇠퇴했다. 이후 여러 칸국으로 분열되었으며, 훗날 모스크바 공국이 금장 호르드의 영향력을 대체하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후계국 중 하나인 차가다이 울루스다. 안타깝게도 기록이 가장 적고 연구도 미비하다고 한다. 나도 차가다이 울루스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별로 없었다. 차가다이 울루스는 여러 국가 사이에 끼어 있었던데다 잦은 전쟁과 인재 유출로 어려움을 겪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미비했던 이곳이 몽골 제국의 해체 과정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고 이후 티무르 제국과 인도 무굴 제국의 발원지가 되었다. 차가다이 울루스는 델리 술탄국이나 맘룩 왕국 같은 나라들, 교황청과도 관계를 맺었다. 뭉케 사후 차가다이 울루스는 톨루이 가문과 계속해서 갈등했다. 그렇지만 차가다이 가문은 권력을 계속 이어가 17세기 후반까지 모굴리스탄을 통치했고 그의 후손들은 20세기 초까지 신장에서 권력을 유지했다.

몽골 중앙아시아는 ‘몽골의 시대’라고 불리는 번성했던 경제적, 문화적 교류에 참여했으며, 중심지라는 위치에 비해 두각을 드러낸 것은 아닐지언정 그 일원이었다. 강력한 칭기스 칸 계통의 정체들 사이에 끼어 있었고 중국과 이란에 견줄 만한 정주 기반이 부족했던, 경쟁하는 두 울루스의 본거지인 중앙 몽골 울루스는 몽골 정체들 중에서 패배자로 간주되었다. 이는 중국, 이란, 러시아와 달리, 우구데이와 차가다이의 영역을 물려받은 현대 국가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몽골 중앙아시아는 단순히 지속했다는 사실 이상으로 몽골과 세계 역사에 그 흔적을 남겼다. - P640 


한반도의 고려 역사와도 관련 있는 대원 울루스는 익숙하지만 이 책으로 더 세밀히 알게 된 부분도 있어 소득이 있었다. 훌레구 울루스와 금장 호르드는 지리적으로 멀고 문화적으로 멀어서 늘 어렵게 느껴졌는데 이제는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간 것 같아서 좋다. 차가다이(중앙 몽골) 울루스는 상대적으로 몽골사에서 비중이 낮게 부여되었던 부분이었는데 그 영항력이 결코 작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 

다만 정치사라고 하기에는 실제를 다 담지 못하는 것 같다. 정치 뿐 아니라 경제, 문화, 종교 등의 분야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최근까지의 역사 동향을 알려준 것이 좋았다. 전문가들의 다양한 견해, 그리고 저자의 의견, 반론 등을 실어 독자로 하여금 객관적인 눈을 바라보게 하기 때문이다. 몽골 제국의 폭력성에 주목했던 경우도 있었다면 팍스 몽골리카에 주목하며 경제적, 문화, 종교적 영향에 주목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어느 것도 한쪽에만 쏠려 있지 않음을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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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다이계의 침략과 1398년 티무르의 일시적인 델리 정복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남아시아는 몽골에 복속하지 않은 채로 있었다.
몽골의 각 칸국과 남아시아의 다양한 정치체 사이의 외교 소통은 빈번하게, 그리고 다양한 목적을 가지고 이루어졌다. 이러한교류는 13~14세기 조선 기술의 발달과 항해술의 발전으로 더욱활발해졌다. 무슬림, 힌두교도, 중국인 상인들이 운영한 상업 네트워크도 외교적 교류에 기여했다. 게다가 이븐 바투타(1304~1377)와 같이 아프로-유라시아 세계의 먼 지역 사람들도 이러한 교류에 참여했다. - P292

남아시아와 몽골 제국 사이의 상업적 연결은 여러 상인 집단에 속한 네트워크를 통해 이루어졌다. 예를 들어, 무슬림과 타밀 상인의네트워크, 중국 선원들의 운송 시설, 시리아 기독교도들의 디아스포라적 연결 등이 있었다. 이러한 상업 교류는 다양한 통로를 통해이루어졌으니, 인도양의 해상 항로, 미얀마와 티베트를 건너 원의영토로 가는 육로, 델리와 일 칸국 이란을 연결하는 아프가니스탄 고개 등이 있다. 거래되는 상품의 종류와 무역의 양상 역시 매우 다양했다. 은, 말, 향신료, 도자기, 직물, 노예 등이 남아시아와몽골 칸국들 사이에서 교역된 주요 상품이었다. 남아시아와 몽골칸국들이 이러한 품목을 직접 교환하기도 하고, 남아시아 항구와시장이 더 큰 아프로-유라시아 무역 환경 내에서 단순히 중개 허브 역할을 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말라바르해안의 항구들은 원과일 칸국 사이에서 교환되는 상품들의 중요한 환적(積) 지점이었다. 이러한 남아시아의 중개 역할은 상인 집단들이 장거리 무역의특정 부문에 집중하는 분절적 무역 양상 때문에 등장했고 시간이지나면서도 유지됐다. - P301

몽골은 "말 위에서 천하를 얻을 수는 있어도 통치할수는 없다"는 중국의 유명한 클리셰를 반증하는 데 성공했다. 게다가, 말을 탄 채 이동하며 통치하는 것은 단점이 없지 않았지만매우 혁신적이었음이 입증됐다. 초기의 대규모 공격 이후에 몽골은 궁극적으로 문화적 활기, 유라시아 규모의 통합, 상업의 활성화, 기술, 과학, 예술의 혁신, 새로운 종교적, 종족적, 지정학적 지형,
초원과 정주 제국 모두가 받아들인 세련된 제도를 낳았다. 몽골은 그들의 파괴적 정복에서 기인하기도 했고, 근대 민족주의 정서의 부침에 의해 더욱 강화된 야만인 이미지에서 완전히 벗어나기는 어려울지도 모른다. 그러나 13~14세기에 이 제국적 유목민들은 세계를 변화시켰고, 오늘날의 세계화 시대를 위한 발판을 마련했다. - P3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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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5년 카라코룸을 건설하기 시작했을 무렵, 몽골은 중앙아시아와 만주, 북중국의 많은 부분을 정복 및 점령했고 고려로도 진출했다. 우구데이 카안은 추가로 서방 원정을 계획했고, 이 원정은러시아의 많은 지역을 정복하는 것으로 끝이 났다. 그는 새로 획득한 영토를 약탈하기보다 이곳을 통치할 행정 중심이 필요함을 인정했다. 수도 건설은 몽골이 약탈자가 아니라 통치자로서 정통성을 한층 강화하는 데 기여했을 것이다. 그러나 몽골 본토는 여전히이동하는 목축민들의 영역이었기 때문에 중앙집권화되지 않았다. - P16

우구데이 가문과 차가다이 가문 간 충돌의 결과로 원 조정은1307년 몽골 지역의 군인뿐 아니라 주민을 위한 새로운 행정기구를 마련했다. 이러한 관료 기구가 얼마나 효율적으로 초원을 통 - P34

치했을지는 판단하기 어렵다. 유목민 가구와 집단은 광활한 몽골지역 도처에 흩어져 있었다. 청(淸, 1644~1911)과 몽골인민공화국(1924~1992. 1928년부터 1932년까지 가축의 집산화를 시도했지만 실패했다)도목축민에게 자신들의 의지를 관철하지 못했다는 측면에서, 몇몇작은 마을들과 주변 지역, 그리고 거의 끝없이 펼쳐진 초원이 앞으로 설명할 정책들을 따랐을 가능성도 낮아 보인다. 게다가 대도의원 조정에 있는 몽골인들은 원래 초원 출신이었지만, 많은 사람이 꽤 오랫동안 정주 세계에 거주했고 일부는 평생을 중국에서 보냈다. 그들은 유목민 사촌들과 연결이 끊겼고, 관심사와 정책 선호도도 달랐다. 이 몽골인들과 원 조정의 중국인 관료들이 고안한 행정기구가 과연 초원에서 효율적이었는지 여부를 규명하기는 어렵다. - P35

여러 몽골 집단 사이의 충돌은 다양한 요인에서 비롯됐다. 그가운데 하나는 중국에서 귀환한 몽골인과 몽골 지역에 남아 있던사람들 사이의 갈등이었다. 중국에서 돌아온 피난민은 그 정확한수가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최소한 10만 명에 달했다. 이 새로운 집단은 목초지, 물, 가축 무리를 놓고 거주민과 경쟁했다. 따라서 식량과 필수품이 부족해졌다. 1388년까지 계속된 명의 공격으로 사태가 더욱 심해졌는데, 카라코룸에 위치한 보급 본부뿐만 아니라토지도 손상됐기 때문이다. 이어진 명조의 무역 제한으로 몽골은필요한 물품을 얻기 위해 중국을 침략해야만 했다. 이와 동시에 몽골은 분열 상태였다. 서몽골 집단 중 하나이자 몽골의 혼인 동맹이었던 오이라트가 칭기스 가문과 이른바 동몽골에 도전했다. 그들이 아릭 부케의 후손들과 손을 잡으면서 북원이 중국에 대한 권위를 되찾을 가능성은 더욱 희박해졌다. - P44

고려와 칭기스계 관계의다른 측면들은 독특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거의 30년(1231~1259)가까운 파괴로 점철된 전쟁이 끝난 뒤 고려 황실은 1274년에 칭기스가문 황제와 혼인 동맹을 맺었고 이러한 관계는 한 세기 동안지속됐다. 칭기스계는 일부 초기 동맹 세력 및 지방 군주(콩기라트와 위구르 등)와 혼인 동맹을 맺었고, 몇몇 정치체(금, 남송, 맘룩)와는장기간에 걸친 전쟁을 벌였지만, 어떠한 경우에도 전쟁과 혼인이라는 두 가지 형태의 상호작용이 이처럼 눈에 띄게 결합하지는 않았다. 실제로 14세기 중반까지 고려는 동북아시아에서 칭기스계의 방벽이 됐고, 1380년대에는 정통성을 갖춘 국가로서 칭기스계의 지위를 인정하는 동아시아의 유일한 나라였다. - P51

초기 고려-몽골 관계의 성격을 둘러싸고 논쟁이 진행중이다. 10 아마도 가장 일반적인 해석은 1218~1219년의 연합으로고려가 몽골 속국의 지위를 갖기 시작했고, 이 지위는 간간이 중단되긴 했지만 몽골 제국이 붕괴할 때까지 지속됐다는 것이다. 이 관점에서 볼 때 고려는 속국으로서 공물과 군사 원조 등 몽골의 요구를 모두 충족시켜야만 했다. "반면 1218~1219년 연합과 초기고 - P55

려-몽골 관계를 당시의 상황에 비추어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하는한국 학자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당시 몽골 지휘관들은 금에대항하기 위한 동맹이자 몽골의 지역 정권 통합을 위한 초석으로서 여러 지역에서 현지 세력을 물색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몽골은동진 정권이나 일부 거란 귀족들과 연합했던 것처럼, 고려와도 비슷한 관계를 맺고자 했다. - P56

유라시아의다른 곳에서도 그러했듯, 고려는 몽골 제국에 통합되면서 기존 무역 관계(주로 중국)를 확장했고 더 넓은 지역 간 네트워크에 연결됐다. 그리고 마침내 개별 칭기스계 귀족들과 그들이 통치하는 영역의 일체화가 대칸 한 사람의 지배 아래 통합된 정치체로서의 제국이라는 관념을 압도하자, 원 왕조의 일부는 고려를 독립적 속국이 아니라 하나의 지방으로 보고 원의 행정 구조 안에 편입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한 시도는 수포로 돌아갔지만, 이 주장은 고려의 지위가 칭기스계 체제의 변화하는 역학 관계를 어떻게 반영 - P71

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 P72

1380년대 내내 고려는 가문, 외교, 군사 이해, 공동의 역사 등 공식적, 비공식적 관계를 통해 원과 얽혀 있었다." 요동은 고려를 떠난다수의 이주민이 거주하는 곳이자 고려 왕족과 홍씨 일가 [홍복원과 그의 후손들]의 자치에 익숙했던 곳으로, 명 왕조는 나름의 전략적 목표를 가지고 요동 장악에 도전했다. 더 넓은 맥락에서 보자면, 15세기 중반까지도 야심에 찬 초원 지도자들은 고려가 몽골제국의 부마국이었다는 점을 내세워 조선 조정의 충성을 확보하고자 했다. 이는 명 조정에게는 한반도와 칭기스계 사이의 관계를상기시켰고, 우리에게는 칭기스계의 지속적인 유산에 대한 주의 - P82

를 일깨워준다.
한국사에서 더 중요한 점은 조선 왕조의 설립에 참여한 많은주요 정치인, 군인, 지식인이 몽골 치하에서 성장했다는 것이다. - P83

일 칸국이 성립한 이후 권력의 중심이 남쪽으로 이동했고, 코카시아에대한 통치는 더욱 간접적으로 이루어졌으며 현지 귀족에 의존했다. 일 칸국의 종말이 바로 캅카스에서 몽골 지배가 종식했음을의미하지는 않았다. 대신에 권력이 분산되고 패권 중심이 사라지는 등 정치적 재적응의 과정이 시작됐다. - P126

몽골 제국의 탄생은 중세 국제 무역의 역사에서 중대한 사건으로, 캅카스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몽골의 정복은 새로운 무역로를 열었고, 서유럽에 거의 알려지지 않은 지역에서도 국제 무역이 활발해졌다. 몽골은 캅카스의 주요 경제 중심지를 수없이 파괴했지만, 생산과 교환의 중심을 다른 곳으로 이전함으로써 이전에 국제 무역에서 소외됐던 타브리즈와 마라가 같은 도시들을 성장시켰다. - P127

"시베리아"라는 지명은 13세기에 작성된 「몽골비사」에 처음 등장하는시비르, 즉 오비강과 예니세이강 사이에 거주하던 사람들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15세기까지 러시아에서 시비르는 오비와 이르티시지역을 가리켰고, 러시아가 동쪽으로 빠르게 진출하면서부터는우랄에서 태평양에 이르는 북쪽 지역 전체를 의미하게 됐다. - P139

몽골의 통치권은 인구조사와 공물 납부, 그리고 공작들의 몽골 군사 원정 참여를 통해서도 관철됐다. 일반 루스인들은 몽골군에 징집되거나 강제 노동에 동원될 수 있었고, 특히 숙련 장인의경우는 더욱 그러했다." 공작들은 주치 울루스를 자주 방문했고,
때로는 수개월, 심지어 몇 년 동안 그곳에 머물렀다. 1242년부터1445년 사이에 99명의 공작과 세 명의 공작 부인이 주치 울루스를250차례 방문했다. "주치 울루스에서 10년 이상을 보낸 야로슬라프와 스몰렌스크의 페도르 로스티슬라비치를 포함해 다섯 명의공작이 몽골 지배층과 혼인했다. - P180

몽골이 루스에 정착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야를릭을 하사하고 공물을 받은 것에서 입증되듯 몽골은 루스를 지배했다. 찰스 핼퍼린이 언급했듯이 루스인들은 타타르 지배의 실제 현실에 익숙했으나, 106 몽골이 블라디미르 대공에게 공물의 관리를 양도하면서 문인들은 몽골의 통치권을 얼버무리고, 핼퍼린이 ‘침묵의 이데올로기 (ideology of silence)‘로 부른 태도를 취할 수 있었다. 문인들은 몽골의 약탈과 도시 파괴를 알고 있었다. 그들은 "이교도의 압제", "가혹한 노예화" 같은 용어를 사용했지만, 복속과지배라는 개념은 애써 피했다. 107루스는 몽골의 관습을 매우 잘 알고 있었고 타타르인들이 모스크바 사회로 진입해 심지어 보야르 집단을 만들기도 했지만, 몽골인은 루스 사회의 외부인으로 남아 있었다. - P203

침략의 충격을 극복하고 나자, 정치적, 상업적, 종교적 측면에서 관계가 발전했다. 정치적, 외교적 계획은 가시적인 성과를 거두지 못했지만, 이탈리아 해양 세력의 아시아 시장 진출은 호혜적 무역을 위한 유라시아 대륙로를 열었고, 흑해 식민지와 지중해 동쪽 항구라는 결절점을 통해 유럽과아시아를 연결했다.
하지만 상인과 선교사는 자신이 활동했던 사회로부터 매우분리된 상태로 지내며 몽골 지배층 내에 확고히 자리 잡았다. - P238

문화 교류의 측면에서 몽골 제국 내의 주요 과학적, 철학적 대화는 이슬람과 중국 사이에서 이루어졌고, 유럽은 몽골 조정에서있었던 주요한 지적 만남에서 주변부에 머물렀다. 몽골은 화약과같은 중국의 발명품을 유럽에 가져오는 데 주요 역할을 했을지도모르지만, 그 전파에는 여전히 의문의 여지가 있다. 몽골의 통치가 끝나자 유럽인들은 곧 내륙 아시아의 대상로에서 자취를 감췄다. 유럽인들이 몽골의 보호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현지 사회와의연결에 실패한 것이 아마도 이러한 결과를 초래했을 것이다. - P239

1260년에 그랬듯이, 분명히정복 그 자체에 파괴적 성질은 있었다. 그러나 적어도 시리아에서 - P278

는 그 영향이 크지는 않았다. 몽골의 점령이 짧기도 했고 그 후 맘룩이 지배권을 되찾았기 때문이다. 몽골이 이 지역 전체에 진출한이후, 사람들이 이라크, 자지라, 아나톨리아 등지로부터 시리아와이집트로 이주하는 인구 변화가 발생했다. 맘룩-일 칸국 국경 지역에서는 일부, 어쩌면 상당한 정도의 문화 교류가 있었고, 이는1320 년대 초 ‘평화 협상 과정‘과 함께 확실히 증가했다. 몽골이 아시아를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까지 개방한 것은 확실히 이집트의술탄국, 그리고 앞서 살펴본 것처럼 예멘에도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한 가지 영향만 특별히 꼽아야 한다면, 그것은 맘룩이 시리아를 점령하고 통치할 수 있도록 몽골이 길을 닦았다는 점이다. - P2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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