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텔리겐치아가 마르크스주의에 이끌렸던 이유는 그것의 ‘과학적‘인성격 때문이었다. 리디아 단의 표현을 빌리면, 그것은 빈곤과 후진성의고통에 "객관적인 해결책을 제시하는 "이성의 진로"로 비쳤던 것이다.
또 다른 이유는 러시아가 서유럽 자본주의 국가들과 비슷해질 것이라고마르크스주의에서 약속했기 때문이었다. 러시아 내에서 마르크스주의운동에 가담했던 어느 활동가는 이렇게 회상했다. "우리의 마르크스주의의 유럽적 성격에 매혹됐다. 그것은 우리의 토속적인 외형과 지방적 편협성의 냄새와 맛을 풍기지 않았으며, 새롭고 신선하고 흥미로웠다. 마르크스주의는 우리가 절반은 아시아적인 나라로 머무르지 않을 것이며, 자유 - P33

주의적 정치체제의 문화와 제도와 속성을 가진 서유럽의 일부가 될 것이라는 약속을 제시했다. " - P34

레닌은 훗날 그의 수사학의 고유한 특징으로 자리 잡게 될폭력론으로 경제주의를 공격했다. 레닌은 경제주의의 전략이 사회주의와 혁명을 파괴할 것이며, 사회주의와 혁명은 인민의 의지당의 형태를 따르는 잘 훈련된 전위당의 중앙집권화된 정치적 지도 아래에서만 성공할수 있다고 주장했다. 경찰 정권을 타도하려면, 당 또한 중앙집권화되고제대로 된 규율 아래 놓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었다. 즉, 당은 차르 정부에 필적할 만한 수준이 되어야 했다. - P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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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 동학농민운동 제1차 봉기는 기존 정부에 대한 불만을 가진 농민들이 주도한 무장개혁 운동으로서 기존의 민씨 척족 정권을 무너뜨리고 그 대신 흥선대원군을 받들고 새 정부를 세우려 했다. 동학군의 1차 진주성 전투 성공을 계기로 조선 조정은 청군에 파병을 요청한다. 동학군은 군사적으로 일본군의 맞수가 되지 않았지만 나약한 조선 조정은 그런 농민조차 감당할 수 없었다.(이이화의 동학농민혁명사2, P21) 1885년 맺은 텐진조약의 조항에 따라 일본군은 경복궁을 점령하고 고종을 유폐, 대원군을 옹립한 뒤 조선에 개화 정권이 들어선다. 일본은 국제적 비난을 피하기 위해 주한 외교관을 보호하고 공사관 피해를 막으라는 지시를 내렸으며 만일의 불상사에 대비한 고종 보호 예방 조치에 대한 지령을 내렸다. 일본군은 부산에서 서울까지 전선을 가설하면서 경비를 이유로 현지에서 인부를 구하고 나무를 함부로 베거나 사유지에 함부로 전신주를 시우는 등 추태를 부렸다. 


그동안 남접과 북접 동학군은 따로 움직였는데 이제는 각 지도자 측에서도 힘을 합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전봉준은 동학 북접 교단과 연합작전을 모색하면서 흥선대원군 계열과도 접촉한 사실이 일본 첩자들에 의해 포착되었다. 동학교도 장두채라는 인물이 흥선대원군을 만났고 흥선대원군이 청나라군과 합세해 일본군을 격퇴하기로 뜻을 맞춘 뒤 김덕명, 김개남, 손화중 앞으로 봉기를 촉구하는 편지를 보낸 사실이 드러났다. 

흥선대원군이 전봉준에게 사자를 보낸 사실도 포착되었다. 1894년 8월에 전봉준이 태인에 있을 때 두 사람이 찾아와 흥선대원군의 친서를 내밀었다. 서찰에는 "서울에 있는 일본군을 몰아내야 하니 곧바로 서울로 진격해달라"고 쓰여 있었다. 

또 8월에는 흥선대원군이 경상도, 충청도, 전라도 농민군에게 겉으로는 효유문을 보내 해산을 종용했으나 뒤이어 재봉기를 당부하는 글을 은밀하게 보냈다. 흥선대원군의 수족들도 눈에 띄지 않게 조용히 움직이며 양쪽의 뜻을 전했다. 9월 초 무렵 전봉준은 송희옥의 편지를 받았고 이어 흥선대원군의 밀사인 박동진과 정인덕이 전주로 내려와 전봉준에게 재봉기를 당부했다.(이이화의 동학농민혁명사2, P76~77)


흥선대원군이 전봉준에게 친서를 보내고 직접적이지는 않지만 전봉준 계열의 동학 인사가 흥선대원군과 정말 접촉을 했을까. 일본 첩자들에 의해 포착되었다는 부분이 걸린다. 다만 흥선대원군이 전봉준에게 연락한 것은 어느 정도 사실로 보여진다. 


제2차 봉기는 흥선대원군이 전봉준을 사주했거나, 적당한 때를 알렸다는 주장도 있다. 이상백에 의하면 '대원군은 전봉준의 처족 8촌이자 전주대도소 도집장 송희옥을 선공주사로 임명하고 대원군의 측근인 박동진과 정인덕은 이 송희옥과 접선하여, 전봉준에게 밀지(密旨)를 보내 대원군의 뜻에 따라 재봉기할 것을 주문하였던 것이다. 김개남에게는 대원군의 손자 이준용을 통하여 전 승지 이건영과 접촉하고 이건영은 김개남을 만났다. 이에 전봉준, 김개남이 적극 호응하였음은 물론이다. 체포된 이후 전봉준은 이를 부정하고 있으나 김개남은 대원군의 지시에 의한 것임을 자백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역사넷 '동학농민운동' 中)


위 사료를 보면 책의 전개 내용과 상당히 비슷함을 알 수 있다. 정말 대원군은 효유문을 내려서 표면상으로는 동학군의 봉기의 흐름을 억제하려하면서도 이면으로는 봉기를 계속 가져다주길 바랐을까. 사실 개인적으로는 대원군이 설사 그런 제스처를 취했다고 해도 온전한 마음이었을지는 회의적이다. 아무리 무너져 가는 조선 왕조였다고 해도 왕조 국가의 최고 수장자의 눈에 동학군의 봉기가 곱게 비칠리 없기 때문이다(2차 봉기 때 공주에서 일어난 전투 상황을 보면 조선 조정은 관군과 일본군과 함께 지방 사족과 유생에 힘을 빌어 농민군을 탄압하는데 혈안을 올렸다).  


남접집단이 9월 10일 삼례 재기포를 단행하고 북접교단이 9월 18일 기포령을 발하였으나, 두 집단 모두 일본군과 관군의 공세를 막아낼 방법이 묘연했다. 게다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대원군 효유문과 더불어 고종의 선참후문 교서 등이 삼남일대에 전해지자 갑오변란 이후 척화거의를 도모했던 척사유생들조차 항일연대는 커녕 도리어 반동학군 활동에 적극적인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 몇몇 호남 지역의 북접계 지도자들이 남북접 연대에 적극적인 관심을 보인 것은 남접계 동학군의 집요한 ‘동참 요구’ 때문이었다. ... 9월 18일 기포령 이후 북접교단 휘하의 동학군도 관아를 습격하여 무장을 갖추기 시작했으나 본격적으로 무장대를 편성하기 시작한 것은 공주 점거투쟁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지는 9월 그믐 이후였던 것으로 보인다.(1894년 남북접 공주 점거투쟁 中)


호남에 속한 김낙철 등은 남북 교단의 조화방법을 모색해 김방서, 유한필, 오지영 등을 먼저 전봉준에게 보내 화해를 건의했다. 고대하던 전봉준을 이를 받아들여 전라도 지역 북접 인사에 대한 압박을 중지하고 세 사람을 최시형에게 보내 타협을 모색했다.

신중을 기하던 최시형은 이들을 만난 뒤 김연국, 손병희, 손천민 등 교단 지도자들을 불러 상의했다. 여러 북접 지도자는 논의 끝에 대세가 어쩔 수 없다고 판단했다. 더욱이 조정에서는 집강소 기간에 경기도, 충청도 등지에서 남접 북접 교도들을 가리지 않고 한통속으로 보아 탄압했고 교단 지도자들을 체포하려고 포교들을 풀어놓은 상황이었다.

최시형은 손천민을 전봉준에게 보내 진의를 확인했고 손천민은 이를 최시형에게 알려 연합전선을 펴야 한다고 건의했다. 손병희는 대세를 거론하며 남북접이 함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하여 최시형은 마침내 전국의 교도들에게 남북접이 손을 잡고 항일전선에 나서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를 대동원령이라 한다.(이이화의 동학농민혁명사2, P85)


북접 선봉장 이종훈은 10월 중순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장내리에 도착하여 사흘 동안 진을 치고 머물렀다. 해월신사께서 군사 지휘부를 정할 때 의암 선생에게 대통령기호를 받게 했다. 전규석을 선봉으로 삼고, 나는 중군으로, 이용구를 후군으로 삼았다. 의암 선생의 말씀을 준칙으로 받들어 논산으로 내려가 전봉준과 군대를 합했다. 두 군이 진용을 합한 지 사흘 만에 의암 선생께서 해월신사를 모시고 오셔서 진중에 주둔하고 머물러 계셨다.(이이화의 동학농민혁명사2, P97~98)


남북접 연합의 세력은 차이가 있지만 그 과정은 비슷하게 기술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이후 기존은 동학동민군의 삼례 봉기를 주목했다. <이이화의 동학농민혁명사2>도 역시 삼례 봉기에 상당 부분을 할애한다. 이에 반해 <1984년 남북접 동학군의 공주 점거투쟁>에서는 삼례 봉기와 비슷한 시기에 이뤄진 공주, 이인 등지의 충청 지역에서 일어난 봉기의 규모가 훨씬 컸기에 더 중요하게 다뤄져야 한다고 본다. 결과적으로 대부분의 전투에서 동학군이 패배했다. 첫째로, 일본군과 관군이 우금치 주변을 에워싸고 있었고 공주로 들어오는 통로를 봉쇄하여 외부와의 연락을 차단시켰다. 농민군은 같은 포위 작전을 폈지만 일본군과 관군에 비해 그 변경 범위가 넓어 압박하는 효과가 크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둘째는 무기의 열세 차이도 있었을 것이다. 다음으로 지방의 사족이나 유생들 대부분은 관군과 일본군에 협력했다(물론 일부는 동학군의 편에 서기도 했지만). 동학군이 내건 기치가 그들에게 먹히지 않았기에 혁명을 위한 탄력을 받기에 부족했다. 그리고 남북접 내부 세력의 충돌과 갈등도 한몫을 했을 것이다. 북접과 남접 간에만 갈등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 같은 북접끼리, 같은 남접 끼리도 세력 다툼이 있었다. <이이화의 동학농민혁명사2>는 패전의 원인 중 가장 먼저 2차 봉기 준비 과정에서 삼례에서 시일을 너무 끌었던 이유를 대었다. 북접 지도자와의 호응과 동의를 얻는데 시간을 빼앗겨 정작 일본군과 관군이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을 벌어 주면서 우위에 서게 했다는 이유다.  


공주 전투 후 전봉준은 포기하지 않고 물러나 다시 몇 차례 공격했으나 원평, 태인 전투에서 패한 것을 끝으로 해산 명령을 내렸다. 


이렇게 <이이화의 동학농민혁명사2>는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한 뒤 청일전쟁을 치르는 일을 시작으로 동학농민군의 2차 봉기 운동이 실패하고 전봉준이 재판을 받는 결과까지가 그려진다. 이 책은 동학농민운동의 전개 과정을 전반적으로 확인할 수 있고 전국적인 관점에서 일어난 봉기 내용들을 다룬다는 점에서 장점이 있다 느꼈다. 전라, 충청 지역 뿐 아니라 경기, 황해 등 다른 지역의 상황도 다룬다.

<1894년 남북접 공주 점거투쟁<은 제목과 노선의 파격적인 내용 때문에 급진적 관점이라는 생각이 들지만 적어도 2차 봉기 중 북접 진영의 더 상세한 상황과 공주 중심의 전투 과정을 상세히 파악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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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 생존 전쟁을 치르다 : 행랑어멈과 식모들*우리 시대의 커리어우먼 역사 속 여자, ㅇㅇ하다 4
이아리.권혁은 지음 / 푸른역사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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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은 엄마(또는 할머니)가 먹여 살렸는데˝라는 회고는 한국 사회에서 낯설지 않다. 압축적인 근대화와 산업화를 겪었던 한국 사회는 매우 오랜 기간 여성들의 노동에 의존해 생계를 도모하고 살길을 찾아온 역사였다. 제대로 된 보상을 받지 못하면서도 여성들은 스스로와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혹은 삶의 의미를 찾고 자아실현을 이루기 위해 노동을 했다. - P11~12

의미 있는 내용의 신간이 나왔다. <역사 속 여자 OO하다> 시리즈다. 우선 4권의 책이 나왔는데 덜컥 한꺼번에 사기보다는 한 권을 먼저 읽어보기로 했다. 1권인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4권이었다는. 다른 무엇보다 4권의 제목과 내용이 가장 먼저 끌렸다.
이 시리즈가 왜 기획되었는지 독자들 입장에서 대부분 어느 정도 짐작하는 바가 있을 것이다. 역사학계에서 일하는 여성학자들은 역사 속 사료를 보고 읽으며 여러 번 한계를 마주한다. 남아 있는 사료와 기록은 대부분이 남성이 쓴 것이기 때문이다. 수많은 사료 속에서 아무리 이를 잡고 헤집어봐도 여성들의 목소리를 접하기란 쉽지 않다. 근현대 이후 시기부터 여성들이 글을 쓰기 시작했지만 그 전에는 그런 경우도 드물었으니 말이다.
이 시리즈는 2024년 여성 사학자들 몇몇이 담소를 나누다 의기 투합하여 기획하게 되었다고 한다.

4권의 내용은 먹고 살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여성들의 이야기다. <여자, 식모 살다>를 통해서 근대 시기 행랑어멈과 식모에 주목을 했다면 <여자, 회사 가다>는 여성이 회사에 취직하고 맞닥뜨린 현실을 다룬다. 여러 사료를 접목하여 사건을 재구성하여 독자가 당시의 현실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하였다.

행랑은 본래 근대 이전 하인들이 주인이 사는 안채와 분리되어 사는 공간이었다. 그러다 1894년 갑오정권의 개혁 내용으로 신분제가 공식적으로 폐지되면서 노비들이 차차 주인을 떠나자 그들을 대신해서 지방에서 농사를 짓고 살다가 경제적으로 몰락해서 상경하게 된 농민들이 서울 양반집의 행랑채를 채우게 되었다.
식민 지배가 어느 정도 안정되자 단기간만 조선에 머물던 재조일본인들이 가족을 이끌고 상당수 들어오며 서울에 자리하기 시작했다. 확산 중이던 서울의 행랑살이는 주택난이 심화되면서 쇠퇴했다. 게다가 제1차 세계대전 동안 전시 호황을 누린 일본은 젊은 여성 공장노동자들을 고용하는 섬유공업이 크게 발달하였다. 이 때문에 일본 본토에서도 식모 일을 할 만한 젊은 여성이 크게 부족해졌다. 반면 조선의 재조일본인 가정들은 달랐다. 조선인 식모가 일본인 식모에게 주는 급료의 6활 정도만 주어도 기꺼이 일하려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이들은 조선인 식모를 고용하기 시작했다. 일본인들이 모여사는 진고개에는 치마저고리를 입은 채 발에는 일본식 게다를 신고 딸깍딸깍 소리를 내며 돌아다니는 조선인 여성들이 늘어가기 시작했다 한다.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이었는데 식모살이를 하려는 여성들이 어떻게 재조일본인 가정에서 일을 할 수 있었을까. 대부분이 어려운 형편에 돈을 벌기 위해 시골에서 상경한 여성들일테니 서울에 아는 이는 없었을 것이다. 이들은 다름 아닌 직업소개소를 통해서 일자리를 얻을 수 있었다. 1920년대부터 주요 도시에 국가적으로 인사상담소가 생기기 시작했는데 1920년대 중후반 무렵에는 인사상담소가 전문 ‘직업소개소‘로 분리되기 시작했다 한다. 직업소개소에서 부르던 공식 명칭은 ‘호내사용인‘으로 여러 직업 중 식모가 전체 중 절반 이상을 차지했을 정도라니 놀랍다.
그러나 당시 식모를 보는 사회적인 시선은 별로 곱지 않았다. 언론도 그렇고 남성들의 편견도 많았다.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먹고 살기 위해 직업을 선택한 경우가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허영심 있거나 유혹하는 여성으로 보는 경우가 많았다. 여성들은 범죄에 연루되거나 성폭력 및 인신매매의 희생양이 될 위험성이 많았음에도 사회는 개인에게 책임을 지웠다. 이는 예나 지금이나 한결 같은 모습인 것 같다.

대학을 간다 했을 때 부모님을 설득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기억이 난다. 하필 나라 경제도 어려웠고 살림이 팍팍했을 때니 말이다. 그래도 여성이 대학을 간다고 해서 이상할 것이 없었던 때였다. 이는 아이러니하게도 전두환 정부의 정책 때문이다. 전두환 정부는 과외 과열 해소를 명분으로 1981학년도부터 각 대학에 기존 졸업정원의 30퍼센트를 추가 선발하되, 그만큼을 중도에 탈락시키도록 했다. 쿠데타로 집권한 전두환 정부에겐 당장 눈에 띄는 치적이 필요했다. 그 일환으로 입시 지옥을 해소하겠다며 과외 금지와 함께 졸업정원제를 내세운 것이었다. 졸업정원제는 대학생 수를 급격히 팽창시켰다. ... 여대생 수 역시 급격하게 늘어났다. 여학생이 점차 고등교육에 진입하기 시작했고, 고등학교만큼은 아니었지만 많은 부모가 딸에게도 대학 교육을 시키기 시작했다. - P102~103
전두환 정부가 과외 금지를 한 것은 알고 있었는데 졸업정원제를 시행했다는 이야기는 자세히 알지 못했다. 아무튼 늘어난 대학생 정원만큼 여학생의 수도 자연스레 늘어난 것이다.

1993년 8월 서울대에 심상치 않은 대자보가 붙었다. A교수의 성폭력을 고발하는 대자보였다. 대자보를 붙인 여성은 조교로 불쾌한 일을 겪었다. 무언가 잘못 되었다를 느꼈는데 전임 조교로부터 자신과 똑같은 일을 겪었다는 사실을 알고 ‘이 사람은 상습범이구나.‘느꼈다. 짐작하겠지만 대자보를 붙인 후 논란과 더불어 거센 후폭풍에 휩싸였다. 그럼에도 그녀가 대자보를 붙일 때 그것을 찢으려는 이들을 막아선 학생들, 대학본부와 학과의 외면 속에서도 먼저 진상조사단을 꾸렸던 학내 단체들, 끝없는 법정투쟁을 함께하며 곁을 지켰던 활동가들, 멀리서 연대의 목소리를 보내 온 시민들, 그들이 있었기에 단 한 장의 대자보가 시대를 움직일 수 있었다.
1999년 2월, ‘남녀고용평등법‘이 개정되며 ‘직장 내 성희롱‘ 개념이 명문화되었다. 또한 사업주가 직장 내 성희롱 예방교육을 의무적으로 실시해야 하고, 성희롱 가해자에 대한 부서 전환과 징계 조치를 취해야 하며, 피해 근로자에게 고용상의 불이익 조치를 취해서는 안 된다는 규정이 들어갔다. 여성을 채용 공고에서부터 배제하는 일이 법적으로 금지되었고, 이제 직장 안에서의 성희롱이 법적으로 금지되었다.

작고 얇은 책인데 쉬우면서도 알차다. 앞으로도 이 시리즈에 관심을 가지며 읽게 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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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1894년 남북접 동학군의 공주 점거투쟁 - 남접·호남 중심 농민전쟁론 넘어서기 와이비 아카이브 2
지수걸 지음 / 역사비평사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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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 점거투쟁은 갑오변란과 청일전쟁 등으로 말미암아 크게 달라진 정세와 조건 가운데서 전개된 assembly/occupy(이하 A/O 투쟁으로 줄여 씀)이었다. 이 책의 표제로 ‘모이고 모으자! 점거하고 담판하자!‘라는 슬로건을 특기한 것은 공주 점거투쟁 시기 남북접 지도부가 합의한 공동투쟁의 목표와 방법을 가장 잘 보여주는 구호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어떤 과거(의 이야기)이든 후대의 독자는 기존에 누군가가 정리해놓은 역사를 만나는 경험이다. 그리고 이 역사적 정리는 여러 번의 논란과 재고를 거쳐 가장 최근에 정설로 굳어진 것이다. 굳어진 정설을 깨는 일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데 저자는 감히 그런 도전을 감행했다.

동학농민운동(동학농민전쟁, 동학혁명 등등 다양한 용어가 있지만 이것이 교과서에도 일반적으로 쓰는 것이라 이걸 택하겠다)은 관련 자료와 데이터가 방대히 축적된 만큼 이미 충분히 많은 저서들이 나와 있다.

이 책은 동학군의 2차 봉기로 초점을 맞추었다. 장소는 호남이 아닌 호서, 충청 지역의 공주다. 공주라는 지역 이름만 보면 우금치 전투를 말하려 하는 것이구나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저자는 갑오년 항쟁에서 공주를 중심으로 한 호서 지역의 역할이 간과되었기에 이를 복원해야 한다 말한다. 기존에는 지나치게 전봉준 중심의 호남, 남접 집단에 초점을 맞추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저자는 동학농민운동의 전개는 기존의 농민 전투(전쟁)이 아니라 임술년 이래 항쟁의 역사에서 어셈블리(도회)라는 말로 상징될 수 있는 비폭력적인 연대와 소통의 모습이라고 말한다. 모두 다 기존의 관점을 뛰어넘는 새로운 내용들이다.

기존 동학농민운동의 서술은 보통 호남 배경으로, 전봉준 중심으로 서술된 측면이 많다. ‘전라도 고부 군수의 학정에 못이긴 농민들이 들고 일어나 봉기를 일으켰고 놀란 정부가 부랴부랴 전주성에서 농민들의 요구를 들어주며 화약을 맺었다. 그러나 새로 파견된 안핵사의 농간에 다시 농민들이 들고 일어나자 조선 정부는 청에 원병을 요청했고 톈진조약의 발효로(구실이겠지만)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했다. 이에 농민들은 반봉건에 반외세 구호를 걸며 들불처럼 일어났다. 그러나 일본군 구식 무기에 밀린 농민군은 우금치에서 많은 사상자를 내며 대패했다.‘ 이렇게 말이다.

동학농민운동에 대해 저자가 말하려고 한 바는 다음과 같다.
첫째, 동학군의 2차 봉기는 남접 집단의 8월 27일 남원 도회나 전봉준의 9월 10일 삼례 재기포령 때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다. 임기준과 이유상 등 공주와 충주 등 호서 지역의 척사유생들이 대원군 밀지나 고종 명의의 「조가밀지」를 받고 동학군과 함께 항일의려를 결성한 때로부터 시작된다고 하였다.
둘째, 기존 연구는 남북접 지도부 사이의 연대가 먼저 이루어진 후 최시형의 9월 18일 기포령이 나왔으며, 이에 의해 북접이 남접 전봉준과 협력하여 연합군을 결성했다고 본다. 공주를 점거하는 투쟁에 남북접 지도부가 합의한 시기는 9월 그믐경이고, 그들이 연대한 이유는 일본군과 관군의 탄압 및 동학 내부의 갈등과 대립을 극복하기 위해서라고 하였다.
셋째, 기존 연구는 11월 8일~11일의 우금치싸움을 포함한 일련의 투쟁을 공주 점거투쟁의 절정으로 이해하였으나 저자는 우금치싸움이 아닌 10월 23일∼25일 공주를 둘러싸고 금강 남북 양안에서 전개된 효포 싸움이 더욱 중요한 사건이라고 주장하였다.
넷째, 남북접 동학군의 사망자 통계 사상자의 숫자가 과장되었으며 기존 연구는 공주 점거투쟁에서 동학군이 대규모로 참여하고 대규모 살상을 당했다고 했다. 그러나 정작 동학군의 대규모 사망은 그들이 정식으로 해산한 11월 중순 이후 집단 학살로 나타났다고 말한다.
다섯째, 저자는 동학 연합군의 공주 점거투쟁은 기존 연구에서 말하는 “병력을 몰아 한성으로 진격하기 위한” 중간 단계가 아니라, 호서와 호남을 연결하는 요충지 공주를 점거한 상태에서 애국적 사민이 참여하는 대규모 집회와 무장 시위(도회와 의거)를 통해 중앙군·감영군, 향리·군교·상인들의 호응을 유도하여 조선 왕조나 일본 정부와 정치 담판을 하려 한 최종 단계라고 했다.
여섯째, 공주 점거투쟁의 성격을 논하면서 저자는 이 투쟁의 주역이 농민군이 아니라 동학군이며 혁명군이 아니라 (무장)시위대/의려이므로, 이들을 전사라고 부르거나 이 사건을 내전이나 혁명, 심지어 전투로 부르는 것도 역사 조작이라고 주장한다.

저자의 주장에 대해서 나는 개인적으로 이렇게 느꼈다.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이후 기존은 동학동민군에 삼례 봉기를 주목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공주, 이인 등지의 충청 지역에서 일어난 봉기의 규모가 훨씬 컸으며 중요했다고 이 책은 말하고 있다. 이렇듯 호남 중심의 배경 중심에서 호서 지역 배경으로 사건의 흐름을 재구성하려한 점이 엿보인다. 또 기존에 동학군이 서울로 진격하기 위한 전제를 뒤엎고 공주 점거를 위한 투쟁이었음을 강조하고 공주점거 투쟁 시기 지방수령이나 척사 유생들이 동학군과 연대하지 않은 것은 일본군의 최신식 무기나 동학군의 무기 열세 때문이라기보다는 서로 연대하고 협동하는 정치적 힘을 가지고 있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본 것 등은 충분히 공감이 되었고 새로운 의견 제시이기에 의의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과연 반침략 반봉건 민중 항쟁으로 일컬어지는 동학농민운동을 어셈블리(도회 또는 의거)라고만 정의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다. 의거와 전투를 그렇게 무자르듯 구획지을 수 있는지 모르겠어서다. 또 어셈블리라는 용어도 좀 난해한 측면이 있다. 저자는 굳이 어셈블리라는 용어를 쓰면서 기존에 도회라는 단어가 사어가 됐기 때문이라고 했으나 그렇다고 한국에서 어셈블리라는 단어를 쓰기에는 선뜻 와닿지는 않는다.
그리고 정말 호서 지역의 유생들이 고종 명의의 밀지를 받았는가. 저자도 이 부분은 후속 연구가 필요하다고 이야기하고 있는데다 그런 설이 있다는 것만으로 믿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또 전봉준이 우금치 싸움을 결행(및 실패)하면서 정말 교단에 저지른 잘못을 뉘우치며 회개했을까라는 것도 의문이었다. 전봉준은 호남 남접 기반의 대장군이었고 호남 남접은 당시 자료를 마땅히 기록하지 않았다(남아 있는 것이 없다). 해당 자료는 북접 동학교단에서 생산했기 때문에 신빙성에 의문이 들 수밖에 없었다. 이를 비롯하여 저자가 전개한 논지가 추론에 기대는 경향이 강하다는 인상을 받아서 아쉬웠다.

이렇듯 장점도 있지만 한계도 엿보이는 책이다. 근래 들어 읽은 책 중 가장 도발적인 책이었다. 실제로 이 책이 나온 뒤 여러 건의 서평이 올라와 논쟁이 되었다고 보았다. 동학농민운동에 대한 역사는 1980년 이후 민중 중심의 역사 담론이 유행하고 2004년‘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1894년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여 봉건제도 개혁과 국권 수호에 기여한 인물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고, 참여자와 유족의 명예를 회복하며 민족정기를 선양하기 위해 위한 법률)이 제정되고 시행된 이후 민족적 측면이 강조되고 혁명화된 부분이 있어 보인다. 이 책이 시간이 흘러 그냥 묻히게 될지 아니면 또 다른 시선의 물꼬를 트는 책이 될지 사뭇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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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역사 - 하 - 제8판
니콜라스 V.랴자노프스키.마크 D. 스타인버그 지음, 조호연 옮김 / 까치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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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 역사 전체는 비록 생존과 성취의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커다란 어려움, 위기, 갈등의 이야기도 하다. ... 그러나 소련 역사를 환경의 산물이라고 말하면, 이 역사를 그토록 놀랍고도 눈에 띄도록 만드는 핵심적인 사항을 놓치게 된다. 아마도 어떤 다른 근대국가 이상으로, 공산주의자들(그들은 스스로를 이렇게 부르기 시작했다)은 모든 것을 포괄하는 이데올로기, 즉 자신들이 마르크스주의-레닌주의 혹은 변증법적 유물론이라고 부르는 것으로부터 동력을 공급받았다. 그 이데올로기 자체는 진화되고 변화되었으나-모든 상황과 결정을 그것을 통해서 바라보아야 하는 렌즈로 남아 있었다. - P707~708

앞선 상권에 이어 하권은 19세기 중후반부터 푸틴이 집권한 시기까지를 다룬다. 푸틴 집권 시기는 2008년 정도까지만 다루는데 이는 현재 제8개정판이 나온 시기상 어쩔 수 없는 부분이다. 그런 아쉬움은 있지만 전체적으로 이 책은 러시아의 역사를 잘 정리하고 있는 것 같다. 번역본으로 나온 책 중에 러시아의 통사를 훓을 수 있는 책은 그나마 이 책이 거의 유일해보였다.

알렉산드르 2세는 지방정부인 젬스트보를 설치하여 대중 교육과 의료에서 상당 부분 효과를 보았다. 그리고 법원을 행정부에서 분리시켜 독립적인 역할을 하게 하고 배심원 재판과 치안판사 제도를 도입하는 등 사법 제도를 개선하였다. 또 하층 계급만 하던 군 복무를 모든 러시아인들에게 확대하는 대신 복무 기간을 축소하고 군사전문학교를 설립하였으며 군법과 법 절차를 개선하였다. 그리고 재정을 혁신하고 교육 및 검열을 조금 자유롭게 하는 조치를 취하는 등 여러 근대화 개혁을 추진했다.
대외적으로도 많은 변화가 있었던 시기다. 러시아는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와 협상을 맺고 발칸 반도를 놓고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다. 또 캅카스 전역, 중앙 아시아를 정복하고 극동 경계를 넓혔다. 그러나 농민 문제는 제대로 해결하지 못했다.
농노 해방은 러시아의 근현대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라 할 수 있다. 이전부터 진행된 정부의 정책으로 농노제가 강화되고 공 등을 비롯한 귀족의 이익은 커져가고 있었다. 농민들의 불만은 쌓여갔고 일부는 봉기, 탈주하는 사태가 이어진다. 실상 이 문제는 한 세기 이상 제대로 해결되지 않으면서 주기적으로 농민들의 봉기를 불렀다. 이 무렵 인텔리겐치아들도 농노제가 폐지되어야 한다고 보았던 상황이었다. 정부로서도 더는 미룰 수 없는 과제였다. 이에 농노 해방은 알렉산드르 2세 시기인 1861년 공식 발표되었다. 그러나 농노들에게 제공된 토지는 여전히 불충분했기 때문에 농민들의 불만과 소요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문제는 그가 암살당하는 바람에 재위 기간 동안 진행했던 개혁이 다 부정당하는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알렉산드르 3세는 변화를 최소화하면서 종교 통일(정교회), 전제 정치, 국민성을 강조하였다. 이는 니콜라이 2세 시기에도 이어진다.

20세기 초, 노동자들의 불안과 자유주의 및 마르크스주의 확산으로 1905년 혁명이 발생했다. 두마 통제가 가능해지면서 자체 입법 프로그램을 진행할 수 있게 되었고 농업 개혁을 통해 농민은 자유 이동이 가능해졌다. 귀족의 수는 감소하였고 귀족이 가진 보유지의 수도 감소했는데 이는 부의 상당수가 국가에 진 빚을 청산해서 남은 돈이 얼마 없었고 변화에 기민하게 대응하지 못한 이유도 있었다. 귀족들은 많은 경우 이민을 떠났고 그러지 않은 이들은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쳐야 했다. 대신 기업가, 사업가, 기술자 같은 중간 계급이 떠올랐다. 정부는 철도를 증설하고 외국 자본을 유치하였으며 중공업 발전을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발칸 전쟁과 이어진 1차 세계 대전으로 러시아도 격랑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제정 러시아 시대부터 1917년 혁명에 이르기까지 이르는 동안 많은 문학가들이 탄생했다. 투르게네프가 1840년대를 배경으로 관념론자들, 자유주의자, 허무주의자, 인민주의자들을 다루었다면 1860년 무렵 등장한 도스토옙스키는 반합리주의, 슬라브주의에 입장에 서 있었다. 레프 톨스토이는 종교적으로 세속에 대한 비판과 예언을 다루었다. 이밖에도 잉여인간을 다룬 곤차로프, 교회 및 민중을 다룬 레스코프, 인텔리겐치아/농민/염세주의자를 다룬 우스펜스키, 현실을 풍자한 실티코프, 상인 중하층 계급을 묘사한 오스트롭스키, 평민 영웅을 다룬 고리키, 근대 단편 소설을 창시한 체호프 등이 나왔다(관련 문학을 읽을 때 이 부분이 많은 도움이 될 것 같다).

1917년 2월 23일 식량을 달라며 일어난 섬유 노동자들의 시위를 시작으로 혁명의 불길이 치솟았다. 2월 26일 임시 두마 정부는 니콜라이 2세를 퇴위시키면서 로마노프 왕조를 종식시켰다. 이 무렵 소비에트도 조직을 갖추었다. 그러나 임시 정부는 온건한 자유주의 입장을 고수하여 전반적인 개혁을 원하는 민중의 요구를 받아들이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더군다나 전쟁은 계속되고 있었기에 사회적으로 혼란스러웠다. 이때 등장한 것이 레닌이다. 레닌은 현 정부가 부르주아적이라면서 소비에트에게 권력을 주고 토지를 국유화하여 농민에게 분배하고 산업을 노동자평의회의 통제하에 두는 등 사회 혁명의 방안을 제안하고 즉각 종전을 요구했다. 볼셰비키가 10월 25일 정부의 통제권을 장악하며 소비에트 러시아가 시작되었다.

1921년까지 볼셰비키는 무력을 동원한 급진 경제 정책을 실시했다. 이로 인해 거의 대부분의 사기업이 사라지고 국유화되었으며 사적인 교역은 억압되었다. 강제 배급이 실시되고 모든 토지가 국유화되었다. 이에 내부 반발로 백군 세력이 등장하였으며 주변국도 적군에 의한 통제 방식에 문제를 제기하면서 러시아는 국제적으로 고립되는 처지가 되었다. 이런 배경에서 러시아는 1928년까지 국가 회복을 위한 후퇴이자 타협으로 자유도를 조금 높이는 정책을 실시하였다. 그 결과 도시에서 활동하는 소기업인들이 증가하고 농촌에서는 부농의 수가 증가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이는 기존 공산주의자들의 불안을 초래하였다.
이런 배경에서 스탈린이 등장한다. 스탈린 시기 러시아는 국가적 산업 계획 정책으로 농업 집단화를 완성하면서 농업 생산량을 다소 증가시켰고 식량 배급제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도급 노동이 일상화되고 임금 격차는 확대되었으며 강제 노동이 시작되었고(반대 세력에 대한 대숙청) 사회주의체제에 대한 강조로 인하여 요식 행위가 늘어나는 부작용을 낳았다.

스탈린 사후 소련 지도자들 사이의 권력 투쟁이 일었다. 스탈린에 대한 흐루쇼프의 비난은 대내외적으로 충격을 주었던 사건이었다. 흐루쇼프는 당제1서기로 올라서면서 권력의 중심에 섰다. 흐루쇼프 시기 러시아는 개인숭배에 기반한 스탈린주의를 벗어나 레닌체제로의 복귀를 선택했다. 경제적으로는 생산, 소비를 자극하면서 산업 경영에 중점을 두었다. 대외적으로는 냉전의 중심에 서 있었고 중국과의 갈등, 쿠바와의 전쟁이 있었다.
이후 들어선 브레즈네프 시대에는 모스크바 중앙에서 정치를 통제하는 방식으로 복귀하면서 정치가 정체되었다. 그러나 국민의 복지 정책이 확대되고 데탕트 정책으로 훈풍이 시작된 시기이기도 하다.
고르바초프는 낮은 성장률로 침체된 경제로 인한 불만과 이전 같은 이데올로기적 강요가 통하지 않는다는 사회적 현실을 직면해야 했다. 그럼에도 그가 레닌주의 사회주의 이상을 강조하며 국민들에게 더 적극적이고 헌신적인 자세로 국가 발전에 이바지함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나아간 것은 한계가 있었다고 보인다. 고르바초프는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 정책으로 자율권을 부여하고 통제를 완화하는 등 개혁을 시도했으나 역설적으로 중앙의 통제력이 약화되는 결과를 낳았다. 각지에서 민족주의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지며 소련은 동유럽을 포기하고 동유럽의 국가도 독립을 자처하면서 결국 1991년 소련은 붕괴의 길을 걸었다.

옐친은 최초로 민주적인 절차에 의한 대통령 선거로 대중적인 지지를 얻으며 최고위 권력자에 선 인물이었다. 그의 재임기 초반에는 급진적인 사유화가 진행되었는데 이로 인해 양극화가 심화되었다. 재임기 중반기에는 대통령의 권한을 높이는 것으로 스스로 권력을 강화하면서 내분이 극대화되었다. 이후 그는 개혁을 후퇴하면서 사회 안정성을 높이려 했으나 급격하게 진행된 사유화는 사회적 혼란을 높이고 부패를 증가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제2차 체첸전쟁이 벌어지자 옐친은 푸틴을 지휘관으로 보냈다. 옐친의 지지율이 떨어지는 상황에서 이는 푸틴의 지지율을 높이고 입지를 강화하는 역할을 했다.
권력자에 올라선 푸틴은 러시아의 발전과 진보를 강조하며 국가주의와 애국주의를 강화하였고 강력한 중앙 통제를 바탕으로 관리형 민주주의 체제를 구축했다. 관리형 민주주의는 비정부기구를 통제하면서 다른 견해가 들어설 공간을 위축시키는 것인데 용어만 좋게 포장한 것일 뿐 과연 좋은 평가를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푸틴은 헌법을 고쳐가며 현재도 집권중이니 말이다. 더불어 크림 반도에 이어 우크라이나 돈바스 지역을 노리며 시작한 전쟁은 현재진행형이다.

공산주의자들과 민족주의자들은 최근에 세계의 많은 지역에서 민족주의적 이데올로기의 중심이 되어버린 ˝원한의 정치˝에 사실상 편입되었다. 공산주의의 종식이 많은 고통, 소외, 공인된 모욕 등을 초래했다는 것은 냉혹한 사실이다. 특히 푸틴의 러시아에서는 민족주의가 대중문화와 여론에서 주류이며, 공식적인 미사여구가 되었다. - P1002~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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