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유럽의 대마녀사냥

마법을 사형으로 처벌하기로 한 것은 찰스 5세가 1532년 제정한제국법규 <캐롤라이나> Carolina였다. 청교도 잉글랜드에서는 1542년과1563년, 그리고 1604년에 통과된 세 개의 의회법안을 통해 마녀박해가성문화되었는데, 이중 마지막 법안은 사람이나 사물에 대한 위해가 없더라도 사형에 처하도록 했다. 1550년 이후에는 스코틀랜드, 스위스, - P242

프랑스, 스페인령 네덜란드에서도 마녀의 사술을 중대 범죄로 규정하고 국민들에게 마녀로 의심되는 사람들을 규탄하도록 조장하는 법규와조례가 통과되었다. 이후 몇 년간 사형대상자의 범위를 확대하고, 마녀의 사술에 의한 것으로 추정되는 상해가 아니라 사술 그 자체를 중대 범죄로 규정하는 법규정들이 재차 만들어졌다. - P243

마녀사냥은 인구집단 내에 집단적인 정신질환을 유발하기 위해 멀티미디어 선동을 활용한 유럽 최초의 박해이기도 했다. 인쇄매체가 최초로 한 일은 마녀들의 세세한 악행과 가장 유명세를 탄 재판을 홍보하는 소책자를 통해 마녀로 인한 위험을 대중들에게 알리는 것이었다(Mandrou 1968 : 136). 이를 위해 예술가들을 모집했는데, 이중에 독일인 발둥Hans Baldung은 가장 지독한 마녀인물화를 많이 그렸다. 하지만 박해에 가장 큰 기여를 한 것은 법학자. 치안판사 · 악마연구자들이었는데, 이들은 종종 한 인물처럼 행동하곤 했다. 이들은 [마녀박해를 지지하는 주장을 체계화하고 비판에 답했으며, 법적인 장치를 완벽하게갖춰 놓음으로써 16세기 말엽에는 표준화된, 거의 관료적인 수준의 마녀재판 형식을 마련했다. 이는 국가 간에 자백의 형식이 유사한 이유를설명해 준다. 법과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들은 업무 중에 철학자나 과학자 같은 당대의 지식인이라 할 수 있을 만한 사람들의 협력을 구할수 있었다. - P245

마녀사냥은 여성에 대한 전쟁이었다. 이는 여성을 비하하고악마화하며 이들의 사회적 권력을 파괴하기 위한 집단적인 시도였다.
동시에 고문실에서, 그리고 마녀들이 죽어가던 화형대에서 여성성과가정에 대한 부르주아적 이상이 구축되었다.
여기에서도 마녀사냥은 당대의 사회적 흐름을 증폭시켰다. 실제로마녀사냥이 표적으로 삼았던 관습과 같은 시기 가족생활과 젠더, 소유관계를 규제하기 위해 도입된 새로운 입법이 금했던 행위들 간에는 틀림없는 연속성이 있다. 서유럽 전역에서 마녀사냥이 진행되는 동안 간통을 저지른 여성을 사형에 처하는 법률이 통과되었다(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에서는 대역죄인과 마찬가지로 화형에 처했다). 동시에 매춘과 혼외 출산이 불법화되었고, 영아살해는 중대범죄가 되었다. 33 동시에 여성의 우정은 의심의 대상이 되었고, 부부간의 동맹을 전복할 수있다며 교단의 비판을 받았다. 이는 마녀박해자들이, 여성들이 서로를범죄의 공범으로 비난하게 만들어서 여성간의 관계가 악마화된 것과견주어볼 만하다. 또한 중세에는 "[여성]친구"를 의미했던 "가십"이라는단어의 의미가 바뀌어 경멸적인 함의를 갖게 된 것도 바로 이 시기였다.
이는 여성의 권력과 공동체적 유대가 얼마나 침해되었는지를 보여 주는 또 다른 사례이기도 하다. - P275

마녀사냥은 악마와마녀 간의 권력관계를뒤집어 놓았다. 이제는여성이 하수인이자 노예이며 신체와 마음이모두 악령인 존재이고, 악마는 이런 여성의 소유주이자 주인이며, 뚜쟁이인 동시에 남편으로 기능한다. 예를 들어 "의도했던 마녀에게 다가가는 것은 악마이고, "여성이 먼저 악마를 불러내는 경우는 거의 없다"(Larner 1983 : 148). 악마는 마녀에게 몸을 드러낸 뒤 자신의 하수인이 되라고 요구하고, 그 뒤에는 전형적인 주인과 노예, 남편과 아내관계가 뒤따른다. 게다가 결혼생활에서 여성들이 짊어지고 갈 운명을정확하게 예시라도 하듯 마녀는 단 한 명의 악마를 맞아들인다. 하지만중세와 르네상스 시기에는 둘 이상의 악마를 맞아들이는 것이 가능했다. 또한 중세시대 지중해와 게르만 지역의 여성들 사이에서는 (헤라다이아나의 시장의 숙녀> la Signora del zogo처럼) 여성의 모습을 한악마를 추종하는 집단이 창궐했던 것과 대조적으로, 마녀사냥 시기 악마는 남성으로 그려졌다. - P277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모든 악의 근원이라며 비난했던 마녀사냥은,
새로운 자본주의적 노동규율에 순응하여 가족 내에서의 재산상속과 출산을 위협하거나, 노동에 들어갈 시간과 에너지를 다른 곳에 낭비하게만드는 모든 성적 활동을 범죄화하는 광범위한 성생활의 재구조화를위한 주요 수단이기도 했다. - P288

유럽 여성들의 운명과 아메리카 인디언 및 아프리카인들의 운명은아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어서 서로 상호적인 영향을 미쳤다. 마녀사냥과 우상숭배라는 비난은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가 지역 주민들의저항을 궤멸시키고 세계인들 앞에서 식민화와 노예무역을 정당화했다.
파리네토에 따르면 유럽당국들은 아메리카에서의 경험을 통해 마녀의존재에 대한 믿음의 발판을 마련하고 아메리카에서 발달한 것과 동일한 대량살상 기술을 유럽에도 적용시키게 되었다(Parinetto 1998). - P294

합리주의와 기계론은 세상이 자연의 착취에 열을 올리게만드는 데 기여하긴 했지만 마녀박해의 직접적인 원인은 아니었다. 마녀사냥을 선동할 때 그보다 더 중요했던 것은 중세 말에 이르러 자신들의 정치경제적 권력을 위협하던 존재양식 전반을 뿌리 뽑아야 한다고느끼게 된 유럽 엘리트들의 필요였다. 이 과업이 완수된 시점에, 다시말해서 사회적 규율이 복원되고 지배계급이 자신의 헤게모니가 확립되었다고 느끼는 시점에서 마녀사냥이 중단된 것이다. 그 때부터는 마법에 대한 믿음이 조롱의 대상이 되어 미신으로 매도당하면서 기억에서사라져 가게 되었다.
17세기 말부터 유럽 전역에서 이 과정이 시작되었다. 단, 스코틀랜드에서는 30년 정도 더 오래 마녀사냥이 지속되었다. 마녀사냥의 중단 - P304

에 기여한 요인 중에는, 지배계급이 스스로 자신들이 동원한 억압기제의 불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지배계급의 일원을 비난의 대상으로 삼게 되면서 마녀사냥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하기 시작했다는 사실도 있다. - P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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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대캘리번

이제 신체는 사회정책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게 되었다. 노동의종용에도 꿈쩍 않는 야수일 뿐만 아니라 노동력의 보유고이자 생산수단, 중요한 노동기계로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국가의신체에 대한 전략을 살펴보면 엄청난 폭력과 엄청난 관심이 동시에 나타난다. 이에 신체의 움직임과 부속기관들에 대한 연구는 데카르트처럼영혼의 불멸성을 주장하는 경우는, 홉스처럼 사회의 지배가능성을 탐구하고자 하는 경우든 당대 대부분의 모험적인 이론의 출발점이 되었다. - P202

마법의 근간에는 물질과 정신을 구분하지 않고, 따라서 우주를 주술적인 힘으로 채워진 살아있는 유기체로 상상하는 자연에 대한 애니미즘적 관념이 있다. 유기체적 우주에서는 모든 것이 그나머지들과 "공감하는 관계 속에 있다. 자연을, 해독해야 할 비가시적 - P209

인 친연성을 나타내는 흔적과 증표의 우주로 바라보는 이와 같은 관점에서는(Foucault 1970: 26~27), 약초, 식물, 금속, 그리고 우리 신체의 대부분 등 모든 요소들이 고유한 강점과 힘을 숨기고 있다. 따라서 자연의 비밀을 전유하고 그힘을 인간의 의지에 맞게 변형하기 위한 다양한 실천들이 계획되었다. - P210

마법의 위험이 어떻든지 간에 부르주아지들은 마법의 힘을물리쳐야만 했다. 마법은 사회적 행위를 결정하는 것이 별들의 영역이라고 간주함으로써 사회적 행위를 부르주아지의 권한 밖에 있는 통제불가능한 것으로 인식하게 만들었고, 따라서 개인의 책임이라는 원칙을 저해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16세기와 17세기의 철학적 사색을 특징짓는 시공간의 합리화 과정에서 예언은 개연성의 계산으로 대체되었다. - P212

기계론적 철학이론 중에는 신체의 통제에 대한 두 가지 상이한모델이 있다. 한편으로 데카르트 모델은 순수하게 기계적인 신체라는가정에서 출발하여 동의에 기초한 통치와 자발적인 노동관계를 가능케하는 자기규율, 자기관리, 자기조절 같은 개별 메커니즘들의 발달 가능성을 상정한다. 다른 한편 홉스의 모델은 신체에서 벗어난 이성이 존재할 가능성을 부정하면서 통제기능을 외부화하여 국가의 절대적인 권위에 이 통제기능을 위임한다. - P218

나는 중산계급에게 데카르트의 철학이 인기 있는 것은 데카르트의 철학이 조장한 자기지배 프로그램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고 본다. 자기지배 프로그램은 그 사회적 함의라는 측면에서 데카르트의 이원론이 정당화한 인간과 자연간의 헤게모니적 관계만큼이나 데카르트와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엘리트들에게 중요했다. - P223

홉스에게 있어서 인간의 행위는 정확한 자연법칙을 따르는, 그렇기 때문에 개인이 부단히 타인에 대한 지배와 권력을 추구하게 만드는 반사행위의 집합이다(Leviathan : 141ff). 그러므로 만인의 만인에대한 투쟁(가설적인 자연상태에서), 그리고 공포와 체벌을 통해 사회에서 개인의 생존을 보장해 주는 절대적인 권력의 필요를 이야기하게 되는 것이다. - P225

가장 은밀한 후미에서 신체를 지배하려는 이 집착과도 같은 시도속에서 우리는 같은 시기 부르주아들이 프롤레타리아트라고 하는 이질적이고 위험하며 비생산적인 존재를 정복("식민화"라고도 할 수 있다)할 때 보여 준 것과 똑같은 열정을 확인할 수 있다. 프롤레타리아트는당대의 대캘리번이었기 때문이다. 프롤레타리아트는 페티가 국가의 - P232

손에 맡겨야 한다고 얘기했던 "원초적이고 소화되지 않은 그 자체로 물질적인 존재였다. 국가는 조심스럽게 "그것을 개선하고 관리하며 용도에 맞게 변형해야만 한다" (Furniss 1957 : 17ff). - P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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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노동축적과 여성의 지위하락

유럽에서 토지사유화는 15세기 후반에 식민지 팽창과 동시에 시작되었다. 그것은 거주자 추방, 지대 인상, 빚을 지게 하여 토지를 팔게 하는 국세 인상 등 다양한 형태를 취했다. 이것들을 모두 토지 수용이라고 정의할 수 있는 것은, 폭력이 수반되지 않은 경우에도 토지 상실은개인이나 공동체의 의지에 역행해서 이루어졌고 이것은 생존기반의 파괴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토지 수용은 전쟁과 종교를 통해 이루어졌는데, 특히 전쟁은 이 시기에 영토적·경제적 배치를 바꾸기 위한 수단의성격을 띠게 되었다. - P109

잉글랜드에서 토지사유화는 대개 "인클로저"를 통해 진행되었는데, 이 현상은 노동자의 "공동자산"cawealth을 박탈하는 것과 매우 깊은 연관이 있었기 때문에, 오늘날 반자본주의 운동가들은 이것을 사회적 수급권에 대한 모든 공격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한다. 16세기에는 "인클로저"가 전문용어였다. 인클로저는 잉글랜드에서지주와 부농이 공동체적 토지소유를 제거하고 자신들의 토지보유를 확대하기 위해 이용한 일련의 전략을 가리켰다.28 그것은 주로 공동 경작제open-field system를 폐지하는 것을 의미했다. 공동경작제란 주민들이 - P111

토지사유화가 해방시킨 것은 노동자(남자건 여자건)가 아니라 자본이었다. 이제 토지가 생존의 도구라기보다는 축적과 착취의 도구로서 "자유롭게" 기능할 수 있게 되었기때문이다. 해방된 것은 지주였다. 지주는 직접고용의 경우에만 노동자가 생계유지 수단을 얻을 수 있게 함으로써 재생산 비용을 거의 다 노동자에게 떠넘길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상업위기나 농업위기가 닥쳐와 일자리가 없어지거나 타산이 맞지 않으면, 전과 달리 노동자가 굶어 죽건 말건 해고해 버리면 그만이었던 것이다. - P122

물가상승은 소농을 몰락시켰다. 그들은 소출이 생존에 불충분할 때는 곡물과 빵을 사느라 땅을 팔아야 했다. 물가상승은 자본주의적 기업가 집단을 만들어냈다. 그들은 많은 사람들이 돈이 없으면 굶어죽어야 했던 시대에 농산 - P123

물 투자와 고리대금업으로 떼돈을 벌었다.
또한 가격혁명은 오늘날 세계은행과 IMF가 수행한 "구조조정"의여파로 아프리카, 아시아,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에서 나타난 것과 맞먹는 역사적인 실질임금 하락현상을 촉발시켰다. - P124

유럽에서 "이행"기는 여전히 격렬한 사회갈등의 시기였고, 국가가주도적으로 일련의 정책을 취하는 발판이 되었다. 정책들의 결과에서역으로 이 정책들의 주된 목적을 세 가지 정도로 추려볼 수 있다. 첫째,
더 잘 훈육된 노동력을 창출하는 것. 둘째, 사회적 저항을 분쇄하는 것.
셋째, 노동자들을 강요된 일자리에 묶어두는 것. - P134

인구위기와 경제위기는 1620~1630년대에 정점에 이르렀다. 유럽과식민지 모두 시장이 위축되고, 무역이 중단되고, 실업이 일반적인 것이되었다. 그리하여 한동안 발전도상의 자본주의 경제가 붕괴할 가능성도있었다. 유럽과 식민지의 경제적 통합이 진행돼서, 각지의 위기들이 서로를 빠른 속도로 상승·확대시키는 효과가 나타난 것이다. 이는 최초의국제적 경제위기였다. 역사가들은 이를 17세기의 "일반적 위기"GeneralCrisis라 부른다(Kamen 1972 : 307ff; Hackett Fischer 1996:91). - P140

맑스는 출산이 착취의 영역이자 저항의 영역일수 있다는 점을 전혀 인정한 바 없다. 그는 여성이 출산을 거부할 수 있다거나 그런 거부가 계급투쟁의 일부분이 될 수 있다고 상상하지 못했다. 맑스는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1973 : 100)에서, 자본주의 발전은인구수와 무관하게 진행되는데, 그 이유는 노동생산성이 증가하는 덕에, "고정자본"(기계류 및 기타 생산자산에 투입된 자본과의 관계에서자본이 착취하는 노동은 지속적으로 감소하고, 그 결과 "잉여인구"가결정되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맑스가 "자본주의 생산양식에전형적인 인구법칙"(『자본』 1권 : 689ff)이라 정의한 이 동학은 출산이 - P148

순수하게 생물학적 과정이거나 경제변동에 자동적으로 반응하는 활동인 경우에만 적용될 수 있고, 또 자본과 국가가 "여성들이 임신과 출산을 거부할까 두려워 할 필요가 없을 때에만 적용될 수 있다. 맑스가 가정했던 것은 바로 위와 같은 상황이었다. - P149

중세 내내 여성은 주로 약초로 제조한 여러 가지 피임약을 이용했는데, 대개 생리주기를 바꾸거나 낙태를 유발하거나 불임상태에 이르기 위한 것이었다. 미국 역사가 John Riddle은 『이브의 약초 :서양 피임술의 역사』(1997) Eve‘s Herbs : A History of Contraception in the West 에서 다양한 약재와 각각의 기대효과를 광범위하게 서술하고 있다. 피임 관련 지식은 여성이 출산에 대해 일정한 자기통제를 확보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하지만 피임이 불법화되면서 여성들은 세대를 거쳐 전승되어 오던 이 지식들을 박탈당했다. - P150

비노동자 정의과정은 17세기 후반에 거의 완성되었고,
이에 대해서는 여성주의 역사학계에서 많은 연구가 이루어졌다.
여성은 원래 그들만의 직업으로 여겨지던 맥주양조나 산파 일에서밀려나고 있었고, 여성고용에 대한 새로운 제한들에 묶이게 되었다. 특히 프롤레타리아트 여성은 최하층의 직업 말고는 일자리를 구하기가어려웠다. 여성 노동인구 3분의 1은 하녀였고, 나머지는 농장 일방적·뜨개질 · 자수. 보따리장사· 유모와 같은 일에 종사했다. - P151

계속되는 토지사유화와 더불어, 동업조합과 시정부의 이와 같은 동맹을 통해 새로운 성적 분업 또는 캐롤 페이트먼Carole Pateman(1988)의용어를 빌자면 새로운 "성적 계약"이 날조되었다. 이 새로운 성적 계약은 여성의 노동자로서의 지위를 은폐하는 어머니 • 아내·딸· 미망인과 같은 용어로 여성을 정의하는 한편, 여성과 그 자식들의 신체와 노동에 대한 무상이용권을 남성에게 부여했다.
.
이 새로운 성적 사회계약에 따라 프롤레타리아트 여성은 인클로저때문에 남성노동자가 상실한 토지의 대체물이자 가장 기초적인 재생수단이 되었으며, 또 누구나 뜻대로 전유하고 이용할 수 있는 공유재가 되었다. 스스로 매춘에 나선 창녀를 지칭하는 16세기의 "공유여성"(Karras 1989) 개념에서 이 시초축적"의 메아리를 들을 수 있다.
그러나 새로운 노동편성에서 (부르주아 남성이 사유화한 여성만이 아닌) 모든 여성이 공유재산으로 변했다. 일단 여성의 활동이 비노동으로정의되자 여성의 노동은 마치 공기처럼 누구나 마음껏 쓸 수 있는 천연자원으로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 P157

마녀사냥의 시대에는 여성이 야만적인 존재로서 정신적으로 허약하고, 구제불능의 욕망을 가졌고, 반항적이고, 순종하지 않으며, 자기통제능력이없는 것으로 그려졌지만, 18세기가 되면 이것이 뒤집히게 된다. 이제여성은 수동적이고, 무성적이고, 남성보다 더 순종적이거나 더 도덕적이고, 남성에게 긍정적인 도덕적 영향을 줄 능력을 가진 존재로 묘사되기 시작했다. - P168

플랜테이션 체제는 대대적인 노동집결과 고향에서 뿌리 뽑히고 의지할 곳 없는 예속 노동력으로 공장제에 선례를 제공했을 뿐 아니라 노동비용 절감을 위한 이주노동과 지구화를 예견한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특히 노예와 임노동자를 지리적·사회적으로 나누어 놓은 상태에서
"소비재의 생산을 통해 노예노동을 유럽 노동인구의 재생산에 통합시킨 국제분업의 형성에 결정적인 단계가 되었다. - P170

17세기 후반에 들어서면 유럽 출신 노동자를 덜 쓰고 그들을 아프리카 노예들로부터 분리하기 위한 법안을 도입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돌이킬 수 없는 인종적 구분선이 그어진 것은 18세기 말에 이르러서였다(Moulier Boutang 1998). 그때까지는 백인, 흑인, 토착민 간에 동맹의 가능성이 항상 존재했고, 본토에서건 플랜테이션에서건 유럽인 지배계급의 상상 속에 언제나 그러한 동맹에 대한 공포가 존재했다. 셰익스피어의 『템페스트』는 이런 공포를 잘 드러내고 있다. 셰익스피어는 마녀의 아들이자 토착민 반란자인 캘리번과 먼 바다를 항해하는 유럽 출신 프롤레타리아트 트린큘로와 스테파노가 조직한 음모를그림으로써, 억압받는 자들의 치명적인 동맹의 가능성을 제시하는 동시에, 프로스페로의 마법을 통해 지배자들 간의 불화가 치유되는 극적인 대조를 펼쳐 보인다. - P175

성차별과 마찬가지로 인종차별도 입법을 통해 제도화되고 강제되어야 했다. 흑인과 백인 간의성관계가 금지되었고, 흑인노예와 결혼한 백인여성은 비난을 받아야했으며 그들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는 평생 노예로 살아야 했다. 1660년대에 메릴랜드와 버지니아에서 통과된 이 법령들을 살펴보면 인종차별사회는 위로부터 만들어졌다는 사실이 분명하게 확인된다. 게다가 "흑인과 백인의 관계를 종식시키기 위해 종신노예화라는 처벌이 필요했다는 점은 그 관계가 얼마나 친밀했었는지를 보여 준다.
마치 마녀사냥의 대본을 따르기라도 한 것처럼, 새로운 법령들은백인여성과 흑인남성의 관계를 악마화했다. - P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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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농노제가 주인과 하인 간의 관계에 도입한 변화의 관점에서, 농노 - P48

제의 가장 중요한 측면은 그것이 농노로 하여금 재생산수단에 직접 접근할 수 있게 해줬다는 점이다. 영주직영지demesne에 바치는 부역노동의 대가로 농노는 한 뼘의 땅 망스mansus, hide를 받았다. 농노는 이 토지를 경작해서 먹고 살았으며, 이것을 "상속수수료만 내면 진짜 유산처럼"(Boissonnade 1927 : 134) 자식에게 물려줄 수 있었다. - P49

화폐와 시장은 계급차이 위에 소득차이를 도입하고, 정기적인 적선에 기대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는 가난한 대중을 만들어 내며 농민층을 갈라놓기 시작했다(Geremek 1994 : 56~62).
점증하는 화폐의 영향력으로 인해 유대인을 향한 체계적인 공격이 12 - P60

세기에 시작되었고, 동시에 그들의 법적·사회적 지위는 하락했다. 기독교 경쟁자들이 왕, 교황, 고위성직자에게 대부해 주던 유대인을 몰아낸 것과, 성직자들이 유대인 차별규정(예 : 구별되는 옷을 입게 한다)을새로이 도입한 것, 그리고 잉글랜드와 프랑스가 유대인을 추방한 것은사실 서로 뜻깊은 관련이 있다. 교회로부터 버림받고, 기독교인들과 분리되고, (유대인에게 허락된 몇 안 되는 직업 중 하나인) 대부업을 촌락수준에서만 영위할 수 있게 된 유대인들은 이제 빚진 농민들의 화풀이대상이 되었다(Barber 1992 : 76). - P61

교회가 성적 규제를 재구성한 특권적 도구로서 7세기부터 출간한 책자인 고해안내서Penitentials가 있다. 푸코는 『성의 역사』1권(1978)에서, 이 책자들이 17세기에 담론으로서의 성과 다양한 단계로 구성된 성 관념을 만들어 내는 데 맡았던 역할을 강조한다. 그러나 고해안내서는 중세에 이미새로운 성담론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이 책자들은 성행위 중 허용된체위들(실제로는 오직 한 가지 체위만이 허용되었다)과 성행위가 허용되는 날짜, 그리고 성행위의 대상으로서 허용되는 자와 금지되는 자를세세하게 규정하고 있어서, 교회가 진정한 성적 교리문답을 부과하려고 시도했음을 보여 준다. - P73

14세기 중엽이 되면 종교재판관의 보고서는 더 이상 이단의 이상성행위와 성적 방종을 고발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한다. 이제 이단은 악명 높은 꼬리 아래 입 맞추기 bacium sub cauda 의식을 행하면서 동물을 숭배하고, 술에 취해 난교를 벌이며, 밤에 하늘을 날고, 아이들을 제물로 바친다고 고발당했다(Russell 1972) 종교재판관들은 루시퍼파라는 악마숭배 종파가 존재한다고 보고하기도 했다. 이단 박해가 마녀사냥으로 넘어가는 이 과정에 발맞추어 이단의 형상은 점차 여성의 모습을 띠게 되었다. 그리하여 15세기 초가 되면 마녀가 이단 박해의 주요 대상이 되었다. - P78

흑사병의 가장 중요한 결과는 계급갈등이 만들어 낸 노동력위기의 심화였다. 노동인구 중 많은 수가 질병으로 사망하자 노동력이극도로 부족하게 되었고 임금이 상승했다. 이는 봉건지배의 족쇄를 부수고자 하는 사람들의 결심을 더욱 굳게 만들었다. - P86

프롤레타리아트 남성이 경제적 조건 때문에 결혼을 - P92

미룬 것에 대한 보상으로 "자기 몫"을 되찾고 부자들에게 복수하려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결과는 모든 노동자들에게 파괴적이었다. 가난한 여성에 대한 국가후원 강간은 반봉건투쟁을 통해 얻은 계급연대의토대를 침식했기 때문이다. - P93

반란이 실패한 것은 봉건권력의 모든 세력들(귀족, 교회, 부르주아지)이 전통적인 차이에도 불구하고 프롤레타리아트의 반란에 대한 공포로 합심하여 공동보조를 취했기 때문이다. 전해져 내려오는 부르주아지의 상은 진정으로 왜곡된 것이다. 이 상에서 부르주아지는 언제나 귀족과 전쟁상태에 있으며 평등과 민주주의의 기치를 높이 들고 있다. 그러나 중세 말기 토스카나에서 잉글랜드, 그리고 저지대40에 이르기까지 어디를 보나 이미 그들은 하층계급을 억압하기 위해 귀족과 연합하고 있었다. 41 부르주아지는 농민과 도시의 민주적 직조공 및 수선공이 귀족보다 더 위험하다고 인지했고, 그 위험은 시민계급이 소중히여기던 정치적 자율성을 희생해서라도 막아야 할 것으로 보였다. 그리하여 절대국가로 가는 첫걸음인 군주의 지배에 자발적으로 복종하면서귀족의 권력을 재수립한 것은 바로 도시 성벽 내의 자치권을 얻기 위해두 세기 동안 투쟁해 온 부르주아지였다. - P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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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노 유목제국사 - 기원전 209~216 유목제국사
정재훈 지음 / 사계절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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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노는 기원전 3세기 중반 등장하여 중국과 겨룰 만큼 강력한 유목제국으로 오랜 시간 존속했다는 인상을 남겼고, 유목제국의 '원상原象'으로서 이후 초원 유목민을 대표하는 통칭이 되었다. 이는 중국과 같은 하나의 '역사 단위'로서 초원의 유목 세계, 즉 북아시아사의 '시작점'에 흉노가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흉노 유목제국사의 전개 과정을 이해함으로써 '고대 유목제국'의 성격에 새롭게 접근해볼 수 있다. 흉노는 이후 유목 세계의 중요 전통이자 영광스러운 '유산'의 하나가 되었다. - P379

이 책은 저자가 쓴 고대 유목제국에 대한 연구서 중 앞선  ⌜위구르 유목제국사 744~840⌟, ⌜돌궐 유목제국사 552~745⌟에 이어 세 번째로 출간된 책이다. 지난 달 ⌜돌궐 유목제국사 552~745⌟를 읽고 나서 이 책이 마침 출간된다는 것을 알게 되어 이렇게 연이어 읽게 되었다. 저자는 2010년부터 흉노 연구사업(부경대)에 참여하여 몽골과 러시아 바이칼 남부, 중국 신장의 관련 유적을 답사하면서 한문 기록과 발굴 성과를 연결하는 작업을 고민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흉노의 존속 기간은 400년 정도로 존속 기간이 길었음에도 불구하고 시작은 2천년도 더 된 일이라 그 기록이 아주 적다. 게다가 흉노 스스로 남긴 기록이 없기 때문에 중국 측의 한문 기록만 남아 있다. 그마저 사마천의 ⌜사기⌟, 반고의 ⌜한서⌟, 범엽의 ⌜후한서⌟와 진수의 ⌜삼국지⌟ 같은 정사의 열전에서만 볼 수 있을 뿐이다. 그 주요 내용도 전쟁과 화친 등 외교 관계에 집중되어 있다. 흉노만의 독특한 습속이나 유목국가 자체에 관한 내용은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게다가 중화주의적 입장에 근거한 중국 측 기록을 온전히 믿기 어려운 부분도 있다. 특히 반고는 흉노를 '오랑캐'라고 하면서 강한 반감을 드러냈고 이는 이후 역사가들에게도 영향을 주어 부정적 편견이 자리하게 만드는 요인이 되었다. 물론 사마천은 ⌜사기⌟에서 최대한 객관적 태도로 정보를 가공해 흉노의 역사를 기록하였고, 유목 습속과 국가 체제에 관한 내용을 유일하게 남겼다는 점에서 가치 있는 작업을 일구어 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문사료를 기초로 연대별 역사를 연구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는 인식이 많았다. 그래서 최근에는 고고학적 발굴 성과 자료에 의한 연구가 주목을 받고 있다. 다만 이 자료는 지역적으로 편중되어 있어, 기원전 1세기부터 기원후 1세기 정도의 시기만 보여줄 뿐 흉노 전사를 설명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저자는 이렇게 공간적 범위와 문화적 복합성에 따라 발굴 자료와 문헌 기록이 불일치하는 것을 해소하기 위해 흉노의 역사는 재구성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흉노의 역사와 문화에 관해서는 앞서 다양한 연구가 있었다. 이 가운데서 기존에 '제국'의 개념에 초점을 맞춰 다양한 작업이 이루어져 왔다. 이 책은 그 연장선상에서 '유목제국' 흉노의 사적 전개 과정을 정리하고, 그 성격을 재검토하였다. 앞선 흉노 역사에 대한 기록을 바탕으로 건국 이전부터 소멸 시기까지 다섯 파트로 나누어 설명한다.

흉노는 그의 선조가 하후씨의 먼 자손으로 순유라고 한다. 당[요]과 우[순] 이전부터 산융, 험윤, 훈육이 있었는데 북쪽 족속[의 땅]에 살았다. [흉노는] 길들인 짐승을 풀어 먹이며 따라다니는데 [계절에 따라 일정한 곳을] 맴돌며 옮겨 다닌다. 길들인 짐승의 많은 수는 말, 소, 양이고, 쉽게 보기 어려운 길들인 짐승은 낙타, 나귀, 노새, 버새, 뛰어난 말, 무늬가 있는 말이다. 물과 풀을 따라 옮겨 다니며 살아 성곽, 붙박여 사는 곳, 농사를 짓는 땅에서 먹고 사는 것이 없지만 각자 나누어 가진 땅이 있다. - P70
이는 사마천이 그린 흉노의 모습을 저자가 재해석하여 복원한 모습이다. 사마천은 흉노의 선조와 기원이 되는 사람들이 북쪽 족속에 살았다고 표현했고 뒷부분에는 유목에 대한 정의, 가축 종류, 생활 모습 등을 기술하면서 흉노를 한과는 완전히 다르며 중국에 대응할 만큼 독자적인 존재였음을 명확히 인식하고 기술하였다. 흉노가 단순히 유목 민족으로 떠돌며 수렵으로 생활했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그게 아님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융'과 '호'에 대한 구분은 어떻게 해야 할까. '융'은 목축을 주업으로 하면서 농사도 병행하는 사람들이었다. 환경이 열악해지면 살림살이를 이동하며 옮겨 다녔음을 알 수 있다. '호'는 사육한 말을 타고 활을 쏘는 기마궁술에 특화된 사람들로 초원에서 계절에 따라 순환 이동을 하며 가축을 사육하는 목축을 했다.

기원전 210년 진시황이 죽고 진한 교체의 혼란이 본격화되자 흉노는 세력을 확장하면서 묵특 시기에 중국을 상대할 정도의 거대한 유목제국으로 발전하며 209년 국가를 건설한다. 흉노는 이 때 초원의 유목 세력만이 아니라 장성 주변에 흩어진 융까지 확보했다. 그 뿐 아니라 진한 교체기 중국의 혼란이 확대되면서 이탈한 중원 출신의 주민도 다수 포섭하였다. 선우는 '크다'를 뜻하는 군장 칭호로 묵특 이후 호와 융 모두를 통합한 유목국가를 다스리는 '하늘의 아들'을 의미한다. 그리고 체제 안정을 위해 만기장 24인을 두어 국가를 운영했다. 선우 이하 24명의 만기장은 세습 관료로 선우를 배출하는 연제씨 출신이거나 이와 연합한 특정 씨족 출신이었다. 묵특 시기 흉노의 영역은 동으로는 요동, 남으로는 텐산 부근의 오아시스와 그 주변 초원에 이르는 범위에 걸칠 정도로 넓게 퍼져 있었다. 묵특 사후에는 한과의 사이에서 어느 일방도 우위를 확보하지 않는 방향으로 나아갔지만 무제가 들어선 후에는 양국 간 전면전이 시작되었다.

흉노는 한과의 전쟁으로 막북 초원으로 밀려난데다 전쟁 대응으로 내부 체제를 안정시키지 못한 상태에서 개별 세력의 성장을 용인한 결과 대선우 즉위 과정이 합의가 아닌 정변을 통해 이루어지며 내부 결속력이 약해졌다. 내부 세력의 갈등은 흉노 체제의 약점과 대선우 권력의 한계를 드러내며 많은 사람들이 한에 투항하였다. 이로써 흉노는 오아시스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하고 한 이외 주변 세력에도 도전을 받으며 세력이 약화되었다. 반면 한은 흉노의 막북 고립과 무력 정벌을 이끌어냈다.
기원전 57년을 전후로 흉노에서는 대선우 계승을 둘러싼 지배 집단 내부의 갈등이 폭발하며 5명의 대선우가 쟁립하는 내전이 벌어진다. 혼란 속에서 대선우가 된 호한야는 일시적으로 상황을 수습하는 듯 했으나, 형 질지골도후에게 쫒겨난다. 그는 고비 이남으로 내려와 한에 도움을 요청했다. 남하한 호한야는 한의 도움을 받으며 세력을 회복한 반면 질지골도후는 막북에서 세력을 유지하려다 끝내 실패했다. 흉노는 호한야 사후 대선우 자리를 연장자 우선 원칙에 따라 형제들이 상속하기로 한다. 흉노는 계속 한과 평화 관계를 유지하면서 물자 지원을 받으며 한에 강하게 의존하게 된다.

48년 흉노는 사촌 간 계승 분쟁으로 남북 분열이 되며 후한이 주도하는 세계 질서에 포섭되었다. 이후 계승 방식에 불만을 품은 일부 세력이 한의 도움으로 흉노를 형성한다. 이후 북흉노와 남흉노의 분열이 고착화되었다. 한은 기미를 받아들이고 신하가 되겠다고 한 남흉노를 군사적으로 활용해 북흉노와 선비, 오환에도 대응하면서 자신들을 유리하게 이끈다. 막북 초원에서 흉노의 권위가 완전히 소멸하자 선비가 흉노를 따르던 유목민을 통합하여 신세력으로 등장했다. 후한 말 대선우를 비롯한 지배 집단의 일부는 남흉노에 대한 통제력을 잃고 중국 내지로 들어온다. 이 중 일부는 조조의 견제를 받아 축소되다 소멸하고 다른 일부는 흩어져 각자도생의 길을 걷는다. 흉노는 216년 이렇게 완전히 소멸하고 해체되었다.

흉노의 활동과 영향 범위는 몽골 초원 뿐 아니라 오아시스, 중국 북변에 걸쳐 있었다. 이 공간을 하나로 묶어낸 흉노는 유라시아 대륙 전반에 영향을 남겼다. 6세기 돌궐, 13세기 몽골 유목제국도 자신의 뿌리를 설명하는 기제로 흉노를 끌어왔고 오호십육국 시대 흉노의 계승 국가를 자처한 '후계'가 계속 등장하는 것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흉노는 서진 말 군사적 수요가 커진 상황에서 서진 정권이 내분으로 붕괴하자 부활할 기회를 얻는다. 유연은 세력을 키웠고, 304년 새로운 국가를 세웠고 "홍방복업"이라는 명분을 내걸며 흉노의 나라를 '재건'한다 선언한다. 유연의 지향성은 새로운 통합제국 한漢의 건설로 연결되었다. 그러나 중국 내지에서 초원과 중국의 전통을 하나로 엮으려는 흉노 후예의 이 시도는 오래가지 못했다. 이 움직임은 이후 300여 년간 전개된 분열의 시작, 이른바 오호십육국의 '전주국'으로 이해되었다. 흉노의 이런 움직임은 이후 오랫동안 전개된 북중국 혼란의 책임을 뒤집어쓰면서 부정적으로 인식되었다.

이후 북중국을 무대로 전개된 분열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호와 한의 '대결'과 '융합'에만 초점을 맞춘 기존의 '이분법적 설명'과는 다른 접근이 필요하다. 장성 안쪽으로 한정된 중국의 범위와는 다른, 초원과 북중국이 하나로 연결된 새로운 판도에서 비한非漢 세력들이 서로 얽혀 '다원적' 성격을 보여주었다는 부분에 초점을 두고 역사의 전개 과정을 이해해야 한다. 이런 면모는 남흉노의 후예인 유연과 그 뒤를 잇고자 했던 다른 집단들이 보여준 '복합적' 성격의 국가 건설 움직임에서도 엿볼 수 있다. 이런 점에 주목해 흉노를 비롯한 유목민에 대한 편견을 넘어 오호십육국시대 이후 오랜 분열기에 명멸했던 국가들의 사적 전개과정과 성격을 다각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 - P396~397



최근 몇 개월동안 ⌜사기⌟와 ⌜통감절요⌟를 비롯하여 고대 중국사를 공부했다. 덕분에 흉노의 역사는 돌궐의 역사보다는 아는 이름과 사건이 많았다. 이름과 사건만 알고 있어도 그 이면의 접근은 더 수월해진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는다. 사마천이 궁형을 당하는 데 배경이 되었던 이릉, 한의 서역 원정의 시초가 된 장건(장건의 원정이 당시에는 실패했지만 이후 한이 서역의 오아시스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던 일), 흉노와 한의 결혼 관계 설정으로 흉노에 시집을 가야 했던 왕소군 등이 있었다.

이 책은 한문 텍스트 기록 뿐 아니라 흉노의 역사 전개 과정에 따른 지도, 선우 승계 과정의 표 등을 실어 흐름을 파악하는데 도움을 주고 유물이나 유적 자료 사진을 실어 문화적인 이해도 가능하게 하였다. 흉노 관련 역사서를 읽을 때 레퍼런스로도 활용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이 책을 읽으며 가장 반가웠던 소식은 고대 유목제국사 3부작 중 절판된 ⌜위구르 유목제국사⌟ 가 내년 재출간을 목표로 작업 중이라는 내용이었다. 절판되어 구할 수도 없는 책이었기에 너무 안타까웠는데 다시 출간된다니 무척 기대가 된다. 3부작을 읽음으로써 기원전 3세기부터 9세기까지 유목제국사 읽기를 한 흐름으로 완성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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