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 프랑스 최초의 핵무기 실험이 성공하자, 드골은 프랑스가 나토 동맹 안에서도 대외정책의 독립성을 지켜야 한다고 느꼈다. 유럽문화적 통일성이라는 뿌리 깊은 인식으로 무장한 보수주의자 프랑스 대통령은 미국이 동반국과 관계를 맺는 데 너무 고압적으로 변했다고 보았다. 드골은 나토에서 미국의 역할에 균형을 맞출 수 있는프랑스의 지도로 서유럽이 독립성을 강화하기를 원했다. 유럽 통합으로 나아가는 유럽경제공동체에 영국이 가입하려 했을 때, 드골이
‘안 된다‘라고 반기를 든 것은 런던이 워싱턴의 트로이목마 노릇을 - P537

한다는 인식에 기반을 둔 행동이었다. 드골은 프랑스가 미국의 안보를 보장하고 미국과 동방에 다리를 놓으면서, 서유럽을 더욱 독립적으로 이끌 수 있는 유일한 나라라고 생각했다.
1964년 프랑스 대통령은 동유럽 및 소련과 기술적·문화적으로협력하기 위한 사업을 적극적으로 개시했다. 드골은 1965년 얄타회담 20주년 기념일에 극적으로 기자회견을 하면서, "얄타"를 극복하고 유럽 분열에 종지부를 찍는 것이 목표라고 선언했다. - P538

1957년 로마조약으로 설립된 - P540

유럽경제공동체는 회원국-네덜란드, 룩셈부르크, 벨기에, 서독, 이탈리아, 프랑스-이 상품, 자본, 노동자를 위한 공동 시장을 만들게 했다.
드골파가 이의를 제기하고, 교섭 과정이 더디고 때로는 분노를 자아내기도 했지만, 10년 뒤 내부 관세 폐지가 완수되면서 당시 이름으로유럽공동체(European Community, EC) 내부에서 완전한 관세동맹이 이루어졌다. 성공의 비결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내부적인 것으로, 서독이 공업 제품을 자유로이 수출하는 대가로 프랑스와 이탈리아 농민을위한 보조금에 거액을 내는 공동농업정책(Common Agricultural Policy)이었다. 다른 하나는 외부적인 것으로, 서유럽 모든 수도에서 유럽이하나로 뭉치면 냉전에서 강력한 목소리를 되찾을 수 있다는 인식이생겨났다.
그리하여 냉전이라는 조건 아래 독일의 경제적 힘과 드골주의원칙의 유럽화가 결합했다. - P540

브란트는 동베를린으로 가는 길이 모스크바를 통해야 한다는것을 알았다. 1970년 브레즈네프와 협상하면서, 브란트는 소련과 무역 및 경제 협력을 증대하고 조약을 체결하겠다고 약속했다. 폴란드와 독일의 새로운 국경과 동독과 서독의 국경을 포함해 전후 유럽의국경을 침범할 수 없다는 데 양쪽이 합의하는 조약이었다. 브레즈네프는 아주 흡족했다. 서독과 체결한 조약은 독일의 영토 탈환 정책에대한 공포를 줄이고, 더욱 중요하게는 어느 시점이 되어 중립국 독일이 유럽에서 냉전의 균형을 소련에 유리하게 기울일 수 있음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 P542

브란트는 모스크바 조약에 이어, 1970년에 폴란드와 별도의 조약을 맺었다. 여기서 독일연방공화국은 폴란드의 서부 국경을 수용한다고 다시 언급하면서 양국 정부가 계속 평화적으로 협력할 것을약속했다. 이 협상에서 가장 중요한 측면은 브란트가 1970년 12월바르샤바를 방문한 것이었다. - P543

1975년 중반 유럽안보협력회의 헬싱키선언 조인은 유럽 데탕트의 중대한 시점이었다. 이는 브레즈네프의 정치 경력이 최고점으로 치달은 순간이었다. 35개국이 참가국 간 관계를 인도하는 원칙에관한 선언‘에 합의했다. 이 원칙에 동등한 주권, 국경 침범 불가, 국내문제 불간섭 등이 담겨 있었다. 모두 소련이 국가 창건 이후 늘 주장한 제안이었다. 최종의정서에 개인의 권리에 관한 핵심 구절도 포함되었다. - P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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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네디 행정부는 공산주의가 남쪽을 잠식해 들어온다는 생각에 강박적으로 매달렸다. 또한 전임 정부들에 비해, 급진적 정치 운동이 성공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조건을 창출하는 것은 빈곤과 사회 부정의라는 것을 훨씬 잘 알았다. 쿠바 코치노스만 침공을 단 몇 주 앞둔 1961년 4월, 미국의 젊은대통령은 라틴아메리카와 함께 이른바 ‘진보를 위한 동맹(Alliance forProgress)‘을 시작했다. 발전과 경제원조에 초점을 맞춘 10개 사업을제시하고, "독립을 위협받는" 어떤 나라든 지켜 주겠다고 약속한 케네디의 계획은 10년 안에 라틴아메리카에서 빈곤을 추방한다는 것이었다. - P494

이런 사업 가운데 가장 성공을 거둔 분야-교육, 보건,
교통, 주거는 배타적이지 않고 개방된 미국, 상호 이익을 위해 라틴아메리카 동맹국과 기꺼이 협력하는 미국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하지만 ‘진보를 위한 동맹‘의 긍정적인 측면은 지역 전체에서반민주적인 군사정권을 기꺼이 지지한 미국의 태도 때문에 무색해졌다. 애초에 공산주의에 맞서기 위한 군사 원조가 ‘동맹‘ 계획의 필수적인 부분이었다. 케네디의 후임인 린든 존슨이 통치하면서 ‘동맹‘의반란 대응 측면은 종종 민간사업을 압도하기에 이르렀다. - P495

쿠바 바깥에서 소련은 라틴아메리카 냉전의 주요 참여자라기보다 적극적인 방관자에 가까웠다. 소련은 각국 공산당 및 그들이 참여하는 전선과 동맹 [칠레 아옌데의 인민연합(Unidad Popular) 등]에 자금을지원하고 조언했다(때로는 환영받았지만, 때로는 환영받지 못했다). 라틴아메리카에서 가장 작은 나라에도 국가보안위원회와 정보총국 요원을계속 두었다. 하지만 그들의 임무는 현지의 사태에 영향을 미치기보다 모스크바에 보고하는 것에 가까웠다. 국가보안위원회 의장 유리안드로포프Yurii Andropov는 라틴아메리카 주재 공작원에게 이렇게조언했다. "주요 과제는 사태의 흐름을 자세히 살피면서 현지의 상황과 세력들의 상관관계에 관한 다면적이고 객관적인 정보를 확보하는것입니다."29 소련은 언제든 곧바로 사태의 추이를 조종하면서 기회가 생길 때마다 움켜쥐려고 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거리와 우선순위,
상대적 힘의 균형 때문에, 냉전 시기 라틴아메리카에서 모스크바의영향력은 제한적이었다. - P507

라틴아메리카의 냉전은 외부보다 내부에서 벌어졌다. 일부이긴 하나 정치적으로 훨씬 더 극단을 달리는 우파와 좌파의 점증하는폭력적 충돌이 중심이었다. 하지만 우파와 좌파는 라틴아메리카에서 복잡한 범주다. 좌파에는 몬토네로스 부류의 악랄한 선동가와 살바도르 아옌데 같은 지조 있는 개혁주의자가 있었다. 이 두 방향 사이의 분열은 냉전 후기에 점점 깊어졌다. 우파도 분열이 심각했다. 일부는 그저 자기들 몫의 거대한 돈과 자원을 지키기 위해 싸웠다. 다 - P509

른 이는 종교와 민족 개념에 이데올로기적으로 깊이 몰두했다. 그리고 일부-특히 남쪽의 원뿔(Southern Cone) 지역의 소규모 중간계급-는 미국을 정치와 사회의 조직화 면에서 직접 영감을 주는 나라로 여겼다.
다른 많은 분야와 마찬가지로, 1970년대는 라틴아메리카의 이런 정치적 경향에서 하나의 분수령이 되었다. 군사 독재의 등장은 그들이 흔히 선언한 것과 달리, "민족적 통합이 아니라 파편화의 증대를 의미했다. - P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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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ste is not only a part and an index of morality; it is the ONLY morality. The first, and last, and closest trial question to any living creature is, ‘What do you like?‘ - 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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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미국은 남베트남에 1만 6000명의 고문관을 두었는데, 이는 케네디가취임할 당시 600명과 비교해 크게 늘어난 수였다. 남베트남의 모든주요 군부대에 미군 장교가 배속되었고, 미국 고문관은 베트남공산당이 통제하는 남부의 베트남민족해방전선이나 하노이를 상대로 하는 전투에 직접 참여하지 않기로 했지만, 남베트남의 전쟁에서 점차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가 되었다. 미국 항공기와 헬리콥터는 북베트남에 기습 공격하는 것을 비롯해, 베트남 병력을 수송했다. 또한 남베트남 반군과 그 지지자를 굶주리게 하려고 농작물을 파괴하는 데 제초제를 사용했고, 베트남민족해방전선의 통제에서 "구출한 농민이이주할 수 있는 "전략"을 세웠다. - P451

베이징은 워싱턴에 미국이 북부를 침공하지 않는 한 자국 군대는 개입하지 않겠다는 신호를 보냈다. 국내외적으로 점점 혁명적 자세를 취했음에도 마오쩌둥은 미국의 힘을 적잖이 존중했다. 게다가 소련과 벌이는 대결이 악화하는 상황-대개마오쩌둥의 행동 때문이었음을 언급해야겠다-에서, 마오쩌둥은 인도차이나에서 전면전을 벌이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그러므로 중국은 북베트남과 남부의 베트남민족해방전선이 중국의 원조를 받아 미국에 맞서 "가차 없이 싸우면서 협상하지 못하도록 구워삶는 방침을 세웠다. 또한 베이징은 한반도에서 경험한 바로 모험을 삼가는 법을 배웠다. - P457

수카르노가 이끄는 인도네시아 민족주의자는 미국이 해방의 조력자로 나선 가운데 1949년 네덜란드에서 독립했다. 워싱턴이 네덜란드에 옛 식민지가 완전히 독립하도록 압력을 가한 이유는 수카르노가 확고한 반공주의자로 보였기때문이다. 1948년 수카르노 군대는 강력한 인도네시아공산당(PartaiKomunis Indonesia, PKI)과 짧은 내전을 벌여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하지만 수카르노가 전 세계의 반식민 투쟁에 더 큰 관심을 보이며 국내 경제 정책을 급진적으로 바꾸자, 인도네시아는 미국이 총애하는 대상에서 떨어져 나갔다. - P463

1960년대 중반에 그토록 많은 제3세계 지도자가 전복된 것은제3세계 운동 전체의 위기를 의미했다. 1965년 가을 알제에서 열리기로 예정된 아시아·아프리카회의가 무산된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 제3세계 이상이 외면되자, 베트남과 인도차이나에 접근하는 미국의 태도가 단호해졌다. - P467

미국에서 베트남의 진정한 비극은 그것이 양쪽이 모두 실패하는 촉매가 되었다는 것이다. 존슨이 바꾼 나라는 20세기 어느 때보다 국내에서 무엇을 이룰 수 있는 - P474

지에 관해 방향성을 잃고, 해외에서 벌어지는 사태에 어떻게 영향을미칠 수 있는지 확신하지 못하게 되었다.
베트남의 진정한 비극은 당연히 베트남 자체의 비극이다. 한반도처럼 베트남은 냉전으로 갈가리 찢어졌다. 베트남공산당의 잔인성과 발전 계획이 실패했기 때문이기도 했고, 미국의 점령과 폭격 때문이기도 했다. 한국과 차이가 있다면, 베트남은 베트남공산당이 민족주의 활동을 거의 독점하고, 남베트남 지도자들이 스스로 믿을 만한정부를 세울 능력이 없었다는 점이다. - P475

세계 냉전의 측면에서 보면, 미국의 인도차이나 개입은 소련이미국의 지배와 자본주의적 착취에 대한 보편적 대안으로, 다시 소련을 내세울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헝가리 봉기에서 베를린 장벽과콩고 위기에 이르기까지 소련은 뒤처지는 듯 보였다. 미국의 힘만이아니라 동유럽의 불만, 중국과 단절, 제3세계의 탄생으로 도전을 받은소련과 그 체계는 세계가 돌아가는 방식과 어긋난 것처럼 보였다. 베트남은 소련이 힘을 되찾을 기회를 주었다. 이런 회복이 소련의 힘보다는 남의 실패를 통해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이 시점에서 별로 중요한 이야기가 아니다. 냉전 시기에 자주 그랬듯이 양극의 측면에서 보면, 별로 다르지 않은 결과다. 미국의 손해는 소련의 이득으로 보였다. - P4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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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토요일에는 비가 내렸다.
얼마 전 산불로 피해가 막심하기도 했고 계속 건조한 날씨로 비가 좀 내려주었으면 했던 만큼 비가 그리 반가울 수가 없었다.

몇 달만에 도서관에 갔다. 작년 9월이었나 희망도서 예산이 소진되고 나서 올해 2월이 될 때까지도 희망도서 신청이 불가능한 상태여서 가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러다 간만에 팟캐스트를 듣다가 관련 책을 읽어보고 싶어져서 도서관에 있나 검색해보니 마침 있더라.

옆지기가 지방 갈 일이 생겨 가는 길에 도서관에 데려다주었다.
간 김에 읽고 있는 책과 관련한 책들이 있나 둘러보았다.
지금 읽고 있는 <냉전>을 쓴 저자의 다른 책이 있었고 동아시아 근현대통사 책도 있길래 관심이 가서 찜해놓았다.
다음에 갈 일이 있을 때 하나 둘씩 빌려보려 한다.
예전에는 몇 권씩 한꺼번에 빌리기도 했으나 이제는 여러 권 빌려봐야 못 읽고 반납하는 책이 생기는 것을 알기에 욕심을 안 부린다^^;

어느덧 봄이다.
일교차가 크기는 하지만 제법 꽃들을 즐길 수 있는 시기가 되었다.

어제는 비가 그치고 해가 난 뒤 미세먼지도 없는 쾌청한 날이었다.
그래서 볕을 쬐며 동네 근처를 산책했다.
돌아오는 길에 필라테스 체육관에 들러 가볍게 스트레칭을 하고 하체 기구 운동을 한 뒤 플랭크 몇 번 하고 돌아왔다.
살기 위해 시작한 운동이 이제 조금은 익숙해지게 된 것 같다.
아직 산책만큼 재미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운동하는 법을 알게 되었으니 나중에는 혼자라도 운동을 이어갈 수 있게 된 것은 다행이다.
물론 혼자 하려면 의지는 더 강해야겠지만!ㅎㅎ

지난 주에는 개나리, 매화, 왕벚꽃 등 올라온 꽃들을 찍기 위해 점심 시간을 피해 회사 근처를 쏘다녔다.
어제는 동네 근처에도 벚꽃이 제법 올라온 것을 보았다.
오늘 확인해보니 회사 근처에는 수, 목요일쯤 벚꽃이 만개하지 않을까 싶다.
바야흐로 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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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5-04-07 12: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주말 지나고 출근해보니 양재천에도 벚꽃이 다들 피었더라고요. 어서 빨리 벚꽃 길을 걷고 싶어 좀이 쑤십니다. 점심 시간에 좀 산책해야겠어요. 봄을 충분히 만끽합시다!

거리의화가 2025-04-09 08:53   좋아요 0 | URL
판교도 이제 벚꽃이 거의 만개했답니다. 이번주가 피크인 듯 해요! 주말에 또 비가 온다니 이후에는 꽃이 많이 떨어지겠죠ㅠㅠ 어제, 그제는 산책하는 사람이 정말 많더라구요. 오늘도 그럴 것 같습니다.
역시 봄이 최고에요!!!

희선 2025-04-11 0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꽃들이 이번주엔 많이 피었겠습니다 며칠 전에 꽃이 조금 피었는데, 하루 지나니까 활짝 피었더군요 그때 조금 추웠는데, 꽃은 별로 안 추웠나 봅니다 저만 바람이 차갑다 느끼는 걸지도...


희선

거리의화가 2025-04-12 17:44   좋아요 0 | URL
저도 추위를 많이 타서 여전히 밤에는 전기장판 이용하고 있고 출퇴근에는 썰렁해서 코트를 입고 있답니다^^;
벚꽃이 이번주 중반에 절정이었는데 바람이 많이 불어서 금요일쯤 되니 후두두 떨어지고 있더라구요. 그래도 여전히 남아 있는 벚꽃도 있기는 한데 오늘, 내일 지나면 비바람에 대부분 떨어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봄꽃은 정말이지 한순간에 사라지고 마네요.
이제 철쭉이 올라올테고 더 있으면 장미가 올라올테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