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티오키아는 산 중턱에서 오론테스강을 향해 펼쳐진 평지에 건설 - P133

된 도시다. 따라서 도시의 중심은 중앙이 아닌 북서쪽으로 치우쳐 있다. 다만 산을 끼고 있기 때문에 용수가 풍부했다. 그리고 성벽은 견고함 그 자체다. 산 위 가장 높은 곳에는 견고한 성채가 서 있다. 이런 성채는 일본 성의 천수각(天守閣)과 비슷하게, 시내가 적에게 점령당한후에도 방어하는 측이 끝까지 틀어박혀 싸울 수 있는 거점 역할을 한다. 그 외에는 성채가 없다. 이 사실은 안티오키아의 방어가 4백 개나되는 탑으로 중요 지점을 단단히 지키고 있는 성벽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 P134

우리가 신앙을 바치는 종교가 번영해야 할 곳은 바로 그것이 발현한 - P156

땅이라는 것이 우리의 확신이다. 이 소망을 실현하는 데는 기존의 국가도 군대도 필요하지 않다. 신도들의 신앙과 의지만이 그것을 실현할 수 있다.
그런 우리가 이곳 아시아 땅까지 찾아온 것은, 이슬람의 자비를 얻기 위해서도 아니고, 이슬람의 법을 따르기 위해서도 아니다.
더군다나 우리 그리스도교도는 칼리프 하킴 아래 일어났던 (90년 전의 이야기) 폭행을 잊지 않고 있다. 그때 예루살렘의 성묘교회가 파괴되었고, 그곳에서 참배하던 순례자들은 죽임을 당했다. 그 사건을 통해 우리는 배웠다. 성지는 그리스도교도가 지켜야 하고, 뿐만 아니라영유권을 갖고 지켜야 한다는 것을. - P157

메소포타미아와 시리아의 셀주크투르크 세력을 결집한 대군의 총사령관인 케르보가는, 이날 처음으로 십자군 전군을 목격한다.
제후들은 모두, 가문의 문장을 수놓은 각양각색의 깃발을 손에 든기수 옆에서 아침 해를 받으며, 둔중하게 빛나는 강철 갑옷으로 중무장한 차림으로 말을 타고 다가왔다. 그 뒤를 따르는 기사들도 강철 갑옷으로 무장하고 오른손에 큰 창을 들고 말을 탄 모습이다. 군량부족으로 말을 희생시켜야만 했던 많은 기사들은 보병으로 싸워야 했으나,
그들도 강철 갑옷과 긴 칼로 중무장했다. 십자군은 일반 보병들도 가슴을 가죽 흉갑으로 보호하고 있었다. 그리고 모두의 가슴에 붙은 하얀색 바탕에 붉은색 십자가 다채로운 무리를 통일시켜주었다. 투르크병사의 눈에 비친 십자군은 실제보다 훨씬 대군으로 보였다. - P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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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당시의 이슬람교도는, 투르크인이든 아랍인이든 이집트인이든, 어느 지역 출신이건 상관없이 서유럽 사람을 전부 ‘프랑크인‘이라고 불렀다. 또한 비잔틴제국의 백성인 그리스인은 ‘로마인‘이라 불렀다. 비잔틴제국이 공식적으로는 여전히 로마제국으로 칭해지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 ‘프랑크인‘이라는 호칭은 대충 정한 것으로 보여도 꽤 적확한 총칭이었다. 사실 유럽인들은 스스로를 ‘유럽인‘이라고 칭하지 않았다.
‘유럽‘이라는 개념조차 존재하지 않았고, 따라서 ‘유럽인‘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 P84

지금까지는 계속 길잡이라고만 쓰고 이름을 밝히지 않았는데, 제후들의 십자군이 소아시아를 답파할 때 길잡이 역할을 한 사람에게는어엿한 이름과 지위가 있었다. 이름은 타티키오스, 지위는 그리스군사령관 중 한 명. 즉 황제 직속의 가신이다. 이 타티키오스가 황제 알렉시우스의 뜻을 받들어 행동하리라는 것은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일이었다. - P104

예루살렘을 탈환한 뒤에도 그곳이 계속 그리스도교 도시로 유지되려면, 북쪽에 있는 안티오키아 역시 계속해서 그리스도교 쪽에 있어야한다. 그리고 이 안티오키아를 이슬람측의 반격으로부터 지켜내기 위해 북동쪽에 위치한 에데사까지 그리스도교 도시로 만들면 전략적으로 만전을 기하는 체제가 이루어진다. 더구나 그로 인한 이점은 즉각나타난다. 안티오키아를 공격할 때 십자군의 배후가 안전해질 수 있는 것이다. - P110

로마에서 열 수 없어서 대신 프랑스의 클레르몽에서 열린 공의회에서 우르바누스가 제창한 십자군이 실현되었을 뿐 아니라, 우르바누스의 제창에 호응한 제후들의 군대가 이제 실제로 오리엔트에 도착했다. 성도 예루살렘은 아직 해방되지 않았지만 서유럽이 모두 들고일어나 출발한 그리스도교도 군대가그들의 성지인 시리아와 팔레스티나에 도착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서유럽의 그리스도교 세계가 받은 충격은 컸다. 이것은 모두 우르바누스 2세의 호소에서 시작된 일이었다. - P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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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 그리스인은 자신들이 라틴인이라 부르던 유럽인을 문명이뒤떨어졌다며 멸시했다. 하지만 라틴인들 역시 십자군 원정을 통해그들과 접촉하는 일이 잦아짐에 따라 그리스인을 혐오하게 된다. 그 - P61

시작이 은자 피에르의 십자군에 대한 그리스인들의 태도였다. 어쨌든형식적으로는 친절한 배웅을 받고 떠난 민중 십자군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발칸 지역에서 만났던 것처럼 공포에 떠는 그리스도교가아니라, 이슬람 세계에서도 용맹하기로 소문난 셀주크투르크의 병사들이었다. - P62

공작 고드프루아가 도착하기 전에, 황제 알렉시우스는 이미 일이 그가 기대하고 있던 것과는 다른 형국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노르만족이 정복한 영국에서 도망쳐온 색슨족을 용병으로 쓰는것과는 전혀 다른 문제라는 것을.
그러나 황제 알렉시우스는 작전을 바꾸지 않았다. 비잔틴제국 황제에게 충성을 서약하도록 한 것이다.
제후들이 오리엔트 땅에서 하려는 군사 행동에 대해서는 찬동한다.
오리엔트에 자신들과 같은 강력한 그리스도교도의 나라가 생기는 것도 찬성했는데, 그것은 이슬람 세계와 비잔틴제국 사이의 완충지대가되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그에 대한 지원은 약속하지만, 그 대신 제후들은 비잔틴제국 황제에게 절대적으로 충성을 맹세해야 한다고 한 것이다.
이렇게 되면 제후의 신분은 비잔틴제국 황제의 신하가 된다. 그렇다면 나중에 제후들이 그들의 군사력으로 정복한 땅의 모든 최고영유권도 자연스럽게 황제에게 돌아가게 되는 것이었다. - P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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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카노사 성은 이탈리아 중부에 광대한 영지를 갖고 있으며 개혁파의지지자로 알려진 마틸데 백작부인이 거처하는 곳이었다. 그 성안, 큼직한 난로에서 불이 기세 좋게 타오르는 따뜻한 거실에서 승리감을만끽하는 쉰일곱 살의 교황. 한편 성 안에 있는 사람들이 내려다보는가운데, 눈 속에 홀로 서 있는 스물일곱 살의 황제.
‘카노사의 굴욕‘은 서유럽 전역의 그리스도교도에게 교황의 권위와권력을 일깨운 일대 사건이 되었다. 파문은 풀렸으나 교황의 완승으로 끝났기 때문이다. - P15

"이것은 내가 명하는 것이 아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가 명하는 것이다. 그 땅으로 가서 이교도와 싸워라. 설사 그곳에서 목숨을 잃는다해도 너희의 죄를 완전히 용서받게 될 것이다. 신께 부여받은 권한으로,
나는 여기서 그것을 분명히 약속한다.
어제까지 도적이었던 자가 그리스도 전사가 되고, 형제나 친지와 다투던 자가 이교도와의 정당한 싸움터에서 그 분노와 원한을 풀 날이온 것이다. 지금까지는 푼돈을 받고 하찮은 일을 하며 세월을 보내던자도, 이제부터는 신이 바라시는 사업에 참가하여 영원한 보수를 받게될 것이다." - P24

그 시대의 공작, 후작, 백작, 남작이란, 자기 힘으로 획득하고 자기힘으로 유지하는 영지의 주인이고, 그것을 위해 없어서는 안 될 군사력으로, 핏줄로 이어진 일족 무리를 이끄는 우두머리였다.
역사에서는 ‘귀족‘이라고 쓰지만 실상은 ‘호족‘이자 ‘부족‘이며, 스코틀랜드로 치면 ‘일가‘라는 뜻의 ‘클랜(Clan)‘이었던 것이다. 그 증거로 그들 모두 유래가 있는 문장(章)을 가지고, 행군할 때는 그것을그려넣은 깃발을 앞세웠으며, 전장에서는 그 각양각색의 깃발 아래 분 - P50

투하게 된다.
교황 우르바누스가 십자군 전사는 누구나 가슴이나 등에 붉은 십자를 달라고 한 것도, 가지각색의 표시를 방치하게 되면 십자군으로서의통일성을 기할 수 없고, 그렇다고 그 문장들을 모두 없애는 것도 비현실적이니 최소한 붉은 십자 표시로 통일성을 기하자는 의도도 있었다. 군웅할거 시대에 이러한 ‘영웅‘들을 하나의 목적을 위해 내보내는것은, 서유럽 그리스도교도의 최고 우두머리이기도 한 로마 교황에게도 간단한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공작이나 백작으로 호칭되지만 실상은 ‘클랜의 우두머리였기 때문에, 우두머리가 십자군 원정이라는 모험에 나서겠다고 결정한이상 일족 무리는 그에 따라야 했다. 이것이 당시 남자들에게는 당연한 삶의 방식이었다. - P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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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떠나며 - 1945년 패전을 맞은 일본인들의 최후
이연식 지음 / 역사비평사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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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번 이곳에서 언급했듯 나는 해방 전후 조선의 역사에 대하여 관심이 많은 편이다. 그동안 관련 책들을 읽어오면서 느끼는 것은 ‘이런 일이 있었다니(고?).’ 공부했다고 생각했지만 새롭게 알게 되는 이야기를 마주할 때마다 매번 놀라움을 느낀다. 동시에 여전히 숨어 있는 이야기들이 얼마나 많을까 느끼게도 한다. 


저자는 해방 전후 한반도에 있다가 일본으로 귀환한 자, 해외에 동원되었거나 해외에 거류하다가 한반도로 돌아온 자들에 대하여 주로 연구를 진행해왔다. 현재 일본 소피아 대학에서 일본인이나 외국인(유럽인)을 상대로 역사를 가르치고 있다고 한다. 

우연히 어떤 계기로 작년에 저자의 또 다른 책이 번역되어 출간되었다는 일을 알게 되었다. 최근 출간된 저작은 이번에 내가 읽은 이 책의 후속 시리즈 성격을 지닌 책이라고 볼 수 있다. 지난 해에 나온 책은 도서관에 희망도서로 신청해두고 전 시리즈인 이 책부터 먼저 읽어보기로 했다.


해방 후의 역사는 주로 한반도의 공간에서 벌어진 일들에 집중되어 있다. 예를 들어 해외에 있던 독립운동가의 귀환(임정 등), 일제의 시스템을 답습한 미군정(쌀 파동 등), 미소대립, 이후 국내 정치 세력의 분열, 남한 단독 정부의 수립에 이르기까지 흘러간다. 다양한 저작이 나오면서 이를 보충해주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국내 공간에 집중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이 책은 해방 후 일본인들이 조선 땅을 떠날 때의 모습이 어떠했는지, 일본에 정착해서는 어떠했는지를 통해 한일 양 민족의 ‘헤어짐’의 방식과 인간 군상의 모습을 일본인들의 회고를 통해 재구성한다(P5). 


짐작할 수 있겠지만 일본인들의 모습은 하나가 아니었다. 여러 사건과 다양한 계급의 일본인들의 목소리를 통해 듣는 에피소드는 해방 정국의 혼란을 좀 더 입체적으로 바라보게 한다. 


일본이 패전하자 조선총독부는 본토에 긴급 타전을 했으나 일본인들의 귀환을 가능한 최대한 미루라 지시받는다. 이는 일본 국내 사정이 좋지 않은 상황에서 한꺼번에 밀려들 귀환자들에 대한 우려 때문이었다. 이에 조선총독부는 조선인 정치 세력과 타협을 통해 일본인을 보호하려는 고육책을 펼친다. 일본인들은 은행이 파산할 것을 우려하였고 이에 전국적으로 외화를 반출하려 하면서 대량인출사태가 벌어진다. 이 와중에 이를 이용한 환전상들이 수혜자가 되었다. 일본인들은 갖고 있던 물건을 처분하기 위해 각 지역에 있던 세화회를 통했다. 세화회는 조선총독부가 식민기구와 조선군이 무력화될 경우에 대비하여 미군 진주 후에도 귀환 원호 사업의 연속성을 확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만들어진 민간 조직으로 1945년 8~9월에 걸쳐 전국에 37개의 세화회가 결성되었다고 한다.

 이중 경성일본인세화회는 남한의 일본인들이 1946년 초 대부분 돌아간 뒤에도 미군정의 허가를 받아 체류하며 북한 지역에서 남하한 일본인들의 원호까지 담당한 곳이었다. 이곳의 임원진은 거의 구 총독부 관료 출신이 많았다고 한다. 세화회는 조선에 잔류하는 일본인과 본토로 돌아가는 일본인 중 잔류를 희망하는 쪽에 있던 일본인들을 지원하기 위한 목적이 컸다.


일본인들은 송환선을 타고 본토로 귀환해야 했다. 미군정은 1945년 9월 23일 민간인 송환 업무 창구를 외사과로 통일하고, 일본인 송환 원호를 위해 설치한 종전사무처리본부와 일본인세화회를 통해 이를 관할, 감독하게 하였다. 송환 순서는 현역 일본군->휴가 중이거나 제대한 군인과 가족->구 일본 경찰 등 바람직하지 않은 자->신관->일본인 광산노동자->일반 민간인 중 원호 대상자->일반 민간인->고위 공직자와 회사 간부->교통 및 통신 요원 순으로 발표했다. 미군정은 이처럼 차등을 두어 귀환 절차를 진행한데다가 일본인 재산 반출에 제한 조치까지 더하면서 혼란을 키운다. 떠나려는 사람들은 많은데 배 공급이 부족해지자 밀수배가 성행할 수밖에 없었다. 일례로 조선의 수산왕으로 유명했던 기시이 겐타로는 밀수선을 타고 도망치려다 붙잡히기도 했다. 일부 기업가들은 회사 자금을 횡령한 뒤 미군정의 허술한 관리를 이용해 조선인 브로커를 끼고 몰래 반출하는 경우도 있었다. 


북한은 남한과는 다른 형태가 전개되었다. 주택 매수 조치로 북한의 일본인과 민간인은 사실상 연금 상태에 놓인다. 그리고 이미 일본인들에 의해 산업 시설이 파괴된 상태에서 소련군이 자원을 반출하면서 북한 지역 사람들은 이중고를 겪었다고 한다. 소련군은 일본인을 고급 노동력으로 보아 이들을 귀환시키려하지 않았다. 살던 집에서 강제로 쫓겨난 일본인들은 귀환 전까지 집단공동생활을 해야만 했다. 이와중에도 북한에 살던 일본인의 사정은 그나마 나았으나 만주에서 온 피난민, 전란을 피해 이동해온 일본인은 환경이 훨씬 열악했다(여기에서도 계급이 나뉘어진 것이다). 1946년 봄이 되면 일본에 귀환하지 못한 이들의 상당수가 집단 남하를 한다(소련의 묵인, 조선인 사회의 요구 등에 의해). 


이처럼 우여곡절 끝에 일본인들은 본토로 돌아갔으나 정착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귀환한 일본인 남성은 일자리를 찾지 못해 무력감에 빠졌고 여성은 순결을 의심받으며 색안경의 대상이 되어야 했다. 이들은 귀환자라는 낙인이 찍혔고 일부는 범죄자 취급을 받기도 했다. 

일본 정부는 귀환자들과 전재민과 소개민 등 본토의 전쟁 피해자들을 넓은 범위의 피해자로 뭉뚱그리며 이들의 요구를 적당히 무마하는 선에서 전후 보상을 최소화하고자 했다. 이들은 엄연히 다른 집단이었던만큼 각기 다른 처우가 필요했으나 그러지 못했고 지원 금액도 턱없이 작았다. 시간을 끌면서 해외 귀환자들의 교부금은 사후에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이는 1980년대 이후 일본 정부가 구 식민지 출신의 피해자가 제기하는 소송에 대해서 ‘개인 청구권의 부인’, ‘시효 지남’ 등의 이유를 들게 되는 나쁜 선례가 되었다.


<요코 이야기>가 이 책에서도 언급된다. 한국에서 이 책이 알려지고 난 뒤 적지 않은 파장을 일으켰고 여러 권의 책에서 소개되기도 했다. 그러나 저자는 1940년대 말부터 <요코 이야기>의 저자와 같은 개인 체험이나 수기가 많았다고 전해준다(하긴 왜 아니 그랬겠는가. 다만 알려지지 않았을 따름이다). 대표작으로 후지와라 데이의 <흐르는 별은 살아 있다>를 언급한다. 그 책은 북한 지역에서 돌아간 여성의 체험을 다루고 있다. 이후 이를 대표하는 저작들은 대개 이 책과 비슷한 귀환 여정을 담으며 선례가 된다. 

문제는 수기가 일본인들을 피해의 맥락으로만 파악하게 하면서 역사적 진실과 함의는 놓치게 하고 식민지 지배 시기 가한 행위에 대한 문제는 등한시하게 한다는 데 있다. 이는 <요코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이런 체험 수기가 있는 반면 또 다른 유형의 체험 수기가 있었다. 주인공인 이소가야는 1907년 일본 시즈오카에서 태어나 1928년 함경남도 나남의 보병연대에 보충병으로 입대한 뒤 1930년대 조선의 노동운동가들을 만나 노동운동에 뛰어들었다고 한다. 1945년 이후에는 일본인 문제에 대해서 적극 나섰고 일본에 돌아간 뒤에도 조선의 사정에 대해 계속 궁금해했으며 이것이 한반도의 동향에 관한 책을 집필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패전과 해방 국면에서 북한 당국과 소련 점령군, 재류 일본인 사이 가교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이는 어떠한 체험을 하느냐가 개인의 생각과 행동을 결정하는데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북한의 역사적 비극(한국전쟁)을 지켜보면서 대다수의 일본인은 자신들이 입은 고난을 군국주의 일본의 무모한 전쟁 행위에 따른 결과로 간주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전에 조선 민족에 대한 일본의 반세기에 걸친 박해의 역사가 있었다는 것을 일본인은 얼마나 반성했을까. 그저 자신들이 조우했던 고난에만 매몰되거나, 혹은 조선 민족을 가해자로 생각하고 이들을 미워하며 조선을 떠나지는 않았는지… - P265

양국간 잠재해 있으면서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는 가해와 피해 의식에 대해서 다시 한번 곱씹게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역사의 빈 자리를 채워주는 이런 책들이 더욱 많이 나와주면 좋겠다. 이제라도 이 책을 읽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후에 도서관에 희망도서가 도착하는 대로 후속 책을 읽어볼 요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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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은빛 2025-04-14 1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 책과 작년에 역비에서 낸 책 모두 읽어봐야겠네요. 알려주셔서 고맙습니다!

거리의화가 2025-04-15 08:27   좋아요 0 | URL
길잡이가 된 것 같아 기쁘네요. 모쪼록 도움이 되셨기를 바랍니다^^

희선 2025-04-14 2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본에서 한국으로 돌아온 사람도 살기 어려웠겠지만, 조선에서 일본으로 돌아가는 것도 쉽지 않았을 것 같네요 돌아가도 사는 게 쉽지 않았군요 자신이 힘들 때여도 다른 걸 생각하는 사람은 대단한 거겠습니다 그런 거 쉽지 않을 듯합니다 그런 사람이 아주 없지는 않았겠지요


희선

거리의화가 2025-04-15 09:16   좋아요 1 | URL
해방 후 한반도 내 정치와 사회상에 주로 집중된 서술의 책이 대부분이죠. 저자가 부모님의 일 때문에 이동하는 삶을 살았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내부인의 시선이 아니라 이동하는 자, 경계인의 시선에서 사건을 다르게 바라보려고 한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