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장류, 사이보그 그리고 여자 - 자연의 재발명 Philos Feminism 4
도나 J. 해러웨이 지음, 황희선.임옥희 옮김 / arte(아르테) / 2023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더 이상 이분법적 사고가 통할 수 없는 세상이 된 지금 도나 헤러웨이의 혜안은 미래로 갈수록 탁월함을 느끼게 한다. ‘경계‘는 불안을 뜻하기도 하지만 변화와 새로움을 모색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사유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그녀의 철학을 이번에야말로 섭렵하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역사저널 그날 고려 편 4 - 충렬왕에서 최영까지 역사저널 그날 고려 편 4
KBS 역사저널 그날 제작팀 지음, 이익주 감수 / 민음사 / 2019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드디어 시리즈의 마지막 편까지 왔다. 공부를 할수록 고려의 역사가 더 좋아지고 궁금해진다. 고려의 역사에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가지셨으면 좋겠는데 이런 쉽고도 알찬 교양서를 통해서 공부한다면 쉽고도 재미있게 공부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지난 권 마지막에 삼별초의 항쟁이 끝나고 강화도에 있던 조정이 개경으로 환도하면서 이제 명실상부 몽골의 내정 간섭이 시작되었다. 
 
원종에 이어 즉위한 충렬왕은 쿠틀륵케미시(제국대장 공주)와 혼인(제국대왕 공주와 충렬왕의 관계는 딱히 좋지는 않았음)하면서 부마 지위를 활용해 외교적 이익을 추구했다. 1278년 몽골에 가서 쿠빌라이 칸을 만나 몽골의 다루가치 배치와 호구조사 요구를 철회하게 하는데 성공했다. 몽골이 고려에 항복을 받아들이게 하면서 요구한 ‘6사‘의 내용 중 고려가 결코 들어줄 수 없는 두 가지 사항들이었는데 이때야 비로소 받아들여진 것이다. 또 이 때 고려에 주둔한 몽골군이 철수하면서 몽골 관리나 군대가 상주하지 않게 되었다. 이로서 고려 국왕의 지위는 부정되지 않았으며 고려 독립국의 위치를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매사냥을 하는 응방의 인물을 측근들에게 맡기는 등 자기가 신임하는 사람들 위주로 정치를 행하면서 왕권을 강화하려고 함으로써 한계를 보인다.

충선왕은 충렬왕이 죽지 않은 상태에서 왕위를 양위받는다. 그는 쿠빌라이의 외손자이기도 했고 계국대장 공주와 혼인하여 몽골의 부마가 되면서 왕위 경쟁에서 유리했다. 충렬왕은 제국대장공주와 혼인하였으나 그녀는 쿠빌라이 칸의 정비 소생이 아니였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힘이 약했다. 쿠빌라이 칸이 죽고 후계를 정할 때 충렬왕이 원 성종을 지지하지 않으면서 왕위에서 물러나게 된다. 아버지의 측근 정치를 보고 못마땅했던 충렬왕의 측근세력을 제거하려다 오히려 원의 의심을 샀고 계국대장공주와 불화가 생기자 8개월만에 자리에서 물러나게 된다. 원나라 성종이 죽고 인종과 무종 간에 대결이 펼쳐졌는데 줄을 잘 선 충선왕은 원의 실력자로 등극한다. 이후 그는 고려 인사 행정 관제를 바로잡고 공이 있는 자를 포상하고 백성 착취를 금지하는 등 개혁 정책을 펼쳐 나갔다. 하지만 그는 즉위 후 3개월만에 원에 가서 고려에 돌아오지 않았다. 아버지 같은 측근정치를 하지 않기를 원했지만 결국 이전의 측근정치를 반복하는 결과를 낳을 수밖에 없었다(고려 내에서 직접 개혁을 했다면 나았겠지).

기황후는 몽골에 끌려간 공녀가 뛰어난 정치력으로 황후에 자리까지 오르면서 큰 권력을 가졌던 인물이다. 이 무렵 원나라와 고려 내 왜구 출몰이 잦아지자 원 조정은 공민왕을 세워 해결하려 한다. 공민왕은 핵심 부원 세력이었던 기황후 세력을 몰아내고 신돈을 기용해 개혁 정치를 펼쳐 나가는데 원나라의 힘이 약해지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정동행송 이문소를 폐지하고 쌍성총관부를 수복하였으며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하여 권문세력이 불법소지한 토지와 노비를 토해내게 하여 국가 재정을 확충하고 권문 세력을 몰아냈다. 또 과거 제도를 개혁함으로써 기존의 유학자들의 계파 정치의 연결고리를 끊음으로써 새로운 인물을 발탁하는 일이 가능해졌다. 신돈이 사적 권력을 지나치게 휘두르자 공민왕도 그를 경계하며 내치게 된다. 중국은 원나라에서 명나라로 교체되었고 공민왕은 명나라에 책봉됨으로써 친정 정치를 행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었다.

이인임은 대표 권문세족으로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던 사람이다. 그는 개혁 세력인 신진사대부들을 내치고 개혁 이전으로 흐름을 돌리기 위해 최영과 결탁하였다. 명 사신이 피살되는 일이 발생하자 이인임은 원과 끊어져 있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북원에 사신 영접을 추진한다. 그로서는 명, 원과 둘 다 관계를 가짐으로써 균형을 맞추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인임의 고단수 정치력은 여기서 발휘되는데 대표적인 신진사대부였던 정도전을 북원 사신으로 보내려고 한다. 정도전이 이를 받아들일리가 없었고 이 일로 정도전은 나주로 유배를 가게 된다(나주 현장에서 백성들의 참상을 보면서 그는 개혁 의지를 일으키게 되었다). 이인임은 정도전 뿐 아니라 이 때 신진사대부들을 모조리 싹쓸이함으로써 개혁 동력을 끊고자 했다. 그러나 이인임의 계속되는 국정 농단 때문에 최영과의 연립 의지는 끊어진다. 이인임이 이 때 개혁 세력들을 잘 보듬고 건강하게 끌어갔다면 고려는 더 이어졌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의 권력욕과 탐욕은 그들에게 내어줄 의지가 없었다.

14세기 말 왜구가 침공하자 고려는 전국에 계엄령을 내린다. 이 때 일본은 남과 북으로 나뉘어 전쟁을 벌이고 있었던 만큼 정치적으로 혼란스러웠고 중국은 원-명 교체였기 때문에 정세가 불안정했다. 왜구의 출몰이 심각했던 배경에는 이런 이유가 있었다.
최영이 홍산에서 왜구를 막아내고 이성계는 황산에서 왜구를 막아냈다. 1389년에는 조선과 왜구 사이에 다리 역할을 하던 쓰시마를 정벌한다. 일본이 남북조를 통일하자 내부가 안정되었고 원-명이 교체되고 명이 해금 정책을 펼치면서 왜구는 자연스레 줄어들게 되었다.

최영은 이성계와 손을 잡고 이인임을 비롯한 권문 세족(구 귀족 세력)을 제거한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최영과 이성계는 위화도 회군 사건으로 갈린다. 명이 고려에 철령 이북 땅을 요구하자 최영은 요동 정벌을 주장했고 이성계는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반대했다. 이성계가 돌아온 뒤 최영은 체포되고 명이 철령 이북 땅을 포기함으로써 최영은 고려의 마지막 무신으로 남았고 이성계는 고려의 무신이자 조선의 개국 왕으로 변모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물론 이 때 당시에는 새 왕조를 열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최영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마지막 이야기는 조선과 이어져서 대중들도 잘 아는 역사가 아닐 수 없다. 아이러니하게도 고려 말의 역사는 조선의 건국 역사와 맞물려 있기 때문에 더 자주 다루어져서 잘 알게 된 측면도 있는 것 같다.

역사저널 그날 고려 편은 패널에 신병주 선생님이 참여함으로 인해 고려의 역사를 조선의 역사와 비교하여 설명해주면서 더 쏙쏙 이해되는 측면이 있었다. 책을 읽기 전 역사저널 그날 고려편을 보아도 좋고 후에 복습 겸으로 해서 보아도 도움이 될 것 같다. 책을 다 읽고 나니 고려 편을 복습해보고 싶은 생각이 절로 일었다.

아쉬운 점은 역사저널 시리즈로 조선은 총 8권의 분량이었는데 고려는 4권의 분량이어서 상대적으로 짧았다는 점이다. 아무래도 방송 분량 자체가 조선보다 훨씬 짧았기 때문일 것이다. 11월에 드라마 방영도 있는 만큼 고려의 역사를 더 다루는 기획 시리즈가 있으면 좋겠다. 고려의 역사는 여전히 부분적으로 가려져 있어 메워야 할 역사가 많다. 앞으로 더욱 많은 자료가 발굴되고 이를 바탕으로 역사들이 보충되길 기원한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희선 2023-10-15 02: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잘 모르지만 아는 이름이 보이기도 하는군요 고려 시대 일어난 일은 잘 모르고 이름만 기억하는 것 같기도 하네요 고려에서 조선으로 이어지는... 조선은 기록을 잘해서 더 많이 알기도 하겠습니다 고려 때 왕권이 약해서 조선이 되고는 왕권을 강화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네요


희선

거리의화가 2023-10-15 16:08   좋아요 1 | URL
조선으로 넘어가기 전 역사는 의외로 많이 드라마에서 다루기도 했고 알려진 게 많아서인지 익숙한 면이 있습니다. 아마도 공민왕 때부터인 것 같아요. 조선은 자료도 많이 남아 있어서 더 매체에서 다루기 쉬운 것이겠죠^^
 



[ Ch 22 ] Sparta and Athens


Life In Sparta

그리스는 전제군주정인 페르시아와는 완전히 다른 형태의 국가였다. 유일신이 아닌 다신교를 믿었으며 폴리스(책에서는 city를 썼지만 도시라는 의미는 아니라서)마다 군대를 각자 소유했고 삶의 방식이 달랐다.

그리스 폴리스 중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가장 규모가 컸는데 둘은 완전히 삶의 방식이 달랐다. 

스파르타인 남성은 군인으로 키워졌는데 7살이 되면 캠프에 가서 fighter로 훈련을 받게 된다. 그들은 강한 몸을 유지하는 것이 목표였던 만큼 거칠면서도 과묵하도록 강요받았다. 사례로 든 것이 너무 끔찍(어떤 병사가 여우를 훔쳐 먹으려다가 다른 사람이 와서 뺏길까봐 옷 안에 숨겼다. 그는 여우에게 뜯기기 시작하고… 다른 사람이 떠날 때에는 여우가 그의 위까지 먹어치웠다는…-_-) 20살이 되면 시험을 받아 통과해야만 군대에 입대할 수 있는 허가가 주어졌고 통과 못하면 투표도 못하는 신세가 된다. 

여성은 스파르타 군인들을 키우기 위한 어머니로 키워진다. 그에 관한 유명한 문장이 있다. 어머니가 아들이 전투에 나가면서 하는 말. “Either win the battle, or come back dead!”


Life in Athens

아테네는 민주정이여서 어떤 일이든 주민들이 forum에서 만나 의견을 투표하여 사안이 결정되었다. 아테네 남성들은 읽고 쓰는 것에서 나아가 수학, 시, 음악 연주(플루트/리라) 등의 교육을 배웠다. 아테네 여성들은 좋은(?) 아내 되기의 역할을 맡아 바느질, 정원 가꾸기, 아이 돌보기, 노예 관리 등 집안일을 행했다. 플라톤은 무지한 이들은 언제나 폭군들에게 순종해야 하는 법이라고 이야기했다고.



[ Ch 23 ] The Greek Gods


The Golden Apple

제우스가 많이도 무료했나보다. 어느날 올림푸스에서 그리스를 내려다보다가 “지구엔 사람이 너무 많아. 좀 쳐내야겠어.”라고 말한다. “세상에서 가장 예쁜 이에게 사과를 주겠다” 한 뒤 (일부러) 헤라 앞에 사과를 떨어뜨린다. “내가 가장 아름답지.” 그러나 아프로디테는 동의하지 않았고 “사과는 내 차지예요.” 아테나도 동의하지 않고 “이건 분명 내 거예요.”한다. 제우스는 트로이의 왕자인 파리스에게 셋 중 한 명을 고르게 한다. 헤라는 “나는 세상에서 당신에게 가장 큰 권력을 주겠어요.” 한다. 아테나는 “날 선택한다면 어떤 전쟁에서도 승리하게 만들도록 하죠.” 한다. 아프로디테는 “날 선택한다면 지구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를 당신에게 바치죠.”한다. 승자는? 아프로디테였다. 무슨 ‘픽 미 픽 미 픽 미 업’도 아니고ㅋㅋㅋ 아프로디테는 헬렌을 그에게 주지만 하필 그는 트로이 메델라오스의 아내였고 이 때문에 트로이 전쟁이 발생했고 트로이 편에 선 신들 vs 아테네 편에 선 신들이 나뉘며 수년 간 전쟁은 지속되었다는 이야기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역사저널 그날 고려 편 3 - 만적에서 배중손까지 역사저널 그날 고려 편 3
KBS 역사저널 그날 제작팀 지음, 이익주 감수 / 민음사 / 2019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개인적으로 ’민‘의 힘을 믿는 편이다. 우리 역사상으로도 ’민‘은 많은 역할을 해왔고 때로는 주도적인 힘으로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어왔다.
3권은 특히나 민의 힘이 돋보이는 주제들이 많아서인지 지금 나라 꼴이 엉망이어서이기도 하지만 힘이 되는 이야기가 아닐 수 없었다. ’주제 파악 좀 하시지.‘라는 말을 우리는 많이 듣고 산다. 그런데 주제 파악을 한다는 것은 그만큼 자신의 계급이나 신분을 뛰어넘는다는 것이 그만큼 어려운 것임을 방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어쩌면 모든 것을 잃어버릴지 모르는데도 불구하고 박차고 일어난 ’민‘들을 생각하면 전율이 인다. 그 세세한 이름들을 알 수 없어 더욱 그렇다.

3권은 민란을 일으킨 주인공들을 다루며 시작한다. 먼저 만적은 최충헌의 노비임에도 불구하고 그 이름이 잘 알려져 있다. 왜일까? 고려사에서 ‘만적의 난‘ 사건은 최초의 신분해방운동의 성격을 가진다. 그는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나.˝를 주장하며 신분해방을 꿈꿨다. 하물며 주인인 최충헌이 무신시기 집권자인 상태에서 말이다. 물론 그 전에 이의민이 소금장수 출신의 천민으로 무신 집권자가 된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입장에서는 본보기가 있다 여겼을지도 모르겠다. 삼국 시대에도 신분 차별에 대한 불만을 표시하며 봉기가 일어난 경우가 있지만 만적은 신분 해방을 꿈꿨다는 측면에서 그 경우가 달랐다.
공주에서는 망이, 망소이의 난이 일어났다. 당시 공주는 ‘부곡‘에 속하던 곳이었는데 이곳은 ‘향‘과 마찬가지로 농산물을 생산했다(‘소‘는 수공업품이나 광물, 수산물을 생산). 고려 시대 지방 체계는 주현-군현-향소부곡 구조로 주현만 지방관이 직접 파견되는 형태였다. 처음 교과서에서 향소부곡을 배울 때 잘못 배웠는지(그 이후에 바뀐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곳에 사는 이들이 천민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오해였다. 고려 시대에 천민은 국역을 지지 않으면 천민이고 나머지는 다 양인이다. 향소부곡도 국역을 지기 때문에 당연히 양인이다. 다만 주현이나 군현의 주민들보다 조금 천한 일을 하는 것 뿐이다. 이번 기회에 향소부곡민이 양인이라는 것을 재확인하고 넘어간다.

최충헌 집권 시기는 길었던 만큼 자기 손으로 두 명의 국왕을 폐위시키고 두 명의 국왕을 옹립시켜서 결과적으로 여러 임금을 모셨다. 앞서 2권 후기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최충헌은 개인에 대한 권력욕과 탐욕이 많았던 인물이었던 만큼 왜 스스로가 왕이 될 생각은 하지 않았을까 궁금했을 수 있다. 그래도 하극상은 있어서는 안 된다고 여겨서일 수도 있겠지만 민심의 눈치를 살폈던 이유가 아무래도 더 클 것 같다(생각은 했지만 감행을 안 한 것일지 모르나 이것은 기록에도 없고 추측일 뿐이다).
최충헌의 권력이 끝모르게 비대해지자 희종은 그의 권력을 견제하기 위해 암살을 시도한다(최충헌은 이를 비롯하여 여러 차례 암살 시도를 받았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암살은 실패했고 희종은 유배길에 오른다. 그런데 이후에도 희종은 최충헌에 대한 견제를 멈추지 않았고 최충헌은 결국 희종을 폐위시키고 강화도에서 명종의 맏아들인 왕숙을 데려와 강종으로 옹립시키게 된다. 앞선 의종은 망나니였다고 쳐도 희종의 암살 시도가 성공했다면 어땠을까. 아들인 최우가 있었다지만 아버지가 살해당한 만큼 최씨 집권이 더 이어지지 않았을지 모른다. 어쩌면 무신 정권 자체가 종료되었을수도 있지 않을까.

몽골은 앞선 거란과 여진의 침입과 다르게 고려에 큰 피해와 영향을 주었다. 그렇지만 몽골이 침입한 국가엔 흔적 하나 남지 않았다는 역사를 보면 고려는 왕조를 지켜냈고 얻을 것은 얻어내는 모습을 보여주었으니 후손으로서 감사하면서도 뿌듯함을 느끼게 한다.

몽골군은 고려 땅에 언제 들어오게 되었을까. 1218년 12월 거란이 침입했을 때 거란군을 따라 몽골군이 떠밀려 내려온 것이 그 시작이었다. 몽골군도 처음에는 형제 관계를 요구하였으나 앞선 거란과 여진과 달리 지나친 공물과 보상을 요구하면서 고려에 부담을 주게 되었다. 어느 날 몽골 사신인 제구예가 들어왔다 피살되자 양국 교류는 단절된다. 범인은 고려일 수도 있고 몽골(의 자작극)일 수도 있고 동북쪽에 있던 동진이라는 나라일 수도 있지만 어디까지나 추정 세력일 뿐이고 정확하지는 않다. 어쨌든 몽골군의 1차 침입의 명분은 이 사건(이라고 주장) 때문에 발생한다. 1차 침입(1231.9) 때는 귀주성에서 큰 전투가 있었다. 여기서 정주 지방의 장군을 맡고 있던 김경손이 불과 12명의 군사를 데리고 성문을 나와 몽골군을 기습 공격하면서 긴장시킨 덕분에 무려 4개월 동안 성을 지키며 전투를 이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고종은 더는 전투를 이어가는 것은 피해를 키우는 일이라 보았기 때문에 지휘관인 박서에게 항복을 종용하면서 몽골과 화친(1232.1)을 맺게 된다.

1232년 7월 최씨 정권이 강화도로 천도하면서 40여년 가까운 강화도 시대가 시작된다. 최씨 조정은 강화도에 있었으나 와중에도 산성이나 섬으로 대피하는 방식으로 몽골군과의 전투는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산성에는 산성방호별감이라는 관리자를 파견하여 수령을 지휘하게 하고 백성을 위한 구휼 사업도 하였다. 문제는 강화도 최씨 정권의 탐욕이다. 병사들과 백성들은 전투로 다치거나 죽어가고 있는데 그들은 세금으로 연회를 열고 펑펑 놀았다고 한다. 예나 지금이나 왜 집권자들이 되면 이리 엉망이 되는지 모르겠다. 인간의 욕심이 결국 발현되는 것이겠지.
1232년 8월 몽골이 2차 침입을 단행하자 처인성(지금의 용인)에서 전투가 벌어진다. 승려인 김윤후가 주연급 활약을 하였는데 그는 백성들의 참여를 이끌어내면서 전투를 승리로 만들었기 때문에 더 값지다고 생각한다(처인은 원래 부곡이었으나 주현으로 2단계나 승격되었다). 기억해야 할 인물이 있다면 홍복원인데 그는 몽골에 귀부해 관리가 되고 세력을 얻어 이후 몽골 침입 때마다 길잡이 노릇을 한다. 고려판 앞잡이로 보면 되겠다. 사람의 선택은 한 순간이지만 역사에 어떻게 이름을 남기는가는 그조차도 몰랐을 것이다.
몽골의 3차 침입은 1235년에 시작해서 무려 5년 간 이어졌고 경상, 전라 지역까지 몽골군이 밀고 내려오면서 문화재까지 소실되는 등 피해가 극심했다. 1241년 우구데이 칸이 사망하고 1246년 구육 칸이 즉위하면서 몽골 내정이 혼란했기 때문에 전쟁은 잠시 멈추어졌으나 다시 1247년 4차 침입이 이어지고 1248년 구육 칸이 사망하여 다시 휴지기를 갖다가 1253년에 5차 침입이 이어진다. 5차 침입 때는 몽골이 철저히 준비를 하고 나와 공성 무기와 발화 무기를 사용하여 방어에 주력하던 고려군이 힘에 부칠 수 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충주성 전투에서는 2차 침입 때 처인성 전투에서 활약한 김윤후가 다시 백성들을 이끌어내며(노비 문서를 소각해주겠다라는 명분) 활약한다.

쿠빌라이와 원종의 만남은 고려 시기를 좌우할 정도로 영향력 있는 사건이었다. 태자였던 원종은 신의 판단력으로 당시 즉위 순위 1위인 아릭 부케를 만나러 가지 않고 쿠빌라이를 만났고 쿠빌라이가 칸에 즉위하면서 원종은 고려를 안정적으로 이끌 동력을 얻게 된다.
1254년 몽골이 6차 침입 후 고려 땅을 떠나지 않으면서 더는 몽골과 싸우는 것이 불가능해진 고려는 강화 후 쌍성총관부를 설치하고 몽골과 책봉-조공 관계를 맺게 된다. 몽골은 ‘6사‘를 요구했는데 고려의 대응이 놀라울 정도로 멋지다(지금도 왜 이렇게 외교를 못하는 건지...).
참고로 몽골이 요구한 ‘6사‘는 다음과 같다.
1.인질 보낼 것 2.군사 파견 요청 시 올 것 3.수량과 군량 수송 4.성역과 역참 개설 5.호구조사 보고 6.다루가치를 둘 것
특히 5, 6번 원칙은 고려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이었다. 고려의 원칙은 단 한 가지였는데 고려를 지킨다는 것이다.
무신정권이 원종을 폐위하자 그는 쿠빌라이 딸과 결혼하고 몽골군의 힘을 빌린다(이 지점이 두고 두고 아쉽다). 결국 1270년 무신정권이 무너지고 정권이 개경으로 환도하면서 고려 내 몽골의 영향력이 강화되는 결과를 낳는다.

개경 환도 세력에 맞서 배중손 지휘 하에 삼별초가 자신들의 조정을 세우고 강화도, 진도와 제주도로 옮겨 가며 몽골군과 항쟁한다. 삼별초는 본래 무신정권의 핵심군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몽골군과 대결하기로 하면서 백성들은 이에 힘을 실어준다(몽골군에 맞서길 원했고 또 호적 문서를 불태워준다는 약속이 있었음). 특히 진도에서 싸울 때는 전라도 남부를 석권할 정도로 그 세력이 컸다고 한다. 하지만 1273년 제주도에서 아쉽게도 삼별초 항쟁은 막을 내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별초의 대몽항쟁은 몽골을 괴롭혔고 고려의 자주성을 보여주는 기회도 되었다고 생각한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희선 2023-10-15 02: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몽골이 고려에 쳐들어오다니 그런 게 전라 지역까지 밀고 내려 온 적도 있었군요 삼별초 생각나기도 하는데, 삼별초가 몽골과 끝까지 싸우다니... 잘 안 됐다 해도 그런 사람이 있었기에 나라를 다 빼앗기지 않았겠지요


희선

거리의화가 2023-10-15 16:06   좋아요 1 | URL
몽골은 고려에 여러 모로 큰 피해를 입혔고 또 많은 영향을 주었죠. 시기가 긴 것도 있었고요. 6차까지 침입을 했던 걸 보면 백성들의 피해는 알만합니다.
삼별초가 전라도 지역을 한 때 장악했었다는 것을 이번에 처음 알았어요. 그리고 개경 정부와는 달리 정부를 새로 세웠다는 것도 새로 인식하게 되었고요. 삼별초가 그냥 단순한 반란군이 아닌 셈이죠!
 



[ Ch 20 ] Greece Gets Civilized Again


Greece Gets an Alphabet

The Dorians와 the Sea People이 그리스에 수백 년간 살면서 약탈이 아닌 자급자족 경제로 정착 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여성들은 가부장적 체제 하에 들어가며 집안에만 갇히게 되는 상황이 벌어진다. 초기 그리스인들은 지금과 같은 알파벳을 사용하지 않고 자신들만의 문자를 사용했다. ⍺(alpha), K(kappa), T(tau), β(beta),  ψ(psi), θ(theta) 등이 있다. 현재의 알파벳은 그리스 문자들에서 가져온 것이 많다. 


The Stories of Homer

그리스의 최초 위대한 작가로 기록된 인물은 호머이다. 호머는 눈이 보이지 않아 이야기를 듣고 그리스 알파벳을 사용하여 글을 썼다고 한다. 호머는 트로이 전쟁을 다룬 <일리아스>, 트로이 전쟁이 끝나고 나서 귀환하는 오디세우스의 여정을 다룬 <오딧세이아> 유명한 두 작품을 남겼다.

이 책에서는 <오딧세이아>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오디세우스는 절벽에 새겨진 거대한 동굴이 있는 섬에 가게 되는데 그곳에서 양과 어린염소를 발견한다. 동굴 주인은 이마에 눈이 하나 달린 괴물 키클롭스가 있었다. 오디세우스는 그곳을 빠져나가야겠다 직감하고 키클롭스에게 자신은 여행자이며 배는 바다에 빠져서 없다고 거짓말을 한다. 오디세우스는 꾀를 내어 우유 대신 와인을 주면서 마시게 한다. 달달한 향기에 취해 와인을 마시고 키클롭스를 잠에 빠지게 하여 오디세우스는 동굴을 빠져나와 무사히 귀환할 수 있었다고. 


The First Olympic Games

오늘날 올림픽 경기는 올림푸스 산에서 이름을 따온 것이다. 그리스인들은 제우스를 비롯한 신들이 올림푸스산에 살고 있다 생각하여 신을 위한 경기를 개최했고 여기서 우승하는 사람들은 올리브 관을 쓰는 영광을 얻었다. 경기 종목은 달리기, 말 경주, 복싱, 레슬링, 5종 경기, 원반 던지기, 투창 던지기, 멀리 뛰기 등 다양했다고 한다. 우승자는 영웅으로 대접을 받았고 연회를 참석할 자격을 얻었으며 집으로 돌아가면 보상금과 평생동안 공짜 음식을 얻어 먹을 수 있는 특권이 있었다. 

오늘날에 올림픽 경기는 4년마다 열리며 수백 종의 경기가 열린다. 오늘날 여성들도 경기에 참여하며 그리스만이 아닌 전세계의 사람들이 참여한다. 그들은 여전히 그리스인들처럼 힘, 지혜, 용기를 겨룬다. 


[ Ch 21 ] The Medes and the Persians


A New Empire

바빌로니아인들이 메디아라는 국가와 친교를 맺고 함께 아시리아를 멸망시킨다. 아시리아인들은 두 국가에 충성하게 되었으나 이도 오래 가지는 않았다. 더욱 강한 국가가 나타났으니 페르시아다. 페르시아인들은 양을 치면서 메디아 근처에 살던 유목민들이었다. 페르시아 목동들은 Astyges(아스티아게스)라는 통치자의 지배를 받았는데 그는 그리 좋은 사람은 아니었고 자신의 왕권 유지에 혈안이 된 왕이었다고. 어느 날 아스티아게스 꿈에 손자가 그의 자리를 뺏게 될 거라는 예언을 듣게 된다. 그는 핵심 참모인 Harpagus에게 손자를 죽이라는 명령을 내리는데 다행히 Harpagus는 찔렸는지 죽이지 못하고 근처에 있던 목동에게 “왕이 아이를 없애길 원하네. 그치만 차마… 당신이 받게.”라고 해서 아이를 키우게 된다. 아이는 잘 자랐고(Cyrus: 영어 발음으로는 사이러스인데 키루스임) 어느날 양을 팔러 나갔다가 아스티아게스의 눈에 띠게 된다. 그는 육감적으로 자신의 손자를 알아봤고 분노하여 Harpagus 일족을 몰살시켜버리려했고 도망친 Harpagus는 Cyrus에게 요청하여 Cyrus가 페르시아인들의 민심을 얻어 페르시아의 왕이 된다. 키루스 대왕은 3년간 전투 끝에 메디아와 페르시아를 통합한다.


Cyrus the Great

키루스 대왕은 더 강한 제국을 만들기를 원했다. 인더스 강을 넘어 소아시아와 인도까지 손에 넣어 페르시아 제국은 더 넓어지게 된다. 페르시아인들은 그가 선하고 공평한 정치를 행하는 왕이었기에 좋아했다. 하지만 키루스는 바빌론이라는 산을 만났다. 바빌로니아인들은 자신들의 왕을 싫어하여 아들인 Belshazzar(벨사살)로 하여금 그들을 통치하도록 시켰다. 그러나 그는 망나니였고 바빌로니아인들의 신임을 얻지 못한다. 키루스 대왕의 군대가  쳐들어왔지만 국경을 그냥 열어주는 바람에 키루스는 바빌론을 쉽게 무너뜨릴 수 있었다. 키루스는 이어서 가나안까지 접수한 뒤 유대인들을 팔레스타인에 들어오게 하고 유일신을 그대로 믿게 하면서 그들에게도 신임을 얻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