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철학사 4 - 탈근대 사유의 지평들 세계철학사 4
이정우 지음 / 길(도서출판)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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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역사는 인간의 의미, 인생의 의미를 해명해온 역사이다. 그리고 이러한 자기 이해는 곧 세계 인식과 맞물려 이루어졌다. - P709~710

철학적 사유는 세계와 인간의 관계만이 아니라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 대해서도 사유해왔다. 이는 곧 윤리, 정치, 법 등에 대한 사유를 뜻한다. - P715


작년 말 세웠던 큰 계획 중 하나였던 세계철학사 시리즈를 4권을 마무리하면서 비로소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 올해가 가기 전에 끝낼 수 있어 참 다행이다. 


3권에서 근대성을 비롯한 칸트 철학에 대한 이해가 핵심이었다면 4권은 근대성을 진단, 비판하는 것(탈-근대)에서 나아가 지금의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분투한 다양한 현대 철학(자들)을 만날 수 있다. 


근대 철학의 본질주의와 결정론적 세계관에 대한 극복을 위해 꺼내든 탈-근대적 사유들(근대 철학의 본질주의 및 결정론을 극복하면서 전개된 생성존재론, 근대적 실증주의 인식론의 한계를 극복해나간 규약주의 이래의 여러 인식론과 합리주의적 형이상학, 인간존재를 둘러싼 현상학, 구조주의, 생명철학 등 여러 결의 참신한 시각들, 그리고 유난히 어두웠던 20세기의 현실에 부딪쳐나가면서 전개된 여러 실천적 철학들 - P7)이 탄생하였다. 


생성존재론은 ‘존재’가 아니라 ‘생성’을 실재로 보고 결정론적 관점에서 벗어나 ‘우연’ 개념에 새로운 지위를 부여하면서 형이상학의 새 지평을 열었다. 생성존재론의 대표 주자는 베르그송이다.

베르그송은 피상적 현실에서 이성을 통한 사물의 본질을 파악하려는 시도에 의해 생성이 폄하가 되었다고 비판한다. 중요한 것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연속적으로 생성되는 실재라는 것이다.

이후 들뢰즈와 바디우가 사건의 철학을 들고 나왔다. 사건의 철학이란 사건 개념을 사물 개념과, 사실, 사태, 사고 같은 개념들과 구분하는 작업이다. 

들뢰즈는 사건과 의미 사이의 연계성을 언어적 관점에서 들여다보았다. 그는 사건(표현된 명제=의미)은 맥락에 따라 성립되고 자연과 역사 사이에 구분은 없다고 주장한다. 반면 바디우는 역사적 사건으로서의 사유가 중요하며 자연과 역사, 존재와 사건 간에 분명한 구분이 있어야 한다 주장했다.


철학이 분화되어 나올 무렵 과학도 사회과학, 자연과학으로 분화되었다. 실증주의는 근대 문명의 성격을 대표하는 것으로 이론에는 증명(실험)이 필요하다는 인식이었다. 합리주의는 과학적인 성과가 쏟아져 나오면서 다변화되는 모습을 보인다. 그럼에도 확장되는 합리성에 대한 비판으로 생철학, 의철학, 정신과학 등이 등장한다. 


분석철학은 논리적이고 언어적인 분석에 의한 형식성을 중요시했으며 앞선 생성존재론과 대척점에 있다. 비트겐슈타인은 일상언어를 형식화하려는 앞선 시도를 논리학에 의해 참/거짓을 구분할 수 있는 표로 만들었다(그 많은 일상 언어를 표로 구성하려는 시도를 했다는 것 자체가 놀랍다). 러셀은 개인이 특정 상황에서 얻은 경험 데이터가  하나의 사실이 된다고 말했다. 

이제 ‘경험적 주체’와 ‘선험적 주체’를 둘러싼 다양한 사유를 펼친 현상학을 말할 때가 되었다. 

후설은 현상학의 포문을 연 철학자이다. 그는 사물이 가진 실재성과 존재론적 가치를 현상에 부여하고 직관이 모든 인식의 기본 바탕이 된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현실적인 것에서 이념적인 것을 구분해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말했다. 후설이 생각한 인식은 자기를 초월해 세상 밖으로 나아가는 의식이다.

하이데거는 당대를 거슬러 존재를 사유하고 존재와 인간의 관련성을 회복하고자 했다. 그에게 ‘존재자’라는 개념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존재는 존재자를 존재자로서 존재케 하지만, 존재자가 드러나는 그 순간 스스로는 그 드러남 아래로 숨는다(P382). 

사르트르는 개념을 파기하고 주체가 행동하는 것이 스스로를 파악하는 방법이라고 말한다. 마르크스를 만나고 나면 그의 철학은 ‘자유’적 대자존재에서 책임이라는 키워드를 더하게 된다. 


구조주의는 합리주의의 또 하나의 형태로 데카르트의 이원적 구도를 삼원적 구도로 변화하는 시도였다. 현상이 실재(계)라면 구조(이미지)는 상상계(추상/상징공간)이라고 할 수 있는데 언어를 통한 의미를 계열화(수직화)하고 타인의 존재에 대해 관심을 두었다. 

라캉은 철학에 정신분석학적 인간 이해를 도입한 학자다. 그는 기호와 기표를 분명하게 구분했는데 기호는 누군가를 향해 무엇인가를 대리하는 것이고, 기표는 무엇인가를 향해 누군가를 대리하는 것이다(P461). 그는 거울 효과를 통해 우리는 자기 안의 타자성을 발견해야 하며 주체의 이중성과 욕망의 이중성을 확인해야 한다고 말했다.

미셸 푸코의 타자의 사유는 배제의 역학을 파헤쳐서 지식, 권력, 주체의 역사를 인식하고자 했다. 푸코는 배제, 감금, 수용 등의 구조를 통해 지식-권력의 관계를 분석해내고 주체의 존재, 행위가 문제화되는 순간에 대해 밝히려 노력했다. 레비나스는 포로수용소에서 생환한 기억 때문에 누구보다도 타자에 천착한 철학자였다. 그는 참혹한 비극 속에서 신체(에서 비롯되는 욕구)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설파했고 나아가 타자의 타자성을 존중하는 사유를 강조한다. 데리다는 유대인이어서 사유하고 저항했지만 자신에게 존재하는 배타성에 대해서도 저항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차별점을 나타냈다. 


20세기 정치철학은 세 갈래로 분화되어 나타나는 모습을 보였다. 자유주의와 자본주의는 인류의 기본 인권 신장과 물질적 풍요의 증진에 큰 공헌을 했고, 스스로의 위기를 도전정신과 창의력으로 돌파해나가는 힘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이런 흐름은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불안정성, 경제적인 것에 의한 사회적인 것의 파괴, 그리고 제국주의적 정복과 전쟁이라는 문제점들을 노정하곤 했다. 이런 폐해를 극복하고자 한 사회주의 특히 공산주의는 개인의 자유보다는 공동체의 평등을 지향하고, 추상적 개인이 아니라 실제 착취당하는 무산계급을 중심으로 하는 사회를 꿈꾸었다. 그러나 이런 시도들은 곳곳에서 심각한 참극을 야기했고, 무엇보다 권력의 집중에 의한 각종 폐해를 낳기에 이른다(P615~616). 민족주의는 가시적이고 ‘자연적’/‘본능적’인 성격을 띠기에 일반 대중에게는 더 가까이 다가온 이념이었다. 근대 국민국가가 상당수 민족국가였기에 자유주의와 사회주의의 대립 아래에서 실제 움직였던 것은 민족주의였다. 그리고 이 민족주의는 또한 국가주의였다는 점이 핵심이다. 민족주의가 국가권력, 군사적 권력에 의해 장악될 때 파시즘이 등장한다. 파시즘의 경험은 특히 극악한 경험이었다. 그러나 때로 민족주의가 긍정적 힘을 발휘하기도 했는데, 이는 제국주의적 저항이라는 상황에서 피지배 민족에게 힘을 불어넣어준 민족주의이다(P617-618). 


4권은 특히나 현대를 이끈 정치 철학의 흐름까지 함께 엮어서 보니 세계 정치사적 흐름과 연관지어 확인할 수 있어 도움이 되었다. 개인적으로는 베르그송과 계몽 비판의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 전체주의 비판의 한나 아렌트, 마르크스를 소환한 데리다, 그 반대편에 있었던 후쿠야마의 철학을 비교해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주디스 버틀러와 스피박도 언젠가는. 이 중 하나라도 파고드는 철학자가 나타날 수 있기를.

철학사의 흐름을 훓어보면서 내가 이론에 많이 취약하다는 것을 다시금 절감했다. 아무래도 이론적 철학보다 실천 철학에 더 무게추가 기울 수밖에 없었는데 삶에 구체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철학이 좋았기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이는 어떤 사태를 보든 현실성이 중요하다 생각하는 나의 성향과도 연결된다. 철학(자들)을 만나는 일은 결국 내가 어디에 더 관심을 가지는지 들여다보는 계기도 되었다.


이렇게 탈근대 사유의 흐름을 살펴보는 것으로 세계철학사 시리즈 읽기를 마무리한다. 결코 이해했다고 볼 수 없고 한 번 훓어보고 개념을 정리한다는 측면이라고 볼 수밖에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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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의 핵심은 이정 안에 들어 있는 어떤 면이 이런 파멸을 불러오기에이르렀으며, 그 측면이 얼마나 어둡고 강한 것이기에 이성의 자기교정 능력마저 상실하게 만들었는가를 밝히는 것이다. 이는 곧 근대적 이성의 대변자라고도 할 수 있는 계몽사상)을 그 결과가 아니라 원리에 있어 급진적으로 비판하는 일이다. 그러나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신화는 이미계몽이었다. 그리고 계몽은 신화로 돌아간다"고 말한다.) 계몽은 전(前)이성적 사유인 신화를 극복하고 이성의 빛으로써 수립된 사유가 아닌가. 그렇다면 이 명제는 무슨 뜻인지 이해하기 곤란하다. 열쇠는 이들의 ‘변증법‘ 개념에 있다. 이들에게 변증법은 헤겔적 변증법이 아니라 개념의 동일성이억압한 비개념적인 것을, 보편적인 것이 억압한 개별적인 것을 드러내는작업이다. 그래서 계몽의 변증법은 계몽 아래의 모순된 것들을 계몽으로통일해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계몽이라는 개념이 억압하고 있는 그 아래 - P590

의 모순을 드러내는 일이다. 이때 우리는 계몽 아래에서 이제까지 그것의대립항으로 여긴 신화를 발견하게 된다. 반대로 신화에서는 계몽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이것이 ‘계몽=신화‘라는 등식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계몽과 신화는 동일한 것도 아니고, 어떤 동일한 것으로 ‘지양‘되는 것도 아니다. 양자는 (양 속의 음, 음 속의 양처럼) 서로 대립하면서도 상대 안에 똬리를 틀고 있으며, 서로 적대적 공모()의 관계를 형성한다. - P591

니시다는 국민 개인과 국가/민족 사이에 ‘절대모순적 자기동일‘의 관계
‘를 부여한다. 국가/민족이야말로 행위적 직관의 실천이 이루어지는 자각의장소인 것이다. 이는 곧 신민 개인과 천황 사이의 관계이기도 하다. 개인에게 일본과 천황이야말로 ‘절대 타자‘인 것이다. (뒤에서 논할 레비나스의 경우와 대조적이다.) 니시다에게는 이렇게 황실 절대모순적 자기동일자이자 ‘영원의 지금‘을 중심으로 이런 관계를 맺어온 전통이 바로 ‘일본정신‘이고 또 ‘국(國)‘이다. 그리고 일본만이 이런 전통을 이어온 국가인것이다. - P602

미키는 일본에 남아 있는 봉건성 그리고 개인주의의미발달이 일본 파시즘을 특징짓고 있다고 보았지만, 더 근본적인 문제로서일본적인 것에는 "형태가 없다"는 점을 들었다. 즉, "무형식의 형식"이 일본적 성격이라는 것이다." 니시다의 무 개념은 이런 성격의 한 정식화라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때문에 일본 문화는 유연함과 포용성을 갖추게 되었지만, 결과적으로 온갖 것들이 병존하는 상황을 빚어내기도 한다. 그리고 일본 사상/문화의 이런 성격은 오히려 당시 파시즘에 유리한 환경을 제공했던 것이다. - P609

도사카가 생각한 사물의 성격 = 특성은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와 달리 정태적으로 파악되기보다 동태적으로, 즉 역사적으로 파악된다. 그것은 인간의 역사적 실천과 맞물려 드러난다. 도사카는 이 성격 개념을 ‘문제‘ 개념으로 잇는다. 도사카의 문제론은 미키의 그것을 이으면서도 유물론의 방향을 취한다. - P613

아나키즘은 노동조합주의/집산주의와 상호부조론의 이념, 자주적 관리에 의한 운영, 평의회에 입각한 정치, 총파업이라는 직접 행동, "일하면서공부하는" 삶 같은 원리들을 고수하고자 한 흐름이었다. 그리고 이런 원리들은 특히 파리 코뮌과 러시아의 소비에트에서 그 구체적/역사적 모습을드러냈다. 그러나 러시아 혁명 이후 공산주의(/마르크스주의)와 아나키즘은갈등하기 시작했고(이러한 갈등은 동북아의 지식인들 사이에서도 논의가 되었고, 이른바 ‘아나-볼 논쟁‘으로서 전개되었다.), 결국 러시아에서의 아나키즘 운동은 점차 고갈되기에 이른다. 사회주의와 아나키즘은 공히 자본주의의 소유적 자유를 비판하고 소유로부터의 자유를 추구했다. 양자는 반(反)자본주의자유주의의 이념을 공유했다. 그러나 아나키스트들은 공산주의자들의당 중심주의와 프롤레타리아 독재(국가의 잠정적인 쟁취)라는 생각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양자는 곧 충돌하기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 P618

푸코는 권력이라는 것에 실마리를 두고서 타자들의 사유를 전개했다. 그래서 그의 일차적인 관심사는 배제, 감금, 수용 등에 관한 고고학적 진실들이었다. 그러나 그의 사유를 보다 고유하게 해준 측면은 그가 권력을 담론/지식과 연계해서, 담론 구성체와 비-담론(/신체) 구성체 사이의 비관계의관계에 주목해서 분석한 점에 있었다. 그리고 이로써 인식론도 정치철학과전에 없던 관계를 맺으면서 일신되기에 이른다.
그러나 그의 이런 사유의 근저에 깔린 궁극의 관심사는 주체의 문제였다고 생각된다. - P640

"자기자신은 자기의식의, 동일자의 팽창과 귀환의박동으로 환원 불가능한 비틀림이다. (...) 자기-자신은 스스로와 같지 않음이며, 존재에서의 결핍이며, 수동성 또는 인내이다."(AE, 169) 레비나스의윤리적 사유는 자기타자화의 사유이다. 윤리적 주체성이란 곧 ‘같은것 안의 다른것‘이다. 박해받는 타자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할 볼모인 것이다. 그는 자신이 행한 것 때문이 아니라 타인들이 겪은 것 때문에 피고인이 된다.
레비나스의 윤리학은 궁극적으로 이러한 타자를 위한 대신함, 책임짐을위한 자기타자화의 윤리학이다. - P658

데리다의 사유는 ‘불가능한 것‘의 사유이다. 그것은 바깥의 바깥이다. 그러나 불가능한 것이 동일자의 바깥에만 존재한다면, 동일자를 초월해 있다면, 그것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우리는 각종 동일자 안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래서 구체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동일자 내부의 불가능한 것이다. 내부의 내부는 웜홀을 통해 외부에 이어져 있다. 내부의 내부로서의 불가능한 것을 사유하고 그것을 통해서 동일자를 변화시켜나가는것, 여기에 탈구축의 철학이 있다. - P660

인간중심주의를 해체하는 데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자신이 벌여놓은 짓을 도외시하면서 어디론가 사라져버리려 하는 것에 불과하다. 중요한 것은 인간의 소멸이 아니라 인간의 책임이다. 기술중심주의에 휘둘리는 포스트휴머니즘이 아니라, 윤리적 주체로써 무너져가는 세상에 맞서는 새로운 휴머니즘인 것이다.
생태적 가치의 추구는 자연과 인간의 관계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 핵심은인간과 인간의 관계에 있다. 우리가 자연과 인간의 관계라고 생각하는 상당수가 결국 인간과 인간의 관계일 뿐이다. 문제의 핵심은 인간중심주의를타파하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다. 핵심은 어떤 인간들이 악업을 저지르고 어떤 인간들이 그것과 싸우느냐 하는 데에 있다. 이 점을 전제하고서 자연-인간관계를 논해야 하는 것이다. - P688

오늘날의 주요 저항 주체는 지식 계층, 성적·신체적 소수자들, 노동자들이 주요한 세 축을 형성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현대의 저항주체들은 과거의 역사에처럼 어떤 단일하고 일사불란한 대오를 형성하고있지 않다. 그래서 문제는 이들이 과연 얼마나 의미 있는 연대를 이룰 수 있는가에 있다. 현대의 대부분의 문제들은 복잡하게 착종되어 있으며, 때문 - P6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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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여자들에게 : 엉망인 여성해방론
다나카 미쓰 지음, 조승미 옮김 / 두번째테제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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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의 생명, 그 뿌리를 간직한 자궁이 지금 부활하고 있다. 수컷을 바라보며 다른 암컷과 경쟁하여 교태를 부리는 가운데서만 살 수밖에 없던 여자가 자신의 역사성에서 자신을 해방하려 하는 것이다. 지금 그런 여자가 있다.
암컷의 제 새끼 죽이기, 이런 피억압자의 극한의 자기 표현은 여성해방운동과 동시에 일어나고 있다. 그 배경에 여자라는 성의 변증법이 있다. 부정적인 자궁에서 긍정적인 자궁으로 이르는 길은 암컷에서 여자로, 여자에서 여자들로 이어질 길이다. - P65

이 책을 읽기 전 공교롭게도 일본의 1960년대 후반에서 1970년대 초반까지 있었던 도쿄대 투쟁 등을 비롯한 사회적 사건을 둘러싼 이야기를 다룬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 을 읽었다. 그리고 그 책을 함께 읽는 분들을 통해서 이 책의 존재를 얼핏 듣게 되었으니 우연치곤 정말이지 절묘한 타이밍이라고밖에 할 수 없다.
과연 일본의 우먼리브운동은 어떤 과정에서 시작되고 전개되었는지 이 책을 읽기 전 내가 궁금했던 부분이었다. 그러나 고백하건대 중반 부분까지 이 책을 읽는게 힘들었다 말할 수밖에 없겠다. 저자의 개인사를 비롯하여 그녀의 주장에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 많았던 것이다. 다행히 후반부에 가니 저자의 주장을 어느 정도 이해하게는 되었다만.

책에서 세 가지 키워드를 뽑아냈다. 첫 번째, 당시 일본의 역사. 두 번째, 당시 일본의 신좌익 운동과 사회적 투쟁이 여성해방운동과 교차되었을 때의 전개와 결과. 세 번째는 여성의 실존적 문제에서 여성해방운동과의 관계. 결국 역사, 사회, 개인의 문제다.

저자의 개인적 고백은 솔직했다. 꽤 많은 여성들이 어릴 적 남성들에게 성추행과 성폭행을 당하지만 같은 여성이자 나를 낳은 어머니에게조차 그 사실을 털어놓는 일을 꺼려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세월이 흘러서 구체적인 기억이 사라진다 해도 그 잔상과 불쾌한 느낌은 여성들을 계속 따라다닌다. 가장 큰 문제는 그 경험이 일회적 사건으로만 끝나지 않고 여성들의 신체적, 심리적 트라우마를 남기는 것이다. 그 귀결이 무엇이든 폭력적인 형태로 나아가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 씁쓸함을 남긴다.

나는 어디까지나 내가 저지른 죄상이 무엇인지 전혀 추측조차 못하는 죄인이었다. 나는 열심히 어떻게 된 일인지 이해하려 했다. 엄마가 자꾸 묻는 바람에 벽에 딱 붙어서. 그런데 뇌리에는 ˝다른 사람들한테 말하면 안 돼!˝ 하고 무서운 표정을 한 엄마의 말만 남아 있었다. - P103

잘못을 저지른 남성은 그 일을 뉘우칠 리가 없는데(다른 여성에게 범죄를 안 저지르면 다행) 정작 피해를 입은 사람은 자신을 죄인으로 취급하고 괴로워한다. 결국 가장 가까운 어른인 부모의 역할이 중요하다 말할 수밖에 없겠으나 그들도 사람이라는 현실이 있다. 게다가 아이를 낳는 것부터 선택해야 하는 여성들은 아이를 키우는 일에서조차 책임을 더 가져갈 수밖에 없는 구조다. 사회적 제도는 여전히 너무나 부족하고 차별적 관행은 개선되질 못하고 있다.

평범한 가정에서는 평범한 부모가 평범하게 아이를 가르친다. 즉 평범한 가정에서는 딸에게 장래에 좋은 아내이자 좋은 엄마가 되라고 한다. 어린 완벽주의자 여자들은 어떻게든 부모의 기대에 부응하려고 애를 쓴다. 그러다가 좌절하면 자신을 한심하다고 여기고 스스로를 철저히 벌하려고 또 애를 쓴다. 한 되씩이나 되는 밥을 먹고서는 토해 낸다.
강조하고 싶다. 세상 어디에도 없는 가정이 이상이 된 현실이 바로 이 병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 P384

저자의 주장이 이해는 가지만 이를 개인과 가정의 문제로만 다루기에는 불합리한 면이 있다. 구조적인 도움도 뒷받침되어야하지 않을까. 얼마 전 홀로 아이를 키우는 엄마가 몇십만원의 원금을 빌렸다가 말도 안되는 이자로 빛더미 때문에 목숨을 끊었다는 안타까운 이야기를 접했다.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기 위해 사회는 어떤 대답을 해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1960년대는 미소의 두 강대국이 존재했지만 세계적으로 좌익의 흐름이 우세할 때였고 일본도 그 선상에 있었다. 베트남 전쟁, 한일조약 소식이 들리자 일본의 민중들도 참지 못하고 일어섰다. 사회당/공산당 데모를 비롯하여 학생 운동도 도처에서 시작되었다.

1969년 1월 18일 도쿄대학 야스다 강당을 점거하고 농성 중이던 학생들을 체포하는 강제 진압이 일어났다. 그날 밤 나는 밤새 친구와 기동대가 빙 둘러싼 도쿄대 주변을 배회했고 이튿날 오차노미즈에서 벌어진 투쟁에 참가했다. 현기증을 느끼면서도 나는 지금 내가 역사의 모든 것을 묻는 투쟁을 벌이고 있다는 직감이 들었다. - P127

나의 어렴풋한 기억에 따르면 적군파가 생긴 직접적 계기는 1969년 4월 28일 ‘오키나와의 날(오키나와 반전의 날)‘이다. 그날의 패배에 대한 총괄에서 적군파가 나왔다. 앞서 1월 18, 19일에 도쿄대 야스다 강당 투쟁 공방이 극적으로 전개되었기 때문에 그때까지 활발히 활동을 하던 신좌익은 이제 지는 해에 가까워졌음을 예상하고 있었다. 그러고 나서 4월 28일 당일에 적이 압도적으로 퍼부은 물량 공세에 신좌익은 박살이 났다.
˝오키나와의 날에 벌인 대중적인 무력 투쟁이 패할 수밖에 없었을 때 자연 발생적으로 도달한 군사적 투쟁의 한계성이 분명히 드러났다. 또 소시민인 투쟁 주체의 한계성 또한 확실히 드러났다. 남자의, 남자에 의한, 남자를 위한 투쟁의 약점이 백일하에 드러났고 혁명이 ‘남자다움‘을 상징하는 시대도 종언을 고했다.˝
위는 당시 내가 쓴 전단지 내용이다. 생각해 보니 1969년 4월 28일에 신좌익은 그전까지 갖고 있던 모든 것들을 잃고서 어쩔 수 없이 풍부한 ‘0‘의 지점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지는 저녁놀 가운데 적군파와 여성해방운동이 태동했다. 이 둘은 신좌익 운동의 아이들로 태어났다. - P241~242

투쟁의 한복판에 있었던 저자는 그 실패를 통한 한계를 느끼고 여성해방운동의 길을 스스로 찾아나갔다. 돌이켜보면 과거 한국의 일제 해방을 위한 투쟁에 나선 이들도 시작이 거창한 대의었음을 인식하고 뛰어든 이들은 없었을 것이다. 시간이 흐른 뒤 내가 그 길에 뛰어들었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달았던 것이겠지. 그러나 보편의 길에 밀려나 있던 여성들이 투쟁의 길에 뛰어들었을 때 저자도 그랬지만 개인으로서의 억압의 경험을 분쇄하기 위해 마냥 뛰어들었던 사회와의 괴리가 쉽게 부수어질 수 없음을 깨닫는 과정이기도 했을 것 같다. 혁명과 진보를 자처한 남성 동지들도 여성 동지들을 편견으로 대한 것은 마찬가지였으니. 자신들이 결혼하면 투쟁하는 여성과 살지 않겠다는 소리를 듣고 뒷일을 자처했으나 오히려 같은 남성들로부터 소외당하거나 차별당하는 경험 같은 것 말이다.

일본 제국주의에 도움을 얻어 승승장구한 전범기업과 우익 정치인들의 행보를 문제시삼고 당시 뛰어든 일본 내 많은 이들이 존재했다. 가해자의 후손을 자처한 그들의 용기가 한편으로 대단하다 생각이 들면서도(물론 그들도 가해자로만 보아서는 안될 것이다) 이는 일부 세력에 불과한 것이다. 그리고 과거 일본 제국주의에 도움을 주었던 많은 민간인들은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 것인가. 남성들은 전쟁에 나아갔고, 여성들은 그들 뒤에 있었다. 아시아 각국의 많은 여성들이 일제의 전쟁을 위해 동원되었는데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고 여전히 문제시되고 있다. 일본 내 여러 민들 간의 차별도 문제적인 것은 마찬가지다. 조선인, 오키나와인 등을 향한 차별적 시선은 개인 간 뿐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이루어졌으니 말이다.

예전에 일본 여자들은 나라를 위하고 가족을 위한다는 대의명분으로 몸과 마음을 다 갖고 있는 총체적인 존재인 자기 자신을 배신했다. ‘정숙한 여자‘는 ‘일본의 어머니‘가 되어 전쟁터 후방에서 침략 전쟁을 지원했다. 그렇게 하는 동안, 전쟁터에서 황군 위안부들은 남성의성을 풀어 주는 역할, ‘신국 일본‘이라는 대의를 지키는 그림자 역할을해야 했다.
앞서 썼듯 위안부 대부분은 본국에서 잡아 온 조선인 여자들이었다. 그리고 지금 일본 국내에서는 남자의 배설 행위일 뿐인 ‘프리섹스‘가 폐지된 집창촌을 대신한다. 한편으로 이런 ‘경제적 동물‘들이 동남아, 대만, 한국에 가서 그 땅의 여자들을 변소 대신으로 삼는다. - P264

나의 어둠과 타인의 어둠 즉 내가 살아가는 모습과 타인이 살아가는 모습이 경합하는 가운데 ‘우리의 내일‘에 빛이 싹튼다. ‘가해자 논리‘는 피억압자 자아를 버리게 할 우려가 있다. 억압자인 동시에 피억압자인 모순 속에 투쟁의 변증법이 숨 쉬고 있는데, 자신을 억압자일 뿐이라고 한쪽으로 기울여 고정하고 굳혀 버리면, 겉으로 내세운 명분밖에 없는 혁명 대의를 사명감으로 갖게 되며, 그런 대의에 나를 바치게 된다. 이런 과정에 ‘가해자 논리‘의 범죄성이 있는 것이다. 내가 실감한 것은 억압자라는 것은 철저히 겉으로 내세운 명분일 뿐이란 점이었다. 이는 늘 깔끔하게 딱 떨어지는 논리였고, 남자들한테 남자다움과 혁명가에 대한 기대를 만족하게 해 주는 논리이다. - P254

이처럼 이 책은 저자가 여성해방운동을 왜 시작하게 되었고, 이를 위한 배경 정보에 의한 개인의 과거사, 이후 현재까지 어떤 과정을 거치며 변화해 왔는지를 그려내었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저자가 후기에도 밝혔듯이 지금의 독자가 보기에는 너무 뜨거운 열정과 행동으로 비춰질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지금의 시대와 그 시대는 다르고 개인의 경험도 다르며 당연하듯 그 때는 저자의 나이가 어렸다는 점을 감안해야 하리라.

여성해방운동은 여성 스스로가 자립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하고, 여성 간의 대화를 통해 연대해나가야 한다 저자는 말하고 있다. 몇십년이 흐르는 동안 일본의 현실이 바뀌었고 여성의 현실도 어느 정도 변화가 있었다. 이 책을 통해 일본 현대 여성해방운동의 흐름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어서 좋은 기회였다고 생각한다(‘변소로부터의 해방‘ 등 뒤에 실린 자료는 참고 자료로도 잘 활용할 수 있을 듯하다).

여성해방이란 여자들이 힘을 모아 여자가 살기 힘든 현실을 깨부수는 것이며, 동시에 서로 갈등하고 미워해온 여자와 여자의 관계성 속에 에로스를 되살리면서 주체성을 확립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여자에게 에로스는 나의 자궁, 즉 나의 자연과 내가 서로 소통하는 가운데 나온다. 소통은 ‘여자인 것‘에서 오는 아픔과 대화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 P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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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4-11-28 10:2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와 다 읽어내신걸 축하드리고 읽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저는 지금 중간 넘어가는데 지금까지도 이 책읽기가 제게는 수월치 않습니다. 저자의 주장에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 있기도 하고 저자가 뭐랄까, 너무 .. 맹렬하게 느껴진다고 해야 할까요. 결이 저랑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저도 부지런히 읽어서 완독하도록 하겟습니다. 다시 한 번 고생하셨습니다!!

그나저나 이 책을 선택한 게 거리의화가 님께 너무나 적절한 타이밍이었네요!! 씐나요!! >.<

거리의화가 2024-11-29 05:48   좋아요 0 | URL
다락방 님도 이 책이 수월치는 않으셨군요^^; 맹렬하게 느끼신 점 저도 백 번 동감하는 바입니다.

그나저나 선정하시는 책이 이번에도 제게 큰 도움이 되었어요. 어찌 이리 딱딱 골라오십니까? 다음 달에도 모쪼록 잘 부탁드립니다^^
 

《성찰》은 “여기서 신의 실존 및 영혼과 신체의 구분이 증명되다”라는 부제에서도 알 수 있듯이, 주제로만 본다면 이전의 형이상학과 거의 다를 바가 없다. 《성찰》이 이전의 철학들과 크게 다른 점은 오히려 책의 구성, 문체, 기술 방식 및 철학적 방법론 등에 있다. 이것들을 통해 이전의 형이상학적 주제들은 완전히 다른 내용으로 거듭났으며, 그 이후로는 누구도 그 이전의 철학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나는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예전에 내가 참되다 믿었던 것들 가운데 의심이 허용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는 내가 생각 없이 경솔하게 하는 말이 아니라, 성찰을 거친 타당한 근거들에 따라 하는 말이다. 그러니 무언가 확실한 것을 발견하길 원한다면, 앞으로는 이런 논증에 대해서는 명백히 잘못된 논증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동의하는 일에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무언가 확실한 것을 만날 때까지, 아니, 다른 것은 몰라도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만큼은 확실하게 인식할 때까지 계속 나아가자.

이제 내가 보는 모든 것을 거짓으로 가정하자. 위조된 기억이 재현하는 것들 가운데 어떤 것도 결코 실존한 적이 없다고 믿자. 나는 아무런 감관도 지니고 있지 않으니, 몸이니 모양이니, 펼쳐있음, 운동, 장소는 키메라[같이 실존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면 무엇이 참된 것일까? 아마도 이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

누구인지는 몰라도 의도적으로 항상 나를 속이는, 대단히 능력 있고 아주 교활한 사기꾼이 있다. 이제는 그가 나를 속인다 하더라도 나 또한 의심의 여지 없이 있다. 실컷 속인다 하더라도, 내가 나는 무엇이다, 하고 생각하는 한, 그는 결코 나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 수 없을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모든 것을 대단히 충분히 숙고한 뒤 마침내 이러한 공리를 확립할 수밖에 없다. ‘나는 있다, 나는 실존한다’는 내가 소리 내어 말하든 정신으로 파악하든 언제든지 피할 수 없이necessario 참이다.

나는 발견한다. 생각이다. 오로지 이것만이 나와 나누어지지 않는다. 나는 있다, 나는 실존한다. 이것은 확실하다. 하지만 얼마 동안? 물론 내가 생각하는 동안. 다시 말해 [이런 일은 불가능하겠지만] 내가 모든 생각을 그만둔다면, 그와 동시에 내가 있다는 것도 완전히 멈추는 일이 일어날 것이다. 지금 나는 오로지 피할 수 없이 참된 것만을 받아들이고 있다. 따라서 나는 엄밀히 말해 오로지 생각하는 것이다. 즉 이전에는 말뜻을 몰랐던, 정신이나 영혼이나 지성이나 이성이다. 그러면서도 나는 참된 것, 참으로 실존하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종류의 것인가? 말했다시피 생각하는 것이다.

나는 나의 정신보다 더 쉽게 혹은 더 명백하게 지각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명백히 인식한다. 왜냐하면 이제는 알다시피 물체들 역시 엄밀하게 말하자면 감각이나 상상력이 아니라 오직 지성으로써 지각되며, 만져지거나 보여서가 아니라 오로지 인식되는 까닭에 지각되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실체라는 사실로부터 어떤 실체의 관념을 지니고 있다. 그렇지만 나는 유한하기 때문에 이것이 무한 실체의 관념은 아닐 것이다. 무한 실체의 관념은 정말이지 무한한 실체로부터만 비롯될 것이다. 또한 나는 무한한 것을 참된 관념을 통해서가 아니라 유한한 것을 부정함으로써 지각한다고 생각해서도 안 된다. 내가 마치 정지를 운동의 부정으로, 어둠을 빛의 부정으로 지각하듯이 말이다. 그렇기는커녕 나는 무한 실체가 유한 실체보다 더 많은 실재성을 담고 있다는 것, 이 때문에 무한한 것, 즉 신에 대한 지각이 유한한 것, 즉 나 자신에 대한 지각보다 어떤 면에서는 먼저 내 안에 있다는 것을 명백히 알고 있다. 만일 내게 더 완전한 존재자의 관념이 없어서, 내 결함을 이것과 비교함으로써 깨닫지 못했다면, 내가 의심하고 욕구한다는 사실, 즉 내게 무언가가 결여되어 있고 내가 전적으로 완전하지는 않다는 사실을 내가 과연 어떻게 알았겠는가?

삶의 모든 시간은 무수히 많은 부분으로 나누어질 수 있고, 이 낱낱의 부분들은 어떤 식으로도 서로 기대어 있지 않으며, 어떤 원인이 나를 이를테면 다시 이 순간에 창조하지 않는다면, 즉 나를 보존하지 않는다면, 내가 방금 전에 실존했다는 것으로부터 지금 실존하는 것이 틀림없다는 결론은 도출되지 않는다. 사실 시간의 본성에 주목하는 사람에게는 명백한바, 무엇이든 낱낱의 순간을 지속하는 어떤 것을 보존하는 데에 드는 힘과 작용은, 아직 실존하지 않는 것을 새롭게 창조하는 데에 드는 것과 똑같다. 따라서 보존과 창조는 자연의 빛에 따라 밝혀지는 것 가운데 하나지만, [실재적으로는 구분되지 않고] 단지 이성적으로만 구분될 뿐이다

많은 부분적 원인들이 나를 만들어내기 위해 참여했다. 이 원인에서는 신에게 귀속되는 완전성들 가운데 하나의 관념을 받았고, 저 원인에서는 다른 완전성의 관념을 받았다. 그리하여 그 모든 완전성은 우주 곳곳에서 발견되지만, 신이라고 하는 하나의 장소에 모두 결합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는커녕 신이 지니고 있는 모든 것 가운데 단일성, 단순성 곧 나뉘지 않음이야말로 내가 신 안에 들어 있다고 파악하는 주요 완전성들 가운데 하나이다. 그리고 이 모든 완전성 가운데 단일성의 관념은 내가 다른 완전성들의 관념들을 얻게 된 어떤 원인이 없었다면 내 안에 자리 잡지 못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이 원인이 나로 하여금 이것들이 도대체 무엇인지를 인식하게 할 수 없었더라면, 이것들이 결합되어 있을 뿐 아니라 나뉠 수 없다는 것 또한 인식하게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나는 내가 인식하는 모든 것을 인식하는 바대로 신한테서 얻었기 때문에 의심의 여지 없이 올바로 인식하며 이런 경우에는 내가 그르칠 리도 없다. 그렇다면 나의 오류는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물론 이 한 가지에서, 즉 의지가 오성보다 더 넓게 열려 있는데도 내가 의지를 지성의 한계 안에 가두지 않고 오히려 인식하지 않은 것들에까지 확장시키는 일에서 비롯된다. 이런 것들에 대해 의지는 차이 없다는 투로 있기 때문에 참되고 좋은 것에서 쉽사리 벗어나며, 그리하여 나는 속기도 하고 잘못하기도 한다.

판단을 내릴 때 지성이 맑고 또렷하게 보여주는 것까지만 의지가 확장되도록 묶어둔다면, 우리가 오류를 범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맑고 또렷한 지각은 의심할 바 없이 어떤 것이고, 따라서 어떤 것도 아닌 것으로부터는 비롯되지 않는다. 그런데 이것의 작자는 반드시 신이다.

상상하는 데에는 내가 인식하는 데에 사용하지 않는 어떤 특별한 마음의 노력이 필요하다. 이 새로운 마음의 노력이야말로 상상력과 순수 지성의 차이를 훤히 밝혀주는 것이다

물체는 본성상 언제나 나뉠 수 있음에 반해, 정신은 전적으로 나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정신, 곧 오직 사유하는 것으로서의 나 자신을 살펴볼 때, 나는 내 안에서 어떤 부분들을 구분할 수 없고, 오히려 내가 완전히 하나이자 통합되어 있음을 인식한다. 그리고 내가 아는 바로는, 신체 전체와 정신 전체가 통일된 듯 보이긴 하지만, 발이나 팔이나 무엇이든 다른 신체 부분이 잘려 나간다 하더라도 정신에서 떨어져 나가는 것은 없다. 나아가 의지 기능, 감각 기능, 이해 기능 등이 정신의 ‘부분’이라고 말해서도 안 된다. 하나의 동일한 정신이 의지하고, 감각하고, 이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정신은 신체의 모든 부분으로부터 직접 영향을 받는 것이 아니라, 뇌로부터, 혹은 아마 뇌의 어떤 작은 부분, 이른바 ‘공통’ 감각이라는 것이 들어 있는 부분으로부터만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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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장

우리는 사물들 자체를 인식하는 것이아니다. 단지 뇌에 주어진 정보에 대한 뇌의 ‘해석‘이 바로 우리의 관념들인것이다. ‘정신‘이란 이 관념들의 총체에 다름 아니다. ‘표상주의‘란 이 과정전체를 표상의 과정으로 보고, 그것을 (분자생물학의 용어를 쓴다면) ‘센트럴도그마‘로 채택한 이론을 가리킨다.
베르그송은 우주와 (뇌를 포함한) 우리의 신체는 연속적이며 그 전체가 물질(‘이미지들의 총체‘)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객체/객관과 주체/주관을 맞세우는 근대 인식론의 구도와 다르다. - P497

어포던스란 환경이 동물에게 제공하는 것이다. 환경이 동물들의 행동.
과 관련해 드러내는, 어떤 면에서는 동물들에게 강제하는 특성이 어포던스이다. 일반적인 생각과는 달리, 깁슨에게 의미와 가치란 (인간을 포함해) 동물들이 환경에 부여하는 것이 아니다. 의미와 가치는 환경 자체에 내재해있고, 오히려 환경이 그것들을 동물들에게 현시한다. "환경은 동물이 행할수 있는 것을 제약한다. 생태학에서 말하는 적소(‘니치)가 이러한 사실을반영한다." (EA, 135) 어포던스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절벽은 동물들로 하여금 죽지 않기 위해 그 앞에서 멈추게 만든다. 물은 동물들을 빠지게 만들지만, 소금쟁이 같은 동물은 그 위를 자유롭게 다닐 수 있게 해준다.33) 불은인간이 그것을 이용할 수 있게 해주지만, 다른 동물들은 두려워 피하게 만든다. 이렇게 어포던스란 환경의 어떤 성격이 동물들로 하여금 특정한 방식으로 행동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 P521

유물론적 환원주의에 따르면 우리 마음의 상태는 곧 뇌 상태와 별개의것이 아니며, 양자는 동일한 것일 뿐이다. 열역학에서의 ‘열‘은 통계역학에서의 ‘분자들의 평균 운동에너지‘일 뿐이다. 어떤 물질이 ‘불에 탐‘은 그것의 ‘산소와 결합함‘일 뿐이다. 마찬가지로 의식의 상태 C는 뇌의 상태 b의결과일 뿐이다. 그러나 환원주의의 실제 내용은 C와 b가 상응한다는 것 - P527

일 뿐이다. 우리는 C 과 b, 이, C2와 b2가, ... 상응한다는 것을 말할 수 있을 뿐, 전자의 차원을 후자의 차원으로 환원할 수 있을지, 다시 말해 후자로부터 전자를 연역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 정신적 차원과 물질적 차원은 전혀 다른 언어/존재론으로 서술되기 때문이다. - P528

무지개는 물리적으로는 파동방정식으로 설명되고, 그것의 지각에 대해서는 뇌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무지개에 대한 역사적·문화적 경험들과 담론들에서의 차이는 접어둔다 해도, 그것에 대한 각 사람의 경험들은 모두 다르다. 이 경험들(심리적 내용들)은 어떤 일반적 법칙성으로도 환원될 수 없다. 뇌에 대한 일반성은, 나아가 다른여러 과학이 동원된 어떤 일반성도 이런 독특성들을 포괄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비환원적 유물론은 마음을 하나의 실체로서 인정하지는 않지만,
마음이라는 차원, 속성은 별개의 속성임을 강조한다. 그래서 이 심리철학은
‘속성 이원론‘이라고도 불린다. - P529

기능주의적 사유는 존재자들을 모두 지표화하고 그 지표들을 계산해서 판단을 내린다. 그러나 지표들은 지표들일 뿐이다. 앞에서(1장, 1절, 82) 예를 들었듯이,
연결망 이론에서 노드 A가 노드 B와 링크되어 있다는 기준은 무엇일까? 환자의 고통은 수치화될 수 있는 것일까? 빅 데이터를 분석하면 과연 해당사태가 구체적으로 이해되는 것일까? 기능주의는 몸으로부터 분리된 정신이라는 데카르트 이원론의 그림자 안에 들어 있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때 아이스만이 사태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데이터 분석만잘했기 때문이 아니라 여러 군데를 발로 뛰면서 말하자면 현상학적 관찰을세심하게 수행했기 때문이었다. 미나레트 구축은 머리가 아닌 몸으로 배 - P534

운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준다. 도제들은 이론을 먼저 배우고 그것을 구현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밑바닥 작업부터 철저하게 몸으로(관찰과 흉내 내기만을 통해서) 배워나가는 과정을 잘 보여준다. ‘인식‘이란 지표들의추상적인 연산을 통해서만은 얻을 수 없는 것이며, 세계 - 내에서 몸을 통해이루어지는 경험이 뒷받침되어야만 성립하는 것이다. ‘체화된(embodied)인지‘가 중요한 것이다. - P535

체화된 인지를 기반으로 전개되는 체화된 마음의 심리철학은 용어가 시사하듯이 마음을 몸에서 추상된 어떤 것으로서가 아니라 몸에 구현되어 있는, 따라서 세계와 맞물려 있는 존재로서 사유하고자 한다. 이 입장을 취할경우 뇌 안에 마음이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 안에 뇌가 있다고도 할 수 있다. 마음은 어떤 실체나 부수물로서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주체성으로서, 그러나 몸에 구현되어 활동하는 주체성으로서 이해된다. 억지로 마음이 어디에 있느냐고 묻는다면, 마음은 몸과 세계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여러 주체적 활동들에 내재해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기능주의에서 벗어난)퍼트넘은 "의미는 머릿속에 있지 않다"라고 말한다. - P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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