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아 사회에 다양한 형태의 변화가 몰아치고 ‘有‘의 새로운 방식들이도래했을 때, ‘‘가 그 안정성을 잃어버리고 폭주하기 시작했을 때, 성리학은 리로써 그것을 통어할 수가 없었다. 필요한 것은 기 자체를 사유하고 기자체에 시대의 도를 내장시키는 작업이었다. 동북아의 근대는 서경덕, 왕부지, 대진, 최한기 등으로 이어지는 기학의 시대였다. 기의 결정적인 성격은그것이 유의 역할을 할 수도 있고 무의 역할을 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기는도에 대해서는 유이지만 ‘物‘에 대해서는 무이다. 기학은 성리학에 대해서는 ‘‘의 학문이지만, 사실은 ‘物‘에 대해서는 ‘허‘의 학문인 것이다.

이 점은 주체론에 관련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인간을 주체로 보고, 주체의 의지, 선택, 책임을 강조했던 정약용의 사유는 끊임없이 비울 것을 역설했던 기존의 허의 사유가 아니라 근대적인 실의 사유이다. 그러나 그는 실의 학문, 통어되지 않는 기의 학문이 띨 수 있는 위험을 정확히 감지했다.
그 때문에 동물의 기와 인간의 기를 날카롭게 구분하고, 인간의 기에 도의새로운 뉘앙스에서의 ‘도‘을 내장케 한 것이다. - P397

로크의 사유는 그 초점을 경험에 맞추고 경험을 구성하는 요소들을 상세하게 분석하고자 했다는 점에서 붓다의 철학함과 통한다. 정밀하게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오온(五蘊) 즉 색(色)・수(受)・상(想). 행(行)・식()은각각 대상(object), 지각(perception), 감응(affection), 행동(action), 마음(mind)에해당한다. 분석의 구도는 곧 색/대상과 식/마음을 양극에 세우고 그 사이에서 수/지각, 상/감응, 행/행동을 분석하는 것이다. 이 구도는 로크와 붓다에 국한되지 않는, 철학사를 관류하는 일반적인 구도이다. 그러나 붓다 사유의 목적이 오온이 결국 공이라는 것(五蘊皆空)을 깨달아 해탈하는 데 있었다면, 로크의 사유는 ‘마음‘이라는 우주의 구조와 기능을 탐색하고(인식론) 그 토대 위에서 새로운 정치를 위한 토대 (정치철학)를 놓는 것, 궁극적으로는 근대적 인간상을 수립하는 것이었다. 붓다의 사유가 불교를 낳았다면, 로크의 사유는 경험주의 인식론·인성론과 자유주의 정치철학을 낳았다. - P401

흄의 사유가 가져온 가장 심오한 결과는 인간의 삶은 어떤 형이상학적 진리에 입각해서가 아니라 인간 자신의 본성에 대한 깨달음에 입각해서 영위될 수 있다는 점을 주장한 데 있다. 이 점에서 흄은 근대적인 ‘주체의 철학‘을 본격적으로 진수한 인물이다. 그는 이론적 탐구를 통해 세계에 대한 어떤 "객관적인 진리"의 인식을 왜 포기해야 하는지, 아니면 적어도 "진리"에 잔뜩 들어간 힘을 왜 빼야 하는지를 역설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로써 그는 사유의 무게중심을 자연철학/형이상학이 아니라 인간의 자기 이해즉 인성론으로 옮기고자 했던 것이다. 하지만 흄의 이런 경험주의 정신은 인성론 자체 내에서도 다시 한 번 발휘된다. 흄은 사유의 무게중심을 인간 그 자신으로 옮겼을 뿐만 아니라, 인간 이해 자체를 실체론적 인간관에서 관계론적 인간관으로 옮긴 것이다. - P426

위대한 자연이 인간에게 준 두 가지 보물이 있다. 자기에 대한 사랑즉자기애(amour de soi)와 타자에 대한 사랑즉 자애심(慈心) 맹자가 역설한
‘人心‘이다. 생명/삶에 대한 사랑이 자연이 인간에게 준 원초적은총이다. 루소는 ‘원죄‘ 개념을 거부하면서, 삶의 근저에 자기애를 놓는다. 하지만 사회생활을 하는 과정에서 인간은 점차 변한다. 자기애는 이기심(amour propre)으로, 자애심은 경쟁심과 질투심으로 바뀌는 것이다. 삶은점차 경쟁과 질시의 도가니로 화한다. 루소는 이 과정을 한 인간에게서만이 아니라 인류의 문명 전체에서도 확인한다. 때문에 그는 자연과 문명을강렬하게 대비한다.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났다. - P439

주체는 사물들과 타인들을, 세계 전체를 객관적 상황으로 해서 그것을 겪어나간다. 즉, ‘經驗한다. 그러나 이 경험은 객관이 주체에 그대로 새겨지는 수동적인 과정이 아니다. 주체의 경험은 일정한 선험적 조건을 전제하는 경험이다. 이 선험적 조건에 주안점을 두어 이해한 주체를 선험적 주체라 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경험적 주체와 선험적 주체는 구분되며, 이런 관계는 특히 영국 경험론자들과 칸트사이의 차이를 통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 P447

칸트의 인식론과 윤리학은 결국 ‘이성‘에 대한 새로운 음미에 기초해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인식론과의 관계에서 볼 때, 칸트가 행한 이성 비판은 과학적 사유의 의의와 한계를 동시에 정립하려는 것이었다.
그것은 한편으로 당대까지 이루어진 과학적 사유를 정초하려는 것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것의 한계를 밝힘으로써 그 너머의 여지를 마련하려는것이었다. 이 점에서 그는 한편으로 이성에 무제한의 권리를 부여했던 전기계몽주의자들과도 다르고, 이성을 단적으로 비판했던 사람들 신앙을주장하려는 속셈을 품고서 이성을 비판했던 사람들(하만, 야코비 등) 그리고도덕적 차원의 수립을 목적하지 않으면서 단적인 이성 비판을 진행하려 했던 회의주의자들과도 달랐다. - P491

칸트 사유는 중요한 문제를 남기게 된다. 데카르트의 이원론이 남긴 문제와 마찬가지로, 칸트에게서도 인식론과 도덕형이상학, 물질의 세계와 정신의 세계, 기계론의 세계와 목적론의 세계, 오성과 사변이성, 현상계와 본체계의 이원론은 ‘두 세계‘ 사이의 심각한 간극이라는 결과를 가져왔
‘기 때문이다. - P493

칸트는 매개자를 둠으로써 양자를 연결하는 길을 택했다. 그는 인식능력과 소망능력 사이에 쾌/불쾌의 능력(감정)을, 인식론과 도덕형이상학 사이에 생명철학과 미학)을, 물질과 정신 사이에 생명과미)을,
자연과 자유 사이에 ‘합목적성(Zweckmäßigkeit)‘을, 오성과 사변이성 사이 ‘판단력‘을, 현상계와 본체계 사이에 양자를 이어주는 역사의 차원을 설정해 자신의 사유체계에 통일성을 부여하고자 했다. - P4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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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얼빈은 소비에트 러시아에서 쫓겨나, 수중에 지닌 현금은 무용지물이 되어 버린 채, 어느 나라에서든 보호받지 못하는 백계 러시아인들의 "유일의 안주지"이고 "낙원"이자 "백계로서아인의 계집들"로 표상되는
"에로와 구로"의 도시라는 경멸 섞인 시선을 받기도 한 것이다." 특히1935년 3월, 소련이 동청철도를 만주국에 넘기고 철수한 이후의 하얼빈기행문에는, 하얼빈의 ‘정조‘인 ‘애수‘가 많이 등장한다. 무국적 백계러시아인들의 불안, 고향에 대한 그리움, 무기력과 무력감은 하얼빈 애수로 피어났다. - P290

20세기 기생 연구에서 고려해야 할 문제는, 조선이 식민지가 되면서 새로 생겨난 많은 제도 가운데하나가 기생이라는 점이다. ‘기생‘과 ‘창기‘를 구분하는 단속령이나 ‘예기‘와 ‘창기‘를 구분한 규칙 등은, 근대가 보여주는 제도적 억압의 또 다른 면이다.
19세기 기생이 기부(기둥서방)가 거느린 창부였다면, 20세기 기생은국가가 공인한 기업이 거느린 창부라고 할 수 있다. 적어도 19세기까지 "액례가 기녀를 솔휵)하는 것은 본래 금령"이었지만, 20세기 들어와서는기업이 기생을 거느리고 합법적인 영업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조선에서는국가가 기생의 착취를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았지만, 식민지에서는 국가가 기생의 착취에 직접적으로 관여하고 있는 것이다. - P341

1910년 이후, 일본은 자국의 식민지 여행을 장려했고, 이는 일본인들의 해외여행의 유행으로 연결된다. 이러한 식민지여행의 유행은 여행안내서의 제작으로 이어졌다. 1920년대에는 한반도전역의 지역 안내서 만들어졌고 공공 및 민간 기관에서도 다양한 목적으로안내서를 제작했다. 1930년대에 들어서는 지역별 관광협회가 설립되고여행안내서와 더불어 여행안내소가 설립된 시기이다. 이와 더불어 1930년대에는 시모노세키에서 출발한 기선이 도착하는 부산, 경부선의 종착역 - P353

인 경성역 등이 중심이 되어 관광산업이 발전했다. 즉, 부산, 경성 등은 접근성이 뛰어난 교통의 요충지라는 점으로 인해 관광도시로 성장할 수 있었다. 특히 경성은 조선의 유신과 일본의 근대라는 시공간의 관광자원이 집중되어 있던 곳이었기 때문에 대표적인 관광도시가 되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1934년 조선보감』이 제작되었다. 당시 발행된 여행안내서는 협회에서 제작된 경우가 많았는데, 「조선보감』의 경우는 개인 요릿집에서 제작 발행한 것이 특징이다. 또한 『조선보감』에는 경성을 소개한 내용이 일부 포함되어 있으나 기본적으로 식도원을 홍보하기위한 목적으로 제작되었기에 전체 내용 중 상당 부분이 식도원의 시설과요리에 대한 소개로 채워져 있다. - P354

일제강점기에 조선을 방문하는 관광단이 가장 보고 싶어하는 것 중의 하나가 기생이었다.
당시 ‘조선색 농후한 전통적 미를 가진 기생‘을 볼 수 있는 곳은 평양 기생학교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사실 평양 기생학교는 1930년대 본래명칭이 ‘평양 기성권번 기생 양성소‘인데 3년제 학제로 운영되었다. 대동강 부근에 있었고 그 부근 일대에 산재해 있는 10여 군데의 대규모요릿집을 대상으로 운영하였다. 또한 평양은 남조선에서 맛보지 못하는3천 년의 역사를 경험할 수 있는 매력적인 장소로 제시되었는데 여행자가만날 수 있는 사람들은 각계통의 전문가들과 평양의 주류집단인 일본인들이었다. 단 하나 여행자가 만날 수 있는 주류집단이 아닌 사람들이 있는데이는 평양기생이다. 이들은 평양 혹은 조선을 방문하는 일본 남성에게 있어 가장 매력적인 요소로 작용했다. - P3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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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6장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의 표현주의는 각각 내재성의 철학과 제작적 세계관의 형태를 띠고 있지만, 공히 형이상학적 표현주의이다. 두 경우 모두표현의 궁극적 시발점-귀결점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스피노자의 존재론을 특징짓는 핵심은 모든 속성들이 불연속적이라는 것, 그럼에도 모든 속성들은 신을 동시에 표현한다는 점에 있다. 아울러 속성과 양태들 사이의존재론적 차이 또한 중요하다. 라이프니츠의 경우 모든 모나드가 상호 표현하는 장대한 울림, 일원성에 핵심이 있고, 그 전체를 근거 짓는 초월적 신에 특징이 있다. 스피노자의 경우 신의 일원성이 체계 전체를 받치고 있지만, 속성들의 불연속성은 오히려 다원성을 내포하고 있다. 이 두 측면을 화해시키기 위해서는 동시적 표현이라는 존재론적 가설이 필수적으로 요청되었다. 반대로 라이프니츠의 경우 오히려 신이라는 존재를 접어둔다면 상호 표현되는 모나드들의 거대한 일원성의 세계를 보여준다. 스피노자에게서는 질들이 여러 부류로서 분리되어 있다면, 라이프니츠의 경우 모든 질들이 상호 표현되면서 다만 모나드들의 개체성에 의해 분절되어 있을 뿐이다. 양자에게서 일원성과 다원성, 내재성과 초월성은 묘하게 엇갈리고 있다. - P289

기일원론은 동북아 전통 특히 성리학과의 연속성을 유지하는 한편 여러측면에서 근대적이기도 한 사유를 시도한 대표적인 사유 갈래이다. 흥미로운 점은 이 양 전통이 극복하고자 한 상대가 서로 상반되는 형이상학이었다는 점이다.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가 극복하고자 한 것은 데카르트의 기계론적 형이상학이었다. 대조적으로 왕부지 등 기 일원론자들이 극복하고자 한 것은 오히려 리기 이원론이었다.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는 데카르트가 표백한 세계에 다시금 형이상학의 생기를 부활시키고자 했다. 반면에기 일원론자들은 리기 이원론에서 형이상학적인 리를 제거하고자 했다. 이런 차이를 이해하는 것은 상당히 긴 논의를 필요로 하겠지만, ‘생명‘이라는차원에 대한 관심을 빼놓을 수 없을 것 같다.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가 데카르트가 제거한 생명의 차원을 복원하고자 했다면, 기 일원론자들은 생명으로서의 기를 틀짓던 리라는 격자를 벗겨내고자 한 것이다. - P290

형이상학적 표현주의와 환원주의는 어떻게 다른가? 환원주의는 존재의 어떤 특정 면을 실재로 상정하며, 다른 면들을 모두 이 면으로 환원한다. 따라서 다른 면들은 비실재이며, 이 특정 면의 가상들, 효과들에 불과하다. 반면 표현주의는 각 존재면들이 모두 각각의 실재성을 띤다. 그리고 그 면들은 서로 간에 표현의 관계를 맺는다. - P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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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스피노자의 철학은 그것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 17세기 말 이래 지속 - P233

적으로 영향을 끼쳐왔다. 그러나 모든 위대한 철학체계가 그렇듯이, 그가끼친 영향, 그에 대한 해석은 각 시대, 각 맥락에 따라 다른 얼굴로 나타났다. 계몽의 시대였던 18세기에 스피노자는 플라톤과 기독교로 대변되는 서구의 전통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세계를 연 철학자로서 각광받았고, 또 그만큼 반(反)계몽주의자들에게는 부정의 대상으로서 경원시되었다. 이후에도 그의 얼굴은 계속 달라지거니와, 그의 사유가 철학적으로 가장 심도 있는 뉘앙스를 띠게 되는 것은 18세기 말~19세기 초의 독일 고전 철학(과20세기 후반 이래의 프랑스 철학)에서였다. - P234

스피노자 비판자들이 그의 사유에서 초점을 맞춘 것은 ① 모든 것을 이성적으로 해명하고자 하는 그의 합리주의, ② 인격신/초월신을 부정한 그의67)신개념, 즉 범신론, ③ ‘숙명론‘으로 이해된 그의 결정론, ④ 그리고 기독교와 "성서"에 대한 그의 급진적 비판이었다. - P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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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카르트는 자신이 배웠던 이전의 어떤 지식에도 만족하지 않고, 진리의 준거를 오로지 "나 자신"과 "세계라는 커다란 책"에 두는 입장을 표명한다. (방법서설』I) 기존의 권위에 일체 괄호를 치고 인식 주체와 인식 대상으로서의 ‘나‘데카르트는 서술의 주체를 ‘나‘로 한 최초의 본격적인철학자로 일컬어진다와 ‘세계‘에만 눈길을 주는 이런 태도는 중세적 전통에서 보면 놀라운, 아니 경악할 만한 무엇이었다. - P76

흔히 ‘과학혁명‘은 17세기 갈릴레오 이래 전개되어온 과학상의 혁명을말한다. 하지만 우리는 근대 과학의 역사에서 두 번의 혁명을 만나게 된다.
두 번째 혁명은 열역학, 파동역학, 진화론 등으로 대표되는 19세기의 과학혁명이다. 사실 존재론적 수준으로 두 과학혁명을 파고들면, 두 번째 과학혁명이 보다 급진적이다. 첫 번째 과학혁명을 떠받치는 존재론은, 여러 근본적인 혁신에도 불구하고, 전통 존재론과 연속적인 측면을 여전히 많이내포하고 있다. 반면, 두 번째 과학혁명을 떠받치는 존재론은 전통 존재론으로부터 급진적으로 이탈한 존재론이다. 갈릴레오, 데카르트, 뉴턴, 라이프니츠 등의 세계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세계로부터 크게 일탈했음에도 여전히 그 그림자 안에 있었다. 그러나 볼츠만, 맥스웰, 다윈의 세계는 이미 매우 다른 세계이다. - P116

17세기에 도래한 새로운 자연상, 데카르트의 철학과 갈릴레오 이래의 고전 역학이 빚어낸 자연상은 근대성의 핵심적인 축들 중 하나로 역할해왔으며, 그 후 자체 내에서의 변화(고전 시대의 힘의 과학, 질의 과학, 19세기의 열역학과 진화론 등)와 탈근대적 자연철학(생태학적 사유, 등질화와 환원주1의에 대한 비판, 비결정론 등)의 도전을 겪으면서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오늘날에도 자연에 대한 과학 및 형이상학의 사유는 근대성과 탈근대성의 문제에서 핵심적인 축들 중 하나를 이루고 있다. - P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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